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네임 온 잇-9화 (9/69)

(9)============================================================

9.

"드디어 드라마를 출연하기로 결정했다고요."

'드디어'? 누구한테 들은 건가? 아니면, 내가 말한 적이 있나? 역시 배우인 거겠지? 아니야, 배우가 아닐 수도 있지 않나? 연예계 몇 년을 있었는데 이런 얼굴을 모른다는 게 말이 안 돼. 그러면 이러고 있는 게 더 이상해지는데. 배우도 감독도 아니라면 어떻게 여기에 온 목적을 아는 거지?

유현은 복잡한 속내를 숨기고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무난한 인사를 되돌렸다.

"…하하, 네. 그렇게 됐어요.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남자가 입꼬리를 당겨 올리는 것을 보고 유현이 얼른 따라 웃었다. 웃는 낯에 침 못 뱉겠지. 그러자 남자의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뭐라 꼬집을 수 없는 미묘함이었다. 명백히 나쁜 징조였다.

"오랜만에 보니 근황도 물어봐 주네요."

유현은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동시에 머릿속이 바빠졌다.

뭘 어떻게 해야 하지. 저보단 나이가 많아 보이니 선배님이겠지? 일방적으로 저를 알아본 선배님이라니… 지금 이 순간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상대다. 배우들 중에는 저를 알아보지 못하면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고, 그런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았다. 진짜 선배면 어떡하지? 선배님이 대체 여기 왜 있지?

남자가 피식 웃었다.

"기억 안 나는 거 같은데."

남자의 표정이나 말투가 덤덤해서 기분이 어떤지 알아볼 재간은 없었다. 점잖은 척하다 돌변해 왈칵 성질을 부리는 게 특기인 사람들이 연예계에 한둘이 아니었다.

"아, 그건 아니고…."

경직된 웃음을 선보인 유현은 시간을 벌 작정으로 음료를 들이켜며 속으로 외쳤다. 그래, 기억 안 난다! 당신 누구세요, 누구시냐고요!

인간의 모든 스트레스는 불확실성에서 비롯된다던가. 정체가 불확실한 남자로 인해, 유현은 목을 축이고 있는 이 순간에도 입안이 바싹바싹 마르는 기분이었다. 남자의 허탈한 웃음이 유현의 상념을 뚫고 들어왔다.

"진짜 기억 못 하네…. 이건 생각 못 했는데."

"…죄송합니다."

"죄송한가요?"

남자는 죄송하다는 말에 죄송하냐고 되물었다. 유현은 선배라고 확신했다. 심지어 성격도 보통이 아닌 선배다.

"제가 요새 자꾸 뭘 잊어 먹고 잘 깜빡깜빡하거든요."

유현은 서둘러 없는 건망증 증세도 만들어 냈지만 남자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가슴에 돌을 얹은 것처럼 갑갑해졌다. 너만 입이냐고 혼이라도 날 것 같아 무심코 들었던 잔도 얌전히 내려놓았다.

"저, 음료 뭐 좋아하세요?"

"그건 왜요?"

"아, 그 더우실 거 같아서…."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더워 보였다. 저보다 심했다. 첫눈에 의구심을 가지지 않은 게 더 이상할 정도로. 재질이 가벼워 보이긴 해도 목이 올라와 있는 세미 목폴라라니, 지금처럼 푹푹 찌는 한여름보다는 선선한 날씨에 더 어울릴 차림새였다.

특이한 건 옷차림뿐만이 아니었다. 계절감이 어긋나도 한참 어긋난 긴 소매의 바깥으로 짙은 선이 튀어나와 있고, 반쯤 덮은 목에도 마찬가지로 검은 선이 삐죽 내밀고 있었다. 형태로 봐선 네임과 타투 중 하나겠지만, 목에서 팔까지 완전히 덮을 정도의 크기라면 당연히 타투일 것이다. 그런데… 저런 걸 배우가 한다고? 분장인가?

"힘들게 모은 쿠폰 주고 안 아까웠어요?"

"네?"

타투에 정신이 팔려 있던 유현이 멍하게 반문하자, 남자는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이며 웃었다.

"내가 그동안 고유현 씨 많이 찾아다녔어요. 나한테 사기 친 사람은 고유현 씨가 처음이거든."

"…사기요?"

"꼭 연락하라면서. 왜 쿠폰만 주고 도망갔어요?"

"쿠폰만 주고 도망을 치다니, 무슨 소리… 어?"

유현이 처음 발음을 배우는 외국인처럼 더듬더듬 남자의 말을 따라 해보다, 거짓말처럼 색색의 조명과 술 냄새, 음악 소리가 떠올랐다. 언제지? 펜트하우스에서였나? 그땐 도망치기 바빴고, 사람을 마주치고 대화 같은 걸 나눈 기억이 전혀 없었다. 시기만 어렴풋하게 짐작되었다. 최소 삼 개월 전…. 불현듯 투덜거리던 상진의 목소리가 스쳤다.

"다른 쿠폰도 많은데 하필 딱 열 개 모은 걸 가져가서 잃어 버리냐? 그러게 쓰지도 않을 거 뭐 신기하다고 그걸 가지고 가!"

기억이 날 듯 말 듯했다. 뒤죽박죽 엉킨 기억 사이에서 단서를 찾아낸 순간이었다.

샴페인, 디제이, 조명, 모델, 손수건….

지잉, 지잉, 지이잉―

유현이 진동을 무시하며 머리를 짚었더니, 남자는 폰을 고갯짓했다. 거슬리니 당장 해결하라는 뜻 같았다. 내키지 않았지만, 심리적 압박을 받고 있던 유현은 떠밀리듯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리고 속사포로 뱉었다.

"죄송합니다. 지금 바빠서 나중에―"

-"고유현. 너 끝까지 이러기야?"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달갑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에 잔뜩 흥분한 목소리였다. 최종익? 유현은 짜증스럽게 인상을 찌푸리고 화면을 확인했다. 매번 모르는 번호로 전화를 거는 정성이 대단했다.

금세 제게 손을 싹싹 빌며 매달릴 거라고 자신했는데 아직도 절 무시하는 걸 믿을 수가 없는 모양인지 최종익은 요 며칠 시도 때도 없이 전화질에 문자질이었다. 제 친구들이 벼르고 있다는 협박에 졸긴 했지만, 이 법치국가에서 당장은 제게 뭘 어쩔 수 있겠나 싶은 마음에 연락을 전부 무시하고 있었다.

미친놈은 전에 나한테 신고당한 거 알고도 행사 스케줄 있는 곳까지 따라와서 집착하더니…. 속으로 중얼거리던 유현은 눈을 크게 떴다. 불쑥 고개를 들어 올리고 물었다.

"엥, 제가 그쪽한테 준 게 명함이 아니라 쿠폰이었어요?"

"커피 잘 마셨어요."

"마셨다고요?"

"연락처는 없고 쿠폰만 있으니까 억울하더라고요."

쿠폰을 사용했다는 말에 파렴치한 보듯이 하던 유현의 눈빛이 양심의 가책으로 누그러들었다. 예, 잘 드셨어요…. 유현이 체념 조로 조그맣게 속삭였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여태 저를 찾으신 거예요? 명함 대신 커피 쿠폰 받은 게 열 받아서?"

"확인할 게 있어서 꼭 다시 만나고 싶었어요."

"무슨 확인을…."

"소개가 늦었는데, 주태화입니다."

자기 소개하려면 아까 할 것이지 이 무슨 뒷북이냐. 유현은 맞은편에서 뻗어온 손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느릿하게 마주 잡았다.

자신을 주태화라고 소개한 남자는 맞잡힌 손을 응시하다가, 살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역시 제 착각이 아니었네요. 다행히도."

"예?"

***

"내년 봄이 좋겠어요. 기사에는 올해 연말 예정이라고 내주시구요."

"아직 합의된 내용도 아니잖니."

"그럼 아버지가 태화네랑 합의해 주세요. 그런 거 잘하시잖아요."

기중은 이마를 짚었다.

"세준아."

"네, 아버지."

"이 결혼, 꼭 해야겠어?"

"뭐가 마음에 안 드세요?"

마음에 안 들다마다. 마음에 드는 걸 찾기 어려울 만큼 마음에 안 드는 것투성이였다.

세준이 태화에게 갖고 있는 마음은 결코 삭지 않았다. 집안끼리의 교류로 어느 정도 친분이 생길 무렵부터 시작된, 아주 오래된 것이었다. 기중은 진작에 알고 있었다.

처음 특이점을 느낀 게 언제더라. 아마도 그날일 것이다. 또래 모임에 다녀온 어느 봄날. 입버릇처럼 유상 제약을 세계 제일의 제약 회사로 만들겠다던 세준은 돌연 의대에 진학하겠다고 선언했다.

뒤늦게 전해 들었다. 또래 모임에서 주회장의 막내 손자도 난데없이 의대에 가겠다고 했다는 것을. 심지어 그 이유라는 것도, 제 손위 형제들의 경쟁을 보고 질렸기 때문이라고. 한심하게도.

그때만 해도 기중은 심각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어릴 때는 으레 그러는 법이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러나, 열다섯. 세준이 다시 한번 진로를 변경했을 때는 무언가 심상찮음을 느꼈다. 갑자기 센터 내 연구원이 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센터 내에서 이능력자들을 제외하고 이능력자들과 가장 자주 마주칠 수 있는 직업이 뭘까 고민한 끝에 나온 결론이었다. 몸이 약해 홈스쿨링을 하고 있던 세준은 결정을 내리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유학길에 올랐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기중은 확신할 수 있었다. 태화가 능력자로 발현하지 않고 일반인으로 자라나 의대에 진학했다면 세준도 틀림없이 의사가 되었으리라. 그랬다면 스물셋에 이능력 관련 석사 학위를 따는 일도, 최연소 연구소장이 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아시잖아요. 제가 왜 결혼하려고 하는 건지."

"그래, 각인했다고."

"네. 맞아요, 아버지. 그거요."

주태화. 현 우신 그룹 명예 회장이 가장 아끼지만, 경영에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어 용돈이나 받아 타 쓰는 애물이다. 센터에서 나가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기에, 자유인의 몸으로 이루고 싶은 원대한 계획이라도 있는 줄 알았더니…. 백수가 천직인 양 뒹굴거리느라 집안 행사에도 통 코빼기를 보이지 않는다던가.

첫눈에 알아보았다. 주 회장의 작품인지는 몰라도, 반골 기질이 돋보이는 물건이었다. 지금이야 반불구가 되고 기가 좀 꺾여 곧잘 네네 거리지만, 사지육신 멀쩡할 때는 시건방이 하늘을 찔러 못 봐줄 정도였다.

센터에서 활동할 때?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했었지. 하고 싶은 말은 다 해야 하는 성격이라 행정 업무를 처리하는 직원들과도 사사건건 부딪치는 녀석이었고, 현장 요원들의 견제란 견제는 다 받고도 실적은 저 혼자 다 챙겨 버려 어느 현장에서나 질시의 대상이었다. 일반 요원이었을 때는 바른말은 저 혼자 다 해 팀장의 눈 밖에 나기 일쑤였고, 팀장이 되고는 노골적으로 제 팀원들만 챙기는 일 처리에 지도부의 원성을 제법 샀다. 심지어 보스인 제 눈치도 보지 않아, 한번 얼굴 좀 보려면 수색팀 서넛을 동원해 억지로 끌고 와야 겨우 그 면상을 한번 구경할 수 있었다.

그래서 세준이 각인한 상대가 태화라는 걸 알았을 때, 기중은 진지하게 태화를 사고사로 위장해 없애는 걸 고려했었다. 남의 집 자식일 때도 별나다 했지만, 센터에서 보니 하도 이상해 괜히 엮였다가는 제 아들만 고달파지겠다 싶었던 것이다. 웬만하면 일 년 안에 생기는 파트너가 저 혼자 오 년이 지나도록 없던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각인에, 약혼에, 이제는 하다 하다 결혼까지 하겠다고 끌고 온 게 그놈, 주태화라니. 아비로서 속이 말이 아니었다. 기중은 대부분의 일을 전적으로 세준의 뜻에 따라주고 있었지만, 이 결혼만큼은 식장에 입장하기 직전까지 최선을 다해 뜯어말려 볼 작정이었다.

"여자랑 만나볼 마음은 전혀 없는 거냐?"

"좋아하지도 않는 여자랑 어떻게 결혼을 하겠어요. 심지어 전 각인자인데요."

"세준아."

"그 여자가 너무 불쌍하잖아요. 아버지."

너는? 너는 불쌍하지가 않고? 기중은 묻고 싶었다.

각인자라 하더라도 세준은 네임주인 태화에게 그렇게 큰 영향을 받지 않는다. 태화가 세준에게 어떠한 애정도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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