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36.
유현은 눈을 굴리다가 손뼉을 마주치며 말했다.
"아아아, 혹시 면허 물어보시는 거였어요? 처음부터 그렇게 물어보시지. 저 운전한 지 꽤 오래 됐어요. 스무 살에 면허를 땄으니까 육 년 정도 됐나. 저 잘해요, 운전."
"…면허를 일찍 땄네요."
이제서야 원하는 대답이 나왔는지 느지막이 대꾸를 내놓았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동생한테 물어보니까 다들 그때쯤 딴대요. 수능 끝나면 시간이 제일 많을 때니까."
"수능을 쳤어요?"
"저요? 당연하죠."
"수능 성적이 없던데."
뒷조사했다는 말이 너무나도 당당해서, 요새는 누구나 다른 사람의 수능 성적을 알아볼 수 있는 시스템이 생겼나 멍하니 생각했다. 유현은 언짢아하며 물었다.
"어디서 조사했는데요?"
"각 잡고 조사한 것까진 아니에요. 고유현 씨가 졸업한 학교에 한 번 물어본 정도."
"수능 성적은 뭐에 쓰려고 알아봤어요? 아니 그리고 본인 수능 성적 나한테 알려줄 것도 아니면서, 남의 성적을 그렇게 함부로―"
"역시 내가 준 건 다 안 읽었네요."
유현이 입술이 딱 붙었다. 세상에, 그런 것까지 적어놨단 말인가. 수능을 되게 잘 봤나 보지? 되게 자랑거리였나 보지? 괜히 머쓱해진 유현은 헛기침을 하며 대답했다.
"수능 성적은, 학교에 물어보면 없을 거예요. 제가 수능은 쳤는데 다음날부터 학교를 안 갔거든요. 학생 개개인 성적은 본인이 입력 안 하면 모르니까. 다른 방법으로 알아보는 방법이 있는진 모르겠는데…."
"학교는 왜 안 갔는데요?"
"근데 저 왜 취조당하죠? 지금 해명을 할 건 내가 아니라 그쪽 아니냐구요. 그날 대체 어떻게 된 거냐구요."
태화가 웃음을 터트렸다. 전화하면서 종종 듣던 그 웃음이었다.
"취조라니. 그냥 난 고유현 씨가 궁금한 건데."
그렇게 말하면 또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해명은 뭐부터 할까요."
"연락 안 된 거요. 내가 전화 많이 했거든요?"
"첫 번째로, 폰이 고장 났어요. 아마도 어디에 부딪혀서 못 쓰게 된 모양이에요."
"두 번째도 있어요?"
"두 번째는, 폰이 멀쩡했더라도 난 전화 온 줄 몰랐을 거라는 거예요. 며칠 동안 의식이 없었거든요."
너무 평이한 어조라 그 내용을 조금 늦게 이해한 유현이 눈을 크게 뜨고 쳐다봤다.
"그럼 병원에 있었어요?"
"병원은 아니고."
"아니고 어디요?"
"병원 비슷한 곳이요. 거기서 나오자마자 유현 씨한테 온 거예요."
듣다 보니 생각이 났다.
"괜찮아지자마자 바로 달려온 거예요."
유현은 머리 한구석에 찌그러져 있던 기억을 끄집어냈다. 연기처럼 사라졌다가 불쑥 나타났던 일은 전에도 있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때도 아팠다고 했었지. 우람한 체격 때문에 아픈 사람처럼은 안 보여서, 유현은 태화가 복용하는 약 때문에 정략결혼을 당할 만큼 몸이 성치 않다는 사실을 종종 잊곤 했다.
"아, 그 공기 좋다는…."
"기억하네요."
"그러면, 그 공기 좋은 곳까진 어떻게 갔어요? 의식도 없는 사람이 갑자기 사라졌다고 해서 얼마나 황당했는지."
빈 들것을 가리키며 여기 있던 환자 어디 갔느냐 물었을 때 저만큼이나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던 구조 대원들의 표정이 생생했다.
"그것까진 자세히 모르겠네요. 나도 눈 떠 보니까 거기여서."
다른 들것으로 실어 간 거였나? 아수라장이었던 현장을 생각해 보면 다른 구급차에 실렸을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하긴 며칠 동안 사경을 헤맬 정도였다는데 골이 깨진 직후에 두 발로 직접 일어나 움직였을 리는 만무했다.
"오래 걸려요?"
"네?"
유현이 멍청히 되묻자 대신 대답하듯 내비게이션에서 안내 멘트가 흘러나온다.
「잠시 후 목적지 부근입니다.」
얼른 바깥으로 눈을 돌렸다. 어느새 병원 앞에 도착해 있었다. 지름길로 왔나 하고 시간을 확인하니 그렇게 일찍 도착한 것도 아니었다.
"어디서 기다릴까요?"
"태워주기만 한다면서요."
"집까지는 어떻게 가려고."
"…택시 타고?"
"택시를 참 좋아하네요. 택시 타지 말고 내 차 타고 가요. 근처에서 기다릴게요. 끝나면 그 번호로 전화해요."
눈짓하는 대로 따라가자 손에 쥔 폰 화면이 밝아지며 저장되지 않은 열한 자리 숫자가 반짝 떠올랐다.
***
형식적인 상담을 받은 뒤 처방 약을 챙겨온 유현은 커피를 홀짝이며 통화 중인 태화를 뜯어 보고 있었다. 상담을 끝내고 나온 유현에게 급한 연락이 왔으니 잠시만 기다려 달라며, 우는 아이 입에다 사탕을 물려주듯 커피를 쥐여주고는 오 분째 통화 중이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세상 참 불공평하네.
어쩌다 한번 시선을 붙들리면 결국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게 감탄하고 있을 껍데기였다. 인류가 보편적으로 만족감을 느끼는 미적인 요소들을 하나하나 잘 안배해 만든 듯한 얼굴, 정수리에서 발끝까지 한번 내리훑는 데 한참이 걸리는 기럭지.
아이돌이다 보니, 유현도 자신의 팬들이 찍어준 제 사진을 자주 보게 된다. 특히, 홈마라 불리는 개인 팬페이지의 사진들은 저를 찍은 게 맞나 의심스러울 정도로 생소한 순간들을 프레임에 담아내곤 했다.
그냥 지나치고 말 일상의 표정 하나도 보정을 거쳐 더없이 완벽한 결과물로 탄생했다. 누군가 시켜서 하는 일도 아니고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의 가장 빛나는 순간을 세상 사람들과 공유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시간과 노력을 투입한다는 게, 이해할 수 없어 더욱 경이로운 봉사 정신이라 생각해 왔다.
그리고 유현은 비로소 그들의 봉사 정신이 어떤 욕망에서 비롯되는지 알게 되었다. 만약 제가 주태화라는 사람의 팬이었다면 저 순간을 꼭 남기고 싶을 것 같다고, 관조적인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외모로 추앙받는 사람들이 발에 채이도록 많은 연예계에서 몇 년을 일한 자신도 이럴진대 일반인이라고 다를까. 멀리서부터 무시하기 힘든 존재감에 가까이 다가와 대놓고 감상하거나 갈 길이 바빠 무심코 지나치던 행인들도 모두 걸음을 늦춰 돌아보곤 제가 본 것이 맞는지 확인해 보고 갔다.
통화가 끝이 났는지 태화가 차로 돌아왔다.
"미안해요. 당장 받아야 하는 전화라."
"저 때문에 급하게 끊은 거 아니죠? 저 진짜 혼자 가도 되는데."
"혼자, 택시 타고?"
저렇게 생기면 비웃는 것이 비웃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 수도 있구나. 유현은 방금 알게 된 새로운 사실에 다시금 세상의 불공평함을 되새기고 떨떠름하게 혀를 찼다.
"운전 잘한다는 건, 본인 생각이죠?"
도로에 진입하자마자 차는 신호를 받고 섰다. 신호 한 번 걸리면 계속 걸리는데, 따위를 생각하고 있던 유현이 느닷없이 들어온 공격에 눈을 깜빡였다.
"고유현 씨 매니저는 웬만하면 운전대 잡게 하지 말라길래."
"언제요?"
"오늘 아침에."
아침에 통화를 끝내고 태화를 만나기까지는 불과 몇 분의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 저 모르게 생긴 유대감으로 둘 사이에 무슨 말이 오갈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피곤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이러라고 상진이 형한테 알린 게 아니에요."
"나도 말했지만, 난 처음부터 이렇게 써먹으려고 한 거예요."
"이렇게 써먹는 게 뭔데요?"
"협조 좀 해달라고 부탁하는 거죠."
"무슨 협조요?"
유현은 사사건건 트집을 잡고 싶은 사람처럼 말꼬리를 물었다. 태화는 표정만큼이나 천연덕스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뭐, 바쁜 애인 얼굴 보는 일이지 뭐겠어요."
뭐, 뭔, 누구 얼굴? 유현이 귀를 의심하며 미간을 좁혔다.
"바쁜…?"
"애인."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하는 유현을 대신해 친절히 그 두 글자를 뱉은 태화 옆모습에서 웃음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진심을 가장한 얼굴에 유현이 조용히 경악했다. 못 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저렇게 뻔뻔해져서 돌아온 거야. 그때 머리를 많이 다쳤나….
"사귄다고 밝혔으니까 매니저한테는 우리가 애인이잖아요? 아닌가?"
"그렇게 따지면, 맞긴 한데요."
"그럼 문제없네. 아니면, 애인이란 말이 싫어요?"
싫은 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양심도 양심이고 비위도 비위였다. 유현은 갓 한국어를 배운 외국인과 대화를 하는 사람처럼 제 뜻을 이해시키기 위해 느릿느릿 말을 늘어놓았다.
"글쎄요. 둘만 있을 때는… 애인보다는, 더 적당한 말이 있지 않을까요?"
"다른 적당한 거 뭐, 남자친구?"
한술 더 뜨네…. 할 말을 잃은 유현이 눈이 시린 사람처럼 눈을 가늘게 떴다. 뭐가 잘못됐냐는 듯 조수석을 보며 "왜요?" 하고 묻는 미소가 더없이 산뜻해서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래요, 호칭은 그렇다 치고요."
"네."
"그 형은 이상한 데서 걱정이 많은 편이거든요. 그러니까 저에 관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 그냥 흘려 들으셔도 돼요."
"매니저가 오늘 태워준다고 했다던데 혼자 병원 가겠다고 우겼다면서요."
"직접 운전해서 갔다 오면 금방인데 뭐 하러요."
"직접?"
가만, 아까 주차장에서 만났을 때도 이 질문 했었지. 이상함을 감지한 유현은 눈을 굴렸다. 생각해 보자. 의도가 뭘까. 차 소유? 아니고. 면허 유무도 아니고. 매니저 동행 여부도 아니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유현이 눈썹에 힘을 주고 두 손으로 허공에 휘저으며 말했다.
"그러니까요. 지금 정확히 뭐가 궁금한 거예요. 돌려 말하지 말고 바로 물어보세요. 뭘 묻는지 모르겠어요."
"오늘 애인 만나러 가려고 했어요? 나 말고."
"에?"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에 그만 얼이 빠져 유현이 입을 벙긋거렸다.
"같이 가자는 매니저한테는 오지 말라고 하고, 나만 보면 택시 타고 가겠다고 하는 사람이 직접 운전해서 어딜 가려나 궁금했거든요."
"그건 왜…."
"이유는 딱히 없고. 좀 거슬려서요."
태화가 시선을 마주쳐 왔다.
"돌려 말하지 말라면서요."
종잡을 수가 없는 순간에, 감정도 의도도 불분명한 시선과 마주치면 회피하기도 직면하기도 어려웠다. 그렇게 머뭇거리는 동안 농담으로 넘길 타이밍도 놓치고 말았다.
뒤에서 빵빵 울리는 경적 소리에 태화는 자신이 언제 쳐다본 적이나 있었냐는 듯 시선을 떼어내 정면으로 옮기고는, 핸들을 검지로 톡톡 두드리다가 출발했다.
헛기침을 한 유현은 화제를 돌릴 겸 슬쩍 다른 말을 던졌다.
"저, 저번에 못 들은 대답 듣고 싶어요. 카페에서. 왜 저였냐고 물었던 거. 기억나죠?"
"네, 기억나요."
"다른 조건 다 빼고, 드라마 캐스팅 하나만 해주겠다고 해도 그쪽이 원하는 거 해줄 사람은 차고 넘치는데, 왜 저한테 계약하자고 거예요?"
"별로 말 안 해주고 싶은데요."
"도망갈까 봐, 그 말 하려고 그러죠?"
"고유현 씨가 대답 안 해서 나도 안 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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