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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동성과 교제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태화를 만나기 이전에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동안 제게 연인, 애인 혹은 여자친구라고 부를 만한 여성이 없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동성연애, 동성 결혼만큼은 남의 일이었다. 최종익이 저를 그런 눈으로 본다는 걸 알았을 때는 편협한 분노에 사로잡혀 복수심에 가까운 정의감을 불태우기까지 했을 정도로, 유현은 그것들이 한평생 자신과 무관한 문제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분명히 그랬다.
그런데 태화는 어디선가 갑자기 튀어나와 자신으로 하여금 저와 영영 무관한 문제를 자꾸만 고민하게 만들었다.
연애 감정에 둔하고 경험이 적은 유현이라도 태화가 제게 갖고 있는 감정이 일반적인 호감 이상이라는 걸 모를 수 없었다. 스스로 가장 이해가 안 되었던 건, 그런 태화의 감정을 어렴풋 짐작하면서도 최종익처럼 혐오스럽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의 애인 역할을 수행할 연기자로 고용된 입장에서는 난감했을 뿐이고,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어쨌거나 유현은 자신이 꽤나 계약을 잘 수행하고 있다고, 때때로 휩쓸릴 뻔했지만 휩쓸리지 않았으니 중심을 잘 잡은 거라고 믿었다.
종종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기울어졌지만, 몇 달 동안 일부러라도 가까워지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 호감을 갖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라고 쉽게 치부했다. 로맨스 드라마를 찍고 주인공끼리 사귀는 일이 흔한 것과 같다고 말이다. 저와 무관하다 생각했던 일이 이젠 전혀 무관하지 않게 되었다는 걸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였다.
그런 상태로 약속된 날짜가 가까워질수록 유현은 마음을 다잡았다. 관계의 본질은 계약이었고, 계약의 목적은 결국 저를 수단으로 삼아 파혼에 이르게 하는 것임을 곱씹었다.
드디어 가족 모임을 하루 남겨둔 새벽이었다. 유현은 침대에 누워서 전의를 다졌다. 태화가 얼마나 결혼을 싫어했는지, 또 얼마나 간절히 파혼하기를 원했는지 떠올리면서.
그러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고민에 다다라서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어떻게 하면 '진짜'처럼 보일지를 고민하는 순간에, 유현은 제가 얼마나 계약을 배제한 채로 임하고 있었는지 불현듯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유현은 잊고 있던 계약 종료 조건을 기억해 냈다.
[본 계약은 갑의 파혼 확정시 종료된다.]
호텔 앞에서 태화에게 네임을 들켰을 때만 해도, 유현은 자신이 이런 기분을 느끼는 순간이 올 줄 몰랐다. 다그치는 태화를 피해 두 손 가득 사탕을 사 들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유현이 바랐던 건 오로지 하나였다. 무사히 계약이 성사되어 무사히 종료되는 것.
계약의 종료를 멍청히 되뇌다가, 유현은 자각했다. 더는 그와의 관계를 계약으로만 볼 수 없다는 것을.
이제 유현에게 계약의 종료는 단지 '주태화의 파혼'이 아니었다. 어떤 상실이었다. 일상 속에 당연하게 스며들었던 그의 존재, 그가 주었던 기묘한 안정감과 피로한 즐거움까지 전부 사라지게 되는 것. 제가 잘 해내면 잘 해낼수록 더 일찍 맞이하게 되는 것….
날이 밝고서는, 혹시라도 계약을 망치고 싶은 마음이 들까 봐 사탕을 챙겨갔다. 자신이 처음 원했던 건 계약이 무사히 종료되는 것이었음을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 주머니에 사탕을 챙겨 넣자, 이제까지 한 번도 염두에 두지 않았던 상실이 목전에 와 있다는 게 실감이 났다. 일상 속에 당연하게 스며들었던 존재, 그가 주었던 기묘한 안정감과 피로한 즐거움까지 모두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때 자각했다. 그와의 관계를 더는, 계약으로만 볼 수 없다는 것을.
소파 등받이를 쥐고 있던 유현의 손이 그만 땀에 미끄러졌다. 마지막 구명줄을 놓친 사람처럼 놀라며 입술 사이 틈으로 작게 읏, 하고 신음을 내뱉었다.
태화는 유현이 놀란 것에는 관심이 없이, 저항이 줄어드는 데 반가워하며 파고들 뿐이었다. 태화에게 떠밀려 한 팔로 겨우 버티던 것마저 꺾이고, 소파에 등이 닿고 쿠션에 떨어진 뒷머리가 반동으로 튀었다. 쿠션 높이가 높지는 않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어깨가 움츠러들 만큼 아득한 낙하였다.
유현이 반사적으로 감은 눈을 채 다 뜨기도 전에, 의심스러울 정도로 뜨거운 체온의 손바닥이 목 뒤를 파고든다. 그러고는 뒤통수를 완전히 감싸 위로 끌었다. 가볍게 딸려 올라갔다.
유현은 늘어져 있는 제 양팔을 머뭇머뭇 태화의 어깨 위로 가볍게 올리자, 티가 나게 굳는 것이 느껴졌다.
만지는 게 싫은 건가. 유현이 다른 생각을 하며 어깨서 손을 떼어내는 것과 동시에, 맞물려 있던 입술도 떨어졌다.
이런 각도로 이런 얼굴을 보게 될 줄은 정말로 몰랐지만, 뭐랄까….
"잘생겼네요…."
태화의 눈매와 입매 모두 부드럽게 휘었다.
유현은 슬그머니 떼어냈던 팔을 다시 태화의 목 뒤로 확실히 감아 아래로 당겨 내렸다. 역시 싫은 표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곧, 이유를 알 수 없는 격정이 따라붙었다. 유현은 거기에 휩쓸리듯 버겁게 호흡했다.
태화와의 키스는 아주 낯설고 특이했다. 키스라는 행위 자체가 손으로 꼽을 수 있을 만큼 표본이 많지 않기 때문에, 어떤 면이 생경함을 주는지 알 수 없었다.
남자라서? 그렇다고 하기엔 눈을 감으면 느껴지는 태화의 입술과 체온과 혀뿐이었다. 어쩌면 이런 장소, 이런 자세 탓인지도 몰랐다. 다른 사람의 집에서 몸을 겹치다시피 하고 입을 맞추는 건 처음이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잦아들었다. 나른했다. 이대로면 곧 기분 좋게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흡족한 입맞춤을 이어나가던 유현이 당황한 건, 태화가 목덜미를 주무르기 시작했을 때였다. 목 아래를 받치고 있던 손이 움직이더니 귓바퀴와 귓불을 문질렀다. 은근하고 느릿한 손길에 번쩍 눈을 떴다.
유현의 머리 한구석에서 '이건 아니다'라는 신호를 보냈다.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유현은 서둘러 태화의 어깨를 밀어냈다. 그러자 태화는 언제 그랬냐는 듯 귀를 장난감처럼 만지작대던 손을 떼어냈다.
그러나 문제는 그 후였다. 손이 떨어져 나갔어도, 자극을 받은 이상 평온해지기가 힘들었다.
빨리, 빨리 비키게 해야 하는데. 유현이 강한 힘을 실어 한 번 더 밀어내자, 태화는 잠깐 입술을 떼어내고 눈을 감은 채로 한숨을 쉬었다.
끝났다고 생각한 유현이 다급하게 상체를 일으키며 소파를 벗어나려 했다.
"어디 가."
이렇게 낮게 갈라진 목소리는 처음 듣는 것이었다. 이 순간엔 그런 소리마저 자극이었다. 유현은 마른침을 삼켰다. 죽어도 화장실에 간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너무 늦어서, 상진이 형한테 연락을… 읍."
가늘게 뜬 눈으로, 곤란한 얼굴을 한 유현을 바라보던 태화는 비켜나 주기는커녕,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갑자기 손을 뻗어 유현의 목덜미를 잡아채더니 보복처럼 몰아붙였다.
아, 안 되는데. 진짜 안 되는데…. 상황을 이성적으로 보려는 노력이 유현의 머릿속에서 계속되고 있었지만, 끝내 밀어내던 힘은 약해지고 손아귀에서 태화의 옷만이 엉망으로 구겨졌다.
***
싫어하면 물러나 주려고 했지만 붙든 것은 분명 유현이었다. 그 손이 태화의 충동에 불을 당겼다.
자칫 잘못하면 키스로만 끝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경고가 머리에 울리고도 무시했다. 밀어내고 바르작대는 걸 굳이 붙들고 이어갔다. 서로 아랫도리 사정을 모른 척할 수 없는 지경이 되어서야 입술을 떨어트렸다.
"드라마 끝났어요."
태화는 숨을 몰아쉬며 누가 들을까 두려운 것처럼 한껏 목소리를 낮춰 속삭이는 유현을 보면서 생각했다. 내내 이러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고.
불이 없어 답답하다느니 불편하다느니 구시렁대던 유현은 태화가 잠깐 다른 곳에서 침실등을 가져오는 사이에 잠들어 버렸는지 조용했다. 사실 드라마가 시작할 때부터 피곤해 보였으니 방금 전까지 깨어 있었던 것도 꽤나 오래 버틴 셈이었다.
태화는 협탁에 침실등을 올려두고 작동이 되는지 확인했다. 조명이 은은하게 밝아지자 깜깜한 어둠 속에 잠겨 있던 유현의 얼굴이 반쯤 드러났다. 유현이 그저 누워 있을 뿐인데 침실이 주는 공간감이 달리 느껴졌다. 아늑하고, 편안했다. 쓸쓸해 보이지도, 공허해 보이지도 않았다.
손을 뻗어 네임이 있는 턱께를 천천히 엄지로 쓸어 보았다. 유현은 그 감촉이 간지러웠는지 손을 들어 긁다가, 가까운 곳에서 얼쩡거리는 태화의 손을 느끼고는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뜨려 애를 썼다. 파르르 속눈썹이 떨렸지만 끝내 눈꺼풀이 열리지는 못했다.
"피곤…."
"……."
"아까 모니터링도 다 못 해서…."
뒷말은 부정확했지만 내용을 유추해 봤을 때, 다 못 본 드라마를 보기 위해서라도 일찍 일어나야 하니 귀찮게 하지 말고 가라는 말 같았다.
흐늘거리는 손길로 태화의 손목을 툭툭 치면서 한참 뭔가를 웅얼거리더니 옹알이 수준의 하소연은 입맛을 다시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유현은 맥없이 수마에 빠져들었다.
경계심도 긴장감도 없는 모습을 지켜보던 태화는 이상한 장난기가 샘솟았다. 여기서 더 괴롭히면 어떻게 될까. 그때 그 꿈속의 고유현처럼 짜증을 낼까.
다른 방엔 침대가 없다는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이 방에 재우기로 한 건, 유현이 현관에 들어서는 순간 반사적으로 떠오른 그 꿈 때문이었다.
"아, 진짜 짜증나게…."
"뭐가 그렇게 짜증나."
"자기 침대 놔두고 꼭 내 침대에 와서 이러더라…. 저리 가라고! 진짜 좁다고요!"
"이러면 안 좁지."
"답답해…."
술에 취해 잠든 유현을 곁에 두고 꾸기에는 터무니없고 양심도 없으며 하염없이 망상에 가까웠던 그 꿈. 그러나 묘하게 현실감이 느껴지던 꿈이라, 태화는 혼자가 되면 어김없이 곱씹어 보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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