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네임 온 잇-62화 (6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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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어…."

반가움과 난감함을 동시에 느낀 유현은 세 번 심호흡을 한 뒤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집이에요?"

"어…. 네. 왜요?"

-"그럼 로비 문 좀 열어줄래요?"

"네?"

-"첫방 같이 보자던 거 잊었어요?"

자기주장을 하듯 비디오폰의 호출 벨이 울렸다. 유현이 다가가 화면을 확인하자 정말로 태화가 거기 있었다. 유현은 현관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잠시만, 잠시만요."

-"그래요."

유현은 문을 열어주지 않고 먼저 현관으로 향했다. 긴장되는 마음으로 현관문의 복도를 비추는 렌즈로 눈을 가져다 댔다. 이런 렌즈를 들여다보다가 봉변을 당하는 온갖 공포 스릴러 영화 속 주인공들의 말로가 떠올랐지만, 유현은 용기 내어 복도를 살폈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간 건가…."

-"뭐가요?"

"네? 아니, 혼잣말이었어요. 잠시만요."

어쩌면 일련의 일들을 겪으면서 제가 예민해진 것인지도 몰랐다. 제가 아까 본 건 사람 그림자가 아니었을 수도 있고, 제가 외시경으로 목격한 건 우연한 타이밍으로 지나가던 배달원이었을 수도 있었다.

유현은 한숨을 돌리며 태화에게 문을 열어주려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정작 비디오폰 화면에는 태화가 없었다.

"지금 안 보이는데 어디 있어요?"

유현이 물었지만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귀에서 떼어내 폰 화면을 확인하자 전화도 끊겨 있었다. 뭐지, 다른 사람이랑 같이 들어왔나.

…잠깐만.

입술을 내밀고 눈을 깜빡이던 유현은, 제가 어떤 상황을 초래했는지 깨닫고 천천히 목을 돌렸다. 끼익끽 소리를 낼 것 같은 뻣뻣한 움직임이었다.

"……."

제가 처한 현실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으로 태화를 제집에 초대한 것이다. 아프다고 혹은 바쁘다고 정리를 미룬 이 집에.

스토킹 일 이후 꺼림칙하다는 이유로 청소업체도 들이지 않고 있었던 유현은 눈 앞에 펼쳐진 누추한 광경에 이마를 짚었다. 유현은 식탁 의자에 걸린 수건과 소파에 걸린 파자마를 빠른 속도로 팔에 건져 올렸다.

상대는 알 수 없는 신음 소리를 내며 퉁탕퉁탕 시끄럽게 뛰어 내려갔다. 얼마쯤 벌어졌나 가늠해보는 듯 한 번씩 올려다보는 얼굴은 귀신에게라도 쫓기는 사람의 것이었다. 자신은 전력을 다해 벗어나고 있는데 추격자는 평온한 얼굴로 바짝 따라붙으니 무서울 만도 했다.

태화는 계단을 세 칸씩 밟아 내려가면서 생각했다. 저놈을 잡는 게 의미 있는 일인가.

급하지 않았다. 일반인치고 재빨랐지만 그래 봐야 일반인이다. 자신이 마음만 먹는다면 금방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저 남자를 잡아서 어떤 식으로든 해결을 보려면 모처럼만에 난 시간을 저 불청객에게 할애해야 했다.

…그래도 잡아야겠지. 불안해하던 게 저놈 때문인 거 같으니.

잠깐 멈춰서서 남자가 내려가는 것을 지켜보던 태화가 난간을 잡고 반 층을 훌쩍 뛰어내렸다. 더는 따라붙는 발소리가 들리지 않아 긴가민가하며 계단참을 막 디딘 남자는 어느새 제 등 뒤에 서 있는 태화를 보고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졌다. 남자는 주저앉은 채로 엉덩이 걸음을 걸었다. 두 팔을 허공에 휘두르며 버둥거리며 소리쳤다.

"으어, 어어, 저리 가! 뭐야, 으어어!"

"왜 그 집 앞에서 기웃거리고 있었지? 거기 누구 사는지 알고 있지?"

"다, 당신이 무슨 상관인데! 씨이, 너 누군데?"

"내가 누군지 말하고 나면 그다음엔 무조건 네 차례야. 네가 누군지 말 안 하고 싶어도 말 안 할 수 없게 만들어 줄 거니까. 내가 누군지 들어도 괜찮겠어?"

"……사, 살려주세요."

나직한 경고에 남자는 얼굴을 굳히더니, 생존 본능이 뛰어난지 곧바로 무릎을 꿇고 손을 모아 비볐다. 살려주세요, 저는 시키는 대로만 한 거예요. 살려주세요. 위에서 내려다보던 태화는 남자의 자백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물었다.

"누가 뭘 시켰는데?"

"그, 그냥…. 지켜보라고…."

"사람을? 집을?"

"집 주변에서, 사람을…."

"누가?"

"모, 몰라요."

태화는 한숨을 쉬었다. 차차 알아보면 되겠지. 혼자 생각하고 혼자 고개를 끄덕인 태화는 몸을 일으키며 손을 뻗었다. 멱살이 잡혀 일어서게 된 남자는 겁에 질린 얼굴로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이거 놔주세요! 다시는 안 할게요! 한 번만 봐주세요! 살려주세요!"

"누가 죽인댔다고…. 그냥 경찰서에 가서 방금 한 말 똑같이 해주기만 돼."

"경찰서요?"

"그럼. 그냥 이렇게 넘어갈 줄 알았어? 이거 범죄야."

질질 끌려 반 층을 오른 남자는 태화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더 필사적으로 버둥거렸다. 남자를 붙잡기 위해 손을 대는 순간부터 피부에 신경통이 퍼지기 시작했다. 통증에 집중력을 잠깐 잃은 태화는 사력을 다한 남자의 발차기에 손을 놓치고 말았다. 태화가 제 옆구리를 붙드는 사이 남자는 다람쥐처럼 반 층을 다시 쪼르르 내려가 있었다.

욕을 읊조린 태화는 전과 달리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소리 없이 추격할 때와 달리, 일부러 들으란 듯이 발소리를 내며 따라붙자 남자는 공포스러운지 흐어어 울음을 터트리며 계단을 내려갔다.

둘 사이의 계단은 다섯 개도 채 되지 않았다. 층계참에서 또 한 번 잡힐 위기에 놓인 남자는,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느꼈는지 뒷걸음질 치며 창 쪽에 등을 붙였다. 남자는 이미 독 안에 든 쥐였다. 태화는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사, 살려주세요…."

"안 죽인다니까. 경찰서에 가서 솔직하게 털어놓―"

태화는 갑자기 제게 쏟아지는 음료에 반사적으로 팔을 들었다. 발치에 빙그르르 빈 플라스틱 컵이 나뒹굴었다. 컵은 막았지만 컵에서 쏟아지는 음료까진 막진 못했다. 어이가 없어 멈칫한 사이 남자는 비상구 문을 열고 빠져나가 버렸다. 달콤한 과일 향이 나는 음료가 정수리부터 머리칼을 적시며 뚝뚝 흘렀다. 태화가 손등으로 턱에 맺힌 음료를 털어내고 차가운 눈으로 비상구를 노려보았다.

저걸 잡아, 말아.

태화는 천천히 비상구를 빠져나와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엘리베이터의 전광판엔 아래 화살표가 움직이더니 곧장 숫자 일 표시가 떴다. 3층에서 1층까지 뛰어 내려가면 금방이긴 한데….

잠깐 고민한 태화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초인종 소리에 비디오폰을 켰지만 또 아무도 없었다. 헛숨을 들이켠 유현이 현관 앞에 서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누구세요?

"나예요."

"아, 잠시만요."

유현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현관문에 다가갔다. 잠금장치를 하나둘 풀고 문을 열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요? 아까 로비에서… 헉, 왜 그래요?"

"좀 들어가도 돼요?"

"네, 들어오세요!"

비 맞은 생쥐 꼴이 되어 문 앞에 서 있는 태화를 얼른 안으로 안내했다. 유현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서는 태화에게서 풍기는 냄새가 달콤했다. 뒤집어쓴 게 물은 아니란 얘기였다.

"어쩌다 그렇게 됐어요? 레모네이드 같은데…."

"실수로 누가 쏟았어요."

어처구니없는 대답에 유현은 아연하게 입을 벌렸다. 대체 누가 저 장신의 머리에다 음료를 쏟을 수 있단 말인가. 팔척귀신이 아니고서야….

머리뿐만 아니라 부분부분 얼굴도 젖어 있었고, 어깨나 가슴팍 등 코트 부분부분 색이 짙었는데 그중에서도 떨어지는 음료를 소매로 닦았는지 팔이 제일 얼룩덜룩 엉망이었다.

그나저나, 자기 머리 위로 레모네이드가 쏟아졌는데도 남의 집을 흥미롭게 둘러볼 수 있다니.

"그거 알아요?"

"뭘?"

눈이 바쁜 태화가 유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지금 자기 머리 위에 있는 저것도 모르는 거 맞지…. 안쓰러운 미소를 지은 유현이 까딱까딱 손짓하자 태화는 의아한 얼굴로 다가섰다. 유현은 발뒤꿈치를 들더니 손을 뻗어 정수리에 다소곳이 올려져 있던 레몬 조각을 떼어냈다. 레몬 조각에 태화의 시선이 멎었다.

"……."

"……."

태화의 표정에서 노기를 읽어낸 유현은 웃지 않기 위해 입술을 깨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일단 조금 씻어내야겠어요. 레몬을 휴지통에 버린 유현이 우두커니 선 태화를 화장실로 보냈다.

태화가 전화를 하고 초인종을 누를 때까지 걸린 시간이 대략 10분쯤. 유현으로서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대체 뭔 일이 있었던 거야? 올라오다가 누구랑 몸싸움이라도 했나. 그 덕에 간단히 청소라도 했다만….

유현은 미처 정리 못 한 테이블 위의 대본들을 모아 탁탁 쳐서 정리하며 화장실을 바라보았다. 뭐 하는 거지. 끈적할 테니 세수라도 하고 나오라고 밀어 넣은 건데 물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환기 때문에 열어놓은 창문을 닫고 커튼을 치는 유현의 뒤에서 끽 문소리가 들렸다. 유현이 뒤를 보자, 태화가 별반 다르지 않은 꼴로 나와 코트를 벗으며 말했다.

"물이 안 나오는데."

"물이 안 나온다고요? 왜?"

유현이 화장실로 달려가서 수도꼭지를 건드려보았다. 정말로 물이 나오지 않았다.

"어, 이거 왜 이러지? 아침엔 잘 나왔는데…. 관리실에 전화해 볼게요."

어렵사리 연결이 된 관리실에서는, 유현이 인사만 했을 뿐인데 왜 전화를 걸었는지 안다는 듯이 곧바로 사정을 설명했다. 비슷한 연락을 여러 번 받은 듯 설명이 끊김 없이 매끄러웠다.

점심쯤에 몇몇 집에서 물이 안 나온다는 연락을 받고 관리실에서는 원인을 조사해 봤지만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고 했다. 결국 늦은 오후에 업체를 불러 물탱크를 점검하면서 전체적으로 단수가 되었다고. 그러고는, 저녁 시간까지 안내 방송을 여러 차례 했지만 유현처럼 귀가가 늦어져 안내를 못 받은 사람들을 위해서 한 번 더 방송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유현이 "그럼 언제쯤 물이 나올까요?" 하고 묻자, 관리실에서는 곤란한 목소리로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양해를 부탁드린다고 했다. 확답할 수 없다는 것이다.

통화를 끝낸 유현이 눈을 굴리자 태화는 불안한 눈으로 물었다.

"왜요?"

문가에 서 있는 태화를 향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물탱크에 문제가 생겨서 점검 중이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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