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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사실 어제 저도 잠을 좀 설쳤거든요."
"왜요?"
"저도 걱정이 돼서요."
"무슨 걱정?"
"잘할 수 있을지."
오늘따라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조심스러움과 차분함이 배어 있어 신경이 쓰이던 터라 무슨 말이든 더 듣고 싶었지만, 유현은 더 말하지 않고 싱긋 웃으며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옆모습을 살펴보던 태화의 눈이 가늘어졌다.
잔뜩 긴장했던 게 무색했다. 달달 외울 정도가 된 요약본도 별로 쓸모가 없었다. 아무도 다가오지도 말을 걸지도 않았다.
장소 자체가 어렵고 낯선 건 아니었다. 기업이 주관하는 행사에 불려가면 종종 보는 곳, 종종 느끼던 분위기였다.
위화감이 드는 건 따로 있었다. 가족 모임이라고 부르면서도 그 속에 전혀 섞이지 못하는 태화.
왜 혼자 온 거야? 세준이는 같이 안 왔대? 또 쓰러지면 어쩌려고….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은 태화를 전염병 환자를 대하듯 일정 거리를 둔 채로 쑥덕거렸다. 사람들은 유현은 안중에도 없이 태화를 경계하기 바빴다.
흐르는 물에 손을 씻어도 별 효과가 없었다. 너무 많이 마셨나. 화장실에서 나와 연회장으로 돌아가지 않고 벽에 기대었다.
"재미없죠?"
애써 정신을 가다듬는 중에 누군가 옆에 서서 말을 걸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유현은 눈을 찌푸려 흩어지는 초점을 맞추곤 상대를 올려다봤다.
아, 이 사람. 아까 연회장에서 누구라고 소개해줬던 건 기억이 나는데…. 태화가 소개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던 데다가 죄다 모여 있어 헷갈렸다.
"아."
부모님을 모시고 오느라 늦었다는 태화의 매형인 것 같았다.
"어? 내가 누군지 알아요? 태화가 소개했나?"
"태화 형 친구분 아니세요? 매형이시라고 들었는데."
묘한 웃음기로 눈이 더 가늘어지더니 남자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었다. 유현은 경계심 어린 눈으로 제 앞에 내밀어진 손을 한참 바라보다 천천히 잡았다.
"반가워요. 모르는 거 있으면 얼마든지 물어보고."
그럼, 하고 입을 뗐다. 유현은 민감할 수도 있는 질문이라 목소리를 죽이고 몸을 기울여 물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가족 모임을 하는 이유가 종교적인 이유인가요? 가족 모임이라길래, 식구끼리 오순도순 모여서 밥이나 한 끼 하는 자리인가 했거든요."
"아, 태화가 설명 안 했구나."
신앙을 따르는 가족이 퍽 독실하지 않아도 크리스마스 이브에 모일 수는 있지만, 이렇게까지 성대한 건 듣도 보도 못했다. 무슨 동네잔치도 아니고 아는 사람은 다 불러서….
"태화가 이걸 가족 모임이라고 부르던가요?"
유현이 "아닌가요?" 하며 눈썹을 들어 올리자, 남자는 손을 내저으며 설명을 더했다.
"아아, 가족들이 다 모이는 자리는 맞아요. 오늘이 우신 그룹의 회장님 생신이거든요. 그런데 생일 파티라는 게 초대만 받으면 누구나 올 수 있는 거니까, 가족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있죠."
태인은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가족 모임이라면 수시로 갖고 있으니 유현을 소개할 기회는 몇 번 있었다. 그러나 꼭 이 자리를 택한 데는 굳이 유현을 드러내 세준을 도발하려는 목적 이외에도 아마도 유현을 보호하려는 의도가 크게 작용했으리라.
이 자리엔 태화를 잘 아는 사람보다 잘 모르는 사람이 더 많았다. 몇 년 전 조모의 희수연에서, 작년 사촌의 결혼식에서 쓰러졌다는 단편적인 정보만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태화가 데려온 파트너보다는 태화 본인에게 시선이 더 집중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제게 시선을 집중시켜, 유현에게 향할 수도 있었던 무분별한 시험의 순간들을 차단하려 했음이 분명했다. …겸사겸사 애인 있다고 소문도 좀 내고.
"어떻게 만났는지 물어봐도 돼요? 태화는 말을 잘 안 해주던데."
드디어 써먹는 순간이 오는구나. 유현은 반색했다. 암기했던 것을 뽐낼 기회였다.
"아, 작년에 백현수 감독님이 캐스팅 문제로 직접 만나고 싶다고 연락을 주셨었는데. 그때 감독님 뵈러 나간 자리에서요."
유현이 둘의 첫 만남을 꾸며 내는 동안 태인은 그 모습을 유심히 관찰했다.
생전 관심도 없던 드라마 투자에 대해 졸속으로 알아보고, 잔소리를 견디며 드라마 제작사의 이사로 있는 지호를 설득하고, 결혼을 피하기 위해 저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서 광고 모델을 섭외하게 만들 정도인가?
하나하나 태화답지 않은 처사였다. 저 나름대로 생각이 있기는 한 모양인데 도통 속을 내비치지 않으니 왜 그러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태화가 잘해줘요?"
"네. 그럼요."
"태화 약혼자 있는 것도 알아요?"
"…네에."
"그럼 고유현 씨 전에 고유현 씨 같은 애인이 많았다는 것도?"
유현이 모든 동작을 멈추고 눈을 굴려 태인을 바라봤다.
태인은 유현의 동요를 놓치지 않았다. 아까 비상계단에서도 그렇고 여기도 그렇고, 마냥 가짜는 아닌 모양인데. 서로 진심이기라도 하단 건가.
자리를 비운 시간이 오래되어 직접 찾으러 왔는지 태화가 다가오고 있었다. 태인이 유현의 귀에 살짝 속삭이고 자리를 떴다.
"난 알고 있으니까 상관없는데, 다른 사람한텐 조심해야겠어요. 사귄 지 그렇게는 안 돼 보여요."
"……."
"반가웠어요."
"우리 형이랑 무슨 말 했어요?"
"사귀는 사이 같대요."
유현이 짧게 대답했다. 그 즉시 태화는 미간을 좁히고 두리번거렸다. 무슨 말인지 알아낼 심산인지 그의 형을 찾는 듯했다.
그의 뒤통수를 보던 유현이 대뜸 물었다.
"언제까지 있어야 돼요?"
"벌써 집에 가고 싶어요?"
생각들이 날아가니 오히려 단순해졌다. 유현은 어젯밤부터 저를 괴롭히던 걱정들을 모두 뒤로 하고 술기운을 빌려 지금 하고 싶은 말을 했다.
"아깝지 않아요? 오늘 크리스마스 이브잖아요. 나가서 기분이라도 내요."
"나랑?"
"그럼 누구랑?"
유현이 태화의 말투를 따라 하자 오늘 본 중 제일 밝은 표정이 되었다.
"지금 당장 나가긴 그렇고, 곧 도착하신다고 하니까 부모님께 인사만 드리고."
계속 마시던 샴페인 잔을 두고 논 알콜 드링크를 들어 올린 유현은, 입가에 가져갔던 잔을 떼어내고 눈을 질끈 감았다 뜨길 반복했다.
"왜 그렇게 창백해요? 내 눈이 취해서 이상해진 건가…."
원래도 하얀 사람이 그나마 얼굴에 있던 혈색마저 뺏기니 영락없이 귀신이었다. 태화가 괜찮다며 내쫓듯이 손을 내젓는다. 잠깐 나 좀 봐봐요. 땀 흘려요? 유현이 바짝 다가서서 걱정스럽게 그의 안색을 살피고 있는데, 어디선가 날카롭고 가벼운 구두 소리가 가까워졌다.
"먼저 와 있었네."
말을 건 사람은 시원시원하게 생긴 미인이었다. 여자는 얼핏 봐도 태화와 혈연관계에 있어 보이는 정도로 닮아 있었다. 태화는 유현만 느낄 수 있는 어색한 움직임으로 약간 멀어지더니, 미인에게 아무렇지 않은 척 인사를 건넸다.
"좀 늦었네."
"그런데, 이쪽은…?"
"인사해. 이쪽은 최근에 나랑 만나는 사람. 여긴 우리 누나."
태영은 회사에서 출발하면서 낯선 남자의 등장에 관해 얘기를 전해 들었다. 막내 도련님이 처음 보는 남자를 데려왔다고. 그래서 생각했다. 또 사람 하나 바보 만들겠군.
태화가 그동안 애인이라며 데리고 온 사람 수만 해도 네 명. 세준을 물리칠 만한 카드라면 역시 성별밖에 없다고 생각한 건지 전부 여자였다. 혹시라도 옳다구나 결혼을 시킬까 봐 성별이 여자라는 것 빼고는 별 볼 일 없는 배경의 사람들만 골라오는 태화의 잔머리를, 부모님도 저도 그동안은 모른 척해 줬었다. 하지만 그런 장난도 그만할 때가 되었지.
태영은 빤히 보이는 수에, 이곳으로 오는 차 안에서 내내 코웃음을 쳤다. 여자로는 안 될 것 같으니 남자로 데려온 건가? 태화가 단순히 그렇게 생각하고 데려온 거라면 큰 오산이었다. 세준과 결혼해도 되겠다는 확신만 심어줄 뿐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태화를 아주 곤란하게 만들어줄 작정이었다. 모두가 아는 거짓말을 해도 동정과 아량으로 믿어주던 시기는 끝났음을, 똑똑히 알게 해줄 생각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고유현입니다."
태영은 유현을 뚫어지게 보았다. 태화도, 태영의 곁에 서 있던 지호도 당황하며 유현을 보았다. 세 사람의 시선을 받고 있는 유현은 의외로 덤덤했다.
"……."
관심 있게 보는 눈이 무시는 결코 아니었지만, 인사를 받지 않는 건 분명한 무례였다. 태화는 누나, 불편한 내색을 하며 낮게 불렀다.
태영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우리, 구면인가요?"
그러자 무슨 폭언이 쏟아져도 끄떡 않겠다는 듯 일견 비장함까지 보이던 유현의 낯이, 실수로 발을 헛디딘 사람처럼 멍해졌다.
***
유현은 본 직후부터 줄곧 눈을 커다랗게 뜨고는 "설마 그날 거실에 잠들어 있던 손님이…." 들릴 듯 말 듯 얼떨떨하게 중얼거리던 '진짜 매형'은 태영의 입에서 구면이냐는 질문이 나오자 단숨에 돌변해, 몹시 예민한 얼굴로 제 아내를 끌고 사라졌다. 유현이 초면이라고 대답을 하기도 전이었다.
그 이상한 만남이 있고 나서 쭉 태화와 유현은 둘이었다.
태화는 그의 가족이 모두 도착했는데도 여전히 구석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었다. 태화 주변만 다른 세상 같았다. 그리고 그게 익숙하다는 듯 별다른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속상한 건지 뭔지 기분이 이상했다.
"나 아직 대답 못 들었어요."
"무슨 대답?"
"우리 눈도장은 찍었고 더 할 거 없잖아요. 보니까 오늘이 중요한 게 아니라 오늘 지나서가 더 중요할 거 같은데. 몰래 나가요."
"나가서 뭐 하려고?"
"그때처럼 형 집에서 양주 하나 딸까요? 아, 쿠폰도 집에 있댔죠. 간 김에 쿠폰 회수도 해야겠다."
태화가 고개를 숙이고 웃는다. 유현은 소리 없이 호선을 그리는 눈매와 입매에 잠시 눈길에 뺏겼다.
"또 세 잔 마시고 소파에 쓰러져 자려고?"
"그땐 정말 피곤했―"
숙어진 고개가 금세 올라올 줄 알았지만 숨을 고르듯 잠시 멈춰 있었다. 유현이 "형?" 하며 태화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잠깐만요. 왜 그래요?"
언제부터 흘린 땀인지 셔츠 칼라가 약간 젖어 있었다. 태영이 다녀가는 동안에는 핏기만 조금 없을 뿐 멀쩡해 보여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는데, 이제 식은땀으로도 모자라 입술까지 새하얗게 핏기를 잃은 채였다. 유현이 서둘러 태화의 앞으로 가 무릎을 구부렸다. 안색을 살피려 하자 태화는 몸을 틀었다.
"왜 그래요? 얼굴 좀 들어봐요."
"…괜찮으니까 앞에 봐요."
태화는 제 상태가 급격히 이상해지고 있는 걸 느끼면서도 필사적으로 괜찮은 척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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