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네임 온 잇-35화 (35/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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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그냥 난 그런 스타일이랑 잘 안 맞아. 성격 안 좋고 머리 나쁜 건 괜찮은데, 겉이랑 속이 다른 건 못 참겠거든."

태인은 턱을 매만지며 의미심장한 대답을 내놓더니, 지호가 다른 질문을 할 듯하자 금세 다른 화제로 주의를 돌렸다.

"네 꾀병 부리는 꼴 구경하라고 부른 건 아닐 테고. 여기에 집합시킨 이유는?"

"아, 그래. 나 여기서 빠져나가게 도와줘."

"너 상태 안 좋아서 여기 있어야 된댔잖아!"

"누가?"

"예? 아까 연세준이 와서 그러더라구요."

입술을 비뚜름히 올린 태인이 태화 쪽으로 턱짓했다.

"컨디션 좋아 보이는데?"

"그래도 며칠은 더 있어야 된다고…."

"며칠이나 더? 뭐하러?"

"그건…. 적절한 치료를 해주지 않을까요?"

"윤지호 네가 보기에는 치료가 필요해 보여? 전혀 아닌데?"

그건 그러네. 이상하게 힘이 넘쳐 보이네. 공격을 받아 정신을 잃고 실려 온 것 치고는 멀쩡해 보이기는 해 지호는 턱 언저리를 검지로 긁으며 스읍, 하고 입소리를 냈다.

"지호 너 본 적 있지? 쟤 센터로 옮길 때."

"저야 많이 봤죠. 전쟁이잖아요."

"그래, 전쟁이거든. 한 번은 깨어나서 주변에 있는 거 다 부수고 사람 하나 다치고 그래야 차에 실을 수라도 있잖아. 상태 안 좋으면 더 난리고."

"보통은 그렇죠…?"

"이번엔 얌전히 실려 왔다던데?"

태화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러잖아도 센터에서 눈을 뜬 것에 의문을 갖고 있었다. 워낙에 특이한 증상을 앓고 있다 보니 누군가 자신을 옮겼을 거라는 가정은 처음부터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센터 파견 직원 한둘 벽에 처박는 건 일도 아니어서, 아무리 죽을 것 같아도 스스로 움직여 이송 차량에 몸을 싣는 태화였다. 그래서 이번에도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동안 스스로 움직였을 거라고 추측했었다.

"누가 날 옮겼었다고?"

"그래, 네 똘마니가."

"뭐?"

"본인이 그렇게 소개한 거야. 네 똘마니였다고. 키 크고 무섭게 생겼어."

곧 귀국한다던 싹싹한 목소리가 귓전에 스쳤다. 태화는 정혁을 떠올리곤 피식 웃었다. 보아하니 제가 할 일이 뭔지 알 것 같은 지호는 말없이 주섬주섬 폰을 꺼냈다. 태인은 지호의 등을 툭 쳐주고 호쾌하게 말했다.

"자아, 그러니까 귀염둥이 윤 서방은 전화 돌려 달라고 부른 거 같고…. 뭐, 나는 지금 당장 연세준한테 가서 지랄해 주고 오면 돼?“

***

-"너! 고유현이 너!"

"그 정도로 제 귀청이 떨어지겠어요? 무슨 일이에요, 이 새벽부터."

유현은 현관문을 열다 풀린 신발 끈을 발견하곤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 어깨와 귀 사이에 폰을 끼우고 두 손으로 매듭을 지었다.

-"시형이 말론 약이 모자란다던데. 왜 형한테 말을 안 했어!"

"그래서 오늘 병원 가려구요. 지금 나가요."

-"진작 말을 했으면 오늘 출근을 안 했지, 인마! 기다려, 일 금방 끝내놓고 갈 테니까!"

"지금 신발 신는 중인데요?"

촬영도 없는 날 유현이 아침부터 부지런을 떨었을 거란 시나리오는 전혀 머리에 없었는지 한동안 정적이 흐른다.

-"…그냥 형이랑 가지? 데려다 준다니까? 혹시 다른 약속 있어? 뭐… 그분이랑?"

약속은 무슨. 살았는지 죽었는지 연락도 안 되는데.

"병원 일찍 갔다 와서 푹 쉬려고 그래요."

-"그런 거면 형이랑 가."

"아이, 바쁜 사람 오라 가라 그러기 싫으니까 그렇죠. 혼자 갔다 오면 돼요. 내가 애도 아니고."

-"바쁜 사람 아니고 나 네 매니저야!"

상진이 이러는 이유는 하나다. 운전. 상진은 유현이 운전하는 걸 싫어했다. 몇 년 전에 연습한다고 차를 몰고 나갔다가 가로수를 들이박고 정신을 잃은 사고 때문이었다. 음주운전이다 뭐다 말이 많았지만 피로 누적이라는 소견에 난리가 난 일이었다. 그 이후로 그 흔한 주차 위반 통지서 한 장 받아본 적이 없는데도 유현이 운전대만 잡겠다고 하면 질색을 하며 뜯어말렸다. 예나 지금이나 쓸모없는 과보호였다.

유현은 현관문을 열고 나서면서 폰을 다른 손에 바꿔 쥐었다.

"그러니까 내 매니저가 지금 바쁘잖아요. 됐어요. 내가 운전을 못 해, 차가 없어?"

-"촬영 때문에 몸도 성치 않은데 또…."

"누가 들으면 나 어디 아픈 사람인 줄 알겠네. 형은 뭐가 그렇게 걱정이에요. 가만 보면 우리 엄마보다 더한 거 같다니까. 바빠요. 끊어요."

어지간히 급했는지 "이유야, 이유야!" 하며 데뷔 초에나 부르던 이름으로 애타게 불러 댔다. 코웃음을 친 유현은 뒷말을 듣지 않고 과감하게 종료 버튼을 눌렀다. 늦잠을 잔 덕에 최대한 서둘러야 진료 예약 시간에 맞춰 도착할 수 있었다.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차를 찾는 건 몇 달 만인 듯싶었다. 본가에 갈 때나 굴리는 차이니 못 본 지 여름부터 적어도 석 달, 아니 꼴사나운 눈물을 보일까 봐 발길을 물린 초봄부터 헤아리면 반년은 족히 된 셈이었다. 때마침 도통 얼굴을 보기 힘들어 형 얼굴 잊어 먹겠다며 은근히 섭섭함을 내비치던 유성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오늘 병원 갔다가 집에나 들를까.

시간을 계산하며 바삐 걸음을 옮기다 말고 옆을 흘긋거렸다. 언제부턴가 낯선 차가 유현의 걸음을 따라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차할 말한 데를 찾는 건가. 주위를 둘러보니 웬만한 직장인들은 전부 출근하고 비어 있는 곳이 꽤 되었다. 보통은 로비와 가장 가까운 곳에 주차하려고 하는데 구석으로 가는 걸 보니 본인이 선호하는 구역이 따로 있는 듯했다.

유현이 자동차의 진로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몇 걸음 크게 떨어졌더니, 썬팅으로 어두운 창이 쭉 내려가며 익숙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어디 가요."

유현이 잠시 굳었다가 금세 창가로 바짝 붙어 섰다.

"뭐예요? 이 차도 그쪽 거예요?"

"고유현 씨 쉬는 날이라길래 만나러 왔어요. 내가 조금만 늦었어도 놓칠 뻔했네요."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시간 많이 뺏진 않을게요. 병원 가는 길이라면서요. 데려다주기만 할 테니까 타요."

잠깐 한눈을 판 사이 말도 없이 사라져 놓고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나타난 거면서, 지금 이게…. 유현이 헛웃음을 뱉었다.

마지막으로 본 게 의식이 사라지며 힘을 잃은 팔이 그만 들것 바깥으로 툭 떨어지는 광경이었다. 머리가 터져 피투성이가 된 몰골을 하고 구급차로 실려 가는 도중이었다. 안 그래도 죽을 날 받아놓았다던 남자인데 이대로 저세상 보내는 건가 싶어 유현이 들것에 답삭 붙어 사정없이 태화를 흔들어 깨웠다. 정신 차려 봐요, 이봐요, 이봐요!

거구의 사내를 옮기는 걸 도와줘도 모자랄 판에 들것에 올라타 방해하고 있으니 구조대원은 짜증을 왈칵 내며 유현에게 당장 떨어지라며 언성을 높였다. 제지당하고 들것으로부터 멀찌감치 끌려 나온 유현은 금세 얼굴을 알아본 기자들에게 둘러싸였고, 경찰차에 구급차에, 구경 나온 인파들까지 섞여 정신이 없는 와중에 들것을 놓치고 말았다. 뒤늦게 따라갔을 때는 홀연히 사라졌다는 기막힌 소식을 들었고.

놀라움 반 반가움 반이었던 기색이 점차 무겁게 가라앉았다. 생각하면 할수록 걱정한 날들에 억울함이 차올랐다. 이렇게나 멀쩡할 거면 살아 있다고 문자라도 주든가.

"내 스케줄은 어떻게 알았어요?"

"매니저한테 전화해서 물어보니까 알려주던데."

"그러라고 밝힌 게 아닌데요."

"난 이러려고 밝힌 거라니까."

탈까 말까. 뻔뻔하게 나타난 게 어이없어서 지나쳐 버리고 싶은 한편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유현이 씩씩대고 서 있자 태화가 슬쩍 회유했다.

"안 타 주면 나 좀 속상한데."

속상하다는 말과는 다른 느긋한 얼굴이 타도 그만 안 타도 그만인 사람 같았다. 유현은 못마땅하게 그 반반한 얼굴을 뜯어보았다. 밤마다 듣는 전화기가 꺼져 있다는 음성 멘트에 얼마나 가슴 졸였을지 상상도 못 하는 때깔 좋은 낯짝이었다. 잠자코 기다리던 기다란 눈매가 유현의 꽉 쥔 주먹을 발견하고는 웃음기로 부드럽게 휘었다.

"안 타요?"

미간을 좁히며 보던 유현은 보닛을 돌아 조수석 문을 쾅 닫고 올라타며 따져 물었다.

"그날 뭐가 어떻게 된 거예요? 쓰러져서 눈도 못 뜨던 사람이 병원엔 안 가고 어딜 간 거예요? 연락은 왜 안 되고?"

"많이 걱정했나 보네요?"

그렇게 되물으니 일순 말문이 막혔다. 근사한 미소에서 시선을 떨어트리며 어물어물 답했다.

"걱정이야 했죠. 상식적으로, 같이 있던 사람이 다쳤는데…!"

"음, 가면서 자세하게 들어봐야겠네요."

"별로 자세할 것도 없어요."

"그래서 목적지가 어디예요."

아, 목적지. 열흘 만에 홀연히 나타난 구태의연한 남자의 생존기를 들을 생각에 급급해 간과하고 말았다. 병원 가는 중이었단 걸. 내비게이션 검색창을 건드리는 손끝을 보던 유현이 작게 말했다.

"…온마음 클리닉이요."

목적지를 듣더니 태화는 눈썹을 살짝 까딱였다. 그러곤 말했다.

"안전벨트 매요.“

***

도로로 진입해 신호를 받고 서 있었다. 뜨뜻미지근한 반응에 유현이 눈을 가늘게 떴다. 진료과목이 뭔지는 상호만 들어도 명확했다.

정신과에 방문한다고 하면, 아무리 편견 없는 사람이라도 미약한 호기심을 내비치는 게 정상인데 태화에게서는 내내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본인이 직접 운전하려고 했어요?"

"예?"

다른 생각에 빠져 있던 유현이 화들짝 놀라 몸을 움찔했다. 태화가 피식 웃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아까 차 가지러 가는 거 같길래."

운전할 차가 있었냐고 묻는 건가? 회사에 미운털이 박혀 밴 차량 지원이 끊기고 여름철 잠깐 상진의 SUV로 스케줄을 다닌 적이 있었다. 차 뺏겼다는 말에 밴부터 구해 준 사람이니 그런 오해를 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아, 저도 차는 있었어요. 뺏겼던 밴은 회사에서 스케줄 있을 때 타라고 해준 거였고요."

그때 유현이 '회사에서 지원이 끊겼다' 대답해 사정을 많이 딱하게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몇 년 동안이나 광고계에서 블루칩이니 기대주니 활약을 했었는데, 타고난 금수저에 비할 바는 못 되겠지만 차 한 대 정도는 무리 없이 소유할 재력은 됐다.

"내 말은, 오늘 같은 날에 혼자 움직이냔 거였어요."

아, 상진이 형 말하는 거구나!

"아아, 제가 쉬는 날엔 매니저 형도 쉬어요."

"……."

"상진이 형이 거의 제 로드 매니저처럼 따라다니고 있긴 한데, 원랜 그게 더 이상한 거죠. 초창기부터 일했던 매니저는 형뿐이라 대표님 다음으로 쳐 주거든요. 오늘은 제가 쉬어서 할 일이 없긴 할 텐데, 대표님이 하도 화를 내셔서 회사 출근했나 보더라고요. 하긴, 그 형은 월급 받는 회사원이니까."

말이 끝나자 차 안에 오묘한 공기가 감돌았다. 능숙한 운전에 멍하니 전면을 보며 주절거리던 유현이 기이한 정적을 느끼고는 슬그머니 옆을 바라보았다.

이걸 묻는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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