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네임 온 잇-61화 (61/69)

(61)============================================================

61.

지회는 여유로운 웃음을 매달고 태화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걸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듯 심기가 불편한 세준의 앞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은퇴도 했는데 센터는 그만 와야지? 네 이름 듣는 거 귀찮아."

"반갑지는 않고?"

"상사가 반가울 리가."

"상사 취급이나 했으면 몰라."

"그건 네 생각이고."

태화가 웃으며 지회에게 손을 들어 보였다. 지회는 미련 없이 병실을 나갔다. 끝까지 지회를 못마땅하게 쳐다보던 세준은 문이 닫히고 완전히 발걸음이 멀어지자 병실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옷은 왜 갈아입었어?"

"왜, 이번에도 수치가 안 좋아?"

"넌 늘 안 좋아."

세준이 주사기로 용액을 빨아들이는 걸 보던 태화가 비뚜름히 입술 끝을 올렸다.

"몸 좀 사려. 태화 너 상태 정말 안 좋아. 운 좋게 근처에 센터 이송 차량 있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요원들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무려 센터 이송 차량이. 근처에."

"……."

"내가 운이 좋은 건지 아니면 누군가가 준비성이 철저한 건지."

세준이 한숨을 쉬면서 주사기를 팔에 가져다 대자 태화가 그를 가볍게 밀어냈다. 세준이 눈을 들자 태화가 폰을 뒷주머니에 집어넣으며 세준을 지나쳤다. 코트를 집어 들자 세준이 "아직 몸도 안 좋은데 나가겠다고? 약도 안 맞고?" 하며 늘어진 코트 자락을 붙잡았다.

"네가 준 약 집에 아직 많아."

"이거랑 그거랑 같아?"

"달라?"

태화는 지호가 어디쯤 왔을까 가늠하며 소파에 편하게 앉았다. 아직 주사기를 내려놓지 않은 채로 세준이 태화의 동선을 눈으로 좇고 있었다.

"아직 강 선생이 등록 안 했나 보네? 지난주에 캠프 다녀왔어."

"닥터가… 너더러, 좋아졌대?"

세준은 눈에 띄게 당황한 기색이었다. 태화는 내심 놀라 그를 유심히 관찰했다.

"왜?"

"뭐가 '왜'야."

"왜 좋아졌대?"

"글쎄, 그것까진 안 물어봤는데."

세준이 주사기를 트레이 안에다 던지듯 내려놓았다. 안간힘을 쓰며 우위에 서려는 세준이 보기 드물게 평정을 잃은 모습이었다.

그때 지호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귀찮은 걸 겨우 해낸 사람처럼 성의 없이 외쳤다.

"야, 주태화! 가도 된댄다! 가자!"

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지호가 기묘한 적막에 고개를 들었다가, 갑자기 생겨나 있는 세준을 보더니 흠칫 어깨를 떨었다.

"어잇, 깜짝이야. 무슨 말도 없이 그러고 서 있어!"

"무슨 소리야. 가도 된다니."

"우리 애 하원시키려구요, 선생님."

지호가 던지는 농지거리에도 세준은 집기를 정리하며 "안돼." 하고 차단했다.

"으잉? 왜?"

"이대로 나가면 위험해. 못 봤어? 저번에 쓰러지는 거?"

지호가 머리를 긁적이며 태화의 눈치를 보았다. 뭐 어떡할까, 친구야. 답을 줘. 지호가 애타게 태화를 바라봤지만 왜인지 세준의 표정만을 살피고 있었다. 제가 도착하기 전에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인데, 지호는 알 길이 없으니 난감할 따름이었다.

"그럼… 태화가 여기에… 더 있어야… 할까?"

"그래. 얼굴 봤으니까 지호 네가 가서 부모님께 잘 말씀드려줘. 걱정하시지 않게."

"어, 어… 그래, 그럴게. 그래야지. 어."

이쯤 해도 당사자인 태화는 반응도 없이 잠잠했다. 받아들이는 건가? 빼달라고 난리더니. 지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윤지호."

"어? 어, 왜?"

"할아버지 생신날, 연세준이 왔었어?"

태화가 묻자 세준이 지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열렬한 시선을 받게 된 지호는 영문도 모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왔었지. 왜? 인사도 하고 갔는데? 그치?"

"……."

계속 트레이 안의 집기들을 만지작대던 세준의 등이 굳는 게 보였다. 작게 실소한 태화가 몸을 일으켜 세준에게 다가섰다.

"이번에도 망상이라고 해봐."

"왜, 또 무슨 망상하는데?"

제가 언제 동요했냐는 듯 세준이 싱긋 웃으며 빈정거렸다.

"아직도 내가 널 어떻게 했을 거 같아? 어떻게 했을 거 같은데? 네가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태화가 멱살을 틀어쥐었다. 사람이 아니라 마치 솜인형을 들어 올리는 것 같이 세준의 발이 가볍게 허공으로 솟구쳤다. 제정신일 때의 태화가 일반인을 상대로 폭력을 쓰는 건 처음 보는 지호는 입을 막으며 뒷걸음질 쳤다.

태화보다 한참이나 작은 세준의 눈높이가 태화보다 훨씬 높아져 있었다. 목이 졸려 얼굴로 피가 몰린 세준은 태화의 팔을 두 손으로 꼭 붙잡으며 힘차게 버둥거렸다.

"그, 렇게 생각하고 싶겠지…. 내가 너한테 무슨 짓을 해서 컥, 네가 그렇게 된 거라고, 네가 나 때문에 그렇게 됐다고 믿고 싶어도, 다 네 탓이야…. 다 네가 에스퍼인 탓…!"

세준을 가만히 들고 서 있던 태화가 솜인형을 던지듯 침대 위로 내쳤다.

"너무 오래돼서 내가 센터에서 어떻게 일을 처리했는지 잊었나 본데."

"……."

"난 위험을 남겨놓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 그러니까 위험한 짓 하지 마."

태화는 차갑게 세준을 내려보다 돌아섰다. 가자. 태화가 문가로 향하자 지호가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세준을 보다가 뒤쫓는다. 혼자 남은 세준은 목을 붙잡고 콜록거리면서도 킬킬거렸다.

태화와 지호가 떠나고 한참 뒤, 세준은 허전해진 병실에 앉아 벽을 노려보며 말했다.

"하면 어쩔 건데."

***

메시지가 끝도 없이 쏟아졌다.

… [누구랑 통화해?] [오빠 사랑해요!!!!!!!!!] [배우병 말기 환자] [이유 폰 맞아요?] [일반인이신 거 같은데.. 번호 바꾸셔야 될 거 같아요ㅠ sns에 번호 유출됐어요] [유현이 오빠 번호 맞아요? 사랑해요♡] [오빠 탈퇴하지 마요ㅠㅠㅠ] [시발새끼양 전화 받앙] [망돌 출신 개유현 의리 조또 없어ㅋㅋ] [고유현 맞음?] [유혀나왜나몰래번호바꿨어] [좀 띄워주니까 진짜 지 좆대로 사네] [최민아랑 사귄다는 거 사실이에요?] [러브타투 해명하시길] [그룹에 피해주지 말고 탈퇴해] [유현아 개같이 잘되자] [유현아 누나 너무 힘들다 사과문 써주라] [럽스타만 하지 마시고 모두를 위해서 입장문 꼭 부탁드립니다] [꼭 유현이 혼자만 잘되길♡] [왜 자꾸 통화중임?] [응 니땜에 마인 망함ㅅㄱ] [사랑해 기다릴게] …

모르는 번호로부터 쌓여가는 메시지와 부재중 전화의 알림 개수가 빠른 속도로 늘어갔다. 방해금지 모드를 설정하기 위해 폰을 만지는 그 순간조차 전화가 울려서 뭘 건드릴 수조차 없었다. 결국 빠르게 줄어가던 배터리가 순식간에 바닥났다. 울리는 알림에 폰이 꺼진 게 벌써 두 번째였다.

유현은 약간의 감정을 실어 구석에 던져두었다.

"계속 와요?"

짐을 챙기던 시형이 걱정스럽게 돌아보았다.

"시형아, 내리기 전에 나 폰 좀 빌려주라."

"상진 오빠가 지금 회사에 전화한다고 빌려 갔는데…."

"형이 왜?"

"상진 오빠 번호도 퍼졌나 봐요. 그래서 아까 오빠 촬영하고 있을 때도 완전 이렇게 돼가지고…."

시형이 양손 검지를 머리 위에 뿔처럼 세워 보였다. 사생 짓일 확률이 높았다. 좋아하는 사람을 매번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괴롭힐 수 있다니, 참 놀라운 재능이었다. 유현이 허탈하게 웃었다.

유현은 태화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브에는 내내 전화가 꺼져 있었고, 크리스마스 당일에는 촬영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며칠을 내리 앓고 촬영장에 돌아와서도 한 번씩 화면을 확인하는 정도의 짬만 났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영문인지, 오전부터 미친 듯이 폰이 울려 대서 촬영 중간중간 한 번씩 하는 확인을 아예 못했다. 왠지 오늘 연락이 올 거 같았는데….

늦은 밤이 되면 멈출 줄 알았지만 저주가 깃들었는지 멈추지를 않았다. 유현은 제 폰을 내외하듯 멀찍이 떨어져 보았다.

"…깨긴 깼을까."

"뭘 깨요?"

"어? 아니야. 그냥 혼잣말."

똑똑. 그때 창밖으로 누군가 창을 두드렸다. 화들짝 놀라 어깨를 들썩인 둘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여기 주정차 금지 구역인가?"

"모르겠는데요?"

"뭐 때문에 두드리는 거지…."

"그냥 지나가다가 신기해서 두드려보는 거 아닐까요? 사람 없는 줄 알고."

가끔 그러는 경우도 있었지만 바깥에 보이는 실루엣이 너무나 건장한 남자의 것이었다.

"문 잠글까?"

"네."

잠금장치 소리가 평소보다 크게 울린 듯해 긴장한 둘은 서로 마주 보았다. 이어 울리는 똑똑, 소리에 유현도 시형도 어깨를 움찔했다.

"…제가 나가볼까요?"

아무리 상황이 급해도 여자인 시형을 내보내는 건 아니라는 생각에 유현이 고개를 젓고 창문을 빼꼼 열었다. 다급하게 말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문을 열고 나서는 것보단 창문을 열고 확인하는 편이 나았다.

"무슨 일… 어?"

"안녕하세요."

유현은, 말쑥한 차림을 한 채 뒤편에 운전기사까지 대동해 온 태인을 아연하게 바라보았다.

"네, 안녕하세요. 근데 여긴 어쩐 일로, 아니 어떻게 여기에…."

"태화 부탁받고 왔어요."

"무슨 부탁이요?"

"집까지 안전히 모셔드리라고."

"아뇨. 저 지금 집에 가는 중인데 굳이…."

"태화 말론 뒤를 밟는 사람들이 있다던데."

"……."

"안전한 차로 움직이면서 그날 얘기 좀 했으면 해요. 개인적으로 궁금한 것도 있고."

***

남자는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바닥에 내던지고 발로 밟은 뒤 사납게 욕을 뱉었다. 혹시 제가 아는 연예인일까 줄곧 관심을 보이던 사람들과 때마침 곁을 지나던 행인 몇이 그 난동에 눈살을 찌푸렸다. 남자는 주변의 따가운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폰을 만지는 손만이 바빴다.

신호음이 짧게 울리고 누구세요, 상대방의 목소리가 들리자 삐딱하게 반문했다.

"누구냐고? 너 내 번호 지웠나 보다?"

-"아, 도착했나 보네."

"이야, 누구는 쫓겨 다니고 숨어다니고 결국엔 출국까지 당해서 숨도 크게 못 쉬고 살았는데, '아 도착했나 보네'?"

피식 웃는 소리가 귓가에 흩어졌다. 비웃는다고 생각한 남자는 숫제 고함을 질러댔다.

"웃어? 웃어?!"

-"소리 좀 그만 질러. 귀 아파. 안 그래도 연락하려고 했었어. 제발 진정 좀 해."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 진정을 하란 거야!"

-"뭐야, 설마 그 '누구 때문에'의 '누구'가 나라는 거야?"

"아니라고?"

-"말을 똑바로 해야지. 오해할 뻔했잖아. 그럼 나 때문이 아니라 내 덕분인 거잖아."

농담 따먹기나 하는 것처럼 웃음기를 잔뜩 머금은 대꾸에 남자가 실소를 흘렸다.

"지 살자고 나부터 까바친 주제에, 뭐? 오해? 덕분? 뻔뻔스러운 것도 정도가 있지…."

남자는 상대방이 눈앞에 있으면 찢어발기기라도 할 기세로 말을 씹어뱉었다. 그러나 그런 윽박은 가소롭다는 듯 감정의 기복 없이 뒤에 오는 말이 나긋했다.

-"나 아니었으면 너 십 년은 족히 한국 땅 못 밟았어. 내 덕분인 거 맞잖아?"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