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중퇴마비록-122화 (122/166)

122화

임진희가 죽은 후 정확히 3년이 지났을 때였다.

그녀가 명을 달리하자마자 수많은 관계 인사들이 그녀들의 집에 몰려들었지만 몇 달이 지나자 그런 인파들은 확실히 줄어들었다. 무엇보다도 차기 가주의 자리를 물려받은 재희가 외부와의 접촉을 엄격히 금지했기에 그들의 저택 근처에 얼씬거리는 사람들은 모두 덩치가 크고 선글라스를 낀, 사람보다는 곰이나 짐승에 더 가까운 체격을 가진 수행원들에 이끌려 쫓겨나기 일쑤였다. 미희는 엄마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보다 새로운 가주를 보필하기 위해 다시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혹자는 임진희가 그토록 자신을 도운 큰 딸을 놔두고, 나이가 찬 손녀들도 아닌 새파랗게 어린 손자에게 그 모든 재산과 자리를 넘겼다는 것을 두고 한참 동안이나 시시비비를 가리길 원했으나, 곧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재희를 보고 모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임진희와 일했던 파트너들은 모두 그녀를 대체할 만한 인물이 대체 어디 있느냐며 불평하다가도, 재희를 마주하고 나면 다들 멍한 얼굴로 납득하며 집을 나서곤 했다. 소년은 이미 소년의 티를 벗은 지 오래였다. 아직 스무 살도 되지 않은 나이였지만 재희는 모든 일을 완벽하게 물려받아 착착 해내기 시작했다. 마치 예전부터 그 자리가 재희를 위해 있었던 것처럼. 그리고 그가 그것을 기다리기라도 했던 것처럼.

“임재희… 그래, 이제는 임 사장이라고 해야겠지. 에잉, 아직도 입에 호칭이 잘 안 붙는구만.”

“겉모습은 아직 꼬맹이지만 말이야, 그 눈이, 나는 딱 보자마자 알았지. 아, 진희 누님의 핏줄이구나. 명백하게 그 눈은 진희 누님의 눈이었어. 나는 알 수 있었다고!”

“임 사장님이라면… 아, 지금 분 말씀하시는구나. 아무래도 처음에는 못 미더웠죠. 전 임 사장님이 타계하시고 장례식까지 다녀왔는데, 그 장례에서도 아무도 모습을 못 봤으니까. 듣기로는 집 안에서만 엄청 애지중지 키워졌다는데. 그 가족들이나 집에서 일하는 분들 빼고는 그 집에 아들이 있다는 것도 몰랐을걸요?”

“이상한 일이지. 그 양반 살아계실 적에, 그렇게 슬하에 아들은 절대 안 둔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셔서, 자식들도 다 딸뿐이잖아. 손주들도 전부 딸들이고…듣기로는 혹시 당신 사생아가 아닌가 하는 소문도… 어머, 내 입 좀 봐. 못 들은 걸로 해 줘요, 응?”

“뭔가 찜찜한 구석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로서는 뭐… 일만 잘 해주면 상관없지. 게다가 그 소년, 전 임 사장보다 더 비상한 능력이 있다고 하던데.”

재희는 그렇게 소문을 먹고 자랐다. 소문과 그에 따라붙는 온갖 호기심과 추궁, 질투, 의심들이 언제나 재희의 이름과 대등한 자리에서 우글거리곤 했으나, 재희는 그런 것들에 전혀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가문의 입지를 더 강하게 다지고, 더욱더 큰 사업을 일구는 것뿐이었다. 가끔씩, 정말로 아주 가끔씩 그가 맨발의 잠옷 차림으로 비 오는 날 새벽에 저택 뒷마당을 하염없이 떠돈다는 것을 그 집안의 고용인들이라면 다 아는 일이었지만, 그들도 모두 침묵했다. 전 고용주인 진희에 비해 재희는 더 융통성 있고 여유로운 부분이 있었지만 막상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면 조용히 짐을 싸서 문밖에 미리 내놓는 사람이었다. 기회가 또다시 주어지는 일은 없었다. 그것은 명백히 진희와는 다른 점이었다. 진희는 언제나 화를 잘 내고 이유 없이 신경질을 부리기도 했지만, 적어도 고용인들을 자신의 가족의 일부라고 여겼다. 그러므로 큰 실수를 저질러도 밥줄이 잘리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재희는 다른 사람이었다. 모두 그것을 잘 알았기에 뭣 모르고 눈치 없이 구는 메이드 몇 명과 운전기사가 쫓겨난 후에야 집안은 다시 재희를 위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재희는 여전히 비가 내리는 밤이면 맨발로 뒷마당을 떠돌다 발견되곤 했다. 그리고 그가 항상 서 있던 곳은, 지금은 이미 베어버린, 옛날에 그 집안 딸들 중 하나가 목을 매 죽은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던 곳이었다.

재희가 가주의 자리에 오르고 나서 스무 살이 되자마자 집안에는 다시 한번 역풍이 몰아닥쳤다. 아니, 피 바람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진희의 큰 장손녀였던 서희는 어느 날 갑자기 공포에 질려 식음을 전폐하고 방에 틀어박혔다. 그리고 꼭 사흘 만에 피를 토하고 죽었다. 원래도 몸이 약하고 자주 각혈을 하던 서희였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마치 약을 먹고 죽은 쥐처럼 서희는 마른 몸을 웅크리고, 그 몸보다 더 많은 양의 피 웅덩이 위에 누워 죽어있었다. 서희의 쌍둥이 동생인 예희도 서희가 죽고 나서 일주일 후 교통사고로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1톤 트럭의 브레이크가 고장 나 횡단보도를 건너던 서희는 피할 새도 없이 그 자리에서 생을 마감했다. 두 딸을 잃게 된 미희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조카딸 도희와 어머니를 잃고도, 몇 년 동안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며 저택의 안주인 노릇과 가주인 재희의 뒷바라지를 하던 미희는 아예 넋이 나가버렸다. 그녀가 돌보던 다른 조카딸들도 마찬가지였다. 연희, 주희, 세희… 모두 미희의 동생들이 남기고 떠난 자식들이었다. 그야말로 고작 한 해 동안 임씨 가문의 씨가 마른 것이다. 물론 늙고 미쳐버린 미희와 이제 성인이 된 재희가 남아있었지만.

마치 집안에 전염병이라도 도는 것 같다고, 그 무렵 고용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김 실장은 생각했었다. 그러나 전염병은 약이나 백신이라도 만들 수 있고, 걸린다고 해서 바로 죽는 것은 아니지만, 임씨 가문에 도는 병은 달랐다. 그것은 운명이라는 병이었다. 속세에서는 그것을 두고 업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들은 모두 비슷한 시기에 마치 누군가가 그렇게 정하기라도 한 것처럼 죽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전염병이었고, 그들의 핏줄에 흐르는 바이러스였으며, 걸리는 즉시 끔찍하고도 아주 우연적으로 죽어버리는 것이었다.

집안의 고용인들은 이 무시무시한 일들에 대해 전부 함구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괴이하고 공포스러운 일이었지만 그들은 자신의 주인이 누구인지 잘 알았다. 그러므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죽은, 그나마 남은 누이 중 가장 어렸던 세희의 시신을 관에 넣고 나서 재희는 미희를 자신의 서재로 불러들였다. 사람들은 미희가 정신이 나가버렸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완전히 미친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재희는 자신의 큰 이모이자 남은 친척인 미희와 오래도록 대화를 나누었지만 집 안의 그 누구도 그들의 대화를 엿들을 수 없었다. 모두 궁금해하기는 했지만 짐짓 모른척하고 자신이 맡은 집안일을 바삐 해치울 뿐이었다. 거실에 놓인 오래된 괘종시계가 두 번 울리고 나서야 서재의 문이 스르르 열렸고, 창백한 얼굴의 미희가 유령같이 빠져나와 2층 방으로 올라간 것을 제일 늦게 잠든 하녀 하나가 보았다고만 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미희는 산을 오르다가 발을 헛디뎌 뇌진탕으로 사망한다.

해강은 멍하니 재희가 하는 것들을 지켜보았다. 재희가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들려준 이야기들도, 그의 흰 손이 촛불의 불빛과 어둠 사이에서 일렁거리는 것도, 거대한 빌딩 밑에 단출하게 숨겨진 여러 개의 관들도, 전부 꿈결 같은 순간이었다. 그래, 어쩌면 정말 아직 꿈에서 깨지 못한 걸지도. 나는 지금 아침에 늦잠을 자고 있고, 눈을 뜨면 뒷마당에서 새들이 울고, 아침도 거른 채 지각할까 봐 가방을 들고 학교로 뛰어가는 거야. 친구들도 그대로, 학교도 그대로, 내 책상도 그대로 있을 거야. 시티 스타디움에서 있었던 테러 사건도, 그곳에서 크게 부상당하고 죽은 사람들도, 전부 없던 일이고, 나는, 나는 지금…

“…내가 너를 데려온 이유를 궁금해했지.”

재희는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질문도 대답도 아닌 말을 던졌다. 해강은 여전히 얼이 빠져 굳어있었다. 먼지가 얕게 쌓인 관 위를 쓰다듬으며 재희는 작게 말했다. 그는 언제나, 언성을 높이는 법이 없었다. 절대로.

“내 사촌 누이들과, 미희 이모, 그리고 할머니인 임진희까지. 나는 그들의 죽음을 모두 예견했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들어맞더군. 유일하게 한 명의 죽음은 예견하지 못했지만… 그건 제쳐두고, 점점 내 능력이 확실해질 때마다 나는 문득 궁금했다. 나는 어디까지 알 수 있는 걸까. 그리고 언제까지? 할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필요가 없어지면… 대가를 치러야 하는 날이 오는 걸까? 그리고 그다음에는? 이 피가, 언제까지 흐를 수 있는 걸까.”

“….”

“그리고 어느 날 깨달았지. 내 능력이, 나에게 주어진 운명이 점점, 나와 핏줄로 이어진 이들이 하나둘씩 죽어갈 때마다 강해진다는 것을. 할머니가 죽고 나서도, 누이들이 차례차례 죽어나갈 때도, 내가 볼 수 있는 범위는 그만큼 정확하고, 넓어지더군.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미희 이모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탁한 거야.”

나를 위해서 죽어달라고.

재희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해강은 한 순간에 이해했다. 그렇게 이어져온 임씨 가문의 불행들이, 잇달아 죽어나간 재희의 사촌 누이들이, 그리고 자신의 입양까지도. 왜 그래야 했는지,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따위를 물을 수는 없었다. 해강은 무력했다. 모든 면에서, 그 동안 그래왔고 여전히 그랬다. 아마 앞으로도 임재희라는 남자의 앞에서는 그럴 것이다.

모든 것은 재희의 뜻대로 움직인다.

그것은 재희와 피가 이어진 이상 거스를 수 없는 일종의 저주와도 같았다.

임진희가 평생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했던 운명, 그리고 그 업보. 그녀들을 집어삼키고 그녀들의 피를 마시며 몸집을 불린 어둠은 멀리 있지 않았다.

모든 것은 임진희가 임재희를 거둔 날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이제, 재희에게 남은 유일한 핏줄은 해강뿐이었다.

한 가지 여러분이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다면, 임재희는 그 누구도 죽인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물론 직접적으로.

재희는 미희가 가장 두려워하던 것을 알려주었고, 미희가 죽은 것은 순전히 그녀의 운명에 따른 결과였다. 사람을 시켜 그녀에게 독약을 먹이지도, 거대한 트럭으로 그녀를 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미희는 자신의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려던 순간 죽음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모두 재희가 바라던,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재희가 ‘본’대로 되었다.

임재희는 누구도 죽이지 않았다.

그것은 해강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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