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중퇴마비록-154화 (154/166)

“예. 이번 신입생도 중 가장 성적이 좋은 녀석입니다.”

“나이가 몇이지?”

“열다섯, 아니 열여섯이었나. 아무튼 그 정도라고 하던걸요.”

“그래 봤자 아직 어린놈이… 올해도 다 못 버티고 제 발로 그만두고 나갈 거다.”

창을 들고 보초를 서고 있던 두 병사가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열을 맞춰 훈련하는 생도들을 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생도들의 나이와 체구는 각기 달랐지만 그중에서 이도보다 더 어린 이는 없었다. 그러나 이도는 그중 누구보다도 눈에 띄는 생도였다. 그만한 나이에 군관 입학시험을 합격하고 입궁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지만, 이도는 무관뿐 아니라 문관으로서의 소질도 겸비하고 있었기에 그를 주목하는 눈길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게다가 열다섯 소년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이도는 어엿한 장정으로서 한 사람 몫의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그런데, 저렇게 눈에 띄는 인재면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지는 않았을 테고. 어느 집안 자제길래 그동안 두문불출했대?”

“글쎄요, 들리는 말로는 출신 집안은 문태국 영의정 댁이라고는 하는데…”

“뭐, 문태국? 그 양반 집 아들이야? 허허, 이거 아주 큰 놈이 하나 들어왔구만.”

“그런데 뭔가 켕기는 게 있는지… 아들이나 조카는 아니라고 합니다. 듣기로는 친척도 아닌 모양인데…”

“그러면 뭐야, 서자라는 건가? 문태국 그 양반은 첩 없기로 유명하지 않나.”

“그것이 조금 복잡한데… 그 왜, 그 집안 막내 조카딸 있지 않습니까? 그 딸과 막역한 친우 지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문태국 나으리께서 자신의 후계자로 키우기 위해 양자로 들였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어이, 거기 뭣들 쑥덕거리고 있는 게야?!”

문 앞에 보초를 서고 있던 병사 둘은 등 뒤에서 떨어지는 불호령에 화들짝 놀라 제자리로 돌아갔다. 부리부리한 눈을 치켜뜨고 부하 병사들이 제대로 일하는지 한 번 둘러보던 대장이 다시 사라지자, 병사들은 참았던 숨을 내쉬고는 훈련 중인 생도들을 흘깃흘깃 구경했다.

세월은 쉼 없이 흘러 이도가 열일곱이 되던 해였다.

이도는 지난 해 성균관에 들어간 후 대과 시험을 앞두고 있었다. 유생으로서는 최연소의 나이로 입학한 셈이었는데, 동료 유생들은 이도가 상상하던 것보다 덜 교양 있었고, 더 멍청한 작자들이 많았다. 그중 뜻이 통하는 몇몇과 어울리기도 했으나 모두 이도의 앞에서는 그에게 친근하게 굴다가도 뒤돌아서면 그의 트집을 잡으며 헐뜯기 위해 혈안이 되는 족속들이었다.

이도는 기본적으로 인간들에게 큰 관심이 없었다. 특히 한양에 올라오고부터는 더더욱. 공부와 훈련에 매진했고 언제나 이도에게는 배워야 할 것들만 잔뜩 있었다. 하나를 깨우치면 열이 눈앞에 다가와 제 머리를 들이댔고, 소위 ‘잘 나가는 집안’의 자제들은 대체 언제부터 그런 것들을 배운 건지 모르는 게 없었다. 어려서부터 미리 벼슬을 하기 위해 키워진 자들과 뒷산에서 나무를 해다 팔며 간신히 동네 서당에서 글을 뗀 이도 사이에는 가늠할 수 없을 만큼의 차이가 존재했다. 그걸 2년 안에 좁히기 위해 이도는 코피를 쏟으며 공부를 하고 책을 읽었다. 그 유명한 문태국 집안을 등에 업은 주제에 뭘 그리 열심히 하냐며 빈정대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도는 그 어르신이 자신에게 거는 기대감을 모르지 않았다. 적어도 저런 녀석들과 어울리라고 자신을 입히고 가르치고 훈련시킨 게 아니라는 것쯤은 확실히 알았다. 등잔불을 켜고 밤새 책을 읽다가 눈앞이 갑자기 새하얗게 변해 당황했을 때도, 머리가 띵해지고 시도 때도 없이 코피를 쏟을 때도, 이도는 악바리처럼 자리를 지키며 계속해서 공부를 했다.

그러는 것만이 자신에게 주어진 유일한 기회를 잡는 방법이었으니까.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일상에도 언제나 끝은 오듯이, 대과의 초시에 합격하고 나서 이도는 열흘 동안의 여유가 생겼다. 시험에 떨어진 동기들 중에는 집안의 여유와 자신의 힘이 닿는 대로 다시 성균관에 박혀 공부를 하는 녀석들도 있었고, 그간의 고된 공부와 일정을 소화하는데 지쳐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짐을 싸는 녀석들도 있었다. 초시 합격자 명단 제일 위쪽에 적힌 자신의 이름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이도는 그중 어느 쪽도 아니었다.

다음 복시까지는 열흘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아직도 소식이 없으신가?”

“예… 소인이 아침에도 식사를 여쭈었는데, 괜찮으니 들어오지 말라는 대답만 하셨습니다.”

이도는 설핏 인상을 찡그리며 굳게 닫힌 영신의 방문을 쳐다보았다. 비록 얇은 창호지와 나무로 만들어진 문이니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부숴서라도 들어갈 수 있을 테다. 그러나 영신은 절대 그 누구도, 그게 아무리 이도나, 심지어 태국이 오더라도 자신을 방해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은 상태였다. 그러기를 벌써 사흘이 지나고 있었다.

“아무리 아씨 혼자… 삼일제라는 걸 지내기 위해서라지만 저렇게 방에서 아무것도 안 드시고 틀어박혀있다간 무슨 사달이 나고 말 겁니다. 도련님이 어떻게든 설득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도는 오늘 아침 막 궁에서 돌아온 참이었다. 어제 초시의 합격자 명단이 성균관 대문에 나붙은 후였다. 어찌 소식을 들은 건지 그날 오후 집안에서 보낸 심부름꾼 하나가 서찰을 들고 이도가 기거하는 방까지 찾아온 것이다. 태국 어르신이 보냈나? 영신 아씨가 보냈습니다. 꿈에서나 듣던 이름을 들은 순간 이도는 잠시 몸을 굳히고 그를 쳐다보았다. 심부름꾼은 들고 온 서찰과 봇짐을 이도의 방에 풀어놓고는 이도에게 삯을 받은 뒤 곧장 돌아갔다.

편지의 내용은 간단했다.

이도에게,

초시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단다. 그동안 네가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한 것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두루 기쁨을 감출 수 없구나.

마음만으로는 전해지지 않으니 오랜만에 집에 돌아와 회포를 풀고 어르신께 인사도 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아. 특히 네가 성균관에 입학한 후 큰아버지가 많이 적적해하셔. 엄하시긴 하지만, 그래도 너를 누구보다도 아들처럼 여기시는 분 아니니.

물론 나도 오랜만에 너를 보고 싶어. 궁으로 들어간 이후 거의 얼굴을 보질 못했으니.

아마 이 편지를 읽게 될 때는 내가 좀 바쁠 거란다.

하지만 네가 집에 도착할 때쯤에는 끝나있을 거야. 그러니 너무 걱정은 말고.

영신이.

짤막한 편지를 몇 번이나 다시 읽어보던 이도는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이 편지를 전한 심부름꾼은 분명 영신과 이도가 살던 문태국의 집에서부터 궁까지 온 것일 테다. 그러면 걸음으로 어림잡아 하루 종일은 걸릴 거리였고, 게다가 영신이 편지를 쓰고 이도를 위한 여벌의 옷과 봇짐을 챙겨 보낸 것이라면 적어도 그 전날에 모든 것을 준비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편지는 오늘로부터 이틀 전에 적힌 것이어야 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이도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도의 초시 합격 발표는 바로 오늘 아침이었다.

…영신은 사흘 전에 어떻게, 미리 이도의 합격 소식을 들었다는 말인가.

여기서 한 가지 그나마 가능한 현실적인 가설은 그녀의 큰아버지이자 이도의 양부인 문태국일 것인데, 문태국은 궁에서 왕 다음으로 손꼽히는 권력을 쥔 자이니 초시의 합격생 정도야 미리 알 수는 있을 것이다. 그로서는 하지 않을 행동이지만 시험 채점자를 매수해 누가 합격자인지 알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문태국은 그럴 남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혹시라도 자신의 입김이 조금이라도 이도에게 영향이 있을 것을 염려해 그는 궁 안에서 이도를 마주쳐도 눈길 한 번도 준 적이 없었다. 하늘 아래 비밀은 없으므로 암암리에 이도가 문태국 집안의 자제라는 것은 여기저기 퍼진 사실이기는 했으나, 그의 싸늘한 태도와 이도의 데면데면한 반응 덕에 아무도 문태국이 이도를 직접 양자로 들였다는 사실까지는 알 수 없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영신이 편지를 쓴 것은 최소 이틀 전이며, 그때까지는 아직 초시를 치른 학생들의 답지가 채점이 되어 있지도 않을 때였다. 그래, 정말이지 당연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이틀 전이 바로, 이도가 초시를 치른 그날이었으므로.

이도는 한참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조용히 고개를 주억거리며 편지를 잘 접어 품 안에 넣었다.

이도와 영신에게는 서로만이 공유하는 한 가지 비밀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 비밀의 영신 혼자만의 것이며, 이도는 그것을 알고도 묵인하는 이였지만.

이도는 혼자 골똘히 생각하다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이번에도 역시나 그녀의 그 비밀에 기인한 것이리라.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지만, 언제나 영신에게는 그런 일들이 흔히 일어났다.

“사흘째 밥도 안 드시고, 저러다 정말 쓰러지십니다!”

발을 동동대는 하인을 진정시킨 뒤 이도는 사람들을 모두 물렸다. 물러가면서도 걱정스러운 얼굴로 계속 뒤를 돌아보는 어린 하인 아이에게 작게 웃어 보인 이도는, 영신이 기거하는 안채 주변에 모두가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천천히 문으로 다가갔다. 분명 하인들의 말로는 영신 아씨가 안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열어주지도 않은 채 틀어박혔다고 했다. 그러나 문고리는 어이없을 만큼 쉽게 열렸다. 손을 갖다 대기만 했는데도 마치 기다렸다는 듯 끼이익 열리는 문을 보며 이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문을 열고 들어가도 될지.

…이번에는…

허나 이도는 망설임 없이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안쪽에서 훅, 하고 큰 바람이 불어오듯 그 기세에 떠밀려 문이 벌컥 열리고, 그 미적지근한 바람은 이도의 드러난 이마를 한바탕 쓸고 지나갔다.

영신은 방 한가운데에 서서, 문을 등지고 있었다.

마치 목각인형이 그러하듯 영신은 뻣뻣하게 고개와 등을 펴고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좌우에서 누군가가 그녀의 팔을 잡아당기는 것처럼 영신은 양 팔을 넓게 벌린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녀의 왼쪽 손에는 작은 지푸라기로 만든 인형과, 오른손에는 싸리나무 가지를 꺾어 만든 회초리가 하나 쥐어져 있었다.

이도가 문을 열자 덥고 큰 바람이 훅 빠져나가고, 마치 누군가 위에서 줄을 자르기라도 한 것처럼 영신은 털썩 그 자리에 쓰러졌다. 이도가 재빨리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은 뒤 쓰러진 영신을 안아 들고 이마를 짚어보았다. 열이 펄펄 끓고 있었다. 반쯤 감긴 영신의 눈이 이도를 알아보고 조금 또렷해진 듯도 했다.

“…오랜, 만이구나.”

이도에게만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영신이 간신히 중얼거리자 이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영신을 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신은 올해 스무 살이 되었지만, 여전히 어릴 적의 그 산골 소녀처럼 몸피가 작고 가벼웠다. 너무 힘을 주어 꽉 쥐어서도 안 될 것만 같은 기분이어서, 이도는 최대한 살살 그녀의 몸을 잡으려고 노력했다.

“…이번에는 어디 사는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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