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네임 온 잇-10화 (10/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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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주태화는 가슴 졸이며 제 약혼자 하나만 바라보는 제 아들과는 달랐다. 그 몸을 하고도 애인을 만드는 데 열성적이라는 근황이, 센터에 가만히 들어앉은 제 귀에까지 들어오게 만든다. 사람 같지도 않은 꼴로 밥도 거르고, 잠도 안 자고 꼬박 몇 달을 매달려 살려 놓았더니, 안하무인도 이런 안하무인이 없지. 다 죽어가는 태화를 구해 준 제 아들만 우스워졌다. 지금도 이런데 결혼 후에는 어떤 취급을 당할지 벌써부터 눈에 훤했다. 아들이 부디 지금이라도 마음을 돌려주길 바랐다.

"아이는 갖고 싶지 않은 거니? 널 닮은 네 아이 말이다."

"태화가 여자였다면 좋았겠지만, 남자니까 어쩔 수 없잖아요."

남자와 결혼하려는 아들을 기중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원하기만 하면 그게 어느 집안의 여식이든 상관없이 혼인을 성사시킬 수가 있는데.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바로 그 센터장을 아버지로 둔 데다, 외가는 무려 유상 제약. 그런 배경을 다 빼고라도, 본인이 중대한 범죄를 저지르고 망명을 신청한다 해도 타국에서 앞다퉈 모셔갈 엘리트였다. 어느 모로 보나 기울어지는 결혼이었다.

기중은 세준이 내심 여자와 결혼을 했으면 하고 바랐다. 이능력은 격세유전이 흔했다. 센터장은 임명직이니 차기는 누가 될지 모른다고 떠들고 다녔지만, 세준이 여자와 평범하게 결혼해서 이능력을 가진 아이만 낳아만 준다면, 차기 센터장 자리는 고스란히 그 아이의 것이었다.

정략결혼에 그다지 거부감이 없는 딸 찬영에게 실낱같은 기대를 걸고 있기는 하지만…. 센터라면 칠색 팔색을 하는 찬영이 해외로 보냈으면 보냈지 제 아비에게 곱게 자식을 내어줄 리가 없고, 그러니 아무리 생각해도 제 대에 못다 이룰 제 꿈을 이뤄줄 사람은 역시 세준뿐이었다. 깊은 시름에 잠겨 기중은 침음했다.

"세준아. 각인했다고 모두가 결혼을 하지는 않아. 나만 해도―"

"네, 각인하신 분과 결혼은 하지 않으셨죠. 정확히는 결혼만 안 하신 거지만요."

"세준아."

"말씀드렸잖아요. 다 이해한다고. 어머니는 아버지 없인 못 사시고, 아버지는 그분 없인 못 사시죠. 그래서 어머니가 그분을 증오하는 것도, 증오심을 견딜 수가 없어서 사람을 시켜 그분을 망가뜨린 것도, 그 일 때문에 아버지가 너무 화가 나서 어머니를 때린 것도, 그래서 어머니가 결국 평생 다리를 절게 된 것도. 찬영인 이해 못 해도, 전 정말로, 다 이해해요, 그러니까."

"……."

"아버지도 절 이해하세요."

"그 경우와는 다르지."

"뭐가 달라요? 제가 가이드가 아니라서? 제가 가이드였다면 아버지는 절 이해하셨겠어요?"

"당연히―"

"반대하셨겠죠. 아버지가 집요하게 그분을 취하셨던 것처럼, 태화가 절 그렇게 간절하게 원하고 탐했다면 차라리 절 죽이셨을 거예요. 수치스러우시니까. 이 결혼도 실은, 태화가 정상적으로 누군가와 관계할 수 없는 몸이라 허락하신 거잖아요?"

"연세준!"

기중이 사자후를 내질렀다. 그러나 세준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상대를 겁박하듯 약한 냉소를 머금고 있었다.

"아버지. 제가 가이드가 아니기 때문에 제게 이 결혼은 더더욱 필요해요. 아버지가 보여주셨잖아요. 그분을 너무나 사랑하시면서도 아내인 어머니를 외면하지도 못하셨죠. 저도 태화가 절 외면하지 못하게 할 장치가 필요해요."

"결혼은 단순히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야. 집안과 집안이 결합하는 일이란 말이다. 이미 그쪽에서도 알고 있을 거다. 이 결혼은 태화가 아니라 네가 훨씬 더 원하고 있다는 걸. 거기서부터 지고 들어가는 거야. 이 아버진 네가 왜 그런 결혼을 하냔 거다."

"그래서, 자식이라도 갖는 실리를 선택하라는 말씀이세요? 적어도 지지는 않을 테니까?"

"그래."

"아버지는 실리를 선택해서 뭘 얻으셨어요? 처음부터 그분과 결혼을 하셨으면 모두가 행복했을 거라는 걸 알고 계셨잖아요. 그랬다면 어머니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일이 없었을 테고, 미치지도 않았을 테고, 그분도 망가지지 않았겠죠. 아버지는 그분의 온전한 애정을 받을 수 있었을 거예요. 어쩌면 그분에게서 아이를 볼 수도 있었을 거고요. …하지만 아버지는 어머니를 선택하셨어요."

"……."

"이해하세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아버지는 그래 주셔야 해요. 전 어머니의 아들이니까."

이 문제가 거론된다면, 자신은 세준에게 언제까지나 질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참담한 기분으로 기중은 눈을 내리감았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항복했다.

"…그래. 알았다."

***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털어내며 거실을 가로지르던 유현은 큼지막한 헤드라인에 시선을 빼앗겼다.

[거대 기업의 동맹… 우신 차남 주태화, 유상 제약 장남 연세준 약혼]

신문을 가져와 소리 내어 읽었다.

"우신 차남 주태화, 약혼."

이제 보니 내용이 꽤 익숙했다. 그 지난주 다른 신문 일 면에서 '연말께 화촉, 후계구도 지각변동' 따위의 제목을 달고 대대적으로 다루었던 기억이 났다. 매일 숙제하는 기분으로 읽었던 신문 기사가 평소와는 조금 다른 맥락으로 읽혔다.

저를 향한 경고에 가까우려나. 허튼짓하지 말라는.

저 기사 속의 재벌 삼세가 투자자의 탈을 쓰고 접근해 대뜸 제 파혼을 도와 달라며 말도 안 되는 계약을 제안해 왔다. 불과 몇 시간 전 유현에게 일어난 일이다.

*

"전 남자입니다만."

"다행히도, 제 약혼자도 남자입니다."

"그게 뭐가 다행이란 거예요?"

오디션이고 뭐고, 남자에게서 진짜 목적을 들은 순간 모멸감으로 머릿속이 온통 새하얘졌다. 얼마나 저를 쉽게 봤으면, 이런 식으로, 이런 자리에 나타나서…. 더 듣지 않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는 찰나, 남자는 차마 외면하기 힘든 목소리로 유현을 붙잡았다.

"집안에선 내가 복용하는 약 때문에 결혼을 서두르고 있어요. 공교롭게도 내 약혼자가 제약 회사 아들이라."

호기심을 자극해 유현을 앉혀두는 데 성공한 그는 처음의 당당했던 기세를 버리고 완곡한 어조로 회유하기 시작했다.

"애인이 되어 달란 게 아니에요. 단지 그런 척 연기를 해달라는 거죠."

처음부터 끝까지 불가해한 말투성이였지만, 그 대목에서는 특히 강한 의문이 들었다. 가짜 애인을 내세워 약혼자를 몰아낼 수 있다면 굳이 수고스럽게 대역을 찾을 필요가 있을까. 그 배경에, 그 몸에, 그 얼굴에… 문란하게 사는 게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울 인간으로 보였다. 애인이 아니라 애인 비스무리한 거라도 돼보겠다고 달려들 사람이 한 다발은 될 것이고, 개중 하나쯤 골라 말을 맞추는 것쯤 일도 아닐 텐데.

결혼이 싫은 이유도 불분명했다. 둘 다 내로라하는 집안의 자제들이니 서로 계산은 넘치도록 해봤을 것이다. 부모들은 자식에게 모자람 없는 상대를 붙여주려고 노력하니까. 상위층의 자제들에게 혼맥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드라마가 아니더라 기사 몇 개만 찾아봐도 알 수 있었다. 집안끼리의 약속을 혼자 깨보겠다는 발상은 터무니없어 보였고, 심지어 그 결혼이 병환의 치료와 관련되어 있다면 우신에서 아들의 애인이든 애인 대역이든 가만두고 볼 리가.

그래서 거절했다.

"죄송하지만, 전 다른 집 가정사엔 휘말리고 싶지 않아서…."

그러자 남자는 예상치 못한 카드를 꺼내 들었다.

"내가 무사히 파혼하면, 고유현 씨가 운이 없어서 잃은 것들을 전부 제자리에 돌려놔 줄 수 있어요. 최종익이 얼씬도 못 하게 해주는 것은 물론이고, 간접적으로 입는 피해도 없게끔."

어떻게 알았는지는 몰라도 그는 최종익을 알고 있었고, 최종익이 제게 한 짓까지도 알고 있는 듯했다. 자신만만하게 최종익을 제게서 떨어트려 주겠다 호언장담까지. 잠깐 죽어 있던 반발심이 고개를 쳐들었다.

"…제 뒷조사를 하셨구나."

"상식 밖의 인간이 돈과 권력을 쥐고 있다면 결코 혼자 타락하지 않아요."

"지금 저한테 협박하시는…?"

"나 말고, 최종익 얘기예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최종익이 고유현 씨를 망치려고 작정했고, 그렇게 작정한 이상 최종익에게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에요. 사실 아주 쉽죠."

"그쪽이 하는 협박처럼 들리는데요."

"보다 나은 선택지를 알려드리는 거죠."

"더 나은 선택지라는 걸 제가 어떻게 알고요. 남의 약점부터 잡고 말씀하시는 거 보니까 그쪽도 못지않게 치밀하고 비겁해 보이는데."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고유현 씨가 내 제안을 거절한다 해도 난 아무 짓도 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그걸 제가 어떻게 믿고…."

"첫째로, 난 지금 고유현 씨한테 부탁을 하는 입장이고, 둘째로는, 말했다시피 고유현 씨가 망가지는 데는 꼭 내가 나서지 않아도 된다는 거예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현실을 일깨워주는 직설에 유현은 그를 우두커니 보았다.

맞는 말이다. 남자가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떠나가기만 해도 그가 만들어준 기회는 자연히 사라지고, 캐스팅이라는 마지막 기회도, 회사라는 최소한의 방어 장치도 잃은 채 최종익의 손아귀에서 놀아날 최적의 환경이 만들어지는 셈이었다.

"솔직히 말할게요. 난 돈에 관심 없고, 드라마엔 더 관심이 없어요. 투자니 뭐니 하며 시끄럽게 돈을 굴리지 않아도 난 이미 돈이 많고, 사실 흥행할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지만 운 좋게 수익이 난대도 나한텐 푼돈이라."

"아, 예…. 좋으시겠어요."

"그러니까 내 목적은 애초에 드라마 투자가 아니라 고유현 씨였다고 말하는 거예요."

목적으로 삼아 줘서 감사하라는 건가? 점점 선 밖으로 내몰리는 기분을 느끼고 있던 유현에게 타인의 말을 곱게 받아들일 만한 심적인 여유 따윈 없었다.

"드라마 보는 기분이네요. 그런 얼굴로 아침 드라마 남자 주인공이 할 법한 말씀을 하시니까."

"그런 얼굴?"

"거만하고 재수 없는 얼굴이요."

"……."

"칭찬이에요. 원래 잘생기면 재수 없다고들 하잖아요. 많이 들어보셨죠?"

괜한 심술로 재수 없다고 막말을 뱉는데도 타격감이라곤 없어 보이는 그 느긋함마저 눈에 거슬렸다.

"본인이 하기 싫다는 결혼을 강제로 진행시키는 거 보면, 그 약이 어지간히 구하기 어려운 약인 거 같은데."

그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표정으로 긍정의 의미임을 알아챘다.

"사랑 없는 결혼을 하는 게 그쪽 세계에서 보편적인 일이라고 들었어요."

"……."

"그럼 그냥 결혼을 하시는 편이 모두에게 좋지 않을까요."

"그럴지도 모르지만…."

잠시 뜸을 들이던 남자는 조소를 띠며 덧붙였다. 저마다 죽기보다 싫은 일 하나쯤은 있는 법이죠.

"설마, 그 죽기보다 싫은 일이 결혼이란 거예요?"

"일단은 그렇다고 해둘까요."

*

그는 시계를 보더니 아리송한 말로 마무리 짓고 자리를 떠났다. 감독이 오겠다고 한 약속 시간이 된 까닭이었다.

그가 떠난 뒤에는 그가 망친 하루가 남았다. 감독과 예정대로 만나 대차게 오디션을 말아먹었고 상진과 잘 하지도 않는 술까지 마셨다.

그리고 이렇게 줄곧 그 만남에 다 늦은 신경을 쏟고 있었다. 미련은 손톱만큼도 없을 것처럼 쿨하게 보내 놓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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