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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태화는 문 앞에 서서 간판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자그만 금속 문패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카페 이름]
태화가 정신을 차린 건 산만한 남자가 떠나고 약혼자가 절 찾아왔을 때였다.
"내가 너한테 약을 주는 조건은, 약혼자로서 처음부터 끝까지 동행하는 거였어. 나갈 때도, 입장할 때처럼 함께여야 한다는 거지."
"그래. 그래서 이러고 있잖아."
"허… 너무 속 보여서 속아주기도 싫다."
"무슨 소리야?"
"오늘 약속 없던 걸로 하자."
여기에서 몇 시간을 시달렸는데, 이제 와 없던 걸로 하자니? 태화는 제 할 말만 뱉고 돌아서는 약혼자의 앞을 막아섰다. 갑작스러운 변덕을 납득할 수가 없었다.
"무슨 개소리냐고 묻잖아."
"네가 술을 못 피해, 사람을 못 피해? 고의로 술 뒤집어쓴 거, 나한테 시위하는 거잖아."
"……."
"그래 놓고 약까지 받아가겠다고 하는 거 너무 양심 없지 않아?"
그때 깨달았다. 남자가 제게 부딪히고, 절 붙잡아 기둥으로 밀치고, 어쭙잖게 닦아준답시고 몸에 손을 대기까지 했음에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걸. 저 혼자 지레 긴장했을 뿐, 어떤 통증도, 어떤 거부 반응도 없었다는 걸.
그 길로 집에 돌아와, 태화는 문제의 종이를 꺼내 들었다. 얼핏 명함인가 했던 종이는 뒷면에 파란색 스탬프가 열 개 찍혀 있는 쿠폰이었다. 장난인가? 실수? 아니면 다른 의미가 있는 건가? 샤워기의 떨어지는 물 아래서도 의문에 잠겨 있었다. 쫓기고 있었던 거라면, 대체 왜, 누구에게? 젖은 머리를 한 채 제 팔을 베고 누워서도 태화는 쿠폰을 빈손에 끼워 돌리며 파티에서의 만남을 곱씹었다. 닿았는데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가 있었지? 여태 이런 적이 없었는데.
남자에 대해서도, 남자가 준 쿠폰에 대해서도, 직접 만나 알아보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쿠폰을 발행한 카페 '이름'에 대해 검색해 보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날이 밝기만을 기다려 달려온 카페 '이름'의 앞. 후기란 후기를 죄다 찾아본 태화에게 밋밋한 외관은 이미 몇 번이나 와본 듯이 익숙했다. 태화는 쿠폰의 모서리를 만지작거리며 망설였다. 만나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막연한 계획조차 없었다.
"일단 술은 이걸로 닦으시고 거기 있는 번호로 꼭 연락주세요. 꼭이요."
꼭 연락 달라고 했으니까….
겨우 찾아낸 구실로 문을 열고 들어섰다. 딸랑, 작게 종이 울렸다.
사진으로 봤을 때보다 내부는 훨씬 좁아 보였다. 입구에서 카운터까지 몇 걸음이면 끝나는 아담한 크기에, 입구의 왼편으로 여덟 개쯤 되는 테이블이 전부였다. 태화는 가로질러 카운터 앞에 섰다.
"어서 오세요."
분주하게 뭔가를 닦고 있던 사장이 카운터 앞으로 나서며 사분사분 인사를 건넸다. 오픈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인기를 증명하듯 놀리는 자리 하나 없이 손님은 꽉 차 있었다.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수선스러우면서도 묘하게 조용했다. 여기서는 정말 커피만 마시고들 가는 건가. 사람 많은 곳은 시끄럽고 피곤하다고만 생각해 왔던 태화는 그 정적을 신기하게 여기며 매장 안을 훑듯이 둘러 보았다. 아쉽지만 당연하게도, 자신이 찾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소득 없는 시선을 거두며 그새 약간 모서리가 닳은 쿠폰을 꺼내 사장에게 내밀었다.
"이 쿠폰의 주인을 찾을 수 있을까 해서 왔습니다. 어제 우연히 주웠는데 꼭 돌려주고 싶어서요."
그 순간 조용하던 매장 안이 한층 더 조용해졌다. 누군가 입을 열면 매장 안의 누구라도 들을 수 있을 만큼.
"어렵습니까?"
처음 인삿말을 뱉은 이후로는 어딘가에 정신이 팔린 듯 보이던 사장은, 태화가 재차 묻자 제 앞에 내밀어진 쿠폰을 받아들며 더듬더듬 대답했다.
"어, 그게… 기명 쿠폰이 아니라서…."
"네."
"알아낼 방법은 없는데…."
태화는 쉽게 납득했다. 남자가 주고 간 쿠폰이 일반 쿠폰이 아닌 단골들에게만 뿌리는 쿠폰임을 안 덕에 범위를 극적으로 좁혔다고 해도, 매출이 높은 만큼 단골도 많을 터였다. 단번에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실례했습니다."
사장의 손에서 쿠폰을 회수해 주머니에 넣고 작게 묵례했다. 그러자 사장은 다급한 목소리로 태화의 발길을 붙들었다.
"저, 손님! 그분이 혹시 어떻게 생기셨을까요?"
나가려던 태화가 고개를 돌렸다. 사장은 제가 언제 넋이 나가기라도 했냐는 듯 말을 계속했다.
"이 쿠폰을 갖고 계시는 거면 저희 가게 자주 오시는 분일 텐데, 생각해 보니까 제가 찾아드릴 수 있을 거 같아서요. 제가 사장이라 단골 분들은 꿰고 있거든요."
"음…."
태화는 어젯밤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인상착의를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쏟은 술에 코가 마비될 것 같은 와중에도, 뭔가에 쫓기느라 바쁜 그 뒤통수를 관찰했으니 느낀 바는 분명했다.
"…눈을 떼기 어렵다고 해야 되나."
과감각으로 평소보다 훨씬 분별력이 떨어진 탓일까. 그에게서 받은 첫인상은, 더 적절한 표현이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남자에게 붙일 말로는 적절치 않게도 좀 예쁘장하다는 것이었다. 기억이 왜곡됐을 가능성을 감안하더라도, 다른 데 새지 못하도록 눈길을 사로잡는 외모였던 것만은 확실했다. 웬 거적때기 같은 옷을 걸치고 있더라는 사실을 도망치는 뒷모습을 보고서야 알았을 정도니까.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시면 좋을 텐데…. 키는 크신가요?"
"키는 별로 크지 않습니다. 잘 봐줘야 170 후반대에, 왜소한 골격은 아니지만 상당히 마른 편이고…."
태화는 인상착의를 줄줄 읊다가 문득 고요하다 못해 적막해진 공기를 알아채고 말을 멈추었다.
"…가게가 참 조용하네요."
***
러시 타임이 지나고 비교적 한산해진 오후 두 시였다. 사장은 설거지를 마친 후 싱크대 주위에 튄 물기를 행주로 훔쳐내며 머신 너머로 일주일 째 출근 도장을 찍고 있는 손님을 흘끔거렸다. 쿠폰의 주인을 찾아주고 싶다며 나타나 진을 치고 있는 장신의 미남자. 처음 이틀은 한두 시간이더니 그다음 날부터는 네댓 시간씩 머물다 가고 있었다.
혼자 와서도 매상은 섭섭지 않게 올려주니 쫓아낼 명분이 없었고, 무엇보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그림이 되는 탓에 비싼 장식이라도 사다 둔 기분이라 홀로 4인 테이블을 쓰는 민폐를 관대하게 눈감아 주었다.
저 손님은 쿠폰을 돌려주고 싶어 온 게 아니었다. 저건 애타게 찾는 사람의 태도였다. 처음엔 단순히 호기심이었다가 일주일쯤 되니 사장도 손님이 찾는 그 단골이 누구인지 궁금해 죽을 지경이었다.
스탬프를 모은다면 주로 테이크 아웃 손님일 것이며, 스페셜 쿠폰을 가지고 있다면 근방의 회사원으로 한꺼번에 일고여덟 잔씩 포장해 가는 일이 잦거나 혹은 혼자서 적어도 일주일에 서너 번 이상은 방문하는 손님이라는 얘기였다. 게다가 170 후반대의 마른 체형의, 눈을 뗄 수 없을 정도의 미인? 그런 여자 손님이라면 꼭 단골이 아니더라도 사장인 자신이 모를 리가 없었다. 대체 누구냐고! 궁금해 죽겠네!
손님이 왔음을 알리는 맑은 종소리가 울렸다. 사장은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가 반가운 얼굴을 발견하고 활짝 미소 지었다. 잠깐 쉬고 있던 알바생 두 명이 벌떡 몸을 일으키자 사장은 그를 만류하고서, 제가 대신 포스 앞에 서서 붙임성 있게 손님에게 말을 붙였다.
"어서 오세요, 매니저님! 너무 오랜만이신데요? 그동안 바쁘셨어요?"
"많이는 아니고 조금요. 사장님도 그동안 잘 지내셨죠?"
"저야 잘 지냈죠. 아, 오늘 금요일이니까 방송국 스케줄 가시는 거구나! 디카페인 라떼랑 아인슈페너로 해드릴까요?"
"아뇨. 당분간은 스케줄 없게 됐어요. 고정 하나 펑크가 나서. 혼자 스케줄 돌리느라 쉴 틈도 없었는데 잘 됐죠, 뭐. 오늘은 제 거 아인슈페너 한 잔만 부탁드립니다."
상진은 몇 년째 카페 이름의 단골이었다. 정 엔터사가 카페 이름에서 5분 거리의 상가를 임대해 쓰다가 지난해 건물을 새로 지어 이전하게 되면서 카페와는 거리가 한참 멀어졌는데도, 상진은 이미 든 입맛을 바꿀 수는 없다며 오늘처럼 출근길이나 퇴근길에 일부러 들러 커피를 사 가곤 했다.
여느 때처럼 카드를 받아들고 계산을 하려던 사장이 의아한 듯 물었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쿠폰 다 모으시지 않으셨어요? 제가 열 번째 도장 찍어드린 기억이 나는데."
"화끈하게 잃어버렸지 뭡니까."
"매니저님이요?"
"우리 애들 중에 하나가요. 하필이면 열 개 다 모은 거를…. 어찌나 기특한지."
상진이 참을 인자를 새기는 표정으로 애써 웃으며 말했다.
"저런…. 그럼 새로 다시 하나 찍어드릴까요?"
"네, 그렇게 해주세요. 어차피 자주 오니까 금방 모을 거고."
"사장의 권한으로 그 쿠폰 받았다 치고 오늘은 한 잔 서비스로 드릴게요. 저희 가게 단골이신데."
"헉, 앞으로도 쭉 여기에 뼈를 묻겠습니다!"
작게 웃은 사장은 상진에게 카드를 결제하지 않고 돌려주면서, 알바에게는 눈짓해 음료를 만들게 하고 스몰 토크를 이어 나갔다.
"그런데 어떤 분이 잃어버리셨어요?"
"유현이 녀석이요."
"어머, 정말요? 그런 거 안 잃어버리게 생기실 거 같은 분이 잃어버리셨네요? 어쩌다요? 가끔씩 오실 때마다 멤버 분들 중에 혼자서만 꼬박꼬박 쿠폰 챙겨오셨거든요."
"자기도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모르겠답니다. 오늘 아침엔, 저보고 형이 잃어버려 놓고 자기한테 덮어씌우는 거 아니냐고 적반하장으로 그러는 거예요. 아이구 그놈 그걸…."
애물단지 막냇동생이라도 되는 듯이 유현의 험담을 늘어놓는 상진의 뒤로, 일주일째 쿠폰의 주인을 찾는 수상한 손님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가는 건가? 좀 더 있다 가지. 사장은 손님의 손에 들린 트레이를 보며 아쉬움의 눈길을 보냈다.
"가시려구요?"
"네."
"그건 이쪽으로 주세요. 감사합니다."
사장이 제 뒤로 눈길을 던지는 것을 본 상진이 어이쿠 소리를 내며 한쪽으로 자리를 터주자, 손님은 트레이를 픽업대에 올려둔 뒤 음료 잘 마셨다고 의례적인 인사를 남기고 돌아섰다. 통화를 하는 중이었는지 곧장 나직하게 깔리는 음성에 사장은 귀를 기울였다.
"방금 받았어. 알아봐 줘서 고마워. 조만간 내가 회사 한번 들를게. 아니, 밖이야. 일이 있어서."
저도 모르게 홀린 듯 뒷모습을 좇던 사장은 어디 가서 키로 누구에게 져본 적 없을 상진이 약간 올려봐야 할 정도로 수상한 손님의 키가 크다는 사실을 새로 알게 되었다. 엄청 크구나….
뒤에서 홀더를 끼워 건네는 것을 한참 못 보고 사장이 상념에 잠겨 있자, 결국 알바생이 "사장님, 여기 음료요." 하며 작게 눈치를 준다. 사장은 막 잠에서 깨난 듯 놀라 음료를 상진에게 건네주었다.
"아, 내 정신 좀 봐. 매니저님, 여기요."
별생각 없이 서 있던 상진은 받자마자 뚜껑을 열어 크림을 한 모금 마시면서 신기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런데, 이런 봄 날씨에 아직도 목폴라를 입는 사람이 있네요. 답답할 거 같은데."
진짜네, 목폴라를 입고 있네…. 일주일 동안 보면서 그의 차림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었던 사장은 새삼스럽게 멀어져가는 등짝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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