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네임 온 잇-17화 (17/69)

(17)============================================================

17.

"벼룩의 간을 빼먹지."

입술을 삐죽거린 유현은 주머니에서 폰을 꺼냈다. 직접 물어보자. 그리고 놀라운 타이밍으로 벨소리가 비상계단 구역 전체를 요란스럽게 울려 댔다.

♪―

유현은 발신자로 뜨는 의외의 인물에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고서 화면을 보고만 있었다.

"일부러 안 받는 거네."

유현이 머리를 젖혀 계단 위를 바라보았다. "인성이 형?" 하고 알은체하자, 삐딱한 목소리의 주인공이 곧이어 타박타박 발소리를 내며 유현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형."

"이번에 드라마 들어간다면서?"

아무 말 없이 인성을 바라봤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대단히 심사가 뒤틀린 듯했다.

"왜 아무 말이 없냐. 이젠 미안하지도 않아?"

그건, 하고 입을 여는 순간 유현의 손안에서 시끄럽게 폰이 울렸다. 유현의 엄지가 수신 거부를 누르기 직전에 무심결에 내리깐 눈이 발신자 이름을 확인했다.

유현은 잠깐 고민하다 "더 할 말 없으면 바빠서 이만 가볼게." 하며 빠른 속도로 계단을 밟아 내려갔다.

어이없어하는 인성을 뒤로하며 유현은 통화 버튼을 누르고 귀에 댔다.

"여보세요."

-"…집이 아닌가 봐요."

"네. 회사에 일이 있어서."

-"아, 회사. 잘됐네요."

뭐가 잘 됐단 거지. 유현은 불안하게 눈을 굴렸다.

-"지금 주차장으로 내려오세요."

"지금요?"

유현이 우뚝 멈춰서서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언제부터 바짝 따라붙고 있었는지, 바로 등 뒤에서 인성이 "그새 새 물주를 꼬셨어? 이야, 고유현 능력 좋아? 부럽다 야." 이죽거리며 유현을 유유히 지나쳐 내려간다.

-"바쁜데 전화한 거면 끊고요."

"아, 아니에요. 죄송해요. 근데 회사로 오신다구요?"

-"거의 다 왔어요. 전해줄 게 있어서 들렀는데 마침 고유현 씨가 거기 있네요."

묘하게 앞뒤가 안 맞는 말이었다. 보통은 전달 대상이 있는 곳을 먼저 알아보고 오지 않나? 마침 있으니까 내려와 보라니. 통화를 끝낸 유현은 후드를 뒤집어쓰고 지하 주차장으로 뛰어 내려갔다.

지하 주차장에서 두리번거리며 태화의 차를 찾았다. 유현이 연락을 하려고 꺼낸 폰 화면에 반쯤 쓱 그늘이 졌다. 삐거덕대며 정면을 바라보자 따돌렸다고 굳게 믿은 상진이 버젓이 서 있었다.

"어디 갔었어. 얘기 좀 하자니까. 전화도 다 씹고."

"저, 전화를 했었어요? 어… 했네. 형 근데 주차장엔 웬일이에요? 어디 가게요?"

"내가 가긴 어딜 가. 회사에서 한참 너 찾다가 온 거야. 인성이 안 만났으면 허탕 칠 뻔했네. 너야말로 어디 가려고?"

유현은 딴청을 피우며 정확히 어디를 가리키는지 알 수 없는 애매한 곳으로 손짓하며 말했다.

"아, 난 요 근처에 볼일이 있어 가지고…."

"요 근처? 요 근처 어디? 타. 차로 데려다줄 테니까."

"아니, 진짜 근처! 엄청 가까워요. 차 안 타도 돼요. 걸어가면 돼요. 완전 삼 분 거리."

"으음?"

수상하다는 듯 있는 대로 좁힌 상진의 미간을 보니, 또 그 '프로의 촉'이 발동한 모양이었다. 본인 말로 눈치가 빠른 게 집안 내력인데 다양한 인간 군상까지 경험하고 나서는 한 번씩 잘 연마한 칼처럼 예리한 촉이 선다고 했다. 유현이 곁에서 지켜본 바로는, 열 번 찍으면 아홉 번을 틀리는 녹슨 칼에 개촉이었다.

"걸어서 갈 거면 주차장은 왜 왔는데?"

"그, 나가려고…! 그래서 막 나가려고 했어요. 응."

"아니야, 아니야. 내가 봤는데, 너 분명 주차장에 볼일이 있었어."

"아닌데? 진짜 그런 거 아닌데?"

"유현이 너 혹시…."

이 형, 뭐 짚이는 게 있어서 이러는 거 아니야? 유현이 숨을 죽였다.

가만 생각해 보면 '프로의 촉'을 마냥 우습게 볼 수만은 없는 게, 유현을 포함한 마인의 다섯 멤버 모두 매니저에게 이것저것 들킨 전력이 있었다. 담배, 술, 야식, 운전….

유현에게 투자자 얘기를 해준 것도 상진이었고, 떨어졌다고 한 오디션 붙은 것에도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 회의 시간에도 때도 내도록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자신을 쏘아보지 않았던가.

그럼 아까부터 계속 얘기하자는 게….

"너어… 형 몰래 차 가지러 온 거지? 맞지?"

"……."

"이 짜아식이…! 유현이 넌 운전대 잡지 말라니까! 형이 위험하다고 했지! 하지 말라고 하니까 더 하려고 그러네, 얘가. 네가 애냐? 쓸데없는 고집 부리지 말고 형 차 타고 가. 키 있으면 잽싸게 내놓고!"

그럼 그렇지. 형 촉은 역시 개촉이야. 유현이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응. 형 말이 다 맞아요.

그렇게 상진을 따라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이었다.

"여기 있었네요."

앞을 가로막은 사람의 얼굴을 본 순간 유현의 사고가 일시에 정지됐다. 상진이 앞을 가로막은 태화를 위아래로 훑어본 다음 유현을 향해 물었다.

"아는 분이야?"

아는 분은 맞지만, 저 사람을 대체 뭐라고 소개할 것인가. 저만 해도 이름만 겨우 아는 정도고, 그 외에는 보기에도 좋고 돈도 많은 재벌 삼세라는 소개말로 부적절한 정보밖에 없었다.

네이머인 것을 숨기려고 자발적으로 고립되길 자처한 탓에 연예계 지인도 몇 안 되는 유현이었다. 그러니 얼굴 번지레한 재벌 집 자제를 사귈 수 있는 통로로 떠올릴 것은 그뿐이었다. 최종익.

상진은 원래도 최종익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근래 들어서는 싫어하는 것을 넘어서 혐오하게 되었다. 최종익이 한 짓은 몰라도, 최종익이 집착적으로 연락을 하는 꼬락서니는 모조리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태화의 단편적인 정보를 곧이곧대로 읊었다간 어디서 또 이런 놈과 엮여 왔냐며 굿이라도 벌일 상진이었다. 그렇다고 대놓고 거짓말을 하자니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고, 솔직하게 투자자니 계약자니 떠들 수도 없었다.

…차라리 모르는 척을 하자.

유현의 미소에서 기묘한 결연함이 흘렀다.

"난 모르…."

"매니저시죠? 안녕하세요."

상진은 살짝 고개를 기울여 유현을 향해 눈을 잔뜩 부릅뜨며 신호를 보냈다. 뭐야? 뭐냐구.

"―진 않고, 우연히 지나가는… 아는 형이에요."

"지나가는, 아는 형이라고?"

손님 앞이라서 최대한 자제한 편이지만 잔뜩 고조되는 어미의 어조로도 두 가지의 함의 유추가 가능했다. 너한테 내가 모르는 아는 형도 있었냐? 이 회사 건물이 통째로 우리 건데 '우연히' 지하 주차장을 지나갈 수가 있냐?

"또 마침 잘됐네요. 같이 가보죠."

바쁘게 오가는 둘의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태화는 고갯짓하며 등을 돌렸다. 따라오라는 거였다.

전해줄 게 있다고 했고, 지금 그걸 받으러 가는 중이란 건 알겠다. 광고 계약을 밀어 넣은 것도 계약을 진행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결과이리라. 그것도 이해했다. 그럼 상진에게 인사는 왜?

유현은 앞서 걷는 등판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동안 연락 한 통 없다가 갑자기 나타나서는 무슨 생각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계약서상 갑의 의중을 파악해 보느라 바쁜 유현은 옆에서 상진이 수상쩍게 보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처음 서 있던 곳에서 꽤 걸어야 하는 구석 자리의 처음 보는 밴 앞에서 멈춰 섰다. 누가 봐도 새 차 같았고 회사에서 리스하던 기존의 밴보다 고급 차종이었다. 태화는 어리둥절한 두 사람을 돌아보며 말했다.

"뺏긴 거 찾아다 줬어요. 차도 뺏기고 매니저도 뺏겼다고 해서."

여전히 영문을 몰라 머리를 긁적이는 상진에 반해 유현은 곧바로 알아듣고 머리를 짚었다.

- 연예인이 혼자 잘 다니면 돼요?

- 차 뺏기고 매니저도 뺏기면 혼자서도 잘 다니게 돼요.

"돈으로 해결이 되는 건 웬만하면 돈으로 해결하는 게 좋은데, 그 돈으로 해결되는 것 중에서도 이런 건 너무 소소하니까."

의심과 불신으로 오염되어 있는 상진의 눈과 이제 날 뭘로 소개하겠냐는 저 오기인지 자신감인지 충만한 태화의 눈이 동시에 유현에게로 향했다.

이제 더는 아는 형이라고 우길 수 없게 된 시점이었다. 무슨 설명이든 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유현은 결국에 "잠시만." 하며 태화에게 목례하고 불손하게 그를 훑는 상진을 한쪽으로 잡아끌었다.

"저거 뭐라고 해석해야 되냐?"

"형, 일단은… 내가 나중에 설명할게요."

속 시원히 듣기 전에는 더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겠다는 듯 상진은 방어적인 태도로 팔짱을 끼고 버텼다. 유현이 힘껏 끌어당겼지만 역부족이었다.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제대로 말해. 유현이 너 또 최종익 같은…."

"아니에요, 그런 거! 절대, 절대!"

"그럼 뭐야, 저 남자? 내가 듣기론 방금 뉘앙스가 좀 이상했거든? 넌 안 그랬냐? 아는 형 맞아?"

유현은 초조한 마음에 혀로 입술을 축이며 태화가 선 쪽으로 바라보았다.

"……."

여유로운 표정에서,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가 이렇게 자신이 곤란해지길 바랐고, 또 조장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아예 주차장까지 밴을 끌고 와 떠안기는 거 보면 적어도 상진에게는 숨길 생각이 없었던 것 같기는 한데.

한숨을 쉰 유현이 힘없이 툭 내뱉었다.

"…사귀기로 한 사이에요."

뭐? 터져 나온 고함이 주차장에 메아리쳤다.

"얼마 안 됐어요. 그래서 말 안 한 거고."

"남자 안 좋아한다며…."

"그런 줄 알았는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최종익과 그런 관계로 발전하면 좋을 게 없다고 넌지시 경고했을 때 저는 남자를 좋아하지 않는다며 일말의 가능성조차 단호하게 잘라내던 유현이라, 상진은 어안이 벙벙했다. 상진은 놀라서 팔딱거리는 호흡을 가다듬고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이유야, 너 혹시라도 무슨 약점 같은 거…."

"형은 대표님한테 비밀이나 지켜줘요."

유현은 상진의 입에서 더 해괴망측한 추측이 나오기 전에 서둘러 뒷말을 막아내고 두 팔로 그의 등을 힘껏 밀었다. 이번에는 순순히 밀려나 주었다.

***

태화 스스로도 느끼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유현의 입매나 눈빛, 볼 근육의 움직임, 작은 행동 하나하나 지나치게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유현은 내내 심란한 표정이었다.

"믿을 만한 사람들은 미리미리 협조 요청해 두는 게 편해요. 매니저 말이에요."

유현이 고개를 돌려 태화 쪽을 바라보았다.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이더니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는지 조용히 시선을 거두어 간다. 차는 도로 위를 정처 없이 방황하며 신호를 받고 섰다가 다시 출발하기를 반복했다.

목적지 없는 드라이브가 십 분이 넘어가는데 유현이 입을 열지 않으니, 신호를 받고 선 동안 태화는 결국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까 곤란했어요?"

물론, 몰라서 묻는 건 아니었다. 곤란할 걸 알고도 일부러 그런 거니까.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