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39.
"그래서 유현 씨는 어떻게 하고 싶다는 건데."
어지간히 빈정이 상한 목소리라 유현이 보이지 않게 한숨부터 작게 내쉬었다.
"감독님은 저한테 한정운이 이성적인 캐릭터라고 설명을 해주셨어요. 그런데 시간 순서대로 봤을 때 한정운이 오유리한테 하는 걸로 봐선 다분히 감정적인 캐릭터예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데?"
감독은 까슬한 턱을 쓸면서 못마땅하게 되물었다.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쌀쌀맞게 굴던 한정운이 자기 목숨을 걸게 되는 이유가 고작, 팀원을 향한 질투라는 것도 납득이 안 가는 부분이 있지만요…."
"왜요, 고작 질투인 게 마음에 안 들어요?"
"아뇨, 질투 자체가 마음에 안 드는 게 아니고."
급한 마음에, 항의하는 듯 어세가 강해지고 호흡이 덩달아 빨라졌다. 제가 흥분했음을 깨달은 유현은 뚝 말을 멈추었다.
원래 같았으면 백 감독도 이쯤에서 유현의 말을 잘라내고, 주제넘지 말고 좋은 말 할 때 대본대로 하라고 윽박을 지르며 기를 죽인 다음 촬영을 진행했을 것이었다.
"그런데 전 아무래도 감독님이랑 생각이 달라서요."
2주 전 목격한 반항적인 눈빛은 쉽게 꺾일 것이 아니었는데, 이상할 정도로 유현이 고분고분했다. 투자자 측이 내내 잠잠한 것도 꺼림칙했다. 그래서 현수는 무슨 꿍꿍이속인지 들어나 보자 싶었다.
백 감독은 유현이 무슨 말을 할지 무척이나 궁금한지 계속해보란 듯 고갯짓을 했다.
"한정운은 어린 팀장으로 견제를 많이 받았다고 했고, 그래서 자신의 존재감을 죽이는 방식으로 팀원들을 보호했다는 언급이 나와요."
"그런데요?"
"분명히 자존심보다는 자기 사람들의 안전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인물이라는 거거든요. 순간적인 감정에 휩쓸리기보다 이성적인 자기 확신으로 말하고 움직이는 인물이고요. 그런 한정운이 팀원을 질투해서 사랑에 목숨을 건다는 건 좀―"
"아아, 그러니까 유현 씨 말은 결국, 한정운이 이성적이라서 질투하는 게 어울리지 않는다?"
더 들어볼 필요도 없다는 듯 중간에 치고 나오는 감독을, 유현이 답답하다는 듯이 입술을 말아 물었다.
"아예 틀린 말은 아닌데, 사랑이 논리로 해결되는 게 더 이상하다고 생각해요, 나는."
감독의 말에 금세 의욕적으로 변한 유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다 쳐도, 오늘 찍을 장면은 특히 한정운답지 않은 거 같거든요."
"오늘 약혼식 씬이야말로, 한정운이 지극히 이성적이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장면이라는 걸 좀 알아야 할 것 같은데? 한정운은 팀장으로서 책임감도 강하거든."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이성적인 판단을 중시하는 한정운이라면 감정이 태도가 되지 않을 거 같다는 거예요. 책임감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화풀이를 할 인물은 전혀 아니라는 거죠."
"아니. 화풀이란 말은 조금 그렇고, 한정운은 지금 피곤한 거예요. 바빴으니까. 잠을 못 자서 피곤하고, 골치 아픈 일이 있었으니까."
"감독님. 무엇보다 한정운은 센터 밖에서 업무 얘기를 끌고 오는 인물이 아니에요."
한 치의 의심도 없는 확신 조에 백 감독이 헛웃음을 뱉으며 물었다.
"그걸 유현 씨가 어떻게 알아?"
"한정운이 센터 밖에서도 힘들다고 티를 내는 인물이었다면, 유리가 센터 입소한 직후에 한정운의 냉대에 혼란스러워했을 리가 없죠. 그런 반응은 원래 알던 한정운답지 않았다는 거거든요."
"그건 모르는 거지. 쌀쌀맞게 구는 태도 자체에 놀랐을지도."
"그랬다면 유리가 바로 돌아섰겠죠. 아예 퇴소를 해버렸거나. 그렇지만 유리는 희망을 갖고 정운이 주위를 맴돌잖아요."
"……."
"한정운이 팀장으로 승진하기 전에는 더 힘들었다고 하는 대사가 팀원들 입에서 여러 번 나와요. 그 말은 곧, 그 힘든 시기에도 센터 밖에서 유리를 봤을 때 한 번도 내색한 적이 없었다는 말이 돼요. 유리가 센터에 들어오고 싶을 만큼 다정했거나…. 그게 아니라도 적어도 무심하진 않았을 거란 얘기죠."
길어지는 설전에서 제 배역 이름이 들리자, 머리를 손보던 민아는 슬금슬금 다가와 흥미로운 눈으로 지켜보았다. 도와줄까 했더니, 대화는 시간이 지날수록 의외의 양상을 띠었다. 오, 감독님이 좀 밀리는데?
백 감독과 몇 번 작품을 해본 경험이 있는 민아로서는 낯설고도 신기한 광경이었다. 제 작품을 분석하고 얘기를 나누는 것은 존중하고 좋아하지만, 영화 감독들이 으레 그렇듯 자존심은 무지하게 센 데다 월권행위에 대해서는 유난히 냉혹했다. 유현이 바로 그 월권을 저지른 것이다.
민아는 감독의 목소리만 듣고도 예상했다. 오늘 촬영 분위기 한번 뭣 같겠구나. 유현이 대차게 깨지고 우중충한 가운데 겨우겨우 끝내겠구나.
그러나 놀랍게도 감독의 논리가 힘을 잃어 갔다. 점차 말도 짧아지고 소리도 낮아졌다. 근처에 선 스탭들도 그를 느꼈는지, 오며 가며 관심 있게 엿듣는 눈치였다.
"그래서 저는, 한정운이 센터 밖으로 센터 일을 끌고 나올 인물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했던 거고요. 설령 그런 고민으로 머리가 엄청 복잡하다고 해도 약혼식 날에 대놓고 약혼자를 무시한다는 건, 한정운의 설정값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 그런 말씀을 드리고 싶은 거였어요."
대본을 읽으면서 생겼던 의문들을 차근차근 풀어내고 나니 속이 다 후련했다.
백 감독은 작가가 의도한 인물 해석과 맞아떨어지는 캐릭터 분석에 내심 놀라고 있었다. 그런 한편으로는 짜증도 났다. 분량을 쳐내기에 바빠 작가가 구상한 캐릭터의 디테일을 잊었던 것이 패착이었다.
기대 가득한 유현의 눈망울에, 감독은 부러 냉정한 투로 뱉어냈다.
"나랑 유현 씨랑은 여전히 생각이 다르네요."
그때 옆에서 관전 중이던 민아가 감독님, 하고 불렀다. 약간의 도움을 주기로 한 것이었다.
감독이 호통 한번 치면 저 멀리 나가떨어질 것 같이 생겨선, 조금도 밀리지 않고 제 주장을 용기 있게 펼치는 게 기특했고, 절 볼 때마다 '누나는 납득이 되는 거냐'며 헤매던 유현이 나름대로 해답을 찾은 모양이라 조금 궁금하기도 했다.
감독이 고개를 돌리자 민아가 슬쩍 말을 얹었다.
"있잖아요, 감독님. 오늘 건 7화고 정운이 고백은 13화인데, 고백받을 때까지 계속 유리가 갈팡질팡하려면 너무 정떨어지면 안 되지 않을까요?"
"정떨어지는 정도는 아니지 않나…."
"에이, 정떨어지죠. 약혼 당일에 그러면."
유현을 편들고 나서는 민아를 빤히 보던 감독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머리를 쓸어올리며 "그래요, 어디 한번 가봅시다." 하곤 돌아섰다.
***
#16. 호텔 연회장. 낮.
앉아 있는 유리 비추고, 정운이 다가와 맞은편 의자를 꺼내 앉는다.
밝고 화사한 연회장 아래 어색한 분위기만 감도는데….
유리 (초조한 듯 입술을 깨물다가)
지형E 널 사랑하지도 않는 자식이랑 약혼하는 게, 넌 기뻐?
유리 (정운을 물끄럼 보며) 내가 그렇게 싫어?
정운 (성가시다는 듯이) 제발 하루만 얌전히 있어줄 순 없어?
유리 (상처받은 눈빛) …….
정운은 유리의 시선에 얼굴을 찌푸리고.
정운 …내가 잠을 못 자서 예민했다. 미안.
서버의 안내를 받아 하나둘 사람들이 들어 온다.
유리 (보다가, 황급히 시선을 돌리며) 됐어.
***
길지 않은 테이크였다. 유현은 민아와 대화를 주고받다가 문이 열리면 일어서서 손님을 맞이하는 데까지였다.
오유리는 김지형에게 휘둘리고 있다. 한정운과 오랜 친구로 지냈다던 김지형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고요한 연못가에 던져진 조약돌처럼 파문을 일으킨다. 그 자리에선 부정했지만 계속 찜찜하다. 그런데 한정운은 그것도 모르고 약혼식을 위해 이동하는 동안에도 살가운 말 한마디 건네지 않는다. 오유리는 약혼식 당일에까지 무심한 약혼자에게 서운하다. 내가 그렇게 싫냐는 건, 꾹꾹 참다 터져 나온 서러운 물음이다.
대본대로의 한정운은 다른 데 정신이 팔려 그런 오유리에게 신경 써주지 못하고 있다. 잠이 모자라 피곤하고, 가이딩이 모자라 신경이 곤두선다. 아마도 앉은 자세는 곧을 것이다. 완벽해야만 하는 캐릭터니까.
그러나 유현은 그렇게 연기할 생각이 없었다.
유현의 한정운은 긴장 없는 기색이다. 앉은 자세도 오히려 평소보다 약간 느슨하게 풀어져 있다. 제 가이드인 오유리의 곁에서 경계를 완전히 풀고 쉬는 중이었다. 다른 생각 중이기는 했지만, 그게 오유리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약혼자의 물음에 한정운은 단번에 변화를 감지한다. 한정운은 오유리를 서운하게는 할 수 있어도 저토록 서럽게 만들 짓은 한 적이 없다. 이 서러움이 누구의 작품인지 유추해 내는 것이 어렵지도 않다. 오유리를 애타는 눈길로 바라보던 누군가가 불씨를 지펴주었을 것이다. 본인은 그걸 순정이라고 포장하겠지만 남의 것을 갈취하는 야만이다. 한정운은 뺏길 생각은 없다.
"내가 그렇게 싫어?"
민아는 착실하게 대사를 내뱉었다.
유현은 자세를 고쳐 앉으며 지그시 바라보았다.
대본을 아예 무시하고 즉석에서 새로 대사를 만들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건 감독의 오해였다. 오해를 풀 시간이 없어 흐지부지 넘어갔지만, 제게는 감히 대본을 새로 쓸 능력 따윈 없었다.
유현은 아주 약간만 바꾸고 싶을 뿐이었다. 지문 한 줄을 건너뛰고, 지문 속에 있는 성가신 표정은 지우고, 그다음에 '내가 잠을 못 자서 그래. 미안.' 정도로 고쳐 뱉을 생각이었다. 대략적인 리허설을 하면서 민아에게도 그렇게 말해두었다.
그러나 유현이 대사를 하려는 순간 머릿속에서 낯선 목소리가 웅웅 맴돌았다.
네 착각이야.
민아의 방향으로 느릿하게 몸을 기울인 유현은 앵무새처럼 말을 토해냈다.
"네 착각이야."
대사가 틀렸으니 감독이 멈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카메라는 계속해서 돌아갔다. 아마도 감독은 유현이 어디까지 하나 보자는 마음일 것이다.
잠을 못 자서 그래.
"잠을 못 자서 그래."
이유는, 안 물어?
"이유는 안 물어?"
민아는 짧은 리허설을 하면서 상처받은 연기 대신 '서운함만 조금 남아 있는' 표정을 짓기로 했다. 그러나 전혀 다른 대사가 나오자 그녀의 얼굴 위로 연기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선명한 당혹스러움이 떠올랐다.
웃는 듯 마는 듯 미묘한 웃음기를 걸고 또렷한 시선을 보내는 유현에, 민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후 인기척에 고개를 돌리면서 애써 감정을 숨기는 것으로 이어져야 했으나, 민아는 놀란 나머지 멍하니 유현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카메라는 여전히 돌아가고 있었다.
이대로 엔지를 낼 수 없으니 유현이 느슨했던 몸을 바로 세우고 민아의 뒤쪽을 보며 알은체를 하며 눈짓했다. 그에 민아는 자연스럽게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배우들이 사인에 맞춰 연회장으로 속속 들어서고 있었다. 부드럽게 미소를 띠운 유현은 수트 단추를 잠그며 몸을 일으켰다. 예의를 차리는 목소리로 "오셨어요." 하고 대사를 치면, 이 장면은 여기에서 끝이 나는 것이었다.
유현이 앉아 있던 테이블에서 나와 비싼 옷을 차려입은 배우들에게 걸어가던 그때였다.
"……."
눈앞으로 기묘한 장면들이 뒤죽박죽 지나갔다.
둥근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흰털의 숄을 두른 여자의 진주 귀걸이, 기다란 테이블에 덮인 흰 보, 테이블 위에 줄지어 선 꽃병, 백색 수트를 입은 남자, 벽에 붙어 있던 기포가 하나둘 떠오르는 샴페인 잔, 검은 수트를 입은 남자의 바닥이 빨간 구두, 부케를 열 배쯤 키워놓은 듯한 꽃나무 장식,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이브닝 드레스를 차려입은 여자의 은색 클러치, 설탕이나 초콜릿 따위로 만든 화려한 공예품이 꽂힌 삼단 케이크….
화질이 좋은 카메라로 찍은 커다란 사진을 부분부분 찢은 다음 코앞으로 들이미는 것 같았다. 동시에 누군가 뇌 속으로 들어가 플래시를 강하게 터트리는 것처럼 시야가 조각난 채로 번쩍거렸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