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네임 온 잇-20화 (20/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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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잘 좀 부탁한다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으면 뭐 하나. 당사자들이 찍힐 의향이 없다는데. 오늘도 조용히 공 치나 보다….

그때 허 피디의 레이더에 호들갑스러워 보일 지경으로 맨살을 열심히 문지르고 있는 민아와 그녀에게로 다가가는 유현이 걸려들었다.

"어…?"

주연 배우들의 촬영 스케줄에 따라 출근하는 허 피디가 확보한 영상의 대부분의 분량은 영준과 민아에 관련되어 있었다. 처음 한 달 동안 유현은 메인 촬영팀보다는 보조팀에서 필요한 장면만 빨리 찍고 촬영장을 떴기 때문에 비하인드 영상을 찍기가 무척이나 어려웠고, 그랬기 때문에 유현과 민아를 촬영장에서 동시에 보는 건 프로모션 영상 촬영을 제외하면 오늘이 처음이었다.

허 피디의 눈으로 볼 때, 주연 배우인 민아와 유현은 썩 친밀해 보이진 않았다. 굳이 표현하자면, 선을 잘 지키는 직장 동료 정도.

평소 대화가 잘 오가지 않는 것을 보면 개인적인 친분은 전혀 없어 보였고, 민아가 유현의 그룹 팬이라는 정보를 입수했을 때 허 피디가 내심 기대했던 간질간질한 친목은, 서로 내외를 하는 건지 일시적인 낯가림인지는 몰라도 완전히 물 건너간 일이 돼버린 듯싶었다. 철저히 비즈니스적인 둘의 영상을 돌려 보며 혀를 끌끌 차기까지 했는데….

한 명은 추위에 떨고 있고 다른 한 명은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담요를 들고 다가가는 상황이라니. 허 피디는 홀린 듯 캠을 들고 둘을 찍기 시작했다.

민아는 무언가 제 어깨를 폭 덮는 느낌에 화들짝 놀랐다가 이내 크게 반색했다.

"어, 뭐야… 감동."

근처의 메이킹 카메라를 의식하고 있던 민아는 카메라를 똑바로 쳐다보며 새초롬한 표정으로 능청을 떨었다.

"보셨나요? 한정운의 이 필사적인 매력 어필?"

찍히고 있던 줄 몰랐던 유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금세 태연히 표정을 바꾸며 대꾸했다.

"이렇게라도 갚아야죠. 유리한테 하는 짓이 있으니까요."

"맞아요. 정운이가 정신 못 차리고 유리한테 너무 쌀쌀맞죠. 다아 돌려받을 거예요."

눈물을 닦는 척하는 민아의 곁에서 유현은 반성한다는 듯이 공손히 손을 모으곤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짬이 나면 배우들은 차에서 쉬는 배우들에게 비하인드 영상을 따내기란 쉽지 않았기 때문에, 허 피디는 마음이 급했다.

어떤 장면을 찍고 계셨죠? 방금 찍은 장면에 대해 설명해 달라는 다급한 요청에 민아는 웃으며 "우리가 어떤 장면을 찍고 있었죠, 한정운 씨?" 자연스럽게 유현에게 인터뷰를 넘겼다.

"정운이가 유리한테 거절을 당하는 장면입니다."

"처음으로."

"네, 처음으로. 이렇게나 좋은 날에, 이렇게나 아름다운 곳에서. 그것도, 약혼녀에게."

유현이 제 뒤편을 슬쩍 돌아보며 조명 세팅이 한창인 현장을 가리켰다.

미관을 해치는 초록색 크로마키 천을 벽으로 세워둔 상태였음에도, 봄철 연분홍 꽃잎이 풍성했을 듯한 커다란 벚나무와 주변부가 퍽 근사했다. 꽃잎은 진작에 지고 낙엽만 떨구는 앙상한 나무였지만 그 위용이 대단해 감독이 반드시 이곳이 아니면 안 된다고 했던 이유를 사람들이 납득할 만한 풍경이었다.

메이킹 카메라의 초점이 분주한 스탭들에게로 옮겨가는 그 순간 바람이 한번 불어 후두둑 잎이 떨어지고, 근처에 스태프가 아이구 아이구 하며 달려와 다급하게 낙엽을 쓸어내는 광경이 함께 잡혔다. 마치 코미디극처럼 이어지는 상황에 함께 관전하고 있던 사람들의 입에서 웃음이 터지고, 그중 가장 먼저 웃음을 멈춘 민아가 부가적인 설명을 덧붙였다.

"저렇게 보여도 나무는 다 CG처리가 될 거라고 해요. 벚나무에서 벚꽃이 다 떨어지면 초록초록해지잖아요."

"여름으로 가는 모습처럼 보여야 해서요."

"CG가 보통 작업이 아니라고 알고 있는데 말이죠…."

"그만큼 막대한 자본을 투입할 가치가 있는 씬이라는, 그런."

"그렇죠. 가치가 있죠. 중요해요. 시간과 계절을 눈여겨보시면 유리의 심리를 알 수가 있거든요. 계절은 지금 여름으로 가는 길목이에요. 그런데 시간은 밤이고, 바람이 불고요."

"봄바람이요."

"맞아요, 봄바람. 그것도 늦은 봄바람이 살랑이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 유리는 마음이 설레고 울렁거리는 상태인 거죠. 그렇지만, 봄에 잠깐 취한다고 해서 여름이 안 오진 않잖아요?"

허 피디는 탄식했다. 이렇게나 성의 있는 인터뷰라니. 한 달 만이었다. 아직 자세히는 몰라도 삼각관계라고 하니 치열한 러브 라인 전쟁이 벌어질 듯한데, 민아의 말은 스포일러의 위험이 있어서 매 회차가 끝나자마자 업로드되는 메이킹 영상에는 쓸 수 없을 게 확실시됐다. 가을밤, 선남선녀, 담요. 이미 이것으로 흥미로운 구상이 끝난 다음이었는데 아쉬울 따름이었다. 스페셜 메이킹을 따로 만들어야겠군.

허 피디는 간만에 생긴 기회를 날리지 않으려고 "설레는 게 아니라 그냥 추워 보이시는데?" 하며 말꼬리를 물었다. 민아는 재치 있게 오들오들 떠는 시늉을 하며 대답했다.

"카메라 밖에선 가을이니까요. 저거 보세요. 바람 부는 거. 바람이 쌩 한 번 불면은요. 저기 저 나무가 그것만 기다린 것처럼 낙엽을 우수수수 떨궈낸다구요. 떨어져도 떨어져도 끝이 안 나요."

"낙엽 때문에 NG가 좀 났어요."

"좀이 아니에요. 솔직히 오늘 NG는 낙엽이 다 냈죠. 그래도 신기한 게, 바람이 불어야 하는 씬이라서… 감독님은 어떻게 딱 바람 부는 날을 골라서 촬영을 잡으셨는지…."

"원래는 바람이 안 불면 강풍기 틀고 찍으려고 하셨다고 들었어요. 준비했을 걸요?"

"아, 진짜?"

민아는 처음 듣는지 눈을 크게 뜨고 유현을 바라봤다. 그럼 바람 안 부는 게 나았겠다. 아니, 난 반팔 입었잖아. 바람 불면 너무 추워서…. 이거 봐봐, 닭살 돋았어. 민아는 작게 고충을 토로하며 담요 바깥으로 한쪽 팔을 빼 유현에게 내밀어 보였다.

"전 이렇게 입어서 별로 안 추운데 누난 좀 추워 보여요."

"어. 난 추위 많이 타서 여름에도 카디건 들고 다니거든. 유현이 너도 좀 추위 타는 편이지 않아? 더울 때도 긴 팔 입고 다니잖아, 맞지?"

"…오, 네. 어떻게 아셨어요? 하하…."

허 피디는 열심히 민아와 유현을 담아냈다. 주거니 받거니 하는 훈훈한 투 샷에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슛 들어갈게요!"

그동안 준비가 다 끝났는지 우렁찬 목소리가 촬영장에 울렸다.

민아는 메이킹 카메라 앞을 지나치며 "마지막 촬영입니다. 화이팅." 각오를 다지며 지나가고, 유현도 뒤를 따라 "화이팅!" 하며 주먹을 쥐어 보이고는 자리를 떠났다.

그림만 좋으면 비하인드 영상도 하나하나 서사가 되고 떡밥이 되는데… 둘이 생각보다 되게 괜찮잖아? 피디는 다시 나무 아래 선 두 사람이 감독의 사인에 금세 몰입하는 장면을 담아내면서 머릿속으로 새로이 편집점을 고민했다.

***

"컷, 오케이."

모두가 숨죽인 가운데 기다리고 기다리던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드디어 촬영 끝. 장장 열네 시간의 촬영 끝에 퇴근이었다. 자정을 넘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암울했던 얼굴들이 밝아지며 희미한 기쁨이 감돌았다.

"넌 내일 촬영 있댔나?"

"네, 여기서요."

"그럼 우리 다음 지방 촬영 때나 보겠는데? 너 은근 나랑 겹치는 장면 거의 없잖아."

"아, 누나 이번 주에…."

유현이 말끝을 흐렸다. 민아는 생략된 뒷말을 듣기라도 한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지난달 크랭크 업한 영화에 추가 촬영이 필요해 민아가 출국하게 된 일은 드라마 현장에서도 화제가 되었다.

필름에 문제가 생겨 초반부 해외 로케이션 촬영을 일부 재촬영한다는 소식이 매스컴을 탔지만, 사실은 그런 이유가 아니라는 소문이 이미 파다했다. 필름 문제가 아니라 스토리를 바꿔 아예 민아의 캐릭터를 들어내기 위한 재촬영이라는 소문, 그 이유엔 '더 원' 캐스팅이 주효했다는 소문. 때문에 드라마 현장에서는 민아의 재촬영 스케줄에 관해서는 쉬쉬하는 분위기였다.

"음, 그럼… 누난 귀국하자마자 바로 지방 촬영이겠네요. 피곤해서 어떡해요."

"뭐, 그렇게 피곤할 것도 없어. 씬도 얼마 없구. 간 김에 거기서 하루 정돈 쉬고 올 거야."

"그럼 다행인데…."

"그래, 나 없는 동안 잘 찍고 있어."

손을 흔들고 돌아서려던 민아는 막 떠올랐다는 듯이 유현의 어깨를 톡톡 치며 손 인사를 건넨다. 아까 담요 고마웠어.

돌아서는 민아를 얼마간 바라보던 유현은 아까 봐둔 방향으로 걸음을 돌렸다. 내일 아침이면 돌아와야 할 곳이지만 어쨌든 집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에 유현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유현 씨."

"감독님."

"바빠?"

유현은 그렇다는 대답도 아니라는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어색하게 웃었다. 감독은 유현의 의사는 처음부터 상관이 없었던지 대본을 뒤적였다. 펄럭거리는 종이에 눈이 묶인 유현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감독님, 혹시 오늘 촬영에 문제가…."

그러자 감독은 할 말이 많은 사람처럼 숨을 들이키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나 막상 유현의 안색을 마주하고는 감독은 입술을 딱 다물었다.

"감독님?"

"아아, 유현 씨 요새 많이 바쁘다고 했지. 뭐… 광고 같은 거 때문에?"

"아뇨. 바쁘진 않고, 한동안 한가했는데 요 한 달 조금 덜 한가해진 건데…."

"으음, 그래. 유현 씨 같은 사람들은, 일 없을 땐 죽도록 없다가도 바쁠 땐 미친 듯이 바쁘고 그런 거지. 음."

"이젠 괜찮습니다. 바쁜 건 거의 마무리 돼서요. 따로 하실 말씀이…?"

가볍게 혀를 찬 감독은 대본을 탁 덮은 후 별일 아니라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예?"

"아니, 잘 들어가 보라고. 오늘은 이만 푹 쉬고 내일 보자구요."

어딘지 모르게 짠한 것을 보는 눈이라 유현이 애써 남은 에너지를 그러모아 보았지만, 감독의 눈에는 누군가의 조언이나 충고를 감당하기에는 터무니없어 보이는 모양이었다. 감독은 이만 꺼지라는 듯 귀찮게 손이나 내저었다. 유현은 긴장이 역력한 얼굴로 꾸벅 인사를 했다.

"그럼… 네, 감독님도 오늘 고생 많으셨습니다. 내일 뵐게요."

감독의 본래 용건이 그런 다정한 인사가 아님을 알면서도 유현은 모르는 척 귀갓길에 오르기로 했다. 듣고 싶은 말은 분명 있었지만, 오늘 찍은 만큼 내일도 촬영이 남아 있었다. 무리할 필요 없지.

유현은 감독을 남겨두고 빠른 걸음으로 촬영장을 벗어났다. 가는 길에 마주치는 스태프들, 배우들과도 후련하게 오늘치의 수고만큼 서로 고생했다는 격려를 잊지 않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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