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네임 온 잇-69화 (6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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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스테이가 나오기만을 기다리며 이미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던 공항은, 곧 팬과 기자와 공항 이용객이 마구 얽혀 엉망이 되었다.

조금 기다렸다가 빠져나가는 것만이 최선인데 문제는, 운이 나쁘면 앞쪽을 차지하지 못하고 뒤처진 기자들에게 걸려서 되레 곤혹을 치르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알아보지 못할 확률이 더 크지만, 재수가 없으면 방금 전의 그 홈마처럼 저를 알아볼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떡하지?

언제쯤 나가는 게 좋을지 고민하는 유현의 눈에, 때마침 게이트 바로 앞에 선 키가 큰 남자가 보였다. 저 사람이다! 유현은 곧바로 그 뒤로 몸을 붙여 걸었다. 남자에게 붙어 그의 어깨에 이마를 붙이고 빠르게 속삭였다.

"죄송합니다. 조금만 부탁드릴게요. 정말 죄송합니다."

유현은 절 밀어내려는 팔을 잡아, 마치 절친한 친구라도 되는 양 그 팔을 제 어깨에 걸쳤다. 그러고는 제 어깨 위로 떨어진 남자의 손을 유현이 두 손으로 꽉 붙들었다. 유현의 입술이 남자의 어깨 근처에서 조용히 움직였다.

"실례인 거 알지만, 사람 목숨 하나 살린다 생각하시고 그냥 이렇게 가주시면 안 될까요. 원래는 맨얼굴로 돌아다녀도 사람들이 잘 못 알아보는데, 피치 못할 사정으로 주목을 받을 일이 생겨서요. 그게 무슨 일이냐면, 저랑 같이 일하는 친구가 되게 인기 많은 걸그룹 멤버랑 사귄다더라구요. 공항에 이렇게 기자가 깔려 있을 줄 모르고 귀국했는데, 제 친구도 그 걸그룹 멤버도 연락이 안 되는 상황이라 제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도 있거든요. 그러니까 제 말은…."

제 발 저 좀 살려주세요. 남자가 떨어지라는 말을 할까 봐 쉬지 않고 줄줄 읊어대는 말이 필사적이었다. 간절함이 먹혔는지, 제자리에 멈춰 있던 남자는 서서히 걸음을 떼 주었다.

팬들은 모두 스테이의 등장만을 고대하고 있지만, 가십을 좇는 기자들에게는 유현도 좋은 먹잇감이었다. 개나 소나 찍어 올리는 입국장 사진보다, 멤버의 열애설에 곤혹스러워하는 아이돌 얼굴 근접샷이 훨씬 더 재밌으니까. 게다가 매니저도 경호원도 없이 어디선가 홀연히 나타나 주다니, 어찌 반갑지 않을까.

손안에서 남자의 감 좋은 코트가 구겨지고 있는 줄도 모를 정도로 유현은 온통 신경이 뒤로 쏠려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유현을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지만, 재수가 없게도 늦게 나온 스테이 멤버 하나가 유현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걸어오는 듯 뒤에서 팬들의 뜀박질 소리가 추격하듯 뒤통수에 따라붙었다. 지척에서 셔터 소리가 쏟아졌다.

여기 봐주세요! 잠시만 비켜주세요! 지나갈게요! 기자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유현이 조금 더 마스크를 올려 썼다. 기자들 진짜 많이 왔구나. 여기서 기삿거리가 됐다가는…. 사납고 폭력적인 대표의 얼굴이 떠올라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걸리면 끝장이야.

유현은 제가 도움을 받고 있는 이 동행인의 키가 커서 무척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속도를 높여 걸어도 다리가 길어서인지 꽤나 잘 따라주었다.

아수라장 속을 어느 정도 빠져나왔을 무렵이었다. 유현이 거칠게 밀쳐졌다. 어느 정도 불쾌함도 섞여 있는 밀침이었다. 거 참, 알아서 떨어져 줄 텐데 참 너무하시네. 유현은 모자 아래로 보이지 않게 눈을 흘겼다.

손길이 다소 섭섭하다 하더라도 도리는 도리였다. 남자가 아니었다면 금세 탄로 나 저들의 먹잇감이 되어 있을지 모를 일이니까. 눈을 내리깔고 남자 몰래 한숨을 쉰 유현이 입술을 뗐다.

"방금은 정말 감사했습니다. 제가 어떻게 사례를―"

모자를 약간 올려 쓰고 눈을 보고 인사를 건네던 유현은 저도 모르게 말을 멈추고 눈을 크게 떴다. 정면에서 본 남자는 저처럼 마스크를 쓰고 있음에도 근사했다.

잘도 저 인파를 뚫고 나왔구나…. 운이 나빴으면, 낙오된 기자들 중 한둘 정도는 연예인이라고 오해했을 법한 외모였다.

"……."

남자의 의심스러운 눈길을 받고 유현은 아, 소리를 내며 정신을 차렸다.

"그러니까, 사례를 하고 싶은데…."

"필요 없습니다. 딱히 사례를 받을 만한 일을 한 적도 없고."

다소 과격한 손길로 밀어냈던 것과는 다르게 말소리와 그 내용은 의외로 사감 없이 차분했다.

"그래도 감사한데, 연락처라도 주시면 나중에 제가―"

"됐습니다. 설령 사례를 받을 만한 일을 했다고 해도…. 뭐, 그냥 사람 하나 살린 셈 치면 되니까."

남자는 정말로 관심이 없는 듯했고 사실 유현으로서도 사례하겠다는 말은 작정 없이 뱉고 본 것에 가까워서, 내심 잘 됐다고 생각했다.

"그럼 전 이만."

살짝 고개를 숙인 유현은 남자를 지나쳐 걸었다. 몇 걸음 걷던 유현은 이상함을 감지하고 돌연 멈춰 섰다. 뒤를 돌아보자 남자는 유현이 인사를 건넨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저 사람 아까도 입국장 문 앞에서 저러고 있었던 거 같은데. 한 번씩 휘청휘청하던 것도, 어느샌가 앞머리가 젖어 있던 것도 낯선 상황에 느끼는 당혹감 탓만은 아닌 것이다.

유현은 다시 남자 앞으로 가서 섰다. 남자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유현을 마주했다.

"혹시 방향이 같으면 저랑…."

"…다릅니다."

남자는 더 어떻게 말을 붙여보기도 어렵게, 차가운 투로 내뱉고 등을 보였다.

"어어……?"

성큼성큼 유현에게서 멀어지던 남자는 갑자기 멈추더니 가슴을 붙잡으며 허리를 구부렸다. 괜한 오지랖을 부렸나 싶어 가만히 지켜보던 유현이 깜짝 놀라 달려가 남자를 부축했다.

남자가 뿌리치려는 듯 팔을 약하게 휘둘렀지만 별로 유의미한 동작은 아니었다. 끌고 가다시피 근처 의자로 데려가 앉혔다.

의자에 억지로 앉게 된 남자는 처음에는 고통을 참는 듯 미간을 좁히고 있더니, 시간이 지나자 안색이 눈에 띄게 편안해졌다. 확실히 혼자 서 있기는 무리인 환자였다. 심장이 안 좋은 사람인가.

유현은 혈색을 찾아가는 얼굴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택시 타는 데까지만이라도 부축해 드릴게요."

남자는 유현을 똑바로 바라보며 조용히 읊조렸다. 그냥 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네?"

"아까부터 주시하는 사람이 있어서. 아무래도 그쪽이 아니라 나 때문인 거 같고."

주시를 하다니? 유현이 이마를 들어 올렸다.

"얼굴까지 찍히면, 그땐 나도 아무 일 없을 거라고 장담 못 합니다."

"…무, 무슨 장담을."

"아까부터 나한테 딱 붙어 있었잖습니까. 오해 불러일으키기 좋게."

"네?"

"최근에 한국도 동성 스캔들 보도 지침이 느슨해졌다고 들었는데. 이대로면 그쪽 친구 못지않게 그쪽도 나랑 시끄러워져야 할 것 같단 얘깁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은 유현의 고개가 뻣뻣해졌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기자가 붙을 만한 유명 인사이고, 왜인지 그를 지켜보는 기자가 근처에 있으며, 그로 인해 자칫 그와 스캔들이 날 수도 있다는 친절한 경고였다.

유현이 고개를 들지도 숙이지도 못하는 채로 불안함에 눈만 굴리고 있자, 남자는 마음의 짐을 덜어주려는 듯 덧붙였다.

"데리러 오기로 한 사람이 있으니까 가보세요."

그냥 하는 말 같은데…. 아픈 사람을 버려두고 가는 게 개운치 않아 유현이 머뭇대자 남자가 한 번 더 주의를 주었다.

"나와 엮이면, 장담하건대, 친구 대신 열애설 해명하는 일보다 훨씬 더 피곤해질 겁니다."

지금 도망치는 게 좋을 거 같네요. 남자가 눈을 감고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말했다.

멤버가 열애설이 터진 마당에, 하지도 않은 연애로 저까지 남자와 스캔들이 나게 되면 마인은 이대로 회생이 불가능했다. 남자도 남자지만, 일단 제 코가 석 자였다. 유현이 벌떡 일어나 작게 "감사했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작게 말했다. 그러고는 도망치듯 잰걸음으로 공항을 질러갔다.

마침내 유리문 앞에 섰다. 그리고 그 순간 유현의 머릿속에 어떤 깨달음이 반짝 스쳐 지나갔다.

전부 꿈이다.

진작에 겪은 적 있는 일이었고, 태화의 집에서 잠들었을 때 꾸었던 꿈 바로 그다음 상황이었다.

잠깐만. 방금 그 남자, 분명히….

위화감을 느낀 유현은 망설임 없이 뒤돌았다. 자리에 앉아 있는 남자와 점점 가까워졌다. 그의 어깨를 건드리며 불렀다.

"형."

등지고 앉아 있던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유현은 뒤로 물러서며 헛숨을 들이켰다.

"……."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투성이인 태화였다.

"헉!"

유현은 물속에 오래 잠겨 있다가 막 빠져나온 것처럼 겨운 숨을 훅 뱉으며 눈을 떴다. 피투성이의 태화도 없고, 공항도 아니었다. 낯선 천장에 연신 눈을 깜빡였다.

"유현아, 괜찮아? 일어났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고개를 돌리자 소파에서 한시름 놓았다는 듯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마른세수를 하는 상진이 보였다.

"형, 어떻게 된 거예요? 여기는… 병실 아니에요?"

"그래, 병원이다! 너 아까 쓰러졌잖아. 기억 안 나?"

"쓰러져요? 언제요?"

"분장하다가! 아니, 사람들이 너 쓰러졌대서 달려갔더니 피를 질질 흘리고 있어서 내가 얼마나 놀랐는 줄 알아?"

"피를 흘려요?"

"분장팀은 누구 간을 떨어트리려고 그렇게 리얼하게…."

유현은 코를 훌쩍이며 일어나 앉았다. 쓰러져서 누워 있던 것치곤 몸 상태가 개운하고 좋았다.

"나 어쩌다 쓰러졌어요? 왜 쓰러졌지?"

"왜 쓰러졌냐고?"

"왜요?"

"지가 왜 쓰러졌는지를 몰라? 하…."

상진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하겠는지 눈을 꼭 감는다. 제 팔목에 감긴 붕대를 의아하게 보고 있던 유현의 눈이 절망적인 기운을 내뿜는 상진을 향했다.

"너 때문에 응급실 의사랑 간호사 다 달려와서…."

의사와 간호사가 다 달려왔다고? 최근 들어 원인을 알 수 없는 이명이나 어지럼증에 시달리면서 큰 병이 있는 게 아닐까 의심하고 있던 유현은 얼굴이 서서히 굳어 갔다.

그래, 저 형이 아무 이상도 없는데 이런 특실로 데려올 리가 없지. 지난 연말에 열이 펄펄 끓어 쓰러졌을 때도 이런 특실에선 지내진 못했다. 그러니까 이건 최소 과로 이상이라는 소린데….

"…왜요, 무슨 병이래요? 어디에 이상이 있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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