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네임 온 잇-44화 (4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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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주차장에 있는 것을 확인한 태화는 기다리라는 말로 전화를 끊은 뒤 쏜살같이 달려와 유현을 태웠다. 행선지를 묻지도 않고 출발한 차는 당연하다는 듯이 한강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오피스텔에서 본가로 가는 데 차가 막히지 않으면 삼십 분이 걸렸다. 유현이 상진으로 착각하고 떠들어 댔던 통화 내용으로도 충분한지 태화는 말없이 운전만 했고, 엔진 소리도 나지 않는 차 안은 그야말로 절간처럼 고요했다. 정적을 깨야 한다는 압박감에 유현이 귓불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시간이 늦었는데…."

저와 통화를 하다가 잠들겠다던 사람을 불러낸 입장에서 할 말이 없었다. 유현이 뒷말을 잇지 않고 있자, 웃음기를 띤 태화가 말끝을 잡고 물었다.

"늦었는데, 그다음은? 왜 왔냐, 고맙다. 둘 중에 어느 쪽이에요."

"…둘 다요. 주무신다면서요."

주무신다니, 하고 낮게 읊조린 태화가 피식 웃었다.

"저번부터 묻고 싶었는데, 고유현 씨는 내가 어려워요?"

"네?"

"사생이 뭐예요?"

그에게 사생의 의미가 별로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았지만 유현은 우물쭈물 대답했다.

"스토커… 같은 거예요."

"이번이 처음이 아닌 거 같던데."

아까 말하는 거 보니까. 얼마간의 텀을 띄우고 태화가 말을 덧붙이며 크게 핸들을 틀었다.

유현은 익숙한 경로에서 벗어나는 태화에게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커피 마시고 싶어서요."

태화는 정면을 보면서도 옆 통수에 눈이 달린 것처럼 태연히 대답했다.

불면증 때문에 커피는 안 마신다면서. 유현이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간간이 불이 켜져 있는 24시간 카페가 보였지만 죄다 지나쳐 가고 이제는 좁은 골목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어디 가요?"

"특별히 좋아하는 카페가 있어서."

그러시다면야. 유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생이란 스토커한텐 자주 시달려요?"

"지긋지긋해요."

"얼마나."

"잘 살던 곳 버리고 이사할 정도로요. 오래 살던 곳이라 정이 많이 들었는데 동네 분들도 불편해하셨고 이사를 안 할 수가 없었어요. 하도 찾아오니까. 너무 심해져서 저도 올봄에 숙소에서 빠져나왔고요."

차는 왜인지 가게가 있을 것 같지 않은, 아니 있다고 해도 영업 중일 것 같지 않은 한적한 동네로 들어서고 있었다. 유현이 주변을 둘러보며 "여기가 어디예요?" 하고 묻자, 태화는 뻔뻔한 얼굴로 "길을 잘못 든 거 같네요." 대꾸했다.

자기가 들어와 놓고? 내비게이션을 켜는 게 어떻겠냐고 유현이 제안했지만 "골목길은 내비 정확성이 떨어져요."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며 핸들만 열심히 돌려댔다.

일부러 이러나 싶게 운전 스타일이 평소보다 거칠었다. 졸음운전은 아니겠지…. 유현은 노심초사하며 태화를 흘끔거렸다.

낯선 곳을 방황하던 차는 으슥하고 좁은 길 몇 바퀴를 빙빙 돌고 나서야 제대로 방향을 잡고 대로로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아까 지나쳤던 24시간 카페의 건물 주차장으로 진입했다. 특별히 좋아하던 카페가 문을 닫았다나. 골목에는 카페 비슷한 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미스테리였다.

유현이 길게 하품을 하는 사이 태화는 따끈한 음료를 캐리어에 싣고 운전석에 올라탔다.

"많이 피곤해요?"

"네?"

"많이 안 피곤하면 잠깐 걷는 거 어때요?"

눈썹을 까딱인 유현은 뜨거운 유자차를 한입 마시고 고개를 끄덕였다.

몇 분 만에 공원 주차장에 차가 멈췄다. 오 분이면 도착할 거리를 빙빙 돌아온 덕에 새벽 한 시를 훌쩍 넘긴 시각이었다.

최대한 사람들 눈에 띄지 않기를 원하니 근방에서 사리지 않고 걸을 만한 곳은 여기뿐이었지만, 막상 도착하고 보니 썩 내키지가 않았다. 크리스마스를 한 달 남긴 시점. 낮에도 찬바람에 오들거리는데, 해도 없고 사람도 없이 바람이 휭휭 부는 강가를 걸으려니 꽤나 큰 용기가 필요했다.

안 내려요? 안전벨트를 풀고 내리던 태화가 재촉하듯 묻는 말에 유현은 미적미적 내려섰다.

이 춥고 야심한 시간에도 사람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어서, 둘은 자연스럽게 어둡고 인적이 드문 곳으로 걷게 되었다. 언제까지 더 걸어야 하나. 뜨거운 잔을 손에도 대고 볼에도 대고 하던 유현이 하품을 참으며 물었다.

"하실 말씀 있으셨던 거 아니에요?"

"나한테 종종 공손하네요, 고유현 씨는."

유현이 멀뚱히 쳐다보자 태화는 한 입도 마시지 않고 있던 음료를 빈손에 건넸다. 얼떨결에 받아든 유현이 양 볼에 컵을 대고 중얼거렸다.

"그래요? …별로 안 그런데."

"호칭도 그렇고."

"호칭이요? 그거야, 그쪽한테 '야야'거릴 순 없잖아요."

"야야거리라는 말은 아니었고."

"네?"

"고유현 씨 매니저랑 나랑 한 살 차이 아니에요?"

유현은 코를 훌쩍였다. 그치, 상진이 형이 서른하나니까 한 살 차이지. 길게 입 밖으로 입김을 불어내던 유현이 코를 훌쩍거리며 그렇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하셨다 그러셨다, 그렇게 말하는 것도."

"그게 마음에 안 드세요?"

유현이 미간을 좁히며 올려다보자, 태화의 입가로 의미를 알 수 없는 가벼운 미소가 스쳤다. 방금 전의 의도를 설명하는 대신 말을 돌렸다.

"'하실' '말씀'이 '있으셨던' 건 아니고, 못다 한 얘기나 나눌까 싶어서요."

뭔가 나한테 어필하고 있는 거 같은데, 그게 뭘까…. 피곤하고 추워서 평상시보다 뇌가 비효율적으로 쓰이는 게 체감이 되었다.

"못다 한 얘기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가장 먼저, 그 네임."

역시 그거였군. 유현이 속으로 툴툴거렸다.

"얘기 나누는 게 아니라 그냥 해명하라는 거잖아요."

"고유현 씨가 궁금한 거 있으면 나도 말해줄게요."

그런 거 없다고 내뱉으려는 순간, 유현은 전화가 도중에 끊기면서 못 들은 얘기가 떠올라 아쉬웠다. 에스퍼였다면 센터에 한 번이라도 소속된 적이 있었을 텐데…. 센터 얘기를 자세히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작품에 대해 공부하고 싶어도 워낙 자료가 부족해 한계에 부딪힐 때가 있었다. 이건 유현만이 아니라 '더 원'에 출연하는 다른 배우들도 공통적으로 토로하는 고충 중에 하나였다. 유현이 갈등하는 듯하자 선뜻 선번을 넘겼다.

"궁금한 거 있으면 먼저 물어봐요."

"…센터에 소속돼 있었어요?"

"그랬죠. 몇 년 전엔."

"얼마나 있었어요?"

유현은 눈을 반짝이며 적극적으로 관심을 표했다.

"꽤 오래? 중학생 때부터 있었으니까, 십 년쯤 되겠네요."

"십 년씩이나? 그럼 왜 나오게 된 거예요?"

"크게 다쳐서요. 능력을 전혀 못 쓰게 됐거든요."

흥미로 가득하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감추려고 애쓰는 새로운 일기장을 멋대로 들춘 기분이 되었다.

유현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눈을 굴렸다.

♪―

때마침 울려주는 벨 소리에 유현이 속으로 환호했다. 유현은 눈으로 양해를 구하고 음료 두 잔을 태화에게 멋대로 떠안겼다.

발신인을 확인하자 상진이었다. 통화 버튼을 누르니 "유현아, 형이 깨운 거 아니지?" 하며 잠기운에 낮게 깔린 목소리가 게으르게 넘어왔다. 아마도 집에 도착하자마자 곯아떨어졌다가 중간에 깨 문자를 확인한 듯했다.

"형. 문자 봤어요?"

-"으응, 이제 봤다. 현욱이는 뭐 때문이야?"

"형 내일, 이 아니라 오늘이구나. 오늘 날 밝으면 오피스텔 관리 사무실에 연락해서 cctv좀 확인해줘요. 현욱이 형은 시간 맞춰서 본가로 보내주고요."

-"갑자기 cctv는 왜?"

"사생이 집을 알아낸 거 같아요. 나 없을 때 집에 들어왔다 나갔다 하나 봐요."

-"뭐어?!"

잠이 몽땅 달아났는지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것처럼 우렁찬 고함이 폰을 울렸다. 유현은 깜짝 놀라 귀에서 폰을 떨어트렸다.

-"미친 새끼들이 또? 어떻게 알았대냐?"

"형, 혹시 드라마 스탭들 중에 숨어 있거나 그런 건 아니겠죠?"

사생이 제작팀 막내 스탭에 자원하거나 엑스트라로 현장에 들어와서는 몰래 밴을 따라붙은 적이 있어 가능성을 언급했다. 그러자 상진이 단박에 부정했다.

-"그건 아냐. 그랬으면 내가 진작에 눈치챘지."

상진이 그랬다면 그런 것이었다. 더러 눈치는 없어도, 엔터사 소속 매니저답게 사람을 알아보는 눈썰미는 남달랐다.

그럼 어떻게 퍼진 거지. 그 난리가 났는데 설마 회사 직원은 아닐 거고…. 이전에 회사 직원과 관련해서도 비슷한 이슈가 있었다.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아 유현은 한숨을 쉬었다.

-"근데 유현이 너 지금 어디야? 바람 소리가 들리는데. 집 아니지?"

"네. 잠깐 걷고 있어요."

대답을 하고 보니 참 속 편한 대답이었다. 사생이 나타난 비상시국에 산책이라니, 꼭 강 건너 불구경하는 사람처럼….

-"설마 너 차 몰고 나간 거야? 피곤할 때 절대 운전하지 말랬는데 기어이 또!"

그러나 상진은 예상치도 못한 것으로 유현을 화를 내며 다그쳤다. 시간도 장소도, 심지어 사생이 오페스텔을 무단 침입 사건도 당장은 문제가 되지 않으며 오로지 문제는 운전을 했다는 사실 하나인 것 같았다.

사방이 조용해 상진의 호통이 쩌렁쩌렁 주변을 울리고 있었다. 유현이 힘없이 눈을 감아 내리며 타이르는 투로 상진을 진정시켰다.

"형, 나 지금 혼자 아니에요."

놀랍도록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함께 있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 말도 없었다.

오래 이어지는 침묵에 유현은 전화가 끊긴 줄 알고 화면을 확인했지만 계속 통화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태화인 걸 알고 말조심을 하는 것이다.

이래서 미리미리 협조 요청해 두라는 거였나. 선견지명이 아닐 수 없었다. 작게 감탄한 유현은 슬슬 심심해하는 것 같은 태화를 보며, 통화를 마무리했다.

"조금만 더 걷다 들어가려구요. 형, 너무 걱정하지 말구요."

-"…그래. 추우니까 빨리 들어가. 감기 걸릴라."

언제 제가 소리를 질렀냐는 양 다정한 목소리로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전화를 끊은 유현은 폰을 주머니에 넣고 음료 한 잔만 도로 가져와 뚜껑을 열고 홀짝였다. 그새 많이 식어 유자차가 미지근했다.

그러자는 말은 없었지만 둘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매니저는 왜 운전을 못 하게 하는 거죠?"

이것도 물어볼 줄 알았지. 지난번에 태화와 통화하며 부탁까지 했으니 유현이 직접 운전하는 것을 꺼린다는 것쯤은 알았겠지만, 새벽에 고래고래 야단을 칠 정도로 싫어하는 줄은 몰랐을 것이다. 유현이 입안에 도는 단맛에 살짝 입맛을 다시고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졸음운전 할까 봐 그래요. 내가 먹고 있는 약 때문에."

뭔지 알죠? 묻자 태화가 수긍하기는커녕 눈을 가늘게 뜨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유현은 코를 훌쩍이며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을 시작했다.

"데뷔하고 일 년쯤 됐을 거예요. 멤버들은 운전면허 따느라 정신없었거든요. 한창 연애하느라 바빠서. 저도 자극받아서 운전 연습한다고 끌고 나갔는데, 운전 도중에 피곤해서 존 거예요. 가로수 들이박고 깼어요. 깨자마자 너무 아파서 의식을 잃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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