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여보세요, 주해강?
“영서야! 다행이다. 있지, 우리가 지금 산에 올라가다가 갑자기 비가 쏟아져서…”
전화기 너머로 타고 흘러나오는 영서의 목소리에, 해강은 안심하며 지금까지 일어난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중간중간 그래? 정말? 정도의 대답을 해가며 열심히 해강의 말을 경청하던 영서가, 잠시 고민하는 듯 뜸을 들이더니 대답했다.
“그래서, 아무래도 영서 네가 와줘야 할 것 같아.”
-아무래도 그러는 게 낫겠네. 그런데 주민이는 괜찮아?
“주민이? 아아, 지금은 자고 있는 것 같은데… 아직 호흡은 잘 하고 있어. 하지만 석규 형 말로는 오래 시간 끌어서 좋을 거 없다고, 되도록 빨리…”
-그래, 그렇지. 알겠어, 위치가 정확히 어디라고?
“그러니까…”
석규가 일러준 대로 해강은 산장 벽에 걸려있던 지도 속에 표시된, 그들이 몸을 피한 산장의 번호와 근처 지형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었다. 확실히 그의 말대로 정혜사가 위치한 산의 곳곳에는 규칙적인 일련번호를 가진 산장들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이곳일 것이다. 영서의 알겠다는 짤막한 대답 후 전화는 끊어졌고, 해강은 한결 안심한 얼굴로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았다.
“…해강아, 좀… 이상한 거 같은데.”
“네? 뭐가요?”
흔들의자에 앉아 이레를 품에 안고 진정시키던 석규가, 해강이 전화를 끊자 미묘한 표정으로 그를 건너다보았다. 이레는 여전히 머리털이 삐죽 설 만큼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몸을 떨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튀어나갈 것 같이 살벌하던 아까 전보다는 조금 덜한 모양이었으나, 여전히 석규가 진정시키고 있음에도 몸을 웅크리고 불안한 눈으로 주변을 노려보고 있었다. 저 애가 갑자기 왜 저럴까, 해강은 어두워진 석규의 표정에 차마 이레의 상태에 대해 물어볼 수가 없었다. 왠지 물으면 안 될 것 같은 예감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그… 방금, 영서랑 전화한 거 맞지?”
“네. 그런데 왜요?”
“…네가 얘기하는 거 쭉 들어봤는데, 주민이 얘기, 안 하지 않았니?”
“…네?”
해강이 얼이 빠진 듯 되묻자, 석규가 뭔가 찜찜하다는 듯 입술을 깨물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물었다.
“네가 한 얘기 중에, 주민이의 상태가 이상해졌다거나, 그놈한테 혼이 뺏겼다거나 하는 얘기는 안 했어. 너는 우리가 산에 올라오다가 비를 만나서 이곳으로 피신 오게 됐고, 두식이 형이나 여 사장님, 하나 누나들이 그놈을 잡으러 나갔다고만 했잖아. 남은 사람끼리 산장에서 숨어 있기로 했다, 고 얘기 했잖아. 그런데… 영서가 주민이에 대해서 물었니? 왜?”
“왜, 라뇨… 그건… 당연히 주민이가 걱정되니까… 영서는…”
해강은 당황한 듯 작게 중얼거리다가, 이내 황망한 눈으로 석규를 응시했다. 석규 또한 당황스럽지만 진지한 눈으로 해강을 마주보았다. 둘은 잠시 그렇게 말없이 있었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석규였다.
“…해강아, 그 목소리… 영서가 맞았니?”
아닐 리가 없었다. 분명 확신했다. 해강은, 그동안 들어온 영서의 목소리를, 그래, 다른 사람도 아닌 그 애의 목소리를 내가 잘못 들을 리가…
어라?
영서가, 맞았던가?
…방금 나와 전화를 한 사람은 누구지?
해강은 재빨리 휴대폰을 들어 통화기록을 확인했다. 분명 조금 전까지 전파가 잡히는 것을 보고, 안도하며 영서의 번호를 찾아서, 영서의 이름을 확인하고… 그 애랑 통화를…
-통화권 이탈
“…잠시만요, 분명… 아까까지는 신호가 잡혔는데. 다시 해 볼게요.”
뚜르르…
뚜르르…
‘전화를 받지 않아 소리 샘으로 연결되며…’
“…이…이건…”
해강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통화 기록에는 분명, 영서와의 통화 기록이 있어야 할 터.
그러나 발신 기록에는, 알 수 없는 번호가 아무렇게나 찍혀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다시 그 번호를 눌러 통화를 걸었을 때는, 없는 번호이니 다시 확인하고 걸어달라는 기계음만 들려올 뿐이었다.
해강의 손에서, 휴대폰이 떨어졌다.
***
“…어라?”
“왜 그러니?”
“아, 해강이한테 전화가 왔어요. 잠깐 받아볼게요.”
“전화가? 이상하네, 산속에서는 전화가 안 터질 텐데.”
“여보세요? 해강아? 거긴 좀 어때? 괜찮아? 별일 없지?”
영숙과 대화를 나누던 중, 영서는 바지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이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발신인을 확인하자 용케도 전화가 닿았는지 해강의 이름이 떠 있었다. 안 그래도 비가 쏟아져서 걱정하던 참인데, 다들 어디서 뭐하고 있는 거람. 영서는 잔뜩 잔소리라도 해 줄 요량으로 전화를 받았으나, 의외로 상대편에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주해강! 말 좀 해 봐, 뭐야?”
“전파가 안 터진다니까. 아마 걸리긴 해도 목소리는 안 들릴 게야. 문자로 보내보는 건 어떠니?”
“그럴까요? 그럼… 어? 뭐라고?”
영숙이 걱정스럽게 거들자, 영서는 휴대폰이 먹통이 된 게 아닌지 앞뒤로 살펴보며 다시 귀에 갖다 대다가, 문자를 보내려 전화를 끊으려던 참이었다. 귀에서 휴대폰을 떼려던 순간, 아무 말도 하지 않던 해강이 입을 열었다.
-……였어.
“어? 뭐라고? 잠시만, 문자로 말하자, 잘 안 들려.”
-내가……산……여……범……다.
“…뭐라는 거야…야, 크게 말해봐! 뭐?”
-…산……
전화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해강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영서는 단순히 비가 많이 오니까, 날씨가 좋지 않아 생긴 통신의 혼선 때문일 것이라 생각하고 몇 번이나 대답을 재촉했다. 무슨 소리야? 뭐라고? 답답해하는 영서를 가만히 지켜보던 영숙은, 순간 스치고 떠나간 생각에 허리를 펴고 영서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확히는, 지직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오는 영서의 휴대폰을.
“뭐? 산…? 범이 뭐?”
-……킥킥.
뚜-
갑작스레 끊어진 전화에, 영서는 이마를 찡그리며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뭐야, 분명 주해강이 맞는데? 무어라고 중얼거리는 듯한 소리가 치직거리는 잡음에 섞여 띄엄띄엄 들릴 뿐인지라, 영서는 어떻게든 그 말을 들어보려 노력했지만 전화는 이미 끊긴 후였다. 게다가 들릴 듯 말 듯 한, 누군가 입을 다물고 웃음을 참는 듯한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말이다.
대체 뭐지?
입술을 삐죽 내밀며 해강의 번호로 다시 발신을 누르려고 하는 순간, 영숙의 손이 그를 저지했다. 영서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자, 영숙이 엄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다시 걸어선 안 된다.”
“예? 하지만…”
“…방금 그 전화, 네 친구가 아니야.”
영서는 의아한 얼굴로 영숙을 쳐다보았다. 친구가 아니라니, 무슨 말인가. 영서는 제 고모할머니가 마치 때아닌 장난이라도 치는 양, 어물쩍 웃으며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할머니, 무슨 소리세요. 아마 비가 와서 통신이 끊기나 봐요. 아무래도 데리러 가야…”
“가면 안 돼!”
엄한 불호령에 영서가 찔끔 놀라자, 영숙은 굳은 얼굴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뒷짐을 진 채 일어난 그녀는 누가 뺏어가기라도 할 것처럼 조용히 편지와 사진을 갈무리해 품에 넣었다. 허리가 굽은 노인이 편지를 안고 천천히 걸어가 선 곳은, 언젠가 영서가 도움을 청하러 왔을 때 예의 그 부적을 꺼내주었던 서랍장 앞이었다. 분명 몇 달 지나지 않았는데도 그 나무 장식장은 마치 물에라도 그슬린 것 마냥 혼자만 훌쩍 낡아 있었다. 말없이 서랍을 열어 편지와 사진을 깊숙이 넣은 후, 영숙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영서를 돌아보았다.
“…할머니…”
“…옛날에, 아주 옛날에… 이 할미가 너만 했을 때 일이다.”
캄캄하게 가라앉은 영숙의 목소리는, 어딘가 목이 메기라도 한 듯 말을 꺼내놓기 어려워하는 느낌이었다. 영서는 직감적으로 뭔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그런 황망한 표정의 노인을 그저 얌전히 올려다보며 귀를 기울였다.
“…내가 그 구미호 놈을 구해주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일이었다.”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가, 일순간 조용해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할미는 그때 지금의 너만큼 능력이 피어나지 못했을 때였고, 경험도 부족했던 지라 초장부터 대처를 제대로 하지 못했던 탓이 크다. 아마… 그래, 분명 내 탓이 제일 클 게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할머니는 잘못하신 거 없어요. 할머니였다면, 아무리 힘이 약했다고 해도 그때의 최선을 다하셨을 거잖아요.”
약한 노인의 모습에, 왠지 영서는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되어 자기도 모르게 그녀를 두둔하며 나섰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그러나 영서는 왠지, 과거의 단지 어린 소녀였던 영숙과 지금의 자신이 동일시되는 기분이 드는 것을 떨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 어쩌면, 단지 남들과 다른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을 짊어져야 한다는 것에 무의식중으로 반발심이 들어서 였을지도 모른다.
손자의 말에 노인은 그저 빙긋 웃을 뿐이었다. 그마저도 곧 사그라들고, 주름진 얼굴에는 다시금 고뇌가 깊게 패이고 있었지만.
“옛날에, 이 할미가 부산에 있는 어느 산에서 주지 스님을 따라 수행을 떠난 적이 있었다. 그때… 그놈을 만났다. 아직 다리가 느려 스님을 따라가다 산에서 길을 잃은 할미를, 어떤 고운 자태를 가진 색시가 나타나 길을 알려주었지. 어디서도 들어본 적이 없는 옥구슬 같은 목소리로, 나를 부르면서, 아가, 아가, 하고…”
영숙은 그때의 감각을 떠올리듯, 멍한 눈으로 빗방울이 내리치는 창호지문을 건너다보았다. 산속에서 나타난, 묘령의 고운 목소리를 가진 아름다운 여성이, 길을 알려주었다고…
“…그리고 그 여자는, 짐작했다시피 사람이 아니었단다.”
영숙은 뒷짐을 진 채 방문으로 걸어가 창호지문을 조금 열었다. 마당에 들이치는 빗방울이 댓돌을 흠뻑 적시고 있는 것을 내려다 본 영숙이 덧붙였다.
“…정확히 일주일 후, 똑같은 모습으로, 이 산속에서 다시 내 앞에 나타났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