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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유현은 정신을 차리고 수건에 생수를 적셔 가져왔다. 태화가 손과 얼굴을 닦는 동안 또 새로운 수건을 적셔 가져왔고, 대충 머리칼을 닦아내는 것을 보더니, 또 부엌으로 달려가 세 번째 젖은 수건을 만들고 있었다. 태화가 괜찮으니 그만하라고 해도 소용없었다.
유현이 수건을 적셔 가져오는 동안에 태화는 눈으로 구석구석 집을 훑었다. 집에 들어섰을 때부터 태화의 흥미를 끌던 것은 장식장이었다. 집 꾸미기에 그다지 열성적이지 않은 성향이 곳곳에 드러나는 와중에도, 그 유리 장식장만큼은 몹시 신경을 쓴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한쪽에 있는 유리 장식장 가장 위 칸에는 몇 개 안 되는 상패들이 올망졸망 모여 있었다. 활동명이나 그룹명이 아니라 본명이 적힌 것을 보면 대부분 배우 활동을 하면서 받은 듯했다.
아래로 갈수록 칸이 넓은 형태였는데, 둘째 칸은 전혀 어울리지 않게도 손바닥만 한 피규어나 동물 모양 솜인형이 전시되어 있었고, 셋째 칸은 목적을 알 수 없는 물건들이, 마지막 칸은 '영원히, 너'나 'My dear, YUHYEON' 같은 제목을 가진 두꺼운 책들이 빽빽이 꽂혀 있었다.
유현은 냉장고에 있는 생수를 다 쓴 건지 이젠 새로운 생수를 꺼내느라 낑낑대고 있었다. 도와줄 생각으로 주방으로 움직이던 태화는 식탁 위에서 막대사탕이 가득 담긴 바구니를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췄다.
"……."
지난번에 물려줬던 그 사탕의 출처가 이 바구니였던 모양이다. 태화가 손으로 뒤적거리고 있자 유현이 선심을 쓰듯 말했다.
"먹고 싶으면 먹어도 돼요."
"긴장할 일이 이렇게나 많아요?"
유현이 질문을 이해를 못 하는 얼굴로 쳐다보다가 아, 하며 웃었다.
"긴장할 때마다 사탕을 먹는 건 아니에요."
"그럼?"
"가족 모임 날 이 사탕을 챙겨간 건, 이걸 산 날의 마음가짐을 잊지 않으려고 챙겨간 거였어요. 다른 건 다 제쳐두고 딱 한 가지만 생각하려고."
"언제 샀는데?"
말해 줄 뜻이 없는지 유현이 어깨를 들먹이며 적신 수건을 내밀었다.
"이제 좀 괜찮은 거 같아요?"
"나아지긴 했는데."
"그래도 역시 계속 찝찝하죠?"
마음에 걸리는지 부지런하게 또 새로운 수건을 만들러 가려는 걸 태화가 잡아챘다.
"어차피 씻기 전엔 어쩔 수 없어요."
"원래 이렇진 않거든요. 단수가 돼도 보통 늦은 저녁부턴 나오는데…."
난처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유현을 보다가 태화가 불쑥 물었다.
"우리 집에 갈래요?"
***
기분 되게 이상하네. 유현이 수도를 잠그며 중얼거렸다.
제집에 가자는 말에 유현이 미지근한 반응을 보이자, 태화는 오후에도 안 나오는 물이 내일 새벽에 나올 거란 보장이 어딨냐며 그럴싸한 의문을 제기했다. 그건 그러네. 유현이 고민에 휩싸였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태화의 차를 타고 지하주차장을 나가고 있었다. 그러다 유현이 "근데 저 내일 새벽에…." 라고 말을 꺼내자마자 태화는 속도를 내더니, 집에 도착하자마자 단내를 풀풀 풍기며 "모니터하고 잠잘 시간도 부족한데 미리 씻는 게 어때요." 했다. 그러고는 얼렁뚱땅 욕실로 넣고 코앞에서 문을 닫아버렸다.
연습생 때야 합숙이니 뭐니 하며 다 엉켜 지내는 게 익숙했다지만, 데뷔 이후엔 네임 때문에라도 멤버의 집에서도 어지간하면 저녁이 되기 전에 엉덩이를 털고 일어서는 편이었다. 그러니 숙소가 아닌, 낯선 사람의 집에서 샤워를 하는 건 스무 살 이후로 처음이란 얘기였다.
"역시 이상해."
젖은 머리를 터는 손이 느려졌다가 괜히 헛기침을 하며 욕실 문을 열고 나섰다.
젖은 수건을 어디다 두면 되지. 유현은 머리에 커다란 수건을 얹고 집을 헤맸다. 현관 앞에 욕실, 욕실 앞에 거실, 거실 앞에 주방, 주방 옆에 침실. 그게 전부인 자신의 오피스텔의 단조로운 구조와는 달리 복도를 걷다가 꺾으면 새로운 곳이 나왔다. 혼자 사는 집이 이렇게 넓을 필요가 있나.
빨래를 위한 다용도실을 기대하고 연 문 네 개가 전부 창고거나 드레스룸이거나 주방이었고, 심지어 방처럼 보였지만 문을 열어보니 방이 아닌 것도 있었다.
"뭐가 어떻게 생겨 먹은 거야…."
유현은 낯선 집안을 수상하게 서성거렸다. 그렇게 몇 개의 방문을 더 건드리고 나서 유현은 인기척이 느껴지는 곳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다 씻은 태화가 있는 곳인 듯싶었다. 유현은 머리 위의 수건을 끄집어내려서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근데 이거 수건을―"
걸어 나온 태화와 맞닥뜨린 유현은 말을 뚝 멈췄다.
"수건은 앞에 있는 바구니에 넣으면 되는데."
유현은 저도 모르게 젖은 머리부터 복부, 그 아래 걸친 수건에까지 눈을 내렸다가, 황급히 시선을 위로 끌어올렸다. 헛기침을 한 유현이 목을 긁적이면서 "그, 크흠, 바구니를 못 봐서…." 하고 수건을 내밀었다.
그 수건을 가져가 근처에 있는 바구니에 던져넣는 것까지 아무 생각 없이 지켜보던 유현은, 태화가 뚫어져라 쳐다보자 불안하게 눈을 굴렸다. 왜 저렇게 보는 거지.
"나 옷 좀 갈아입을게요."
어, 어, 그, 그럼요! 말을 더듬은 유현이 허둥지둥 빠져나왔다.
여기가 이렇게 돼 있었나. 좀 달라진 것 같은데. 거실로 나가 얼마쯤 주위를 살펴보고 있자니, 옷을 평소처럼 완벽히 갖춰 입은 태화가 한 손에는 나무 보울, 나머지 한 손으로 병 주둥이를 잡는 동시에 고블렛 잔 두 개를 손가락에 끼운 채로 다가왔다. 식탁에 탁 내려놓은 보울을 들여다보자 한입 크기로 썬 과일이 종류별로 담겨 있었다.
태화는 술을 내려놓다가 멈칫하며 물었다.
"일찍 나가야 된댔나?"
"네? 아, 네. 새벽에 나가야 돼요."
"그럼 이 술은 못 마시겠네요."
태화는 술병과 잔을 테이블 끝으로 밀어놓고 유현의 옆에 자리했다. 드라마는 이미 끝나고도 남은 시간이었다. 사실 지금 곧바로 눈을 붙여도 다섯 시간도 잘 수 없었다. 지금쯤이면 매니저나 다른 스탭들이 뭐라고 하는지 볼 수 있을 텐데. 버릇처럼 옆자리를 더듬었지만, 외투 주머니에 있을 폰이 만져질 리가 없었다. 가서 가져올까 했지만 어차피 드라마만 끝나면 갈 텐데 또 귀찮게 집을 헤매기 싫었다.
"안 피곤해요?"
"조금?"
태화가 능숙하게 리모컨을 조작해 결제하는 것을 보던 유현은 갑자기 뭔가가 떠올랐다는 듯이 어, 소리를 냈다.
"왜요?"
"여기 원래 TV 없었잖아요."
"계속 필요할 거 같아서 하나 샀어요."
계속 필요…. 유현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다물었다. 광고가 시작하는 것을 보고 리모컨을 내려놓은 태화는 블루베리를 하나 집어 먹으면서 물었다.
"소감이 어때요?"
무슨 소감. 드라마를 보기도 전인데 딱히 꺼내 놓을 만한 소감이 별달리 없었다. 넓디넓은 집 구경이 어땠는지 묻는 건가? 아니면 넓고 쾌적했던 샤워 시설? 유현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고 있으니, 태화가 픽 웃으면서 "아까 나 찾으러 와서 봤잖아요. 그거 묻는 거예요." 하고 친절하게 생각의 방향을 정해주었다. 유현이 뒤늦게 아, 소리를 냈다.
아까 본 것. 보고 놀란 것.
"…크다?"
"뭐가?"
태화가 되묻자 유현은 제 말의 어감이 오해를 살 만했음을 깨닫고 손을 내저었다.
"아니, 아니! 아니 그게 아니고! 그, 그, 문신이! 문신이 되게…."
말실수가 될까 봐 더 뱉지는 못하고 유현이 열심히 손으로 아까 본 것을 제 상체에 대강 그려 보였다. 목부터 허리까지 몸을 새까맣게 감싸고 있던, 마치 넝쿨 줄기 같았던 검은 선들. 몸을 도화지 삼아 커다란 용을 그려 넣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알고 실제로 본 적도 있지만, 그런 용 문신과 비슷하게 거부감이 들었다. 마치 몸에 균열이 가 있는 것처럼 보여서, 조금 더 오싹한 느낌이었다.
"문신 아니에요. 네임이에요."
문신의 정체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것이라 그만 얼이 빠지고 말았다. 누군 심란한데 옆에서는 심란한 사람을 보고 웃기나 했다.
"네임? 네임이 왜 그런 모양…."
"광고 끝났어요. 앞에 봐요."
더 묻지 말라는 듯, 태화는 유현의 턱을 살짝 밀어 얼굴을 정면으로 돌려주었다.
드라마 시작하기 직전 폭탄 같은 발언을 던진 태화 탓에 좀처럼 내용에 집중할 수 없을 거라고 걱정했지만, 의외로 금세 빠져들었다. 두고 보면 안다는 감독의 말이 허풍이 아니었다. 궁금증을 일으키며 긴장감을 높이는 연출과 대놓고 눈을 사로잡는 화면 효과와 액션 연기가 대단했다.
그리고 단연 돋보이는 것은, 돈의 맛이었다. CG의 향연. 찍었던 것과 방영되는 것이 완전히 달라 유현은 감탄을 연발하며 화면을 감상했다.
유현은 흘긋 눈치를 보다가 태화가 과일에 관심이 없는 것을 확인하곤, 보울을 아예 제 앞으로 가져와 찍어 먹으며 내용을 따라갔다.
어느 배우든 자신이 출연한 드라마가 잘 되기를 바라지만, 잘 되는 드라마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경험이 많지 않은 배우로서 주연을 맡은 데에 어떤 책임감을 느끼고 조금은 내려놓은 부분이 있었다. 잘 안 될 수도 있다고, 너무 실망하지 말자고.
그렇지만… 이건 너무 되는 거잖아!
속으로 환호한 유현은 저만 그렇게 느끼나 싶어 옆자리를 흘긋 보았다. 태화의 표정은 알아보기 힘들었다. 몰입하고 있는 듯한데 어딘지 마음에 안 드는 사람처럼 눈썹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유현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재미없어요?"
"재미있어요."
"근데 표정이 왜 그래요?"
태화는 한쪽 눈썹을 살짝 찌푸리더니 약간 기막힌 어조로 말했다.
"이거, 작가 친구가 센터 출신이랬죠. 맞아요?"
"네, 맞아요. 근데 갑자기 그건 왜…."
"그 작가 친구라는 사람이 가이드인지 에스퍼인지 모르겠지만, 살아있다면 감독이랑 사이좋게 센터에 한번은 끌려가겠다 싶어요."
"끌려가요? 왜요?"
"신기할 정도로 구현을 잘했어요. 저걸 센터에서 허가를 내줬다는 게 믿기지가 않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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