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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이거 뭐예요?"
"저희가 보낸 장소 협조 공문에 대한 답신인데…. 계속 한번 읽어보세요."
센터에서 사설 가이딩 기관에 관련 지침을 내리고 있어 더 이상의 장소 협조는 어려울 것 같다는 내용으로 시작하는 글이었다. 그러나 읽어내릴수록 이 답신은 장소 대여 거절이 아니라 답신을 빙자한 요청문이었다. 끝까지 읽어내린 백현수가 사나운 표정의 얼굴을 들었다.
"이게 대체 무슨 개소리지?"
박인영은 백현수가 내미는 것을 챙겨 넣고 차분하게 말했다.
"거절이면 거절이고 승낙이면 승낙인데, 이건 도저히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구요. 그냥 넘기기에는 좀 찜찜하구…. 저희 쪽에서 메일을 넣었는데 굳이 제작사로 답신을 보낸 것도 이상하구요. 제작사 측에서도 이 부분은 감독님이 잘 아실 것 같다고 곤란해하는 눈치였어요."
답답한 듯 한숨을 푹 내쉰 백현수가 어렵게 입을 뗐다.
"따지자면, 거절은 아니긴 하죠. 조건부니까."
"음, 그건… 특정 배우가 그 장소에서 촬영하게 하면 대여를 해주겠다는 거니까, 네. 조건부는 맞는데요."
박인영이 머뭇머뭇 의견을 내놓았다.
"처음에는 거기 대표나 대표 지인이 유현 씨 팬인가 싶었거든요. 감독님도 아시겠지만, 의외로 그런 경우 더러 있잖아요. 그런데 생각하면 할수록 이상한 거예요. 처음엔 정부 기관에서 전체 지침이 내려와서 더는 장소 대여는 어렵겠다고 해놓고, 배우 한 명이 촬영하기만 하면 빌려줄 수 있다는 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
"그리고 전체적으로 요구사항 말고 내용도 좀 그렇잖아요? 장소 선정을 까다롭게 하지 않으면 촬영에 지장이 생길 수도 있다는 둥, 꼭 자기들이랑만 해야 된다는 식으로…. 감독님은 읽으면서 못 느끼셨어요?"
최근에 촬영 장소 섭외에 난항을 겪고 있는 터라 조건부 대여를 거부하자는 의견 개진이 쉽지는 않았지만, 아무리 봐도 꺼림칙한 구석이 있어 덥석 좋다고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게다가 촬영 중에 무슨 문제라도 생겼을 때 유현의 소속사 측에서 손해 배상을 요구해 올 빌미가 되어 골치가 아파진다.
"감독님. 그러지 말고 먼저 협찬 제의가 온 0403CAMP는 어떠세요? 거긴 같은 사설 가이딩 기관이라도 기업 운영 비중이 큰 데라 협찬이 조금 더 자유롭다고도 하구요. 신설된 지 얼마 안 돼서 넓은 데다, 다른 기관에 비해서 사용 제약도 비교적 적고, 거리적으로도 그렇구요. 그쪽이 더 낫―"
"저번에도 말했지만 거기는 절대 안 돼요."
백현수가 논할 가치도 없다는 식으로 손을 내젓자 박인영이 아쉬운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잠시 딴생각에 빠져 있던 백현수는 알람이 울리자 시계를 확인했다. 시간을 확인하자 더 꾸물거리면 지각이었다. 진작에 식은 커피를 단숨에 들이켜고 유리잔을 탁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만 갑시다."
"감독님, 그럼 장소 요청은 어떻게…."
"센터에서 촬영 장소 섭외도 막았는데, 다른 걸 못 막을까 싶네요. 우리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니 그렇게 하겠다고 하세요."
박인영이 볼을 긁적이다가 이내 결심을 굳힌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섰다.
***
"처남. 한 마디만 할게."
"나 폰 좀."
"네 매형이 한 마디만 한다니까?"
"노는 사람 아니라는 말하려는 거잖아."
그 말을 하려는 게 맞았다. 완벽히 간파당한 지호는 분하다는 듯이 콧김을 뿜었다.
"그나저나 여긴 뭐가 이렇게 매번 번거롭냐. 여기도 국가 기관이라 이거야? 웬만한 성인 남자 대여섯이 붙어도 멀쩡한 사람이 퇴원 결정도 혼자서 못 내리게 돼 있는 게 말이 돼? 금치산자한테도 이렇겐 안 하겠어."
"잔말 말고 가서 빨리 허가서 받아와."
"주태화 네가 왜 태영이 누나 동생인 거야, 진짜! 악!"
지호는 괜히 성질을 부리며 근처 보조 의자를 걷어찼다가 정강이를 잡고 콩콩 뛰었다. 태화가 한심한 눈을 하고 쯧쯧 혀를 찼다.
"어우, 이거 왜 이렇게 딱딱하냐?"
지호는 그 단단한 의자에 앉아서 눈물을 찔끔찔끔 흘리며 뼈가 부러진 것 같다고 우는소리를 했다.
"윤지호. 난 네가 어떻게 우리 누나랑 결혼했는지 의문이다. 누나는 너 이런 놈인 거 알아?"
"참, 얘가 뭘 모르네. 누나는 내가 이러면 귀여워하지. 완전 내 매력 포인트."
"미쳤네."
"안 귀엽냐?"
지호가 두 손등을 겹쳐 꽃받침을 하자 태화는 웃음기를 없애고 냉랭하게 말했다.
"진짜 뼈가 부러지고 싶은 거면 말을 해."
"저 자식은 농담을 해도…."
"농담 아냐."
"알겠다고! 네 매형이 부러져서 너덜너덜한 다리를 이끌고 갔다 온다고요! 근데 좀 괜찮아지면 갔다 오자. 나 진짜 아파."
"꾸물대지 말고 가서 빨리 받아와."
"좀 이따가 갔다 오겠다고. 급하냐?"
"연세준이 와서 하루 더 있다 가야 된다고 소견서 작성하면 너 내일 또 와야 돼."
"아우 씨, 그래! 지금 간다, 가!"
"내 폰은 주고 가."
지호가 괘씸하다는 듯이 쳐다보다가 태화가 내민 손이 아니라 침대에 던져주고 후다닥 도망쳤다.
태화는 폰의 전원이 켜지는 동안 의문점을 정리했다.
일가친지 앞에서 태화가 발작을 일으킨 건 이번이 세 번째다. 몇 년 전 조모의 희수연에서, 작년 사촌의 결혼식에서, 그리고 엊그제 파티에서. 증상은 전부 같았다. 갑작스러운 폭주 전조 현상을 보이며 쓰러졌다.
에스퍼가 된 이후로 좋은 상태인 적이 드물었지만, 센터를 나온 뒤에는 빈말로도 좋다고 할 수 없는 최악의 상태가 쭉 지속되었다. 언제 쓰러져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불안정한 육체로, 제가 죽게 된다면 누구도 다치지 않고 혼자 죽는 것만을 바랄 정도로 위태롭게 살아냈다.
그랬으니 이전의 이상 상태에 문제 의식을 갖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이상 상태라고 인식조차 하지 못했다. 세준의 말마따나 예민한 상태에서 인파 속 여러 자극에 오래 노출이 되어 그런 줄 알았고, 실제로 스스로도 극심한 피로감을 느끼던 상태에 쓰러졌으니 충분히 일어날 만한 일이 일어난 것이라 여긴 것이었다.
그러나 근래의 몸 상태는 무서울 정도로 좋았다. 아주 길지는 않아도 매일 밤 잠을 청하면 약간의 수면을 취할 수 있었고, 감각들이 시도 때도 없이 과민해져 가만히 있는 것조차 괴로운 순간들도 거의 사라졌다.
"나 상태 좋으면, 센터 안 가고 한 달은 버틸 거 같아?"
"한 달이 아니라 서너 달 정도."
그 말을 들은 게 불과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다. 노민이 없는 말을 지어낼 리도 없거니와, 설령 그게 저를 안심시키기 위한 거짓말이었다고 해도 갑작스러운 폭주는 틀림없이 이상 상태였다.
세 번의 폭주 전조. 공통점은 세 번 모두 전날 밤 세준이 제공한 가이딩 약물을 주입했다는 것. 먼저 일어난 두 번의 경우엔 근처에 다가온 사람을 해칠 뻔했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갑작스럽게 나타난 세준이 극적으로 수습하는 모습으로 마무리 된 사건들이었다. 세준이 사람들 앞에서 대대적인 활약을 보임으로써, 결혼 진행을 앞당겨야 한다는 말이 당연한 명제처럼 따라 나왔다.
모든 정황들이 의심만 하고 있던 가설에 무게를 실어주었다.
태화는 부재중 알림이 상단에 몇 건 뜨는 것을 확인한 후 알림을 눌러 곧장 전화를 걸었다.
「전원이 꺼져있어 삐 소리 이후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되며, 연결된 후에는 통화료가 부과됩니다.」
태화는 폰을 침대 위에 내려놓고 환복했다.
문이 인기척 없이 열리고 사람이 들어왔다. 태화는 뒤늦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김지회?"
"구경 왔어. 오늘내일한대서."
지회의 농담에도 태화는 웃지 않았다. 보안 문제로 센터는 외부인과의 접촉을 철저하게 막고 있었고, 보안 관련 규정 위반은 발각 시 경고로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센터 소속 요원들이 극히 조심하는 부분이었다.
"무슨 일이야? 연세준 올 거야. 빨리해."
그 말에 지회는 머리를 쓸어올리며 "하필이면…." 중얼거리고는 끝내 작게 욕을 읊조렸다.
"너 나가고 우리 팀 갈가리 찢긴 거 알지. 정혁이한테 들었다며."
"그래, 그랬다며."
"애들 잉여 인력으로 내돌려지고 우리 팀닥 지방으로 좌천돼도 한 번도 네 원망 안 했어. 그건 팀장으로서 네 선택을 믿었기 때문이야. 지금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
"……."
"그래도 이거 하나만 알자. 그날 너 누구랑 어디에 있었던 거야?"
"그날?"
"너 수색팀에 체포된 날."
태화가 눈썹 사이를 좁혔다. 수색팀에 체포되다니. 수색팀과 사이가 아무리 안 좋았어도 공과 사는 가릴 줄은 알았다. 수색팀과 사이가 나빴던 건 개인적 감정이므로 전적으로 사적인 영역이었다. 수색팀에게 체포되는 날이 있었을 리가 없다.
"내가 왜 수색팀에―"
"쉿."
태화가 입술을 떼는 순간이었다. 지회가 조용히 하라며 검지를 입술에 댔다. 그러더니 낭패라는 듯 눈을 질끈 감아 내리며 고요한 문 쪽을 바라봤다.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린 모양이었다.
"어머,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 연 선생님."
지회는 금세 표정을 바꾸고는 문을 당겨 열어주었다. 바로 문밖에 서 있던 세준은 손을 뻗으려던 자세 그대로 멈칫하며 지회를 바라보았다.
"여기에 있으면 안 되지 않나요. 김 팀장님."
지회는 별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아니, 그게. 은퇴한 우리 팀장님이 약골이 다 됐더라고, 애들이 저한테 어찌나 호들갑을 떠는지 제가 당최 믿을 수가 있어야죠. 우리 팀장님이 어떤 분이셨는데! 그래서 지나가는 길에 들렀어요. 사실인가 하고."
"김 팀장님."
"근데 애들 말이 맞는 거 같아요. 연 선생님이 보시기에도 그렇죠?"
지회는 대단한 비밀을 얘기하는 양 손날을 세워 세준에게 속닥거리는 시늉을 하며, 끝에는 코를 찡긋거리며 웃어 보였다.
"그나저나, 연 선생님은 어떻게, 잘 지내셨어요? 너무 오랜만이에요. 저 녀석 센터 나가고 나니까 도통 뵐 일이 없어요."
떠드는 입을 막을 명분이 없어 지켜본다는 느낌으로 세준은 눈썹만 까딱였다.
"결혼 준비는 잘 돼가세요? 청첩장도 안 주더라구요 저 자식이."
"청첩장을 드려도, 김 팀장님은 어차피 못 오실 텐데요."
"그러게요. 왜 이렇게 규정이 빡빡하게 바뀐 건지. 몇 년 전만 해도 이 정돈 아니었는데. 그쵸?"
"김지회 팀장님."
"저 자식이랑 결혼하는 게 연 선생님이실 줄 누가 알았겠어요. 축하드려요."
"제가 알기론, 보안 규정 위반은 보직 해임이 가장 약한 징계인 걸로 알고 있는데."
"연 선생님은 연구소 소속인데 어떻게 그런 것까지 알고 계시네요? 근데 아쉽게도, 제가 바빠서 오래는 못 있어요."
태화는 턱을 매만지며 둘의 대화를 흥미롭게 관전했다. 생각보다 팽팽하게 신경전이 오가고 있었다. 지회가 부팀장이었을 때 세준과 그렇게 사이가 나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어쩐 일인지 몇 년 새 앙숙이 된 듯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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