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
그냥 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남자는 반쯤 뜬 눈으로 곁눈질하며 말했다. 왜요, 유현이 물었다.
"전부 쳐다보잖아요?"
그 말에 유현은 깜짝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정말이었다. 적어도 시야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일제히 걸음을 멈춘 채로 전부 유현과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유현이 눈을 굴렸다. 발소리는커녕 사람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고요한 공항의 높은 유리 벽 너머로 새하늘에는 새와 비행기가 날아가고 있었다. 공항 내부만 통째로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이런 건 너무 이상하잖아. 기괴한 상황에 질려 숨도 잘 쉬어지지 않았다.
지금 도망치는 게 좋을 거 같네요. 남자가 귓가에 속삭였다.
문득 기억이 났다. 이 남자는 아까 공항에서 마주친…. 유현은 급히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는데도 남자의 생김새를 알아볼 수 없었다. 이런 건 있을 수 없었다. 유현은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뒷걸음질 치며 남자에게서 멀어졌다. 빛을 발견한 오르페우스라도 된 양 한 번씩 뒤를 돌아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참아냈다. 돌아보는 순간, 자신이 몹시 곤란한 상황에 놓이게 될 것 같았다. 근거라곤 없지만, 직감이 그랬다.
공항은 텅 빈 것처럼 여전히 괴괴했고, 누군가 자신을 좇고 있지 않다는 건 소리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공항 입구에 다다를수록 뜀박질은 더 빨라지기만 했다.
입구가 코앞이었다. 절박하게 뻗은 손끝이 문에 닿으려는 찰나, 뒤에서 익숙한 부름이 들렸다.
유현아.
유현은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남자, 얼굴이 보이지 않던 바로 그 남자가 바로 등 뒤에 서 있었다. 놀란 유현이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발작하듯 상체가 벌떡 튀어 올랐다. 검은 어둠 속에서 눈을 뜬 유현은 몸을 일으켜 앉았다.
"허억, 헉, 허억…!"
공항이 아니라 침대였다. 물속에 오래 잠수해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유현은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어느 정도 호흡이 돌아온 유현은 두 손을 들어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땀에 젖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러다 헛웃음을 지었다. 아까 낮, 공항에서 그 남자를 돕지 못하고 지나친 게 마음이 많이 안 좋았던 모양이다. 악몽까지 꿀 정도라니.
유현은 이불을 걷어내고 방에 딸린 욕실로 향했다. 숙소에서 유일하게 욕실이 있는 독방이었다. 사장의 개입으로 이루어진 방 배정이었다. 현재로선 유일하게 돈이 되는 녀석. 사장이 규정한 그룹 내 유현의 위치였다. 처음에는 반발이 있었지만, 유현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잡음이 없던 멤버의 열애설이 불거짐으로써 그 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되어버렸다.
욕실에 들어선 유현은 가장 차가운 온도로 물을 틀고 어푸어푸 거칠게 세수를 했다. 조심성 없이 물을 얼굴에 퍼 나르자 티셔츠의 앞판이 금세 다 젖어 들었다. 정신이 좀 드는 기분이었다. 이왕 물이 튄 김에 땀에 전 몸까지 씻어내 버리는 게 낫겠어. 유현은 곧바로 웃통을 벗어젖혔다.
옷에서 팔과 머리를 빼내고 티셔츠에 물이 튀지 않도록 거울이 달린 수납장을 열어 올려두었다. 나머지도 마저 벗어 같이 올려두려던 유현은, 비스듬히 열린 수납장에 비친 제 모습에 천천히 굽힌 허리를 폈다. 손을 뻗어 수납장을 닫고서는, 거울에 비치는 빗장뼈를 문질러 보았다.
잘못 본 거겠지.
유현은 마른침을 삼키며 세면대 앞으로 움직였다.
"…이게 뭐야."
*
햇수로 2년 차 아이돌 그룹, 마인의 매니저 김상진은 가로등 빛만 어렴풋이 새어드는 어둠 속에서 곰 같은 몸을 구기고 앉아 술을 들이키고 있다. 소주를 서너 잔 연거푸 비우는 사이 밝혀둔 폰 화면은 저절로 어두워진다. 상진은 다시 폰을 건드려 화면을 밝혔다.
「인기는 좆도 없으면서 눈만 높아서 탑여돌만 공략하는 양심 저세상 간 새끼들. 데뷔한 지 2년 다 되어 가는데 단 한 시간도 탑백에 못 들어본 새끼들이 아직까지 주제파악 못하고 병크만 터트림. 못 뜨는 새끼들은 못 뜨는 이유가 반드시 있다. 마인 팬이 유어스라고? 아니. 마인팬은 마이너다.」
필터링이 없는 비판에 가슴이 찢어진다. 상진은 차마 못 읽겠다는 듯 눈을 질끈 감고 다시 소주를 따랐다.
술기운으로 얻은 용기에, 다음 글.
「유어스 한줌따리들이 지 살 뜯어서 앨범을 사재면 뭘 하냐고. 내돌이 음방에 나오길 하나 예능에 나오길 하나. 문자 보내면 개나 소나 다 틀어준다는 라디오도 못 타요. 시발 이게 말이 됨? 덕질 가성비가 존나 떨어짐. 그뿐이면―」
아마도 이쪽은 팬인 쓴 것 같았다. 취해서 조금씩 흐려지는 시야를 다잡고 폰을 들어 올렸다. 팬이 쓴 건 애정을 기반으로 해서인지 어휘에서 받는 대미지가 확실히 덜 했다. 상진은 조금 시큰해져서 코를 훌쩍이며 엄지를 움직여 스크롤을 내렸다. 그러자 보이지 않던 뒷내용이 나왔다.
「―그뿐이면 다행이지. 한이라도 처먹으며 미친듯이 덕질할 거라고. 근데 씨발 분기별로 내돌이 썸을 타네 연애를 하네 망돌 주제에 지랄 났음. 짜증나는 오백원 짜리 사생썰 듣게 만듦. 씨발 이렇게 덕질 난이도가 극악인 남돌 첨봄.」
망돌…. 상진은 폰을 내려놓고 어둠 속에서 머리를 쥐어뜯었다. 틀린 말 하나 없었다. 이제 그만 읽자. 흡사 고문이고 자해였다. 화면을 꺼버리고 다시 깜깜해진 식탁 위에서 잔을 채웠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들을 관리하고 있는 매니저로서도, 월급 타 먹는 일반 직장인으로서도. 나만 애가 타? 나만 이렇게 괴로워? 데뷔를 했으면 꼭대기까지 가보고 싶은 마음이 없나? 그러려고 데뷔한 거 아닌가? 탑급이 되면 내가 좋나? 지들이 좋지! 물론 아이돌이 탑급으로 성공을 하면 함께 한 매니저도 보람차고 좋기야 하겠지만, 어디 본인들만 하겠는가.
상진은 술을 목에 넘기면서 제 신세를 한탄했다. 왜 이런 모니터링까지 자신이 해다 바쳐야 하는가. 게으른 놈들. 보통은 어린 나이에 데뷔한 아이돌의 정신 건강을 위해 댓글이나 기분 나쁜 글들은 보지 말라고 충고하지만, 그건 이 숙소의 주인들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세상모르고 방 안에서 쿨쿨 잠이나 자고 있을 개자식들은 자신들의 두 눈으로 민심이 어떤지 알아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끽, 문이 열렸다. 상진이 호랑이처럼 눈을 빛냈다. 어느 놈이야, 어떤 놈이 또 몰래 처기어나가려고 해!
"형."
방에서 나온 건 유현이었다. 상진의 눈이 대번에 서글서글해졌다. 저 불쌍한 녀석….
"응, 이유야. 왜, 자다가 목 말라서 나왔어?"
건네는 목소리마저 상냥했다.
"형…."
이 새벽에 왜 궁상맞게 혼자서 술이냐고, 진작에 너스레를 떨었어야 하는 유현이 가까이 다가오지 않고 멀리서 형, 형 부르기만 했다. 어딘지 그게 애처롭다는 생각마저 들어 상진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왜, 무슨 일이야. 아이구, 우리 이유 몸이 왜 이렇게 차갑냐. 응?"
유현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놀랍게도 냉기가 훅 끼쳤다. 어, 내가 술이 너무 됐나. 상진은 몇 병이나 마셨는지 돌이켜 봤지만, 자정 즈음 공병 세 개를 치운 이후로는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술이 세긴 해도 강소주로 연달아 마시는 건 무리가 되었는지, 제대로 서는 게 힘들었다. 유현의 어깨를 잡고 서서 다시 한번 물었다.
"형 왜 불렀는데? 뭐 줄까, 응? 물? 물 줄까?"
'뭐주까, 뭐주까'만 연발하는 상진을 가만히 올려다보던 유현은 작게 한숨을 쉬더니 제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상진은 눈을 끔뻑이다가 불 꺼진 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
상진의 뇌는 이제 보이는 것들을 영상이 아니라 연속 사진처럼 인식하고 있었다. 연속된 장면이 이어지는 것도 아니고, 알콜에 전 뇌는 멋대로 몇 장면을 알아서 날렸다.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 유현이 사라져 있었다.
"이유야아, 형이 지금 밖을 좀 지켜야 하는데에…. 니네 멤버들이 또 몰래 나가면 형이 맞아 죽게 생겼걸랑…."
"와서 이것 좀 봐줘요."
방금 전에 눈앞에 있던 유현이 언제 욕실까지 갔는지, 불까지 켜놓고 그 안에서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갈지자로 걷다가 침대에 한번 정강이를 받히고 잠깐 정신이 든 상진이 욕실 문가에 섰다.
"여기 형 왔다."
"형…. 이거 뭘로 보여요?"
상진은 제 턱 아래에 다가온 팔에 맹한 눈으로 유현을 보았다.
"팔?"
"팔 여기에요."
유현이 검지로 팔뚝의 어느 지점을 가리켰다. 상진은 초점을 모으려 고개를 뒤로 빼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서서히 눈빛이 또렷해졌다. 취기가 완전히 달아난 얼굴이었다. 유현의 팔을 우악스럽게 끌어 눈앞에 가져가 확인했다. 글자였다.
"너, 너, 뭐야 이거?"
"…그럼 이거는요?"
유현이 티셔츠 네크라인을 잡아 늘렸다. 팔에 있는 게 쇄골에도 있었다.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어. 상진은 살인사건이라도 본 것처럼 두 손으로 입을 눌러 막았다.
"형, 나 어떡해요?"
나도 몰라. 이걸 나한테 물으면 어떡해, 새끼야. 넌 또 밖에서 뭔 짓거릴 하고 돌아다닌 거야. 그런 말들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하얗게 질린 유현의 안색을 보니 차마 뱉기 힘들었다.
상진은 평정심을 되찾기 위해 심호흡을 했지만 제가 뿜는 날숨에 거하게 취할 것 같았다. 결국 한 손으로는 입을 가려 올라오는 술 냄새를 막으며, 애써 차분한 목소리를 흉내 냈다.
"…그래서, 누구야?"
상진이 아는 마인의 멤버 '이유'는 착했다. 한 마디로, 다루기 쉬운 멤버였다. 오랜 연습생 기간을 지낸 덕분에 아이돌 업계 시스템에 대한 이해도가 높으며, 여러 번 데뷔가 좌절된 경험 탓인지 다른 멤버들과 달리 아이돌로서의 목적의식이 매우 뚜렷했다. 될성부른 떡잎이란 소리였다. 이유는 회사 몰래 허튼짓을 하지도 않았고, 어지간해서는 거짓말을 하지도 않는다.
"나도 몰라요."
거짓말. 상진은 유현이 처음으로 제게 거짓말을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 막 거짓말을 할 만한 사유가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타 멤버들과 달리 2년짜리인 유현은 곧 재계약을 앞두고 있었다.
"형, 저 진짜 몰라요…."
그런 불신을 알아챘는지 유현이 울먹였다.
"각인 상대를 모른다니? 그게 말이 된다고―"
상진은 뭔가가 떠올라 입을 다물고 이마를 짚었다.
"…될 수도 있겠구나."
이 될성부른 떡잎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의 유현을 욕실에서 끄집어내 침대에 앉히고 돌아서며 말했다. 일단 자라.
"상진이 형…."
"날 밝으면 병원 가자."
상진은 불안한 유현의 눈빛이 자신의 등에 붙는 걸 알았지만, 빌어먹을 숙취 때문인지 갑작스러운 충격 때문인지 골이 깨질 것 같아 더는 상대해주기 어려웠다. 그리고 마른세수를 하며 들어왔을 때와 달리 똑바른 걸음걸이로 유현의 방을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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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
"미친놈, 여기까지 따라왔… 어어?"
뒤쪽을 보며 불안 불안하게 걷던 낯선 남자는 기어이 부딪히며 태화에게 샴페인을 모조리 쏟아내고 만다.
"……."
히익. 남자는 헛숨을 들이켰다. 벽이나 기둥쯤으로 생각한 게 실은 사람이었다는 데 깜짝 놀란 듯했다. 온통 술로 젖은 앞판을 보고는 원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뜨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어 태화의 표정을 확인한다. 싸늘한 안색을 확인한 남자는 반도 남지 않은 샴페인 잔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허둥지둥 변명을 늘어놓았다.
"죄송합니다!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거든요. 여기는 무대가 잘 안 보이는…. 아, 핑계를 대는 게 아니라, 그러니까 여기가 되게 구석이라서…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무조건 죄송합니다."
저 나름대로 이유를 설명하던 남자는 말이 꼬이자 냅다 허리를 숙이며 용서를 구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에 태화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사실, 향긋한 술이 가슴팍을 적실 때까지 기척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에게도 문제는 있었으니까.
이 상황은, 저에게로 돌진해오는 사람 하나 피하지도 못할 만큼 감각이 둔해져 있음을 의미했다. 그가 최근 5년간 참석했던 어느 행사보다 인구 밀집도가 높았으니 멀쩡한 게 이상한 일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나치게 많은 자극들이 피로감을 끝도 없이 고조시켰다. 음악 소리는 계속해서 커지기만 하고, 어두운 장내를 조명이 시시때때로 색을 바꿔가며 비추고, 화장품 냄새, 향수 냄새, 달콤한 알코올 냄새, 약한 땀 냄새가 한데 섞여 알 수 없는 악취가 되어 후각을 자극한다. 그러니 좀전의 충돌이 남자의 탓이라고만 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앞을 잘 보고 걸었어야 하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가보세요."
죄송하다는데 어쩌겠는가. 일반인과 싸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세탁비를… 아니지, 새로 사드릴게요. 많이 놀라셨죠? 물도 아니고 술을…."
술을 맞은 건 짜증이 나지만, 태화는 그런 기분을 숨기고 무심하게 대꾸했다.
"가보세요. 세탁비도, 변상도 됐습니다."
"그래도 어떻게 그냥…."
"……."
"헉, 뭐야. 여기로 오는 거야? 나 본 건가?"
남자는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허리를 낮추고 목을 움츠리더니, 대체 누구 들으라는 건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내 고개를 쭉 빼고 동태를 살피기까지. 제가 사과를 하던 중이었다는 사실조차 잊은 듯했다.
태화는 그 산만함을 다소 기막힌 심정으로 쳐다보았다. 그냥 변상해 내고 꺼지라고 할까.
남자는 태화의 뒤를 기웃거리다 눈이 마주치자 작게 탄식했다. 뒤늦게 제가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지 인지한 얼굴이었다. 어색하게 웃으며 이마를 긁적였다.
"어, 어쨌거나 다시 한번 사과드릴게요. 죄송합니다…."
"……."
"아, 저한테 마침 손수건이 있었는데!"
여기 있다, 하며 남자는 해맑게 제 안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손수건을 꺼내 들었고, 태화는 제게 술이 쏟아질 때보다 더 질색하며 다가오는 손길을 피했다.
"……."
소리도 없이 재빠른 태화의 움직임에 남자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떻게 그렇게 빠르게 멀어졌냐고 묻는 눈이었다.
"아! 그게, 제가 뭘 하려는 게 아니라… 우선 좀 닦으셔야 할 것 같아서요."
남자는 눈을 깜빡이다가 뭔가 오해를 살 만하다고 생각했는지, 손수건을 쥔 손으로 열심히 닦는 시늉을 해 보였다. 누가 그걸 모를까 봐. 단지, 처음 보는 사람이 제 몸을 건드리게 둘 생각이 없을 뿐이었다.
"필요 없습니다."
"…어두워서 잘 안 보이시는 거 같은데 지금도 여기 이렇게 술이 다 흘러내리고 있거든요. 여기 바지까지."
남자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검지로 제 가슴팍 위에서 아래로 선을 그리듯 가리키며 말했다.
"신경 쓰지 마세요."
"많이 찝찝하실 거 같아서요. 정 그러시면, 여기 손수건이라도…."
"정말로 괜찮습니다."
태화는 손을 들어 최대한 차분히 거절 의사를 전했다.
"저는 괜찮으니까 이만 가보셔도…."
"잠시만, 실례 좀!"
태화가 뭘 어떻게 해보기도 전이었다. 남자는 서너 걸음 떨어져 있던 거리를 확 좁혀와 태화를 가까운 기둥 뒤로 밀어붙였다. 태화는 반사적으로 남자를 밀칠 뻔한 손을 가까스로 허공에서 거둬들였다. 일반인에게는 신체라기보다 무기에 가까운 양팔을 옆구리에 가만히 붙이고 심호흡했다. 남자는 방금 자신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상황에 놓여 있었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얼굴로 기둥 뒤를 기웃대기나 했다.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원인 모르게 가빠지는 숨을 삼키며 뱉어낸 말이 제 의도보다 날카로웠다. 그러나 남자는 눈치라곤 없었다.
"쉿!"
"쉿?"
따라서 되묻는 음성에 짜증이 서리자 남자는 정신을 차린 듯 커다란 눈을 굴리며 어물어물 말을 늘어놓았다.
"아… 죄송합니다. 세게는 안 밀었는데 아프셨어요? 혹시 아프셨으면 죄송해요…."
"……."
"…어, 근데 그거 아세요? 여기가 보던 것보다 더 많이 젖으셨어요. 방금 전에 모르고 짚었는데 여기 제 손바닥이 다 축축해져서…."
졸지에 저보다 한참 작은 남자와 기둥 사이에 갇힌 태화는 사납게 내려다보았다.
"그러니까… 제가 젖은 김에 여기를… 손수건으로 이렇게 닦아드리면 되겠다, 그런 말이었거든요?"
말을 돌리며 친근한 척 굴던 남자는, 파고들듯 똑바로 떨어지는 태화의 시선을 마주하더니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제 손에 쥐고 있던 손수건으로 태화의 셔츠를 멋대로 문질러 댔다.
"그런 말이었는데…."
태화가 어설프게 술을 닦아내는 손을 팔로 쳐내며 "비키세요." 낮게 경고하자, 남자는 그 말만을 기다린 듯 헛기침을 하며 순순히 물러났다.
"오해하실까 봐 말씀드리지만… 절대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아무래도 방금 이쪽을 본 거 같았거든요. 너무 눈에 띄기 전에 피해야 되니까 이렇게 좀 실례를 하게 된 건데요. 어, 모쪼록 이해를 해주시면 좋겠다는, 그런 뜻인데…."
"……."
"워낙 키가 크시니까 평소에도 자주 이목을 끄실 거잖아요. 아, 제가 절대 탓을 하는 건 아니고요! 그러니까, 우리가 마주 보고 있었잖아요. 의심을 받을 바에야 같이 숨는 게 나을 거 같아서…."
뻔뻔한 변명 정도는 되던 말은, 점차 뒤로 갈수록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기척을 경계하느라 주의력이 심각하게 부족해져 결국 변명도 아니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게 다 저 미친놈이 쓸데없이 눈이 좋아서 문제인 건데…. 이런 걸 보면 키가 큰 게 마냥 좋은 건 아닌 거 같거든요…. 아니, 저 미친놈은 불려 다니느라 바쁘다더니 뭔 애프터 파티에까지 나타나서 이러는지…."
남자는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다가 마침내 뭔가 반가운 광경을 목격했는지 눈썹을 이마로 당기더니 "반대로 가네?" 하고 반색했다. 그는 곧 다급하게 뒷주머니를 뒤져서, 손수건과 함께 태화의 손안에 무언가를 꼭 쥐여주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일단 술은 이걸로 닦으시고 거기 있는 번호로 꼭 연락주세요. 꼭이요."
쉼 없이 뱉는 말도 급하기야 급했지만, 당장이라도 튀어 나갈 듯 이미 반쯤 돌아선 구두코의 방향에서는 초조함마저 느껴졌다. 태화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는 아까 자신이 내려둔 샴페인 잔을 기어이 발로 차 넘어트렸다. 그러고는 인파 너머로 다급히 사라졌다.
태화는 어이없다는 듯 그 뒤통수를 지켜보다가,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제 손을 펴 남자가 뭘 주고 갔는지 확인했다.
"……."
척척히 젖은 손수건. 그리고 그 안에는 딱 명함만 한 크기의 종이가 들어있었다.
[cafe 이름
coffee & dessert
open 10:30AM - close 9:30PM
insta @cafe_name_ ]
[게시글]
[전세계 각인 네이머 중 0.1%가 겪는 끔찍한 증상(feat. 러브 타투)]
(네이머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일일 드라마 사진 캡쳐)
네임 간섭
치료법도 없음
좆같음
[댓글 108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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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다는 사람도 있고 기분만 더럽다는 사람도 있네 무슨 기준이지
└학계 피셜로 각인 상대의 집착도 기준ㅋㅋ최근에 논문도 나왔는데 상대가 다자연애 가능한 폴리아모리거나 하면 간섭 효과 없대
└진짜???? 흥미로운데...
└시간을 돌리고 싶어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
└22 죽고 싶음 왜 그딴 새끼와 엮였을까..
└인정합니다 레알 좆같음 좆보다 더 좆같음
└네임 간섭 자체는 0.1%는 아닐 걸? 정도의 차이지 대부분 느낀다고 배웠는데
└정확히 어떤 거야? 본문만 봤을 때는 딱히 병인지 모르겠어.. 설명이 너무 부족한 듯
└ㅈㄴㄱㄷ)누가 갑자기 만지면 기분 더러운 거라고 보면 됨
└잉 누가 갑자기 만졌을 때 기분 안 더러운 사람도 있어?
└ㅋㅋㅋㅋㅋ윗윗댓쓰니는 쉽게 설명한 거고 단순히 기분 문제는 아님ㅋㅋㅋㅋㅋ나름 질병코드도 나오는 병증이얔ㅋㅋㅋㅋ
└스크랩 글이라서 수정이 안 된대!! 첫댓에 글쓰니가 설명 추가해둠!!
└【네이머에게서 나타날 수 있는 말초 신경 장애의 일종이다. 오랫동안 심인성 정신 질환으로 취급되어 왔으나 최근 네이머가 갖고 있는 유전자와 말초 신경 질환의 원인 유전자의 돌연변이의 상관성을 입증하면서 말초 신경 장애로 인정되었다. 각인 상대가 있는 네이머의 약 50%는 네임간섭의 증상과 징후를 보이며, 그중에서 약 1.4%는 심각한 신경 장애를 겪는다. 10대, 20대에게서 흔히 나타나며 다양한 증상으로 나타날 수 있다. 주로 저리거나 얼얼한 느낌으로 나타나고 심한 경우에는 스치기만 해도 고통을 느끼기도 한다.
[지식백과] 네임 간섭 [name interference effect] (한국대학교병원 의학정보, 한국대학교병원)】
이런 거래 첫댓 긁어옴
└앗ㄳㄳ
└러브 타투 생긴 직후엔 좋았거든? 그 전에 네이머라서 발현 직후에 생기는.. 다들 알지? 약간 잠도 잘 못 자고 뒤척이고 두통도 오고 환청환시도 보이고.. 근데 그게 싹 사라지니까 너무 좋은 거야 근데 씨발 각인하니까 더 좆같음
└댓쓰니 댓글만 봐서는 각인하기 전이 훨씬 심각해보여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좆같아졌는지 궁금행
└원댓쓰니가 말한 증상이 한꺼번에 오는 건 아니야 그리고 발현 직후엔 심했다가 점점 나아지긴 하거든ㅎㅎ 근데 간섭 효과는 누구랑 접촉하거나 하잖아? 그럼 온몸이 사이렌이 된다고 보면 돼ㅎㅎ 몸살 왔는데 누구한테 몽둥이로 두드려 맞은 것처럼 계속 욱신거린달까
└질병이 낭만적이라고 하면 나 너무 싸패 같아...?
└222 낭만적...
└문제가 뭔지 아십니까 여러분? 각인 상대와 헤어져도 각인 상대가 여전히 날 사랑한다면(우욱 씹....) 간섭 효과가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맞아 네임 간섭 있으면 구남친 구여친이랑 헤어져도 다른 사람 못 만남ㅋㅋ
└헤엑?? 미친;;; 낭만적이라고 했던 거 취소 웩
└저거 때문에 네임 스카 생기는 사람 많잖아
└네임 스카는 또 뭐죠 선생님
└타투 지우는 것처럼 네임 지우다가 피부에 남는 흉터ㅇㅇ
└그냥 흉터라고 해서 착각할까봐 지나가다 남겨ㅠㅠ네임 간섭보다 훨씬 심각한 병이야ㅠㅠ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싶을 만큼 고통스러움ㅠㅠ
└맞아 연인이랑 헤어지고 충동적으로 러브 타투 지우려다가 실패해서 네임 스카 생기면 자살하는 사람도 있음.. 치료도 안 되고 너무 아파서
└헉... 생각보다 훨씬 심각한 거네ㅜ
└네임 간섭 치료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구 현재 처방 받을 수 있는 치료약이 있긴 한데 모두에게 효과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의사마다 말이 갈리는 중
└나도 저번에 본문에 있는 병 때문에 병원 갔는데 의사쌤 말로는 그 효과 미미한 치료약이라도 서로 급여 받겠다고 난리래..보험 처리가 안 돼서 억소리 나게 비싼데도 불구하고
└네이머 중에서 0.1프로 이하면 수치상으로 되게 적어 보이는데 이 글엔 되게 많다..
└통계적으로는 그런데 네이머 중에서도 10대, 20대에서 90퍼 이상 발견되는 증상이라니까 뭐... 여기에도 꽤나 있을 법함
└오... 10대 20대... 사랑에 눈머는 시기네 뭔가 과학적인 듯하면서도 신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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