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네임 온 잇-21화 (21/69)

(21)============================================================

21.

수업 시간 내내 졸던 학생을 눈여겨보았다가 따로 교무실로 부르는 담임 선생님의 모습 같았지. 마음에 안 드는 게 있다는 의미일 텐데….

밴으로 돌아가는 유현의 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사실 마음에 드는 것을 더 찾기 어려울지도. 따지고 보면 낙하산 인사나 다름없으니까. 엉망으로 오디션을 보고 나서 그다음 날 아침에 캐스팅 기사가 난 걸 두고 '계약금'이라고 했으니, 온전히 제힘으로 얻은 배역이라고 우길 수는 없는 것이다.

푹 쉬라고 해줄 것 같았으면 퇴근하는 걸음 찝찝하게 만들지나 마시지. 유현은 속으로 툴툴댔다. 귀가가 마냥 개운치만은 않았다.

"하아…."

익숙한 차를 발견하고 날숨을 훅 뱉으며 고민을 아무렇게나 머리 한구석에다 쑤셔 넣었다. 어쨌거나 촬영은 내일도 있고, 모레도 있다. 쉬는 시간에 쉬어주지 않으면 심신만 고달플 뿐이었다.

차 안에 있던 상진은 유현을 발견한 듯, 가까이 다가가자 전조등을 밝혀주었다. 번쩍이는 불빛에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눈을 가린 유현은 새삼스레 제가 선 자리에서 뒤를 천천히 돌아보았다. 퇴근길에 번잡하지 않게끔 출구와 가까운 쪽으로 오라는 당부대로 걸어오긴 했는데, 촬영장에서는 꽤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아니, 왜 이런 곳에 차를 대 놨대?

상진은 최근 제 배우가 주연을 맡았다는 데 심취해서 온갖 민망스러운 유난은 혼자 다 떨고 있었다. 때때로는 정도가 지나쳐 남들 눈에 꼴값으로 보일까 걱정이 되는 수준이었는데, 그런 상진이 고른 장소라고 믿기 힘든 후미진 곳이었다.

거리도 아까 그 자리가 더 출구랑 가까운 거 같은데. 유현은 살짝 고개를 갸웃하며 밴에 올랐다. 목이 말랐던 유현은 차에 타자마자 생수병부터 찾아 물을 넘겼다.

유현은 흘긋 운전석을 바라보았지만 수상스러울 정도로 잠잠했다. 물을 느리게 삼킨 유현은 눈치를 보다 슬쩍 상진을 불렀다.

"형, 무슨 일 있어요?"

유현이 어둠 속에서 눈을 깜빡거렸다. 웬일로 형이 조용하지?

"형?"

"……."

"…내일 콜타임 여덟 시라 그랬던 거 같은데, 맞죠?"

유현이 일부러 시간을 틀리게 말하며 동태를 살폈지만 역시 반응이 없었다. 많이 피곤한가.

상진은 멋대로 소통을 단절시키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하루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무시했던 건, 데뷔한 지 삼 개월 만에 막내 주영이 다른 걸그룹 대기실 앞에서 번호를 따다가 걸린 일, 데뷔 1년 차에 시현이 탑급 걸그룹 멤버와 열애설이 난 후 잠수를 탄 일, 작년에 리더 인성이 미성년자 걸그룹 멤버와 여행을 갔다가 연예 1면에 걸릴 뻔한 일을 제외하곤 없었다. 그러고 보니 전부 연애 관련이군.

예사롭게 생각하며 유현은 목을 축이다 멈칫했다. 잠깐, 저 형 설마 담요로 오해하는 건 아니겠지?

"상진이 형."

"……."

"형. 설마 아직도 담요 가지고 그러는 거예요?"

태화와 교제 사실을 밝히고 나서 틈만 나면 유현을 단속시켰다. 무슨 근거로 하는 소린지는 모르겠으나, 태화는 소유욕이 대단해 보이니 특히 치정 문제로는 꼬투리도 잡히지 않게 하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다시는 엮이지 않았으면 하는 부류지만, 기왕 엮인 거 제발 원한 사지 않게 조심하라면서 말이다. 이제 조금 폼을 찾아가는데 괜히 재벌가 자제의 눈 밖에 나 활동에 차질이 생길까 봐 그러는 것이다.

스케줄로 유현이 피곤해하면 할수록 사이코패스처럼 기뻐했던 지난 한 달 동안의 상진을 생각하면, 그의 예민함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었다.

"크하하, 역시 유현이 너는 사진발 좀 받으려면 바빠서 시들시들하고 그래야 돼!"

그렇다고는 해도 유현은 조금 억울한 측면이 있었다. 담요 하나 빌려줬다고 겁 없는 양다리 취급이라니.

"내가 아까 말했잖아요. 담요 빌려준 그거는 그냥 호의! 형도 봤잖아요. 누나 추워서 막 이렇게 덜덜 떠는 거. 내가 대사 치는 앞에서 그러고 있는데 어떻게 못 본 척해요?"

"……."

"아니, 그리고 나는 지금 사귀는 사람 말고는 다른 사람이 눈에 안 들어온다니까요. 형이 걱정할 거 하나도 없다구요."

"그래요?"

변명을 주절거리던 유현은 낯선 음성에 멍하니 시선을 들어 올렸다. 금방 정신을 차리곤, 달려들듯 조수석 머리 받침대에 팔을 감아 몸을 붙이면서 운전석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했다. 유현이 생각한 그가 맞았다.

"뭐예요, 왜 그쪽이 거기에 있어요?"

"고유현 씨 매니저랑 스타일리스트 쫓아내고 차지했어요."

"그게 아니라 어떻게 왔냐고요."

"차 타고 왔죠."

"……?"

"담요 얘기는 뭐예요?"

유현은 저를 돌아보는 태화의 입꼬리에 문득 시선을 빼앗겼다. 비웃음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싱긋 웃는 모양에서 어딘지 모르게 심술이 느껴졌다.

"별거 아니에요."

"매니저가 의심할 정도면 별거 아닌 게 아닌 거 같은데."

"아니, 오늘 저녁에 갑자기 추워졌잖아요. 바람 많이 불고. 같이 연기하는 분이 추워 보여서 담요 빌려준 거예요."

"그쪽 매니저는 어쩌고?"

"매니저가 바뀐 지 얼마 안 됐는데 잘 안 맞는 모양이더라고요. 오늘은 아예 매니저를 촬영하는 도중에 집에 보내버렸다고 하니까…."

"친한가 봐요? 그런 얘기를 다 알 정도면."

뭐야, 이 사람은 또 왜 이래.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저 지금 추궁당하고 있는 건가요?"

"설마요. 출발해야 하니까 앉아요."

아닌데. 추궁이었는데, 방금. 유현은 머리를 긁적이며 자리에 엉덩이를 갖다 붙였다.

"그런데 진짜 여긴 어쩐 일이세요?"

"도통 고유현 씨를 볼 수가 있어야죠. 스케줄을 보니 우리가 친해지기는커녕 얼굴이나 잊어 먹지 않으면 다행이겠던데."

유현은 이제야 생각이 났다. 그래, 계약에 그런 게 있었지.

"말로만 들었지 드라마 촬영이란 거 지독하네요. 마지막 한 씬만 더 찍으면 된다길래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끽해야 끝나기 전 삼사십 분 정도를 예상했던 유현은 '마지막 한 씬'이라는 말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해 질 녘부터 주구장창 한 씬만 찍어댔으니 언제부터 기다렸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정확히 몇 시부터요? 계속 상진이 형이랑 시형이랑 같이 있었던 거예요?"

"몇 시인진 모르겠고, 담요 가지러 왔을 땐 없었던 거 같네요."

뒤끝이 느껴지는 대답에 유현은 기막힌 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눈썹과 입꼬리를 각각 반대 방향으로 죽 당겼다. 참아보려고 안간힘을 쓰던 유현은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뭐가 웃겨요?"

"아니, 오늘따라 어울리지도 않게…."

무심결에 웃으며 말을 뱉던 유현이 모순을 깨닫고 말끝을 흐렸다. 오늘따라 어울리지도 않아? 누가 들으면 날이면 날마다 만나서 되게 잘 아는 사람인 줄 알겠네. 주태화란 사람에 대해서는 쥐뿔도 모르는 주제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울리지도 않게… 그러니까, 매니저 형이랑 시형이가 어울리지도 않게 먼저 퇴근을 했다고요. 원래 그렇게 남의 말을 고분고분 잘 듣는 스타일들이 아니거든요. 네."

얼렁뚱땅 뒷말을 마무리 지었다. 다행히 태화는 별다른 의심 없이 넘어가는 기색이었다.

"그럼 우리도 이만 퇴근하죠. 이러다 여기서 날 새겠네요. 오피스텔로 가죠?"

이젠 정말 출발을 하려는지 천천히 차가 앞으로 나아갔다. 습관적으로 대본을 챙겨 들던 손이, 페이지를 넘기려다가 문득 드는 생각에 멈춰 있었다. 이대로 가도 되나.

저 운전석의 남자와 자신은 이인삼각으로 달리는 것보다 더 환상의 호흡이 필요한 사람들이지만 친해지지도 못한 상태이고, 그가 말한 대로 앞으로 둘에게는 만날 시간이 그다지 많지도 않을 것이다.

도심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촬영지에서 유현이 지내는 오피스텔까지는 못 해도 한 시간이었다. 간단히 계산을 끝낸 유현은 "잠깐만요!" 다급하게 외쳤다. 급브레이크를 밟은 태화가 돌아보는 사이에 유현은 잽싸게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

"…현 씨."

―나도 이렇게 되고 싶지 않았어.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농담 같아? 진심이야…―나야말로 시간을 돌리고…―그거 참 고맙네…―현아, 고유…….

"고유현 씨."

조수석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던 유현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을 떴다.

"방금 그쪽이 저 부른 거예요?"

숨을 힘겹게 몰아쉬며 절 불렀냐 묻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였다. 태화는 그 창백한 안색을 가만히 보다 차분히 입술을 뗐다.

"몇 분째 깨우는 중이었어요. 일어날 생각을 안 해서."

유현은 그 말에 부스스 머리를 매만지며 주변을 살폈다. 바깥을 보니 익숙한 오피스텔 주차장이었다.

"와, 잠든 줄도 몰랐어요. 저 언제 잠들었어요?"

"음, 출발한 지 얼마 안 돼서 바로?"

굳이 앞자리로 옮겨 탄 보람이 없었다. 민망함에 유현이 이마를 짚으며 실소하자 태화는 작게 목 안쪽으로 웃으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얼른 올라가서 쉬어요. 늦었어요."

악몽도 이런 악몽이 없었다. 유현은 속으로 황당해하며 안전벨트를 풀고 뒷자리에 손을 뻗어 짐을 챙겼다. 시험을 앞두고 밤새 공부하는 꿈을 꾸는 수험생처럼, 꿈속에서마저 촬영이라니.

짐을 다 챙겨 문고리 손을 올리던 유현은 문득 태화를 돌아보며 물었다.

"집엔 어떻게 가시게요?"

"아까 고유현 씨 매니저 퇴근할 때 부탁했어요. 본인 차도 여기 있다고 해서."

"아, 그쪽도 어차피 내려야 하네요. 그럼 같이 나가요."

둘은 같이 내려 정확히 어디 있는지 모를 태화의 차를 향해 걸었다. 차는 알아서 찾아 돌아갈 테니 이만 집으로 가라는 태화의 권유에도, 유현은 "나도 예의 차릴 줄 알거든요." 하며 꿋꿋이 동행했다.

주차장은 넓었고 이렇게 늦은 밤에는 로비 근처의 대부분은 이중 주차일 만큼 차가 많았다. 이중 주차로 빠져나가기 힘들면 택시라도 잡아줘야 하나. 슬슬 유현이 눈치가 보일 무렵, 다행히도 둘은 저 멀리 구석 자리에서 태화의 차를 발견할 수 있었다.

힘든 일을 끝낸 사람처럼 훅 숨을 내쉰 태화가 차를 등지고 유현을 보며 짓궂게 웃었다.

"이젠 내가 고유현 씨를 집 앞까지 데려다줘야 할 차례인가요?"

돌아가란 권유도 무시한 채 끈질기게 따라온 고집이 자못 우습기는 해 유현은 바닥을 보며 샐샐 웃음을 흘렸다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근데 오늘 찾아온 이유 진짜 말씀 안 해주세요?"

"말했잖아요. 고유현 씨 보러 간 거라고."

"진짜 나 보러 온 거라고요?"

"이것도 말했지만, 고유현 씨가 워낙 바쁘니까요."

유현은 으음, 낮은 신음을 냈다. 역시 그 말 그대로 믿기는 힘들었다. 친해질 시간이 없어서 촬영장까지 직접 왔다는 건 생각하면 할수록 이상했다.

안 보면 보고 싶고 시간 내서 만나러 오는, 진짜 애인 사이와는 거리가 먼 둘이었다. 둘은 계약자와 피계약자, 갑과 을이 더 적절했고, 전화 한 통이면 유현이 어떻게든 시간을 만들었을 것이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