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네임 온 잇-47화 (47/69)

(47)============================================================

47.

"모른 척해 주는 것도 지쳐. 너도 좀 정도껏 해라. 각인도 스폰받다가 생긴 거잖아. 이 바닥에 그거 모르는 사람 없어. 그런데 뭐, 누군지를 몰라? 상진이 형이나 속아주지, 지나가던 개도 웃어. 너 그렇게 당하고도 스폰받는 버릇 못 고쳐서 계속 스폰서랑 놀아나다가, 봄에 그 사달 난 거잖아. 그러고는 슬슬 약발 떨어진다 싶으니까 바로 갈아타는 너도 참 너다."

"……."

"알아서 하자고? 너만 아니었어도 알아서 잘했어."

유현은 너무 화가 나면 머리가 새하얘진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전에도 인성과 부딪치는 순간들이 많이 있었지만 이렇게 전면적으로 그룹을 위해 한 노력을 부정당한 건 처음이었다.

데뷔하고 그룹 스케줄이 비는 동안 유현은 저를 불러주는 모든 예능에 출연했다. 단 십 초 홍보의 기회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뛰고 구르고 웃고 박수를 쳤던 그 시간들. 드라마나 영화 촬영 중에도 컴백 준비에는 소홀할 수 없었던 짧은 밤과 이동 시간에 외울 게 산더미처럼 쌓여 졸음과 힘겨운 사투를 벌이던 치열한 아침이, 저 인간에게는 아무 의미도 아닌 것이었다. 억울하고 아까웠다.

유현은 인성에게 무어라도 쏘아붙일 작정으로 돌아섰지만, 헛소리를 듣다 보니 머리 꼭대기까지 오르던 화도 가라앉아 버렸다. 실망도 기대가 있어야 하는 법이었다. 원래 어떤 사람이었는지 잊고 있던 건 유현도 마찬가지였다.

"그래. 그런가 보다. 형 말대로 내가 나밖에 모르나 봐. 됐지? 할 말 다 했으면 가볼게."

"형은 이제 속이 좀 시원해?"

이번에는 내내 잠잠하게 있던 주영에게서 걸려온 시비였다. 유현이 반쯤 틀었던 몸을 다시 되돌렸다.

"넌 또 뭔데."

"계속 우리 원망하고 있었던 거잖아. 숙소에서 나가라고 그랬다고, 상반기에 우리끼리 컴백하겠다고 그랬다고.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되든 안중에도 없는 거지? 맞지?"

당연한 말에 유현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결정하지 못하고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었다.

논란이 터지기 시작한 4월 말, 유현은 그룹에 피해가 가지 않게 하려고 자진 탈퇴 의사를 표시했다. 그러나 여기에 없는 멤버 정효와 시현이 그럴 거면 자신들도 함께 나가겠다며 화를 냈고, 연이어 터지는 논란에 홍보실 불 꺼질 새 없는 나날을 보내던 회사 측에서마저 봄이 지날 때까지는 일단 지켜보자며 만류했다.

그런데도 둘은 빨리 거취를 결정하지 않고 그룹에 피해를 줬으니 이제 와 유현에게 책임감을 가지라는 식이었다. 세상 모두에게 손가락질당할 때 기다렸다는 듯이 탈퇴를 종용하던 둘이 컴백이 밀렸으니 혼자 속 편한 꼴은 못 보겠다고 붙잡고 기어이 한 마디씩 얹는 꼴이 기가 막혔다.

목구멍까지 독이 올랐다. 어떤 표정이 저들의 열등감을 건드리는지, 어떤 말을 해야 한 번에 무너질 수 있는지, 유현도 알고 있었다. 몰라서 가만있는 게 아니었다. 그렇게 악에 받쳐 입을 여는 찰나였다.

"아니, 이게 누구야! 대한민국 최고의 배우 고유현이잖아~"

멀리서 유현을 알아본 정효가 눈코입을 인간이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크게 벌리며 다가왔다. 시끄럽게 복도를 울리는 오두방정에 정효를 등지고 있던 인성과 주영도 뒤를 돌아 정효의 등장을 확인했다.

바짝 다가와 대뜸 손바닥으로 가슴을 툭툭 치며 "쓰읍, 저번에 볼 때보다 몸이 많이 좋아졌는데?" 하고 신소리를 하는 정효에게 웃어주는 것만으로 숨 막히는 공기가 편해졌다.

"무슨 얘기들을 하셨길래 이렇게 심각해?"

늘 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정효가 이번에도 가볍게 분위기를 흔들었다. 유현은 괜히 정효의 기분까지 망치고 싶지 않아 정확히 주영을 보며 한숨처럼 내뱉었다.

"그만하자. 간다."

"야야야, 나 이제 왔는데 어디 가!"

"대표실."

"아아, 대표님 만나러 온 거였어? 으응. 어서 가보셔, 가 봐."

정효가 저 멀리서 끌고 온 깃털 같은 가벼움에 그대로 희석되어 갈등이 소강상태로 접어드는 듯했다.

"아, 형 지금 대표님 만나러 가? 잘됐네. 지금 대표님한테 형이 대신 말하면 되겠네. 컴백 시기 밀리게 하지 말라고. 형도 어차피 마인에 마음 떴잖아. 굳이 드라마 종영할 때까지―"

"목주영, 너 이 새끼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정효가 서둘러 입을 막았으나 유현이 이미 모두 들어 버린 후였다. 유현이 빙그르르 몸을 돌렸다.

"하하, 얘가 왜 이래…."

"놔! 에잇, 퉤퉤!"

필사적으로 벗어나려는 움직임에 정효가 주영을 놓치고 말았다.

마인에 마음이 떴으니 컴백 시기를 드라마 종영 후로 밀리게 하지 말라?

유현으로서는 합류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아예 없었다. 그런데도 회사에서는 다짜고짜 마인 멤버들에게 유현의 드라마 촬영이 끝나기를 기다리라고 통보한 거고, 그 화풀이를 인성과 주영은 지금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에게 하고 있는 것이다.

정효가 말리려고 했던 걸 보면 이 오해를 정효도 어느 정도는 알고는 있었던 듯싶었고, 대표가 오늘 꼭 얼굴을 보자던 것도 이 건 때문일 것이다. 바보가 된 기분에 유현은 픽 웃었다. 그룹 활동을 하랬다가 말랬다가 자기네들 마음대로네.

"그래, 가서 꼭 그렇게 말할게. 나는 마인에 마음 떴으니까 절대로 컴백 밀리게 하지 말아 달라고."

유현이 서늘하게 웃으며 말하자, 주영이 눈을 깜빡이며 주춤거렸다.

뒤돌아서 대표실로 향하는 유현의 뒤로 정효가 후다닥 따라붙었다.

"유현아, 유현아. 저 새끼 아무것도 모르고 저래. 맨날 저러잖아."

"괜찮아. 신경 쓰지 마. 내가 나중에 연락할게."

더는 따라오지 말라는 듯 잘라내는 단호함에 정효는 걸음을 멈췄다. 그러고는 짜증스럽게 뒷머리를 긁으며 멀어지는 유현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언제나 사고만 칠 뿐인 막내 주영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이 미친새끼야, 지랄할 데다 해야지! 넌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되냐?"

정효가 분노를 담아 주영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뻑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미쳤어? 왜 때려!"

"쟤는 우리 컴백 자기 때문에 밀린 줄 몰라, 지금!"

"어쩌라고! 이제 알았잖아! 그럼 된 거 아냐? 대체 내가 뭘 잘못했다고 때려? 정효 형은 왜 맨날 저 형만 감싸고 돌아? 왜 내 편은 안 들어줘?"

"왜 내가 유현이 편만 드냐고? 고유현은 가끔 실수해도 대부분은 도움이 되는데 목주영 넌 한결같이 도움이 안 되는 새끼라서야."

"내가 왜! 우리끼리 하면 나도 잘할 수 있어! 도움 돼!"

"그럼 네가 여태껏 유현이 때문에 일부러 못 했다는 거냐? 하아, 이 가망 없는 새끼 어떡하면 좋지?"

멍청하니 말이 안 통했다. 혀를 찬 정효는 곧바로 타겟을 바꿔 인성에게 따졌다.

"인성이 형. 형까지 왜 그래. 이 새끼 말려도 모자랄 판에 왜 옆에서 부추기고 있냐고? 형은 또 유현이한테 뭐라 그랬어?"

"주영이 말 틀린 거 없어. 쟤 이제 알았으니까 됐고, 이제부턴 우리끼리 하면 돼."

"뭐, 뭐? 형 미쳤어? 되긴 뭐가 돼? 컴백은 무슨 돈으로 할 건데?"

"췌, 유현이 형 없다고 회사에 돈이 없어?"

"회사 지금 좆됐어. 무리하게 사옥 짓고 다른 회사 인수한다고 있는 돈 없는 돈에 사채까지 끌어쓰다가."

정효의 간결하고도 극단적인 설명에 주영은 믿기 힘든지 도움을 구하는 표정으로 인성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돈이 아예 없지는…."

"내가 방금 말한 거 콧구녕으로 들었냐? 없어, 없다고. 현욱이 형이 하는 말 못 들었어? 유현이 아니면 하반기에 큰일 날 뻔했다잖아. 넌 그럼 그것도 그냥 매니저 형이 유현이 편들어 주려고 하는 말인 줄 알았냐?"

"……."

"논란 터져서 좆같이 시끄러웠을 때도 회사에서 유현이 끝까지 안고 있었던 이유가 뭔데? 예뻐 죽겠어서?"

"……."

"어으, 이 빡대가리 새끼, 새대가리 새끼…. 안 그래도 계약 기간 끝나가서 안 한다고 하는 거 해달라고 빌어서라도 합류시켜도 모자랄 판에, 씨발…."

주영이 한껏 풀이 죽어 고개를 수그렸다. 그러다 잘못을 저지른 강아지처럼 눈만 들어 머뭇머뭇 물어보았다.

"근데 형. 유현이 형 계약 기간이 끝나 간다는 건 무슨 말이야? 유현이 형은 우리랑 계약 기간이 달라?"

정효가 그 순진하고도 머저리 같은 눈을 보자 견딜 수가 없는지 "씨발!" 소리를 지르며 킹콩처럼 날뛰었다. 유현의 앞에서야 성질을 죽이고 지낸다지만 주영의 앞에서는 거칠 것이 없었다.

"암것도 모르는 새끼가 입만 살아서는…."

"그쯤 해."

주영이 쪽도 못 쓰고 찌그러지는 꼴을 보고 나서야 분이 좀 풀리려고 하는데, 그 옆에서 또 인성이 초를 치고 있었다. 정효는 전혀 사그라들지 않는 기세로 인성에게도 건들거리며 비아냥댔다.

"다 같이 유현이 덕 봐놓고 형도 이러는 거 아니야. 강수 때문에 아직도 이러는 거야? 아니지? 강수랑 우리 3년이고, 유현이랑 우리가 같이한 거 자그마치 5년이야, 5년. 어?"

"……."

"우리 스케줄 하나도 없을 때 쟤가 악착같이 방송 돌았던 거 잊었던 거 아니지? 인기 얻자마자 우리 멤버한테 고정 패널 자리 넘겨주고, 끼워팔기 소리까지 들으면서 우리 광고 출연시켜 줬던 거 잊은 거 아니지? 아니지? 어? 제에발 아니길 빈다."

정효는 으르렁대며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주영이 혼란스럽게 정효와 인성을 번갈아 보는 반면, 인성은 그저 귓가에 들려오는 욕지거리에 거슬린다는 듯 눈가를 살짝 찌푸릴 뿐이었다. 인성은 조용히 가라앉은 눈으로 말했다.

"우린 가자."

"네? 네…."

***

유현은 몇 발 되지도 않는 거리를 데려다주겠다고 나서는 상진을 의자에 눌러 앉혀두고 홀로 회사를 나섰다.

대표와의 면담은, 미리 얘기가 됐던 것처럼 사생팬의 처분과 거취에 관한 논의가 먼저였다.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지만, 사생팬이 잡힌 건 전부 태화 덕분이었다.

사사로운 목적으로 cctv를 돌려보는 걸 엄격히 금지하는 데가 많아, 관리실과의 마찰을 대비해 경찰을 대동했지만, 의외로 영상을 넘겨받는 건 수월했다고 했다. 문제는 영상을 확보한 후였다.

오피스텔 복도엔 cctv가 없어 살펴볼 수 있는 자료는 로비와 주차장 영상이 전부였고, 전날 영상을 눈이 빠져라 들여다보며 의심이 가는 사람을 골라냈지만, 모자와 마스크 때문에 cctv로는 식별할 수가 없었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