시린새벽
몽롱했다.
안개가 빼곡하게 들어선 산 속으로 걷는 것처럼, 발 앞에 무엇이 놓였는지, 바로 앞에 무엇이 있는지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세상천지에 오직 자신만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뒤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커다란 짐승이 맹렬하게 달려오고 있었다. 정후는 반사적으로 앞을 헤치며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무서웠다.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팔 다리에 무엇이 스치는 지도 모르고 한참을 달렸다. 쫒아 오던 검은 짐승은 어느샌가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헉헉헉'
거친 숨소리가 귓가에서 쿵쾅댔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펴는 순간, 잠시 숨 돌릴 틈도 없이 발 밑이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지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갈라진 땅은 정후의 몸을 저 밑바닥으로 내팽개쳤다. 공중에 붕뜬 부양감과 더불어 정후의 정신이 아득해 졌다. 그 사이로 얼음같이 차갑고 싸늘한 눈동자들이 정후를 따라왔다. 정후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소근대는 소리에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정후의 몸이 풍덩하고 물속으로 빠졌다. 숨이 쉬어지지 않아서 폐가 찌그러질 듯이 아팠다. 정신없이 헤엄을 쳐도 몸은 점점 가라앉을 뿐이었다. 누가 발을 잡고 끌어 내리는 것만 같았다. 정후는 힘껏 발길질을 했다. 아무리 떨쳐내려고 해도 떨쳐내지지가 않았다. 점점 힘이 빠지고 있었다. 아득한 물 안으로 몸이 점점...사라지고 있었다.
"안돼!!!"
정후가 침대에서 큰 소리를 치며 튕기듯이 일어났다. 싸한 물냄새가 코끝에서 맴돌아 정후는 머리를 좌우로 세차게 흔들었다.
"헉..헉...헉...."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붙잡고 정후가 상체를 숙였다. 위가 찢어질 듯이 아팠다.
"깨셨습니까?"
"...........네가...어떻게?"
예상치 못한 목소리에 정후가 고개를 돌렸다. 물병을 채워서 냉장고 위에다 내려놓고 있는 원재가 보였다. 원재는 서두르지 않고 컵에다 물을 따라서 정후에게 건넸다. 멍하게 그 컵을 받으면서도 정후의 눈은 계속 원재에게 이 상황에 대해 묻고 있었다.
"쓰러져 계신걸 주인 아주머니가 발견을 하고는 제게 연락을 하셨습니다. 방에 제 연락처가 있었다더군요. 과도한 알콜섭취로 인한 위궤양. 다행히 며칠 입원하셔서 치료 받고 그 후 통원치료를 계속 하면 괜찮아진다고 합니다."
"...................."
한 모금 목을 축인 정후에게서 원재가 컵을 받아 들었다. 정후는 힘에 부치는 듯 도로 침대 위로 누웠다. 며칠간 곡기를 끊고 술만 마셨으니...어쩌면 아직 살아 있는 게 더 신기했다.
"좀 쉬십시오. 간병인을 붙여 두겠습니다. 다음날 다시 오겠습니다."
정후는 눈을 감았다. 원재는 이불을 정후의 배까지 끌어서 정리해 주고 목례를 한 후 뒤돌아 섰다.
"........원재야..."
"네. 선배님."
"......너....윤서... 만났냐?"
정후의 목소리가 부슬비 내리는 밤거리처럼 착 가라앉아 있었다. 원재는 다시 정후 옆으로 걸어왔다.
"예. 만났습니다. ....주제..넘었습니까?"
".................."
"좀 진정되시면 말씀 나누고 싶었지만, 이왕 말 나온 거 지금 하겠습니다…돌아오십시오. 선배님!"
“……………..”
대답 없이 눈을 감고 있는 정후를 보며 원재는 두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예전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는, 무력하기 그지 없는 남자의 모습에 속에서 천불이 났다. 하늘 같은 선배라는 것도, 안정이 필요한 환자라는 것도 잊고 어깨를 마구 흔들어 주고 싶었다.
“추문 때문에 그러십니까? 그런 거라면 상관없습니다. 아시잖습니까? 진실을 믿는 것이 아니라 믿고 싶은 대로 믿는 것이 이쪽 세계의 생리, 선배님이 필요해지면, 선배님이 그들이 필요한 힘을 가지게 되면, 그들에게 있어서 진실은 아무 의미가 없어질 것입니다. 선배가 누구든 상관이 없을 테니까요. 돌아오십시오. 선배님 자리 비워뒀습니다. 선배님이 필요합니다.”
“…………피곤하다.”
“더 이상 이런 선배님의 모습 보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누구 때문에 법조계에 들어왔는데요! 선배님 옆에서, 선배님이 보는 세계가 궁금해서, 선배님처럼 되고 싶어서! 저 이곳까지 왔습니다. 따라오라고 쫓아와 보라고 말씀하신 건 선배님 아니셨습니까? 그 말씀에 책임져 주십시오!! 선배님!!”
진실하고 올곧은 원재의 눈동자가 정후의 가슴속을 깊게 찔러왔다. 정후의 마음이 제멋대로 물결치기 시작했다.
돌아갈 수 있다?….그곳으로. 다시?
지난 세월, 마치 꿈인 양 그리웠던 그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
멈춰버렸던 시계가 다시 째깍 째깍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생각할 시간을 줘.”
“일주일입니다. 일주일 후에 바로 회사로 나오십시오. 차편을 마련해 놓겠습니다.”
더 이상 말할 여지도 주지 않고 원재는 뒤 돌아 나갔고 곧 문이 닫혔다. 정사각형 수십개로 이루어져 있는 병원 천장을 따라 정후의 시선이 움직였다. 한참동안은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비현실적인 꿈을 꾸는 것 마냥 몽롱했다. 그리고 점점 하나 둘씩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들이 머리 위로 떠올랐다.
떠나버린 윤서.
편지 한 장이 윤서가 남긴 전부였다.
평소대로 늦은 오후 잠에서 깨어 차려놓은 밥을 먹고, 또 술을 마시러 갔다. 그 편지를 발견한 건 윤서를 보지 못하고 사흘이 지나서 였다.
미안하다라…이제 와서…
모든 것을 망친 주제에. 이제 와서 미안하다는 값 싼 말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가소로웠다.
그 미안하다는 말이 웃겨서 정후는 또 술을 마셨다.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가 않아서 마시고 마시고 또 마셨다. 윤서의 물기 어린 눈이 사라질 때까지, 그 주눅들어 듣기 싫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마시고 마시고…. 또 마셨다.
그리고 눈을 떴더니… 다시 돌아갈 수 있단다. 그 동안의 일은 그저 조금 오랫동안 꾼 악몽일 뿐,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갈 수 있단다.
정후는 서둘러 링겔을 뽑았다. 환자복 차림 그대로 슬리퍼를 끌고 병원 문을 나섰다. 택시를 잡아 타고, 골목길을 뛰어서 윤서와 함께 살던 그 곳으로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낡은 철문이 끼익 소리를 내고 열리자, 어질러진 방안이 한 눈에 들어왔다. ………없다…어디에도 윤서의 흔적은 찾아 볼 수 없었다.
갔다. 윤서가. 드디어.
이제야 벗어 날수 있게 되었다. 좁은 새장 같은 이곳에서.
지긋지긋했던 악몽이 이제야 끝이 난 것이다.
매일 매일 술을 마시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선망에 가득 차 우러러 보던 눈들이 단 한 순간에 싸늘하게 식어, 비수로 변해 자신을 찔렀다.
그 순간부터 자신은 게이에다 그저 근본도 모르는 더러운 고아일 뿐, 성공한 변호사 한정후는 죽어 없어졌다.
벌레를 보듯 경멸에 가득 찬 눈동자들이 지난 3년동안 피할 길 없이 꿈속에서조차 끈질기게 쫓아왔다.
친절하게 말을 걸어오던 사람들이 전염병이나 된 것처럼 피하기에 바빴다.
더 비참했던 건 동정하는 눈빛과 말투.
미칠 것만 같았다.
거울을 보면 지독히도 볼품없는 사내가 퀭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할 수 가 없었다.
“돌아 간다. 돌아 갈꺼야. 다시.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꺼야!!!”
윤서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형…형…하고 부를 때마다 숨이 막혔다. 그래서 더 술을 마셔야 했다. 그 우울한 눈동자가 자신을 비출 때마다 참을 수 가 없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윤서에게 손이 올라가곤 했다. 그럴 때마다 온 몸이 밧줄로 칭칭 묶인 것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도무지 떠날 수가 없었다.
“이제 끝이야. 이제 끝이라고!!”
정후의 목에서 핏대가 섰다. 의미 모를 눈물이 정후의 얼굴을 적시고 있었다.
“한 변호사님 사무실은 이쪽입니다. 전 변호사님을 보좌하게 된 김희아 라고 합니다. 모쪼록 잘 부탁 드립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합니다.”
정후는 고급스럽게 꾸며진 사각의 공간에 들어서서 가만히 주위를 둘러봤다. 커다란 책상과 빼곡한 책장, 편안해 보이는 엔틱한 소파는 원재가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한 눈에 알 수 있게 했다. 정후는 은은하게 광택이 나는 마호가니 책상의 끄트머리를 손으로 쓸었다. 찹찹한 나무의 감촉이 손끝에 느껴졌다. 그리고 크리스탈로 만들어진 명패.
변호사 한정후.
………………얼마나 다시 찾고 싶었던 이름인지, 정후의 시선이 오래도록 명패에 머물렀다.
“마음에 드십니까?”
“…휘황찬란한데.”
“위너로펌의 새로운 간판변호사! 한정후님을 모시려고 돈 엄청 들였습니다. 보이시죠? 저 등골이 휘었어요.”
엄살을 피우면서 이제야 예전의 후배다운 얼굴을 되찾으며 웃는 원재를 정후가 힘차게 끌어안았다.
“…….잊지 않고…고맙다.”
삼년이 넘는 세월, 세상의 밑바닥에서 허우적거렸던 자신을 단번에 끌어올려준 원재에게 정후는 무슨 말로 감사의 인사를 해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원재는 그런 정후의 마음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정후를 마주 안았다.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선배님. 부디…보란 듯이 다시 날아올라 주세요.”
정후가 원재의 왼쪽 가슴을 주먹으로 쿡 쳤다. 한쪽 입가를 살짝 올리며 씨익 웃는 한정후는 삼년 전 모습 그대로였다. 세상에 거칠 것 없었던 자신만만함.
드디어 한정후가…. 돌아왔다.
“일단 내가 전면에 나서지는 않을 거다. 처음부터 정공법으로 나가면 다치는 건 이쪽일 테니까. 이번 한성기업건. 나는 후방에서 지휘하지. 팀을 꾸리고, 신임 변호사를 전면에 내세워.”
“말하기 좋아하는 이 바닥 사람들. 입 아프겠네요.”
“아마도. 바라는 바고.”
“완벽하게 승소해 주세요!”
“노력하지.”
외국기업의 한성기업에 대한 적대적 M&A를 방어하기 위한 소송은 전 국가적으로 관심의 대상이었다. 정후의 화려한 재기 무대로는 더할 나위가 없었다.
정후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했다. 책 더미에 파묻혀서, 관련 논문을 수십번을 보고, 판례집이 너덜거릴 정도로 파고들었다. 관련 전문가들과 끊임없이 의견을 나누고 한치의 빈틈도 없이 준비를 계속했다. 소송이 시작되자, 상대방의 매수 절차상의 하자와 위법성을 물고 늘어지면서 결정적으로 대상기업과 인수기업간의 독과점 문제를 소송상 이슈로 끌어올렸다. 국민들은 한국기업이 외국계 기업으로 넘어가는 것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었다. 정후는 언론을 이용해 그 부분을 계속해서 부각시켰다. 상대가 방어할 틈도 없이 공격하고, 국민여론을 잘 이용해서 판사의 결정에 압박을 가하는 건 정후의 소송상 특기중의 하나였다. 소송은 두말할 것도 없이 정후의 뜻대로 흘러갔다.
한성기업 소송 뒤에 한정후가 있다라는 소문은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가듯, 소리 없이 구석구석 퍼져나갔다.
“선배. 좀 쉽시다. 저까지 죽겠어요.”
“조금만. 이것만 보면 끝나. 그런데 다들 어디 갔어?”
겨우 보고 있던 서류에서 눈을 떼고 몸을 쭉 펴는 정후를 원재는 못 말리겠다는 듯 한숨 짓고는 털썩 의자에 몸을 길게 하고 누웠다.
“다들 죽을 상을 하고 선배님만 노려보고 있길래 반란이 일어날까 서둘러 먼저 보냈습니다. 지금쯤 선배님 안주 삼아 소주잔 기울이고 있을걸요, 더불어.. 지금쯤 제 와이프도 선배님 사진 앞에 두고 이를 갈고 있을 겁니다.”
“녀석. 넉살은. 흠…그럼 이만 가볼까. 너 먼저 일어나. 내가 정리하고 가지.”
정후가 보고 있던 서류를 챙기고 두꺼운 책들이 널려져 있는 책상을 정리하려고 하자 원재의 손이 급하게 끼여든다.
“귀하신 간판 변호사님이 정리라뇨! 옷 입으세요. 그리고.. 이거 정리해 드리는 대신 술 한잔 사주십시오.”
“얼마든지. 그런데 그럼…제수씨한테 나 더 곤란해 지는 거 아닌가?”
“훗. 제 와이프가 선배님 팬인거 알면서 하시는 말씀이지요? 그 사람 선배님 일이면 무조건 오케이입니다.”
“하하하. 걱정 없게 전화 한 통 해드려.”
“옙!!”
군기가 제대로 들어간 대답과 함께 원재가 정후에게 군대식으로 경례를 붙였다. 그걸 보면서 크게 소리 내어 웃는 정후의 모습은 누가 보기에도 너무나 밝게 빛나고 있었다.
“선배님의 재기를 축하 드리며~건배!”
“판결도 안 났는데…아직은 이르지.”
“한.정.후 이름만으로 지금 위너로펌에 밀려드는 고객들이 얼만데요. 거대 고객들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자문, 고문으로 스카우트하려는 기업들 견제하느라 저 정말 정신 없이 바쁩니다.”
“그만하고 술이나 마셔. 자. 건배.”
정후는 원재가 보도록 만족스럽게 웃으며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추켜세우는 것이 멋쩍어 말을 돌리긴 하였지만 정후도 지금 자신이 예전과 같은, 혹은 그 이상의 성공을 눈앞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 한성기업외에도 지금 정후가 맡고 있는 소송은 작게는 수십억대에서 크게는 수백억대에 달하는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비단 그에 따라 받게 되는 큰 수임료 뿐만 아니라 한정후 라는 이름의 가치도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물론…아직도 뒤에서 수근거리는 소리는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들에게 그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는 문제였다. 아무도 정후의 앞에서 그가 고아라서, 그가 게이라서 사건을 위임 할 수 없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런 추문이 있었다는 사실도 모른 척 하고 그저 “승소할 수 있습니까?” 라고 물었을 뿐이다. 그리고 원재가 어떻게 손을 썼는지 어느 순간부터 정후는, 지독한 소문에 시달리다 세상의 오해에 깊은 상처를 입고 3년동안 외국에 나가서 더욱 깊이 있는 공부를 하고 온 그런 사람이 되어 있었다.
“……믿고 싶은 대로 믿는다라….과연.”
“네?”
“아니. 너 재주 좋다고.”
정후가 원재를 향해 잔을 들어보이고 한번에 들이켰다. 오랜 만에 독한 술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느낌에 정후는 온몸에 찌릿 하고 전기가 돌았다.
“선배님 술 괜찮습니까?”
“아. 이 정도쯤은 괜찮아.”
“피곤해 보이시는데 제가 괜히 붙잡은 건 아닌지…요즘 잠은 제대로 주무세요?”
“녀셕. 걱정은…일이 지나치게 많은 거 빼고는 아무 문제 없어. 안 마셔?”
“마십니다.”
원재도 기분 좋게 잔을 비웠다. 잔이 몇 번 오가고 정후도 원재도 슬슬 긴장이 풀렸다. 정후가 피곤한 눈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푹신한 소파의 쿠션 위로 등을 기댔다. 원재는 술잔을 든 채 그런 정후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할 말 있으면 해.”
정후가 나른하게 말했다. 원재는 내심을 들킨 것이 멋쩍은 듯 술을 모두 비우고서 정후를 향해 자세를 바로 했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질문해도 됩니까?”
“……꼭 대답하지 않아도 되는 거면 물어.”
“……그때..왜 제 제안을 거절하셨습니까?”
눈을 문지르던 정후의 손이 멈칫했다. 원재의 질문이 정후에게 날아든 이후 두 사람 사이에는 묘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정후가 피식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꼭 대답하지 않아도 됐지? 아무래도 피곤하다. 이만 들어가자.”
계산서를 들고 먼저 일어서는 정후의 뒷모습이 원재가 보기에는 왠지 모르게 아슬아슬해 보였다.
원재가 잡아 준 택시에 탄 정후는 몸을 더욱 더 깊숙이 의자 안으로 묻었다. 피곤에 절은 몸이 물 먹은 솜마냥 축 늘어졌다. 시간이 날 때 잠이라도 푹 잘 수 있으면 좋으련만, 요즘 들어 잠을 잘 자지 못했다. 아니 오랫동안 제대로 잠든 적이 없었다. 일이 바빠 잘 틈이 없었던 거라고 자기 합리화 중이지만 사실, 불면증에 가까운 증세라는 것은 자각하고 있었다.
“미치겠네.”
운전을 하는 택시기사 외에는 아무도 없는 혼자만의 시간이 되자 정후는 나직하게 욕설을 내뱉으며 머리를 헤집어 흐트려뜨렸다. 이제는 어딜 가든 시선들이 따라다닌다. 그 시선에는 물론 동경과 감탄어린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탐색하는 듯한, 감시하는 듯한, 또 시기와 질투에 가득 차 조금이라도 약점을 찾으려 번들거리는 눈이 더 많았다. 마치 예전의 추문을 잊지 않고 있다는 의미인 것 같아 정후는 더 이를 악물 수 밖에 없었다. 조금의 빈틈도 보이지 않으려고 하루종일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더니 이제는 아예 너덜너덜 해지는 것 같았다.
새로 얻은 서른 남짓한 평수의 아파트는 예전 윤서와 살던 곳 과는 천지 차이였다. 성공한 독신 남성이 갖추고 있을 모든 가구와 가전제품이 세련되게 코디 된 집은 금방 잡지에서 튀어나온 것 같았다.
정후는 양복 상의를 벗어 소파에다 아무렇게나 던졌다. 넥타이도 느슨하게 풀고 지친 듯이 푹 소파로 가라앉았다. 한 쪽 팔을 들어 두 눈을 가렸다. 따끔따끔하게 통증을 알리는 두 눈이 피곤한 정후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때 왜 제 제안을 거절하셨습니까?”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은 정후의 머리위로 잊혀지지 않고 떠오른 원재의 물음.
왜?
…..왜?
……왜 그랬을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지독한 악몽과도 같았던 그때를. 할 수만 있다면 지우개로 빡빡 지워서 그 시간들을 인생에서 없애버리고 싶었다. 잠시만, 아주 조그만 순간이라도 정신을 놓으면 피할 길 없이 떠오르는 그때의 그 기억들 때문에, ………윤서의….우울한 눈과 울음 섞인 목소리 때문에 정후는 더 죽을 힘을 다해 일을 하는 수 밖에는 없었다.
그렇게…..1년이 라는 시간이 지났다. 벌써 1년이 넘었다.
정후가 힘 없이 일어나 부엌으로 들어갔다. 크리스탈 잔을 꺼내 물을 따르던 정후는 참지 못하고 또 장식장에 들어있는 독한 술을 꺼내 들었다. 조각 얼음을 집어넣고 한 잔 가득 채웠다. 목마른 사람이 물을 들이키듯 정신없이, 허겁지겁 한 잔을 모두 비우고 또 한잔. 그리고는 술잔을 벽에 집어 던졌다.
쾅!!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유리잔이 산산조각 나서는 바닥으로 흩어졌다. 파편들이 어지럽게 거실바닥을 수 놓고 있었다.
“도대체 뭐야? 도대체 뭔데? 아무 문제 없는데 왜 이래? 돌아 왔잖아!! 뭐가 문제야? 왜? 왜? 왜?
점점 초조해졌다. 처음에는 성공에 대한 압박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그런 게 아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 몸을 돌고 있는 피가 바짝바짝 마르고 닳는 느낌. 혼자 있으면 덮쳐 오는 가슴 통증. 그리고 허전함.
“허전함이라…무엇에 대한?”
빈 집을 울리는 정후 자신의 목소리.
정후는 와이셔츠 차림 그대로 침대위로 엎어졌다. 베개에 머리를 묻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도록 귀를 꽉 막았다.
“자자…피곤해서..그런 거야…자고 나며 괜찮아 져. 내일…한성기업 대표와 면담을 하고…오후에 법률단 팀 회의. 김 회장님과 저녁 약속. 그리고……그리고……”
잠이 들지 않았다.
정후는 천장을 보고 바로 누웠다. 스탠드 불을 켜자 은은한 조명이 방을 아늑하게 비췄다.
‘그때…왜 제 제안을 거절하셨습니까?’
“…..죽을 까봐…그 녀석이.”
묻고 묻어 두었던 정후의 진심 한 자락이 빠져 나왔다. 오늘처럼 피곤한 때에…또 생각치 않으려 애쓸 힘이 없었다. 그저 생각이 나는 대로 오늘 밤만은 그저 내버려 두기로 했다. 정후의 감은 두 눈 뒤로 윤서의 얼굴이 선명하게도 떠올랐다.
하긴…함께 한 세월이 얼만데 고작 일년에 희미해질까.
고아원에서 처음 본 윤서는 지나치게 작았다. 또래 아이들 보다 한참 더.
부모님 한꺼번에 여의고 의탁한 친척 한명 없이 고아원으로 들어오게 된 정후는 항상 시퍼렇게 날이 서 있었다. 뾰족하게 가시를 세우고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상대를 가리지 않고 으르렁 거렸다. 사람들이 아무 의미 없이 쳐다보는 것도 자신을 불쌍하게 여겨서 그런 걸까 항상 눈을 삐딱하게 뜨고 세상을 쳐다봤다. 동정 받는 것이 죽기 보다 싫어서 차라리 죽고 싶었던 정후에게 스스럼 없이 다가와 환하게 웃어줬던 사람은 오직 윤서가 유일했다. 비쩍 골은 팔로, 젓가락보다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정후의 옷자락을 붙잡고 베싯 베싯. 처음에는 그 웃음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리 모질게 뿌리쳐도 종종 걸음으로 쫓아 오는 윤서를 정후는 오래 외면할 수 없었다. 그때부터 정후는 윤서에게서 웃는 법을 배웠다. 그때부터 정후는 윤서를….
“지겹다…이젠. 이미 끝난 일이야.”
용서할 수 없다. 어떤 일을 겪었는데. 얼마나 괴로웠는데.
떠나 준 것으로, 놓아 준 것으로. 다신 보지 않는 것으로…그저 묻어 두겠다.
정후는 몇번을 되풀이 했는 지도 모를 다짐을 또 되뇌었다.
용서할 수 없다. 다신…보지 않는다. 잊을 것이다. 전부…잊어버릴 것이다.
잘 차려진 한정식을 앞에 두고 정후는 반도 채 뜨지 못하고 수저를 내려놓았다. 원재 역시 의아한 듯 수저질을 멈췄다.
“선배?”
“아…신경 쓰지 말고 먹어. 입맛이 없네.”
“그래도 좀 더 뜨십시오. 요즘 통 못 드시는 것 같습니다.”
“괜찮아. 한끼정도 부실했다고 쓰러질 만큼 약골은 아니니까.”
정후가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어깨가 결린 듯 목을 스트레칭 하면서 정후는 방 한쪽에 놓인 신문을 폈다. 이미 아침에 모두 읽은 신문의 내용을 대충 훑어보다가 사각 구석에 적혀있는 오늘의 운세란에 저절로 눈이 갔다.
‘형. 오늘 형은 북쪽으로 가면 운이 좋대요. 북쪽이면 어디지? 앗. 파란색이 행운을 가져다 준대. 넥타이 바꿔요. 있어봐. 내가 바꿔줄게요.’
“젠장!!”
“선배?”
정후는 신문을 거칠게 구겼다. 종이들이 요란하게 바스락 거렸다.
“아니야. 보기 싫은 기사가 떠서. 다 먹었냐? 일어나자.”
정후는 물을 벌컥 들이키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두를 신고 식당을 나왔다. 한 낮의 뜨거운 햇살에 저절로 두 눈이 찌푸려졌다. 뒤따라 나온 원재와 사람들의 무리속에 섞여서 천천히 사무실로 걸음을 옮기던 정후가 갑자기 멈칫하더니 정신없이 뛰기 시작했다.
“선배??”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에 원재의 부름도 들리지 않았다. 정후가 무작정 뛰어가서는 앞서가고 있는 한 남자의 팔을 거칠게 잡아챘다.
“윤서야!!”
“………뭐야?”
익숙한 향기가 스쳤다. 그 녀석에게서는 묘한 물 냄새가 났다. 코끝을 스치던 물냄새에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정후의 발이 먼저 달리고 있었다. 정후의 팔은 아직 낯선 남자를 붙잡고 있었다. 가슴속을 가득 메우는…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은 허탈함. 정후의 손에서 천천히 힘이 빠졌다. 남자는 아픈 듯 잡힌 팔을 문질렀다.
“………죄송합니다. 아는..사람과 착각을 했습니다.”
정후는 주먹을 폈다 쥐었다 한참을 그대로 서 있었다.
왜…붙잡으려 했을까..정말 윤서 였다면 어쩌려고, 붙잡아서 도대체 뭘 하려고 달려가서 붙잡았을까…붙잡았는데…그 녀석이 아니라서 가슴이 왜 내려앉은 걸까…
“선배님? 괜찮으십니까? 누구였어요?”
“모르는 사람. 착각했어.”
정후는 길 한가운데에 허리를 굽히고 한참동안 숨을 골랐다. 원재가 걱정스레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알았지만 지금 당장은 어떤 표정을 만들어 내야 할지 자신이 없었다. 갑자기 둑이 터진 것처럼 알 수 없는 감정들이 휘몰아 쳤다.
“회의시간 늦겠다. 들어가자.”
겨우 허리를 펴고 무표정한 가면을 만들어냈다. 회의를 하면서도 코끝에 물냄새는 끈질기게 사라지지 않았다.
원하는 정보를 찾아오지 못한 팀원에게 평소완 달리 거칠게 화를 냈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욱하는 감정들이 계속해서 치밀어 오르고, 그걸 조절하기가 힘들었다. 점점 자신의 리듬이 깨어지고 있었다.
집에 돌아와서 술병부터 꺼내 드는 것이 익숙해졌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그나마 선잠도 잘 수가 없었다. 술에 취해서 정신을 잃듯이 잠시 눈을 부치고 다시 회사로. 그리고 미친 놈처럼 일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또 술을 마시고 다시 또, 가느다란 줄 위에서 곡예를 하듯이 정후의 생활은 아슬아슬 했다.
자꾸만 따라오는 잔상들. 어린 날의 기억. 윤서의 손. 윤서의 웃는 얼굴. 윤서의 목소리. 언제나 힘들 때 자신을 보듬어 주던 윤서의 모든 것들.
그때의 윤서는 정후에게 쉼터이자, 안식처였다. 세상에 지쳤을 때도, 세상에 다쳤을 때도, 세상이 미울 때도, 윤서에게 달려가 그 작은 몸을 안고나면 편안해 졌다. 윤서의 눈이 자신을 숭배하듯 볼 때 마다 정후는 마치 자신이 신이라도 된 듯 자신감이 충만해지고 힘이 넘쳤었다. 계속해서 그 눈을 자신에게 붙잡아 두기 위해서 정후는 더 열심이 달렸다.
“그래 놓고서는 뒤통수를 제대로 때렸지.”
독한 술을 한 입에 털어넣으면서 정후는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이상하다고 생각해야 했다. 그날, 성적으로 담백한 윤서가 온몸으로 유혹을 해오던 그날, 조금 냉정하게 생각해야 했었다고. 하지만 정후는 윤서가 자신에게 그런 짓을 할 것이라 꿈에도 생각치 못했다. 세상 앞에 당당히 서기 위해 정후가 얼마나 치열하게 싸웠는지, 얼마나 힘겨웠는지, 자신이 흘린 눈물과 땀. 오직 윤서만이 알고 있었다. 오직 윤서에게만 제 모든 약점을 보여주었었다. 그래서 정후는 윤서가 그 모든 것을 망칠 수 있을 거란…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그 믿음의 결과는….참담했다.
“보고 싶은 게 아니야. 그리운 게 아니라고. 생각하지 마.”
형제 같이 10년. 뜨겁게 사랑하며 3년. 그리고 죽도록 원망하며 3년. 이제 겨우 떨어져서 1년. 시간이 더 필요했다.
“어제도 술 드셨어요?”
“마누라같이 잔소리는 그만.”
원재가 서류뭉치를 들고 정후의 사무실 안까지 쫓아 왔다. 책상에 자료를 내려놓으며 옷을 걸고 있는 정후를 걱정스럽게 응시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안색도 좋지 않으시고. 일이 너무 바쁘신 거면 제가 스케쥴을 조금 조정하겠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선배님!”
“잠을 잘 못자서 조금. 별거 아니야. 됐지?”
정후는 원재의 말을 끊고 더 이상 시선을 주지 않은 채 서류에 집중했다. 원재도 더 이상은 입을 대지 못하고 일어섰다. 원재가 나가자 정후가 읽고 있던 서류를 책상 위에 내 팽개쳤다.
“승소를 축하합니다!!!”
한성기업 소송은 결국 완승으로 끝이 났다. 어려운 소송을 승리로 이끈 위너로펌은 일약 법조계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배후에 한정후가 있었다는 소문은 이미 기정사실화 됐고, 승소로 인하여 정후는 이제 더 이상 그늘에 숨어 있을 필요가 없었다.
“선배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한 변호사님 고생하셨어요. 축하 드립니다.”
“멋진 팀원들 덕분이지. 모두들 수고 많으셨습니다.”
모두들 자신들이 이룬 결과에 만족해 하며 기분 좋게 술잔을 나눴다. 그동안 눈코 뜰새 없이 바쁘게 일한 터라 오늘의 여유가 더욱 기꺼웠다.
“2차 갑시다. 2차!! 2차는 한 변호사님이 쏘세요!!:
2차 3차 까지 이어진 술자리는 새벽까지 계속되었다. 팀원들을 모두 택시 태워 보내고, 먼저 가는 모습 보겠다고 우기는 원재의 뒤까지 봐준 뒤에 정후도 택시에 올라 탔다. 주는 잔을 사양치 않고 마신 터라 정후도 몸을 가누기가 힘이 들었다.
지잉. 지잉.
술에 잔뜩 취한 채 집 문 앞에 선 정후는 계속해서 초인종을 눌렀다. 아무리 눌러도 안에서 반응이 없자 이번에는 큰 소리가 나도록 문을 쾅쾅 쳤다.
“…벌써 자나? 나도 안 들어 왔구만…죽었으…정윤서…야!! 윤서야. 문 열어. 문!”
쾅.쾅.쾅.
“음…안 열어주네…늦게 와서 삐졌나?”
혀가 꼬여서 뭉개지는 혼잣말을 내뱉으며 정후는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깜깜하게 불이 꺼진 집 안이 낯설었다.
“윤서야. 나 왔다.”
휘청휘청, 정후는 곧 쓰러질 것 같은 걸음으로 집 구석구석을 살피기 시작했다. 지금쯤 나와서 종알종알 잔소리를 할 윤서가 보이지 않았다. 술은 왜 이렇게 마셨느냐. 왜 연락도 없이 늦었느냐. 재판결과는 어떻게 되었느냐. 제일 먼저 말해주지. 나쁘다. 쉼도 없이 재잘재잘.
윤서가…들리지 않았다.
“…………그랬지…그 자식…없지…그 새끼…갔지…더 이상 없지…내가…버렸지…”
소파에 기대고 있던 정후가 스르륵 거실바닥으로 무너졌다. 새삼 파고드는 상실감.
승소하고 오면 당연하다는 듯 심드렁한 척 하는 자신을 대신해 더 기뻐하고 방방 뛰던 윤서.
‘형 진짜 멋져! 형 진짜 대단해요! 우와우와. 축하해!! 파티 할까요? 응? 수고 많았어. 고생했어요. 형 진짜 사랑해요.’
“훗…재미 없다…재미가 없다…”
이제 거의 다 찾았는데, 이제 자신을 보면서 함부로 무시하지 못하는데, 아무도 차가운 경멸의 눈빛을 보이지 않는데…그런데도 전혀…기쁘지 않았다.
“나…승소했다. 이겼어. 힘든 재판이었는데…내가 이겼다. 모두들 난리야. 한 변호사님 한 변호사님…나 돌아왔단 말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윤서 때문에 괴로웠던 시간이 점점 사라지고, 윤서 때문에 행복했던 기억들만 떠올랐다. 아무리 애써봐도 하나 둘, 윤서에게 받은 것들만 떠올랐다.
“아니야. 생각해 내…얼마나 괴로웠는지 생각해내라고!! 매일 속이 아플 정도로 술을 마셨잖아. 모두에게 손가락질 당했잖아. 무시 받았잖아. 안 그래? 야. 한정후. 너 좋던 머리 다 어디 갔냐? 생각하라고…씨발. 정윤서 그 자식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미웠잖아!! 여기까지 왔는데…미쳤다고 그리로 다시 돌아가냐? 웃기지도 않지. 씨발. 잊어…제발…잊어봐.”
정후의 눈에서 짙은 눈물이 한 방울 흘러 내렸다. 가슴이 아파서 윤서가 미워 죽을 것만 같았다. 그런 짓만 하지 않았다면 지금도 자신은 예전처럼 윤서의 작은 몸을 안고 승리를 기뻐할 수 있을 텐데. 미워하지도 않고, 원망하지도 않고, 생각하지 않으려 애쓸 필요도 없이, 예전처럼 행복할 수 있을 텐데.
“너…왜 그랬냐? 왜 그랬어!! 왜 그랬냐고!!! 변하는 건 없다고 했잖아…근데…왜 그랬냐…”
정후는 정신 없이 술에 취해서야 겨우 인정할 수 있었다. 윤서가 그립다는 것을. 모든걸 다 되찾아가고 있지만…다신 찾지 못할 윤서 때문에…가슴 한쪽이 뻥 뚫려 시리다는 것도.
똑똑
노크소리에 의자에 머리를 기대고 잠시 쉬고 있던 정후가 몸을 일으켰다.
“들어와요.”
검은색 정장의 김비서가 머뭇거리며 세 잔의 차를 테이블 위에 올려 놨다. 김비서의 뒤로 카메라를 든 30대 중반의 남자와 비둘기 색 투피스 차림의 여자가 따라 들어왔다.
“……김비서?”
“여성잡지 기자분 들입니다.”
“이수진 입니다.”
여자가 내민 손을 보고도 정후는 무덤하게 비서에게만 시선을 줄 뿐이었다. 슬쩍 찌푸린 인상이 이 상황에 상당히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인터뷰에 응한 적이 없는데?”
“대표님이 무조건…하시랍니다.”
“전화 연결해. 이분들 잠시 밖에 모시고.”
“고아출신에 성공한 변호사!! 이번에 한성기업 방어소송을 멋지게 승리하셨더군요. 축하 드립니다.”
“……………”
“구독율이 가장 높은 여성잡지 입니다. 여성들이 본다는 것은 또 그 남편들도 여기 잡지에 실린 정보를 알게 된다는 거지요. 한정후 변호사님께 실이 되지는 않으실 겁니다.”
수진의 당당한 말투에 정후는 피식 웃으면서 의자에서 일어나 소파로 갔다. 수진의 앞에 선 후 오른손을 내밀었다.
“한정후입니다.”
“이수진이에요.”
정후가 먼저 자리를 권하자 수진이 가볍게 목례를 하면서 한쪽 다리를 꼬고 앉았다. 정후는 느긋하게 수첩을 펴고 녹음기를 준비하는 수진을 기다렸다.
“한변호사님이 법조계에 처음 등장 했을 때부터 큰 이슈였죠. 수석에 수석에 수석. 게다가 고아출신. 쉽지 만은 않으셨을 텐데요?”
“…고아 출신이라서 다른 이들에겐 쉬운 것이 저에게 특별히 어려울 것도 없었죠. 시험은 출생을 따지는 법이 없으니까 말입니다.”
“그 당시 생활을 조금 이야기 해주시죠.”
“흐음…별다를 게 없었습니다. 후원해주시는 분들고 계셨고, 또 나중에는 부모님도 생겼으니까요. 공부야…남들 하는 것처럼 똑…같지…”
‘형..가?…이젠 안 와?’
갑자기 떠오른 예전의 기억 한 조각,
후원자였던 분들이 양부모가 되어주셨다. 그 집으로 들어가기 전에 옷자락을 붙잡던 윤서의 작은 손. 그 손을 붙잡으면서 내가 뭐라고 했더라….
대학을 들어가고, 집을 나와서 윤서를 데려와 함께 살면서…내가…뭐라고 했더라…
“한 변호사님?”
“아. 질문이 뭐였습니까?”
기자의 계속되는 질문에도 정후의 머릿 속은 과거의 기억들을 헤집느라 바빴다. 자신의 말에 울먹거리던, 그리도 환하게 웃음짓던 윤서의 얼굴은 떠 오르는데…무슨 말을 했는지는 생각이 나질 않았다.
어떻게 진행했는지도 잘 모를 인터뷰가 끝나고도 정후는 한참동안 생각에 잠겨 있어야 했다. 검토해야 할 서류가 한 더미나 쌓여있는데, 그것들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오자 정후는 자켓을 들고 일어났다.
“저 오늘은 먼저 퇴근입니다.”
차에 키를 꼽아 시동을 걸고 가속페달을 힘주어 밟았다. 엔진의 힘찬 울림과 동시에 차는 매끄럽게 주차장을 빠져나가 도로에 진입했다. 퇴근시간 전이라 한산한 도로에서 정후는 조금 빠르다 싶을 만큼 속도를 올렸다. 빠른 속도감이 어지러운 머리를 차분히 진정시켜 주었다.
한강 고수부지 앞에 차를 대고 흐르는 강물을 보다가 핸들에 두 팔을 걸고 앞으로 엎드렸다. 생각이 날 듯, 말듯. 속이 울렁거렸다.
‘형…가? 이제…안 와?”
‘데리러 올게.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 꼭 데리러 올게. 알았지?’
스무 살의 정후가 중학생인 윤서에게 말하고 있었다. 윤서는 기다렸다고 했다. 손을 꼽으면서…
‘아…좋다. 너랑 이렇게 평생 살았으면 좋겠다. 지금처럼 같이 밥 먹고, 아침에 제일 먼저 보고, 손잡고 이야기도 하고. 응?’
‘……………’
‘가끔…아니 종종 섹스도 하고! 야! 어디가? 일로 안 와? 정윤서!’
‘약속해. 사랑해줄게. 한정후는 정윤서만을 평생.’
가득 고인 윤서의 눈물 속에 행복하게 웃고 있는 한정후가 비췄었다. 따뜻하게 안아오는 팔의 감촉이 목에 느껴졌다.
“우웁….”
그랬다.
내가…먼저였다.
사랑하게 된 것도, 사랑한 것도.
나 밖에 모르는 눈을 영원히 차지하기 위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윤서를 손에 꽉 움켜진 것도. 세상따윈 보지 못하도록 눈을 가려버린 것도. 나였다.
하나 하나 처음부터 다 가르쳤다.
내 색깔로 윤서를 전부 칠했었다. 오직 나만 보도록, 오직 나만 사랑하도록. 오직 나밖에는 보지 못하도록. 오직…오직……
‘결혼해요? 결혼…진짜 해요?’
그때는 어떻게 답했더라….
‘내 나이쯤의 남자들은 다들 결혼해. 알잖아?’
“으윽…”
잊고 있었던 기억들이 물밀듯이 정후를 감싸기 시작했다.
잊었다.
달콤하더라.
성공이라는 열매는. 모두들 부러워 하는 시선은.
마약처럼 치명적이고 또한 매력적이었다.
점점 더 높은 곳이 보였다. 처음에는 윤서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작은 공간만이 필요했던 나였지만, 어느 순간 저 꼭대기에 침을 흘리고 있는 내가 있었다. 나라면 능히 도달할 수 있다고. 모두들 우러러보는 저 정점에 오직 나만이 오를 수 있다고.
그 후로는 뒤가 보이지 않았다.
“………윤서야…”
그런 내 뒤에서 윤서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윤서는 항상 거기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내가 어디에도 가지 못하도록 가둬 놨으니까, 굳이 뒤 돌아 보지 않아도 된다고 여겼다.
결혼을 할 생각이었다. 결혼을.
사회적으로 신분과 지위를 보장 받기 위해서. 더 높은 곳을 향한 발판으로 내게 힘이 되어 줄 여자를 골랐다. 게이라는 것을 숨기기 위해서도 더할나위 없이 좋은 결정이었다.
‘결혼해요? 결혼…진짜 해요?’
여전히 내가 사랑하는 건 정윤서였고 따라서, 변하는 건 없다고 생각했다. 벌써 변해 있었기에…무엇이 변했는지 몰랐다.
나 밖에 모르게 만들어 놓고…아무데도 가지 못하게 꽁꽁 묶어놓고…나 혼자…날아가려고 했다.
그날…윤서는 계속 떨면서 울었다.안기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내 목에 두른 팔을 절대 풀지 않았다. 날지 못하는 새가 되어버린 윤서는…그렇게 날 붙잡고 있을 수 밖에 없었는데…나는 그 아이를 그렇게 가둬놓고도, 그걸 잊었었다.
양손에 담을 수 없을 만큼 잔뜩 욕심을 끌어 안고, 그래서…가장 소중한 것이 흘러버린 것을 잊었다.
정후는 눈물이 흘러 부연 시야로, 핸들을 옆으로 꺾었다. 부앙 하는 출발음과 함께 차는 거칠게 고속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골목길은 그대로 였다. 나란히 서있는 키만한 담장에 가로등 하나, 깜박깜박이는 불빛이 아슬아슬해서 어두침침 한 곳. 이 길을 걸어 집이라는 곳으로 돌아갈 때 마다 그때의 정후는 항상 뒤돌아 뛰어서 도망치고 싶었다. 매달 둘째 주 월요일, 그리운 세계를 잠시 맛보고 나면…더욱 속에서 무언가가 치솟았다. 그래서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뒤돌아 섰다. 하지만…자신이 돌아올 때 까지 항상 발갛게 충혈된 눈으로 기다리고 있을 윤서가 발목을 붙잡아서 정후는 차마 발이 떼어지지 않았다. 그대로 떠나버리면 윤서가…죽을 것만 같아서. 그때는 그것마저 화가 나고 속이 상해서 더 술을 마시고 난동을 부렸다.
“…………”
급하게 문을 열고 들어간 곳은 사람이 살지 않은 특유의 알싸한 냄새가 났다. 아무것도 없는 빈방 안에서 정후는 털썩 주저 앉았다.
“멍청한 놈…이곳으로 와서 뭘…어쩌겠다고…”
…………………………윤서는 이곳을 떠나고 이미 없는데.
손바닥에 한 웅큼의 먼지가 쓸렸다. 검은 정장 바지 위로도 다닥다닥 회색 먼지들이 들러붙었다. 정후는 가만히 넋을 놓고 앉아 있었다. 이곳 구석구석에 베인 모진 기억들이 정후를 덮쳐왔다.
‘이 개 같은 새끼가. 너 때문이야! 너 때문이야!’
자신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믿고 싶지 않은 독한 욕설들. 그리고…윤서에게 폭력을 행사하던 자신의 모습. 발길질 하던, 가구들을 부수던, 밥상을 뒤엎고, 노름을 하고, 돈을 빼앗고, 그리고…술에 취해 강제로 욕정을 풀던 자신의 모습.
하나하나가 선명하게…지독히도 생생하게 정후를 찔렀다.
“…………우욱…”
믿을 수 없었다. 사실이 아니다. 내가 그랬을 리가 없다. 윤서에게. 윤서에게. 내 윤서에게. 내가..그랬을 리가 없다.
붉게 변한 눈으로 짐승처럼 윤서를 때리는 자신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다. 고개를 흔들어 그 장면을 지우자 이번에는 울며 붙잡는 윤서를 내팽개치며 노름질을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나타났다. 발작적으로 손을 휘저어 그마저 없애자 곧바로 술을 마시고 윤서에게 욕설을 퍼붓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아니야…아니라고…아니야…….아니야……아니야…….”
그리고…그 모든 것을 감내하고 있는 처연한 눈동자의 윤서가 있었다.
정후는 일어섰다. 신발을 구겨 신고 정신없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윤서가 일했다던, 예전에 자신에게 와서 윤서의 일을 따지던 여자를 찾아야 했다. 그 여자라면 지금 윤서가 어디에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윤서를 찾아야 했다. 윤서를 찾아서…윤서를…찾아서……
어떻게 해야 하나….도대체…어떻게…
윤서가 간절한 육신이 부질 없는 생각보다 앞섰다.
숨이 목에 걸려 헐떡였다. 술집이 모여있는 유흥가 거리, 저만치에서 그때 그 여자가 가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정후는 무작정 달려가 그 여자를 잡아챘다.
“윤서 어딨어? 윤서!! 어딨냐고!!!”
정후가 현정을 잡아채자 마자 검은 정장의 사내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정후를 현정에게서 떼어내어 거리로 내팽개쳤다. 현정은 정후를 내려다 보고 한쪽 입가를 비죽이 올려서 웃고는 그냥 뒤돌아 섰다.
“거기 서!! 윤서 어딨어?? 말해!! 윤서 어딨냐고!!!”
정후가 다시 일어나서 현정을 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 시도는 또 검은 사내들에게 막혀 무위로 돌아갔다. 현정이 천천히 바둥거리는 정후에게 다가왔다. 감정 하나 실리지 않은 차가운 눈이 정후를 비웃고 있었다.
“알아서 뭐하게? 당신이랑 상관없는 사람 아니었어? 윤서?”
“………………”
“그때 분명히 그렇게 들은 것 같은데, 나.”
“상관 있어. 그러니까 말해. 윤서 어딨어?”
“이 새끼는 혀가 반밖에 없나, 어디서 반말이야? 뭐해? 이거 보기 싫으니까 내 눈앞에서 치워!”
현정은 가차없이 말하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정후는 자신을 붙잡은 사내들을 온 힘을 다해 뿌리쳤다. 계단을 구르듯이 내려가서 홀을 지나는 현정을 돌려세웠다.
“어딨어? 당신은 알지? 어딨어? 말해!! 윤서 어딨냐고!!”
“그걸 이제 와서 왜 물어? 그 녀석이 기어코 떠나도록, 야밤에 흔적 하나 안 남기고 떠나도록 그렇게 녀석을 몰아부친 거 당신 아니었어? 그래 놓고 이제 와서 그 녀석이 어디 있는지가 왜 궁금한데? 네가 벌여놓은 도박 빚 갚느라 몸 팔고 엉망진창이 된 그 녀석 한번을 안 들여다 봐 놓고…”
“……뭐?”
“젠장!”
현정은 거칠게 욕설을 내뱉으며 잡힌 손을 뿌리치고 사장실로 들어갔다. 정후는 현정이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도 붙잡을 수 없었다. 바로 옆에서 폭탄이 터진 것처럼 귀가 멍멍했다.
방금…무슨 말을 들은 거지? 분명..뭐라고 했는데…뭐라고 했지?
하…잠시만…잠시만…잠…시만…
“…그럴 리가…없어…그럴 리가…없어…사실이…아니야…”
집으로 돌아 온 정후는 감당하기 힘든 사실에 목을 놓고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그 끔찍한 사실이…현실이 아닐 리가 없었다. 분명히 명백한 사실이었다. 다만 믿고 싶지 않았을 뿐.
손끝으로 윤서의 살을 파고들던 감촉이 스물 스물 기어올랐다. 자신의 이 손이 윤서를 때리고, 윤서탓으로 모든 것을 돌리며 현실을 도피했을 때, 그 같지도 않은 빌어먹을 현실을 지키기 위해 윤서는 저기 저 밑바닥까지 내려가 있었단다.
윤서를 때린 주먹이 끊어질 듯 아파왔다.
“으으으윽…….으으윽…으윽…..아아아아악..”
미웠다. 윤서가. 용서가 안됐다. 윤서가.
미워하려고 했다. 윤서를. 상처주고 싶었다. 윤서를.
내가 아픈 만큼, 내가 괴로운 만큼…너도 괴로워 보라고. 벌레처럼 웅크리고, 작은 동물처럼 겁에 질린 윤서를 내가…그래…내가…몇 번씩 버렸다.
형이라고 부르는 그 아이의 목소리를 외면하면서,
애처롭게 붙잡는 손을 뿌리치면서,
간절하게 쳐다보는 시선을 피하면서,
몇 번씩 몇 번씩 윤서를 버린 거다..
정후의 몸이 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먼지 수북한 사각의 방을 기어 다니면서 정후는 온 몸을 뒤틀면서 울었다.
윤서를 윤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때는 돌아서…미쳐선, 그저 내 삶을 부순 배신자라고만 여겼지…그가 윤서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윤서였는데…내가 내 색으로 모두 칠해버려선, 그렇게 밖에는 못할 윤서 였는데. 그렇게 만들어놓은 것은 바로 자신이었는데.
‘괴롭게 해서 미안해요, 아프게 해서 미안해요.
형 자신을 미워하게 만들어서 미안해요.
진작 놔주지 못해서, 내 욕심으로 붙잡고 있어서...
행복하게 해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그 말은 자신이 먼저 해야 할 말이기도 했다.
지켜주기로 해놓고 내버렸다. 영원히 함께 하기로 한 약속도 까맣게 잊었다. 미안하다는 말은…정후가 먼저 해야 하는 말이었다. 그날의…무너진 윤서에게.
“윤서야!!!!! 윤서야!!!!!! 윤서야!!!!!!!!!!”
몇 년 만에 불러보는 이름인지, 이제야 정후는 제정신이 돌아 온 듯했다. 까맣고 까만 어둔 밤을 지나서 이제야 눈앞에 사물들이 또렷해 졌다. 무엇이 더 소중한 것이었는지, 잊고 있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그래서 지금 얼마나 멀리 와버렸는지 까지도. 그래서…그래서..지금 자신의 곁에 윤서가 없다는 것을 절절하게도 깨쳤다. 그것은 죽을 것처럼 아팠다. 맨 밑바닥으로 떨어져 모두가 경멸의 눈초리를 보낼 때도 이만큼 아프지는 않았다.
그때는…윤서가 있었으니까…그것을…이제서야 알았다.
커튼이 뜯겨 나간 창문으로 햇살이 강하게 비췄다. 정후는 팔로 눈을 가리고 그대로 누워있었다. 이대로 사라져 공기중의 먼지로 흩어졌으면 좋겠다고, 정후는 아주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다.
“꼴 좋네.”
팔을 내리고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눈꺼풀을 살짝 올렸다. 가벼운 차림의 현정이 정후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정후가 팔에 힘을 주고 반쯤 몸을 일으켜 앉았다. 벽에 등을 기대고 축 늘어졌다.
“…………무..쿨럭….쿨럭..”
목이 꽉 잠겨서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다. 정후는 허리를 동그랗게 말고 한동안 마른기침을 쿨럭였다.
“무슨 일입니까?”
정후의 존대의 현정이 정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무엇인가를 찾듯이 한동안 정후를 바라보던 현정이 큰 숨을 들이켰다.
“이제야 제대로 된 사람 눈 같네.”
“………………”
시선을 피하지 않는 정후의 눈동자는 아픔에 물들었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아마…윤서가 사랑에 빠진, 그리고 사랑한 사람의 눈은 저랬으리라고 현정은 생각했다.
“나도 어디 있는지 몰라. 나한테도 말하지 않았으니까.”
“………………”
“바다라는 말만 들었어. 누님, 여기 바닷물 색깔이 너무 이뻐요. 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몰라. 난 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요… 이게 내가 들은 전부야.”
정후의 세포 전부가 현정의 말을 새기고 있었다.
바다라…그렇게 가고 싶어 하더니만…결국은 혼자서 간 거냐? 응? 윤서야…거기도 내가 데리고 가기로 했었지…그런데 그래…내가 잊었었지...
“찾을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그럴 겁니다.”
정후의 단호한 대답에 현정의 입매가 굳어졌다. 현정은 정후 높이에 똑같이 마주 앉았다.
“들었어. 윤서가 당신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용서할 마음이 생긴 거야? 아니 용서할 수 있겠어? 그런 건 같지는 않지만 또 다른 복수의 연장이라면 그만해 줘. 윤서도 충분히 괴로워했으니까.”
“…………”
“또…그런 게 아니라고 해도 자신이 없으면 그냥 서로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 윤서의 전화목소리, 나름대로 편안하게 들렸어. 당신도 대단하던데? 신문, 잡지에서 종종 봐. 어쩌면…다시 만나는 게 틀린 답일지도 모르잖아. 이미 잔뜩 나버린 서로의 상처는…보면 볼수록 아플 테니까. 그냥 이렇게 사는 것도 괜찮지 않겠어? 그 쪽은 그 쪽대로. 윤서는 윤서대로.”
“상처 헤집기는 이제 끝났습니다. 지난 3년으로도 충분히 넘칩니다……윤서는…윤서 대로 살게 될지 몰라도 전 아닙니다. 전…윤서 없인 아무것도…그 아이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찾아야 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정후의 눈동자가 곧 눈물이라도 쏟을 듯이 벌겋게 충혈됐다. 현정은 그 눈에 같이 울고 싶어 졌다. 현정의 귓가로 정후에게 전하지 않은 윤서의 서글픈 울음이 맴돌았다. 그럼에도 보고 싶어서 미치겠다고 했지…그 사람이 훨훨 날고 있는 게 너무 좋아서…가슴이 아프다고도 했지. 사람 사이 마음 마음, 뜻대로 되지 않아 속이 까맣게 타는, 윤서와 정후는 여전히 그런 사랑이라는 것을 하고 있는 걸까? 그토록 돌고 돌아서도 아직까지?
“요즘은 공중전화에도 번호가 있더라. 이뻐서 주는 거 아니야.”
반으로 접힌 흰종이가 팔랑팔랑 춤을 추며 정후의 무릎팍으로 내려왔다. 그것을 잡는 정후의 손이 덜덜 떨렸다. 손에 쥐고도 한참…섣불리 펼쳐 보이지는 못했다.
“안 봐?”
“아직은…”
“그럼?”
“……고맙습니다.”
종이를 꼭 쥐고서 목례를 하는 정후를 보면서 현정은 더 다그쳐 묻지 못했다. 주위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은 다 마쳤으니…그걸로 끝. 그 이후의 일은 두 사람의 몫임이 분명했다.
“씨발. 개나 소나 하는 사랑. 뭐가 그리 대단해서. 둘 다 병신이지.”
정후는 그대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현정은 문을 있는 힘껏 닫고는 나갔다. 낡은 철문이 삐그덕, 요란하게 휘청였다.
정후는 옛집에서 삼일을 더 머물렀다. 구석구석, 지난 날 자신이 했던 모든 일과 한 점, 여과 없이 마주했다. 그것은 생살을 찢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현실에 무릎 꿇고 등 돌아 선 대가는 생각보다 훨씬 크고 아팠다. 온 몸에 커다란 가시들이 빼곡하게 박혔다. 이것을 빼는 것 또한 쉽지 않으리라. 우선은…정후 자신의 제 자리를 완전히 찾아야 했다. 윤서가 그 일로 더 아파하지 않도록, 마음 편하게 돌아올 수 있도록. 그러기 위한 시간이 더 필요했다.
“선배님!!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연락도 되지않고!!”
“미안. 그럴 사정이 좀 있었어.”
“대체 그럴 사정이라는 것이..”
“두번 째 소송도 승소하자. 이번에는 더 완벽하게. 이제부턴 걱정할 일 없을 거다. 이번만 눈 감아라.”
정후가 웃으면서 원재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예전의 작위적이고, 아슬아슬 하던 웃음이 아니라 힘이 없기는 했지만 진짜 미소였다. 한꺼풀 벗겨낸 듯한 정후의 모습에 원재는 목까지 치민 말들을 다시 밑으로 삼켰다.
“이번만 입니다!! 치사해서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위너로펌 대표는 접니다! 다음엔 확 잘라 버릴거에요!!”
“큭큭, 얼마든지. 그대 뜻대로.”
정후의 뒷모습은 더 이상 무너질 것처럼 위태롭지 않았다.
“………느물거리는 것까지…이제야 정말… 돌아 온 겁니까? 선배?”
정후는 가장 잘 보이는 곳에 현정에게서 받은, 아직 펴 보지 않은 종이를 내려 놓았다. 항상 일하는 자신의 옆에서 몇 시간이고 헤실거리며 지켜보던 윤서가 떠올랐다. 종이가 윤서라도 된 듯 정후는 보란 듯이 밀린 서류들을 빠른 속도로 검토해 나갔다.
“김비서. 들어와요.”
“네. 찾으셨습니까?”
“이거. 공중 전화번호입니다. 위치 추적해 주세요.”
“추적 즉시 알려드리겠습니다.”
“아니, 보고 시일은 제가 정하겠습니다. 일단 추적만 해주세요. 더불어…그곳에 있을 한 사람도 찾아 주셨으면 합니다.”
“예. 알겠습니다.”
정후는 두근 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한쪽 손바닥을 심장 위에 올려 놨다. 거친 심장박동이 손바닥으로 여지없이 느껴졌다. 심장은 뛰고 있었다.
“한 변호사님. 1번 전화입니다.”
“연결하세요. …네. 한정후 입니다.”
“……………”
“말씀하십시오.”
“……아비다.”
공문을 적어나가던 정후의 손이 멈칫했다. 펜을 놓고 전화기를 움켜 쥐었다. 마지막 보던 날 고집스런 외면에 상처 입었던 가슴이 다시 헤집어 지는 것만 같았다.
“예.”
“앞이다. 시간 좀 내거라.”
예전과 변함없는 간결한 대화법. 후원자에서 아버지로…또 지독한 타인으로, 정후는 거울을 보고 넥타이를 바로 맸다. 구김 없는 양복 상의도 탁탁 털어서 단정히 입었다.
“오랜만입니다. 그간 별고 없으셨습니까?”
“……돌아왔더구나.”
“함구하셨더군요. 덕분에 조금 쉬웠습니다.”
“모진 놈.”
아버지, 김 회장은 그 말을 끝으로 앞에 놓인 물만 벌컥벌컥 들이켰다. 어느새 알아보았는지 정후와 김회장에게 주위시선이 고정되고 있었다.
“사모님은 건강하십니까?”
“사모님이라니!! 어미한테!”
“………자격을 잃은 것 아니었습니까. 저.”
한가닥 숨기지 못한 원망이 결국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양부모에게 필요한건 완전무결한 아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래도 믿고 의지하던 부모의 외면은 상처가 되었다.
“………그 아이도 함께냐?”
“……지금은 아닙니다.”
김회장이 정후를 보는 눈은 살짝 물기가 어려 있었다. 부러질지 언정 굽히지 않는 어린 아이의 기세에 마음을 빼앗겼다. 잘만 크면 대단한 놈이 될 것이라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고 양 아들로 호적에 떡 세워놓고 한번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정후가 뿌듯하고 자랑스러웠던 김회장이었다. 버리고 나서도 생살을 뜯어낸 것처럼 속이 쓰렸다. 친 자식은 아니되, 친 자식보다 더 정성을 들인 아들이었다.
“……철 없는 때 사내가 즐긴, 거칠 것 없는 유희를 우리가 너무 크게 받아 들였어. 너만 괜찮다면 돌아 오너라.”
“……………”
“어미도 기다리고 있다.”
정후는 김회장이 어렵게 내민 손을 부여 잡고 싶은 심정을 지긋이 눌렀다. 아버지였다. 해준 것 없이 떠나버린 친부 대신 정후의 어깨에 커다란 날개를 달아 준 사람. 지금도 여전히 귀했다.
“지금은 아니지만…곧 찾을 겁니다.”
“정후야!”
“말씀은 감사하지만…회장님 제안은 거절하겠습니다. 그 사람 없이는…저 못살겠습니다.”
“………살아보고도 그래? 그 진창에서 허우적거리고도 아직도냐?”
“고아 였을 때도,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오기만 시퍼렇게 산 학생이었을 때도, 성공했을 때도, 무너졌을 때도, 그리고 설령 모두들 경멸하는 게이 라도. 아무 조건 없이 절 사랑해 준 사람은 오직 그 사람 하나 뿐입니다. 그런 사람…제게는 다신 없습니다.”
“………내 아들이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진 않겠지?”
“이제 제 날개를 쥐고 있는 사람은 회장님이 아니십니다.”
김회장과 정후의 시선이 불꽃이라도 튀길 듯이 맞부딪혔다. 그 변함없는 시선에 흔들리는 것은 김회장쪽. 어쩔 수 없다는 듯 큰 한숨이 새어 나왔다.
“시간 되면 밥 먹으러 오너라.”
“…………”
“회장님이라는 호칭, 마음에 들지 않는다. 먼저 일어나마.”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고 했던가, 한 번 잃었으면 됐지…다시 힘들게 올라온 아들. 또 내칠 수는 없었다. 인정할 수 는 없지만 세월이 지나다 보면 편해지는 날도 오겠지…정정하던 김회장의 얼굴위로 주름 한 줄이 더 깊게 새겨진 듯 했다.
두 번째 소송도 승소한 후 정후는 더 참지 않고 김비서에게 위치를 물었다. 서울에서 2시간 남짓 떨어진 곳에 윤서가 있었다. 차를 몰면서 정후는 뭐라고 첫마디를 꺼내야 하나 머리가 깨지도록 생각했다. 벌써 이만큼 벌어진 간격을 어떻게 메워야 하는 건지도 자신이 없었다. 아는 것은 단 하나. 어떻게든 찾아서 옆에 둬야 한다는 것.
보고 받은 대로 바닷가에서 안으로 조금 더 들어가니 시내 한 가운데 윤서가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서점이 보였다. 맞은편 도로에 차를 세웠다.
환히 비치는 유리 벽 안에 윤서가 있었다.
종종 걸음을 치면서 책을 정리하고 있는 윤서를 정후는 섣불리 다가가지 못하고 그저 지켜봤다. 오랜만에 윤서를 보자 그리움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수많은 감정들이 휘몰아 쳤다가 잠잠해지기를 반복했다. 눈 먼 미움과 원망이…조금이라도 남았는지, 정후는 제 마음속 깊숙한 곳까지 놓치지 않고 살폈다. 다시 찾아서, 혹시나 지나는 말에 가시가 돋아 윤서를 상처 입히는 일 따위는 없어야 했다. 아무리 마음을 헤집어도 가슴이 외치는 말은 단 하나. 윤서가 그립다는 것. 정후는 시동을 끄고 차문을 열었다.
“여기다 꽂으면 돼?”
발 뒤꿈치를 들고 맨 위의 책장에 책을 꽂으려 애를 쓰는 윤서의 손에서 책을 빼서 정후가 대신 꽂았다. 윤서는 머리 위에서 들리는 정후의 목소리에 완전히 굳어서는 그대로 얼음이었다.
“오랜만이다. 정윤서.”
“………혀엉..정..정후..형?”
말을 더듬으며 뒷걸음질 치는 윤서의 모습에 정후는 심장 저 안쪽이 욱씬 거렸다. 마치 못 볼 것이라도 본 것마냥 놀라며, 윤서는 덜덜 떨고 있었다.
“잘 지냈어?”
“………네…형..형은요?”
윤서는 계속 뒤로 물러나 정후와의 거리가 벌써 열걸음은 넘게 났다. 등이 벽에 닿자 윤서는 옴쭉달싹 못하게 갖혀버린 쥐처럼 파들거렸다.
“난 잘 못 지냈어. 밥은, 밥은 먹었어?”
“……네…형..형은요?”
“난 아직. 저녁시간 전인데 벌써 저녁 먹었어?”
“…………아..아니요..…”
“잘 됐다. 저녁먹자.”
“…………”
“나랑 저녁 먹기 싫으냐?”
“형…저기…저기요. 알바 시간 끝나려면..아직 멀어서…아니..아니..그게 아니라…어떻게..어떻게 온 거에요?”
“언제 끝나?”
“……7시요.”
“40분 남았네. 기다릴게. 서서 책 봐도 되지?”
윤서의 대답은 들을 생각이 없었는지 정후는 바로 서점 안쪽으로 들어갔다. 무슨 책인지도 모르고 뽑아서 무턱대고 중간부터 폈다. 윤서의 시선이 따갑게 따라붙었지만 정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의미 없는 글자에만 집중했다. 그리고 윤서가 다른 곳을 볼 때마다 정후는 윤서를 바라봤다.
머리가 조금 자랐다. 볼 살은 더 빠진 것 같고. 그래서 커다란 눈만 더 뎅그래진 것 같았다. 바지런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여전하다.
어느새 정후는 책을 덮고 윤서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 눈앞에서 윤서가 돌아다닌 다는 것이 정후에겐 새삼 감동이었다.
다른 아르바이트생이 오고 인수인계를 마친 윤서가 가방을 가지러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정후는 차를 서점 바로 앞에 주차시키고 윤서가 나오자 보조석 문을 직접 열어주었다. 잔뜩 곤란해 보이는 윤서는 곧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았다.
“형…저기…형…나는…”
“일단 가서 이야기 하자. 여기 서서 할 순 없잖아. 타.”
마지못해 하는 윤서를 억지로 차에 태우고 오면서 봤던 한식당으로 차를 몰았다. 정갈한 음식들이 차례차례 차려지고 이윽고 윤서와 둘만이 되었을 때 정후는 당장이라도 윤서에게로 뻗고 싶은 손을 주먹을 꽉 말아 쥐고 애써 상 밑으로 숨겼다.
“먹어.”
“………미안해요. 형. 말로 못하고…종이 쪽지에다 적어서…진짜 미안해요. 형. 신문 봤어요. 정말 다행이야…진짜 미안해요. 내가…그때…이제 와서..아무 소용도 없지만…”
윤서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다급하게 중얼거렸다. 이 자리가 바늘방석에 앉은 것보다 더 괴로워 보였다. 정후는 음식이 담긴 접시를 윤서 쪽으로 가까이 옮겼다.
“음식 식겠다. 먹어.”
“진짜…미안해요. 형…정말 미안해요. 내가 정말 잘못했어요. 나는…”
“윤서야.”
“……………”
“정윤서.”
“………네..”
“형 배고파. 먹고 이야기 하자.”
자신이 배고프다는 말에 허겁지겁 수저를 드는 윤서를 정후는 정말 어쩔 수 없다는 심정으로 바라봤다. 안보고 살 수 있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우스웠다. 잊혀질 거라고 믿었던 다짐이 참 볼 품 없었다.
불편한 침묵 속에서 간혹 그릇들만 달그락 거렸다. 억지로 꾸역꾸역 밥만 밀어넣는 윤서의 모습에 정후가 윤서의 수저 위로 계란 부침을 올렸다. 순간 놀란 윤서의 입에서 거칠게 기침이 튀어나왔다.
“그러게 급하게 먹으니까 그렇지.”
정후는 윤서의 옆으로 가서 물을 건네며 등을 도닥였다. 윤서는 정후의 손길을 피해서 엉덩이 걸음으로 또 물러섰다.
“콜록콜록..괜…콜록…괜…찮아요..콜록콜록.”
“말하지 말고 물 마셔.”
입가로 물잔을 가져다 주는 정후의 손을 윤서가 잡았다. 정후는 윤서가 잡은 곳에서 찌릿하고 전기가 통하는 것을 느꼈다. 오랜만에…정말 오랜만에 윤서의 체온이다.
“형…제발..말해요. 원망이든, 욕이든…제발…그냥…어서…”
정후는 팔에 닿은 윤서의 손을 꼭 움켜쥐었다. 윤서가 움찔 하는 게 느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돌아 가자.”
성급히 나온 말이었지만, 입 밖으로 내뱉고 나니 더 간절해졌다. 윤서와 돌아가고 싶었다. 다시 돌아가서 예전에 약속한 대로 함께 밥을 먹고, 아침을 맞이하고, 윤서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와서 하루 일과를 풀어내고 싶었다. 이제는 그 약속을…제대로 지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윤서의 눈이 크게 한번 일렁이더니 곧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런 윤서를 보며 기대로 부풀었던 정후의 가슴 한 쪽이 차갑게 식어갔다.
오래된 습관은 이처럼 무섭다. 또 자만하고 있었다.
찾아서 데려가면 된다고만 생각했지…윤서가 거절할 것이란 건 염두에 두지 않았다.
질려버렸을지도 모른다. 그 시간을 넘어선 윤서는…
더 이상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정후는 다급해졌다.
“윤서야. 내가..”
“형.”
언제 떨었냐는 듯 윤서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그 담담함에 정후는 아찔해졌다.
“……형. 형이 다시 날아올라서…다시 반짝 반짝 빛이 나서…다시 예전처럼…그렇게 되서…나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만약에…안 그랬다면 난 아마 죄책감에 죽고 싶었을 거에요. 정말..그랬을거야. 고마워요. 형. 다시 돌아가줘서.”
“윤서야.”
“거기 있어요. 형. 형은 거기가 제일 잘 어울려. 그리고…지금 형의 옆 자리는 내가 돌아갈 곳이 아니에요.”
기억 속의 물기 어린 음성으로 윤서는 서둘지 않고 또박또박 말했다.
가둬놓았던 새가…그곳이 새장이었다는 것을 알아챈 모양이다. 날아오른 건 정후가 아니라 윤서 였다.
“내 옆이 아니라도…넌 살 수 있다는 거냐?”
“아마도. 그런 거 같아요. 그래야 하는 거잖아요.”
“……………”
“………형은 내가 용서가 되요?”
윤서의 입가로 처연한 미소가 피어 올랐다. 정후는 그 미소가 이내 울음을 참으려 일그러지는 것을 그저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진짜 미울텐데…그래도 형이 이렇게 와줘서 내가 내입으로 형한테 잘못했다고 할 수 있게 해줘서..정말 고마워요. 내가…평생..평생…여기서 기도할게요. 형이 잘되기를. 형이 행복하기를.”
“윤서야.”
“너무 어두워지면 서울 가기 그렇잖아요. 일어나요.”
윤서가 일어나려는 것을 정후가 잡아서 품에 가뒀다. 자신의 품에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파들거리는 작은 새를 정후는 꽉 껴안았다. 날아가게 둘 수 없다. 떠나가게 둘 수 없었다.
“너는 내가 용서가 되냐? 너에게 주먹질하고, 욕하고, 못된 소리만 골라서 하고…그랬던 내가 용서가 되냐?”
“…….형은 그럴 만 했으니까. 내가 무슨 자격으로 용서를 해요?”
“나도 그래. 나도 널 용서할 자격이 없어.”
정후는 윤서를 안은 팔에 더 힘을 주었다. 한 품에 쏙 들어오는 작은 몸은 잃어버린 퍼즐조각 처럼 딱 맞았다.
“윤서야…나는 너 없이는 안되겠다. 네가 없이는 아무것도 안되겠다. 너무 늦은 게 아니라면…아직도 우리가 서로 함께 하고 싶은 거라면…네 마음에…”
“……안되요. 형… 더 말하지 마요.”
윤서의 팔이 정후를 살짝 밀었다. 미약한 저항이었지만 윤서의 거부에 정후의 가슴은 길게 상흔이 그어졌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윤서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정후는 차마 볼 수 없었다. 자신만 바라보던 그 눈이…다른 곳을 향해 있는 것을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데려다 줄게.”
정후는 윤서를 놓기 전에 다시 한번 꼭 껴안았다. 상처 헤집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던 자신 만큼 윤서도 시간이 필요 한지 몰랐다. 그럼 시간을 주면 된다. 장기전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다시 찾을 수만 있다면.
“여기서 살아?”
“네. 혼자 살긴 좀 크죠? 여기 집 주인 형이 유명한 화간데요, 안 쓰는 집이라고, 사람 들어 살면 더 좋다면서…저한테 빌려주셨어요.”
“들어가.”
정후가 윤서의 안전벨트를 풀어줬다. 문 손잡이를 잡은 윤서가 조금 망설였다. 눈을 질끈 감더니 이윽고 문을 열고 내린다. 못다한 말을 숨기듯 윤서는 가슴께를 꽉 붙잡고 있었다.
“잘 가요. 형. 운전 조심 하고…식사 때도 놓치지 말고 챙기고…또…참…내가 뭐 하는 거야? 형…와줘서 정말 고마워요. 그리고 진짜 미안했어요.”
윤서는 끝 인사를 하는 것 같았다. 더 이상 이어질 인연은 없다는 듯, 여기가 마지막인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정후는 음악을 틀고 볼륨을 최고로 올렸다.
“…………”
“들어가. 문단속 잘하고. 또 보자.”
윤서는 들어가지 않고 계속 서 있었다. 정후도 출발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참. 먼저 돌아선 건 윤서 였다. 몇 번을 뒤 돌아보기는 했지만…윤서는 조금 망설인 후 집안으로 사라졌다. 정후는 윤서를 삼킨 대문을 노려봤다. 꽉 닫힌 철문은 견고했다. 정후는 그 문이 윤서의 마음 같다고 생각했다.
“나와라. 정윤서.”
열리지 않는 문.
“나와라. 정윤서…”
여전히 닫혀있는 문.
“…………이번에는 내 차례냐?”
정후는 새벽녘이 되어서야, 겨우 서울에 도착 할 수 있었다.
“선배. 매 주말마다 어딜 그렇게 다녀오시는 겁니까?”
“비밀.”
“뭐야? 선배 연애해요?”
“글쎄?”
정후는 웃으며 조간 신문을 펼쳤다. 전면에 나선 두 번째 소송도 멋지게 승소 한 후 정후는 김회장의 회사에 법률자문을 맡았다. 김회장은 파티를 열어 정후를 화려하게 소개했다. 이제 정후의 면전에 대고 옛 소문을 물어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예전 일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은 것처럼 모두들 정후에게 다시 손을 내밀기에 바빴다.
역겨웠다.
자신이 꿈꿔온 세계의, 자신이 오르고자 했던 정점의 진모습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잔혹하고 또 덧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정후는 윤서가 더 간절했다.
“이번 내일도 시간 안 되십니까? 최회장님과 골프약속이 있는데 선배님도...”
“주말은 시간 안 돼. 이 나이에 골프는 무슨. 평일에 스쿼시나 한판 해.”
“정말 주말마다 어딜 가시는 건데요? 말씀 해주시면 제가 단념하고..”
“훗. 네가 단념 안 하면 어쩔 건데? 니 말대로 연애해. 애인 만나러 가야 하니까 그 시간은 넘보지 마십시오. 네? 대표님!”
신문을 돌돌 말아서 원재의 엉덩이를 톡 치고 정후는 내일 윤서에게 내려갈 때 가지고 갈 선물을 사기 위해 백화점으로 향했다. 곤란해 하는 것을 알면서도 매주마다 정후는 윤서에게 내려갔다. 억지로 집 안으로 들어가서 차를 얻어 마시고 밖으로 불러내서 영화를 보고, 공원을 산책하기도 하고, 그리고 돌아올 때마다 윤서가 좋아하는 것들을 하나씩 선물로 남겼다. 첫째 주는 라벤더 화분, 둘째 주는 곰인형. 셋 째주는 멜론, 이번 주는 오르골을 가져갈 생각이었다. 하나씩 두고 오는 선물들이 늘어날 때마다, 윤서 마음속에 자기 자리도 넓어지길 기대하면서 정후는 매주 금요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백화점을 들르곤 했다.
“한정후씨?”
“………아…”
엔틱한 가구들이 오밀조밀 하게 세팅 되어 있는 매장을 둘러보다 정후는 낯선 여인의 부름에 얼굴을 굳혔다. 머리모양이 바뀌어 첫눈에 알아보진 못했지만…그녀는 정후의 전 약혼녀였다.
“오랜만이에요. 돌아오셨다는 소문은 익히 들었어요.”
“네. 오래간만입니다.”
“괜찮으시면 잠시 차 한잔 하시겠어요?”
“…….가시죠.”
낮 시간대라 까페는 한산했고,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곱게 말린 웨이브 머리에 샤넬 원피스를 입고 있는 여자는 누가 봐도 상류층의 귀부인 같았다. 어쩌면 자신의 안 사람이 됐을지도 모르는 여자를 앞에 두고 정후는 어떤 감흥도 없었다. 그녀가 먼저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면 정후는 모르고 스쳤을지도 몰랐다. 그저 필요해서, 모두들 어울린다기에, 치기 어린 마음에 선택했던 여자. 어쩌면 그녀에게 가장 큰 실례를 범한 건지도 모른다.
“너무 늦었지만 이렇게라도 말씀 드릴 수 있게 되서 다행입니다. 그때는 큰 실례를 범했습니다. 사죄 드립니다. 그리고 함구해주셨더군요. 그 또한 감사드립니다.”
“함구는 정후씨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집안과 김회장님의 체신을 위해서 였어요. 그러니 감사하단 인사는 사양하죠.”
“…………”
“사죄라? 어떤 실례에 대한 사죄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
“절 허수아비 인형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에 대한 사죈가요? 아니면 그냥 불미스런 일로 하게 된 파혼에 대한 사죈가요?”
“민주씨.”
“다행히 제 이름은 기억하시네요. 어떤 의미의 사죄든 받기로 하죠. 새삼 그것을 따지기엔 시간이 너무 흘렀으니까요.”
민주는 왼손 약지 손가락에 끼어진 다이아몬드 반지를 뱅글뱅글 돌렸다. 정후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할 말이 없었다. 어색함을 숨기려고 계속해서 물만 들이켰다.
“결혼했어요.”
“축하드립니다.”
“고마워요.”
민주는 반듯하게 앉아있는 정후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자신의 시선이 조금 부담스러운 듯 보였지만 결코 시선을 피하지 않는 정후의 모습에 잠시 가슴이 싸해졌다. 과거, 정후 역시 조건에 맞춘 정략적인 상대였지만 한쪽 가슴에 살며시 담기도 했었다. 드러난 엄청난 사실에 얼마나 당황하고 놀랬었던가. 말 못할 배신감에 치를 떨기도 했었다. 더럽고 추잡하다고 욕했지만 정후가 한번도 그 사람을 안 듯 뜨거운 가슴으로 자신을 품어준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선 망치로 두드려 맞은 것처럼 큰 충격을 받았다. 지금 이렇게 정후를 봐도 아무런 동요가 없는 건 바로 그 때문이다.
“예전에 그치랑 여전한가요?”
“…………노력 중입니다.”
짧은 한 마디에도 애절함이 가득하다. 민주는 살짝 심술이 났다.
“한정후씨가 저에게 한 가장 큰 잘못이 뭔 줄 아세요?”
“……………”
“그런 사람이 있음에도 감.히. 날 넘 본거에요. 내 인생에 다시 없을 모욕이었어요.”
“……미안합니다.”
“새털같이 가벼운 말이네요. 그 미안하다는 말은. 필요 없어요.”
“……………”
민주는 핸드백을 들고 일어섰다. 그리고 마시지 않은 물을 정후의 면전에다 확 뿌렸다. 정후의 젖어버린 머리카락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에 민주는 활짝 웃었다. 십년 묵은 체증이 확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이걸로 대신하죠. 한정후씨의 노력이 빛을 발하길 바래요. 그럼 이만.”
자기 할말만 다 해놓고 또각또각 구두소리를 내며 당당하게 걸어가는 민주의 뒷모습에 정후는 웃으면서 머리를 툭툭 털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그런 사람이 있음에도 감.히 다른 사람에게 옆을 허락할 생각을 하였다니, 그건 그녀, 그리고 그에게 정말 해선 안 될 짓이었다. 덕분에…이 고생이지만. 뭐 나쁘진 않다.
정후는 손수건을 꺼내 머리의 물기를 닦으면서도 계속해서 나오는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우습게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 졌다.
정후는 포장된 오르골을 보조석에 고이 모시고 윤서의 집 앞에 차를 주차했다. 막 내리려는데 윤서의 날 선 목소리가 들렸다. 정후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왜 이래? 너랑 더 볼일 없으니 다신 찾아오지 말라고 했잖아!!”
“너야말로. 그 새끼랑도 헤어졌으면 나도 괜찮지 않아? 잘해준다는데 그만 튕기시지? 아닌 말로 우린 이미 갈때까지 간 사이 아니던가?”
“닥치고 꺼져.”
정후의 눈에 뒤돌아서는 윤서를 거칠게 잡아채는 사내가 보였다. 생각할 것도 없이 정후가 뛰어가 윤서를 낚아 채곤 등 뒤에 감췄다.
“뭐야. 당신?”
“……이 새끼 봐라. 신수가 훤하네. 나 몰라보겠어?”
찰나의 순간 속에 정후는 기억 속의 남자를 찾아낼 수 있었다.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핑계로 노름질이나 하고 있는 미친 자신에게 돈을 빌려주며 비열하게 웃던 사내. 그리고…윤서를…
“이 새끼!!”
정후는 온 힘을 실어 성칠에게 주먹을 날렸다. 미처 방어하지 못한 터라 크게 충격을 받은 성칠의 몸이 땅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윤서의 비명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정후는 성칠을 올라타고 정신없이 주먹을 날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린 성칠의 반격 또한 만만치 않았다. 커다란 사내 둘이 기교 없이 무작정 치고 박는 광경은 차마 눈뜨고 보기 어려웠다.
“그만해!! 그만해요!! 그만하라고!!!”
악다구니를 쓰면서 윤서가 가운데로 끼어 들어 간신히 두 남자를 떼어냈다. 그 와중에도 그들은 서로에게 주먹질을 하면서 살기를 내뿜었다.
“개새끼. 감히 네가 누굴 건드려!!”
“훗. 지꺼 굴려 목숨 연명하던 새끼가 이제 와서.”
“……………”
성칠의 말에 정후의 몸이 벼락이라도 받은 듯 딱딱하게 굳었다. 온 몸을 난도질 당했어도 이보다는 덜 아플 것 같았다. 심장을 길게 베고 지나간 상처는 크게 벌어져서 거침없이 피를 토해내고 있었다.
‘네가 벌여놓은 도박 빚 갚느라 몸 팔고 엉망진창이 된 그 녀석 한번을 안 들여다 봐 놓고’
옆에서 현정의 원망스런 목소리가 다시 귓가를 파고 들었다.
……화낼 권리가 있던가…
윤서를 그렇게 내 몬 사람이 바로 자신인데. 윤서의 상처가 곪고 곪을 동안 그대로 방치해 둔 채, 그저 술에 의지해 자기 혼자 도망쳐 놓고서는…정말 이제 와서…무슨 자격으로…
윤서가..무슨 심정이었을까…정후는 그 생각에 더 미칠 것 같았다. 다른 사람에게 안긴 윤서보다, 그때 윤서가 어땠을지…그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고 돌아와서, 술에 취해 널브러진 자신을 보면서…또 손을 올리고 욕을 하는 자신을 보면서, 또…노름을 하러 가는 자신을 보면서…
비슷했을 것이다. 둘째 주 월요일마다 닫혀진 문 안을 훔쳐보듯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그래도…버리지 못해서…버릴 수가 없어서…돌아왔던 자신의 마음과…이게 사랑인지 미움인지 뒤섞여서 원망과 함께 검게 엉킨 그 마음과….돌이 킬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절망까지. 아마 비슷했을 것이다. 아니…더 참담했을지도 모르지.
정후는 얼음처럼 굳은 채 윤서가 성칠의 뺨을 올려 부치는 것을 넋을 놓고 지켜봤다.
“내가 말했지. 형 건드리지 말라고.”
“이 새끼가!!”
“아무것도 모르면서 헛소리 지껄이지 말고 빨리 내 눈앞에서 꺼져.”
“…………너…아직도 저 새끼가 좋은 거냐?”
성칠은 자신을 올려다 보며 독기를 내뿜는 윤서가 정말 어이가 없었다. 호기심이 어느새 진심 가까이에 간 모양이다. 성칠은 정후 앞을 막고 자신에게 대드는 윤서를 차마 내리칠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두 놈을 싸잡아 죽여버리고 싶은데, 온 몸이 밧줄로 칭칭 묶인 듯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가슴이 조금 욱씬 거리는 것도 같았다.
“병신. 씨발.”
“…………”
“아아악!!!”
성칠이 괴성을 지르면서 정후의 차 유리창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유리가 날카로운 소음을 내면서 산산조각 났다. 성칠의 손에 새빨간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상처 입은 손으로 성칠은 몇 번 을 더 주먹질을 했다. 몸에 난 상처보다 가슴에 난 상처가 더 아프다는 것을 성칠은 처음 알았다.
성칠이 가버리고 난 뒤에 마당은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처럼 엉망이었다. 윤서는 여전히 얼음인 정후의 손을 잡아 끌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윤서가 상처를 소독하고 연고를 바르고 반창고를 붙여줄 때까지도 정후는 아무 말이 없었다.
“…형은…나랑 있으면 못 볼꼴만 보네요. 정말…이게 뭐야…”
“……………”
“이제 오지 마요. 형.”
윤서의 말에 정후의 정신이 바짝 들었다. 그 동안 곤란해 하기는 했어도 오지 말라고 한적은 없었다. 정후가 다급하게 윤서의 손목을 잡았다.
“윤서야!”
“오지 마요. 형.”
“윤서야.”
“이게 뭐야…깡패한테 얻어 맞고. 안 들어도 될 욕이나 듣고. 이게 뭐야…”
“……윤서야!!”
“오지 마요. 형. 제발…”
“……………”
“잠을 못 잤어요. 떠나고도 한참 동안. 혹시나 형이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가지 못 할까봐. 내가 망친 그대로 머물까봐. 매일 매일 숨죽여가며 기도했어요. 형이 다시 날아오르게 해주세요. 제발. 전 이제 더 이상 욕심부리지 않을 테니 제발…형을 원래 자리로 돌려 놔 주세요.”
“그래서 돌아갔어. 너만 빼고 다 되찾았다고.”
“응. 그래서..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이젠 힘들게 찾은 그걸 지켜 야죠. 그러니까 그만 와요. 또 나쁜 소문이 나면 어떡해? 나 겁나요. 그러니까 제발 그만 와요.”
“난 그런 거 겁 안나. 소문? 나도 돼. 이제 그런 거에 겁먹지 않는다고. 내가 겁나는 건 널 이대로 영영 못 찾게 되는 거 뿐이야!!”
정후의 말에 윤서가 잡힌 팔을 크게 뿌리쳐 빼냈다.
“왜 그게 겁이 안나요? 추락하고 어땠는지 다 잊었어요? 나는 그게 겁나요!! 형이 또 나 때문에 다 잃게 될까 봐!! 내가 또 형을 망칠까봐!! 나 겁이 나 죽겠어요!! 형이 그때 날 어떻게 봤는 줄 알아요? 그때 내가 얼마나 괴로웠는지도 알아요? 그런데요!! 그런거 다 놔두구요…문제는…내가 또 욕심이 생긴다는 거에요.. 알아요? 내가 요즘 무슨 생각을 하는지? 형이 매주 올 때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윤서가 방안으로 들어가 이제껏 정후가 준 물건들을 모조리 가지고 나왔다. 정후가 준 선물뿐만 아니라 모르고 놓고 간 손수건, 라이터, 넥타이핀도 함께 있었다.
“ 이것들 보면서…어떻게 하면 형을 조금 더 오래 붙잡아 둘 수 있을까…나 형이 오기 전 일주일동안 매일 그것만 생각해요. 어떻게 하면 형이 눈치채지 못하게 붙잡아 둘 수 있을까. 나 그것만 생각 한다구요!! 나…이러다가 또 예전과 같아 질거에요. 또 예전처럼 형밖에 모를 테고, 형 밖엔 잃을게 없어질 테고…그러다가…또 형을 꽁꽁 묶어 두고 싶어질 거야…그렇게 될까 봐…무서워 죽겠어요. ”
“윤서야..”
“봤죠? 나 일해요. 서점에서. 꽤 재미있어요. 책 읽는 거 좋아한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그때는 좋아하는 게 형밖에 없었잖아. 나 친구도 생겼어요. 서점에 잘 오는 앤데요…그 아이랑 이야기 하는 것도 즐거워요. 나 영어도 배워요. 나…일주일에 두번…야학에 나가 외국인 노동자들한테 한글을 가르쳐 줘요. 나도…형 좋아하는 거 말고…할 수 있는 게 있더라구요.”
“………………”
“그래서…사실은 더 미치겠어. 잃을게 생기니까. 내가 형한테 빼앗았던 게 무엇인지 더 잘 알겠어서…나 정말 미치겠어요. 부탁이에요. 제발…그만 와요…날 위해서…그만 와줘요. 나도 좀 살게…평생 형 안 잊을 테니까. 잊지도 못할 테니까. 그러니까…”
윤서는 담기만 했던 감정들이 툭 터졌는지 아이처럼 엉엉 울기 시작했다. 정후는 윤서가 이렇게 우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발까지 동동 구르면서 엉엉, 윤서가 괴로워하는 게 손에 잡힐 듯이 선연했다.
이 상처는 내가 만든 것이다.
내 상처를 윤서가 만들었듯이.
그만 오라는 말은 제발 계속 와달라는 말처럼 들렸다. 그렇게 듣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냥 자신 때문에 아프다며 엉엉 우는 윤서가 너무 예뻐서, 미안하고 미안한데 그래도 예뻐서 정후는 저도 모르게 윤서의 머리를 감싸 쥐고 입을 맞췄다.
눈물에 젖어서 촉촉한 입술에 입술을 맞부딪혔다. 부드럽고 따뜻한 윤서의 체온에 정후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놀라서 버둥거리는 팔을 붙잡아 한 손에 모아 쥐었다. 남은 한 손으로는 허리를 당겨 안으며 정후는 윤서에게 파고 들었다. 열리지 않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리고 신음하는 틈을 타서 혀를 깊숙이 밀어 넣었다. 말캉말캉하고 도톰한 살점을 휘저으면 정후는 윤서의 체향에 점점 취하는 것 같았다.
“형…이러면….”
“…나도 문 안 잠궜어.”
“……………”
“누가 들어올지도 몰라. 네 친구든, 네 동료든, 널 아는 사람 아무나. 그때와 똑같지?”
입술을 맞대고 속삭이는 정후의 말에 윤서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벌을 주는 거라고 생각했는지 파득거리던 저항을 멈추고 몸에 힘을 쭉 빼는 윤서가 느껴졌다. 정후는 쓰게 웃으면서 윤서의 티셔츠를 벗겼다. 들어 나는 살결 마다 입술을 가져갔다. 수줍게 솟아 있는 분홍색 유두를 한 입에 머금고 쪽쪽 빨았다. 윤서의 마른 주먹에 파랗게 힘줄이 돋았다.
“눈 떠. 누군지 봐.”
“…………”
“벌 주는 거 아니야. 눈 떠.”
파르르 올라간 눈꺼풀에도 입을 맞췄다. 깊은 눈망울 안에 정후가 비췄다. 아주 오랫동안 보지 못한 자신의 모습이었다.
“하나만 묻자. 다른 거 다 치우고. 나 아직도 사랑하지?”
“………………”
다시 눈을 질끈 감아버리는 윤서의 모습에 정후의 손이 아래로 내려갔다. 그저 떨고만 있는 윤서가 가여웠지만 정후는 더 이상 오래 끌고 싶지 않았다.
“만약에 지금 누가 들어와서 네가 모든 것을 다 잃게 되면, 너도 나처럼 해. 3년간. 미친놈처럼 나한테 화풀이 해. 그리고 나서 우리 다시 돌아가는 거야. 그리고 또 만약에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다면 너 그래도 나처럼 해. 지난 시간 아팠던 만큼 나한테 갚고. 그리고 다시 돌아가는 거야. 그러니까…나 지금 너 안는다. 반항해도 돼. 상관하지 않을 테니까.”
정후는 윤서의 옷을 모조리 벗겼다. 정후의 더운 손이 구석구석 윤서를 매만졌다. 말라서 도드라져 보이는 쇄골과 갈빗대를 혀로 찬찬히 쓸고, 발끝부터 더듬어 올라갔다. 동그란 무릎을 감싸 쥐고 다리를 넓게 벌렸다. 그 사이로 자리 잡은 정후는 아직 발기하지 않은 윤서의 분신을 입안으로 머금었다.
“…….형!”
머리를 잡아 빼려는 윤서의 손짓을 무시하고 정후는 정성껏 윤서를 핥기 시작했다. 쾌감에 약한 몸은 여전했다. 온 몸이 발개진 윤서는 몸을 반쯤 뒤틀어 엎드린 채 흐느꼈다.
이제 완전히 서버린 윤서의 것을 앞 뒤로 쓰다듬으면서 정후의 손가락이 뒤쪽으로 향했다. 허리를 공중으로 반쯤 들게 하고 손가락으로만 느껴지는 주름을 따라 손톱을 세웠다. 그리고 하나. 오랜만에 열리는 문은 손가락 하나를 삼키고도 꽉 죄웠다. 정후는 서둘지 않고 주름이 충분히 펴질때까지 살살 돌리면서 빼냈다가 다시 집어 넣었다.
한결 촉촉해진 구멍은 이제 정후의 손가락 세개를 무리 없이 담고 있었다. 모든 진이 빠져 그저 널부러진 채 간헐적인 신음만 뱉고 있는 윤서를 정후가 일으켜 세웠다. 목에 팔을 두르게 하고 허리를 단단히 감은 채 정후는 윤서의 안으로 한번에 파고 들었다.
“흐윽….아아…아앗…앗…”
“…….흡…윤…윤서야..”
따뜻하게 감싸오는 윤서의 안은…전혀 변함이 없었다. 오랜 방황을 끝내고 돌아온 아늑한 집처럼, 여전히 그대로 였다. 정후는 한 품에 쏙 들어오는 여린 몸에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정후는 윤서의 안에서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정후를 넣은 충격이 가셨는지 윤서가 무작정 매달렸던 정후의 목에서 떨어져 정후를 마주 봤다. 눈물꼬리를 매달고 처연하게 말라붙은 윤서의 표정.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는데…
영원히 사랑하겠다고 했는데…
행복하고 싶었는데…
제발…늦었다고 하지마…
지금 내게 안기는 것이…허락이라고 해줘.
정후의 눈에서 길게 눈물 한 방울이 흘러 나왔다. 몸은 그대로 인데, 마음이 저만치 멀어져 있는 것 같았다. 윤서를 안으면서도 외롭다고 느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윤서가 없으면, 윤서의 마음이 없으면…다 가지고도 정후는 혼자였다.
울고 있는 정후를 윤서의 손이 살며시 감싸 안았다.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면서 조용히 윤서는 웃었다. 어쩔 수 없다는 체념이 그 웃음 안에 베어 있었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정후는 몰랐지만, 순간 윤서가 자신을 허락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윤서야!!”
정후는 성급하게 달려들었다. 윤서의 몸을 반으로 부술 듯이 격렬하게 움직였다. 하나하나 각인이라도 새겨놓듯이, 정후는 윤서의 몸에 모든 감정을 다 그려 넣었다.
새벽녘의 여명이 파르스름 하게 방안을 비추고 있었다.
깊게 잠이 든 정후의 머리를 매만지는 윤서의 손끝이 머뭇머뭇…그 손끝을 따라 조용히 눈물이 흘렀다.
“잘 잤어? 좋은 아침.”
잠에서 깨려는 듯 뒤척이던 윤서가 눈을 완전히 뜰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수십 번도 넘게 마음속으로 연습했던 인사를 하면서 정후의 목소리가 몰래 떨려 나왔다. 깊고 까만 눈동자 속에 이른 아침부터 자신의 모습을 확인 하면서 정후는…지금 행복 근처 까지 왔다고 생각했다.
“………잘 잤어요?”
“응!”
세수를 하는 윤서의 옆으로 비집고 들어가 같은 물에 얼굴을 씼었다. 나란히 서서 양치를 하고 윤서가 밥을 짓는 동안에도 졸졸, 정후는 윤서를 따랐다.
어린아이처럼 설레고, 늙은이 처럼 불안했다.
“형.”
“응.”
윤서의 부엌을 차지하고 커피를 끓였다. 거실 소파에서 기다리고 있는 조금 굳은 표정의 윤서를 곁눈질 하면서 슬 피어 오르는 불안감을, 억지로 잠재우려고 노력했다.
“불러 놓고 왜 말이 없어? 자. 커피.”
“…………”
“아이리쉬네. 향이 좋다. 윤서야?”
윤서는 잘근잘근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정후가 손가락을 윤서의 입에다 물리며 나직하게 윤서를 불렀다. 초조하면 입술이 너덜해질때까지 깨무는 것이 윤서의 버릇이었다.
“……서울 근처에 집을 마련할게. 이사는 집이 준비되는 대로 하고, 집 빌려준 그 화가라는 형한테는 나도 인사를 하고 싶은데. 윤서야?”
“……..형…난 여기 있을게요.”
“윤서야!!”
“형이 오고 싶을 때 언제든 편하게 와요. 생각이 날 때나, 혹시 내가 필요하면 언제든지. 난 여기 있을게요.”
“무슨 뜻이냐?”
“아무 약속도 하지 말고, 그냥 편하게. 형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도, 그때도 내가 생각나면 언제든지. 우리 그렇게 해요.”
“뭘 그렇게 하자는 거야!!”
정후의 목소리가 커졌다. 전혀 예상치 못한 윤서의 반응이었다.
숨겨진 정부라도 되어주겠다는 윤서의 말에 벌컥 화가 났다. 어떻게 생각하는 지 알면서. 그 동안 얼마나 돌고 돌아 왔는지 알면서. 그럼에도 함께 하고 싶은 열망도 알면서, 자신의 마음을 모조리 부정하는 윤서의 말이 서운하고 야속했다가…그것이 4년 전 자신이 하려던 일임을 깨닫고 정후는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게 제일 좋은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보니까, 그게 제일 좋은 방법이에요.”
“……………”
“어제 물었죠? 아직도 형 사랑하냐고…”
“………….”
“……난 한시도 형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어요. 내 사랑이 형한테 독임을 안 순간에도 난 바보같이 형을 사랑하는걸 멈출 수가 없었어요. 지금도 그래. 숨겨진 사람도 괜찮다고 생각할 만큼 형을 사랑해요.”
“…………어떻게 하면 믿어 줄래? 다시 너와 내가 행복해 질 수 있다는 걸. 내가 어떻게 하면 믿어 줄래?”
“형을 못 믿어서가 아니야. 그래서가 아니에요.”
그렇게 말하는 윤서의 눈은 달마저 뜨지 않은 깜깜한 밤과도 같아 보였다. 정후는 커피를 내려놓고 일어섰다.
“주말에 올게. 나오지 마. 너 두고 올라가는 거 확인할 때마다 속이 쓰리니까.”
어제 주지 못한 오르골을 현관에 두면서 정후는 지금 윤서와 자신이 이 오르골 속에 들어 있는 음악처럼 되돌이표 속에 갖혔다는 생각이 들었다. 끊임없이 울리지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서글픈.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개인 항공사도 괜찮습니다.”
“태풍으로 인한 악천후로 어디에도 서울행 비행기를 구할 수가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소송자료는 제가 메일로 보내 드릴 테니까 김비서님이 대표님께 전해 주십시오.”
“예. 근처 호텔을 예약해 놓겠습니다. 여기 일은 신경 쓰지 마시고 쉬다가 오세요.”
전화를 내려 놓으면서 정후는 얼굴을 문지르다가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일본에 출장을 왔다가 악천후에 발이 묶였다. 불안불안 하더라니.
“젠장!!!”
내일이면 윤서와 약속한 토요일이었다. 지금 예상으로는 일요일 밤 비행기도 뜰 수 있을지 장담 할 수 없었다.
집전화도 휴대전화도 없는 윤서에게 사정을 알릴만한 방법은 전무했다. 엄청나게 퍼붓는 밖의 비를 원망스레 쳐다보면서 정후는 또 무력감을 느껴야 했다.
지독히도 가지 않는 일분 일초를 억지로 버티고, 재운항이 된 서울행 첫 비행기를 타고 공항에 내리자 마자 택시를 잡아 타고 윤서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태풍의 여파로 아직도 남은 비가 쏟아 지고 있는 밤거리를 정후는 돈을 두배로 얹어주며 최고 속도를 주문했다.
윤서가 사는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 커다란 돌비석 밑에 우산을 쓰고 쪼그려 앉은 익숙한 인형이 보였다.
“아저씨. 여기서 세워 주십시오.”
세어보지도 않고 손에 잡히는 대로 택시비를 치르고 정후는 우산도 쓰지 않고 돌비석 아래로 달려갔다. 역시나…윤서였다.
“……윤서야…”
자신의 부름에 우산을 쓰고 있었음에도 비에 다 젖은 윤서가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 말라붙어 있었다.
“윤서야. 내가 출장을 갔…윤서야!”
오랫동안 쭈그리고 앉아 있었는지 일어서려던 윤서의 다리가 힘 없이 꺾이면서 축축한 바닥으로 푹 고꾸라졌다. 황급히 안아 드는 윤서의 몸은 뜨거운 열로 펄펄 끓었다.
“너.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던 거야? 열이…병원. 병원 가자.”
“놔요…놔!…놔요!!”
“윤서야!!”
“그러게 약속 같은 거 하지 말자고 그랬잖아요. 약속 같은 거 하지 말고 오라고. 그럼..난 기대도 하지 않을 테니까. 기대 하지 않으려고 노력할 테니까.”
“윤서야.”
“봐요. 날 봐. 난…형 스쳐가는 한 마디도 꼭 붙잡고 놓지를 않아요…난 여전히 그때…그 어리석었던 정윤서 그대로에요. 하나도 안 변했어…그러니까…이런 나를 내가 어떻게 믿어요?…이런 내가…형을! 당신을! 또 망치지 않을 거라고…나를 어떻게 믿어요…”
윤서는 정후의 손에 들고 있던 우산을 넘겨 주곤 빗속으로 휘청이며 걸어갔다. 정후는 그 우산을 내팽개치고 성큼성큼 걸어가서 비틀거리는 윤서를 획 돌려세웠다.
“망쳐봐. 망칠 수 있으면. 얼마든지 망쳐 보라고!!”
“…..놔요. 형.”
“이젠 너 때문에 내가 망가지는 일은 추호도 없을 거야. 그러기 위해서 나도 죽도록 노력할테고!”
“그런 노력…나 아니면 안 해도 되는 거잖아요. 좀 놔요!”
“아니. 그보다 더한 노력도 할거야. 널 내 옆에 두기 위해서 라면 더한 노력도 할 수 있어!! 눈 좀 떠! 언제까지 옛날에 사로잡혀 있을건데? 내가 괜찮다잖아! 내가 이제 괜찮다잖아!”
“내가 안 괜찮으니까!!!!”
윤서가 힘주어 정후를 뿌리치고는 그 반동에 못 이겨 땅바닥으로 또 쓰러졌다. 윤서는 일어날 생각도 하지 않고 정후도 일으켜 세워주지 않았다.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내가 안 괜찮아요. 형은 괜찮을지 몰라도 내가 안 괜찮아요. 맨날 이렇게 까만 밤 같아.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너무 까매서 무섭고 겁나. 내 눈먼 사랑이 무서워 죽겠다구요!!”
“나는 어떤데? 나는 속이 좋아서 이러는 줄 알아? 나도 그래! 나도 매일, 널 미워하던 그때의 내가 떠올라. 널 때리던 그때의 내가 떠오른다고. 널 두고 결혼하려고 했던 나도 있어. 널 잊어 볼 거라고 발악하던 나도. 그전에!! 작은 새인 널 움켜쥐고 나는 법을 잊게 만든 내가 생각나. 그때마다 내가 죽이고 싶을 정도로 싫어져선 아주 미치겠어!! 아니 그것보다!!! 그래서…네가 내가 싫어졌을까 봐…무섭고..겁이 나. 그런 내 맘도 알아?”
“…………”
“네가 전부야. 깨닫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그건 내가 평생 갚을게. 정윤서! 한정후한테는 네가 전부라고. 그러니까…제발..이제 그만 나를 가져.”
정후도 비가 흐르는 바닥위로 무너져 내렸다. 윤서에게 팔을 뻗어 꼭 껴안았다. 얇은 옷 안의 펄펄 끓는 체온이 느껴졌다.
“사랑해. 윤서야. 사랑한다고.”
“……………”
“깜깜한 밤은…언젠가는 지나. 알잖아. 밤이 지나면 곧…여명이 찬란한 새벽이 오고, 그 새벽이 지나면 눈 부신 아침이 시작돼. 그러니까…우리 밤에 갖혀 있지 말자. 약속 했잖아. 언제나 함께 아침을 맞이하자고. 응?”
“……………”
“내가 너에게 씌운 새장은…이미 사라졌어. 괜찮아…윤서야. 네 잘못이 아니야. 그러니까…제발..네 의지로 내게 머물러줘. 약속할게. 앞으로의 아침은…어제와는 다를 거야. 제발..윤서야.”
간절했다. 살면서 이토록 간절해 본 적이 없었다.
비는 너무나 차가웠고 자꾸 멀어지려는 윤서의 마음은 얼음보다 시렸다.
사랑한다면서 아껴주지 않은 자신과,
사랑한다면서 떠나려는 윤서가…이렇게 끝날 수는 없었다.
이렇게 끝을 내고 싶지 않았다.
빌고 빌어서, 애원하고 애원해서라도 다시…꿈을 꾸고 싶었다.
윤서와 함께 하는 내일.
오늘의 이 긴 밤을 지나서 윤서와 함께 맞는 아침.
그럴 수만 있다면 설령, 또 다시 윤서 외의 모든 것을 잃게 되더라도 괜찮을 것 같았다. 정후는 지금 이 순간, 자신에게 전부는 처음부터 윤서였다는 것을 절절히 깨닫고 있었다.
힘없이 축 늘어져 있던 윤서의 팔이 정후의 등을 타고 천천히 올라왔다. 그리고 윤서는 온 힘을 다해 정후를 끌어 안았다. 그 작은 움직임, 윤서에게는 죽도록 힘들었을 그 용기에 정후는 못난 과거의 자신이 구원 받은 것만 같았다.
“………그냥 사랑해도 되요? 이제?”
“……………”
“나 또…형 옆에 있어도 되요?”
아직 윤서는 그 기억 속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그건 앞으로 서로가 함께 헤쳐갈 숙제였다.
“………사랑해.”
“내 잘못이 이제 형한테 상처가 아니에요?”
“……다 나았어.”
자신의 대답에 윤서의 눈에서 빗물에 섞여 눈물이 흘렀다. 아무리 닦아도 멈추지 않았다. 그 눈물 속에 모질었던 지난날이 씼겨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정후는 기도했다.
“……형이 그리워서…죽는 줄 알았어요.”
“……나도.”
"형을 사랑해서...미안하고 싶지 않았어요. 이제..내 사랑이 형한테...미안하지 않아도 되요?"
"...........부디 그래주라."
윤서는 희미하게 웃으면서 정후의 품안에서 정신을 잃었다. 윤서가 꼭 잡은 자신의 옷자락이 타들어 갈 듯이 뜨거웠다.
시간이 흘러도 과거가 변하지는 않는다. 과거는 과거로 영원히 존재할 것이고 그 안에서 얻은 기억과 상처는 서로 맞물려 가끔 현재를 덮칠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 지난 과거에 지금 살고 있는 현재가 잠식당하지 않게 하는 것.
자신이 오랫동안 아파야 했던 건 이 가장 기본적이고 단순한 명제를 잊어서 였다고 정후는 윤서를 품에 안고 생각했다.
길고 길었던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까맣고 어두웠던 건 비단 윤서뿐만이 아니었으리라.
과욕과 야망에 눈멀어 아침이 지나는 지도 몰랐던 자신 역시 깜깜한 밤에 살고 있었다.
아직 태양은 완전히 떠오르지 않았다.
밤은 지났어도 찬란한 아침이 오기까지, 그 남은 시간을 또 인내해야 할 것이다.
그 시간동안 아프고 괴로웠던 상처가 또 피를 쏟아 내고, 서로를 다치게 하려고 혀를 벌름거릴지도 모른다.
그때마다 오늘을 기억할 것이다. 내 품에 안긴 열에 들 뜬 작은 윤서를. 잃어버린 뒤에야 깨닫게 된 삶의 이유를.
아침을 기다리는 시린 새벽녘, 정후는 윤서가 눈을 뜨면 하고픈 인사를 설레이는 마음으로 되 뇌였다.
“안녕. 윤서야…좋은 아침.”
...................................................................................................................................................
정후야...넌 너무 어려워. 조금 미안.
하.하.하.(<<궁색한 웃음소리)
안녕하세요~바사라입니다^^
1부 내어놓고...많은 관심과 응원에 너무 행복했습니다.
기다림에 대한 대가를 치르기엔 한참 부족한 글이 될 듯 하여, 시린 새벽을 내어놓기가 조금 저어됩니다.(ㅠ.ㅠ) 부디...애정(?)으로 읽어주시기를...간절히 소망해 봅니다. 앙♡
사족. 주신 늦은밤 감상에 대한 답글을 모두 달았습니다. 본의 아니게 늦어진 분에 대해서는 송구한 말씀 전합니다.
사족 2. 윤서가 사는 곳이 익숙하지 않으신가요?(쿨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