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27.
그딴 소리도 했다고…. 태화는 이마를 짚으며 눈을 감아 내렸다.
"태화 넌 네 영혼에까지 새긴 이름이 그렇게나 알량하니?"
제가 그랬을 리 없다고 비웃고 반박하고 부정하고 싶지만, 사고를 당한 전후로 무늬가 다른 종이를 덧대어 붙인 것처럼 기억의 면이 고르지가 않았다. 기억을 하려고 하면 할수록 뇌에 못질을 하는 것처럼 괴로웠다.
"난 원래 무서운 게 없는 사람이었어. 악몽 같은 것도 꿔 본 적이 없었고."
"……."
"근데 이젠 스트레스 좀 받는다 싶은 날이면 네 꿈을 꿔. 병실에 가만히 누워 있던 너 말야. 살가죽이 뼈에 붙어서 볼품없고, 혈색도 없어서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알 수 없는, 시체 같은 너."
태영은 다시 몸을 편하게 기대며 말했다.
"회사 일도 배우기 싫고, 사업을 하는 것도 싫고. 별로 열심히 살고 싶지 않다고 했지. 덤처럼 거저 얻은 인생 막 쓰고 싶다고 했지."
"……."
"그럼 네 영혼의 주인이랑 결혼해서 살아, 그냥. 그럼 나 네 인생에 더는 상관 안 할게."
***
반신욕으로 흘린 땀을 씻어내고 거울 앞에서 머리의 물기를 털던 유현의 손이 멈췄다. 헐겁게 맨 허리끈으로 느슨하게 벌어져 있던 샤워가운의 깃 쪽에서, 유현이 팔을 움직이는 때마다 뭔가가 가려졌다 드러났다 하고 있었다. 유현은 머리에 그대로 수건을 얹어 놓고 샤워가운의 섶을 살짝 당겨 내렸다.
"뭐야…."
긴가민가했지만 역시 네임이었다.
유현이 수건은 대충 던져놓고 허리끈을 풀어 샅샅이 제 피부를 훑다가, 아예 샤워가운을 완전히 벗어버리고는 뒤를 돌았다. 머리만 돌려 거울로 엉덩이, 허리, 날갯죽지, 어깨까지 눈으로 제 몸을 타고 오르다 뒤통수 바로 아래 애매하게 박혀 있는 네임을 발견하고는 짧은 숨을 토해냈다. 그리고 작게 중얼거렸다.
"…이런 미친."
다시 샤워가운을 걸치고 대충 던져둔 수건을 주워 욕실을 나섰다.
또 네임!
주방으로 간 유현은 컵에 찬물을 가득 따라 들이켰다. 다 비운 물컵을 던지듯 내려놓고 차가움에 찡하게 울리는 골을 부여잡았다. 두통을 참아내며 약통부터 찾았다.
뭐, 아름다운 족쇄? 낭만의 상징? 웃기지 말라 그래.
인간은 미지의 영역을 미화하고 과장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지닌 동물이고, 가지지 못한 것에 막연한 환상을 갖기 마련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연애를 하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떴는데 운명처럼 그 사람의 이름이 몸에 새겨진다면?'은 여전히 출생의 비밀과 함께 로맨스 드라마의 단골 소재였다.
멋모르던 시절 어린 유현도 네임이 생긴다면 어떨까, 정도의 상상은 해본 적이 있다. 하지만 그건 '그러면 어떨까'였지, '그랬으면 좋겠다'가 아니었다.
유현은 처음부터 네임이 싫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네임은 아름답지도 낭만적이지도 않았다. 데뷔가 확정되고 프로필 사진 촬영을 당장 일주일 앞둔 열여덟 생일날 아침에 본 네임이 뭐 얼마나 아름답고 낭만적이었을까. 그저 좆같았다.
이제는 몇 년이 흘렀으니 적응이 될 만도 했는데 여전히 좆같았다. 파내서 없앨 수도 없는데 받아들이고 살자니 감수해야 할 게 너무 많았다.
요샌 웬일로 안 보인다고, 이번에는 촬영 끝날 때까지 안 보일 모양이라고 시형이랑 손 붙잡고 좋아했더니만….
거실로 나가 선반이란 선반은 다 뒤졌지만 보이지 않았다. 한동안 시형도 필요 없었고 약을 챙기지 않은 지도 꽤 되었다. 몸이 바쁘고 정신이 고단해지면 어김없이 존재감을 뽐내는 좆같은 병이었다. 심신이 한계에 몰리는 지난 몇 주 동안에도 네임은 의심스러울 정도로 잠잠했다.
유현은 무릎을 꿇은 채로 티비장 아래를 뒤적이다 문득 손을 멈추고 생각했다. 아, 혹시 그게 문제였을까. 시형이랑 안 보여서 좋다고 말한 거? 진짜 네임에 자아가 있기라도 한 거 아니야….
"말도 안 되지. 에비."
쓸데없는 길로 빠지는 망상에 이내 고개를 흔들고 몸을 일으켰다.
침실의 협탁 서랍장을 끄집어 내 뒤집고 약이 있을 리 없는 옷방까지 가서 온통 헤집은 후에야 유현은 제가 지난달 찬장에 넣어두었던 게 기억이 났다.
찬장에서 꺼내 든 약통은 유현이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가벼웠다. 복약 지시대로 두 알을 삼키고 보니 약통 바닥에 딱 두 알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바빠서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인데 짬을 내 병원까지 들러야 한다는 뜻이었다.
유현은 소파에 앉아 왼쪽 가슴팍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샤워가운에 가려진 네임은 첫글자 '이'만 보였다.
"이 씨…."
표면이 매끈한 약통을 만지작댔다. 다발성 네임 발현 증후군. 이 약을 처방받기 전에 의사에게서 받은 진단이었다.
네이머 만 명 중 한 명 정도가 겪는다는 PTSD 증상 중 하나로서, 네임이 제멋대로 신체 부위 중 두 군데 이상 나타났다 사라지는 희귀 질환이었다. 네이머 중에서도 각인을 한 사람에게만 생긴다는.
네이머의 각인은 미디어 매체에서 흔히 다루는 것과 다르게 매우 드문 현상이었다. 네임은 애초에 글자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었고, 문양이나 기호로 발현된 네임이 글자로 변형되는 것이 바로 각인의 과정이었다.
네이머의 몸에 이름자는 어쩌다 우연히 새겨지는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를 각인했다면, 앞으로 그보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힘들다는 의미였다. 그런 의미에서 네임은 아름답고 낭만적일 수도 있겠지만….
"사랑인지 뭔지 나는 해본 적도 없어. 도대체 이게 뭔데? 이 자식이 누군데?"
코웃음을 친 유현은 신경질적으로 가운을 여몄다.
처음 제 몸에 나타난 이것이 각인 네임이란 사실을 병원에서 확인받았을 때, 유현은 대표 손에 죽을 뻔했다. 말 그대로 목숨을 잃을 뻔했다는 것이다.
"너희 다른 멤버들 빌빌거리는 동안 혼자 신나게 방송 좀 돌더니 뵈는 게 없었나 봐, 우리 고유현이가?"
"대표님, 아니에요!"
"정산은커녕 회사 돈 해 먹기 바쁜 그룹에서 너 혼자만 아주 살만 했나 봐. 그새 누구랑 눈이 맞아 붙어먹었을까나? 너무 궁금해서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야, 아주.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는 게 이런 건가?"
"제가 그런 멍청한 짓을 왜 하겠어요? 아니에요, 진짜 아닙니다!"
"아니야?"
"네, 아니에요. 대표님 저 진짜 억울해요."
"억울해? 하하, 씨팔, 그럼 네 몸에 그건 뭔데, 어? 의사 선생이 각인 네임이라고 했다며!"
눈이 돌아 있는 대표의 앞에 무릎을 콱 꿇고서 유현은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저, 대표님, 그게, 그게요…. 저도 모르겠어요. 저는 진짜 모르는 일이에요…."
"그걸 네가 모르면 누가 알까? 아, 김상진은 알려나? 그 새끼가 고유현이 몸 함부로 굴려 먹고 다니라고 빼돌려줬지, 그렇지? 개 같게도 호흡이 척척이야!"
"진짜 아닙니다, 대표님! 제 스케줄 아시잖아요, 그럴 수가 없었어요! 믿어주세요…."
"그럴 수가 없었으면 씨팔, 그런 게 네 몸에 있으면 안 되지, 어? 아아, 일본? 일본에서냐?"
네이머가 되고 싶어서 네이머가 된 사람은 없고, 배타적인 분위기만 아니라면 네이머가 아이돌이 되지 못할 이유는 사실상 없었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커지면서 네이머라는 사실을 숨기고 활동을 하는 연예인들이 점차 늘어 갔고, 그들은 노출을 최소한으로 줄이거나 피치 못할 경우 메이크업으로 가리면서 대중들의 눈을 속여 왔다. 가리기 힘든 부위에 네임이 있다면, 각인 상대가 없는 네임은 보통 문양의 형태였으니 패션 타투라고 둘러댔다. 의지만 있다면 어디에든 길은 있었다.
그러나 없던 길을 개척해 나가는 용감한 네이머들 중에서도, 각인 상대의 이름을 새긴 채로 활동하는 경우는 없었다. 방송 업계, 특히 아이돌 산업에서는 각인을 한 상대가 생기면 은퇴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굳어져 있었고, 각인했다는 이유로 은퇴한 아이돌들도 이미 여럿이 되었다.
인식할 수 있는 문자로 네임이 변형된다는 것은 곧 각인을 의미했다. 애시당초 아이돌 팬들이 네이머인 것 자체도 싫어하는데, 아이돌의 몸에서 각인의 흔적이 발견된다는 것은 절대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무책임하고 기만적인 일로 치부되었다.
다시 말해, 의사의 각인 네임 확인서는 대표에게 유현은 더 이상 아이돌로서는 효용 가치가 사라진 상품이 됐다는 선고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유현은 죽도록 맞았다. 그런 끔찍한 날것의 고통은 난생처음이었다. 대표는 어디서 몸을 놀리고 다닌 거냐고 악을 쓰고 바닥에 쓰러져 동그랗게 등을 말고 있는 유현의 등을 구둣발로 사정없이 찼다.
"이 새끼가 끝까지 모르쇠로 잡아떼? 오냐오냐해 줬더니 지도철이 무서운 줄을 모르네. 그럼 그 새끼를 조져야 답이 나오겠네. 밖에, 야! 가서 김상진이 오라 그래!"
조폭 출신이라는 지 대표는 아랫사람을 응징하는 데 있어 수단을 가리지 않았고, 종내 분에 못 이긴 대표의 손에 야구 배트가 들리게 됐다. 영문을 모른 채로 대표실로 끌려 온 상진은 참혹한 광경에 반쯤 넋이 나갔다. 대표의 배트가 망설임 없이 허공으로 올라가자 상진은 얼른 대표를 껴안고 소리쳤다. 이유야, 정신차리고 도망쳐! 이곳저곳 다 닦아 너덜너덜해진 걸레처럼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유현은 죽음의 위협을 느끼고 대표실을 벗어나 복도를 달려나갔다. 곧바로 상진도 그 방에서 빠져나와 유현의 뒤를 쫓아 달렸다. 그 뒤에서 포효하는 지 대표와 겁에 질린 비서의 목소리가 차례로 흘러나왔다. 당장 저 씨발새끼들 데려와! 진정하세요, 대표님!
복도의 모퉁이를 돌아 살았다 싶은 안도감이 드는 순간, 유현은 그대로 바닥에 무너졌다. 며칠 의식을 잃었고 눈을 떴을 때는 병실에는 초상이라도 난 것처럼 우는 어머니와 귀 아프게 소리 지르는 동생과 죄책감에 어쩔 줄 모르는 상진이 있었다. 그날 이후로 몇 달간은 이씨 성을 가진 사람과는 말도 섞지 않았다.
지긋지긋한 회상을 끝낸 유현은 약통을 꽉 쥐었다. 죽어라 복도를 내달리던 숨 가쁜 발걸음이 아직도 생생했다. 맞은 부위가 잘못된 것 같은 생각이 들면서도 뜀박질을 멈출 수가 없던 그때 그 순간. 아무 전조도 경고도 없이 네임이 나타날 때면 항상 그날의 고통이 생생히 떠올라 목이 죄이는 기분이었다.
♪―
적막을 깨고 울리는 벨 소리에 유현은 흠칫 어깨를 떨었다. 친구라고 부를 만한 사람도, 지인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도 많지 않은 유현에게, 이 시간에 전화를 걸어올 사람은 하나뿐이다.
상진이겠거니 손을 뻗어 확인한 이름은 뜻밖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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