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네임 온 잇-64화 (6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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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센터 출신이 보증할 만큼 정확도가 높단 얘기였다. 그럼 좋은 거잖아! 눈이 마주친 유현은 활짝 웃었다.

"……."

때마침 화면에서는 유현이 등장하고 있었다. 날개가 달린 것처럼 허공을 가볍게 가로지르는 장면이었다. 유현은 제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태화를 툭툭 치며 손가락으로 화면을 가리켰다.

"저기 저 장면 좀 봐요. 와이어 액션으로 엄청 고생했던 장면이거든요. 사실 저 장면이 리허설이랑 달라서 NG였어야 했단 말예요. 액션 팀이랑 사인이 안 맞아서 크게 다칠 뻔해서요. 근데 찍어놓고 보니까 너무 좋았던 거죠. 그래서 감독님이 그냥 저걸로 쓰신 거예요."

생각보다 너무 멋있게 나온 터라 유현은 신이 나 떠들어 댔다. 자랑을 늘어놓으면서 평소에 상진에게 하던 대로 팔꿈치로 툭툭 치며 호응을 유도했다.

"보여요? 저거 처음부터 끝까지 대역 없이 제가 직접 한 거예요. 대박이죠? 저 날 상진이 형도 저거 보고 너무 멋있다고…."

빤히 보는 태화를 보곤 정신이 조금씩 돌아왔다.

"아… 죄송해요. 아프셨어요? 버릇이라서."

"안 아프셨어요."

공손한 말투로 트집을 잡는 태화에 할 말이 없어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문 유현은, 괜스레 제 팔꿈치를 긁적이고 과일 보울을 품으로 끌어당겼다. 태화에게서는 아무 말도 못 들은 척 과일을 와구와구 입에 집어넣었다.

이어지는 화면은, 소속이 불분명한 에스퍼가 총상을 입고 상처 부위가 아물기 전에 근육을 뚫은 총탄을 꺼내려고 불에 지진 칼로 살을 찢는 장면이었다. 진짜처럼 생생했다. 잔뜩 찌푸린 눈으로 보던 유현은 며칠 전에 감독의 설명을 듣다 궁금해했던 게 떠올라 불쑥 물었다.

"저,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돼요."

"형은 다쳐서 능력을 못 쓰게 됐다고 했잖아요."

"네."

"촬영하다가 에스퍼들은 다쳐도 금방 낫는다는 얘길 들었거든요. 피가 뚝뚝 흐를 정도로 심하게 다쳐도 피가 멎고 살이 붙는 게 보일 정도로 회복력이 좋다고."

"대개는 그런 편이죠."

"그런데 형이 능력을 몽땅 잃을 정도면 얼마나 심하게 다쳤던 걸까… 궁금해지더라구요."

"음… 이렇게 숨을 쉬고 있는 게 기적이라고 해야겠네요. 폭주하고도 살아남았으니까."

"폭주요?"

폭주라는 말에 놀라 유현이 태화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태화는 막 에스퍼가 정신을 잃는 장면을 턱짓하며 말했다.

"에스퍼가 일반인보다 회복력이 좋은 건 맞는데, 저렇게 여러 군데 치명상을 입고 다량의 출혈로 이미 의식을 잃는 경우라면 일반인보다 훨씬 예후가 좋지 않아요. 에스퍼는, 피가 멈췄을 때부터가 진짜 응급 상황이니까."

"어떤 응급 상황이요?"

흥미로운 얘기였다. 유현은 키위를 우물대며 태화의 말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심폐 기능이 아예 망가지지만 않았다면 에스퍼는 일반인과는 다르게 수혈이 딱히 필요하지 않아요. 빠르게 피를 만들어 낼 수 있거든요."

"와, 그럼 사고가 나도 과다출혈로 죽을 일은 없겠다…."

"대신, 그만큼 과도한 에너지를 쓰게 돼요."

"과도한 에너지를 쓰면 안 좋아요?"

"과도한 에너지를 쓰는 만큼, 그 에너지를 제어하기 위해 체내에 축적되어 있던 가이딩도 함께 쓰게 되니까 좋지 않죠. 가이딩이 사라질수록 오히려 모든 신체 기능들이 최대치로 활성화되는데… 그땐 더 잘 보이고, 더 잘 들리고, 더 잘 느껴지고, 더 빨라지고, 더 강해져요. 모든 게 가능해지죠."

그럼 더 좋은 거 아닌가? 유현이 눈을 굴렸다.

"그때부터 에스퍼의 의식은 스스로 통제 가능한 영역을 벗어나게 돼요. 넘치는 에너지를 외부로 방출하려고만 하죠. 자신의 육체가 완전히 소멸할 때까지, 계속해서."

"……."

"쉽게 말해서, 가이딩이 고갈되면 몸을 정상으로 유지하던 제동 장치가 박살이 나서 평생 쓸 에너지를 한 번에 터트려 버리는 거예요. 저렇게."

태화가 가리키는 화면에서는 귀신 같은 타이밍으로 쾅 하는 폭발음과 함께 섬광이 터졌다. 유현은 탄성을 터트렸다. 전에 태화에게 들은 말도 있고, 드라마 촬영 때문에 폭주라는 개념에 대해 공부하기도 했지만, 시각적 효과가 남기는 인상은 남달랐다. 유현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저렇게 폭주하고도 살아남은 거면, 생존 자체가 기적이라고 불릴 만한데. 유현은 조심스럽게 태화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럼 가이딩을 받으면 폭주해도 살 수 있어요?"

"파트너가 있으면요."

"파트너요?"

"고정적인 페어로 일하는 가이드를 말하는 거예요. 보통 각인한 가이드를 파트너라고 불러요."

"파트너가 아닌 가이드가 가이딩을 해주면 안 되는 거예요?"

"물론 돼요."

생명이 위독해졌을 때 에스퍼가 회복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에너지에 상응하는 가이딩을 받기만 하면 무사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바꿔 말하면 태화도 가이딩만 받았다면 목숨이 위험할 일도 없었고 아예 능력을 잃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뜻 아닌가.

"그럼 형은 왜 가이딩을 안 받았어요?"

유현은 혀끝에 맴돌던 질문을 조심스레 꺼내 놓았다. 질문을 받은 태화의 표정이 오묘했다. 민감한 부분을 건드린 것 같았다.

"아니, 답하기 곤란한 거면 굳이 안 해도 돼요."

유현이 두 손을 내저으며 서둘러 덧붙였다.

"곤란한 건 아니에요."

태화는 당황한 유현을 달래듯 차분한 목소리로 운을 뗐다.

"말했다시피, 파트너가 아닌 가이드가 폭주 위험에 빠진 에스퍼에게 가이딩을 해주면 안 되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그런 일은 극히 드물어요."

어째서? 유현이 눈으로 묻자, 태화는 복잡한 수학 이론을 어린아이에게 설명해야 하는 사람처럼 난감한 얼굴을 했다.

"그건 각인 방법 중 하나거든요. 에스퍼 몸에는 아무 에너지도 남아 있지 않은데, 어떤 가이드가 그때 가이딩을 쏟아 넣으면 그 가이드와 각인이 될 확률이 높아져요."

"그런데요?"

"에스퍼들이 가이드와 하는 각인은 네이머들의 각인이랑 비슷한 거예요. 어떻게 보면 조금 더 강한 결속이라고 봐야겠네요. 목숨이 걸렸으니까."

각인이 뭐라고, 하면 되잖아. 유현이 뭐가 문제냐는 듯이 바라보자 태화가 한숨을 지으며 충격적인 답을 내놓았다.

"내 경우엔, 약혼자가 반대했어요. 내 약혼자는 가이드가 아니었거든요."

유현이 질린 얼굴을 하자 그에 태화는 별거 아니라는 양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저마다 죽기보다 싫은 일 하나쯤은 있는 법이니까요."

보통 '죽기보다 싫은 일'이라고 하면 그 주체가 본인 아닌가? '약혼자'가 죽는 것보다 싫은 일이 각인이라니.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의 사고방식에 소름이 돋았다.

파혼에 그같은 이유가 있었을 줄이야. 다른 가이드와의 각인을 견딜 수 없어서 생사의 고비에 있는 약혼자를 폭주하도록 방치한 약혼자라니. 진작 파혼하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였다.

"……."

유현은 이제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고,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들었다. 무의식적으로 검지로 간지러운 턱 끝을 문질렀다.

유현에게서 잊혀진 과일 보울이 무릎 위에서 쏟아지기 일보 직전인 것을 발견하고 태화는 보울에 손을 뻗었다.

"……."

보울을 치우던 태화는 문득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가만히 유현의 손을 잡아 내렸다.

"왜요?"

막 상념에서 빠져나온 유현이 의아한 눈으로 보자, 태화는 유현의 턱을 제 쪽으로 당기고 약간 들게 했다. 그러고는 못 보던 점에 대해서 묻기라도 하는 것처럼 여상스레 물었다.

"끝 글자가 뭉개져 있는데, 어떻게 읽는지 알아요?"

네임을 발견한 것이었다. 놀란 유현이 그의 손에서 턱을 빼냈지만 금세 붙잡혀 전과 똑같은 자세가 되었다. 태화는 별로 힘을 주지 않는 것 같은데도 유현은 많은 힘을 써야 했다.

"이렇게 보이는 곳에 생기면 촬영 같은 건 어떻게 해요?"

"이것 좀…."

"화장으로 가려지지 않을 거 같은데."

"잘 가려지니까, 이거 놓고…."

지척에서 태화와 눈이 마주치자, 유현은 생각하는 법을 잊은 것처럼 그저 똑바로 마주 보게만 되었다.

"……."

태화는 조금 더 거리를 좁혀 왔다. 경계심 많은 소동물을 대하는 것처럼 조심스럽고 단계적인 접근이었다. 이 정도도 괜찮냐고 묻는 것처럼 입가에 걸린 미소가 점점 짙어진다.

유현은 태화의 손가락에 붙들린 턱을 마구 긁고 싶어졌다. 부드럽게 움직이는 입꼬리에 시선을 빼앗겼던 유현이 의식적으로 눈을 들어 올리고 태화의 옅은 색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태화는 어느새 숨도 조심히 쉬어야 할 만큼 가까운 거리에 와 있었다.

유현은 제 안에 존재하는 모든 용기를 끌어모아 입을 열었다.

"…이러려고 온 거 아니에요."

"왜요, 이런 거 애인이 싫어해요?"

피식 웃으며 태화는 턱을 살풋 놓아주었다.

"그래서, 네 애인 말고 넌 어떤데?"

"……."

"싫어?"

답이 없으니 거절이라고 생각한 건지 미련 없이 멀어졌다. 유현은 저도 모르게 제게서 물러나는 태화의 팔을 붙들었다.

"……."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 공간에, 스피커를 타고 유현의 목소리가 울렸다. 난 너한테 협조해줄 생각 없어. 딴 사람 알아봐. 지금 속마음이랑 완벽히 다른 대사라고 생각하며 유현은 눈을 감았다. 목덜미가 붙잡히고 입술이 겹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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