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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얘가, 얘가… 그게 무슨 소리야! 아트 퍼펙션에서 적극적으로 컨택 중이래. 다시 화장품 광고를 할 거면 그쪽이 낫지. 개국공신이나 다름없는 널 두고 의리 없이 해지 통보한 회사의 뭘 믿고 다시 계약을 하냔 말야. 형 말이 틀려?"
"아트 퍼펙션은 또 무슨 얘기예요?"
"클리어랑 같은 회사 하이엔드 라인으로 있는 럭스 알지? 거기 경쟁사. 냄새를 맡은 거지, 냄새를!"
떨어진 곳에서 보이는 목이 불그스름한 게 술이라도 한잔 걸치고 얘기하는 것처럼 고양된 모습이었다.
"어디 광고주들만 그러는 줄 알아? 요새 지 대표도 안달 나서 나보고 너 스케줄 따라가지 말래잖냐. 현욱이랑 수환이 붙여줄 거라고. 웃기지도 않아!"
현욱과 수환은 마인의 로드 매니저들이었다. 유현이 흘긋 눈을 들어 백미러를 바라보았다. 상진도 백미러를 통해 유현을 보고 있었다.
"언제는 너 빼고서라도 마인 컴백시킬 거라고, 로드 매니저들까진 못 붙여주겠다고 그럴 땐 언제고. 그 양반도 속 참 빤해. 안 그러냐?"
"그럼 매번 형이 직접 픽업하러 오는 이유가 그거였어요? 회사에서 매니저 보낼까 봐?"
"…하여간에! 지 대표, 잘난 고팀에서 다 알아서 하라더니 이제 와서 말 바꾸는 것 좀 보라구. 갑자기 없던 인력들이 어디서 솟아났는지 모를 일이지. 그 애지중지하는 마인 애들 다 놀리기로 한 건지 뭔지."
고팀은 '고유현 팀'의 줄임말로, 마인의 데뷔 시절 로드 매니저였던 상진과 스타일리스트 팀장 시형을 포함해 여덟 명가량의 스태프들을 부르는 별칭이었다. 회사에서는 '얼마나 대단하시면 개인 의전팀까지 꾸리냐'며, 주로 빈정거리는 의도로 사용되었다.
"내가 너 데리고 나가서 회사라도 차릴까 봐 벌벌… 안쓰러워 못 봐주겠다니까."
"……."
"어디서 뭘 들었는지 회사 말아먹고 토끼는 거냐고, 언젠 나랑 널 못 잡아먹어 난리를 쳤잖냐. 액땜을 거하게 하는 건지 뭔지 초봄부터 일이 좀 안 풀린 걸 가지고, 하루가 멀다 하고 너네가 자초한 일이니 우린 모르겠다 알아서 수습해라, 닦달 닦달에…. 때리지만 않으면 다야? 활동도 없는 주제에 무슨 차냐고 차도 팔아버리고, 오피스텔 키도 뺏으려고 했잖아!"
"……."
"지 대표가 처음엔 뭐, 좀 봐주는 듯하다가 여름쯤 되니까 너더러 회사 손해를 물어내라, 어찌해라…. 안 되면 알아서 깎아 정산하겠다, 그 수선을 피우더니! 글쎄, 엊그제는 회사 갔더니 나보고 너를 잘 구슬려 보랜다. 이사로 올려주겠다면서! 참 나 그걸 누가 바란다고?"
상진의 입으로 들으니, 백팔십도 뒤바뀐 상황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한없이 막막했던 초여름, 그즈음엔 정말로 방법이 없었다. 고유현은 어디에도 써주지 말자고 온 세상이 단합이라도 한 것 같았다. 그렇게 아무도 자신을 반기지 않고 남은 건 세상에서 잊혀지는 것밖에 남지 않은 것 같았던 때, 하나 남은 내 편이라 여기던 회사의 대우마저 달라졌었다.
돈밖에 모르는 지 대표야 그렇다 쳐도 직원들까지 태도가 달라지니 황당하고 섭섭했다. 식구처럼 생각했는데 알고 봤더니 나눠 가진 게 계약서 하나뿐인 사이였다는 데 실망이 컸었다.
당시엔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달래더니. 상진도 실은 분했던 걸까. 그렇다면 몇 주 동안 둥둥 날아다니던 그의 기분이 이해는 되었다.
"그래서 형이 이번에 느낀 게 있거든."
디스전에 참가하는 랩퍼처럼 지 대표의 뒷담을 줄줄 쏟아내다 돌연 차분해진 상진이 낮게 말했다.
"내가 몇 년 동안 일하면서 지켜보니까 그래. 여기가, 고꾸라지는 게 한순간인데 또 기회만 잘 잡으면 다시 일어서는 것도 금방이야. 물론, 그런 기회가 아무한테나 오는 것도 아무 때나 오는 것도 아니고, 기회를 잡았다고 무조건 성공하는 것도 아니지. 그러니까 기회는 많을수록 좋은 거고, 일단 발 걸칠 데가 있으면 일단 걸치고 봐야 돼."
이미 촬영이 끝난 전회차 대본과 다음에 찍을 대본을 겹쳐놓고 번갈아 보던 유현은, 상진의 진지한 목소리에 시선을 박은 채로 히죽 웃었다.
"뭐야, 또 왜 이렇게 분위기를 잡아요. 무슨 잔소리를 하려고?"
"이번 드라마는 너한테나 나한테나 놓칠 수 없는 기회야. 넌 오늘처럼 열심히만 해. 이상한 생각 말고 주눅 들지도 말고. 넌 때맞춰 기회를 잡은 것뿐이니까."
"……."
"결국엔 알게 될걸. 오늘처럼. 네가 얼마나 괜찮은지."
요즘 유별나게 군다 싶었던 게, 전부 그럼…. 아마도 유현이 여러 차례 캐스팅을 거절하고 사정이 어려워져서야 오디션을 본 걸로 감독에게 눈칫밥을 먹고 있다 생각한 모양이었다. 한숨을 쉰 유현이 고개를 들고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말했다.
"형, 나 기 안 죽어요."
"그래. 절대 기죽지 마! 아까도 말이야, 완벽했잖아! 어떻게 날아오는 칼을 단번에!"
유현은 대본으로 시선을 떨어트리며 말이 안 통한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상진이 조용해지자, 대본 위에 덕지덕지 붙은 메모지들을 눈으로 의미 없이 더듬던 유현이 가만히 턱을 괴었다.
"……."
운전에 집중한 상진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저 형은 나랑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면서 예전부터 되게 아빠인 척하더라…. 유현은 소리 없이 빙긋 웃으며 눈을 내렸다.
***
발신자 표시 제한으로 걸려온 전화였다. 누구지. 전화가 끊기게 내버려 뒀지만 받을 때까지 할 모양인지 끈질기게 울려댔다. 결국 의심스럽게 받아 들었다.
"여보세요?"
-"팀장님!"
사는 게 심심하면 혼자 위험할 것이지 나까지…. 태화가 인상을 찡그렸다. 센터 내부인, 특히 현장 요원들은 외부인과의 접촉이 철저히 금지되었다. 들키면 일단 모든 임무에서 배제되었고 이후 강도 높은 조사가 수반되었다. 태화는 외부인이지만 내부 사정을 훤히 아는 내부인이기도 해서, 이 일이 들키면 조사는 같이 받게 될 것이었다.
"김정혁 너 미쳤―"
-"저 안 미쳤구요. 팀장님 저 지금 어디게~요?"
"……."
-"네? 어딘지 맞혀 보시라니까요!"
장난스러운 말투에 태화는 그제야 찡그린 미간을 풀고 헤식은 웃음을 지었다.
"공항인가 보네."
-"정답입니다!"
에스퍼에게 공항은 가장 보안이 삼엄하면서도 동시에 허술한 곳이었다.
공항은 에스퍼가 예민해지는 장소들 중 하나였다. 사람이 많고, 시끄럽고, 장시간 비행으로 컨디션 조절 능력이 떨어지는 곳. 그래서 이능력자 관련 위기관리 능력은 전 세계 공항의 품질 평가 지표 중 하나였다.
에스퍼로 인한 사건 사고는 매년 발생했다. 그 사건 사고는 재산 피해는 물론이고 인명 피해로도 이어지곤 했다. 문제는, 외국인이 많은 장소에서 피해가 발생했을 경우 단지 공항 품질이 조금 떨어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여러 국제적 분쟁 거리를 야기했다.
따라서 전 세계 각국에서는 공항 내외부에 머무를 수 있는 에스퍼의 인원을 법으로 엄격히 제한하고 있었다. 센터나 FER 등 공인 기관들은 인원 제한 수칙을 철저히 엄수해야 했다. 인명 사고 발생 시 차후에 소명의 과정에서 신고된 인원보다 더 많은 에스퍼가 공항에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외교 문제나 전쟁으로 번질 가능성까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마디로, 공항은 신고된 에스퍼가 아니면 감시 인원이 사전에 합의 없이 공항에 들어올 수 없다는 뜻이었다.
"들키면 시말서로 안 끝날 텐데."
-"제가 시말서 쓰는 거 제일 좋아하시던 분이 웬일로 제 걱정을 해주시네요."
"너 시말서 쓸 때만 조용해서 그랬지. 그리고 네가 쓰던 게 무슨 시말서냐, 초등학생 반성문이었지."
꾸중에도 반대편에서는 속도 없이 키들거린다. 하긴 쥐어박히면서도 좋다고 졸졸 따라다니던 놈이었지. 정혁은 태화가 센터에서 마지막으로 영입한 팀원이었다.
"출국?"
-"입국입니다. 인천 공항이에요."
"어디에서 왔는데?"
-"아, 팀장님은 모르시겠구나. 저 FER로 쫓겨나 있다가 꼬박 4년 만에 돌아오는 겁니다."
FER, 국제 에스퍼 협력 기구. 처음 에스퍼의 인권 증진을 위해 설립되었지만, 현재는 에스퍼와 가이드 모두를 보호하기 위해 움직이는 조직이었다.
전 직원이 에스퍼와 가이드로만 구성되어 있고 보안이 강력해 일반인들에게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전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각 FER지사를 허브처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부 고위 관료나 일부 기업가들에게는 정부 기관 정도로 인식되었다.
다만, 한국의 경우에는 조금 달랐다. FER이 크게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한국에서 활동하는 FER 소속원들이 분명 있었지만, 센터가 FER의 역할을 완벽히 수행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FER은 이를 매우 불만으로 여겨, 언젠가 FER의 여러 지사들이 모여 한국 센터의 운영 방침이 FER의 설립 목적과 어긋난다며 정부에도 여러 차례 압박을 넣은 일이 있었다. 센터에서 이를 알고 '센터는 사기업이 아닌 정부 기관이다, FER도 마찬가지로 정부 기관을 대신한 것 아니냐, 그런 식의 공문을 보내다니 지금 전쟁을 선포하는 것이냐'고 대응하면서 FER에서도 서둘러 입장을 철회했는데, 그 일로 FER과 센터의 관계는 최악이 되었다.
어쨌거나 FER을 주축으로 이능력자들이 모이고 있는 것은 세계적인 추세고, 센터도 그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어 화해의 제스처로 정기적인 교류를 제안했다.
그리고 센터 내에서는 그 정기적인 교류를 '어리석은 배신자를 위한 유배형'이라고 불렀다.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차출되어 가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FER? 뭘 했길래."
-"차암, 팀장님도. 거긴 뭘 해서 가는 데가 아니잖습니까. 저도 억울하다구요."
"그럼 오늘 온 건 아예 입국이야, 아니면 다시 FER행?"
-"새로운 팀에 배속돼서 아예 입국입니다. 팀장님이 절 구하셨어요."
"새 팀장이 누군데?"
-"팀장님, 놀라지 마십쇼. 부팀 이번에 승진하셨답니다. 팀장님으로요! 이제 부팀 아니고 팀장님이십니다. 핫하하하!"
태화는 탄식했다. 지회의 승진 사실이 기쁘다기보다 걱정이 앞섰다.
팀장들은 기본적으로 나이대가 있었다. 센터는 어리고 실력 있는 에스퍼를 나이 든 팀장 아래 팀원으로 두고 싶어 했고, 간부급 능력자들은 새파랗게 어린 에스퍼가 자신들과 같은 급의 팀장이 되는 것은 결코 원치 않았다. 양측의 니즈가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에도 센터는 가끔씩 연소한 에스퍼의 승진을 단행하기도 했는데. 언뜻 능력주의 운운하며 기존의 간부들을 압박하기 위한 정치적 수단으로서의 인사 감행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어린 팀장 손을 빌려 '해결하자면 전력 손실이 예상되지만 그냥 둘 수도 없는 까다로운 일'을 처리할 속셈인 것이 대부분이었다.
제 팀에서 부팀장으로 있으면서 지겹도록 보아 왔으니, 센터의 그런 꿍꿍이를 모르지 않을 테고…. 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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