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네임 온 잇-24화 (2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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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아, 아아, 아픕니다…."

유현이 스턴트 배우의 신음에 놀라 얼른 떨어졌다.

"괜찮으세요?"

백 감독은 컷, 소리도 없이 일어나 배우를 위해 마련된 세트장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두 다리가 자유로운 스태프들도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며 죄다 뛰어 들어와 유현의 주위를 에워쌌다.

"괜찮아?"

"아, 네. 괜찮아요."

놀란 사람들 중에서도 백 감독이 가장 놀란 것처럼 보였다. 그는 시퍼레진 얼굴로 유현의 손에서 황급히 장갑을 벗겨냈다. 팔을 뻗다가 손가락에 날이 스친 모양인지 살이 약간 벌어져 있었다. 감각도 없었는데 언제…. 유현이 신기하게 그 상처를 들여다보았다. 과일을 깎다 실수로 손을 베인 수준으로 미미한 상처였다.

배우의 손가락이 멀쩡하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백 감독은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며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가서, 가서 소독약이라도 가져와. 얼른!"

백 감독은 덜덜 떨고 있는 조연출에게 힘없이 손을 내저었다. 희게 질린 조연출은 대답조차 뱉어내지 못한 채로 고개를 주억이며 어딘가로 달려나갔다.

***

사람들에게 밀려서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는 상진이 저만치에서 고개를 쭉 빼고 기웃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를 본 유현이 슬며시 웃었다. 그때 곁에 서 있던 감독이 툭 내뱉었다.

"진짜 안 되겠다."

"예?"

"이건 배우를 잡든지, 스탭을 잡든지, 감독을 잡든지… 아무튼 사람 하나는 확실히 잡겠어. 이건 안 되겠어요."

그러자 액션 감독은 쌍욕이라도 하고 싶은 얼굴로 와이어를 담당했던 액션 팀 스탭들을 향해 발꿈치를 찍듯이 쿵쿵 다가갔다. 민웅을 향한 액션 감독의 날카로운 호통이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유현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아까 다 맞춰봤잖아! 뭐야, 방금 거. 줄 당기라는 사인 못 봤어?"

"죄송합니다. 제가 착각해서…."

구석에서 와이어 조절을 담당했던 두 명 중 실수를 한 쪽이, 유현과 아침에 농담을 주고받았던 민웅이었던 모양이다. 얼마나 놀랐으면 시꺼먼 안색이 창백해져 있었다.

"이 자식들아, 오늘 현장에 와서 리허설만 몇 번을 했는데 어떻게 입에서 착각했단 소리가 나와!"

액션 감독의 매서운 다그침에 촬영장이 술렁였다.

유현이 그쪽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동안 조연출은 소리소문없이 나타나 소독약을 치덕치덕 바르고 붕대를 둘둘 감기 시작했다. 별로 다치지도 않았는데…. 치료하는 조연출의 표정이 비장해서 그만하셔도 된다는 말을 할 수도 없었다. 밴드면 족할 것을 붕대라니. 여간 민망한 게 아니었다.

어수선한 현장을 잠깐만 쉬자는 말로 정리하고 온 백 감독이 무거운 표정으로 걸어왔다. 유현은 감독이 제게 와 할 말을 안 들어도 알 것 같았다. 그보다 먼저 선수를 쳐야 했다.

"감독님. 방금 건 긴장해서 그러신 거 같은데, 전 충분히 이해하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아직 한 번 밖에 안 해봤으니까 한 번 더 해보면 합이 더 잘 맞지 않을까 하는…."

"아니에요. 내 욕심이 과했던 거 같네요. 방금 거 보니까 빼는 게 맞는 거 같네요. 너무 위험해서 안 되겠어요."

유현이 손뼈가 부러진 환자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두껍게 감긴 붕대를 황급히 둘둘 풀어내고 손바닥을 펴 보였다.

"감독님, 저 조금 긁힌 거 말곤 아무렇지도 않거든요."

"지금은 운 좋게 그랬다 쳐도 운이 나쁘면 또 모르는 거죠. 나중에 혹시 모를 위험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절대 설득 당하지 않을 단호함이었다. 이건 감독의 감정이나 호오와 관련 없이 현장을 지휘하는 책임자로서 하는 얘기라는 게 느껴졌다. 감독도 어지간히 놀란 것이었다. 하지만 진짜 안 다칠 자신 있는데….

"몇 주 동안 이것만 연습했고, 아까 들으셨는진 모르겠지만 감독님도 저보고 소질 있다고 하셨었거든요."

"유현 씨."

"네."

"아무리 노련한 경력 스턴트들도 아차 하면 다치는 게 액션씬이에요. 방금도 봤죠? 그리고 욕심낸다고 항상 욕심만큼 좋은 결과물이 나오는 거 아니에요."

"그야 그렇지만…."

"아까 유현 씨가 운 좋게 못 피했으면 그 칼이 어디 가서 박혔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당장 촬영 접고 싶어지니까, 내 말 들읍시다."

백 감독은 아쉬워 어쩔 줄을 모르는 유현의 어깨를 꽉 잡았다. 완고한 의지가 실린 힘이었다. 안전 문제로 숙고하는 감독 앞에서 무작정 고집을 부릴 수도 없는 노릇이라 유현은 입을 꾹 다물었다.

"이 장면은 어떻게 찍을지 다시 고민을 좀 해봐야겠으니까 조금만 쉬었다가 와요."

백 감독의 가벼운 토닥임에 밀려나듯이 터덜터덜 밴 쪽으로 걷다가 유현이 우뚝 멈춰 섰다. 갈 땐 가더라도 확인은 해야겠다.

"감독님."

"네."

"그럼 방금 거 모니터링 한 번만 해도 될까요. 어떻게 나왔는지 궁금해서요. 그 정돈 괜찮죠?"

백 감독은 그 정도도 못 해주겠냔 듯 빈자리를 가리켰다. 유현은 감독의 옆에 앉아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다.

"……."

멈춰 있던 화면이 움직였다.

***

시동을 거는 상진이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형은 안 피곤해요? 나랑 매일 스케줄 같이 하면서."

최근 들어 상진은 보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로 지속적인 흥분 상태였다. 조그만 일에도 과하게 즐거워하고 과하게 들썩이는. 아침 촬영이 있어 새벽 다섯 시나 여섯 시에 픽업을 하러 와야 하더라도, 유현이 퉁퉁 부은 얼굴로 차에 올라타면서 보는 상진의 얼굴은 언제나 싱글벙글이었다.

오늘은 그동안 본 중에서도 가장 심했다.

"별로? 오늘은 또 일찍 끝났잖냐. 고유현 배우님이 너어무 잘해줘서."

저 형 또 저러네…. 유현은 유난스러움을 넘어 구제 불능의 영역으로 들어서는 중인 매니저를 질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뭔 배우님? 적응 안 되게 왜 그래요."

"아까 내가 리허설하는 거 다 봤잖아. 그래서 너 촬영할 때 이야, 이거 뭔가 단단히 잘못됐구나, 딱 알았지! 올라가야 될 네 와이어는 안 올라가지, 어찌 된 건지 넌 가만히 서 있지, 거기다 뒤에 서 있던 스턴트는 칼 들고 와이어에 끌려가고 있지…. 네가 그것도 모르고 고갤 딱 돌리는데!"

"형, 그만이요."

"유현아… 형은 눈앞이 딱 캄캄해졌다? 과장이 아니라 진짜로!"

"듣는 척도 안 하는구만."

"근데 고거를 네가 따악 제압을 할 줄 누가 알았겠냐. 마아악 영화처럼, 파바박!"

유현의 등 뒤로 작은 칼이 똑바로 날아가는 상황에서 눈앞이 캄캄해진 게 비단 상진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감독은 급기야 대본에 손을 대면서까지 등장 씬을 바꿀 생각을 했고, 선 채로 조느라 줄을 당길 타이밍을 놓쳐 주연 배우를 위험에 빠뜨린 두 액션 팀의 스탭들은 액션 감독에게 과하게도 욕을 먹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모두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사고의 결과물이 생각보다 너무 잘 나온 덕택에 통편집의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모니터링 한 영상이 기대 이상이었고, 유현이 그 반응을 놓치지 않고 한 번만 더 해보자고 감독을 설득했다. 팀원들의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엿보고 있던 액션 감독이 부추기면서 촬영은 콘티 수정 없이 재개되었는데, 리허설했던 것처럼 서너 차례 같은 장면을 카메라에 담아내던 감독은 왜인지 내내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더니 모니터링을 하는 중에 불쑥 말했다.

"이상하죠."

"네?"

"…와이어 없는 게 좋네. 그죠?"

사람 여럿 잡을 뻔한 사고를 영상으로 확인하고 나서부터는 내내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얼굴이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배우에게 욕심만큼 좋은 결과물이 나오는 법이 없다 뱉은 말을 도로 무르고 싶어 하는 듯한.

사고 날 뻔한 장면이 마음에 든 것 같았고, 쓰고 싶은 것 같았다. 그 장면을 쓰면 오히려 처음 계획했던 당일 촬영 콘티의 상당 부분을 덜어내고 수정해야 하는데도.

이후엔 감독은 어떤 결심이 섰는지 첫 번째 테이크를 채택하겠다고 선언했고, 그 덕분에 몇 번 더 와이어 장치에 매달려 허공을 돌아야 했을 유현은 이후에 그저 총을 옆구리에 대고 겨누는 장면을 여러 각도에서 찍고는 촬영이 끝이 났다. 저녁까지 각오했던 일정이 반나절은 짧아졌다.

그리고 그 일련의 과정이 상진의 눈에는 상당히 드라마틱하게 비친 것 같았다.

"유현이 너는 예전부터 심상치 않았어. 그거를 내가 진작에 알아봤거든. 예전부터 몸 쓰는 거 하나는 끝내줬잖아. 그냥 팔을 잡아서 딱!"

"아아, 알겠으니까 그만하고 제발 집에나 가요."

"으응? 그래, 가야지, 가야지. 고 배우님 댁에 안전히 모셔다 드려야지!"

유현이 신 레몬을 베어 문 것처럼 시린 눈을 하고 운전석의 상진을 살짝 훔쳐보았다. 가만 보니 콧노래를 부르는 것으로도 모자라 어깨춤까지 추고 있다. 단지 상진은 심각한 몸치라 그 움직임이 상당히 몸부림처럼 보이긴 했지만….

"형."

"왜?"

"형은 내가 드라마 찍는 게 그렇게 기분이 좋아요?"

"고럼. 기분 째지지."

뭘 또 째지기까지. 드라마 촬영이 처음도 아니었다. 주연급은 이번이 처음이긴 했어도, 그 처음이란 게 할 수 있지만 안 했을 뿐 여태 못한 건 아니었다. 그러니 따지고 들자면 그렇게 감격스럽고 기쁠 일도 아니어서 상진의 별스러운 태도가 수상했다.

"솔직히 말해봐요. 형 연애하죠?"

"으잉?"

"…아닌가?"

"연애는 무슨! 연애하는 건 너지!"

발끈하는 걸 보니 연애는 아닌 것 같고. 유현은 눈썹을 까딱거렸다.

"그럼 혹시 로또 됐어요? 아니면 주식? 저번에 형 물 탔다가 손절했다고 울지 않았어요?"

"아니, 야야! 주식 그 얘긴 뭐하러 꺼내. 겨우 잊고 지냈는데 얘가 또 속 쓰리게 하네."

"그럼 뭐예요. 우리 드라마에 투자했어요? 아닌데… 우리 첫방도 전인데…. 형 반응만 보면 지금 우리 드라마 시청률 한 삼십퍼 찍었는데…."

"유현아. 너 형을 그렇게밖에 안 봤냐? 너 정말 형 마음을 모른다!"

벅차오르는지 또 혼자 격앙된 상진을 보며 유현이 멀뚱멀뚱 눈을 깜빡였다.

"형은 통쾌해서 그러지!"

"뭐가요?"

"귀신같이 냄새들을 맡으니까 말이야."

"무슨 냄새?"

"무슨 냄새긴. 돈 냄새지!"

"……."

"너 우신이랑 계약한 건 어떻게들 알았는지 그렇게 회사에 연락이 온댄다. 클리어에서도 재계약 진행하자고 연락 왔다고 하던데, 지랄… 가만있으면 중간이라도 갈 걸 기다렸다는 듯이 팽하던 것들이 감히 누굴 넘봐!"

몇 개월 전만 해도 광고 계약 해지 소식을 전하면서 사형 선고라도 내리는 사람 같았던 상진이 한껏 의기양양했다. 고작 그런 거 때문에? 유현이 눈을 굴리며 건성건성 대답했다.

"그래도 클리어랑 할 수 있으면 거기랑 하는 게 좋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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