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네임 온 잇-26화 (26/69)

(26)============================================================

26.

-"그동안 여기저기서 스카웃 제의가 들어왔지만 부팀이 절 불러줄 때까지 전 의리를 지켰다구요! 이제 김치찌개 매일 먹을 겁니다. 너무 좋아요!"

해맑은 포효에, 심각해져만 가던 태화는 긴장을 내려놓고 피식 웃었다.

"그래, 이번에 돌아가서 너네 팀장님 만나면 제발 조심 좀 하라고 해."

-"왜요, 저 없는 동안 무슨 사고라도 치셨대요?"

"그게 아니라 걱정이 돼서. 대책 없이 무모하기로는 걔가 나보다 한 수 위니까."

-"에이, 걱정 마세요. 제가 부팀 옆에 꼭 붙어서 커버 치겠습니다."

"웬일이야, 김정혁이. 부팀 뭐라 하지 말라고 팀장한테 대들다가 처맞기까지 한 놈이."

-"팀장님 나가시자마자 부팀의 실체를 알게 됐거든요.

"무슨 실체?"

-"부팀 은근 수단과 방법 안 가리는 타입이시잖아요. 절차 무시하는 건 기본이고, 본인이 안 내키면 상부 명령 자기 선에서 컷. 다른 팀장님들도 열 받게 하면 바로 딜 꽂잖아요. 팀장님이 탱커 역할 제대로 해주셨던 거죠."

쌓인 게 많은지 지회에 대한 불만이 주절주절 끊이지가 않았다.

-"지금은 부팀이 미친개라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그래서 알았죠. 부팀을 막을 수 있는 건 팀장님밖에 없구나. 제가 정말 아무것도 몰랐던 거였어요…."

지회가 가끔 미친 것 같기는 해도, 팀장이나 부팀장 정도의 간부급이 되면 '미친 거 아니냐'는 소리를 듣는 게 다반사였다. 애초에 멀쩡한 사람이 살아남을 수가 없는 환경이라 안 미친 사람을 찾는 게 더 빠른 센터에서, 지회는 드물게 멀쩡한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었다. 눈치가 빠르고 정치질에 능해서, 미친개 소리 들을 만한 지경까지 갈 리가 없는데 희한한 일이었다.

"걘 또 뭘 했길래 미친개로 소문이 나?"

-"수색팀에 미친 듯이 개겨서요."

태화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뱉었다. 수색팀에 개겨? 단단히 미쳤군. 어디서 뭐 잘못 주워 먹고 광견병에 걸린 개 정도로 소문이 날 만한 일이다.

수색팀은 처음에야 미해결 사건의 수색을 위해 결성한 최정예 프로젝트 팀이지, 점차 그 본래 목적이 흐려져 현재는 센터장의 직속 부대 정도로 인식되고 있었다.

수색팀은 일반 요원들과 달리 정신 교육 강도를 거의 세뇌급으로 받은 뒤에야 활동이 가능했는데, 그 이유는 유사시에 센터장과 동일한 권한을 가질 수 있어서였다.

처음부터 원칙주의자들만 뽑는 건지 아니면 세뇌를 당해 용통성이 없어지는 건지, 상당히 보수적으로 상황 판단을 하는 데다, 불복할 경우 사살도 가능해, 웬만큼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야 요원들은 수색팀과 갈등을 만들지 않았다. 오죽하면, '폭주 전조로 미친 에스퍼는 가이드보다 수색팀을 불러와서 정신을 차리게 하는 게 낫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였다.

-"팀장님이 들어도 어이없으시죠? 진짜 저도 너무 어이가 없어서…. 그때 생각만 하면 지금도 아찔해요."

"걔 미칠 때 너희는 안 말리고 뭐 했어?"

-"그게 저희는 전원 숙소 대기 명령받았거든요. 방 밖으로 나오지도 말고 팀원들끼리 접촉하지도 말라고."

"……."

-"부팀 그러고 있는 것도, 닥터들이 팀닥 좀 살려달라고 몰래 찾아와서 알게 된 거였어요. 팀닥하고 부팀 수색팀에 개기고 있다고, 나와서 어떻게 좀 해보라고. 그래도 그거 듣자마자 다 달려나가서 뜯어말렸다고요."

"……."

-"팀장님 그렇게 되시고, 부팀이랑 팀닥까지 잃을까 봐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요…."

마지막 말에 분위기가 미묘하게 가라앉은 것은 느낀 정혁은, 다음 말은 일부러 목소리 톤을 띄워 말했다.

-"근데, 아시죠? 수색팀 짤 없잖아요. 저희가 명령 불복으로 전부 수용소에 갇혔거든요. 그거에 또 부팀이 빡쳐서 항의하러 가고, 저희는 제발 가만 있어달라고 바짓가랑이 잡고 빌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자신이 사고를 당한 후의 일을 이렇게 자세하게 듣는 건 처음이었다. 깨어난 직후에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고, 그동안에는 감시 강도가 높아 연락이 힘들었다. 괜히 저 때문에 팀원들이 징계라도 받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고.

"그래서, 지금은 다들 괜찮지?"

-"그럼요! 그때 잠깐만 혼란스러웠던 거고, 지금은 다들 잘 지내고 있어요. 아! 이번에 부팀이 팀장님 되셨으니까, 다 같이 한번은 모이겠어요. 축하주라도 한잔해야 하니까!"

태화는 팀원들에게 늘 마음의 빚이 있었다. 가만히 듣던 태화는 망설이다가 늦은 인사를 건넸다.

"…수습한다고 다들 고생 많았을 텐데, 그땐 미안했다."

허어업,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팀장님, 방금 미안하다고 말씀하신 거 맞으세요? 저 지금 소름 돋았어요."

"다 같이 모이면, 그 자리에서 내 안부 좀 전해줘. 내가 미안하다고 했다고도 전해주고."

몇 년이 지나서야 이런 짬이 생겼는데, 지금을 놓치고 나면 언제 또 기회가 생길지 몰랐다. 팀장니임, 하며 정혁이 울먹였다.

"참, 그리고 네 새 팀장님한테 그 말도 전해줘라. 얼마 전에 부탁 들어준 거 고마웠다고."

-"얼마 전 부탁? 와, 두 분 연락하셨어요? 부팀 저한테 아무 말씀 없으시더니!"

그때 문밖 멀리서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에 태화는 문가로 시선을 돌렸다. 사무실의 주인이 돌아오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튼 그렇게만 전해줘. 너도 이만 조심해서 복귀하고."

-"넵!"

통화를 마무리 짓고 폰을 옆에 내려두자마자 문이 열렸다. 태영은 태화를 보곤 반가운 얼굴을 했다.

"언제 왔어?"

"방금."

"으음? 내 비서는 너 온 지 한참 됐다던데?"

그 말에 태화가 불만스럽게 쳐다보았다.

"그럴 거면 왜 물어봤어."

"그냥."

정혁과의 전화로 목이 탔다. 태화가 "여기 차는 안 줘?" 하고 묻자 서류를 대충 책상에 던져올린 태영은 손만 뻗어 호출 버튼을 누르고 "여기 물 한 잔이랑 블랙 커피 한 잔 부탁해요." 작은 소리로 지시했다. 그러고는 태화의 맞은편에 털썩 자리 잡으며 말했다.

"얼굴 좋네?"

인사인지 시비인지 알 수 없는 말을 뱉은 태영은, 다리를 꼬고 앉아 발신인이 불분명한 선물을 받았을 때처럼 의심스러운 눈으로 태화를 쳐다보았다.

"좋을 게 뭐 있어. 그대로지."

"아니야, 아니야. 저번이랑 다르게 아주 좋아 보여."

태영은 단호한 얼굴로 검지 손가락을 세워 양쪽으로 까딱였다.

"뭐, 그래. 좋으면 좋은 거지."

"신기해서 그래. 세준이가 얼마 전에 연락 왔어. 너 상태 많이 안 좋아서 실려 왔는데, 자기가 바빠서 몇 달 소홀히 봐서 그런 거 같다고. 미안하다면서 자기가 더 신경 많이 쓰겠다고 그러더라구? 그땐 그냥 하는 소린가 했는데…."

"……."

"정말 다르네? 주태화 챙기는 건 역시 세준이밖에 없다."

싫은 기분을 대놓고 드러낸 태화는 손을 내저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보자고 한 이유가 뭐야?"

"방금 말했잖아. 상태 안 좋다길래."

"상태 안 좋은 거 구경하려고?"

"말하는 거 봐. 상태 안 좋은 거 구경하려고 불렀겠니? 걱정돼서 불렀지."

"어련히 알아서 할까."

"어련히 알아서 하는데도 걱정하는 꼴 보기 싫으면, 네가 빨리 결혼을 하면 돼."

똑똑, 노크 후 문이 열리고, 앞에 앉아 있던 세 비서들 중 가장 어려 보이던 여자 비서가 물과 커피를 가져왔다. 선배들에게 언질을 들었는지 어느 쪽인지 묻지 않고도 커피를 태영의 앞에, 물을 태화의 앞에 내려놓는다.

비서는 긴장이 역력했다. 잔받침 위에서 잔이 달그락거렸다. 고개를 들던 비서와 눈이 마주치자, 태화는 긴장할 거 없다는 듯이 최대한 무해하게 웃으며 형식상의 인사를 건넸다.

"잘 마실게요."

비서는 당황한 듯 눈이 커졌다. 얼굴을 붉히더니 고개를 꾸벅 숙인 후 허둥지둥 사무실을 나갔다.

뜻 모를 얼굴로 그 광경을 가만히 보던 태영은, 뭔가 생각난 것이 있는지 막 들었던 잔을 다시 내려놓으며 물었다.

"저번부터 묻고 싶었던 건데, 그때 그 명단, 누구 찾으려고 했던 거야?"

"그때?"

"너 봄에, 파티 명단 구해줄 수 있냐고 했던 거."

물잔을 단번에 비운 태화는 잠깐 생각하다 아아, 하며 피식 웃었다. 태영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여자야?"

"여자겠어?"

두 번 고민도 없는 부정에 태영은 대놓고 실망한 기색을 비쳤다. 내심 여자이길 바랐던 모양이었다.

"여자였으면 뭐 어쩌게?"

"어차피, 아니라며."

"아니야. 셔츠에 술 쏟고 도망간 범인 찾으려던 거였어."

"뭘 찾아? 참…."

김이 샜다는 얼굴로 태영은 힘없이 소파에 등을 툭 기댔다. 그러고는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졸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기대한 내 잘못이지…."

태영은 이제 좀 사람다워진 동생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멀대같이 큰 키와 솥뚜껑같이 큰 손에 도둑놈같이 커다란 발로도 앙상해 보일 수 있다는 걸 가르쳐 준 동생이었다. 겉보기에 건강한 모습을 되찾은 것처럼 보이지만, 언제든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태화야."

"응, 말해."

"누구 없으면 그냥 세준이랑 결혼해."

또 그 얘기냐는 듯이 태화가 눈가를 찌푸렸다.

"연세준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들어?"

"기억나? 내가 세준이 반대했던 거."

어딘가 스산한 눈을 하고 고집을 부리던 태화와 침체된 집안 분위기를, 태영은 똑똑히 기억했다. 약혼을 올려야겠다며 급작스레 들이닥친 막내아들을 아연하게 바라보던 부모님과 석연찮은 듯하면서도 마냥 방관하던 태인, 수차례 만류했던 자신. 실은 본인 외에 누구도 반기지 않는 약혼이었다, 애초에.

태화가 센터에 들어가고부터는 무소식이 희소식이 되어, 가족들과 통 사이가 좁아들 기회가 없었다. 마음껏 누린 만큼 집안의 요구를 받들라는 재벌가에 만연한 정략적 결혼관은, 태인이나 저같이 철저히 기업인으로 길러진 자식들에게나 통하는 것이었고, 열다섯을 기점으로 우신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벗어난 동생에게 감히 혼사의 이해득실을 논할 사람은 없었다.

"세준이 어디가 마음에 드냐고? 솔직히, 너 살려준 거. 딱 그거 하나."

"……."

"근데 생각해 봐. 말리는 가족들 다 제치고 약혼해야겠다고 우긴 거 주태화 너였어."

최소한, 창피해서 숨긴다는 소리는 듣지 않게 번듯한 식이라도 올리자는 부모님의 간청을 무시하고, 뭐가 그렇게 급한지 말 꺼낸 지 며칠 만에 간단하게 약혼식까지 해치워 버리고 유유히 센터로 돌아간 태화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결혼은 싫다니. 결혼만은 절대 안 된다니. 도무지 앞뒤가 맞질 않았다.

"각인까지 했던 사이라면서 결혼은 왜 못 하겠대?"

"각인했다고 다 결혼해? 찾아봐. 헤어지는 사람 생각보다 많아."

흐흥, 코웃음 치며 몸을 세운 태영이 말했다.

"네가 남자랑 결혼한다고 했을 때, 내가 안 된다고 반대했어. 근데 네가 그랬지. 이미 각인해 버렸다고. 그래서 나도 네가 방금한 말 똑같이 했어. '각인했다고 다 결혼하는 거 아니야.' 그랬더니 네가 뭐라 그랬는지 알아?"

"……."

"에스퍼에게 각인은, 주인 없는 영혼에 이름을 새기는 일이야."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