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네임 온 잇-40화 (40/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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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이게 뭐지…? 골을 꽉 조여오는 압이 느껴졌다. 눈을 질끈 감은 유현은 눈꺼풀 안쪽에 맺힌 잔상을 털어내듯 머리를 흔들다 약간 비틀거렸다.

"컷! 유현 씨? 유현 씨, 왜 그래요?"

감독의 목소리가 귀에 꽂히자 환각처럼 머물던 것들이 일시에 사라졌다. 민아가 다가오고 감독도 다가왔다.

유현은 허리를 숙여 두 팔로 허벅지를 짚은 채로 가슴이 부풀도록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그럼에도 달리는 호흡에 겨웠다. 토할 것처럼 속이 메스꺼웠다.

감독은 같이 몸을 숙여서 유현의 상태를 체크했다.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잠깐 어지러워서요."

"어지러워요? 정확히 어떻게 어지러워요?"

민아는 유현을 걱정스럽게 보다가 갑자기 눈을 키웠다. 그러고는 곧장 유현을 끌고 의자에 앉혔다.

"여기 좀 앉아 있어. 안색이 안 좋아."

점점 시야가 돌아오는 것에 한숨을 돌리던 유현은, 악력이 느껴지는 손길에 어리둥절하게 민아를 바라보았다. 숨을 고르던 유현의 옆에서 감독이 물었다.

"속이 안 좋은 건 아니고?"

"네? 아, 네. 조금."

"체한 거 아니야? 어지럽고 식은땀 나고 메스껍고. 맞지? 아까 뭐 먹었는지 생각해 봐. 아, 김밥인가? 너 아까 김밥 먹었지? 나도 김밥 먹고 체해 봐서 알아. 있어 봐."

당장 나가 소화제라도 구해올 듯한 민아에게 유현이 손을 내저으며 만류했다.

"아니요, 누나 저 괜찮아요. 잠깐만 앉아서 쉬면 돼요. 긴장해서 그런가 봐요."

"아니야, 너 전혀 안 괜찮아. 있어 보래두."

끝끝내 민아는 바쁘게 홀을 벗어나 버린다.

유현은 감독의 눈치를 살폈다. 대사 바꾼 걸로 뭐라고 하시려나. 하필 그 순간에 왜 그런 말이 떠올랐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땐 그냥 떠오른 그대로 말을 하는 게 맞는 것 같았다. 대본을 마음대로 바꾼 건방짐을 꾸짖는다면 무조건 죄송하다고 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유현의 안색을 보던 감독이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유현 씨."

"네, 감독님."

"…쉬어요."

"죄송합… 네?"

"괜찮아질 때까지 쉬고 있어요. 긴장해서 그런 거라며."

그러더니 감독은 모니터 앞자리로 돌아갔다.

모두가 분주한 가운데 혼자가 된 유현은 멍하니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아까 그건 뭐였을까. 지나쳐 간 기억에 집중하는 시선이 점점 초점을 잃어 갔다.

강한 빛을 눈에 쬔 것처럼 머릿속에 잔상이 남아 있었다. 격식을 위한 차림새, 두 편으로 갈라져 적당히 불편한 분위기, 서로를 잘 아는 듯한 대화, 건조한 웃음들….

오늘 드라마 촬영처럼 빳빳하게 멋을 낸 머리도 없고, 하얀 연미복도 없었지만 유현은 그게 약혼식인 걸 저절로 알게 되었다.

의식이 이끄는 대로 기억을 겉돌던 유현이 갑자기 상념에서 깨어나 눈을 찌푸리고 중얼거렸다.

"누구의?"

***

허 피디는 오전부터 현장을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드물게 100회차를 넘기리라 예상하는 드라마이다 보니 촬영 스케줄이 잡힌다고 매번 올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촬영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무슨 생각인지 백 감독이 실내 촬영은 죄다 미루고 야외나 지방 촬영 씬을 우선적으로 찍고 있어, 주연 배우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경우가 더러 있었고, 주연 배우들이 각자 분리되어 있는 촬영에서는 괜찮은 소스가 될 만한 영상은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그리하여 허 피디는 오늘만을 기다린 것이다. 간만에 세 주연 배우를 모두 찍을 수 있다는 사실에 몹시 들떠 있었다.

'아이돌 출신인데 꽤 잘하네?'

허 피디는 눈칫밥을 먹으며 촬영 중이라는 사실을 잊을 만큼 몰입해, 방송국에서 붙인 자체 메이킹 팀과 함께 구석에서 관객이 된 기분으로 현장을 감상했다.

메이킹을 찍으러 다니기 시작하면서, 허 피디는 막 일을 시작한 시절보다 촬영장 면면을 다소 냉소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허 피디의 업무가, 그게 무엇이든 카메라 앞에서는 잘 만들어진 하나의 허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는 과정 위에 존재했기 때문에.

그럼에도 여전히, 간간이 어떤 것에는 감탄하게 되었다.

오늘, 아이돌 출신의 고유현은 진지하게 연기라는 걸 하고 있었다. 이전까지 허 피디가 핸디캠 너머로 보았던 장면들은 한정운이 오유리를 싹퉁머리 없이 밀어내거나 아주 뜬금없이 안달 내는 장면이었다. 이번에 찍는 회차가 바로 그 싹퉁머리와 뜬금없음 사이의 개연성과 서사를 담당할 모양이었다.

약혼을 하는 장면이었다. 기쁜 듯하면서도 복잡한 감정을 실은 눈빛, 그러나 정작 그 눈빛을 받는 당사자인 여주는 알 수 없게 일시에 웃음기를 숨겨 버리는 순간들. 그리고 그런 은폐의 순간들 때문에, 여주가 보는 남주의 단면이 독단적인 완벽주의자라는 사실에 변함이 없게 된다는, 시청자들만 알 수 있는 어떤 것들.

이런 것들이 허 피디가 허상에 불과한 이 일을 놓지 못하는 이유가 되어 주었다. 허 피디는 시청자를 매료하는 영상과 그 영상을 구성하는 모든 것들을 사랑했다.

한정운이 서브남이라고 듣긴 했지만, 일단은 삼인 주연으로 홍보가 되었으니 어느 쪽이 남주인지 확실치 않은 초반에는 치열한 각축전이 될 듯싶었다. 현재 초반부도 다 찍히지 않은 상황이라고 하니, 고유현이 연기하는 한정운이라는 캐릭터는 시간이 갈수록 더 색이 선명해지리라. 잘만 연기하면 나쁜 남자만큼 매력적인 것도 없지. 허 피디는 냉정하게 한정운의 흥행을 점쳤다.

다음 촬영 준비를 하기 바쁜 스탭들 사이에서 서 있던 유현에게 민아가 가까이 와보라며 제게 손짓했다. 훨씬 키가 큰 유현이 고개를 숙여 귀를 대주자 민아는 담요를 둘러주며 귓속말을 전했다. 유현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눈을 둥그렇게 뜨는 것까지 허 피디의 핸디캠은 조금도 놓치지 않았다.

허 피디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그들에게 살금살금 접근했다.

"―에 보이더라구. 영준이한테 들어서 대충 알곤 있었거든. 그래서 아까부터 말해줄까 했는데 감독님이…. 어, 안녕하세요?"

"두 분, 지금 뭐하고 계시나요?"

"다음 촬영 준비를 하고 있어요. 그렇죠, 유현 씨?"

들이대는 메이킹 카메라에 적잖이 놀랐는지 유현이 허둥대며 '에'인지 '네'인지 구분이 힘든 소리를 흘리며 어정쩡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번에도 담요를 두르고 계신데요. 이건 어떤 의미인가요."

민아는 그 질문으로 아마도 몇 주 전의 촬영분을 붙여 편집을 할 계획이란 걸 눈치챘는지 고맙게도 연결 지어 대답을 내놓았다.

"오늘은 유리가 정운이한테 잘 보여야 해서요."

"왜죠?"

"약혼식이거든요. 유리는 약혼을 계속하고 싶어 했잖아요. 정운이는 원치 않는 약혼을."

"그치만 유리는 별로 기뻐 보이지 않았어요. 왤까요."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요. 현타…?"

"무엇에 대한 현타일까요?"

"아마도… 정운이에 대한 마음 같아요. 확신이 없는 그런 상태."

추운 건가? 실내라 조명 때문에 외려 후끈한데. 그런 의문을 가지면서도 허 피디는 유현의 목을 조르듯 꼼꼼하게 담요를 둘러주는 민아의 손길을 놓치지 않았다.

"한정운 씨는 약혼하는 기분이 어떠셨을까요?"

"정운이는 약혼…. 하기 싫었을 거라고 생각 안 해요. 좋고 나쁨, 꼭 둘 중에 하나만 골라야 한다면, 기분이 좋은 것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의 실을 뽑아내듯 신중한 대답이었다. 약혼 서약을 촬영하느라 내내 서 있었던 민아가 옆자리에 의자를 빼서 앉다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냐는 듯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유현을 쳐다보았다. 그를 본 유현이 살풋 웃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우리 모두 다 알잖아요. 정말로 원치 않는다면, 한정운은 싫은 약혼쯤은 피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거."

그 말을 하는 유현의 눈이 어딘가를 헤매는 듯 아득했다. 그러나 곧 초점이 명확해진 눈으로 핸디캠을 바라보며 웃는다.

"좋아하는 사람과 하는 약혼이 기분 나쁠 리 있나요."

***

밴에 올라타는 유현의 얼굴이 평소 보다 상기되어 있었다.

"형. 오늘은 백석동으로 가주세요."

예상보다 몇 시간이나 일찍 끝났고 내일은 스케줄이 아예 없는 날이었다. 촬영이 없으면 기어이 다른 스케줄이 비집고 들어오는 혼란한 일정이라, 본가에 다녀올 엄두를 못 내고 있던 중에 마침 잘 되었다.

몇 달 만에 가는 본가인지. 유현은 콧노래를 불렀다. 새벽까지 이어질 거라고 예상했던 촬영이 자정 전에 끝나준 덕에 집으로 돌아갔을 때 어쩌면 깨어있는 어머니를 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서로 장단이 잘 맞아 모이기만 하면 수다스러운 상진과 시형이 웬일로 조용했다. 둘 중에 하나가 어머니께 가는 거냐, 같이 가도 되느냐 묻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차 안은 소름 끼치도록 조용했다.

유현이 설마 하고 뒤를 돌아보자 시형이 없다. 어? 소리를 내면서 유현은 두리번거리다가 손을 들어 내부 조명을 켰다.

"저번부터 담요 그거 되게 거슬리네요."

달칵 켜지는 실내조명 아래, 별로 반갑지 않은 얼굴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순간 유현은 공포 영화의 주인공처럼 소리를 지를 뻔한 것을 겨우 헛숨을 들이키는 정도로 견뎌냈다.

옆자리에 민아의 담요를 내던진 유현은 잔뜩 경계하며 멋대로 스탭들을 몰아낸 불청객을 노려보았다.

"뭐예요? 나 방금 진짜 놀랐어요, 진짜로!"

"오늘은 앞으로 안 와줄 거예요? 나 심심한데."

지금 심심한 게 문제인가? 유현은 차마 입으로 뱉지 못하는 욕을 눈빛에 실어 보냈다.

"일 잘하는 남의 매니저 쫓아내고 그 자리 앉았으면, 착실하게 할 일이나 하시죠."

"그럼 출발 안 할게요."

유현이 허, 탄성을 뱉었다.

끌어내고 내가 운전해 갈까? 그냥 내려서 택시를 잡을까? 그냥 상진이 형을 불러? 갖가지 방법을 떠올려 봤지만 당장 실행할 기력도, 허비할 시간도, 간헐적으로 발휘되는 인내심도 현재로선 부족했다. 유현은 불만이 아주 많다는 것을 표출하듯 뒤꿈치를 쿵쿵 찍으며 차에서 내려섰다.

앞 좌석 문이 닫히기도 전에 유현은 팔이 잡혀 조수석 쪽으로 쑥 끌려갔다.

"어어!"

어린애 손을 잡아끌듯 손쉽게 끌어당기는 힘에 놀라 넘어질 뻔한 유현이 중심을 잡으며 태화의 어깨를 짚었다가 화드득 손을 털어냈다. 그 수선에도 태화는 아랑곳 않고 유현의 팔의 보드라운 면을 확인했다.

"이게 뭐 하는…!"

"어떻게 네임이 없어지죠?"

어버버하는 사이 유현은, 문자 그대로의 코앞에서 태화를 마주해야 했다. 지나치게 가까웠다. 숨을 크게 쉬면 서로에게 닿을 만큼.

"뭐, 뭐가요…."

답을 들어내기 전에 놓아줄 마음이 없는지 팔을 쥔 손힘은 억세고 옭아맨 시선도 불손했다. 태화는 고개를 살짝 비틀며 유현의 옷깃 안쪽을 확인했다.

"이번에는 목에 있네요."

눈동자만 스륵 움직여 유현과 시선을 맞춘 후 나직하게 말했다.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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