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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눈꺼풀이 열리고 뚜렷한 눈동자는 천장으로 향한다. 죽은 사람처럼 숨조차 고요하게 내쉬던 그의 얼굴에서 잠기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사람들이 잠드는 시간에 잠드는 것은 바라지도 않았다. 다섯 시간만, 아니 세 시간만…. 그것도 허락되지 않는다면 단 한 시간이라도 깨지 않고 단잠을 자 보고 싶었다. 빌어먹을 돌연변이에게는 그런 것조차 사치였다. 깨질 것 같은 두통이 없는 개운한 감각으로 눈을 뜬 게 마지막으로 언제인지는 기억도 나지 않았다.
"고유현…."
태화는 눈을 감기 전부터 자꾸 속으로 되뇌던 이름을 다시 끄집어내 입안에 굴려보았다.
오랜만에 느꼈던 존재 그대로의 촉감과 온기. 아무런 고통도 주지 않는 접촉. 확신하기도 어려울 만큼 짧게 지나가 버린 순간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열 개짜리 동그란 칸이 전부 채워진 종이 쿠폰은 당일에만 아연했지, 다음 날 정신을 차리고부터는 그 쿠폰을 토대로 우스운 짓거리를 제법 했다. 그 카페에 직접 찾아가 쿠폰을 내밀면서 주인을 알 수 있겠냐 물어본다든가, 일주일 정도 무작정 그 카페에 진을 치고 앉아서 들어오는 손님 얼굴만 관찰한다든가. 문득 한심해져 그만두고 누나인 태영에게 부탁해 애프터 파티 참석자 명단을 얻어다 집에 들어앉아 하나하나 대조해본 것도.
그만큼 간절했다. 겨우 가능성에 불과할지라도, 제한적으로나마 정상일 수 있다면.
다시 한번 만나보고 싶은데…. 만나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정말로 그날 느꼈던 게 제 착각이 아니었는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어슬렁어슬렁 거실로 걸어 나와 소파에 몸을 기댔다. 손이 닿을 만한 거리에 읽다 만 서류 한 뭉치가 있었다. 전신을 감싸는 나른함에 오늘은 어쩌면 잠들 수 있겠다고 침실로 들어가기 세 시간 전쯤에 보던, 고유현 본인이 알면 기함을 할 만하게 자세한 신상 명세였다.
연예인이라는 사실을 전해 들은 순간 태화는 남모르게 탄식했다. 아이돌.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런웨이에 서는 모델들처럼 마른 체형에 불그스름한 조명 아래서는 도통 가늠이 안 되는 머리 색 하며, 브랜드의 난해하기 그지없는 옷을 골라 입은 행색은 일반인인 것이 더 이상했는데도, 대단히 헛물을 켜고 있었던 것이다.
이름과 나이, 데뷔 연도 같이 인터넷 서치로도 알 수 있는 부분들은 빠르게 넘겼다.
최종익이 일방적으로 성적인 관심을 두는 듯하다? 최종익의 소문이야 익히 알고 있었다. 여성 편력이 심하고 추잡하게 놀기 좋아한다고. 남자를 좋아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다면 고유현이 그쪽 성향인 건가. 간혹, 자신을 이성애자라고 주장하던 사람이 동성애자를 만나고서야 자신이 양성애자인 걸 알게 되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까….
살면서 한 번도 관심을 가져본 적 없는, 타인의 성적 취향에 대해 한참 고민하던 태화는 갑자기 현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빠른 전자음이 들리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지호가 쩌렁쩌렁 소리를 지르며 모습을 드러냈다.
"너 현수한테 걔 캐스팅하는 조건으로 투자하겠다 그랬다며! 네가 도움을 줬네 마네 하던 걔!"
태화는 읽던 것을 한쪽에 두고 새벽같이 달려온 매형을 반갑지 않게 맞았다.
"누나가 보냈어?"
"너 또 애인 좀 해달라 그러려고 그러지?"
"응."
"진짜 미쳤냐?"
한때는 둘도 없는 친구였으나 이제는 제 아내의 앞잡이가 돼버린 지호였다. 태화는 몸을 일으켜 움직였다. 지호는 그런 태화의 뒤를 졸졸 따라 쉬지 않고 떠들어댔다.
"인간이 왜 인간인데. 인간은 학습을 한다고, 학습을! 넌 학습 능력도 없냐? 연세준이 너 그런다고 눈 하나 깜짝할 거 같아? 어차피 저러다 말겠지 하고 콧방귀나 뀌겠지. 태화야, 너 이제 그냥 연세준이랑 결혼하면 안 되냐? 대체 안 되는 이유가 뭐야. 그거라도 말해 보든가."
"……."
"까놓고 말해서, 네가 받아들이기만 하면 세상에 너네 둘보다 더 평화로운 관계가 어딨냐? 서로 각인했지, 집안 수준도 비슷하지, 친하지…."
반쯤 남은 생수통을 비우던 태화는 기어이 '평화로운 관계'라는 말이 나오자, 다 비운 통을 구겨 구석에 던져놓고 못마땅하게 보며 물었다.
"누나가 그렇게 말하라고 시켰어?"
"태영이 누나 끌어들이지 말고, 새끼야. 내가 예전부터 생각하던 거야. 너도 생각을 아주 조금만 바꿔 봐. 너 약혼 깨려고 사귀지도 않는 사람들 끌어들여서 세준이 물 먹인 거, 나도 알고 누나도 알고 세준이도 알고 다 알아."
"알라고 한 건데 모르면 안 되지."
태화가 움직이자 지호는 또 조르르 따라붙는다.
"난 가끔 집안에서 너희 둘 남자라고 반대했으면 불타올랐을까 싶어."
"그럴 리가."
"주태화. 인마. 일부러 그렇게 해로운 관계만 찾아다니는 그거, 이제 그만할 때도 안 됐냐는 거야."
"앉든가. 왜 서서 그래."
"이럴 바에야 데면데면하게라도 연세준이랑 노력해 봐. 살다 보면 괜찮아질지 누가 알아. 그냥 적당히 룸메이트처럼 살아."
태화는 제 커다란 몸을 소파에 한껏 기대고는 웃음기가 빠진 얼굴로 무감하게 중얼거렸다.
"일부러 해로운 관계만 찾아다닌다면 당연히 그건 병이야. 하지만 난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냐! 지호는 갑갑하게 구는 처남을 보며 퍽퍽 가슴을 쳤다.
태화가 원하는 파혼은 그렇게 쉽지 않을 것이다. 세준은 태화의 목숨을 구했고, 또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목숨줄을 쥐고 있으니 말이다.
어차피 대대적으로 기사까지 난 마당에 다른 대안이 없기도 했다. 몇 년 전부터 태화가 계속해서 가짜 애인을 만들어 약혼자 세준의 심기를 긁고 있긴 했지만, 그게 유효타가 될 수 있었다면 둘은 진작에 파혼을 하고도 남았어야 했다.
"아니, 그럼 이번에 걔가 네 계획대로 안 따라주면 어떡할 거야? 돈맛 좀 보고 너한테 엿처럼 진득진득 들러붙어서 주는 거 먹고 안 떨어지면 어떡할 거냐고!"
지호가 쉽게 물러설 것 같지 않자 태화는 피곤하다는 듯이 눈썹을 들썩였다.
"뭘 어떡해. 붙여놓는 거지."
"그게 말처럼 쉬워? 예쁘장하던데, 너도 그 얼굴 보고 뻑 간 거지? 주태화 너 걔 얼굴에 홀랑 넘어가서 그러는 거면, 너 그거 진짜 아니야. 다시 생각해. 안 떨어지면 붙여놔? 그런 걸 호구 잡힌다고 거야, 인마!"
태화는 할 수만 있다면 지호를 현관 밖으로 던지고 싶었다. 제 친구이자 매형은 제 아내의 명을 등에 업고 온 날은 어지간해서는 돌아가지 않았다. 겁을 주는 수밖에 없나….
마른세수를 한 태화는 긴 한숨을 내쉰 끝에 생기라곤 없는 눈으로 지호를 바라봤다.
"윤지호."
"왜, 왜."
냉담한 시선이 꼭 모르는 사람의 것 같아 지호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다. 이제 보니, 잠을 설쳤는지 흰자위도 한껏 충혈된 채였다.
"불렀으면 말을 해!"
"나는 여기에서 통용되는 상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최대한 노력 중이야."
역시 이 방법뿐이야. 태화는 가까운 사람의 저런 공포가 낯설지 않았다. 뭘 상상하는지 하얗게 질려가는 지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태화는 농담처럼 가볍게 주워섬겼다.
"아무도 안 다칠 거고, 아무도 안 죽을 거고. 꽤 나쁘지 않은 방법이잖아?"
***
비공식적인 오디션을 위한 미팅. 카페에 약속 시간보다 삼십 분 일찍 도착한 유현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구석진 자리로 가 앉았다.
"맛있게 드세요…."
종업원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내려두면서 유현을 흘끔거렸다.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꼼꼼히 가렸음에도 알아본 것 같았다. 유현이 살짝 묵례하자 종업원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놀라며 종종걸음으로 달아났다. 과민한 반응에 괜히 머쓱해져 모자를 벗고 다시 쓰길 두 번 정도 반복했다. 알아본 게 아니었나….
에어컨이 쌩쌩 돌아가는 곳이라도 목이 좁고 소매가 긴 옷은 확실히 더웠다. 네임만 아니었으면 민소매만 입고 다니는 건데. 유현이 빨대를 빼고 차가운 음료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지잉, 폰이 테이블을 밀어내며 진동했다.
[백 감독이 일이 생겨서 이십 분 정도 늦을 거 같다는데 지금 데리러 갈까?]
백 감독의 연락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얼굴을 했을 상진이 어렵지 않게 떠올랐다. 제게는 걱정하지 말라며 큰소리를 쳐 놓고 오늘 본 상진은 족히 며칠은 잠을 설친 듯 눈 밑이 시꺼맸다. 직접 운전해 가겠다는 유현을 억지로 보조석에 앉혀 제 차로 데려다주며, 오디션을 보는 당사자보다 더 긴장된 기색이었던 것도 생각해 보니 우스웠다. 떨어져도 괜찮다고 해 놓고 긴장은 본인이 다 해. 유현은 작게 키득거렸다.
상진은 유현을 카페 앞에 내려주고 회사로 돌아간 참이었다. 곧장 데리러 오겠다는 걸 보면 멀리 가진 않은 모양이지만 굳이 귀찮은 일을 하게 할 필요는 없었다.
[두 시간도 아니고 이십 분인데요. 그냥 기다릴게요.]
유현은 답장을 보내고 마저 음료를 비웠다. 나중에 감독님 오시면 한 잔 더 시켜야겠다. 물기 맺힌 잔을 기울여 얼음을 입에 털어 넣고 오독오독 씹을 때였다.
"백현수 감독 만나러 왔죠?"
감독 이름이 들리자 유현은 일어섰다. 마스크와 모자를 벗고 허리를 굽히다, 삐걱대며 멈춘다. 만나기로 한 시각보다 이십 분이나 이른 데다 방금 전에 감독이 늦을 거라는 통보 문자를 받기까지 했으니 백 감독이 벌써 도착했을 리가 없던 것이다.
누구지? 감독님 말고 다른 사람이 온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서둘러 입안의 얼음을 씹어 넘긴 유현은 고개를 들어 낯선 남자에게 눈을 맞추었다. 유현은 감독을 만나본 적이 없어 얼굴도 모르는 사이였지만 백현수 감독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백현수 감독이 저런 생김새라면, 영화판에 배우보다 잘생긴 감독이 영화를 찍는다고 소문이 자자했어야 했다.
그런 얼굴이었다. 배우 보다 잘생겼다는 수식이 어울리는. 저 스스로도 생김새에 자부심이 있으면서 만나 본 연예인이 적지 않은 유현의 눈에도 면역이 없는 외모였다.
"……."
새까만 머리칼에 비해 홍채가 훨씬 옅은 빛깔을 띨 가능성 따위를 생각하고 있던 유현은 무례할 정도로 시선이 길어졌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얼른 남자에게서 얼음 잔으로 시선을 떼어내며 인사를 건넸다.
"아, 안녕하세요."
"네. 오랜만이네요."
틀림없이 초면일 거라 믿고 있던 유현이 티가 나게 멈칫했다.
오랜만이라니. 저런 남자를 본 적이 있었다면 기억을 못 할 리가 없었다. 그래도 없는 사실을 말하는 것치곤 너무나도 평이한 어조이지 않았나. 이런저런 생각으로 엉거주춤 서 있자 낯선 남자는 웃음기 맺힌 목소리로 자리를 권했다.
"설마 내가 앉길 기다리는 건 아니죠? 그렇게까지 극진한 건 별로니까 좀 앉으시죠."
일단은 주춤주춤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머리를 굴렸다. 최근에는 집 밖으로 나가는 일이 드물었고, 원래도 사람을 만나는 일이 거의 없었으니 이런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곳은 기껏해야 시상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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