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네임 온 잇-52화 (5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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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주태화가 웬일이야."

말을 거는 건 검사가 끝났다는 신호였다. 반듯이 누워 있던 태화는 눈을 떴다.

"나 너 컨디션 이렇게 좋은 거 간만에 본다. 오늘은 가이딩 안 해도 되겠다. 다음 예약자한테 넘기는 걸로 할게?"

분주하게 돌아다니던 노민이 잔뜩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캠프로 불리는 사설 가이딩 기관은, 공혈을 하듯 낮은 등급의 가이드의 방사 가이딩을 에너지 형태로 저장해 놓으면 그를 예약한 에스퍼에게 제공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기관의 약물 사용이 가능한 비상 상황은 몇 가지로 엄격히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가이딩 여유분이 운영 능력의 판단 지표였다. 태화가 방문하는 날이면, 가이딩이 모자랐으면 모자라지 이렇게 남는 경우가 없기 때문에 기관장격인 노민은 무척이나 기분이 좋은 듯했다.

태화는 바로 내려서지 않고 베드 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서 탐탁잖은 듯 팔짱을 낀 채로 노민을 바라보고 있었다. 태화가 센터에서 팀장 노릇을 하기 전부터 봐온 노민은 저 지긋한 눈길이 무슨 의미인지 알았다.

"왜, 뭐, 뭐. 또 뭐가 마음에 안 드는데. 넌 컨디션 좋은 게 싫냐?"

"아니. 센터랑 말이 달라서."

노민은 그건 또 무슨 개소리냐는 듯 인상을 찡그리며 돌아보았다.

"나 지난달에 센터에 실려 갔었거든. 그때 그러더라고. 상태가 너무 안 좋다고."

"뭘로 실려 갔는데?"

"가이딩 부족이지, 뭐."

"가이딩 부족이라고? 에이, 말도 안 돼. 한 세 달 전 일인데, 네가 착각한 거 아니고?"

"지난달 맞아. 그래서 일부러 여기 온 거고. 다음 주에 가족 모임 있거든. 처음부터 끝까지 멀쩡한 정신 유지해야 되는 자리."

노민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다시 차트 화면을 들여다보더니 새퉁스럽게 부정했다.

"아닌데?"

"얼마나 좋은데? 반년은 가이딩 필요 없을 정도인가?"

"반년? 각인한 가이드도 없는 게, 양심이 있어야지. 평소에 요만큼이었으면 오늘은 요만큼이 된 정도야."

엄지와 검지를 오므려 손가락 한 마디쯤 간격을 띄웠다가 중지 한 개 길이 정도로 늘려 보였다. 태화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혀 차는 소리를 냈다.

"뭐야. 엄청 좋은 줄 알았네."

"평소에 네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 줄 모르는구나?"

잔소리가 시작되려는 징조였다. 태화는 팔과 가슴팍에 덕지덕지 붙은 검사 장치들을 스스로 떼어내고 일어섰다.

"너 상태도 심각한데 상성까지 안 좋아서 버려지는 가이딩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그거 아까워서 예약은 어떻게 받는대?"

"그러니까! 나도 네 예약은 안 받고 싶어!"

태화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형식상 걸친 검사 가운을 벗어내고 옷걸이에 걸린 셔츠를 꺼내 팔을 끼웠다. 노민은 바퀴가 달린 의자에 앉아 태화 주변을 어지럽게 굴러다녔다.

"나 상태 좋으면, 센터 안 가고 한 달은 버틸 거 같아?"

"한 달이 아니라 서너 달 정도."

예상보다 더 후한 대답에 태화는 옷을 입다 말고 놀란 얼굴로 노민을 쳐다보았다.

"그렇게나?"

"그렇대도. 그리고 온 김에 밥 한 끼하고 가."

"일행 있어."

"같이 해."

"안 돼."

오늘 방문에 함께 온 사람이 있다는 건 일전의 부탁으로 알고 있었지만, 그 일행이 태화와 어떤 사이일 거라고 생각은 않던 노민이었다. 형님이나 누나의 부탁에 달고 온 귀찮은 혹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센터를 나온 태화가 얼마나 좁은 인간관계를 맺으며 살고 있는지 아는 노민은 놀라워하며 물었다.

"누구야?"

"누군지 못 봤어?"

"아직 못 봤어. 누군데?"

태화는 별다른 대답 없이 한쪽 입꼬리만 올린 채 단추를 하나씩 끼웠다.

저거 저 재수 없는 웃음, 분명 뭐가 있는 건데? 노민이 끈덕지게 캐물었지만 태화는 특유의 '재수 없는 웃음'만 입에 건 채 일절 대답하지 않고서 성큼성큼 검사실에서 걸어 나갔다.

다음 예약자 차트를 정리하던 노민은 금세 집중력을 잃고 중얼거렸다.

"이제 꼬랑지도 없는데 지가 대체 누구랑 와."

***

사설 가이딩 기관이라고 태화가 말했을 때 혹시나 했는데, 와보니 정말로 촬영을 했던 장소 중 하나였다.

건물을 통째로 빌리는 것은 천문학적인 액수가 든다고 했다. 적정선에서 제시한 대여료로 이 건물에서 사용 가능한 구역은 극히 일부였다. 때문에 유현은 건물의 바깥은 마음껏 둘러봤어도 이렇게 내부까지 볼 수는 없었다. 오늘은 직원의 안내에 따라 마음껏 구경을 한 유현은, 두리번거리며 건물 안쪽의 응접실로 걸어 들어갔다.

친절한 직원은 유현이 자리에 앉자마자 쿠키를 권했다. 쿠키를 먹을 생각이 없던 유현은 기대하는 눈빛에 어색하게 웃으며 집어 들어 한입 베어 물었다.

"입맛에는 좀 맞으세요?"

"오, 네, 맛있어요."

"제가 직접 만든 거예요!"

"직접 만드신 거예요? 어디서 사 오신 건 줄 알았어요. 정말 맛있어요. 최고."

유현이 엄지까지 치켜들자 안심했는지 직원은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가시려나 보다. 검사 끝나고 올 때까지 좀 쉬어야지. 유현이 무릎을 쭉 폈다.

"저…."

그대로 일어서 나갔을 줄 알았던 직원은 할 말이 있는 듯 머뭇거리고 있었다. 뒤편에 서 있는 직원을 뒤늦게 눈치챈 유현이 엉거주춤 일어서 직원과 눈을 맞췄다.

"아, 네. 말씀하세요."

"…사인 한 장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어, 그럼요! 혹시 종이하고 펜…."

"여기요."

미리 챙겨왔는지 뒷주머니에서 아무렇게나 둘둘 접은 종이와 펜이 나왔다. 유현은 펜을 쥐고 앉아서 사인을 시작했다. 눈 감고도 할 수 있는 사인이었다. 유현은 공을 들여 유려한 사인을 만들어 냈다. 알파벳으로 티오를 쓰자 직원은 눈치껏 유현의 옆자리에 앉아 제 이름을 불러주었다. 유현은 간단한 인삿말을 써 내려갔다.

"팀장님이 누구 데려오신다고 해서 저희 엄청 놀랐거든요."

"팀장님이요?"

되묻느라 유현의 손이 잠깐 멈췄다.

"아, 태화 님이요. 예전에 센터에서 팀장님이셨대요. 다른 분들이 아직도 팀장님으로 부르셔서 저도 그렇게 부르고 있어요."

"그렇구나. 근데 다들 왜 놀라신 거예요?"

"여긴 사실 이능력자들만 출입 가능한 곳이거든요."

촬영 섭외가 되는 곳이라 일반인도 방문이 당연히 가능한 줄 알았다. 태화가 전화로 곤란해하던 게 단지 예약 절차가 귀찮아서인 줄 알았지, 아예 들어오는 데 자격 조건이 있는 줄 몰랐다. 무리한 부탁이었구나.

"그래서 제가 여기로 모신 거예요. 가이드이시면 파트너 자격으로 안에 같이 들어가실 수 있는데."

유현은 당황한 표정을 지우고 마치 알고 있었던 것처럼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움직였다. 직원은 다시금 말을 이어갔다.

"어떤 분이 오시려나 직원들이 많이 궁금해했었거든요. 그분은 아닌 거 같은데 대체 누구실까 하구. 근데 고유현 씨가 오실 줄 몰랐어요!"

"그분이요?"

유현의 흥미 가득한 눈빛에 부담감을 느꼈는지 직원의 입가에 애매한 미소가 감돌았다.

"어…. 네! 예전에 팀장님이랑 같이 오시던 분인데, 저는 일한 기간이 짧아서 못 뵀어요. 직원 분들은 여기서 오래 일하신 분들이라 다 아시는 분이라고 하더라구요."

"다 아시는 분…. 그렇구나. 여기요."

사인을 끝내고 종이를 돌려주자 직원은 기쁜 얼굴로 받아들었다.

약혼자인가? 아니면 파트너? 마침 유현은 저번에 못 들은 대답이 있었다는 걸 기억해 냈다.

여태 나름 침착하게 말을 잇던 직원은 사인과 함께 적힌 글귀를 읽더니 뭔가 벅차오른 듯 제 두 손을 꼭 모으고 말했다.

"사실은요. 제가 마인 팬이거든요."

"헉, 감사합니다."

"근데 이렇게까지 프로페셔널하신 분인 줄은 몰랐어요. 무대 잘하는 건 너무 잘 알고 있었는데에…."

"……?"

"드라마 때문에 오신 거죠?"

직원이 무슨 오해를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어쩐지 건물 소개를 구석구석 너무 열심히 해주시더라니. 울먹거리는 직원의 입에서 프로페셔널이 나온 이상, 오늘의 이 방문은 현장 답사 목적이어야 했다.

"어, 그, 네, 아시는구나! 네, 개인적으로 궁금해서 제가 부탁드렸어요. 캐릭터 연구? 뭐, 그런 거 때문에, 현장 답사나… 그런 것들이 조금 필요해서…."

"두 달 전에도 여기 촬영차 방문해주셨죠? 그때도 제가 그 서류 담당했었거든요. 더 둘러보고 싶은 곳은 없으세요?"

유현이 눈을 굴렸다.

"아……. 저희 팀에서 컨택하셨던 담당자 분이셨구나……."

제작부에서 애를 먹었다던 담당자와 동일인이라곤 믿기지 않았다. 유현은 혼란스러움에 눈빛이 흔들렸다. 깐깐하기가 말도 못 한다며, 서류를 대체 몇 개나 준비하라는 거냐며 땅이 꺼지듯 한숨을 쉬는 걸 영준이 들었다고 했는데.

"그러니까 마음 푸욱 놓으세요!"

"네?"

"저를 비롯해서 여기 직원들은 비밀 유지 서약을 하거든요. 드라마 관련 정보가 새어나갈까 봐 걱정 안 하셔도 된답니다!"

"가, 감사합니다…."

"정말 너무 멋있으세요. 응원할게요!"

팬을 속였다는 죄책감에 유현이 볼을 긁적이며 먼 곳을 바라보았다.

***

그분? 그분이 누굴까….

"그럼… 좋아하던 가이드는 없었어? 진짜로 결혼하고 싶은 사람."

거기에 뭐라고 대답했더라. 분명히 뭐라고 했던 거 같은데. 유현은 과자를 똑 입으로 베어 먹으며 흐린 기억을 마구 헤집었다.

다시 물어볼까? 진짜 순수하게 궁금해서 그런 거니까…. 그런데 지금 그걸 물어보면 뜬금없지 않을까?

"일부러 그러는 거예요? 기다리게 했다고?"

"네? 뭐가요?"

"그렇게 흘리면서 먹는 거요."

태화의 지적에 아래로 내려본 유현이 과자 부스러기가 흩어진 것을 보고 화들짝 놀라 쿠키를 허둥지둥 봉투 안에 집어넣었다.

"그만 먹으란 얘긴 아니었는데. 더 먹어도 돼요."

"아니에요. 다 먹었어요."

최대한 조심스럽게 가루를 손에 모아서 창밖으로 날린 후 유현은 산뜻하게 말했다.

"세차비 나오면 청구하세요."

"청구하면요?"

"물어내야죠."

"커피 쿠폰으로?"

쿠키 봉투를 뒷좌석에 두던 유현이 몸을 돌리다가 말고 어이가 없다는 듯이 입을 벌리고 태화를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커피 쿠폰은 꼭 돌려받아야겠다."

"그렇게 해요. 그럼 그걸로 세차비 다시 내는 건가? 창조 경제네."

"허! 아직 커피 안 바꿔 먹었다는 거 거짓말 아니죠? 조만간 찾으러 갈 거예요. 진짜로."

여간 즐거워 보이는 게 아닌 옆모습에, 유현이 헛웃음을 지었다. 가만 보면 사람 놀리는 거 참 좋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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