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42.
짙푸른 꿈이었다. 물속에 잠긴 것처럼 기억이 어지럽게 일렁인다.
새벽녘의 병실. 수능 날 돌아오던 길에 교통사고를 당해 꼬박 한 해 병원 신세를 지고 의식을 차렸을 무렵이었다.
"이젠 별로 간절하지 않아요. 잘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의사도 간호사도 입을 모아 유현이 깨어난 건 기적이라고 했다. 그러나 기적이 엔딩일 수는 없었다. 삶은 동화가 아니었다. 기적이 있은 다음에는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눈을 떴을 때는 모든 게 달라져 있었다. 저와 엇비슷했던 동생 녀석은 몰라볼 정도로 자라 저를 내려다보았고, 원래도 그다지 튼튼해 보이지는 않았던 어머니는 몹시 수척한 모습이었다. 일 년 넘게 침대 신세를 진 저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일 정도였다.
유현은 병실에 홀로 남을 때면 틈틈이 잃어버린 현실을 되찾는 연습을 해야 했다. 숨을 쉬고 말을 하는 게 생소했다.
"그만두겠다니. 갑자기 왜. 좋아했잖아."
꽉 잠긴 어머니의 목소리가 낯설다.
"모르겠어요. 왠지 다 의미 없는 것처럼 느껴져서…."
유현은 이상하게도 아무 감흥이 없었다. 죽다 살아난 사람들은 대부분 저와 제 삶을 소중히 여기게 된다던데, 아무것에도 감사하지 않았고 새 삶이 별로 감격스럽지도 않았다. 솔직히, 거저 얻은 삶이 지겹고 지루했다.
일 년을 쉬었으니 연습생은 잘린 것이나 다름없는 데다, 일 년 치의 병원비와 앞으로 지출하게 될 재활 비용도 막막했다. 운 좋게 재활을 일찍 끝내고 연습생 신분이 된다 해도, 데뷔할 가능성은 1년 전에 비해 더욱 희박해진 상황이었다.
"왜… 왜 그런 말을 해? 응? 너만 깨어나길 기다렸던 엄마는 뭐가 돼?"
"그냥, 잘 될지 모르겠어요. 재활하고 다시 연습생으로 돌아가도 데뷔할 거란 보장도 없고…. 그냥 유성이처럼 평범하게…."
"이러지 마. 엄마한테 이러지 마. 제발, 유현아."
중심을 잃고 무너지듯 병실 침대를 짚던 가녀린 팔과 파리하게 질린 안색과 깨문 입술 위로 흐르는 눈물. 유현의 스무 해 남짓한 인생에서 단연코 그날처럼 놀란 적은 없었다. 이불을 그러쥐는 어머니의 핏기 없이 가느다란 손가락들을 보며 유현은 알 수 없는 설움이 차올랐다.
"엄마한테 이러지 마. 너 없이 엄만 못 살아."
유현은 슬픔으로 연약해진 어머니를 달래기 위해 입술을 뗐다.
엄마, 엄마. 물속에 갇혀 소리치는 것처럼 까마득하게 귓전을 울렸다. 이내 목소리는 나오지 않고 몸도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일렁이던 기억은 익사시킬 듯 유현을 덮쳐 왔다. 그대로 끝이 어딘지 모르는 어둠으로 계속 가라앉았다.
얘가, 엄말 놀리는 거야? 유현아!
유현이 어둠을 쨍하고 가르며 울리는 목소리에 번쩍 눈을 떴다.
"깨어있는 거니?"
아직 꿈인가? 어둠 속에서 눈을 뜬 유현은 잠깐 꿈의 경계에서 허우적댔다.
"…엄마?"
"어머, 왜 이렇게 식은땀을 흘려? 몸이 안 좋아?"
유현은 벌떡 일어나 앉으며 이마를 쓸었다. 땀이 배어 나오는 이마를 반팔 소매로 훔쳐내고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악몽을 꿔서요."
"악몽?"
"처녀 귀신이 나 잘생겼다고 막 달려오는데… 그게 너무 무서워서."
"그래서 엄마 부른 거야?"
"습관이에요. 무서우면 엄마 부르는 거. 나만 그런 거 아닐걸?"
농담조로 무마시켜보려 했지만 유현의 안색을 살피는 어머니의 눈길이 어두워졌다. 유현이 애써 밝은 기색으로 물었다.
"엄만 이 시간에 웬일이세요? 지금까지 안 주무셨어요?"
"아니. 물 마시러 나왔다가 네 얼굴 보고 싶어서. 본 지가 너무 오래돼서."
애틋한 시선이 꿈속의 어머니랑 겹쳐 보였다. 기분이 이상했다. 깨어질 것을 보듯이 조금도 변하지 않은 조심스러운 눈이. 그래도 꽤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유현이 안심시키기 위해 카메라 앞에서가 아니면 잘 짓지 않는 표정을 만들어 보였다. 어머니가 보기에는 그저 해사한 웃음일 것이었다.
"뭐가 좋다고 웃어? 거기서 여기까지 얼마나 걸린다고 자주 오지도 않구."
웃는 얼굴을 보니 면박이 나오는지 어머니의 눈에서 안쓰러움이 가셨다. 대신에 자리한 건 섭섭함이었다.
"인터넷으로 많이 찾아보셨을 거면서. 이제 검색도 잘하시잖아요. 유성이가 그러던데?"
"말을 그렇게밖에 못 하지! 자주 오겠습니다, 빈말이라도 할 줄은 모르구!"
"역시 화면 속에서 보는 아들이 제일 착하죠?"
어머니는 괘씸하다는 듯 눈을 흘기곤 유현의 볼을 주욱 꼬집어 늘렸다. 유현은 으아아, 엄살을 피운다.
"미리 얘길 했으면 좋았잖아. 넌 어떻게 딱 이런 날을 골라 와. 오늘만 그런 것도 아니야. 올 때는 항상 연락도 없이 불쑥불쑥."
"연락을 하면 또 귀찮은 일 하실까 봐 그러죠. 대충 있는 거 차려 먹으면 되는데 유성이까지 끌고 가서 시장이고 마트고 다 털어오고 그러시니까."
"네가 자주 오면 안 그러지!"
얄미운 소리만 골라 한다며 옆구리를 꼬집혔다. 유현이 또 아아, 소리를 내며 꿈틀대다 그새 주름이 몇 줄 더 는 어머니의 얼굴을 보고 헤죽 웃었다.
"쉬는 날이라서 왔어요. 하루종일 있다 갈게요."
"엄만 약속 있어!"
"아이구…. 진짜 날을 잘못 잡았네."
"그러니까 또 와. 날 더 추워지기 전에 또 와. 알았지?"
유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또 올게요. 엄마도 가서 주무세요. 내일 친구분들 만나러 가시려면 빨리 주무셔야지."
어머니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방을 나가면서도, 주춤주춤 발길을 멈추고 유현을 뒤돌아보았다.
할 말이 있어 그러시는 건지 근심이 되어 그러시는 건지…. 이미 잠이 모두 달아나버린 유현은 침대에 기대앉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와, 너무 예쁘다! 내가 엄마 아들이라서가 아니고 객관적으로!"
"사회생활 좀 한다고 입으로 때우는 법만 배워가지곤."
"평소에도 이런 걸 입고 다니셔야 한다니까. 엄만 귀티가 흘러서 이런 걸 입어줘야 한다구요."
"허이구? 생색내려고 밑밥 까는 거였구만?"
"비싼 옷 좀 사드리게 해달란 얘기지."
"비싼 옷 필요 없구, 효도하고 싶으면 얼굴이나 비춰 좀."
"에이, 알겠어요, 알겠어요. 이거 알아서 차려 먹을 테니까 엄만 얼른 가보세요. 예쁜 옷에 튀면 어떡해요."
"튀긴. 내가 넌 줄 알어. 됐어. 저리 가."
늦은 아침을 먹으러 나온 유현을 밀치고 국을 푸는 어머니를 말릴 재간이 없었다. 유성은 익숙한지 괜히 옆에서 얼쩡거리다 혼나지 말고 앉으라며 눈짓했다.
유현의 자리 앞에 그릇을 내려놓고 옆자리 의자를 꺼내 앉은 어머니가 근심스럽게 물었다.
"못 본 새 얼굴이 반쪽이 됐어. 밥은 먹고 다니는 거야?"
"몸 만드느라 살이 빠져 보이는 거예요. 근육 때문에 오히려 몸무게는 늘었어요. 이거 보세요."
팔뚝을 꺼내 알통을 만들어 보이자 어머니는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유성아, 얘, 네 형 삐쩍 곯은 거 봐라."
"곯았다뇨. 그 정돈 아닌데."
"살을 뺄 데가 어딨다고 저 지경으로… 아주 뼈다귀를 만들겠다는 거야. 저번에 드라마 찍을 땐 그렇게까진 안 뺐잖아."
유현이 같이 방어 좀 하자며 식탁 아래로 다리를 뻗어 툭툭 쳤지만, 유성은 알아서 하라며 파리를 쫓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결국 포기하고 시무룩한 시늉을 하며 되물었다.
"엄마 눈엔 별로예요?"
"응, 별로야. 너무 말랐잖아. 남자가 그게 뭐야. 엄만 보기 싫어."
언제는 예뻐서 보기 좋다고 하셔 놓고. 컴백 시기에 맞춰 극단적인 다이어트를 하느라 이것보다 훨씬 더 말랐을 때도 보기 좋다 빛깔 고운 칭찬만 해주시던 분이 말이 이렇게 달라지는 걸 보면, 이번 드라마 촬영이 어지간히 마음에 안 드는가보다 싶었다.
유현은 반박할 의지를 잃고 입속에 뜨끈한 국을 떠넣었다.
"항상 몸 조심하구. 저번에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그런 일이 있으면서 엄마한텐 연락도 한 통 없구, 뉴스로 알게 해?"
"엄마, 약속 열한 시까지라고 하지 않았어요? 늦으시겠는데?"
"얼마나 불효막심한지, 오매불망 저 하나 걱정하는 줄은 모르구…. 유성이가 전화 안 했으면 나한테 알리지도 않았을 거야, 분명히. 그러게 왜 그런 드라마를 찍어선!"
"그건 드라마 촬영하다가 그런 거 아니라니까 또 이러신다…."
직접 드라마를 선택했다고 의심 없는 사람들 앞에서 불러주는 사람이 없어 써주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단 말은 죽어도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유현은 식탁 아래로 계속해서 유성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그러니까 더 걱정되는 거잖아. 세상에, 테러라니… 재수 옴 붙어서 그런 거잖아. 느이 출연자들도 하나같이 나쁜 소식만 들려와."
"운이 조금 나빴던 거예요. 액땜, 액땜! 진짜 아무 일도 없었어요. 봐요, 저 이렇게 멀쩡하잖아요. 엄마 인터넷 좀 줄이셔야겠다. 자꾸 이상한 것만 보니까 걱정이 많아지시는 거예요."
"이상한 게 아니라 아들 소식 궁금해서 그러는 거야. 하여간에 기껏 와선 엄마한테 한다는 말이 고약해."
없는 사람처럼 가만히 밥만 퍼먹던 유성도 길어지는 잔소리가 불편했는지, 고맙게도 화제를 돌려주었다.
"그럼 형은 하반기엔 계속 드라마 촬영만 하는 거야?"
"응, 아마도?"
"연우 울겠네."
"연우가 누구야?"
"내 여자친구."
"여자친구가 있어?"
"형이 직접 사인도 몇 번 해줘 놓고. 하여간 동생한텐 관심도 없지."
"야, 난 너한테 여자친구가 있는 줄도 몰랐다. 연우라고만 하면, 그게 네 여자친구인 줄 어떻게 알아? 근데 신기하네. 어떻게 여친을 사귀었대, 남중 남고 나온 숙맥 공돌이가?"
"허, 누가 누구더러 숙맥이래."
이제 진짜 가봐야겠다며 안방에 가방을 챙기러 간 어머니는 현관으로 가는 길에 유성의 빈 그릇을 보더니 다시 가방을 내려놓고 팔을 걷어붙였다. 엄마, 내가 할게요. 유성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듬직한 말투와 달리, 어중간한 손놀림으로 바닥에 국물을 흘리고 만다. 어유, 이 덜렁이! 입술을 즈려문 어머니에게 등짝을 얻어맞은 유성이 몸을 배배 꼬았다.
유현은 키들거리며 물었다.
"그래서 연우는 왜 우는데?"
콧잔등을 찡그린 유성이 등을 문지르며 대답했다.
"걔 유어스거든. 매일 마인 컴백하기만 기다려. 걔는 형이 공연하는 게 제일 좋대."
"지방에서는 네 공연 보러 다니기가 힘들어서 대학도 서울로 온 거래더라."
식탁에 국그릇을 내려놓은 어머니가 거들자, 유현이 깜짝 놀라 쳐다보았다.
"엄마, 만나 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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