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네임 온 잇-14화 (14/69)

(14)============================================================

14.

그가 유현에게 요구하는 건 간단했다. 몇몇 자리에 동행해 그의 애인 역할을 수행할 것. 유현이 어떤 의무를 성실히 이행해야 하는지 자세하게 명시되어 있었으나, 그 뒤에 덧붙는 예외 조항들이 상당히 유현의 편의를 봐주고 있었으므로 이건 전적으로 유현에게 유리한 계약이 맞았다.

단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계약의 종료에 관해서였다.

[본 계약은 갑의 파혼 확정시 종료된다. 단, 갑의 사정으로 계약을 지속하기 힘들다고 판단되는 경우 그 즉시 계약은 해지된 것으로 본다.]

갑의 사정? 구체적으로 어떤….

로비의 반 정도를 지났을 즈음, 생각이 많은 유현의 눈앞으로 익숙한 얼굴이 훅 스쳐 지나갔다. 그쪽에서도 알아보았는지 가던 걸음을 늦추더니 상체를 뒤로 기울여 유현의 얼굴을 확인하려 들었다.

"……."

유현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이고 곧바로 태화의 곁에 붙어서서 팔을 붙들었다. 의아한 시선이 제게 머무는 것이 느껴졌지만 유현은 모자를 깊게 눌러쓰며 태화의 팔을 붙든 채로 반걸음 앞서 나갔다. 가뜩이나 이미지가 좋지 않은 상황에 호텔에서 기자들의 눈에 띄어 좋을 게 없었다. 서둘러 벗어나야 했다.

"무슨 일…."

"일단 여기서 빠져나가요."

빠른 걸음으로는 입구까지 금방이었다. 유현은 로비를 완전히 빠져나온 뒤 태화를 벽 삼아 살폈다. 제 갈 길을 가는 기자의 뒷모습을 끝까지 확인한 뒤에야 유현은 태화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무슨 일이에요?"

"그게 방금…."

굳이 알 필요가 있을까 싶어 망설이던 그때 발렛 요원이 다가왔다. 끝까지 설명을 들을 심산인지 말없이 버티고 있는 태화에게 유현은 고갯짓하며 그의 뒤를 가리켰다.

"지금 안 타면 안 될 거 같은데."

태화는 흘끗 끊임없이 들어오는 차들을 보더니 하는 수 없다는 듯 키를 받아 들고 운전석에 올라탔다. 한숨 돌린 유현은 조수석 문을 열어 작별 인사를 건넸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어디 가요?"

"택시 잡으려구요."

태화는 기가 찬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래요. 뭐, 다른 건 그렇다 치고, 매니저는 어쩌고 택시를?"

"그 형은 약속이 있어서요."

"……."

"그럼 이만 전 가볼게요."

유현은 작게 웃고 문을 닫아주었다. 아까 본 그 기자만 아니었어도 가는 길에 태워 달라 부탁해 보는 건데 내심 아쉬웠다. 그렇게 두 발이나 걸었을까.

"……?"

다급한 발소리에 돌아봤더니 태화였다. 유현은 꽉 붙들린 제 팔을 힐끔 내려보았다.

"왜요?"

"내 차 타고 가요."

"괜찮아요."

"타고 가요."

"진짜 괜찮아요. 혼자 잘 다녀요."

"연예인이 혼자 잘 다니면 돼요?"

"차 뺏기고 매니저도 뺏기면 혼자서도 잘 다니게 돼요."

나가줘야 할 차가 멈춰버리자 이제 진입하는 차량들은 무슨 일이 있나 하고 바깥 상황을 살폈다. 다행히도 상황 파악이 빠른 요원들은 금세 정리해 손님들을 안내했지만, 이 이상으로 이목을 끌어서는 안 되었다. 실랑이를 벌여 봤자 곤란해지는 건 저 하나였으니까.

발렛 요원이 다가오는 것을 발견한 유현이 거의 입을 벌리지 않고 작고 빠르게 속삭였다.

"로비에서 아는 얼굴을 본 것 같아서 그래요. 연예부 기자!"

태화는 그제야 내키지 않는 듯 유현을 미적미적 놓아주었다. 유현은 약간 흐트러진 모자를 고쳐 쓰고선, 꾸벅 묵례하고 걸어 나갔다.

운 좋게 저 멀리 손님이 내리고 출발하려는 빈 택시가 보였다. 유현은 그 택시를 잡으려고 뛰듯이 걸으며 팔을 쭉 뻗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빠른 속도로 콱 잡아채 내리는 손길이 있었다.

"어?"

진행 방향과 반대로 당겨지며 받은 반동도 반동이었고, 그 아귀힘이 반사적으로 신음이 나올 만큼 억척스러웠다.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더니, 또 태화였다. 언제 이만큼 쫓아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유현은 목소리를 낮춰 작게 경고했다.

"기자가 있다니까요."

"물어볼 게 생겨서 그래요."

그 말을 하는 태화의 눈이 평소와 달랐다. 초점을 잃은 듯도 하고 뭔가를 뚫어져라 집중해서 보는 듯도 하고. 유현은 의아하게 그를 따라 눈을 내렸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이 제 손목이었다.

"……."

"……."

식사하면서 걷어놓은 소매 밖으로 드러난 선명한 글자. 네임이었다.

유현이 팔을 뿌리치며 허겁지겁 옷 끄트머리를 잡아당겨 가렸다. 유현이 패닉에 빠져 있는 것을 본 태화는 아무 말 없이 운전석으로 향했다.

***

차에 올라타자마자 캐물을 거란 예상과는 다르게 서먹한 정적만이 계속되었다. 얼마나 세게 쥔 거야. 유현은 얼얼해진 손을 다른 손으로 계속해서 주물렀다.

복잡한 심경이었다. 제가 작정하고 사기를 친 것도 아니었고 먼저 드라마에 투자해서 계약하자고 덤벼든 것도 저쪽이었다. 그러니 쩔쩔맬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저쪽에서 어떤 오해를 했을지 아니까 당당할 수도 없지….

말하자면 이런 기분이었다. 허망하고 짜증스러운데 딱히 남 탓을 할 수도 없어서 단숨에 부풀어 오르는 기분을 있는 힘껏 누르게 되는. 상진이 제 몫이라고 사다 놓은 커피를 다이어트를 한답시고 외면하다 어렵사리 마시기로 마음을 돌린 순간 실수로 쳐서 몽땅 바닥에 쏟아 버렸을 때. 그때 딱 이런 기분이었다. 뒷수습까지 제 몫이라는 점마저 완벽히 똑같았다.

차가 막혀 시간이 도로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다 해도 기본적으로 호텔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금방이었다. 눈치를 보던 유현은 조심스럽게 오피스텔 근처의 편의점을 가리켰다.

"저 앞에서 세워주시면 될 거 같아요."

도로변에 차가 정차하고 유현이 안전벨트를 풀 때까지도 고집스럽게도 침묵이었다. 평생 저 얼굴로 살아왔으니 본인이 입 다물고 인상 쓰면 어떤 효과가 있는지 모르지는 않을 텐데. 유현은 제 인내심을 조여 오는 이 고요한 압박감이 조마조마했다.

"아무것도 안 물어보실 거면 저 이만 가 봐도 될까요."

"팔목에 그거, 네임이에요?"

태화는 어둠 속에서 얌전히 옷으로 덮여 있는 유현의 팔목께를 응시했다. 그렇게 팔목에 오래 있던 시선이 천천히 올라와 유현의 얼굴에 그쳤다.

"뉴스가 난 건 봤어요. 그래도 네이머인 건 루머인 줄 알았는데."

유현은 문득 이 차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생경하게 느껴졌다. 가죽 시트 냄새도, 그 흔한 방향제 향도 느껴지지 않는 공간, 화가 난 듯한 남자와 그 옆에서 어쩔 줄 모르는 자신도.

"……."

눈 맞춤이 길어지며 태화의 말을 놓칠 뻔한 유현은 눈을 깜빡였다. 그가 대답을 꽤 인내심 있게 기다려주었음을 인지하자마자 헛기침을 하며 곧바로 고개를 틀었다. 방금 나 너무 긴장했지. 그치, 어.

"…문제가 되나요?"

"문제가 안 되나요, 고유현 씨한테는?"

"정 마음에 안 드시면 아직 계약서에 사인은 안 한 상태니까…."

"각인할 정도면 보통 사이는 아니란 건데, 나하고 그런 계약을 해도 괜찮냐고 묻는 거예요."

지극히 통념적인 물음에, 유현은 당황하며 소리 없이 입술을 달싹였다.

네이머와 각인자. 둘 다 네임을 가진 사람을 뜻하지만 네이머가 조금 더 포괄적인 개념이었다. 글자의 형태로 네임이 있다는 말은 곧, 각인 상대가 있음을 뜻했다.

그러나, 유현에게 태화가 표현한 '보통 사이가 아닌' 상대는 예나 지금이나 없었다. 그걸 설명하자면 어느 날 갑자기 네임이, 그것도 모르는 사람의 이름자가 저 혼자 몸에 새겨졌다는 얘길 해야 했고, 그 이야기는 통념과 상식을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일이라 솔직하게 털어놓고도 되레 사기꾼으로 몰릴 공산이 컸다. 저도 안 믿기는데 그걸 누가 믿을까.

유현은 엉망으로 뒤엉킨 머릿속에서 느릿느릿 단어를 골라내며 말했다.

"그 괜찮냐는 게… 상의 된 거냐고 물으시는 거면, 괜찮을 거예요. 아마도."

"…괜찮다?"

"충분히 심사숙고한 일이고, 어차피 제가 잘 되는 길이니까 당연히, 음… 아니, 꼭, 굳이 남의 허락을 받을 필요는 없는 문제라고,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하고요…."

고르고 골랐는데도 도저히 들어줄 수 없는 말이 차곡차곡 나열되었다. 내가 지금 무슨 헛소리를…. 각인 상대가 있다고 전제한다면, 이기적이고 속세적이기 그지없는 말이었다. 유현이 체념하듯 눈을 감으며 한숨을 뱉었다. 태화는 그 모습을 아주 집요하게 관찰했다.

"대단하네요."

"…감사합니다."

태화는 재채기처럼 웃음을 뱉었다. 뭐가 감사하다는 건지. 어이가 없었다.

들어가 보세요. 의미를 알 수 없는 정적 속에서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유현은 차 문을 열고 튀어 나갔다. 안녕히 가세요. 인사를 성의 없이 내던지고 차 문을 쾅 닫은 후 운전석 쪽으론 고개도 돌리지 않고 눈앞에 보이는 편의점으로 뛰어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알바생의 인사에 유현이 까딱 숙이고 매장 안쪽으로 들어갔다. 살 물건도 없으면서 괜히 매장을 한 바퀴 돌면서 바깥의 동태를 살폈다. 투명한 유리 너머로 차가 떠나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유현은 바깥에 시선을 고정한 채 사탕을 두 움큼 넘치게 집어 계산대 위에 올려놓고 카드를 내밀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 망한 거 같은데.

***

태화의 삶에서는 대체로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것들이 삶의 방향을 좌우했다.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랐지만 치열한 경쟁 속에서 우수함을 증명해 보여야 했던 열다섯까지의 삶에서도, 또 그전의 삶을 모조리 부정당한 후 그저 생존이 목표가 된 열다섯 이후의 삶에서도 그러했다.

할아버지의 총애와 사촌들의 시기 그리고 질투. 특수능력자로서의 각성에 이은 네임 발현….

누군가는 "그런 걸 숙명이라고 하지. 영웅에게 주어진 필연적인 서사 같은 거." 하며 가볍게 웃었다. 당시에는 그 말이 꽤 위로가 되었던 듯도 하다. 언젠가 맞을 광영의 서사적 장치라고 생각하며 쓰레기 같은 순간들을 의연하게 넘겼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숙명이란 얼마나 잔인한 단어인지를 알게 된 것은 그가 더 이상 아무도 지킬 수 없게 되었을 때였다. 센터에서 머물러서는 안 되는 신분이 되었을 때. 눈을 떴을 때 자신은 요원들을 이끄는 팀장도 아니었고, 하다못해 에스퍼도 아니었다.

스스로를 영웅이라 칭했던 교만함을 규탄당하기라도 한 듯 모든 능력을 잃은 후였다. 그뿐이라면 차라리 축복이라 하겠으나….

매일 밤마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방 안에서 두통에 시달리며 선택할 수 있다고 착각했던 것들을 곱씹었다.

에스퍼가 되었어도 폭주하지 않을 수 있다고, 네이머가 되었어도 각인하지 않을 수 있다고, 비록 자의로 센터에 입소한 것은 아니지만 퇴소만은 제 뜻대로 할 수 있을 거라고, 어느 시기에 퇴소를 하면 진정한 제 삶을 살 수 있게 될 거라고.

잔인하게도 그런 착각들은 숙명적으로 불행을 불러왔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