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네임 온 잇-22화 (22/69)

(22)============================================================

22.

"그쪽은 애인인 척 연기해 줄 사람을 구하는 거지 애인을 구하는 게 아니라고 했잖아요."

"……."

"빨리요. 저 진짜 졸려요."

유현이 작게 하품을 하며 재촉 아닌 재촉을 하자 태화가 가볍게 어깨를 들썩였다.

"오늘 시달릴 대로 시달린 거 같아서 다음에 얘기하려고 한 건데 내 마음을 너무 몰라주네요."

"다음에? 그게 더 피곤해요. 매니저 형이 운전은 더 잘한다구요. 그만 오세요."

"내가 모는 차에서 잘만 잤으면서."

"그건 잔 게 아니라 피곤해서 기절한 거라고 봐야 되거든요. 그래서 용건이 뭐였다구요?"

태화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렴풋이 웃으며 말했다.

"연말에 가족이 다 모이는 자리가 있어요."

"네."

"그때 고유현 씨가 참석해줘야 해요."

연말 스케줄을 벌써 말해? 세 달이나 남았는데. 유현이 의아하게 바라보자 태화가 차 보닛 위로 걸터앉으며 자신은 무고하단 제스처를 취했다.

"그래서 다음에 말하겠다고 한 거죠."

"정말… 준비성이 철저하시네요."

"아, 준비성 하니까 생각 난 건데…."

태화는 벌떡 일어나 보닛을 시계 방향으로 돌아갔다. 뭔가 싶어 다가가자 글로브 박스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유현에게 내밀었다.

"이거 받아요."

받아 들고 보니 대략 스무 장쯤 될까 싶은 서류철이었다. 졸다가 깬 이후부터 계속 으슬으슬해진 터라 유현은 코를 훌쩍이며, 스르르 넘겨 뒤적여 보았다. 빠르게 넘어가는 종잇장마다 깨알 같은 글씨가 빼곡해 내용은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다.

"뭐예요?"

"가짜와 진짜의 간극을 메우려면 서로를 알아야 하고, 우리한텐 절대적으로 시간이 부족하니까―"

다음 말이 곧바로 이어지지 않아 유현이 얼굴을 들었다.

"편법을 써야죠."

"편법?"

"친해지는 것도 속성으로 해치우자는 거예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연인 행세에 조금도 어색함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게, 무려 계약으로 명시되어 있었다. 계약이고 뭐고 스케줄에 허덕이기 바빴던 유현은, 오죽 걱정이 됐으면 촬영장까지 왔을까 싶어 희미한 죄책감이 들었다.

"어때요, 외울 수 있겠어요?"

안색이 어둑해지는 것을 봤는지 태화의 목소리가 걱정스러워졌다. 그에 유현은 어떤 오해를 받았는지 깨닫고 헛숨을 뱉었다.

"드라마 촬영하면 제가 외우는 대본만 몇 권인 줄 아세요?"

유현은 턱을 치켜들며 한껏 우쭐댔다.

"좋아요. 그럼 주기적으로 만나서 간단하게 퀴즈를 푸는 걸로 할까요."

"이런 걸로 무슨 퀴즈씩이나."

"최대한 빈틈을 줄여보자는 거예요. 빈틈이 있으면 금방 들통날 테니까."

"빈틈이요?"

"이렇게," 하고 태화가 유현에게 한 걸음 성큼 다가서자 유현이 반사적으로 두 걸음 물러났다. 태화는 거 보란 듯 눈짓하며 부드럽게 웃었다.

"생기는 빈틈이요."

눈짓을 따라 제 발끝과 태화의 발끝을 번갈아 보던 유현은 흠칫하더니 어수선하게 해명했다.

"아 그러니까 이건, 그쪽 키가 너무 크고, 저도 막 사람이 가까이 오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내 말은, 고유현 씨가 다른 사람들한텐 다 그래도 나한테 그러면 안 된다는 거예요. 사귀는 사이처럼 보이려면."

태화는 유현의 양어깨를 짚어 유현이 향해 있는 곳에서 정확히 반대 방향으로 돌려주었다. 유현은 제 등 뒤에서 태화가 미는 대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좀 더 친해져야 될 필요성이 있어요."

"퀴즈를 푸는 걸로 친해질 수 있을까요?"

"적어도 서로에 대해 알아갈 수는 있겠죠."

"……."

"친해지기가 싫어도 나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알아야 해요. 고유현 씨가 아무리 연기를 잘한다 해도, 모르는 걸 아는 척할 재주까진 없을 테니까."

물론 알아가다 친해지면 더 좋고요. 덧붙은 말에 유현이 눈썹 위를 긁적였다. 방금 건 농담 아닌 거 같은데 이거 뭐라고 답해야 돼.

유현은 고민을 하다 얼렁뚱땅 말을 돌렸다.

"크흠, 그럼 퀴즈는 나만 풀어요?"

"그래야죠."

"…그런 게 어딨어요?"

"고유현 씨는 이런 거 정리할 시간 없잖아요."

반박하고 싶어도 시간이 없는 건 사실이라 입을 꾹 다물었다. 바빠 죽겠는데 팔자에도 없는 시험까지 치게 생겼구나…. 그다지 내키지 않았지만 다른 뾰족한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의 가족들 앞에서 허술하게 애인 행세를 들키는 상황만은 일어나서는 안 되었다.

주차장을 한참이나 가로지른 둘은 드디어 로비 앞에 섰다.

"하실 말씀은 이게 다죠?"

"다예요. 이제 정말 올라가 쉬어요."

그렇게 말하면서 태화는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들어가는 걸 보고 떠날 심산인가? 설마 집 앞까지 데려다주려는 건…. 문득, 이제까지 누구와도 이런 식으로 헤어져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유현은 괜스레 민망해져 쫓기듯이 비밀번호를 두드리고 후다닥 로비로 들어섰다.

문이 닫히기도 전에 엘리베이터 앞에 선 유현은 버튼을 꾹 눌렀다. 의식적으로 전광판만 올려다보다가 슬그머니 눈을 굴려 투명한 유리문 너머를 살폈다. 드디어 떠난 모양인지 태화가 보이지 않았다.

"……."

인사도 없이 보냈네. 생각이 길어질 틈 없이 띵, 경쾌한 알림음이 울리고 엘리베이터 양 문이 열린다. 유현은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버튼을 누르려다가, 손을 내렸다. 인사는 하고 올걸.

로비의 자동문이 열리고 그 사이로 뛰쳐나온 유현이 두리번거렸다. 멀리서 차 바퀴가 고무바닥을 긁는 마찰음이 들리고 태화의 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유현이 얼른 차 앞으로 뛰어들어 양팔을 벌리자 낮은 속도로 달려오던 차가 금세 멈춘다.

허리를 굽힌 유현이 운전석의 창을 두드리자 시꺼먼 유리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태화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조심히 가시라고요."

"응?"

"그리고 저 아까 말씀 못 드렸는데, 오해하실까 봐요."

"……."

"그, 제가 요새 정신 못 차리게 바빠서 그렇지, 일부러 될 대로 되라든지 나 몰라라 한 건 절대 아니에요. 친해지기 싫다거나 그런 것도 아니고요."

제게서 미묘하게 비껴난 지점에 시선을 고정하고 우물쭈물 늘어놓는 유현의 말이 길어질수록 태화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유현은 그를 발견하지 못한 채로 계속해서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래서 이제부턴 시간 날 때마다 전화 정돈 하겠다고요. 그쪽 말대로 우리는 좀 더 친해질 필요성이 있으니까."

말하고 보니 대단한 용건도 아니어서, 똑바로 선 유현은 멋쩍음에 콧잔등을 살짝 찡그리며 주차장의 어느 먼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문자를 보내는 게 나았으려나….

"……."

아무 대꾸가 돌아오지 않는 공백이 길어지자, 허공을 떠돌던 유현의 시선이 결국 태화에게로 향한다. 그 뚱한 눈길이 제게 옮겨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그제야 태화는 싱긋이 입술을 가로로 늘리며 말했다.

"날 새겠네요."

"네?"

"다 알겠다는 말이에요."

날 새겠다는 말이랑 알겠다는 말이랑 어떻게 같아. 유현의 눈이 샐쭉해졌다.

"정말로 늦었어요. 그만 가서 자요."

태화가 콘솔박스에서 제 폰을 꺼내 들어 시간을 확인시켜 주자 유현의 눈이 커졌다. 애써 외면했던 피로까지 몰려들게 만드는 숫자, 날짜가 달라지고도 한 시간이 훨씬 더 지난 시각이었다.

유현은 급격히 피곤해져 눈썹뼈를 꾹꾹 누르며 인사를 건넸다.

"아무튼 저 진짜 갈게요. 운전은 조심하시고요."

한 걸음 물러나서 손을 작게 흔든 후 유현은 비척비척 걸음을 옮겼다. 차가 움직인 건 그보다 한참 뒤였다.

***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예, 좋은 아침입니다. 안녕하세요."

예정보다 일찍 출근한 유현은 촬영장에 연신 꾸벅꾸벅 여러 방향으로 고개를 숙이며 들어섰다. 스탭들은 바쁜 와중에도 유현의 인사를 넘기지 않았고, 몇 마디 인사를 주고받다가 오늘은 한쪽에 커피차가 준비되어 있으니 가보라는 귀띔도 들었다. 이른 시간이라 커피를 못 챙겼는데 꽤 반가운 소식이었다.

조명이 설치되고 있는 곳과 서너 걸음 떨어진 곳에서 백 감독과 뭔가를 논의하고 있던 액션 감독이 유현을 발견하고는 손을 들어 보였다. 유현은 곧바로 공손히 허리를 접으며 멀리서 인사했다. 그러자 액션 감독은 반갑게 손짓하며 유현을 불렀다. 커피차에 들를 생각을 접고 잔뜩 긴장하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어, 유현 씨 왔어요? 생각보다 일찍 왔네."

백 감독의 안면에 피곤함과 유현에 대한 무신경함이 섞여 비쳤다.

"오늘 찍을 씬이 걱정돼서요. 몸도 미리 좀 풀어놓고 하려구요."

"햐, 이런 사람들을 모범생이라 하는 거지. 바람직한 자세예요. 오전엔 몸이 덜 풀려서 다치기가 쉽거든. 이렇게 리허설 맞춰보고 들어가면 다칠 확률은 낮아지고, 이따금 촬영 시간이 단축되기도 하니까 서로서로 다 좋은 거지. 감독님, 안 그래요?"

촬영 크랭크인 직전까지 몇 주간 유현을 지도한 액션 감독은 유현이 기특한지 따스한 눈길을 보내며 거들었다. 유현이 헤벌쭉 웃었다. 그때 유현 씨, 하고 감독이 나직이 이름을 불렀다. 느슨해졌던 신경이 한순간에 바짝 곤두섰다.

"네, 감독님."

"자신 있죠?"

"네?"

"솔직히 나는 대역으로 갔으면 하는데, 액션 감독님이 믿어 보라시길래."

감독의 예리한 눈빛이 똑바로 자신에게 향하자 유현은 저절로 뻣뻣해졌다. 유현이 선뜻 대답을 못 하고 고양이 앞의 생쥐처럼 얼어 있자, 액션 감독이 그 모습에 파하하 웃으며 긴장을 쉽게 걷어냈다.

"아니, 유현 씨 잘한다고 내가 방금까지 칭찬을 엄청 해놨는데 그렇게 겁을 먹어버리면 내가 뭐가 돼? 걱정하실 것 없다고, 무조건 잘할 수 있다고 해야지!"

당사자가 오자 한층 더 격해지는 액션 감독의 적극성에서 한발 물러서야겠다 생각했는지, 백 감독이 예사롭게 입을 열었다.

"유 작가님이 처음부터 여러 번 당부를 하시기도 했고…. 나도 욕심이 좀 있어서 유현 씨한테 연습 좀 해 와 달라 부탁한 거긴 했는데… 적잖이 걱정이 돼서 말이에요. 유현 씨한테 너무 위험한 일 시키는 거 아닌가 하고."

유현은 그 말에서 백 감독이 작가의 당부를 조금 성가셔한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액션 감독도 그 미묘한 짜증을 느꼈는지 한풀 꺾인 목소리로 설득했다.

"내가 다 아까워서 말이에요. 유현 씨가 어떻게 했는지 지켜본 입장에서."

"아깝다고 리스크를 감수할 필요는 없죠. 우리한텐 대체할 수 있는 선택지가 있으니까. 대역도 있고, 정 안 되면 씨지도 있고…."

"나도 안 될 거 같으면 웬만해선 대역 쓰라고 하는데 그동안 유현 씨가 열심히 하는 거 봤고 잘했으니까 리허설이라도 한번 보시라고 권하던 거예요."

실제 무기까지 동원되는 장면이다 보니 걱정하는 것이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걱정된다는 이유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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