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네임 온 잇-56화 (56/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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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유현은 직원들의 배웅을 받을 때까지도 입을 꾹 다물고 있더니 차를 타자마자 말했다. 저 못 받아요.

"왜요, 선물이 싫어요?"

"선물이 문제가 아니고요."

"그럼?"

"어렵게 고른 보람이 없잖아요! 그 많은 옷들을 입고, 벗고! 또 우리가 얼마나 고민했냐구요!"

고민의 시간이 자연히 길어졌던 것은 무엇을 입을지의 문제였을 뿐, 무엇을 사야 할지의 문제는 아니었다.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게 볼 줄 아는 평범한 심미안 정도는 지니고 있었지만, 나쁜 것들 중에서 그나마 덜 나쁜 것을 고르는 일보다 좋은 것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고르는 일이 더 어려운 법이었다.

직원들이 내내 모델 같다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것처럼, 유현이 시도해 본 모든 옷들이 잘 어울렸고, 지불할 능력이 있는데 사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면 아무 문제가 없네요. 나는 오늘 느낀 보람만큼 돈을 낸 거니까."

태연한 대답에 유현의 안색이 아연해졌다. 그러나 유현은 금세 다음 핑계를 마련해 떠들었다.

"그, 그리고, 들어봐요. 내가 오늘 가족 모임에 간 덕분에, 계획대로 파혼을 하게 됐다고 생각해 보자구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지만, 태화는 무슨 말이 나올지 궁금해 잠자코 있었다.

"그럼 우리는 무사히 계약이 끝나고 자연스럽게 멀어지겠죠?"

"……."

"그런데 백화점의 그 직원들이 악의 없이 SNS에 오늘의 일화를 올려버린 거예요. 크리스마스 이브에 누가 와서 누구의 옷을 사줬네 마네…. 동성 커플, 아이돌과 재벌, 크리스마스 이브, 가족 모임, 뭐 이런 온갖 자극적인 키워드로 흥미를 끄는 바람에 우리 둘이 계속 사귄다는 루머가 도는 상상을 해보라구요!"

가만히 말이 끝나기를 기다린 태화가 입술을 비스듬히 올린 채로 다소 쌀쌀맞게 쳐다보았다.

"그래요, 상상해 봤어요. 그게 왜?"

유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왜냐니…. 아니, 근데 남의 일이라고 말을 그렇게…. 내 직업은 소문에 취약하다고요! 계약이 끝나도 난 계속 일을 해야 하는데… 너무하네 진짜?"

"그게 문제라면 걱정할 거 없어요. 입이 가벼운 사람들이었으면 진작에 잘렸을 테니까."

"세상에 비밀이 어딨다고. 지라시가 필요할 때 제일 먼저 새어나가는 게 관계자의 발언인 세상에서!"

인터넷 상에 있는 글들 중에 대부분은 할 일 없는 사람들이 지어낸 소설에 가깝지만, 개중에 때때로 수상할 정도로 앞뒤 정황이 자세하고 정확한 이야기가 B급 지라시처럼 나돌기도 한다며, 잔뜩 열을 올렸다.

"아까 그 사람들 얼굴 못 봤어요?"

"무슨?"

"엄청 놀란 것 같지 않았어요? 흔히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거죠. 분명히 무용담처럼 늘어놓고 싶을 거라고요."

직원들의 반응으로 미루어 보아 기록적인 매상이었음이 확실하다며, 이후 직원들이 그에 대해 떠드는 것을 지나가던 다른 직원이 엿듣고 그것을 인터넷에 퍼트리는 구체적인 상황까지 제시하며 태화의 '전부 주세요'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짓이었는지를 설파했다. 그에 태화는 기가 막혀 웃었지만 유현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니까 선물은 지금 입고 있는 이 옷 한 벌만 받는 걸로 할 거예요."

"결론이 왜 그렇게 될까요."

"배송되기 전에 취소하면 소문이 나는 걸 막을 수 있다니까요?"

"글쎄요. 남 말 떠들기 좋아하는 직원들이라면, 기록적인 매상이 없던 일이 됐을 때 더 떠들 거 같은데."

제가 생각해봐도 그랬는지 유현은 입을 다물었다. 승기를 잡은 태화는 소리 없이 입꼬리를 양 끝으로 끌어당겼다.

"농담이에요. VIP 전담팀은 보안이 생명인데, 직원들이 어디 가서 함부로 떠들지 않아요. 그래도 정 걱정이 된다면 내가 나중에 각별히 입단속에 신경을 써달라 주의를 주라고 할게요. 그럼 문제없죠?"

"……."

"이제 내 보람찬 선물을 받아주기만 하면 되겠네요."

"…내가 부담스럽다면요?"

부담스러워? 이제 와서? 은근히 선을 긋는 태도에 태화는 속으로 다짐했다. 반드시 아까 그 옷들을 전부 안겨주고 말리라.

"그 역시 내 선물의 문제는 아니죠. 고유현 씨가 부담스러워하지 않으면 돼요."

태화의 간결한 대답에, 유현은 꽉 막힌 도로로 눈길을 돌리면서 중얼거렸다.

"크리스마스라고 산타가 막무가내…."

뜻대로 되지 않아 불만인지 차 안에서 유현은 내내 뾰로통했다. 시위라도 하듯이 창문에 이마를 대고 있었다.

*

동그랗게 빨간 자국을 달고 주차장에 발을 딛던 유현까지 자연스럽게 떠올린 태화의 입술이 미세하게 호선을 그렸다.

"으음, 표정 한번 간지럽다. 봄날이네, 봄날이야."

태화는 단번에 얼굴을 굳히고 태인을 노려보았다. 동생의 매서운 눈빛에도 태인은 계속해서 빙글댔다.

"나한텐 또 살벌하네."

"그래서 어떻게 알았냐고."

"잊었어? 내가 예약했잖아."

부담스러웠다니 유감이야. 태인이 굳이 한 마디를 더하며 코를 찡긋거렸다.

"그건 그렇고. 들었어? 할아버님 오늘 못 오신다는 거."

"아니, 못 들었어. 며칠 전에 전화 드릴 때도 별말 없으셨는데, 갑자기 왜?"

"당신 자식들 당분간은 꼴 보기 싫으시대."

"누가 또 할아버지한테 유언장 고쳐달라고 찾아가기라도 했대?"

"그것보다 더했지. 태인이 태영이 계열사 사장 자리에 착착 다 앉히고 태화한테 주식이고 부동산이고 다 나눠주고 나면 우리 애들 몫이 돌아오기는 하는 거냐, 대놓고 그러셨단다. 무려 오늘 아침에, 그것도 할아버님 생신상 위에서."

"누가?"

"작은아버지 일동."

학습 능력이 없으면 눈치라도 있어야 할 텐데. 매년 연례행사처럼 주 회장의 속을 뒤집어 놓는 작은아버지들이 이젠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할아버님은 네놈은 나 죽기만 기다리냐고 노발대발하시고, 심약한 우리 할머님은 옆에서 그거 보시고 놀라셔서 아침부터 몸져누우시고."

가만히 듣던 태화는 뭔가 이상함을 감지하고 설마 하는 얼굴로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 설마 어머니 아버지 늦으시는 게…."

"맞아. 전부 몰려가서 할아버님한테 얘기 좀 잘해달라고 아버지 붙잡고 계신대. 덩달아 어머니도 같이 붙들려 계시는 듯하고."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몰랐다. 불완전한 컨디션으로 유현에게 가족을 소개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태화는 눈을 감았다. 약발이 듣기 시작하는지 몸이 나른해지고 있었다.

돌아온 태화는 얼마쯤 떨어진 곳에서 권태로운 기색의 유현을 바라보았다. 전문가들이 공들여 매만진 유현은 더없이 완벽했다. 제가 걸친 것과 색도 옷감도 전혀 다르지만 나란히 서면 맞춰 입은 것 같이 보이는 차림새를 한 것도 마음에 들었다.

꽤 오래 자리를 비웠음에도 말을 걸어오는 사람은 없었는지 여전히 턱을 괸 채로 삼삼오오 모여 떠드는 무리들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호텔 입구에 내려설 때부터 얼이 빠진 듯하던 유현은 외딴섬처럼 떨어져 있는 것이 수십 분 지속되자 아예 긴장을 풀고 샴페인을 들이키고 또 들이켰다.

슬슬 그만 마시게 해야 하나. 그다지 주량이 대단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낮은 도수의 샴페인이라도 결코 우습게 볼 것이 아니었다.

지나가는 서버에게서 또 한잔의 샴페인을 얻어낸 유현을 말리려는 그때, 중앙으로 난 길을 따라 커다란 보폭으로 앞쪽으로 나아가는 태인의 뒷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까 비상계단에서 태인을 마주쳤을 때 그가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제발'로 시작하는 우울한 목소리를 들었는데, 제 형은 양심 없게도 회사로 돌아가기보다 그의 비서에게 일감을 떠넘기기로 한 모양이었다.

툭툭. 가볍게 치는 손길에 태화가 유현을 돌아보았다.

"여기요."

"뭐예요?"

"사탕이에요."

몰라 묻는 게 아닌데. 태화가 눈썹을 까딱이자 유현이 검지로 제 관자놀이를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

"아까부터 여기를 계속 이렇게 꾹꾹 누르잖아요, 손 여기로."

유현은 제 손등을 뒤로 젖혀서 손바닥과 팔목의 경계로 옆머리를 꾹꾹 누르는 시늉을 해 보인다.

두통과 사탕이 대체 무슨 상관이냐 물으려 태화가 입술을 떼자, "까놓은 거니까 입에 넣기만 하면 돼요." 하며 유현은 벌어진 틈새를 놓치지 않고 막대사탕을 황급히 밀어 넣었다. 태화는 얼떨결에 밀려든 사탕을 물고 설명을 바라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당이 떨어져서 그래요."

"뭐가요."

"오늘 좀 그랬잖아요."

"뭐가 그래요?"

"세상 예민해 보였다구요."

그랬나. 살짝 갸웃한 태화는 이내 별일 아니라는 듯 작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마 잠을 못 자서."

"그 이유는 아니에요. 그쪽 불면증은 갑자기 생긴 게 아니라―"

"그쪽이?"

"형이, 태화 형님이!"

또 굳이 말을 자르고 하는 지적에 유현이 재빠르게 호칭을 고치고는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그동안 계속 불면증을 앓고 있었으니까, 잠 한숨 못 자고 날 만나기도 하고 그랬을 거 아니에요. 그런데 형이 여태 내 앞에서 그런 적이 없단 말이에요. 한마디로 평소랑 완전히 달랐다, 이거죠."

"내가 평소에 어땠는데?"

유현이 그 질문만을 기다린 사람처럼 곧바로 턱을 치켜세우고 눈을 내리깔았다.

"봐봐요. 적어도 이런 표정으로, '여기에서 저기까지 전부 다, 일시불로.' 이렇게 말하거나, 갓 부를 얻어서 세상에 자랑하려는 졸부같이 굴진 않았죠."

유현은 최대한 거만한 표정을 지으면서, 따라 한답시고 낮은 목소리까지 어설프게 흉내 냈다. 그런 감상을 내놓을 거라곤 전혀 예상 못 한 태화는 참지 못하고 결국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과시욕에 취한 졸부 같다는 건가?

태화는 한 건 해냈다는 듯 의기양양한 얼굴로 앉아 있는 유현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래서 싫었어요?"

"싫진 않았고 그냥 뭐…."

"그냥 뭐? 그냥 뭐 어땠는데요?"

"그냥 뭐 우쭐대는 거 좀 재수 없다, 그 정도?"

"재수 없다?"

"그게 다 긴장해서 그런 거예요. 평소에 멀쩡하다가 중요한 일 앞두고 머리가 아픈 이유가 다 너무 걱정을 많이 해서 그런 건데. 사실 어제도 걱정하느라 잘 시간 놓친 거죠? 걱정을 하는 것도 다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란 말이죠. 걱정을 하면 할수록 뇌가 에너지를 쓰게 되고, 에너지가 모자라니까 당이 떨어지고, 그 영향으로 두통이 오고. 다 이해해요. 저도 가끔 너무 바빠서 정신줄을 놓으면 좀 재수 없어지거든요."

평소와 다르게 재수 없는 게 전부 두통 때문인 것 같으니 사탕으로 모자란 당이나 채우고 제정신 챙기란 얘기였다. 헛웃음을 뱉은 태화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유현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할 말을 끝냈다.

"걱정 마요. 형은 연기 초짜에 아마추어지만 저는 프로니까."

태화가 사탕을 혀로 굴리며 물었다.

"이 사탕은 어디서 났어요?"

"집에서 가져왔어요. 긴장되면 먹으려고."

"프로라서 긴장되진 않나 봐요. 다행이네요."

놀리는 투에 유현이 고개를 숙이고 크게 한숨을 쉬었다. 새어 나오는 숨에서 단내가 풍기는 것을 보니 지금부터 나올 말은 취기에 나오는 진심일 확률이 높았다. 내내 말을 아끼던 유현의 속내가 궁금했던 태화는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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