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16.
태화는 칼로 도려내는 듯한 감각에 손에 힘을 풀어내면서 마저 말을 끝냈다.
"그러니까 포기해. 난 나 가지고 실험한 인간이랑 결혼하기 싫어."
태화는 세준을 뒤로 밀듯이 놓아주고 가뿐하게 베드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세준은 밭은기침을 뱉어내면서 옆으로 주춤주춤 멀어졌다.
"또 그 소리야? 내가 널 가지고 실험했다고?"
"……."
"몇 번을 말해! 네 몸에 내 이름이 있었던 것처럼 지금 내 몸에도 네 이름이 있어. 난 널 살리려고 했어. 끝내는 살려 냈고! 그런데도 난 널 잃었어. 단지 네가 필요한 순간에 내가 가이드가 아니었단 이유로!"
"……."
"매일 꿈을 꿔. 눈을 뜨면 나는 네가, 돌아오길 빌고 또 빌고…. 그러니까 나 좀 제발 그만 미워해. 미쳐버릴 거 같아…."
이미 몇 년째 넌더리가 날 정도로 들은 말이었다. 아주 조그만 동정심도 생기지 않았다.
"말은 잘해."
다소 냉정하게 말을 끊어낸 태화가 바닥을 디뎠다. 그를 본 세준은 금세 눈물을 거둬들이고, 서둘러 카트를 제 앞으로 가져와 앞을 막으며 소리쳤다.
"그래, 내 탓 하고 싶으면 얼마든지 해! 대신 사실 가지고만 말해. 없던 일 지어내지 말고!"
"없던 일?"
태화가 비뚜름히 웃었다. 그러고는 손가락에 연결된 측정기를 빼 던졌다.
"네가 수술칼 들고 설치던 게 다 내 망상이다? 살려달라고 울던 건? 도망친 건?"
다급한 눈길로 카트를 훑던 세준은 조그만 유리병과 주사기 하나를 꺼내 들었다. 태화는 한 발 한 발 세준과의 거리를 좁혀 갔다. 세준은 뒷걸음질 치면서도, 요령 좋게 용액이 든 바이알에 주사기를 꽂아 빠르게 빨아들였다. 주사기 끝의 공기를 빼고는 고갯짓하며 침대를 가리켰다.
"누워. 이제 투약할 거니까."
"전부 다 없던 일이면, 대체 내가 기억하는 건 뭔데. 너 그때 분명히 나한테 그랬어. 미안하다고."
"안 누울 거면 이대로 해."
숨을 거칠게 몰아쉬던 세준이 결국 가까이 다가선 태화의 팔뚝에 사정없이 주사기를 꽂아 넣었다. 주제에 의사라고 정확히 꽂힌 주사기를 보고 태화가 한쪽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올렸다.
"이제 약 들어가니까 숨 크게 쉬고 입 다물어. 가이딩에 집중하고 말 아껴."
세준의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인공적으로 가이딩을 흉내 낸 가짜가 몸 곳곳을 돌아다니자 몸에서는 자연적으로 거부 반응이 일었다. 몇십 초쯤 버티던 태화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어금니를 악물고 눈을 감았다. 잇새로 억눌린 신음이 흘렀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네 말대로 난 연구원이고 센터의 누구라도 실험체로 쓸 수 있어. 하지만 그럴 수 없는 단 한 사람이 너야. 믿기 싫겠지만 그게 사실이야."
태화가 욕을 삼키며 목 안쪽으로 웃었다.
"꽤 절절한 고백이었어. 너답지 않게."
태화는 느른하게 걸어가 침대 위에 널브러진 측정기를 손가락 끝에 끼우고 침대에 반듯이 누웠다. 그리고 네임은 순식간에 번져 흉흉하게 핏대가 불거진 목까지 시꺼멓게 덮었다.
***
뭐가 어떻게 돼가는 거야.
유현은 대본을 보다 말고 속으로 투덜거렸다. 며칠째 감감무소식이었다. 된다 안 된다 말이 없었다. 안 될 것 같으면 마음이라도 편하게 알려주기라도 하든지. 연락이 없는 며칠간, 고사도 지내고 새 대본도 받고 간단한 홍보 영상도 벌써 몇 개나 찍었다.
그래서 하는 거냐고, 마는 거냐고.
상진이 문을 열고 들어온다. 유현이 눈썹을 이마 쪽으로 한껏 끌어 올린다.
"왜 형만 와요? 대표님은요?"
"어… 잠깐 얘기하고 오신대."
"누구랑요?"
대본을 집어넣으며 묻던 유현은, 숨소리조차 내지 않는 의도적인 묵언을 알아채고 가만히 고개를 돌렸다.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고개를 기울이자 반대편으로 머리를 돌려 아예 시선을 피해버린다. 상진은 뭔가 알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고 있는 것이다.
"뭐예요?"
"뭐가?"
"대표님 누구랑 만나는데요?"
상진이 대답을 거부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의심스러웠다. 뭘까 고민을 하던 유현이 갑자기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여기까지 왔어요?"
"어?"
"확인하려고?"
"뭐, 뭐를?"
"아니, 왜 나랑 얘기 안 하고 멋대로 찾아와? 뭐야 진짜…."
"유현아, 이유야…. 이건 대표님이 말씀하시는 게 나아."
"아니, 내 일인데 왜 대표님이랑 얘길 하겠다는 건데요? 대표님이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희한한 사람이네. 그래서 나 회사에 오라고 한 거예요? 그 얘기 하려고?"
"아니지. 정확히 말하면 너 계약 때문에 물어볼 게 있으시대."
"와… 그런 것까지 말했어요? 심지어 형도 알고 있고?"
"어? 뭐… 나는 네 매니저니까 대략적인 건 알고 있어야지."
유현은 입을 벌리고 하 날숨을 내뱉었다. 몸에 네임 좀 있는 게 뭐가 어때서. 그게 왜 대표와 매니저가 제 학부모가 될 이유가 되는지 조금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뭐라던가요? 문제가 되냐고 물었을 땐 말 한마디 안 하고 갔다고요. 그 후론 전화 한 통 없더니, 참…."
저 모르게 회사랑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다니.
반면 상진은 유현이 어느 부분에서 흥분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다는 듯 확신이 덜 선 투로 물었다.
"유현이 너는 기분이 나쁜 거야? 그래도 계약하는 건데…."
"아니, 그걸 왜 나랑 먼저 얘길 안 하고 회사에 얘길 하냐구요!"
"회사야 네 매니지먼트 업무를 담당하는 곳이니까 당연히 알아야지…."
"엄밀히 말하면 매니지먼트 업무가 아니잖아요. 그런 데까지 왜 회사가 관여를 해야 해요?"
상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매니지먼트 업무가 아니야?"
"아니에요. 됐어요. 나중에 얘기해요."
유현은 상진이 잘못한 것도 아닌데 괜히 열을 올렸다고 생각하곤 고개를 저었다. 그때 문이 열렸다.
"어, 그래. 먼저 와 있었네."
유현을 보자마자 싱글벙글 웃는 상이 된 지 대표가 품에 안기라도 할 듯 팔을 벌리고 다가왔다. 근 몇 달간 냉기를 풀풀 날리며 눈빛으로 닦달하기 바쁘던 대표가 봄날 볕처럼 따사로운 미소를 선보이자 의심스럽게 뒷걸음질부터 쳤다. 대표는 머쓱하게 팔을 거둬들이며 유현과 상진의 어깨를 묵직하게 한 번씩 두드리고 상석에 가 앉는다.
"얼굴 본지도 좀 오래됐고 물어볼 게 있어서 불렀어. 겸사겸사."
유현이 긴장하며 기다렸다.
"뭐… 슬슬 재계약해야지?"
"네?"
유현이 무슨 말이냐는 듯 상진을 바라보자 상진도 다짜고짜 재계약을 꺼내 들 줄 몰랐는지 어이없는 웃음을 걸고 있었다.
"재계약이 아니라 광고 계약 건들 먼저 말씀하셔야 순서가 맞죠. 대표님도 참."
"겸사겸사라고 했잖아. 아, 그런데 김 실장. 저번부터 살살 기어오른다?"
유현이 아니었다면 정 엔터는 진작에 없어지고도 남았을 거라는 사실은 지 대표도 인정하는 바였다. 그러니 유현을 전 소속사에서 데려온 공로를 인정받아 상진도 회사에서 발언권이 커진 것이었는데, 어느새 직원들 사이에서는 자연스럽게 그가 부대표급으로 인식되어 지 대표에게 바른말을 간언하는 총대가 되어 있었다. 간이 배 밖으로 나와, 지근지근 밟아줄 때까지 나불대는 게 특징이었다. 너무 세게 밟으면 가끔 '유현이 데리고 나가겠다'며 꿈틀대기도 했다.
지 대표는 밟지도 않았는데 최근 자주 꿈틀대는 상진이 몹시 못마땅했다. 유현이 상진을 유난히 따르니 큰돈을 주고라도 그를 회사에 붙잡아 두고 있기는 하지만, 유현만 아니었으면 진작에 잘라버렸을 잉여 인력이었다. 나가서 회사를 차려도 차렸을 연차라, 유현을 채 가지나 않을지 항상 눈엣가시였다.
그리고 상진도 그런 지 대표의 심리를 잘 알았다.
"대표님. 기어오른단 말씀은 좀 그렇죠. 그래도 여기서 제가 일한 지가 몇 년짼데. 저번부터 말씀 함부로 하시는 건 지 대표님이…."
"뭐, 이 새끼야?"
지 대표의 입에서 재계약 얘기가 나올 때부터 버벅거리던 유현의 뇌가 뒤늦게 이 난데없는 기 싸움의 맥락을 짚어냈다. 어유어유어유, 소리를 내면서 팔을 휘저었다.
주의가 집중되자 유현은 분위기를 환기하는 차원에서 아주 즐겁고 명랑한 상황에서만 내는 하이톤으로 물었다.
"그런데 대표님, 재계약 얘기는 뭔지 알겠는데 광고 계약은 또 뭐예요?"
"뭐야, 얘 오늘따라 왜 이렇게 맹하냐. 살짝 말해준 거 아니었냐?"
대표가 상진에게 눈짓하며 물었다.
"아니, 저도 서프라이즈 하려고 말을 안 하긴 했는데 이미 아는 거 같아서… 유현아, 너 몰랐어? 아까 계약 가지고 뭐라고 그랬잖아. 매니지먼트 업무가 아닌 그건 뭐야? 찾아올 사람 있어?"
상진이 뚱하게 묻자 유현이 뒤통수를 긁는 척하며 눈을 굴렸다. 뭐라고 말하지? 빤히 쳐다보는 대표의 시선에 핑계가 떠오른 유현이 천연덕스럽게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 아니, 그… 저는 집 계약 얘기하는 줄 알고요…."
"집이 왜? 넌 지금 그 오피스텔이 편하다며. 왜, 다른 데로 옮겨 줘? 저쪽 아파텔로 옮겨줄까? 오, 그래. 이번에 재계약하면 그리로 옮겨줄게. 어때?"
언제는 돈 없으니 방 빼라더니 웬 아파텔. 불과 몇 주 전, 전용 밴이 없어지고 상진마저 다른 팀 스케줄 지원 돌리더니, 이대로는 회사 운영이 어려우니 방도 빼야 할 것 같다면서 죽는소리를 하던 지 대표였다.
유현은 눈을 빛내는 대표를 떨떠름하게 보다가 코끝을 긁으며 은근슬쩍 말머리를 돌렸다.
"근데 진짜 광고 계약 얘긴 뭐예요? 아무도 말씀을 안 해주셔서 너무 궁금하네, 하하…."
***
혼자 돌아가겠다며 상진을 겨우 따돌린 유현은 비상구 계단을 한 칸 한 칸 밟아 내려서며, 꽃점을 보듯이 번갈아 중얼거렸다.
"하라는 거다… 웃기는 소리다… 하라는 거다… 그건 착각이다…."
제법 굵직한 광고 계약이 들어왔는데, 그 광고주가 원래였으면 절대로 유현을 섭외할 리가 없는 우신 그룹 계열사 중 하나라고 한다.
우신 그룹은, 특히 금융 계열사는 광고 모델 선정 기준이 워낙 까다로워서 웬만하면 아이돌은 쓰지도 않았다.
대중들이 광고 계약의 자세한 이면까지는 알 수 없어도, 우신에서 병적으로 깨끗한 이미지를 추구한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그는 곧 우신의 광고를 찍으면 무결점이라는 이미지 보증이 된다는 의미와 같았는데, 때문에 우신의 광고를 한번 찍는 것이 필모라는 우스개가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광고를 제안했다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한테?
"그것도, 세 개나…."
유현은 계단 가운데 멈춰 서서 한숨을 쉬었다.
애당초 제게는 절대 올 리가 없는 광고였다. 그러니 현재로서는 가장 유력한 용의자인 태화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연예면을 장식하고 있는 제게 우신에서 뭐하러 광고를 주겠냔 말이다.
우리 사이의 계약은 문제없이 진행될 거라는 사인으로 받아들이면 되나? 그럼 그 사람 덕분이라고 고마워해야 하는 건데….
아니면, 일단 계약부터 하고 손해 배상으로 두둑이 뜯어내 보려는 심산인가? 회사를 파산시키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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