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네임 온 잇-4화 (4/69)

(4)============================================================

4.

"너 뭐 하는 새끼야!"

문을 열자마자 날아오는 물체에 유현은 재빨리 몸을 피했다. 간발의 차로 목표물을 비켜나 바닥에 떨어진 유리컵은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파편을 사방으로 튕겨 낸다.

유현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유리 조각을 운동화로 밀어낸 뒤 대표실 가운데로 걸어들어와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지도철 대표가 얼굴을 시뻘겋게 하고 소리쳤다.

"직원들이 쎄빠지게 뒤 닦아 놨더니 이번엔 또 뭐냐. 명색이 아이돌이란 새끼가 네임? 씨이팔, 네에임? 다 놨냐, 어?"

근처 사우나를 다녀오는 출근 루틴 덕에 깐 달걀처럼 반지레한 볼을 자랑하던 지도철의 얼굴이 웬일로 푸석했다.

"아니, 뭔데 잠도 안 자고 다 저 지랄들이냐. 솔직히 불어라. 뭘 했길래 다 헤까닥 해서는 몇 달 전 사진에 거품 물고 달려드냐?"

"……."

"애들한테 듣기로는, 네가 대우가 시원찮다 어쩐다 탈퇴하고 싶다고 입 털었다며? 너 설마 계약금 짜다고 씨팔, 정 엔터 말아먹고 빤쓰런 하기로 작정했냐? 사진도 네가 푼 거 아니야?"

유현만 보면 늘그막에 본 늦둥이처럼 예뻐 마지않던 지도철은 몇 개월 만에 적나라한 불안감을 드러내며 유현을 깎아내리기 서슴지 않았다.

"이 싸가지없는 새끼가 상도 없이…. 고유현이. 너 머리 잘 굴려라. 너 이대로 나가면 다른 데 가서 편히 활동할 수 있을 것 같지? 고유현이 앞길 막으라면 대한민국에서 이 지도철이보다 더 잘 막을 사람 없을 거라고, 씨팔, 어?"

"대표님, 진정하시고―"

"진정이고 나발이고! 너 이미 재계약한 상태고, 회사에 막대한 손실을 입힌 거부터가 계약에 위배 돼. 이런 식으로 자폭해봤자 네가 뱉어낼 돈만 불어난다고. 정신 안 차릴래?"

아이돌은 보통 5, 6년 차가 되면 재계약을 논의 중이라는 기사가 난다. 그러나 유현은 5년 동안 두 번의 재계약을 조율했지만 기사 한 줄 나지 않았다.

업계의 보편적인 계약 기간이 7년. 그럼에도 도철은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지 내칠 생각으로 2년 계약서를 내밀었다. 모든 것이 준비되고 데뷔 일자까지 정해진 상황에서 그 계약서를 마다 할 수 있는 연습생은 많지 않을 것이다. 기존 소속사에서 데뷔 목전까지 갔다가 엎어지고 트레이드 당하는 동안 스무 살을 넘긴 연습생이 네이머라면 더더욱. 게다가 데뷔가 확정된 다섯 중 혼자만 다른 계약서를 받은 것을 데뷔하고야 알았으니.

도철은 손이라도 올려 후려치고 싶은지 연신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더니 억대의 시계를 풀어내 옆에 두었다. 말 한마디 하지 않고 경고하는 것이었다. 유현은 이미 저 손에 죽기 전까지 맞아본 경험이 한 번 있었다. 저 손에 맞을 바에는, 후라이팬으로 스스로 머리를 내려쳐서 뇌출혈로 입원하기를 택했을 것이다.

"대표님!"

유현은 주먹을 꼭 쥐고 테이블을 쾅 내려치며 기합이 들어간 목소리로 불렀다. 그 소리에 저도 모르게 움찔한 대표는, 이내 당했다는 듯이 눈을 질끈 감고 목 뒤를 손으로 받치며 중얼거렸다.

"아오, 고유현 저거… 그래, 뭐! 말해."

"이번 일은 제 불찰이 맞습니다. 죄송해요. 그날 거기에 네임이 생겨 있는 줄 몰랐어요. 아침에 준비할 때만 해도 없었거든요. 저런 사진이 찍힌 줄도 몰랐고… 아니, 알았는데 네임이 찍힌 줄은, 맹세코 몰랐습니다. 정말로요."

몰랐던 거 좋아하시네…. 대놓고 빈정거린 지 대표가 코웃음을 쳤다.

"너 예전부터 그만두고 싶다고 했던 건 맞잖아. 이때다 싶어서 네가 푼 거 아니야?"

"대표님, 그랬을 리가 있겠어요? 저 고유현이에요. 마인 이유예요. 그만두고 싶단 건… 말만 그랬던 거예요. 체력이 달려서요. 말로는 뭘 못 해요. 정말로 그만두고 싶었으면 회사랑 재계약을 안 했겠죠. 아닌 말로, 제가 갈 데가 없어서 못 나가는 것도 아니고요."

"어쭈?"

"대표님 저 아시잖아요. 저 그렇게 막돼먹은 놈 아닙니다. 믿어주세요."

유현이 눈썹에 힘을 주고 강조하자 지도철은 점점 노기를 거두었다. 언짢은 시선은 그대로였지만 지도철은 다행히도 풀어둔 손목시계를 도로 손목에 착용했다. 때리진 않으려나 보다. 유현이 한숨 돌리려는 찰나, 그가 불신이 걷히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4월부터 활동 전부 끊기고 이 지랄 난 건 뭔데."

이 지랄. 지 대표의 말이 맞았다. 유현은 4월부터 지금까지 끊임없는 지랄을 겪었다. 모든 광고, 영화, 드라마가 일시에 끊겨 버렸고, 학교 폭력과 갑질이라는 터무니없는 루머에 시달렸다. 급기야는 네이머로 아웃팅까지 당했다.

유현의 생각에도 지랄이 많기도 많아 멋쩍게 관자놀이를 긁으며 원흉의 이름을 내놓았다.

"…최종익이요."

난데없이 불거진 이름에 지도철이 눈살을 찌푸렸다.

"최종익? 신문사 아들 말하는 거지? 걔가 왜."

"펜트하우스 사건이요."

"…뭐, 왜! 너 설마 거기 있었냐?"

"제가 경찰에 신고했거든요. 그래서 열 받았나 봐요."

"아니, 너 그럼 씨팔… 4월에 불려 다니던 게 그거 때문이었냐?"

눈알이 빠질 듯이 커진 지도철과 눈이 마주치자 유현이 억지로 입꼬리를 당기며 웃었다.

***

오피스텔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제가 사는 층수를 누른 후에야 긴장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최선의 상황에서도 뺨 몇 대는 맞을 것을 각오한 걸음이었지만, 의외로 지 대표는 고의성만 없었다면 상관없다는 식이었다. 유현이 생각한 최악은 지금보다 일이 더 나쁘게 흘러 영영 활동할 수 없게 되는 경우였으나, 지 대표가 생각하는 최악은 좀 다른 듯했다.

펜트하우스 사건의 최초 목격자이자 신고자인 유현을 작정하고 주저앉혀 영영 재기하지 못하도록 만들려는 외압이 있었다면, 그 말인즉 앞으로 있을 유현과의 재계약에는 아무런 장애물이 없다는 의미였다. 설령 재계약이 불발된다 하더라도 유현이 갖고 있는 치명적인 결함으로 인해 다른 회사에 둥지를 틀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게 지 대표에게는 꽤나 매력적으로 다가온 모양이었다.

"하여간에 놀부 심보시지."

어쨌거나 오늘 최고의 수확은 지 대표가 당분간은 유현에게 날것의 적개심을 드러내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다. 화가 나면 눈에 뵈는 게 없는 지 대표가 오늘 제대로 분풀이를 했다면, 오늘 저녁쯤엔 마인의 멤버 이유가 갈비뼈가 부러져 의식불명인 채로 응급실에 실려 왔다는 자극적인 타이틀의 기사가 신나게 팔리고 있을 테다. 회복 불능이 되어서도 남 주긴 아깝다는 지 대표의 심술이 섭섭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당장에는 무사할 수 있다니 섭섭함보다는 안도감이 큰 게 사실이었다.

물론 지 대표가 참아주는 기간이 길지는 않을 것이다. 지 대표가 몇 개월간 일어난 기이한 추락의 원인을 알게 되어 그에 부당함을 느낀다 한들, 정재계의 인사들을 상대로 어쩔 도리가 생기지는 않을 것이고, 더 이상 돈이 되지 않는 유현에게 끝내 어떤 태도로 나올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띵, 소리가 나며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어디 갔다 와?"

고개를 들었을 때 보이는 건 달갑지 않은 얼굴이었다. 불행의 단초이자 이 모든 지랄의 시발.

"…최종익?"

"이제 형이라고도 안 불러주는 거야?"

길바닥에서 마주친 노숙자를 제집 거실에서 발견하기라도 한 양 놀란 유현이 질색하며 물었다.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

"그러게 연락을 작작 씹었어야지."

"……."

"형은 유현이 너한테 실망했어. 그렇게 여러 번 기회를 줬는데도, 이렇게 미련하게."

몰상식과 파렴치 앞에서 짧은 탄식을 뱉어낸 유현이 걸음을 옮겼다. 현관문 앞을 가로막은 최종익을 밀어내며 도어락을 풀었다. 귀찮게 굴면 몸싸움까지 할 생각이었지만 웬일로 순순히 물러서 주었다.

"형 뒤통수쳐놓고 이러기야? 많이 서운하다."

"맞은 뒤통수 얼얼한 건 피차 마찬가지니까 앞으론 서로 엮일 일 만들지 말자고요."

유현이 현관문을 닫기 직전 문을 잡아챈 최종익이 씩 웃는다.

"고유현. 네가 나한테 이러면 안 되지."

애써 무반응으로 일관하던 유현의 입매가 일그러졌다.

끔찍했던 그 날이 떠올랐다. 3월의 마지막 주 토요일, 최종익의 생일날. 유현이 도착한 곳에선 이미 인간도 짐승도 아닌 무엇들이 제정신도 아닌 채로 소파며 바닥이며 할 것 없이 서로 엉겨 있는 상태였다. 그들을 지나쳐 위층의 vip룸을 열었을 때 그 파티의 주최자인 최종익도 이미 맛이 가 있었다.

보통은 가이드를 선호한다고 하던데, 난 좀 특별한 하루를 보내고 싶거든. 에스퍼는 우리 같은 일반인들이랑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감각이 예민하다나? 그 얘길 들으니 궁금해서 참을 수가 있어야 말이지. 성감도 그렇게 예민한지 말이야.

뭐야, 왜 그렇게 떨어? 걱정 마. 하급 에스퍼라 통제가 쉽다고 했으니까. 약도 충분히 먹였고. 이렇게… 총도 있고.

그날 최종익이 노리던 건 목돈에 웃돈까지 얹어 구해왔다는 에스퍼 뿐만이 아니었다. 유현도 잠시였지만 분명 그 방에 갇혔으니까.

난 남잔 싫어해. 여자가 좋아. 그래도 너라면 괜찮을 거 같은데. 유현이 넌 어때?

이후론 징그러운 술래잡기였다.

그런데 뭐? 이러면 안 된다고? 누가 할 소리를. 이러면 안 되는 건 최종익이었다.

"딱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어요. 가세요."

손에 힘을 줘 현관문을 닫으려 하자 최종익이 현관으로 냉큼 발을 밀어 넣는다. 유현이 날선 눈으로 쏘아보았다.

"내가 꽂아준 광고에, 방송만 몇 갠데 날 이렇게 대해? 뭐, 어디 믿는 구석이라도 따로 있는 거야?"

"하, 무슨 헛소릴…."

"그 몰랐단 표정은 뭐야, 정말로 다 네 능력 덕인 줄 알았던 거야?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거 아냐?"

유현의 손에서 힘이 스르르 빠졌다. 최종익은 닫히려는 현관문을 대신 잡고 씩 웃으며 말을 계속했다.

"유현이 너도 잘 알겠지만, 형은 관대하고 인정 많은 사람이야."

"뭐?"

"그러니까 시시한 자존심 좀 그만 부려. 네 잘못 인정하고 사과하면, 형은 너 용서해줄 준비가 돼 있으니까. 응?"

유현은 실소했다. 최종익을 거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제가 무엇에 대해 용서를 빈단 말인가. 이토록 상식 이하의 인간 앞에서, 유현은 더는 경멸을 숨길 여력이 없었다.

"사과? 쓰레기한테 해야 할 사과 같은 거, 없어."

"말버릇이 그게 뭐야. 형한테 쓰레기라니."

"반성도 사과도 최종익 네가 해야겠지만 전부 다 안 할 거 알아. 그래서 쓰레기라는 거야."

"반성? 사과? 난 모르겠다. 유현이 네가 도통 무슨 소릴 하는지…."

최종익은 저 홀로 결백한 가운데 억울한 모함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불쌍한 얼굴로 시치미를 뗐다.

"아, 그래. 네가 경찰한테 그렇게 말했다곤 들었어. 내가 사람을 죽였다고. 사리 분간이 안 될 정도로 내가 취해 있었고 약을 했고, 오른손엔 총을 들고 있었다고. …그러니까 분명 그 총으로 사람을 죽였을 거라고. 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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