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네임 온 잇-66화 (66/69)

(67)============================================================

67.

그 꿈은 제 욕망을 선명하게 직시하게 된 순간이었다. 태화는 그 꿈을 꾸기 전까지는 자신이 그런 식으로 누군가를 원하게 될 수 있다고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어쩌면, 낯선 존재에게 느끼는 신선함을 착각한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유현을 볼 때마다 느끼는 갈증은, 어쩌면 그저 정상적 삶에 대한 소망에 불과한 게 아닐까. 때때로 그런 의심이 솟았지만….

"……."

제 침대 위에 유현이 부드러운 빛을 받으며 세상 모르게 잠들어 있는 것을 보니, 역시 확신만 얻게 되었다. 이건 특별한 무언가에 이끌리는 감각이었다. 이끌려서 기어이 갖고 싶은, 명백한 소유욕이었다.

유현의 허리 아래로 밀려나 있는 이불을 끌어 올려 덮어주고 일어서려던 태화는,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유현의 턱께에 어른거리는 까만 글자 때문이다.

태화는 어떤 사물을 분별할 목적으로 가까이 다가가는 일이 거의 없었다. 평범한 사람보다 대단히 시력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현의 네임을 볼 때만큼은 일반인처럼 자세히 보기 위해 허리를 숙이고 눈을 가까이 가져가게 되었다. 앉은 거리에서 보이지 않았던 게 가까이 본다고 더 잘 보일 리 없는데도 한껏 눈을 들이댔다.

유현의 턱을 살짝 감싸고 조심히 움직였다. 턱에 새겨진 네임은 글자의 모양을 하고 있으면서도 읽기 어려웠다.

이, 탁? 이, 택?

실은 지난 열흘 가까이 유현이 의도적으로 제 연락을 피했던 걸, 태화는 알고 있었다.

왜인지는 몰라도 유현이 절 피하는 것 같다는 추론에 도달했을 때 태화는 좀처럼 평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유현이 기를 쓰고 숨기려는 것까지 알아내기로 한 데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던 것은 그래서였다.

정 엔터의 대표실 비서로 근무하다 지난해 그만둔 사람을 수소문했다. 그에게서 알아낸 건 의외의 사실이었다. '고유현은 각인 상대가 누군지 모른다고 말했다'는 것.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와서는 그랬어요. 각인 네임이 생겼다고요. 그때만 해도 회사가 크지 않아서 저 혼자 비서로 근무를 하고 있었는데…. 자다가 일어났더니 갑자기 생겨 있었댔나…? 저도 바깥에 있어서 정확히는 안 들렸는데, 어쨌든, 자기도 모른다는 식으로 말했어요."

갑자기 생겨 있었다, 라….

"당연히 지 대표님은 뒤집어지셨죠. 상대가 누군지 알거나 모르거나, 각인 네임이 생긴 마당에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유현이 엄청 맞았어요. 쓰러져서 입원도 했을 걸요, 아마? 갈비뼈가 부러지고, 팔인가 다리에 금이 가고… 얼마나 맞았으면 그 얼굴이 사람 같지도 않게 퉁퉁 불어서… 어유, 다시 생각해도 끔찍해! 그런데도 유현이가 끝까지 억울하다고 한 거 보면…. 쯧, 잘 모르시겠지만, 유현이가 뭘 잡아떼고 그럴 애는 아니거든요."

모르는 사람의 네임이 저절로 새겨질 가능성? 세상에 그런 건 없었다.

"저요? 당연히 말리고는 싶었죠. 그런데 전 바깥에서 듣기만 하는데도 오금이 저려서 차마…. 아니, 지도철 대표님이 조폭 출신인데… 왜, 그중에서도 있죠, 궂은일 담당하는 말단. 가끔 일수 안 걷어지는 곳 가서 귓돈 좀 챙기고 그랬다 그러시던 거 보면, 어지간히 악독했겠다 싶은 거죠. 그래서인지 얼굴로 먹고사는 애한테도 어쩜 그렇게 사정 안 봐주고…. 네? 네, 확실히 그랬어요. 본인도 누군지 모른다고요. 그래서 아는 직원들끼리는 유현이를 두고 그렇게 수군거리기도 했어요. 혹시 애가 어디 가서 나쁜 일이라도 당한 건 아니냐고요."

그러나, 나쁜 일이라면. 세상에 널리고 널린 게 비극이었다.

답지 않게 잔인한 상상을 하는 동안 눈앞에서 네임이 홀연히 증발했다. 티끌만 한 흔적도 남지 않았다. 태화는 이처럼 누군가의 몸에서 네임이 영영 사라지게 하는 방법을 알았다. 네임주(主)의 죽음.

"……."

방금까지 글자가 있다고는 믿을 수 없는 깨끗한 피부를 눈으로 더듬어 보다가, 태화는 끓어오르는 살의에 헛웃음을 지었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이건 그 성질이 기이했다. 원인을 알 수 없을 만큼 분노로 그늘진 욕심이었다.

부정적인 감정을 갈무리한 태화는 몸을 일으키고 바닥에 내려섰다. 불을 끄고 깜깜한 방을 나섰다.

***

유현은 웬만하면 꿈을 꾸지 않지만, 잠에 깊게 들 수 없을 정도로 피곤하면 불특정한 과거의 어느 시점, 어느 상황 속에 떨어져 '이건 꿈이다' 생각하는 자각몽을 꾸곤 했다.

피곤하다 했더니 어김없이 꿈이었다.

유현은 꿈인 걸 알아차리마자 과거의 감정에 동화되었다. 꿈속에서조차 정말이지 억울한 심정이었다.

"혼자냐?"

"대표님?"

"그래, 대표님이다."

대략 일곱 시간 전쯤일까. 일본에서 개인 출연으로 잡혀 있던 스케줄이 모두 끝나고 모처럼 한가하게 개인 시간을 보내려고 하는 그 시각, 한국에서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목소리가 안 좋다? 왜, 너도 설마 여자랑 있냐?"

"예에? 대표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무언가에 잔뜩 화가 난 대표는 어떤 의미를 담은 말이라고 할 수 없는, 그저 상스럽기만 한 소리를 몇 분간 토해냈다.

상황은 과거이지만 겪는 것은 현재의 유현이라, 그때와 달리 속 편히 생각했다. 또 시작이시군. 대표의 술주정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이제 곧 그 말씀을 하시겠군.

"―그래서 시끄러워서 눈을 떴어, 시끄러워서! 하도 시끄러워서 받았더니, 기자 새끼가 나한테 그래. 대표님, 장시현 군이 레인 양과 사귀는 게 맞나요?"

그렇지.

"씨팔, 아침 일찍 죄송하다든가, 하다못해 안녕하냐든가 이딴 기본적인 인사도 없이! 지 소속도 안 밝히고! 띡, 장시현 군이 레인 양과 사귀는 게 맞냐고 하더라니까! 하, 내가 기도 안 차서 씨팔! 뭐, 장시현이는 장시현이고 윤나영은 레인이냐? 장시현이도 활동명이 있다 이거야! 기본도 안되어 있는 새끼가 아침부터! 어?"

유현은 스피커폰으로 바꾼 뒤 탁자에 올려두고 그 앞에 의자를 꺼내 앉아 다리를 꼬고 앉았다.

"내가 여자 있냐고 물었을 때 그 새끼가 뭐랬냐. 유현이 너도 들었으니까 기억나지. 없다고 딱 잡아떼고 점잔 떨었잖냐? 근데 뒤로는 호박씨를 까고 있어? 이 씨팔 새끼가…."

그거야 솔직하게 말하면 대표님이 죽어라 패니까 그렇죠. 유현은 입술을 뗐지만 한 글자도 뱉을 수 없었다. 마치 지나간 과거를 바꿀 생각도 하지 말라는 듯이. 유현은 한숨을 쉬었다. 꿈속에서라도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을 방법은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너도 거기서 미적대지 말고 당장 들어와."

몇 년 전에 겪었음에도 이날의 기억만은 비교적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유현은 대표에게서 돌아오란 말이 나올 줄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입술에서는 마치 상상조차 못 한 말을 들은 양 당황한 목소리를 내보냈다.

"예? 당장이요?"

"와서 너도 니네 꼴통들이랑 당분간 숙소에 얌전히 처박혀 있어."

"저 방금 스케줄 끝나고 들어왔는데…."

"들어왔는데 뭐?"

"들어왔는데 좀 쉬다가…."

"좋은 말로 할 때 들어와라."

"대표님, 예정대로 내일 들어가면 안 될까요? 여기 숙박도 내일까지로 돼 있고요…."

의미없는 반항이다.

"분위기 파악 못 하냐? 내가 들어오라면 들어오는 거야!"

일본에서 좀 더 쉬겠다고 반항만 하지 않았어도 지 대표에게 다짜고짜 오해를 받는 일은 없었을 텐데. 유현은 관조적으로 지나간 일을 반추했다.

유현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느릿느릿 공항으로 가 티켓을 끊었고, 지연도 없이 곧바로 한국행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었다.

이다음 일이 어떻게 될지 유현은 다 알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입국장 바깥에 취재진과 팬들이 떼로 깔려 있을 것이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길이 없고, 유현은 당황한 채로 멀뚱거리고 서 있을 것이다.

활짝 열린 게이트 너머로 비명에 가까운 함성이 터진다. 과거에서처럼 살짝 어깨를 움칠거린 유현은 눈을 깜빡거리다가 설마 하며 뒤편을 돌아보았다.

"……."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유명 아이돌 그룹 '스테이'가 스태프들을 대동해 걸어오고 있었다.

유현은 발작하듯이 잠에서 깨어났다.

어떤 꿈은 주체가 안 될 만큼 생생하게 남는다. 바로, 과거에 있던 일을 꿈으로 꿀 때다.

"왜 하필 그때야…."

멤버의 열애설 소식으로 급하게 귀국했던 그날이다. 제게 무슨 일이 닥칠지도 모르고, 오랜만에 주어진 자유 시간이 사라져버린 것만이 안타까웠던 그 날. 숙소에 돌아와 짧은 저녁잠을 자고 눈을 떴을 때 제 몸에서 각인 네임을 발견했던 그 날.

마치 롤러코스터의 고점까지 올라가는 구간이 더 떨리고, 공포 영화를 보다가 갑자기 조용해지는 순간 더 초조해지는 것처럼. 모든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더 긴장되는 꿈이었다.

다 꿈이다. 다 지나간 일이야. 유현은 속으로 되뇌었다.

문득, 깜깜하고 소음 하나 없는 방이 낯설었다. 방음재를 이중으로 설치했다더니 너무 고요해 꼭 멸망한 지구에 혼자 남겨진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유현은 일부러 소리내어 기지개를 켠 뒤 뻐근한 목을 주물렀다.

좀처럼 어둠에 익지 않는 눈을 몇 번 깜빡거렸다. 아무리 기다려도 앞이 보이지 않았다.

"뭐야…."

덜컥 겁이 난 유현은 무릎 걸음으로 걸어 협탁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팔을 마구 허우적댔다. 뭔가 손에 걸려 쿠당탕 소리를 내며 넘어지는 것을 가까스로 잡아챘다. 아마도 태화가 가지고 오겠다던 조명인 것 같았다.

유현은 어둠 속에서 조명을 이리저리 만지작거린 끝에 불을 켤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불이란 것이 다 꺼져가는 것처럼 희미했다. 옛날옛적 호롱불보다 못한 수준이었다. 협탁과 그 주변만 겨우 비추는 정도였다.

아무리 귀찮아도 폰을 챙겼어야 했는데. 호롱불보다 못한 조명은 선이 짧아 들고 움직일 수도 없었다. 하여간에 쓸모가 없었다. 조명을 제자리에 올려둔 유현은 조심조심 바닥에 발을 내디디고, 엉거주춤 어딘가로 걸어 나갔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