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네임 온 잇-5화 (5/69)

(5)============================================================

5.

유현은 선명한 총소리를 들었다. 술과 마약, 총 그리고 괴상한 목줄을 한 능력자를 뒤로하고 홀로 달아나던 중이었다. 자신을 대신해서 누가 죽었는지 알아버린 순간이었다.

도망친 보람도 없이 발이 묶인 듯 건물 주변을 맴돌며 경찰차가 오기만 하염없이 기다렸었다. 그 추운 새벽에 외투도, 신발도 없이, 지금 생각하면 누구에게 들킬까 무서운 엉망인 몰골로.

"사람이 죽었다곤 말 안 했어. 못 봤으니까. 오히려 경찰한테 사람이 죽었냐고 물어봤고, 죽었다고 들었고, 난 보고 들은 대로 진술했을 뿐이야."

최종익이 연행되어 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으니, 유현은 감히 그 사건을 제 불운과 연결 지을 발상조차 하지 못했다.

처음엔 단순히 일이 안 풀린다 생각했었다. 방송국 스케줄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캔슬되었고 며칠 간격으로 줄줄이 예능 출연도 엎어졌다. 계속해서 출처를 알 수 없는 지라시들이 인터넷에 떠돌았고, 또 그 지라시들은 아무 필터링 없이 기사화되었고, 그 덕에 예정되어 있던 광고와 드라마, 영화도 전부 하차당했다.

그럼에도 하산을 준비하는 등산객처럼, 기이할 정도로 내내 좋기만 했으니 이제 조금 사그라들 때가 되었다고 겸허히 받아들였다. 언제까지나 마냥 좋기만 할 수는 없는 거라고.

사생팬의 메시지겠거니 보아 넘긴 수상한 번호의 메시지를 받기 전까지는. 그러니까 그때까지는 누군가의 의도가 개입되었을 거라고는, 꿈에도.

[형 화 많이 났어]

[그러니까 반성 좀 하고 있어]

[다음에 얼마나 반성했는지 들어볼 거야]

[진정성이 느껴지면 형이 광고 한두 개 정도는 다시 하게 해 줄 거니까]

전말을 알게 된 이후에는, 최종익의 이름을 떠올리기만 해도 치가 떨렸다. 그럼에도 유현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무시했을 뿐이다. 종종 저를 불편하게 만들었음에도 지인이랍시고 간간이 어울리곤 했던 과거의 자신을 책망하면서.

유현아. 최종익은 친근하게 굴며 유현의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다.

"형이랑 내기 하나 할까? 네가 나 없이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

"그날 거기 있던 내 친구들도 너한테 화가 많이 났거든. 단단히 벼르고 있더라고."

"……."

"형은 그래도 좀 착한 편인데 형 친구들은 다 무섭다? 사람 망가트리는 걸 재미로 하는 놈들인데, 우리 유현이한테 원한까지 품고 있으니까, 쉽지 않겠지? 다 뺏고도 더 뺏고. 더는 뺏을 게 없어지면 뱉어내게 만들고, 뱉을 게 없으면 토해내게 만들지. 그게 걔네 전문이거든. 만족을 모르게 태어난 태생들이라."

"……."

"그날 봤지? 몸 파는 일은 또 출신을 안 가린다? 그 대단하다는 능력자들도 돈 떨어지면 몸 팔아. 그게 세상이야, 유현아."

잘한 거야, 잘한 일이야. 매일 밤마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 얼마나 안간힘을 썼던가. 그날이 아니었다고 해도 언제 어느 때고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고, 제가 신고하지 않았다면 어떤 죽음은 악랄한 연대 속에 조용히 없던 일이 되고 말았을 테니까.

그러나 때때로 후회가 되는 순간이 찾아왔다. 지금처럼. 얄팍한 정의감을 발휘하지 않았다면 좋았을걸. 보고도 못 본 척, 듣고도 못 들은 척 그 자리에서 곧장 도망쳐 버렸어야 했는데, 하고.

"유현아. 정말로 사람이 죽었고 경찰이 그걸 봤으면 내가 왜 이렇게 멀쩡히 돌아다니고 있을까? 응?"

"……."

"무엇보다도, 내가 네 생각대로 사람을 죽이고도 없던 일로 만드는 게 가능하다면… 유현이 네가 나한테 이러면 안 되지 않을까?"

살인사건이 분명했으나 세상은 기이하리만치 조용했다. 무릎 꿇린 채 무력하게 앉아 있던 남자의 모습이 방금 본 잔상처럼 눈앞을 스쳤다. 그 자리에 있던 누구도 벌을 받지 않고 소리소문없이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유현은 두려움을 들키지 않기 위해 이를 꽉 물고 주먹을 쥐었고, 최종익은 그를 보고 눈을 휘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 팩트는 그거 하나거든, 네 힘으로 이룬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거. 다시 말하면, 네가 할 수 있는 게 전혀 없다는 거지. 형 말, 어렵지 않지?"

"……."

"유현이 너한텐 형뿐이야. 네가 웃기지도 않는 깔끔 떨면서 형 곤란하게 만들었어도…. 나 봐. 너한테 이렇게 기회를 주잖아."

누군가는 운이 나빠 죽고, 누군가는 운 좋게 살아 도망치고, 그리고 살아남은 누군가가 안타까운 죽음을 신고한 일이, 최종익에게는 '웃기지도 않은 깔끔'밖에 안 되는 것이다. 함께 어울린 그간의 시간을 통째로 도려내고 싶을 만큼 혐오스러운 인간이었다.

"…당장 꺼져."

"알았어, 알았어. 꺼질게. 반성 다 하면 연락하고."

유쾌하게 웃은 최종익은 유현이 반드시 연락하리라 확신하는 얼굴로 돌아섰다.

***

검토가 끝난 시나리오는 첫 장이 덮여 도로 주인의 손에 넘어간다. 지호는 방금 물린 시나리오를 눈으로 가리키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현수야. 아무래도 그거… 나오기 힘들 거 같은데."

"왜, 말을 전해줄 수도 없을 만큼 형편없어?"

말을 전해달라니. 자존심 빼면 시체인 백현수의 입에서는 나올 법하지 않은 노골적인 청탁이었다. 굳이 술자리에 끼겠다고 나서는 목적이 뻔하다던 태화에게 벌컥 성을 낸 게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지호는 괜히 태화 쪽을 흘긋거리며 턱을 검지로 긁적였다.

"글쎄, 형편없다기보다…. 솔직히 시나리오만 놓고 보면 나쁘진 않지. 신선하고…."

"나쁘진 않으면?"

지호가 곤란함에 쓰읍 숨을 들이쉬자 현수는 재차 묻는다.

"나쁘지 않으면 뭐가 문젠데?"

방송계는 냉혹한 세계였다. 철저히 돈을 좇아 움직이는 곳. 자본주의 사회에서 안 그런 업계가 어디 있겠냐마는, 언뜻 창작의 자유를 존중받는 영역처럼 보인다는 데 다른 업계와 차이가 있다. 실상은 모든 것이 돈의 힘으로 움직이는데도.

친구가 아니라 제작사 관련자의 눈으로 보자면 어려울 건 없었다. 이 시나리오가 나쁘고 나쁘지 않고, 하는 평가를 논할 필요도 없었다. 이 드라마가 방영되는 일은 없을 테니까. 간단히 말해, 돈이 안 될 작품이다.

"제작 방식이 예전이랑 달라져서 영화 감독들 드라마 쪽으로 눈 돌리는 거 많아지긴 했는데… 우리 백 감독같이 잘 나가는 감독들은 한 우물만 파도 한 세월이 모자라거든."

"윤지호. 내가 영화만 찍어서 드라마는 못 찍을 거 같냐?"

"아니,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구석에서 관심 없이 술잔이나 들이키던 태화가 살짝 눈썹을 찌푸린다. 둘이 조용히 술을 마시려고 잡은 장소에 현수가 눈치 없이 들이닥쳤을 때부터 예상한 결과였다. 혹시나 했던 대로 역시나 사업 얘기가 등장하고, 지인에게는 마냥 성격이 무른 지호는 어쩔 줄을 모른다.

현수와 지호가 막역한 사이라는 걸 감안해도 더 못 봐줄 꼴이었다. 태화는 보다 못해 말을 얹었다.

"정말 왜인지 몰라 묻는 건 아닐 테고…. 이능력자를 컨텐츠 소재로 삼지 않는 거, 방송계에서 암묵적인 룰 아닌가?"

불쑥 끼어드는 음성에 지호는 계면쩍어하며 헛기침을 한다. 현수의 눈이 태화에게로 맥없이 옮겨갔다.

"센터를 소재로 다루면 편성부터 불가능해. 백현수 네가 설마 그런 기본도 모른다곤 생각 안 하지만… 몰라서 하는 부탁 아니잖아? 몰라서 그런 거면 윤지호한텐 차라리 다행이다 싶은데."

부정도 않는 무뚝뚝한 시선에 태화는 작게 혀를 찬 후 성가신 투로 말을 이었다.

"윤지호가 제작사 하나 맡는다 소문 도니까 네 부탁 하나쯤은 들어주기 쉽다 생각한 모양인데, 센터 가지고 만드는 드라마는 같이 죽자는 얘기밖에 안 돼."

"그래, 이전에 없던 소재 거리지. 리스크가 있는 건 나도 인정해. 그치만 편성이 되기만 한다면 충분히 상업적으로 가치 있는 작품이야. 윤지호, 아니야?"

"어? 어, 맞아. 재밌긴 해."

그걸 또 맞장구쳐 주고 앉아 있네. 아니꼽게 지호를 쏘아봐 준 태화는 입안에 머금고 있던 술을 넘긴다. 방안에 한동안 정적이 감돌았다.

거의 면박에 가까운 말을 듣고도 현수는 자리를 뜰 생각이 없어 보였다. 다른 목적이 있는 건데, 분명히. 미심쩍게 보던 태화가 술을 목 뒤로 넘기고 툭 물었다.

"해외 영화제에서 상도 몇 번 탔겠다, 여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계속 예술 영화 찍는 젊은 천재 감독으로 남으면 편할 걸 굳이 왜 상업 드라마 판에 제 살 깎아가며 머리를 들이밀려고 해?"

"…먼저 스타트를 끊을 작품이 필요하댔어."

의아해하는 시선들이 제게 모이자 현수는 망설이며 덧붙였다.

"이게 성공하기만 하면 내 다음으로 센터에 대한 이야기가 매체에 쏟아질 거라고. 그러니까 의지만큼이나 재능이 있어야 한다고."

"누가?"

지호가 필요성을 언급한 주체를 물었지만, 현수는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입을 꾹 다물었다. 아, 센터 일이라면 더더욱 끼고 싶지 않은데…. 지호는 심란한 얼굴로 술을 들이켰다.

"센터를 수면 위로 올리겠다?"

오히려 내내 시큰둥하던 태화가 흥미를 보이며 자세를 고쳐앉는다.

"이상하지 않아? 센터는 국가 기관일 뿐인데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고 있다는 게."

현수가 입 밖으로 낸 짧은 의혹에서 채 갈무리되지 못한 분노가 들끓었다. 태화는 얼핏 미소를 지었다. 현수가 왜 이 작품을 맡기로 했는지 감을 잡은 것이다.

백현수는 전 센터장의 외손자였다. 수십 년간 G 건설사가 연이은 악재에 끝내 매각되고 그를 막으려고 무리하게 힘을 쓴 계열사들이 줄도산했다. 온 나라가 떠들썩한 사건이었다. 재계에서 영향력 있는 그룹이 하루아침에 공중분해 된 사건은 충격적이었다. 현수에게는 가세가 기울었다는 말로는 다 표현이 안 되는 재앙이었을 것이다.

그때 그런 소문이 돌았다던가. G그룹이 망한 건 현 센터장의 반감을 샀기 때문이라는. 현수는 그 정황을 의심하는 것이리라.

저는 전면에 나서지 않고 과거에 원한이 있는 사람을 대신 내세워서 벌집 쑤시기를 하겠다니 누구인지는 몰라도 약아도 어지간히 약은 게 아니었다. 태화는 계란으로 바위 치기를 각오한 현수에게 진심을 담아 충고했다.

"현재로선 센터장을 통제할 수단이 없어. 돈도 권력도 무서울 게 없는 사람이지."

"그래. 그러니까 누군가 고발해야…."

"그게 네 생각대로 될까? 겨우 드라마 하나로."

현수는 태화의 회의적인 반문에 코웃음을 쳤다.

"주태화. 겨우 드라마 하나라고 했어? 너 같이 속 편히 산 놈은 아무것도 몰라!"

"……."

"언론까지 합심해 막는 부조리를 어떻게 세상에 알릴 수 있을지 고민이나 해봤어? 안 해봤겠지. 겨우 드라마 하나라고? 그 드라마에 뭐가 담길 줄 알고? 애초에 그 새끼들이 뭘 숨기고 있는 줄이나 알아?"

"……."

"유상 제약에서 가이딩 약물을 성공시킨 게 과연 우연일까? 센터장 아내가 유상 제약 고명딸인데 우연일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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