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네임 온 잇-46화 (46/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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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연예인도, 회사 사람도 아니구나? 피곤해 죽겠는 몸 이끌고 말해도 모르는 사람이랑 차 마시면서 얘기하다 온 거면, 데이트 아니야? 아니면 뭔데, 말해봐."

여기서 말려들면 안 된다는 걸 아는데 유현은 강하게 부정하고 싶었다. 음료 한잔 들고 강가 걸으면서 얘기 조금 한 게 전부인데 데이트는 무슨 데이트. 사실 처음부터 한강에 가려고 한 것도 사생을 피해서 집으로 오던 길이었다. 그게 어떻게 데이트야. 절대 아니지.

유현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유성을 지나쳤다. 유성은 욕실로 향하는 유현의 뒤에 바짝 붙어 "자꾸 왜 숨기는데? 형 이런 거 숨기는 사람 아니잖아." 하고 귓가에 속삭였다. 유현이 "아, 진짜!" 하고 신경질을 부리며 유성을 밀어냈지만 오히려 신난 얼굴로 달라붙으며 약을 올렸다.

"여자 맞지? 애인이지? 어? 내 말이 맞지?"

"가라고 했다."

"맞잖아! 인정해. 인정하면 보내주고."

"나 씻어야 된다고. 비키라고 했다."

"피곤한데 만난 사람 누군데. 빨리 말해줘. 안 그럼 나 엄마 깨운다?"

화장실 문 앞에서 소리 없이 몸싸움을 벌이던 유현은 결국 주먹을 들었다. 거실에는 곧 형제가 치열하게 투닥대는 소리만 난무했다. 제법 타격이 센 유현의 주먹을 요리조리 피하면서도 유성은 형의 팔을 잡은 손은 놓지를 않았다.

"……."

소파에서 엎치락뒤치락하던 둘은 안방에서 들리는 인기척 소리에 일제히 움직임을 멈췄다. 안방의 동태를 살피느라 유성의 손힘이 약해진 틈을 타 유현은 얼른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숨이 차 양 허리에 손을 올린 유현은 숨을 몰아쉬며 본 중얼거렸다. 저 지독한 새끼….

세면대 물줄기 아래 손을 갖다 대던 유현은 팔목을 멀뚱히 내려다보았다. 벌겋게 손자국이 남아 있었다. 유현은 눈썹을 좁히며 짜증스럽게 내뱉었다.

"무식하게 힘만 센 저거 진짜 어떡하지?"

내가 불을 끄고 갔었나. 아무 생각 없이 방 불을 켰다가 소리를 지를 뻔한 유현은 침대 가운데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유성에게 달려들었다. 놀랐다고, 놀랐다고! 유현이 수건을 휘두르며 응징하자 몇 대 맞아주던 유성은 금세 피하며 낄낄거렸다.

"빨리 말해. 수상한 냄새가 난다고."

"왜 이렇게 집착해? 냄새가 나긴 뭔 냄새가 나?"

"아무 사이 아닌데 왜 늦은 시간에 만나냐고."

"그냥…! 촬영 끝난 시간이 늦은 거야! 만나서 드라마 자문 구했어! 알지도 못하면서…."

자문이라는 말에 유성은 김이 샜다는 표정으로 침대에서 내려갔다.

"뭐야. 그럼 처음부터 그렇게 말할 것이지."

"잘 거야. 갈 때 불 끄고 가고."

지나치게 기억력이 좋은 동생에게 이 이상 거리를 제공해서는 안 되었다. 분명 이 일도 기억해 두었다가, 조금만 늦게 들어와도 그때 그 자문을 구한 사람이냐며 귀찮게 하거나 저 심심할 때 그 밤에 대체 무슨 자문을 구했냐며 들러붙을 수도 있었다. 절대 휘말리지 말아야지.

유현이 수건을 대충 걸어두고선, 잽싸게 이불 속으로 들어가 목까지 덮어 올리며 눈을 감았다. 그러자 유성은 더는 떠들지 않고 저벅저벅 걸음을 옮긴다.

불이 꺼지는 소리에 유현이 번쩍 눈을 뜨고 다급하게 유성아, 하고 불렀다.

"왜?"

"내일 강의 있어?"

"있어."

"몇 시에?"

"아홉 시. 왜?"

"너 일어났는데 나 자고 있으면 좀 깨워주라."

"오호라, 심지어 오전 촬영이었는데 밤늦게까지…."

유성이 어둠 속에서 쓸데없이 말을 늘리자, 유현은 베개를 던지며 소리쳤다. 나가! 새끼야, 나가!

***

유현을 바래다주고 돌아가는 길, 태화는 핸들을 세게 틀어쥐며 헛웃음을 흘렸다.

"스토킹?"

집을 드나들던 사람이 스토커였다니. 조사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것이었다.

태화는 계약서를 전달한 날 호텔 앞에서 유현이 네이머인 것을 확인한 후, 약 삼 개월 동안 유현의 각인 상대를 찾기 위해 은밀히 조사를 진행해 왔다.

그러나 희한한 건, 이상할 정도로 특정할 만한 인물이 없었다. 마치 스스로 고립되기를 자처한 사람처럼 아무 데도 나가지 않고, 아무도 초대하지 않고, 아무도 만나지 않고. 힘든 일을 겪어 일시적으로 대인기피증이나 공황장애가 생겼던 거라고 짐작해 조사 기간을 이전 몇 년으로 늘려도 보았으나, 지속적인 교류가 발견되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일반적으로 네이머가 연애 상대에게 각인하는 비율은 극히 낮았다. 각인 네임, '러브 타투'라는 것은 비非 네이머의 생각처럼 그렇게 단숨에 새겨지는 무엇이 아니었다.

각인을 단지 화학 작용으로 보는 관점에서라도, 여러 가지 조건이 있겠지만 최소한 단 한순간이라도 신경의 체계를 부수고 상대방을 '또 다른 나'로 받아들일 준비를 갖췄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었다.

한두 번 만남으로 각인을 하는 경우도 가끔 생긴다고 하는데, 유현의 조심성 많은 성격상 그럴 확률은 낮아 보였다. 그렇다면 주변인 중에서는 그나마 가장 유력한 사람이 스타일리스트 박시형뿐이었다. 몇 년째 꾸준히 만나고 연락하는 유일한 여성. 그러나 태화가 팔목의 네임을 확인했을 때 각인의 첫 글자가 '박'은 아니었다.

태화는 고려 범위를 수정했다. 어쩌면 연예계 인물이 아닐 수도 있었다. 아주 어릴 적에 만났던 사람들 중 하나라면, 가족이 대신 안부를 전해줄 정도로 친밀한 사람이라면 또 몰랐다. 본가에 들를 때마다 만나고 있었다면, 단순히 유현의 행적만 좇아서는 알 수가 없는 것이었으니까.

조사의 결과가 시원찮을 때마다 의아한 한편, '어쩌면 헤어진 게 아닐까'라는 목적 불분명한 기대감이 점점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유현이 네임주와 헤어졌다고 해서 저에게 무슨 큰 이득이 있는지는 몰라도, 그건 분명 나쁜 일은 아니었다. 기쁜 것도 같았다. 그러나 확실해야 했다.

유현의 본가와 접촉하는 인물까지 찾아볼 계획을 세우던 그즈음, 태화는 유현의 집을 들락거리는 사람이 있다는 보고를 듣게 되었다.

20대 여성. 로비와 현관 비밀번호를 공유하고, 자연스럽게 빈집을 내줄 수 있는 사람. 태화는 당연히 그녀가 유현의 애인이라고 생각했다.

촬영이 시작되고 드나들기 시작했으니, 위험한 시기는 지났다 판단한 유현의 허락이 있지 않았나 추측해보았다. 어쭙잖은 기대감이 애인의 존재를 확인하자마자 박살이 났다. 저도 왜 이러는지, 뭘 어쩌고 싶은지 모르는 상태여서 할 수 있는 건 자조밖에 없었다.

그랬는데, 그 여자가 네임주도 아니었고, 하다못해 애인도 아니고. 심지어 몇 년이나 괴롭히며 이사까지 하게 만든 스토커라니. 아까 태화가 유현을 태우러 간 주차장에서부터 줄곧 따라붙던 차량도 스토커 짓이었을 것이다. 머리도 마음도 시끄럽고 복잡했다.

"하."

짧게 날숨을 뱉은 태화는 왜인지 그만 허물어지려는 입매를 손으로 가리며 새벽을 달렸다.

***

유현은 대표의 호출로 회사에 온 참이었다. 상진이 제 선에서 해결해 보려고 애를 쓴 듯했지만, 지 대표가 당사자의 의견이 가장 중요하니 반드시 면담을 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는 통에 별수 없었다.

너무나도 피로해, 두 발로 걷는 게 아니라 마치 스스로의 몸을 들어서 한 발씩 옮기는 기분으로 대표실로 향하고 있었다.

복도에서 팍 거칠게 회의실 문이 열리며 익숙한 두 사람이 나타났다. 리더 인성과 막내 주영이었다. 저 멀리서부터 회의실이 시끌시끌하다 했더니 또 회의 시간에 인성이 제 의견을 관철시키려 패악질에 가깝게 주장을 펼친 듯했다.

"둘 다 오랜만."

회의실 안에서 인성이 누구를 또 잡아서 닦아세웠는지는 몰라도 지금부터 잡을 대상은 확실히 유현인 듯싶었다. 인성이 입꼬리 한쪽을 씩 올리며 인사인 듯 아닌 듯한 말을 건넸다.

"좋아 보이네."

"안 그래. 피곤해."

유현이 예사롭게 대꾸하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막내 주영은 이젠 적의를 감추지도 않고 대차게 노려보았다. 인성이 조소를 머금고서 말했다.

"누군 컴백 밀려서 초조해 미치겠는데, 넌 활동하느라 바빠서 피곤해?"

"내 말 곡해하지 마. 말 그대로 피곤하단 뜻이었어. 어쩌다 컴백이 밀렸는지 몰라도 잘 해결되길 바랄게. 그럼."

이만하면 잘 대처했다고 생각한 유현이 둘을 지나쳤다. 피곤하다는 말도 잘 해결되길 바란다는 말도 진심이었다. 열 받을 줄 알고 꺼낸 말이긴 했지만. 유현도 남의 기분을 신경 쓰고 싶지 않은 날이 있었다.

그들로부터 서너 걸음 벌어졌을 때였다. 인성이 쿵쿵 다가와 유현의 팔을 사정없이 잡아끌었다.

"누구 약 올리냐? 잘 해결되길 바랄게?"

인성이 꼬투리를 잡아 다그쳤다. 그래, 지고는 못 사는 형님이시지. 속으로 빈정거린 유현이 저절로 좁아 들려는 미간에 손을 얹으며 힘없이 물었다.

"왜 이래."

"왜 이러는 줄 몰라?"

"그래서 형은 나한테 지금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그 컴백 밀린 게 나 때문이라고?"

"아닐 거 같아?"

유현이 헛웃음을 쳤다.

"잊었나 본데, 나 쫓기듯이 숙소에서 나온 거 몇 달 안 됐어. 형이 사생 때문에 나 꼴도 보기 싫다고 해서. 이번 상반기에도, 나 빼고라도 컴백은 꼭 해야겠다며? 그래서 알겠다고 했잖아. 거기서 내가 뭘 더 해?"

"애초에 네가 아무 문제 안 만들었으면 될 일이었다는 생각은, 안 들고?"

"그래, 그건 진심으로 미안해. 근데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어."

"그렇게 말하면 다야?"

유현은 인성을 이해할 수 없었다. 회사와 조율을 하다가 잘 안 풀리는 구간에선 꼭 이렇게 신경질을 부려 유현이 나서게 만들었다. 그때마다 그나마 발언권이 큰 제가 마인을 대표하는 게 맞다는 생각으로 총대를 메주었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달랐다.

"언제까지 내 탓만 할 거야? 이제 좀 알아서 하자."

유현이 인상을 쓰며 팔을 뿌리쳤다. 뿌리쳐진 인성도 옆에 서 있던 주영도 적잖이 놀란 얼굴이었다. 이번에도 언제나처럼 한숨을 쉰 다음 뭐가 문제냐 물으며 고분고분 그들의 생떼를 들어줄 줄 알았던 모양이었다.

"컴백 준비 잘하고. 응원할게."

성의 없이 던지고 몸을 돌렸다. 정말로 그냥 갈 생각이었다. 인성이 들으라고 한 뒷말만 아니었어도.

"그래. 넌 처음부터 너밖에 몰랐어. 넌 네 성공이 제일 중요했지. 성공하려고 뭔 짓이든 다 했잖아. 잘못되면 어쩔 수 없었다고 징징대고. 그래, 네가 원래부터 그런 애였다는 걸 우리가 잊고 있었다, 야."

"형은 꼭… 날 참아준 것처럼 말한다."

"몰랐어? 네 추문 때문에 우리 많이 힘들었어."

가장 효과적으로 유현의 속을 긁을 줄 아는 인간이었다, 인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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