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네임 온 잇-55화 (55/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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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문제는 옷이 아니었다. 전문가의 견해와 본인의 취향을 반영해 고른 옷이 마음에 들지 않을 리 없었다. 그냥 서둘러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귀가 간지러운 극찬과 아부의 향연이 펼쳐지는 이 장소를.

태화의 등쌀 아닌 등쌀에 떠밀려 옷 하나를 마지못해 고르면 신상을 캐치하는 안목이 탁월하다고 칭찬했고, 흔한 셔츠 하나를 피팅해도 이런 디자인과 옷감은 평범해서 피부가 깨끗할수록 옷발이 잘 받는데 어쩜 이렇게 피부 결까지 좋으시냐며 호들갑을 떨었다.

처음엔 이 사람들이 저를 놀리는 건가 의심이 들었을 정도였다. 이토록 지극한 태도라니. 웬만한 의전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아이돌 유현으로서도 곤혹스러운 극진함이었다.

잠깐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태화는 다시 유현을 거울을 마주 보게 했다. 거울의 유현에게 시선을 맞추며 또 물었다.

"이제 어때요?"

작게 한숨을 쉰 유현은 긴히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며 고개를 돌렸다. 태화는 고개를 숙이며 귀를 입가에 대주었다. 유현이 작게 귓가에 속삭였다. 마음에 들고 문제없으니까 빨리 나가요.

"진짜로?"

몸을 바로 세운 태화가 무슨 대단한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심각하게 되물었다. 빨리 나가자니까 뭐가 '진짜로'야. 유현은 눈썹을 찌푸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 무슨…."

직원들이 태화의 뒤에서 긴장된 기색으로 주시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유현은 직원들의 시야에 걸리지 않을 정도로 살짝 고개를 숙이고 눈을 잔뜩 부릅떴다. 소리 없이 항의하는 것이 먹혀들었는지 태화는 피식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태화는 돌아서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한쪽에 성심성의껏 걸어둔 코트를 끄집어내려 팔에 걸고서는, 직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아까 입어본 옷들 전부 저 사이즈로 보내주세요."

안절부절못하던 직원들이, 태화가 가리키는 '저 사이즈'의 방향으로 일제히 시선을 돌렸다. 본분을 잊지 않고 애써 안면 근육을 단속하고 있었지만, 반짝거리는 눈빛과 상기된 볼로 저들이 얼마나 흥분했는지 알 수 있었다.

직원들은 태화와 VIP룸으로 들어서는 유현을 보면서도 '화면보다 실물이 훨씬 더 나으시다' 따위의 립서비스를 태연히 건네던 프로들이었다. 태화와 유현, 둘 다 누군지는 알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듯한, 어떤 종류의 흥미도 의문도 없이 철저히 비즈니스적인 태도를 유지하던 프로들. 그런 프로들의 표정에서 환희와 감동이 전해졌다.

졸지에 돈 많은 애인을 부추겨 제대로 허영을 채운 사람이 된 유현은 황당해 입을 벌리고 눈을 깜빡였다. 이 상황에 당신들이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라고 한다면… 그게 더 이상하잖아. 유현이 언짢음을 숨기지 않고 태화를 바라보았다. 그에 어깨를 으쓱인 태화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입구를 향해 고갯짓했다.

"이제 나가죠."

"……."

직원들은 유현에게 허리를 구십 도로 숙이며 공손의 극치를 선보였다. 유현은 얼떨결에 맞절하다가 직원들과 눈이 마주치기라도 할까 얼굴을 가리고 태화보다 먼저 룸을 빠져나갔다.

***

유현은 샴페인을 홀짝이며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멀리서 구경했다.

가족 모임이라며.

언제나 그렇듯 모임에는 주목을 받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모임의 주최자, 대중들 사이에 주축이 되는 최연장자, 갖가지 문제를 몰고 다니는 이슈 메이커, 혹은 얼굴을 좀처럼 보기 힘든 게스트…. 그래서 유현은 막연히 그게 태화일 거라고 멋대로 판단했다. 가족 모임에도 잘 참석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기도 했고, 약혼자가 아닌 다른 사람을 애인으로 데리고 등장하는 것이니 더욱 관심을 받을 거라고.

"심심해요?"

유현의 심란한 얼굴을 확인했는지 태화가 웃음기를 달고 물었다.

"심심하진 않은데…."

"응, 그런데?"

"아까 놀라지 말라고 한 게 이거였어요?"

"실망했어요?"

이를 예상하진 못했지만 실망과는 엄연히 달랐다. 유현은 샴페인 잔을 내려놓고 표현할 만한 단어를 신중하게 골라내기 시작했다.

"음, 그냥 좀…. 의외랄까."

그랬다. 불의의 연속이었다. 담이 높고 경계가 삼엄한 부촌의 어느 저택일 줄 알았던 모임 장소가 호텔의 리셉션장이었음을 알았을 때도, 그가 말한 가족 모임이 가족'도' 모이는 자리를 가리키는 것이었음을 알았을 때도. 또 리셉션장에 들어서기 직전 어떤 것에도 놀라지 말라던 장난스러운 경고가, 실은 이 숨 막히는 무관심에 대한 경고였음을 알아챘을 때도.

나름대로 세워보았던 예상 시나리오마다 수위의 정도만 다를 뿐으로, 유현은 제게 쏟아질 수모를 단단히 각오하고 있었다. 따가운 눈총과 날 선 말투, 저를 사이에 두고 오가는 고성, 고의적으로 뿌려지는 물세례, 혹은 얻어맞아 얼얼한 따귀…. 그러므로 이 무관심은 유현에게는 너무나도 기대에 어긋난 평화로움이었다.

의외라고 뭉뚱그린 단어에서 복잡한 감정을 느꼈는지 태화는 별말 덧붙이지 않고 그저 웃었다.

태화는 비상약으로 챙겨온 가이딩 약물을 주사할 곳을 찾다가 비상계단에서 뜻밖의 인물을 마주쳤다.

"형."

어, 정 비서님 잠시만요. 조금 이따 다시 전화 걸게요. 전화를 끊은 태인이 "여기서 만나네." 하며 반갑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태화는 긴 바늘로 뇌를 찌르는 듯한 편두통에 머리를 부여잡으며 다가갔다.

"요새 괜찮다며?"

"그러게. 괜찮은 줄 알았는데 아니네."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컨디션 난조는 불행히도 오늘에까지 이어졌다. 감각이 과민해지는 거야 못 견딜 정도는 아닌데, 골이 쪼개지는 듯한 두통은 최근 몇 달간 거의 느끼지 못했던 수준이라 고통에 익숙해진 태화도 순간순간 몸을 움찔거릴 정도였다.

태화는 주머니에서 서둘러 약을 꺼냈다. 팔을 걷은 후 캡을 제거한 주사를 직각으로 꽂아 실린더의 약물을 전부 주입했다. 뒤통수와 등을 벽에 기댄 채로 눈을 감고 약효가 돌기를 기다렸다.

태인은 근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망설이며 입을 열었다.

"주태화, 저번처럼 너 또 상태 안 좋아져서 누가 다치기라도 하면 파혼이고 뭐고―"

"그럴 일은 없어. 어제 가이딩제 먹고 주사했고, 지난주에는 캠프까지 다녀왔고."

중간에 말을 가로채 불길한 가능성을 봉쇄했다.

"왜 하필 오늘이야? 사람들이 너 무서워하는 거 몰라서 그래?"

"아니까 온 거야. 멀리서 보기만 하라고."

태인은 확신할 수 있었다. 태화는 유현을 소개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다. 사람들 많은 곳에서는 태화가 불안정하고, 가족들도 웬만해서는 그런 태화를 귀찮게 하지 않는다는 점을 이용하려고 굳이 이날을 고른 것이리라.

"소문을 내고 싶으면 그냥 스캔들 기사를 내지 그랬냐."

"그럼 일에 지장이 가잖아."

누구의 일일지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제 동생을 관찰하던 태인은 불쑥 내뱉었다.

"꼭 진짜로 연애하는 거 같다, 너."

언짢음과 낯섦이 동시에 느껴지는 어투에 태화가 눈을 떠 제 형을 바라보았다. 현재 상황에선 별로 도움 되는 말은 아니었다.

반면 태인은 흥미로움에 눈을 빛냈다. 부정하지도 않아?

"아까는 백화점을 쓸어 담았다면서?"

시착한 옷들을 전부 구매한 일을 말하는 것이라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게 다 누구 때문인데.

태화도 굳이 옷 한 벌 사 입히겠다고 안 그래도 바쁜 휴일의 백화점을 들쑤실 생각은 없었다. 번거로운 짓은 딱 질색이었으니까.

오늘의 모임은 파혼이 목적이지만 파혼만이 목적으로 보여서는 안 되는 자리였다. 자신이야 어떤 취급을 받든지 상관이 없지만 유현은 달랐다. 일부러 사람들이 많은 행사를 고른 만큼 유현이 남들 눈에 어떻게 비칠지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연예인인 데다, 인식도 별로 좋지 않은 아이돌. 절대 첫인상이 천박하거나 가벼워 보여서는 안 되었다.

다만, 문제는 그런 생각을 한 것이 겨우 이틀 전이었고, 이런저런 조건을 따져 전문가를 구하기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마침 태인에게는 거액을 지불하고 고용한 개인 쇼퍼가 있다는 게 떠올랐고, 아쉬운 소리를 하며 부탁을 했던 것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비서, 개인 쇼퍼, 운전기사, 주치의…. 개인화된 전문 인력은 큰돈이 아깝지 않을 만큼 끈질긴 관찰과 분석을 통해 고용주에게 자신을 맞추는 사람들이다.

태인에게 최적화된 스타일링을 제시하는 것이 주 업무였던 사람이 생판 본 적도 없는 유현에게 딱 맞는 스타일링을 내놓을 수는 없을 것이었고, 충분히 각오한 일이었다. 그래서 백화점에 들어서는 순간까지도, 태화는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다. 기다리고 있는 것이 당연히 태인의 쇼퍼일 줄 알았던 것이다.

그들을 맞아 준 건 백화점의 VIP 담당 쇼퍼들이었다. 패션쇼장처럼 꾸며진 공간을 보며, 태화는 어떻게 된 건지 깨닫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형, 일부러 그랬지?"

"나도 네 말 듣고 부탁을 했는데, 내 쇼퍼가 바쁘대서."

어릴 적부터 따로 나와 살기도 했고, 혹시 모를 위험에 모임이란 모임은 죄다 빠진 탓인지, 태화의 형제들은 그가 소위 재벌로서의 정체성이 희미하다고 생각했다. 특권 의식을 거부하며 홀로 결벽을 떠는 꼴이 보기 싫다며, 태인과 태영은 이런 상황을 만들어 곧잘 태화를 놀리곤 했다.

우신의 일원으로서 이득을 보게 하거나 끝끝내 스스로 과시하게 만들게끔. 스스로 누군지 잊지 말라는 듯이.

귀찮아서 해명하진 않았지만, 그의 형제들이 착각하는 게 하나 있었다. 태화는 타인에게 자신을 재벌로 소개하는 게 싫거나 어려워서가 아니었다. 별로 그럴 필요가 없어서였다.

오늘 태인이 깜짝 제공한 VIP 쇼룸에 태화가 몹시 당황하고 어쩔 줄 모를 거라 예상했겠지만 실제로는 큰 감흥이 없었고, 떠받들어지는 일 따위로 골탕을 먹을 거라 생각하는 귀여운 발상이 우스울 따름이었다.

태화가 짜증 나는 건 그런 게 아니었다.

"내가 백화점에 갈 줄 몰라서 형한테 부탁했을까? 싫으면 싫다고 얘길 하든지."

"재력을 뽐낼 기회를 만들어줬는데 이 형님께 고마워하지 않고."

"형의 그런 오지랖, 별로 기껍지 않다는 것만 알아둬."

"왜, 부담스럽대?"

부담스럽다는 말을 듣자마자 말다툼 아닌 말다툼이 떠올라 태화의 신경이 대번에 곤두섰다.

"그래서, 형은 쓸어 담았다느니…. 그런 얘길 어디서 들은 건데? 직원들 입이 그렇게 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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