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네임 온 잇-68화 (68/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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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그치만 한정운은 이제 더는 입덕부정기라고 볼 수 없잖아. 자기 마음을 인정하고 유리한테 고백도 한 상태니까. 근데 자기 살려주겠단 사람을 밀치긴 왜 밀쳐?"

오늘 민아와 유현이 첫 번째로 촬영하는 씬은 어제 오후 촬영에서 이어지는 컷이었다. 위험 지역을 수색하다 발각되고 격전을 벌인 후 도망치는 부분까지가 어제 찍은 액션 분량이고, 오늘은 부상을 입은 한정운에게 오유리가 가이딩을 시도하고 한정운이 그런 오유리를 다급하게 밀치면서 고조되는 감정 연기 부분이었다. 민아는 오늘 촬영분이 이해가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대본 읽다가 너무 궁금해서 감독님이랑 작가님한테 연락해서 여쭤봤는데, 두 분 다 그러시더라. 그냥 나는 대본을 읽으면서 느낀 황당한 감정 그대로 연기하면 되는 거라구."

"어… 감독님 작가님 말씀대로 모르는 편이 나을 수도…."

"유현이 네가 지금까지 연기한 한정운은, 둘이 남겨졌을 때만큼은 오유리를 헷갈리게 한 적이 없어. 그게 오유리를 더 헷갈리게 하는 거지만… 뭐 어쨌거나."

확실히 유현이 연기하면서 백 감독이 초기에 의도했던 캐릭터보다 훨씬 더 개연성을 갖추게 됐다. 약혼녀의 소중함을 모르는 냉혈한이 다른 사람에게 뺏기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후회남이 되는 서사가 아니었다.

일을 할 때는 냉철하지만 진심을 전할 때만은 거침없는, 그러면서도 무슨 이유에선지 속내를 전부 드러내지는 않는 남자. 그게 고유현의 한정운이었다. 나쁜 남자가 아니라 좋은 남자지만 때때로 악역을 자처하는 남자였다. 미묘한 차이는 함께 연기 호흡을 맞추는 민아가 제일 잘 알았다.

그러니 아무 이유 없이 긴급 상황에서마저 가이딩을 거부하고 무안을 주는 건 유현이 여태 쌓아놓은 캐릭터성과 어긋나는 것이었다. 다 제쳐두고 딱 오유리의 감정선 하나만 본다 해도, 다짜고짜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이는 건 어색하게 느껴졌다. 다음 장면에서 오유리는 한정운의 간병을 자처하며 내내 걱정돼 어쩔 줄 모르는 모습으로 나오는데, 무안을 준 상대를 지극정성 간병한다는 건 마치 오유리가 짝사랑에 빠진 것처럼 보이게 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게, 너무 좋아질까 봐 그런 거래요."

"응?"

"가이딩을 받았는데 예상보다 너무 좋으면 포기할 수가 없으니까."

"그럼 더 이해가 안 되는데? 포기를 왜 해? 한정운은 김지형 볼 때마다 으르렁대고 있는데?"

"한정운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태도로 대하잖아요."

유현이 연기하는 한정운은 고약한 구석이 있었다. 처음엔 오유리를 잔뜩 지치게 하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한없이 다정해져서 오유리의 마음을 온통 흔들어 놓고, 마음이 싱숭생숭한 가운데 한 번씩 차가운 면모를 보여 실망하게 만드는.

함께하고 싶은 건 김지형이지만,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을 과시하는 게 바로 한정운이었다. 눈으로는 사랑을 말하면서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도통 알 수 없게 행동하는 것이 바로 유현이 연기하는 한정운의 매력이 아닐까, 오유리의 시선으로 생각해 왔다. 아무리 유현이 연기를 잘한다고 해도 기존의 대본을 완전히 뛰어넘을 수는 없으니까. 다시 말해 민아는 '한정운이 일관된 태도를 취한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한정운이 오유리한테 일관되진 않잖아?"

"오유리를 사랑하잖아요."

"그래, 그건 알겠어. 난 감정 말고 태도를 말하는 거지."

"한정운은 약혼녀를 너무 사랑해서 계속 안전한 영역에 두고 싶어 해요. 그래서 처음에 유리를 봤을 때 화부터 내잖아요. 여긴 왜 왔냐면서. 현장 임무에는 팀장 권한으로 배제시키고 유리한테 미움도 받구요. 유리는 그게 변덕 같은 거라고 생각하지만."

"……."

"유리를 대할 때는 한 가지로만 판단해요. 위험한지 아닌지. 한정운은 위험한 거라면 그게 뭐든 유리에게는 가까이 두고 싶지 않아요. 그게 설령 자기 자신이 되더라도."

민아가 놀란 얼굴을 했다. 후반부로 갈수록 영준과는 붙는 장면도 많은 데다, 김지형이라는 캐릭터 자체가 솔직한 편이라 연기를 하면서 서로 각자 해석을 많이 주고 받는 편이었다면, 유현과는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서 연기한다는 인식이 있어 이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 것이었다. 유현의 설명대로라면 한정운은 일관된 태도가 맞긴 했다. 오유리가 그 사실을 전혀 모르는 게 문제지만.

"뭐야… 그런 이유면 대박인데? 애정을 넘어 순정이다, 그건."

"아무 소용없는 순정이죠. 자신의 행복을 바라는 게 아니라 오유리의 안전을 바라잖아요."

"소용이 있을지 없을지는 끝까지 가봐야 알지?"

"음… 오유리는 그런 마음을 알게 된다 해도 김지형을 택할 거 같지 않아요? 혼자만 안전해지는 걸 원하지 않잖아요. 애초에 센터에 들어온 이유부터가 안전과는 거리가 멀고… 다쳤다는 연락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게 싫어서, 한정운한테 도움이 되고 싶어서, 그게 유리가 센터에 들어오기로 한 이유잖아요."

"그럼 유현이 넌 오유리가 김지형이랑 이어질 거 같아?"

"네. 남자 주인공이기도 하구요."

민아는 "그건 그렇지만…." 하며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이더니, 약간의 시간을 두고 의외의 대답을 내놓았다.

"이건 그냥 내 생각인데, 작가님 맘이 바뀌실 수도 있을 거 같아. 사람들이 남주가 아니라 남조한테 꽂히면 결말 바뀌기도 한다잖아."

연기든, 캐릭터의 매력이든 충분히 남주를 견제할 만하다는 뜻이었다. 눈을 감고 눈썹뼈 위로 상처 분장을 받던 유현이 눈을 뜨고 민아와 눈을 마주쳤다.

그때 현지가 "아, 뭔지 알겠어요. 시청자들이 단체로 서브병 걸리면 갑자기 분량 많아지고 갑자기 분위기 남주 되잖아요." 하며 민아의 말을 거들었다. 그러자 민아가 "맞아요, 서브병! 와아, 그런 용어는 누가 만드는 거야? 너무 딱이다." 하고 감탄하며 맞장구를 쳤다. 그에 유현이 웃으며 말했다.

"탈고 다 끝나셨다고 들었어요. 방송 때문에 결말이 바뀌진 않을 거 같아요."

"정말? 작가님이 그러셨어? 저번에 통화했을 때 나한텐 그런 말씀 안 해주시던데?"

유현의 분장을 거의 마무리 지으며 현지가 조용히 물었다.

"유현 씨, 어디 안 좋아요?"

"아니요, 왜요?"

"식은땀 흘리잖아요. 안 좋아 보여요."

"그래요? 안 좋아 보이는 건 잘 모르겠는데…."

그렇게 안 좋은가? 유현이 거울에 얼굴을 돌려서 비춰보았지만, 입술 색을 죽여놓은 데다 여기저기 살이 찢어진 분장을 해두니 안색이 당연히 나빠 보였다. 유현이 "분장을 너무 잘 해주셔서 그런 거 같은데요?" 하며 웃었다.

"아니, 나는 아까부터 난로를 유현이 옆에만 갖다 세워두는 거야. 엄청 서러울 뻔했네."

마찬가지로 거의 마무리 단계로 들어선 민아가 짐짓 서운한 듯 말하자 현지와 재영에게서 웃음이 터진다.

현지가 습관처럼 시간을 확인하다가 생각난 듯 물었다.

"아, 곧 시청률 뜨겠다. 민아 씨는 얼마나 시청률 나오면 좋겠어요?"

"욕심 같아선 20은 나오면 좋겠죠. 문제는 그게 가능하냐는 건데… 난 진짜 모르겠어요. 가늠이 전혀 안 돼요. 감독님도 드라마는 처음이라 모르겠다 그러시구."

"맞다. 저 아까 여기 오면서 감독님이랑 조명 감독님 두 분이서 말씀하시는 거 들었는데, 어제 잠 한숨도 못 주무셨대요. 엄청 걱정 되시나 봐요."

"비밀의 성이 우리보다 일주일 빨랐잖아요. 그쪽은 1화 7퍼, 2화 10퍼 나왔대요."

"아……."

재영이 알려준 타사 동 시간대 드라마의 시청률에 민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예전과 달리 15%만 나와도 잘 나온다는 소리를 듣는 게 지상파 드라마 시청률이었다. 선풍적 인기를 끌어서 드라마를 안 보는 사람들까지 끌어오면 좋겠지만, 이제 그런 경우는 드물었다. 파이 싸움에서 지면 시청률은 망한다는 것이다.

생소한 소재인 데다가 홍보가 생각보다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감독의 걱정을, 민아는 오다가다 들었다. 홍보 영상마다 허락을 구해야 해서 당초 예정보다 홍보가 조금 덜 되었다고 말이다.

민아의 표정을 본 현지가 선반 위에 위태롭게 올려진 도구들을 정리하면서 밝은 목소리로 격려했다.

"벌써부터 너무 걱정할 필요 없다고 봐요. OTT 순위는 좋잖아요. 더원 1위예요."

"진짜요?"

"그리고 사람들 반응도 괜찮았어요. 신선하다고."

"그래요? 그러고 보니 유현이 네가 드라마 경력으로 따지면 나보다 선배님이네? 어떨 거 같아?"

촬영장 오는 길에 봐둔 게 다행이었지. 유현은 불시에 날아온 질문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시청률 잘 나올 거 같아요. 멋있더라구요."

"그래?"

"CG 엄청나던데요?"

잠이 쏟아지려고 해서 유현은 몸을 일으켰다. 바깥에 나가서 차가운 바람이라도 쐬야겠다.

"누가 협조해 달랬나…. 친해지자 그랬지."

"왜 형 같은 사람을 믿었는지 모르겠어."

유현이 비틀거리며 의자를 붙잡았다. 현지가 놀라 뒤를 돌았다. 분장을 끝내고 얼굴을 살피던 민아가 휘청거리는 유현을 보고 깜짝 놀라 소리쳤다. 유현아, 너 왜 그래? 괜찮아?

"누가 혼자 살고 싶대?"

유현은 그대로 바닥으로 무너져내렸다. 넘어지면서 짚은 난로에 손이 뜨거워졌다.

"엄청. 날 사랑한댔거든. 살게 해서, 살고 싶게 해서. 그래서 난 이제 살고 싶지가 않아."

유현아! 유현 씨! 비명 같은 외침이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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