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13.
존재만으로도 구원이 되는 사랑.
친구의 이야기를 꺼내 천천히 써 내려갔다. 그 친구를 기억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 친구가 못다 이룬 행복을 대신 이뤄주기 위해서. 때때로는, 아릿한 심장 께를 손으로 꾹 누르면서 '너라면 어땠을까'하며 일부러 고통 속에 잠겨 들기도 했다.
"센터에 소속된 능력자들은 철저히 격리되고 외부와 엄격하게 접촉이 금지되기 때문에, 센터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 모를 수밖에 없다고 해요. 하지만 난 친구 덕에 운 좋게 알게 된 거죠."
"……."
"부조리를 밝혀서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그런 위대하고 정치적인 목적 같은 건, 적어도 나한테는 없어요. 난 그냥 사람들한테 어딘가엔 그렇게 치열한 곳이 있다고, 우리를 위해 그렇게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고 알려주고 싶은 거죠."
"……."
"그리고 친구에게 제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행복한 결말을 만들어주면 족해요. 정말로 난 그게 다예요. 유현 씨가 그걸 생각해 주면 좋겠어요."
친구가 행복한 엔딩을 맞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쓰기 시작한 글이지만, 다 쓰고 나니 더 막막했다.
그때의 정림은 아무것도 몰랐다. 그 많은 시간 동안 방송에서, 출간물에서, 어째서 단 한 번도 센터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지 않았는지를. 의문을 가져볼 생각도 못 했다.
애매한 조건으로 입상하게 될까 봐 공모전에 내지도 않고 시나리오를 들고 무작정 방송국과 제작사를 찾아다녔다. 정식으로 글을 배운 적도 없는 작가 지망생이, 그 흔한 인맥 하나도 없이 뭐가 될 리가 없었다. 차차 현실을 깨달아 갔다.
어딜 가나 규율은 동일하고 엄격했다. 센터의 일은 센터의 일로 남겨 둘 것. 포기를 배우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가슴 속에 이야기를 묻어갈 때쯤, 모르는 번호로 연락이 왔다. 백현수 감독이었다. 당신이 방송국 모 피디에게 주고 간 시나리오를 우연히 읽었는데 관심이 생겨서 연락을 드렸다. 나는 이런 사람이고 관심이 있으면 연락 달라.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꺼내는 성미 급한 백 감독과 그렇게 손을 잡은 게 2년 전이었다.
"난 정치적인 목적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현실은 '나만 결백하면 된다'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더라구요? 투자도 안 되고 캐스팅도 안 되고…. 그래서 나랑 감독님이 여기저기 많이 떠돌았죠."
"……."
"어떻게든 타개해 보려고 최대한 타협을 하면서, 내가 처음에 그린 그림이랑 조금 달라졌어요. 특히 캐스팅 부분이 그런데…."
"……."
"뭐,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이렇게가 아니면 안 될 일이었던 거라고."
불편한 화제에 다시 면구스러워진 유현은 착한 아이처럼 얌전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를 보며 정림은 아쉬움을 삼켰다. 조금만 더 일찍 수락했다면 남자 주인공이 다른 배우한테 갈 일은 없었는데. 그리고 이어지는 말은, 작가로서 의지와 강단이 느껴지는 약속이었다.
"유현 씨가 가장 매력적이지 않을 수는 있어요. 원래 이렇게까지 비중을 키우려고 했던 캐릭터가 아니어서. 대신 가장 임팩트 있는 등장씬을 줄게요."
***
저작 운동이 점차 느려진다. 태화는 젓가락을 쥔 제 왼손을 차갑게 응시했다. 현역 요원일 때 힘을 실어 사용했던 왼손은 이렇듯 종종 말썽이었다. 그는 두꺼운 장갑을 꼈다가 벗은 것처럼 손끝의 감각이 예민하게 되살아나는 것을 가만히 방치했다.
"……."
태화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물잔을 쥐었다. 네임이 있는 자리마다 욱신거려 식사에 집중하기도 힘들었다. 감각이 선명해지는 만큼 고통 또한 분명해지는 탓이다. 순간 손아귀에 비정상적으로 힘이 들어갔다.
그는 그것을 인지하고 테이블 위에 물컵을 떨구듯 내려놓았다. 말 한마디 오가지 않던 데면데면한 식탁 위에서 충분히 주의를 끌고도 남을 크기의 소음이 일었다. 맞은편에서 깜짝 놀란 듯 유현이 어깨를 움찔거리고는 물었다.
"괜찮으세요?"
"별일 아니에요. 손이 미끄러져서."
태화는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하고 다시 물잔을 들어 올렸다. 여전히 주체가 안 되는 왼손은 테이블 아래로 숨긴 채였다. 덜덜 떨리는 손을 쥐었다 폈지만 불편함은 가시지 않았다.
왜 이러지….
이래서는 안 될 시기였다. 세준에게 아쉬운 소리까지 해가며 태인에게 전달받은 가이딩 약을 주입한 게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다. 아무리 급한 불 끄는 용도였다 해도 지속 기간이 지나치게 짧았다.
이럴 경우 둘 중 하나였다. 약이 잘못되었거나 몸이 잘못되었거나. 전자의 가능성에 더 무게를 두고 있었다. 자신이 망가지면 망가질수록 기꺼워하는 사람이 약을 처방하니 말이다.
이러다가는 오늘내일 안으로 센터에 실려 가겠는데. 마지막으로 센터를 방문한 날짜를 가늠해 보자 겨우 두 달 전이었다. 약효가 예전만 못하다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어떤 전조도 없이 주기가 반절로 줄어든 것은 확실히 수상하다.
센터의 방문주기와 가이딩이 고갈되는 주기는 대체로 일치한다. 평균적으로 4개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센터에 찾아가 가이딩 약물을 주사하고 나면 무리 없이 일상생활이 가능해야 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사설 가이딩 업체에 들러 가이딩 약물을 복용해야 하는 것도 퇴역한 에스퍼 신분으로 꼬박꼬박 센터에 들러야 하는 것도 지긋지긋했지만, 오늘만 사는 것처럼 몸을 혹사시키던 시절에 비하면야 일 년에 서너 번에 불과한 가이딩은 충분히 감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가이딩 약물의 효과가 떨어지는 시기가 점점 앞당겨지고 있다. 의심이 확신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저기…."
며칠이나 더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를 가늠해 보고 있던 태화가 눈을 들었다.
"말씀하세요."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유현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캐스팅이 확정되자마자 며칠 동안 작가 개인 미팅, 공개와 비공개로 대본리딩이 쉼 없이 이어졌다더니 안색도 무척이나 나빠 보였다.
"계약서 확인하기 전에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이 말을 하려고 기다렸구나. 깨작대는 것을 보고도 식단 조절 정도로만 여겼는데, 유현은 이 자리에 앉을 때부터 이 타이밍을 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식사 시간 전부를 망치지 않으면서도 본격적인 계약 얘기가 나오기 이전의 타이밍을.
태화가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유현은 어렵사리 입술을 뗐다.
"저한테 그러셨잖아요. 아파서 약을 복용하는데, 그것 때문에 집안에선 결혼을 강행하는 거라고."
"네."
"그 약을 안 먹으면 죽는다거나… 뭐, 그런 건 아니죠?"
이런 순간에, 이런 질문을. 너무나도 공교로워 태화는 왼손을 꽉 말아쥐며 씩 웃었다.
"그럴 리가요."
"그럼 왜 굳이 집안에서 결혼을 시키려고 해요?"
"약을 구하기 용이해지기 때문이죠."
"그쪽이 결혼을 싫어하는 이유는 상대가 마음에 안 들어서인가요?"
"비슷해요."
"그럼 도대체 그 약이란 게 뭐길래…."
"고유현 씨."
"네?"
"내가 고유현 씨한테 부탁하는 건, 날 살려달라는 게 아니라 애인인 척 연기만 잠깐 해달라는 거예요. 전혀 복잡할 것 없어요. 간단하게 생각해요."
유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쥐고 있던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조건이 좋은데 생각할수록 의심스러워서요."
"뭐가요?"
"그쪽은 아파서 약이 필요한 몸이고, 결혼은 약 때문에 하는 거라고 하고, 근데도 결혼이 죽기보다 싫다고 하니까… 죽으려고 작정한 건가 싶고 그렇잖아요."
위약금이니 뭐니 했어도 실질적으로 서로 오간 거 하나 없는 판이니 안 하겠다고 하면 그만인 계약이었다. 그런데도 유현은 계약을 하겠다고 이 자리에 나온 것이다. 결정적인 계기는 아마도 계약금이랍시고 안겨준 드라마 배역일 것이었고. 그만큼 재기에 간절하다는 뜻일 텐데….
태화는 얄궂은 호기심에 오른손으로 턱을 괴고 물었다.
"그렇게 말하니까 궁금해져요. 내가 죽으려고 작정한 거라고 하면 고유현 씨는 입장이 달라지나?"
"달라지죠."
"왜?"
"……."
"나도 원하는 걸 얻고 고유현 씨도 원하는 걸 얻으면 결과적으론 모두에게 좋은 일인데, 왜 달라지지?"
피로로 창백한 유현의 낯이 조금 더 진지하게 가라앉는다. 새까만 눈으로 자신의 얼굴에서 농담의 흔적을 찾으려는 듯 쏘아져 오는 시선도 꼼꼼했다.
"더럽고 치사해서 결혼도 안 하고, 죽든 말든 약도 안 맞을 거라는 거예요?"
"더럽고 치사하단 얘긴 한 적도 없어요."
"그래서 진짜 죽으려고 그러는 거라고요?"
태화는 눈썹을 까딱이고 자세를 바로 했다. 의외로 진실에 가까운 추론이었다. 미심쩍어하며 자꾸만 따져 묻는 걸로 봐서는 그게 본인에게 꽤 중요한 문제인 듯싶은데, 유현이 제 도덕 기준에 도저히 맞지 않아 그만두겠다고 하면 아쉬운 쪽은 자신이었다. 이 대화는 이쯤에서 그만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럴 리가요. 말했다시피,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예요."
"나한테 약을 훔치러 가자고 해요, 차라리. 같이 하는 거면 그편이 훨씬 나으니까."
물잔을 들어 올리던 태화의 손이 멈칫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물을 목으로 넘기고는 물었다.
"진짜로 훔치러 가자고 하면 같이 가주게요?"
"왜요, 따라가서 망 정돈 봐줄 수 있죠. 계약금 받은 의리가 있는데."
계약금은 끝까지 포기 안 하겠다는 솔직한 말에 태화는 시원스레 웃었다. 그 순간 왼손 말단부터 싸하게 돌던 힘이 탁 풀렸다. 식탁 아래로 두고 쥐었다 펴 보곤 평상시와 다름없음을 확인한 태화는 왼손으로 자연스럽게 식기를 집어 들며 말했다.
"2인조 절도범으로 활동할 생각까지 해주다니, 든든하네요."
"근데, 농담이죠? 진짜 죽을 생각 아닌 거 맞죠?"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파혼이 목적이에요. 자살이 아니라.“
***
엘리베이터가 한바탕 쏟아내는 사람 틈바구니에 끼어, 유현은 너무 멀진 않지만 일행이라고 묶이지 않을 만한 거리로 태화의 뒤를 쫓았다. 비싼 밥을 얻어먹긴 했지만, 밥 한 끼 하자고 호텔까지 오는 건 못 할 짓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나름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끝냈고, 태화는 후식 서빙이 완전히 끝난 뒤에야 계약서를 내밀었다. 그 서류를 가볍게 읽어내린 유현의 감상은 이러했다.
저 사람, 결혼하기 싫다는 거… 진심이구나.
"계약서 초안인데 추가하거나 빼도 상관없어요. 변호사에게 검토를 맡겨도 괜찮겠지만, 대신 비밀 엄수가 철저한 곳이어야겠죠. 비밀유지의무도 무시하고 입 싸게 구는 인간들이 의외로 많으니까."
한 글자만 허투루 봐도 코 베이는 게 계약이라며 전문가의 자문 없이 섣부르게 체결한 계약의 위험성에 대해 질리도록 들어 온 까닭에, 변호사도 대동하지 않고 대책 없이 당장 사인부터 휘갈길 생각이야 처음부터 없었지만…. 뭘 모르는 유현의 눈에도 이상해 보이는 계약이었다.
하는 일에 비해 과분한 대가를 받는 계약. 심지어 조율의 가능성을 열어둔 것을 보면 유현이 유리한 쪽으로 조항 몇 개쯤 조금 더 수정하겠다고 해도 흔쾌히 그러라고 할 눈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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