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여우야, 여우야, 뭐 하아~니!”
“밥 먹는~다!”
“무슨 반찬~?”
“개구리 반찬~”
“여우야, 여우야~”
……
“죽었니? 살았니?”
“살려주세요오오오옥!!!!”
“살려주세요!!!”
“흐어어어, 흐어어어엉~~ 엄마아~ 누나아~~”
“시끄러워, 이 자식들아!”
“두식아, 아직 애들인데 너무 거칠게 다루진 마라.”
“넵, 하나 누님!”
“아, 아저씨! 자, 자 자 자, 잠시만요!!! 그거 칼이죠??!!?! 흐어억, 이거 좀 풀어주고 말해요!!!!”
“….음, 시끄럽네.”
“처리할까요?”
“으아아아아아아악 누니이이이임!!! 살려주세요 누님!!!!”
어둠 속에서 꼰 발을 까닥이던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스물스물 다가왔다. 이건… 꿈인 거지. 으응? 비록 내가 그렇게 길고 긴 꿈에서 깨어난 지 얼마 안 되었다지만… 응? 꿈이지?
영서는 현실을 부정하며 묶인 팔을 이리저리 비틀어 보았다.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아… 권영서, 18세의 꽃다운 나이로 이렇게…어딘지도 모르는 창고에서 죽는구나…
이렇게 죽을 줄 알았으면… 그때 망설이지 말걸… 그때…
“시끄럽게 오밤중에 다들 뭐 하는 거야?”
귀에 내리 꽂히는 차분하면서도 서늘한 목소리.
영서는 방금 전까지 고래 고래 소리치며 살려 달라 외치던 것을 뚝 멈추고,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았다. 왼쪽에 같이 묶인 주민은 이미 울다 지쳐 탈진한 듯했고, 해강도 살려 달라며 바닥을 구르며 빌다가ㅡ과연 비는 게 맞는지 모르겠지만ㅡ낯선 남자의 등장에 고개를 들었다.
“…사장님.”
“시간이 몇 신데 지금… 엉? 뭐야? 웬 애새끼들이냐?”
“아, 그러고 보니 벌써 시간이 이렇게 늦었군요. 두식이가 늦장을 부리는 바람에요.”
“그치만 형님, 그 휴게소에서 파는 감자 핫도그는 예술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잠시 그걸 사려는데 이 자식들이 도망치려는 바람에…”
“시끄러 임마, 감자 핫도그같이 생긴 게.”
남자가 혀를 차며 핀잔을 주자, 해강의 목덜미를 잡아챈 채 영서와 주민까지 묶어온 커다란 덩치의 곰 같은 남자가 풀이 죽은 듯 끙,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런 거에 상처받는 거냐고! 영서는 어이가 없었지만, 일단 지금 상황에서는 목숨을 구하는 것이 먼저였으므로 하나하나 딴지를 걸 시간을 없었다. 보아하니 저 남자가 여기 있는 인간들 중 제일 상사인 듯 했으므로, 일단 살고 보자!!!!
“사, 살려 주세요! 아저씨!”
“으음… 너희가 잡혀왔다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겠지. 하나야.”
“네.”
설명을 요하는 듯한 눈빛으로 남자가 여자를 건너다보자, 여자는 들고 있던 전자 패드를 사장이라고 불린 남자에게 넘겨주었다.
“오… 오, 그렇군. 으음…. 음.”
“석규의 예상대로였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뭐… 처음 계획대로 처리해야지, 별 수 있나.”
남자는 주머니에서 익숙한 손동작으로 담배를 꺼내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달빛 외에는 들지 않는 어두침침한 창고에서, 유일하게 잠깐이나마 불이 붙었다 사라지는 장면을, 그리고 그 불빛에 잠시 드러난 남자의 분명한 얼굴을 영서는 보았다. 그리고 등줄기를 타고 스치는 예리하고 칼날 같은 감각. 아니, 보다 은근하고 질척한 불안의 감각. 영서는 마치 포식자 앞에 상처를 입은 채 쓰러진 초식 동물의 심정으로, 본능적인 공포를 느꼈다. 이 남자…
“…당신, 대체 누구야? 누군데 우리를…”
영서는 자신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은 것도,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목소리도 순간 눈치채지 못했다. 심장이 두근, 두근 하며 달음박질치고 있었다. 저절로 숨이 가빠져 왔다. 저 눈, 저 어둠 속에서도 정확하게, 내 눈을 마주쳐 오는 푸른 안광. 저것은…
인간의 것이 아니다.
“나?”
남자가 담배를 문 채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여자가 패드를 받아 뒤로 물러나고, 그녀의 눈짓을 따라 해강을 붙들고 있던 덩치도 물러났다. 담배를 문 남자는 느적 느적 걸어 꽁꽁 묶인 영서의 앞에까지 다가와 무릎을 쭈그리고 앉았다. 태운 담배의 향이 몽롱하게 주변을 채우고 있었다.
“그러는 넌, 뭐냐?”
뭐냐,라고 했다.
누구냐, 도 아닌. 뭐냐?라고 묻다니.
영서는 대답하지 않고 남자를 쏘아보았다. 매몰차게 노려보는 눈빛과 달리, 손 안에는 땀이 가득하고 묶인 다리는 저절로 떨리고 있었지만.
“간만에 진짜배기를 낚았네.”
남자가 킬킬 웃으며 담뱃재를 털었다. 입안에 머금었던 연기를 후우, 내뿜자 옆에서 정신을 잃은 것 같았던 주민이 콜록거리며 몸을 뒤틀었다.
“내가 누군지 궁금하냐?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반쯤 들어온 달빛이 남자의 얼굴을 밝혔다. 초승달처럼 휘어진 눈매와 입꼬리가 요사스러웠다.
“여우지.”
***
영서 일행이 납치되기 얼마 전.
하늘은 오랜만에 맑고 푸르렀다. 무사히 퇴원 수속을 밟고 학교로 돌아온 영서는 오랜만에 가뿐만 마음으로 학교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물론 퇴원하자마자 시험기간이 들이닥치는 바람에 그다지 즐기지도 못했지만. 드문드문 영서는 명부를 조금씩이나마 채워갈 수 있었고, 일직차사는 퇴원 후 영서의 몸 상태에 조금 신경을 쓰는 눈치였으나 곧 그런 기색을 떨쳐버렸다. 그리고 그는 영서에게 이른바 무명귀無名鬼같은, 이름이 없고 구천을 떠도는 잡귀들을 봉인하는 법을 알려주었다. 영혼의 이름을 영혼이 기억하지 못해도, 영서가 영혼의 이름을 알 도리가 없더라도 그 원혼의 크기가 크지 않은 단순한 사념체에 불과하다면, 영서의 힘을 가공해 부적의 도력으로 어느 정도 이들의 힘을 눌러 놓은 뒤 이름을 빼앗아 봉인시키는 방법이었다.
그런 방법이 있었으면 진작에 알려주지 그랬냐며 어이없어하는 영서를 보며, 일직차사는 어깨를 으쓱했을 뿐이었다.
‘인생을 쉽게만 살려고 하면 안 되지, 꼬맹아.’
쉽게는 개뿔. 지금 누구 때문에 이런 고생을 하고 있는데. 영서는 그동안 명부를 채우느라 동분서주하며 맞지도 않는 퇴마 일을 하느라 고생했던 나날들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더랬다. 비록 몇 장 채우지도 못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리고 명부는 이상하게도, 영서가 이름을 얻어내느라 오래 시간이나 힘을 쏟은 만큼 그 이름이 갖는 힘이 크게 작용하는 듯했다. 한 예로, 해강에게 씌었던 묘비 귀신의 이름이나 얼마 전 받았던 주민의 누나, 주희의 이름은 오로지 한 장의 낱장에 적혀있을 뿐이었다. 다른 원혼들의 이름을 적어도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 적힐 뿐이었다. 무슨 원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식으로 라면 열심히 모으다 보면 언젠가는… 음… 언젠가는 다 채울 수 있겠지. 영서는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하고 학교 뒤뜰에 자주 출몰하던 머슴 귀신을 빠르게 봉인했다. 머슴이 뭐야, 머슴이. 그것도 남고에. 영서는 투덜거리며 점심시간이 끝나기 전에 명부를 집어넣고는 손을 탁탁 털어내며 교실로 돌아갔다.
어느덧 순조롭게 시간은 흐르고 시험은 끝나 여름 방학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내년에 입시생이 된다는 부담감과 벌써 1학기가 끝났다는 초조함, 그러나 반면에 더운 여름을 앞두고 곧 방학을 맞는다는 설렘이 남중고의 학생들을 감싸고 있었다. 시험 결과야 어쨌건, 이제는 지난 얘기인 것이다. 수많은 시험지를 채점하느라 바빠진 선생들은 마무리되어가는 학기 진도를 마저 끝내버리고 수업 시간마다 영화를 보여주거나 자습을 주곤 했다. 맘대로 떠들거나 놀지는 못하지만, 학생들은 그저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시답잖은 장난질을 하거나 방학 계획에 대해 떠들어대고 있었다.
“난 엄마가 벌써부터 학원 종일반 끊어놨대, 미치겠다 진짜!”
“으하학, 불쌍한 놈! 나는 방학하면 미뤄뒀던 게임들부터 전부 박살 낼 거지롱! 하루에 6시간만 자고 20시간 동안 게임하는 게 꿈이었다!”
“등신 새끼야, 24시간 빼기 6시간이 20이냐? 어우 진짜.”
“씨, 너는 뭐 할 건데?”
“글쎄, 일단 할아버지 댁 들르고, 일본에 큰아버지가 계셔서 한 번 뵈고 와야지, 가족끼리 가기로 한 거라 맘대로 여행도 못할 듯.”
“와~ 일본까지 가서 가족끼리 돌아다니냐, 불쌍하긴 마찬가지네.”
“시끄러 임마.”
옆 분단에서 의자를 끌어다가 슬리퍼를 발끝으로 깔닥대며 수다를 떠는 학생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영서는 조용히 학원 숙제를 풀어나갔다. 방학이라… 그러고 보니 벌써 하복도 입고, 교무실뿐만 아니라 전 교실에도 에어컨을 틀어주는 것을 보니 확실히 더워진 날씨와 계절이 실감 나기도 했다. 이상하게 영서는 더위가 잘 와닿지 않았다. 원래부터 더위를 못 느꼈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었다. 정확히는 사고 이후…부터인가. 영서는 샤프를 눌러 딸깍거리며 새 샤프심을 빼내었다. 남자애들이라 그런지, 영서 주변의 학생들은 조금만 몸을 움직여도 땀을 흘렸고, 쉬는 시간마다 목줄 풀린 개처럼 뛰어다니며 온갖 공놀이를 해대는지라 점심시간이 오기도 전에 교실은 땀 냄새로 가득했다. 에어컨 앞에 딱 달라붙어서도 덥다며 상의를 탈의해버리는 놈들도 여럿 있어서, 영서는 눈살을 찌푸리며 시선을 돌리곤 했다. 그 정도로 더운가, 싶은 것이, 영서는 아침에 등교할 때를 제외하고는 에어컨이 빵빵한 교실 안에서는 항상 교복 카디건을 걸치고 있기 일쑤였다. 물론 영서도 인간이었기에 아예 더운 것을 못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확실히 남들보단 추위를 조금 더 탄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더위를 못 느낀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한기를 잘 느껴서 그런가.
영서는 카디건이 걸쳐진 팔을 문지르며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샤프심을 찰칵대며 문제집을 다음 장으로 넘기는 영서의 시야에, 낯선 그림자들이 스물스물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