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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행복해지는 마법 (11/11)

4. 행복해지는 마법

“나르, 거기서 뭐 해.”

나르가 멍하니 하늘을 올려 보다 작은 아이의 모습으로 변해 내게 날아왔다.

“겸이, 그대는 또 한 번 우리를 구해 주는군.”

울 것 같은 얼굴로 내 얼굴을 쓰다듬은 나르는 곧 어디로 떠날 사람처럼 다른 사람들의 얼굴을 한 번씩 바라보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불안한 건지…. 나르를 안아 주며 얼굴을 바라보자 나르가 입꼬리만 겨우 올려 웃었다.

“너 왜 그래?”

“나는 이제 떠나야 한다.”

“어디를? 나도 같이 가?”

“겸이, 나는 수많은 수인들의 영혼으로 만들어진 키메라가 아닌가.”

말문이 막혔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나를 이룬 영혼들이 제자리를 찾길 원해…. 그러기 위해선 나르가 사라져야 한다.”

씩씩한 말과 그렇지 못한 얼굴에 묘한 이질감이 일었다. 작은 몸을 벌벌 떨 만큼 두려워하는 주제에, 가긴 어딜 간다고.

“싫어, 안 돼.”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르는…. 나르는 겸이와 함께할 수 있어, 즐거웠다.”

입꼬리를 바르르 떨던 나르는 결국 눈물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뿔뿔이 흩어졌던 사람들도 가까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탐욕이 말한 의지하지 말라는 게 이럴 걸 알고 그런 건가? 나르를 보는 눈앞이 흐려져 눈을 깜빡이자 나르가 자신의 얼굴을 닦으며 다시 웃는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너 무섭잖아. 벌벌 떨고 있는 주제에 뭐가 좋다고 웃는 건데!”

“나르는 겸이가 준 이름이 너무 좋다. 겸이가 너무너무 좋다. 길마도, 계라니, 사탕이, 수박이, 꼰대까지 다 너무 좋다! 이렇게 좋은 사람들을 겸이 덕분에 만날 수 있어서 행복했다. 흑, 그, 그러니… 무섭지 않다….”

“지금, 그걸 물은 게 아니잖아.”

나르의 조그마한 손이 내 얼굴을 한 번 닦아 주더니 내 얼굴을 잡고 코를 부볐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 전부 내 가족이었다. 어버이이고, 더없이 소중한 형제였으며, 둘도 없는 친구다.”

한마디 한마디 할수록 나르의 몸을 이루고 있던 영혼이 동그란 빛을 내며 하늘로 떠올랐다. 그걸 잡아 보려 손을 뻗었지만, 내 손을 통과해 하늘로 오르는 걸 막을 순 없었다. 이미 오열 중인 사탕 누나의 울음소리만 적막한 이 공간을 채울 뿐이었다.

조금 더 예뻐해 줄걸, 이렇게 헤어질 줄 알았으면…. 권경배처럼 간식도 많이 주고, 푸름이처럼 예뻐만 할걸. 못 해 준 것들만 떠오르는 나와는 다르게 온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했던 나르는 슬퍼하는 사람들을 달래듯 웃는 얼굴로 작별 인사를 이어 나갔다.

“나의 주인을 잘 부탁한다. 아기 늑대니 나르 대신 그대들이 잘 보살펴야 해.”

“이제 영영 못 만나는 거야?”

“길마, 이제 나르는 없지만… 나르의 안에 있는 영혼들은 그대들 덕분에 다시 한번 살아갈 내일이 생기지 않았나. 그게 곧 나르고, 그 사람들 하나하나가 겸이를 사랑해 줄 겸이의 사람들이 될 것이다.”

“그건 나르가 아니잖아!”

결국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점점 사라지는 작은 몸에 얼굴을 묻고 꼭 끌어안자 나르는 익숙하게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 작은 품에서 얼마나 큰 위로를 얻었는데… 잃을 때가 돼서야 깨달은 사실에 더욱더 헤어짐이 두려웠다.

“안 가면 안 돼? 라디아탄 한 번 더 불러서….”

“겸이, 정신 차려라! 내 안에는 수많은 수인의 영혼이 있다! 이들을 다시 한번 묶어 둘 생각인가?”

어깨 위론 따스한 손이 올라와 위로하듯 쓰다듬었고, 나르가 천천히 품 안에서 날아오르더니 하늘 위로 커다란 마법진을 그렸다.

힘을 무리하게 쓰는 건지 그리면 그릴수록 더 빠르게 빠져나가는 영혼들에 이제 흐릿한 잔상만 남은 나르는 온 얼굴로 울고 있었고,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입을 열었다.

“나르의 선물이다! 그대, 흑… 나르의 가족들이 아, 앞으로 행복해지는 마법… 마법을 흐윽….”

나르의 울음이 터지자 반짝이는 마법진에서 금색의 빛이 우리들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하얗게 질린 장꾸 형이 급하게 눈을 가린 채 어깨를 들썩였다.

권경배와 푸름은 이제 서로 끌어안고 울고 있었고, 사탕 누나는 빨개진 눈으로 훌쩍이는 수박 누나의 어깨에 기대어 나르만 멍하게 올려 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웃으면서, 헤어져야 하는데…. 겸이 미안하다. 나르 계속 눈물이 난다.”

서둘러 얼굴을 닦아내곤 나르가 있는 하늘 쪽으로 팔을 벌리자 언제나 그렇듯 내 품으로 날아오는 나르와 눈을 맞추며 입꼬리를 올렸다.

나르도 내 얼굴을 확인한 뒤 따라 웃으며 이마를 맞댄 순간. 마지막 남은 영혼이 하늘 위로 올라가며 나르는 완전히 사라졌다.

예고 없이 찾아온 이별은 언제나 버거웠다. 조용한 던전 안에는 이제 훌쩍이는 소리만 가득했고, 지긋지긋하다 생각했던 퀘스트가 끝났음에도 기뻐하는 사람 하나 없었다.

먼저 정신을 차린 화환과 송금이 형이 다른 사람들을 다독였고, 햇살이 가장 심하게 울고 있는 뽀또 님을 부축하며 먼저 포탈을 빠져나갔다.

텅 비어 버린 펫 창을 확인하자 가슴 한구석도 같이 연동된 건지 허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나르 얘는 겸이라고 할 수 있었으면서 겨미, 겨미 한 건가?

배낭 안에는 나르의 흔적이 많았다. 나르를 위해 챙겨 둔 간식과, 나르가 사라지기 무섭게 배낭으로 들어온 옷과 펜던트까지. 밖으로 나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그것들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데 나를 돌아본 화환이 다른 사람들을 전부 내보낸 뒤 내가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우리 둘밖에 없어. 울어, 겸아.”

겨우 참은 눈물은 화환의 ‘울어’ 한마디에 터져 버렸다. 멋있게 보이고 싶다며 던전 앞에서 갈아입은 나르의 제복으로 얼굴을 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가슴이 먹먹했다. 아니, 먹먹하다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슬펐다. 그저 나오는 대로 눈물만 흘리고 있자 화환이 앞에 주저앉는 건지 털썩하는 소리와 안아 주는 손길에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탐욕의 말대로 의지만 하고 있지 말걸…. 수없이 드는 후회에도 할 수 있는 거라곤 이렇게 우는 것밖에 없어 그게 더 서러웠다.

“자기야, 나르는 행복했대.”

“흐윽, 응….”

마구 고개를 끄덕이자 화환이 내 어깨를 다독이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겸이가 이렇게 울면 나르가 더 슬퍼하지 않을까?”

“….”

“행복해지는 마법까지 걸어 줬잖아. 잊으라는 말이 아니야. 그냥, 지금 당장은 나르의 빈자리가 너무 크겠지만 오래 걸리더라도 조금씩 다른 기쁨으로 채워 갈 수 있지 않을까?”

“형은, 흑…. 아무렇지도 않아요?”

“슬퍼, 마음도 아프고 텅 빈 것 같은데…. 겸이가 이렇게 우는 게 더 슬퍼, 나는.”

이럴 때 코가 나와 훌쩍이며 화환의 얼굴을 보려 고개를 뒤로 빼자 걱정을 잔뜩 머금은 얼굴이 눈앞에 보였다. 화환이 양손으로 내 얼굴을 한 번 닦아 주곤 입술 위로 가볍게 쪽쪽거리며 입을 맞추더니 장난스레 웃음을 지었다.

“다른 사람들도 똑같나 봐, 다들 겸이 걱정하느라 귓속말 계속 보내.”

나 혼자 슬픈 게 아니었다. 나르를 예뻐하고 아끼는 마음은 다들 같을 텐데, 내 아픔에 미쳐 다른 사람들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었다. 이제야 보이는 채팅은 온통 겸이 괜찮냐며, 왜 안 나오냐는 물음들로 가득했고, 권경배에게서는 내려갈까? 라는 물음이 하나 와 있었다.

얼굴에 올라와 있는 화환의 손길을 털어내곤 나르의 옷을 배낭으로 넣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울었더니 후련해요. 얼른 나갈까요?”

코맹맹이 소리로 웅얼거리는 걸 용케 알아들은 화환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제야 나르가 사라진 풍경을 한 번 둘러보곤 포탈로 발을 옮겼다.

“뭐야, 뮤첼이 다시 나온 줄 알았네.”

“장꾸가 걱정했다는 소리를 이렇게 돌려 하네.”

“…잘 보내줬어?”

유난히 힘들어하는 사탕 누나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자 고생했다는 위로의 말이 돌아왔다. 고생은 나만 한 게 아니었기에 어색하게 웃으니 이제 쉬자며, 겸이 성에 초대해 달라는 말에 하우징에 파티원들을 전부 불러 모았다.

“아, 우리 수인의 구원자 칭호 만들 수 있네요.”

“맞네, 이번 던전 보상이지?”

“저 방금 상자 깠는데 여긴 코스튬 나왔어요. 수인족 전통의상이라는데요?”

“그러고 보니 뽀또 님은 칠죄종 칭호 합체 안 됐죠?”

가든 하우스에 제각각 누운 사람들의 입만 바쁘게 움직였다. 뽀또는 고개를 끄덕이곤 삼촌의 욕을 했으며, 나르가 없어진 펫 창만 하염없이 바라보던 나도 상자를 연 뒤 조합을 하려 배낭을 열었다.

“그런데 겸이 형, 뮤첼이 동상 소환해서 공격했을 때 어떻게 막은 거예요?”

“그거 라디아탄의 축복 칭호…. 모든 공격을 50% 확률로 무효화한대.”

“와…. 그래서 살아 있었구나…. 나르 커진 것도 그것 때문이에요?”

“아니, 그건 분노로 이성을 잃었다는데? 자기희생 조건 충족으로 5차 각성하고 스킬 구슬 깨니까 진정됐는데… 왜 커진 건지 모르겠어.”

“진짜… 어뉴어 징글징글하다. 형이 희생하는 거 고민하게 처음부터 히든 던전 준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겸이가 희생하지 않는 걸 바란 건가?”

“그것도 들렸어요?”

“겸이는 안 들렸어? 장꾸가 자기가 희생한다고 소리 엄청 질렀는데.”

보미 누나가 장난스레 웃으며 장꾸 형을 한 번 노려보았다.

“열한 명 희생보단 한 명 희생이 낫잖아요….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만.”

“그래도 가슴이 철렁했어. 다음 주가 업뎃이지? 8월 5일.”

“응, 휴가철이네.”

“아, 겨울이 휴가받았는데, 뒤풀이 겸 여름휴가나 갈래? 월, 화, 수.”

“언니, 모레잖아요….”

“가평 가자, 거기 겨울이 삼촌이 운영하는 데 있어. 불러야겠다.”

[수인족의 구원자]

-수인족들의 영웅으로 수인 왕국 입장 시 입장료가 면제됩니다. 하우징 이동 가능.

“어, 왕국으로 하우징 이동 가능한 것 같은데요? 입장료도 면제래요.”

마침 그걸 보는 중이었기에 푸름의 말에 고개만 끄덕였다. 시간도 늦었고, 한바탕 운 탓인지 눈도 가물가물해 말할 기운이 없었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화환만이 내 상태를 알아차렸고, 정해지면 알려달라는 말과 함께 둘이 나란히 로그아웃했다.

“자기야, 이렇게 매달려 있으면 어떻게 씻어?”

“능력껏.”

“아, 같이 씻자는 거구나. 나 벗는다?”

채하현이 티셔츠 아랫단을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접속 종료 후 매미처럼 등에 매달려 있었지만… 아직 속살까지 내보이는 건 부끄러웠기에 안고 있던 허리를 놓고, 욕실 밖으로 나갔다. 안에서 채하현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쟤는 부끄러움도 없는 건가? 경험의 차이가 이렇게 무서운 것이었다. 그래서 경력직이 월급이 많은 이유겠지.

“10분 안에 나와요, 뜨거운 물에 씻는 거 잊지 말고,”

밖으로 나올 때쯤 발갛게 익은 얼굴로 나오겠지…. 안방에 있는 욕실에서 빠르게 샤워 후 밖으로 나왔다. 채깔끔은 아직 씻는 것 같았고, 거실 소파 위로 앉으며 계속 울리는 핸드폰을 들고 앉아 알림을 확인했다.

겨울 [ㅇㅇ 그럼 수목금?]

푸름 [길마님 된대요? 2박 3일이나..!]

사탕 [놀고먹는 겜창인데 남는 게 시간이자나 될 듯]

나르가 떠난 허한 빈자리를 휴가로 메우려는 듯 한창 일정을 짜는 사람들이 보였다. 두 시가 넘어가는 시간인데 잠도 없나….

“자기야, 뭐 봐?”

“단체 채팅이요. 수, 목, 금 2박 3일로 간다는 것 같은데?”

채하현이 내 옆으로 바짝 붙어 앉으며 손에 들린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착하게도 따뜻한 물로 씻은 탓에 후끈한 열기가 느껴져 슬쩍 옆으로 자리를 옮기자 이젠 딱 허리를 안아 품에 가두었다.

“더워요.”

“나도 더웠어요. 겨울이 형 삼촌네로 간다는데, 갈 거지?”

“아뇨, 저 목요일 생일이라 작은형이랑 만나기로 했는데?”

“생일?”

고개를 끄덕였다. 형수님은 이미 선물을 사 보냈다고 했고, 큰형은 호캉스나 하라며 국내 유명 호텔의 숙박권을 보내 주었다.

“네, 3일. 그 다음 날이 부모님 기일이라 전날 다녀오기로 했어요.”

“금요일에 일찍 와서 가는 건 안 돼?”

“네, 당일은… 안 돼요.”

미리 얘기한다는 걸 잊은 탓에 삐죽이는 채하현을 다독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가만히 어깨만 토닥여 주자 내 어깨에 입술을 묻곤 삐진 척을 해댔다.

“길마님은 정모 가셔야죠.”

“이렇게 나를 애인 생일도 못 챙기는 사람으로 만드는 거야? 나랑 다녀와서 가면 안 돼?”

“안 돼요, 아직 외가 쪽 어른들이 저 보는 걸 힘들어해서…. 저 엄마 판박이거든요.”

알아주는 땅 부자네 고명한 외동딸인 엄마와 평범한 아빠. 반대를 무릅쓴 결혼 이후 처음으로 가는 가족 여행에서 사고가 난 탓에 아직 나는 용서를 받지 못했다.

채하현도 인색의 던전에서 내가 무너진 이유를 묻지 않은 탓에 정확한 사정을 모르고 있을 거였고, 나도 당분간은 말할 생각 없었다.

“그럼 갖고 싶은 거라도 알려 줘.”

“앞머리 넘기고 시간마다 예쁘게 사진 찍어서 보내 주세요.”

“자기야, 겨우 그거?”

“겨우? 어이없네. 고르고 고른 건데. 그럼 다 벗고 찍든가.”

채하현은 성욕이 없었다. 거의 일주일은 붙어 지낸 것 같은데 입을 맞추는 건 내 일이었고, 그걸 받고만 있는 게 채하현의 일이었으니 말이다. 혹시 아랫도리에 문제가 있는 건가? 합리적인 의심에 이어 이제는 많이 한 행위라 기대감이 없어져 아무렇지 않게 느껴지는 건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조금만 덜 예뻤어도…. 알겠다며 꼭 벗은 모습도 보여 주겠다는 이상한 말을 끝으로 나란히 머리를 말린 후 같은 침대 안으로 파고들었다.

“하우징 성이랑 가까운 데로 옮기고 왔어.”

나르의 빈자리에 괜히 접속하기 꺼려져 주말은 게임에 접속하지 않은 채 채하현과 딱 붙어 있었는데, 잠시 낮잠을 자다 일어나 보니 옆에 아무도 없어 짜증을 내는 중이었다.

“같이 갔다 오지. 이제 나 서운하게 하는 거예요?”

“자기야, 자기가 이럴 때마다 사랑받는 기분이야. 조금 더 집착해 줘.”

“그만하라는 거 돌려 말하는 중인 거죠?”

“…너무해, 진심인데.”

“그럼 화장실 가는 것도 허락 맡고 갈래요?”

“응, 나 자신 있어.”

뭐야 이 미친놈은…. 예상 시간까지 적어 두라는 말이 턱 끝까지 맺혔지만 차마 나오지 않았다.

“좀 있으면 2박 3일이나 못 보는데, 나 몰래 이럴 거예요?”

“그래서 말인데… 겸이 생일에 내가 집으로 데려다주고 다시 데리러 가는 건 어때?”

“와, 그거참 별로네. 지금 잘하라는 말이었는데, 이렇게 받아친다고?”

“그냥, 같이 살까? 옷만 가져오면 되는데.”

채하현의 말에 고개를 숙여 내가 입고 있는 옷을 내려다보았다. 이미 집으로 돌아가지 않은 지 일주일이 다 되어 가는 시간이었기에 유니폼처럼 입고 있는 옷은 채하현의 옷이었다. 내 몸에 맞춘 듯 딱 맞아 불편함이 없었기에 잠시 잊고 있었었다.

“…너무 편해서 잊고 있었는데, 전 이만 집에 가 봐야겠어요.”

“옷 가지러?”

“아뇨, 돌아가겠다는 말인데.”

“아하, 이제 겸이 집으로 내가 가는 거야?”

그렇겠냐고…. 자기는 틀린 거 없다는 듯 웃는 얼굴을 보자 말문이 막혔다. 동거라니. 하긴, 결혼을 전제로 하는 연애긴 하니까 이상한 일은 아니지 않나? 며칠 같이 살아서 그런지 채하현의 머릿속에 있는 꽃밭이 조금 옮아 온 것도 같았다.

“짐 싸?”

“됐어요. 뭘, 수고스럽게…. 여기 있어요. 그냥.”

“네, 여기 있어요. 어뉴어 접속은 언제 할 거야? 왕국에 점점 수인 NPC 생기던데.”

“… 원래 있을 장소가 거기였나? 지금 들어가 볼까요? 형 하우징도 구경하고.”

“마을 입구에 우리 동상도 만드는 중이더라.”

“그럴 만하죠, 그 고생을 했는데….”

캡슐 안으로 들어가자 익숙한 부유감과 함께 로그아웃했던 성 안에서 접속되었다.

“겸이 형! 오랜만이에요!”

“겸인 휴가 못 온다며? 우리 겸이 실물 한 번 보나 했는데….”

거긴 이미 다른 사람들이 점령 중이었다. 일단 쿨이 끝난 히든 스킬부터 쓰고, 북적이는 사람들을 둘러보다 가장 작은 외형으로 몸을 줄였다.

“혹시 하우징 여기로 옮기신 거예요?”

“아니… 이젠 여기 아니면 이상해서….”

보미 누나와 겨울이 형, 송금이 형에 푸름이까지…. 자기 집처럼 편하게 있었다. 마침 채하현도 안으로 들왔다.

“이젠 우리가 없으면 허전하지 않아요?”

“그럴 것 같긴 한데…. 다른 사람들은요?”

“곧 올걸? 소리, 코코, 장판 오빠 데리고 온댔으니까. 이제 퀘스트 알려 주고, 세계전 모여서 보려고.”

세계전이 오늘이었나? 고개를 끄덕이는데… 성엔 넓은 방이 널렸는데 굳이 좁은 가든 하우스에서 옹기종기 모여 그걸 봐야 하는지 의문이 궁금했다.

“야, 겨미…. 난 왜 안 불러줬냐. 나 그저께 처음 와 봤잖아.”

“어? 보미 누나는 거의 매일 계셨는데, 얘기 못 들었어요?”

“안 보인다고 했더니….”

화환과 빈자리에 가 앉으며 대답하자 겨울이 형이 보미 누나를 노려보았다.

“넌 매일 장판 님이랑 던전 돌았잖아. 누구한테 눈을 그렇게 뜨는 거야?”

꽉 잡혀 사는 건 달이 형만이 아니었나 보다. 눈을 내리깔며 보미 누나의 곁에 붙는 겨울이 형을 보다 보니 다른 사람들이 전부 모였다. 곧 세계전이 열린다는 알림이 뜨는 걸 본 송금이 형이 커다란 유리를 벽에 세워 놓았다. 도대체 이 게임에서 제작자의 한계는 어디인 건지….

화면에 제일 먼저 보이는 건 거대한 콜로세움 경기장이었다. 세계전은 5:5 pvp였고, 8개국이 참석해 각 나라당 세 번의 경기를 치러 우승자를 뽑는다고 했다. 솔직히 별로 관심이 없었다. 이제 주민들이 생기기 시작한다고 했으니 그걸 보러 가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하지만 여기 모여 한마음으로 훈민정음을 응원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는 것도 그다지 나쁘진 않았다. 쿠션을 긁어 편하게 누울 공간을 만드는데 화환이 내 배를 들어 제 무릎 위로 올려놓곤 등을 쓰다듬었다.

[귓속말]유우 : 편하게 누울 수 있게 만들었는데..

[귓속말]화환 : 겸이 자리는 여기 아니었어?

그건 그렇지. 화환의 다리 위로 엎드리자 등을 만지던 손이 점점 내려가 꼬리와 이어진 허리 부근을 뭉근하게 쓰다듬어댔다. 거기가 신기하긴 하지…. 백설이가 우리 집에 왔을 때 나도 만져 본 적 있는 곳이었기에 그냥 내버려 두었다.

[귓속말]간계밥 : ㅇ

[귓속말]유우 : ㅇ?

[귓속말]간계밥 : 목요일에 다녀오는 거?

[귓속말]유우 : ㅇ

[귓속말]유우 : 조케따 여름휴가

[귓속말]간계밥 : 왔다 얼굴 비추고 가지

[귓속말]유우 : 귀찮잖아 왔다갔다

[귓속말]간계밥 : 전날이랑 다음날은 머하게 길마님도 온다며

[귓속말]유우 : 호캉스

권경배가 부럽다는 얼굴로 나를 한 번 보곤 고개를 저으며 세계전이 한창인 화면으로 눈을 돌렸다.

[귓속말]간계밥 : 우리 집 한 번 들렀다가 가, 엄마가 미역국 만들어 두겠다고 너 오면 들려 보내라더라

도대체 그런 아기자기한 어머니에게 어떻게 권경배 같은 곰이 태어난 걸지 이해할 수가 없어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첫째 아들은 엄마를 닮는다는 것도 이젠 옛말인가 보네.

훈민정음의 아슬한 우승을 거머쥔 세계전이 끝나 왕국을 하 바퀴 둘러보러 밖으로 나왔다. 그곳엔 화환의 말대로 마을 주민들이 몇 명 살고 있었다.

나르가 찾아 주었던 무기는 아직 사용할 수 있었는데, 나르의 축복이 없어서인지 전보다 능력치가 떨어졌다며 보미 누나가 특히 서운해했다. 그리고 250 마지막 메인퀘를 끝내자 피안의 여름 휴가일이 다가왔다.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없어도 하고.”

“네, 네. 오늘도 그 말 10번 채울 거예요?”

“응, 혼자 있기 싫으면 어떻게 하라고?”

“보고 싶어요.”

“새벽이라도 달려갈게.”

내 짐을 챙기기 위해 우리 집에서 같이 자는 새벽 내내 세뇌하듯 중얼거린 말에 나도 모르게 대답이 나왔다. 내 정답에 채하현은 예쁘게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곤 입까지 쪽쪽 맞추더니 먼저 밖으로 나가 버렸다. 여우 같은 새끼.

호텔까진 채하현의 차를 타고 가게 되었다. 겸사겸사 같은 곳으로 가는 권경배까지 태워 도착한 호텔 입구, 제 몸만 한 가방 안을 뒤적여 꺼낸 보온병을 내 손에 들려 주던 권경배가 멋쩍은 듯 눈을 피했다.

“미역국, 엄마가 주래.”

“매번 안 챙기셔도 되는데….”

“먹고 빈 건 반납하고, 잘 다녀와.”

손을 저어 주곤 채하현에게 연락한다는 말을 끝으로 둘을 태운 차가 멀어졌다. 호텔 입구 혼자 덩그러니 서 있는 건 이상한 기분이었다. 예전엔 이런 기분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채하현에게 온 첫 사진은 막 도착한 펜션 입구에서 찍은 단체 사진이었다. 이번 정모에 참여한 사람은 봄, 수박, 사탕 누나와 겨울, 송금이 형, 채하현, 푸름 권경배, 뽀또 님이었고, 하나같이 웃는 얼굴로 카메라를 보고 있었다.

“좋겠다….”

적막한 실내, 들리는 건 전자기기 소리와 내 숨소리가 다인 이곳에서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유난히 크게 들렸다. 채하현의 얼굴을 확대해 화면이 어두워질 때까지 멍하게 보기만 했다. 조금 귀찮게 굴어서라도 오늘은 따라갈 걸 그랬나….

아무것도 하기 싫어 그저 누워 있다 보니 어느새 해가 졌다. 그다음 받은 사진은 총 세 개로 귀찮은 얼굴로 마트에서 찍은 것과, 다른 사람이 찍어준 듯한 수영장 안의 채하현. 그리고 저녁을 먹는 듯 테이블이 다 나온 단체 사진이었다. 역시 내가 없어도 세상은 잘 돌아가는구나.

채하현 [자기야, 저녁 뭐 먹어?]

룸서비스로 주문한 술이 나오지 않게 품에 안곤 미역국이 올라 있는 테이블 사진을 찍어 채하현에게 보내주었다. 곧바로 확인한 건지 꼭 저 같은 화난 토끼 이모티콘은 여러 개 보내는 핸드폰을 내려다보다 잔 가득 술을 부었다. 이상하게 시간이 안 갔으며, 지겨웠다.

나 [재미있어요?]

채하현 [겸이 보고 싶어서 별로]

채하현 [허전해]

뻥 치네. 그렇게 웃는 사진을 보내 놓곤…. 잠시 입을 삐죽이다 술을 들이켜며 조금 전 받았던 사진만 들여다보고 있는데 전화가 걸려 왔다.

“네.”

[자기야, 나 안 보고 싶어?]

“오려고?”

[궁금해서. 나 술 안 먹는 거 알지?]

“알게 해 줬죠. 형이 몸으로.”

[부르면 바로 갈 수 있다고.]

“그럴까 봐 일부러 안 부르는 건데? 남은 시간 재미있게 놀아요. 앞으론 안 보내 줄 거니까.”

[내가 말했지, 이럴 때마다 설렌다고요. 집에서 겸이만 보고 살아도 좋다니까.]

“진짜 묶어 둘 수도 없고…. 가서 저녁이나 먹어요.”

[네에, 겸이도 미역국 많이 먹고, 좋아해. 알고 있지?]

“저도 많이 좋아하는 거 알고 있죠? 나중에 봐요.”

얼굴로 몰리는 열에 서둘러 전화를 끊곤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오랜만에 술을 마신 탓인가? 어떻게 좋아한다는 말이 이렇게 불쑥 나올 수 있는 거지…. 울리는 메시지 알림을 무시한 채 연달아 술을 들이켜며 채하현이 없는 첫째 날 밤이 흘러갔다.

“못 살아. 호캉스 하라고 보내놨더니 술만 처먹었어?”

작은형의 잔소리에도 쉽게 이불을 벗어날 수 없었다. 결국 몸을 일으켜 자리에 앉은 건 작은형이 숙취해소제를 손에 쥘 때였다. 물과 함께 약을 삼킨 뒤 샤워를 하고 나오자 한심하다는 작은형의 얼굴과 함께 다시 시작된 잔소리를 묵묵히 흘려듣는 중이었다.

“너, 이모님은 왜 당분간 쉬라고 한 거야? 집에도 없었다며.”

“우리 집 이모님이랑 내통해? 그건 어떻게 알았어?”

“이모님 월급이 어디서 나간다고 생각한 건데….”

“요 며칠 다른 데 있었어.”

“어디, 경배도 모른다던데.”

“채하현네….”

“잘되는 중인 거야, 스토킹 중인 거야?”

“잘되는 중. 만나기로 했어.”

작은형이 크게 한숨을 쉬며 머리칼을 흐트러뜨렸다. 응원해주는 게 아니었나? 순간적으로 드는 적막에 눈치만 살피던 중 작은형과 눈이 마주쳤다.

“겸아, 너희가 암만 사랑이라고 떠들어 봤자 주위에선 변태 짓이라며 손가락질할 거야. 너 이런 것까지 생각하며 만나는 거야?”

“…형이 그랬잖아, 살다 보면 손가락질도, 욕도 먹는 거라고. 10명이 나를 욕해도 1명만 믿어주는 사람이 있으면 옳은 인생이라고. 나는 옳은 인생을 사는 중인 거야.”

“그래서 지금 행복해?”

“지금은 좀…. 채하현 못 본 지 하루째라.”

작은형의 얼굴이 점점 굳어갔다. 그게 우스워 낄낄거리다 보니 어느새 나를 노려보는 눈초리에 어깨가 움찔 떨려 왔다.

“같이 있으면 좋아.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서 걱정될 만큼. 걱정하지 말고 나 응원해 줘, 형.”

대꾸 없이 내 얼굴만 보던 작은형이 손을 뻗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언제 이렇게 컸지 하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스물셋인데, 조금 어릴 뿐 다 컸지. 당당한 얼굴로 웃으니 가만히 따라 웃어 주던 형이 ‘셋이서 밥이나 한번 먹자’ 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근 2년 만에 찾은 납골당은 유난히 조용했다. 눈높이에 위치한 부모님의 자리에 오는 길 산 꽃을 넣어 두곤 한참을 멍하게 보기만 했다.

겸이 이만큼 커서 군대도 다녀오고, 여우 같은 남자친구도 생겼다고, 나중에 아주 나중에 한 번 데리고 올 테니까 예쁘게 봐 달란 인사를 하며 말이다.

호텔로 돌아와 늦은 점심을 먹은 작은형이 백설이 데리러 갈 시간이라며 흰 봉투를 생일선물이라 준 뒤 떠났다. 봉투는 그대로 테이블 위에 둔 채 침대에 엎드려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려는데, 때마침 전화가 왔다.

[자기야, 뭐 해?]

“누워 있어요.”

[내가 보낸 거 봤어?]

“아니, 좀 전에 형 가서 이제 핸드폰 들었는데?”

[빨리 봐 봐요.]

스피커폰으로 돌린 뒤 메시지를 확인하자 다섯 개의 사진만 덜렁 올라와 있었는데… 아무래도 채하현은 변태가 맞았다. 일어나 막 찍은 사진 다음으로 거의 벗고 찍은 거울 셀카였다. 이어 아침 식사와 가슴이 훤히 보이는 수영장에서 찍은 사진과 조금 전 온 가운 사이로 속살이 보이는 사진까지…. 아니, 내가 얼굴을 보내라고 했지 이렇게 헐벗은 사진을 보내라고 했었나?

“형 변태예요?”

[아니, 나는 겸이 말을 잘 들은 건데.]

빠르게 사진들을 저장한 뒤 피안의 단체 채팅을 확인하자 전부 환하게 웃는 사진과 음식, 노는 모습을 담은 동영상에 기운이 빠졌다. 여기는 이렇게 지루한데 다들 너무 즐거워하는 모습이 거리감 있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나도 형 따라갈걸…. 지겨워요”

[그래서, 그것 말고 더 할 말 없어요?]

눈만 꼭 감았다. 어차피 채하현은 싫다고 해도 내일이면 내 옆에 붙어 있을 건데, 두 번 일을 시켜도 될까? 아랫입술만 짓씹으니 웃음기 사라진 채하현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 왔다.

[내가 대신해 줘?]

“…보고 싶어요, 형.”

[네, 20분 뒤에 짐 챙겨서 내려와요.]

“뭐야, 오고 있었어요?”

[응, 형 왔다길래 일찍 다녀올 것 같아서.]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똑똑할 수가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연륜의 차이인가? 늘어 놓았던 짐들을 차곡차곡 가방으로 밀어 넣곤 마지막으로 형이 준 생일선물을 제일 위로 얹어 두었다.

채 10분도 지나지 않았지만 일단 가방을 메고 밖으로 나오자 채하현의 웃음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벌써 나가는 거야?]

“네, 뭐 마실래요? 1층 제과점 유명하다길래 간식 좀 사려고.”

하루 늦게 참석하는 건데 빈손으로 갈 수 없지 않은가…. 타르트를 나눠 먹을 만큼 포장한 뒤 커피 두 잔을 주문해 채하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얘는 왜 이렇게 안 오냐며 빨대만 씹어대다 반쯤 비웠을 때 걸려 온 전화에 밖으로 나가 바로 앞에 보이는 채하현의 차 조수석에 올라탔다.

“생일 축하해.”

“새벽에도 해 준 말이잖아요.”

“그때는 얼굴 안 보고 있었잖아요.”

손에 들린 짐을 뒷좌석으로 옮긴 채하현을 한 번 안아 준 뒤 케리어에 있던 음료를 컵홀더에 넣어 주었다.

“이게 끝이야? 하루 만에 봤는데?”

날이 갈수록 뻔뻔해지는 것 같은 건 내 착각인가? 어느새 얼굴을 내 쪽으로 돌린 채하현이 뾰로통한 얼굴로 ‘뽀뽀’하고 중얼거렸다.

진짜…. 예뻐서 해 준다. 양손으로 채하현의 볼을 잡고 입술을 한 번 붙였다 떼는데, 정확한 위치 확인을 위해 내리깔고 있던 눈을 들어 올리자 기다렸다는 듯 채예쁜이와 눈이 마주쳤다.

한동안 시선이 진득하니 얽혔고, 곧이어 채하현의 고개가 비스듬히 돌아가며 점점 가까워졌고, 눈을 감아야 하나 고민하던 중 입술이 아닌 코끝에 말캉한 채하현의 콧망울이 부벼져 왔다.

“빨리 출발해요, 해 다 지겠네.”

놀라라, 키스라도 하는 줄 알았네. 싱겁게 떨어지는 얼굴에 기분이 나빠져 채하현의 얼굴을 밀어낸 뒤 안전띠만 맸다. 채하현은 하라는 운전은 안 하고 웃는 얼굴로 글러브 박스를 열어 작은 상자를 내 손 위에 올려 주었다.

“생일선물.”

“다 벗은 사진이 아니라 이게?”

“응, 아쉬워?”

“아뇨, 너무 생각지도 못한 선물이라….”

케이스 열자 그 안에 든 건 손목시계였다. 이거 사러 나온 김에 나를 데리러 와 준 건가? 한참 내려보고만 있자 빤히 보고 있던 채하현이 내 손에 들린 상자에서 시계를 꺼내 손목에 걸어 주었다. 그러곤 할 일을 마쳤다는 듯 운전대를 잡고 정모 장소로 출발했다.

뭐라고 말하면 되지? 고마워요? 매일 끼고 있을게요? 머릿속이 복잡해 손을 꼬물거리다 채하현의 놀고 있는 오른쪽 손을 잡았다.

“이따 뽀뽀 많이 해 줄게요.”

고르던 말 중 제일 별로인 말이 튀어나오자 채하현조차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고, 귀가 화끈거렸다.

“그거 말고, 어제저녁에 자기 전에 한 말 또 해줘.”

“…나중에 봐요.”

“더 전에요.”

“좋아해.”

“잘 안 들리는데?”

장난스러운 말에 의자에 등을 기대곤 창밖만 내다보자 채하현이 내 손을 한 번 꽉 잡았다.

“좋아해요, 형.”

그 뒤로 몇 번이나 좋아한다고 말했는지 모른다. 채하현은 지겹지도 않은지 계속해서 못 들었다 거짓말을 했고, 종래엔 거의 소리를 지르듯 좋아한다는 말을 해야 했다.

어느새 도착한 펜션은 사진에서 봤던 것과 같이 깨끗하고 예뻤다. 벌써 저녁 준비를 하고 있던 사람들과 돌아가며 인사를 마치자 꼭 닮은 부부가 내 양옆에 서 쉼 없이 쫑알거리는 것만 빼면 모든 게 다 좋았다.

“겸아, 뭐 먹고 이렇게 컸어?”

“야, 겨미. 너 수인화 할 수 있다며…. 나 왜 계속 소외시켜?”

“아, 좀! 한도진. 겸이 나랑 얘기하고 있잖아.”

“…누나 혼자 얘기 중이면서.”

게임과 똑같은 모습에 결국 웃음이 터졌다.

“형, 누나는 어떻게 만나게 된 거예요? 게임에서 만났다셨죠?”

“응, 3년쯤 전에 결장 5인 pvp에서 적으로 만났는데, 누나가 나만 따라다니면서 죽였거든….”

“언제 적이야 그게. 원래 힐러부터 따는 거 국룰인데, 쟤가 얼마나 욕을 하던지….”

이게 그건가? 혐관으로 시작된 사랑?

“그다음이 구인 글이었지? 보미 누나 고정팟 만든다고 올린 글에 내가 찾아갔어. 적으로 만나기 싫었으니까.”

“맞아, 그때 사탕이 길드 만들 거라고 바빠서 결장 못 한다고 했었거든.”

“그 뒤로는 뭐…. 게임하다 나도 길드 들어오고 첫 정모 때 만나서 따라다녔지…. ”

“옛날 생각난다. 그땐 귀여웠는데…. 누나, 누나 하면서 좋다고 매달렸잖아.”

그 뒤론 싸움 같은 투닥거림이 이어졌다. 귀여운 맛이 없어졌다는 보미 누나의 푸념에 발끈한 겨울 형이 삐죽이며 대답하는데, 안 봐도 뻔한 승패에 고기를 굽는 채하현의 옆으로 걸어갔다. 부부 싸움은 남이 끼어드는 게 아니지….

“형, 안 더워요?”

“나 좀 익은 것 같은데 겸이가 먹어 줄 거지?”

“헛소리하는 거 보니까 멀쩡하네.”

차마 가까이 갈 엄두가 안 나 멀찌감치 떨어져 보고만 있으니 채하현은 내가 말을 건 것만으로도 좋다며 웃었다. 사탕 누나가 이상한 얼굴로 우리를 보더니 푸름의 옆구리를 푹푹 찔렀다.

“길마님 이제 제가 구울게, 가서 좀 드세요.”

거절이라는 걸 모르는 채예쁜은 푸름에게 집게를 쥐여 주고 자리에 앉자 본격적인 술판이 벌어졌다.

“겸이 여기 올 줄 알았으면 케이크라도 사다 둘걸… 선물을 우편으로 보냈는데.”

“괜찮아요, 1인 가구라 원래 생일에도 케이크는 안 먹어서….”

“그래도, 생일인데.”

수박 누나는 아쉬운 목소리로 중얼거리더니 내 앞으로 고기를 산더미처럼 쌓아 주며 케이크 대신 고기 많이 먹으라며 술잔을 채워 주었다. 이 사람들은 어제도 많이 먹었다고 했는데 오늘 역시 내일이 없다는 듯 마시네. 알딸딸하게 술이 오른 상태에서 당연하게 게임 얘기나 흘러나왔다.

“나 어뉴어에서 지금까지 한 것 중에 수인 구원이 제일 재미있었던 것 같아….”

“저두요. 이렇게 장기적으로 한 건 처음이라 그런가? 끝났다는 생각 하면 계속 좀… 찡해요.”

송금이 형의 말에 푸름이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히 나 또한 그렇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보미 누나가 나를 힐끔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맞아. 나르가 그랬잖아. 자기 영혼은 겸이를 거쳐 간 많은 사람이 선물로 준 거라고…. 그 말에 따르면 나중에 업뎃 끝나고 다시 만날 수 있지 있는 거 아닐까?”

“그러고 보니 이상하긴 했어. 뮤첼이 만든 키메라인데 어떻게 라디아탄의 힘을 빌려 쓸 수 있었지?”

채하현의 말에 제일 먼저 떠오른 건… 예전 수인 왕국을 재건했던 던전이었다. 별의 아이의 영혼을 모으던 뮤첼과 유일하게 등장했지만, 얼굴이 보이지 않았던, 작은 두 번째 별의 아이…. 등 뒤로 소름이 끼쳤다. 만약 그 애가 나르가 맞다면 라디아탄의 힘을 빌릴 수 있지 않았을까?

“… 전에 구름이 누나랑 갔던 히든 던전에서 본 영상에서 두 번째 별의 아이가 나왔다고 했잖아요. 그게 나르였을까요?”

“그럼 나르도 돌아오는 거 아니에요, 수인족 왕국에?”

“업뎃 끝나면 알 수 있겠지. 혹시 모르니까 너무 기대하지 말고….”

가장 기대 중인 얼굴을 한 송금이 형의 말에 내심 기뻐하던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오면 잔소리도 달게 들을 수 있을 텐데.

“분위기 깨서 미안한데, 아마 돌아오진 않을 것 같아. 나나가 나르를 기억 못 해.”

묵묵히 잔을 채우던 사탕 누나의 말에 주위가 조용해졌다.

“나르 찾을 것 같아서 계속 재워 두다 여기 오기 전에 깨웠는데 아예 모르더라.”

그러니 기대하지 말라는 사탕 누나의 매정한 말에 다들 앞에 놓인 잔만 비워댔다. 아마 전부 알고 있을 거다. 그 말엔 자기처럼 기대하다 괜히 상처받지 말라는 다정함이 담겨 있다는 걸 말이다.

밤늦도록 이어진 술자리는 하나둘 자러 간다는 사람들 탓에 결국 나와 보미 사탕 누나만 남았는데, 보미 누나도 들어가고 둘이서 정리하고 자리에 앉았을 때였다.

“겸아, 채하현 어디가 그렇게 좋아?”

막 찰랑이는 소주잔을 비울 때라 사레가 걸려 콜록거렸다. 그러자 사탕 누나가 물잔을 밀어 주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뭐예요, 어떻게 알았어요?”

“티 내는 거 아니었어? 매일 같이 접속하고 접종하고… 알아 달라 일부러 그런 건 줄 알았는데.”

“다들 알고 있는 거예요?”

“몇 명만? 지금은 아직 채하현 혼자 짝사랑인 거로 많이 알고 있을걸….”

“짝사랑이요?”

짝사랑은 내가 먼저 하고 있었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눈만 끔뻑이자 사탕 누나도 따라 멍한 얼굴로 나를 마주 보았다.

“매일 찾아서 끼고 다니고, 겸이 있어야 겨우 채팅도 했잖아…. 원래 길드전이나 가끔 길드원끼리 던전 갈 때 꼭 할 말이나 오더만 내리던 애였으니까.”

“아니… 전 태생이 살랑거리는 사람인 줄 알았죠….”

“그럴 리가…. 수박이, 푸름이랑 장꾸 오빠도 이번에 친해진 건데.”

요망한 채하현이 그렇게 티를 내고 있었는데 나 혼자 몰랐었던 거였다. 그나저나 채하현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끼를 떨었는데….

혹시 취향이 동물인 변태 쓰레기 이상 성욕자인 건가? 그럴 가능성이 있는 것 같아 얼굴에 핏기가 가시는 것 같았다. 맞다! 그럴 수 있지…. 현실에서는 그렇게 붙어 있어도 손가락 하나 대지 않는 걸 보면 가능성이 차고 넘치지 않은가!

“누나 길마님이랑 소꿉 친구라셨죠? 혹시…. 길마님…. 취향이 남들과는 다른 이, 이상 성욕자 뭐 그런 거예요?”

사탕 누나는 멍하니 내가 한 말을 곱씹다 이내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거의 넘어갈 듯 허리를 젖힌 탓에 뒤로 넘어가는 게 아닌가 걱정이 먼저 들었다.

“너, 하…. 늑대일 때부터 추근거려서 그런 거지?”

“네, 뭐…. 그런 것도 있고.”

아무래도 고자인 것 같다고 예습을 통한 시뮬레이션까지 마친 내게 손가락 하나 대지 않는다. 하는 말이 차마 나오지 않아 마지막 남은 술병을 비우며 고개만 끄덕였다.

“그건 아닐걸…. 이걸 내가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걔네 집이 조금 특이해. 그 집에 천재가 하나 있거든.”

형제가 있었나?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애는 천재가 아니니까…. 그러고 보니 서로 가족 얘기를 전혀 하지 않았다. 물론 나는 숨기는 게 있었기에 먼저 묻지 못했는데 채하현도 얘기하지 않은 게 이상하게 다가왔다.

“그러고 거기 둘째가 얼굴 천재지.”

아, 채하현 얘기다.

“얼굴이 똑똑하긴 하죠….”

“천재 손주 떡하니 안겨 주고, 지원받아 사업을 시작했는데 이게 또 대박이 났어. 뭐, 뻔하지. 천재인 큰딸은 후계자로 데리고 다니고 얼굴마담인 막내는 방치되는 거…. 그래서 애가 좀 삐뚤어졌어.”

“채하현이요…?”

“응, 모르겠어?”

“누가 봐도 얼굴 빼고 평범하지 않아요?”

“…한 번 마음 준 사람한테, 집착이 심해. 아마 겸이 네가 해달라는 건 다 해 주고 전부 맞춰 줄걸.”

할 말이 없었다. 실제로 같이 지낸 일주일은 내가 스쳐 지나가듯 먹고 싶다는 말을 하면 무조건 그 메뉴가 테이블 위로 올라왔으며, 장난친다고 한 사소한 것마저 내 손에 들려 줬으니 말이다.

“뭐든 가장 좋은 거, 가장 예쁜 거로 다 주는 대신, 그냥 겸이가 옆에 있어 주길 바랄 거야. 뻔하지, 뭐. 온전히 자기 것이 되는 걸 바라는 건데, 다들 무겁고 무섭다고 떠났겠지. 제정신인 사람이 어떻게 늪으로 몸을 내던지겠어. 그래서 매번 파국으로 끝났을걸…. 물질로 얻은 사랑이 오래가진 않잖아.”

그동안 귀엽게 넘기던 채하현의 행동이 떠올랐다. 새로 산 캡슐부터 편하게 입던 옷 대신 사 온 새 옷에, 하물며 계란프라이까지 몇 번의 망침 끝에 터지지 않게 예쁘게 구워진 걸 내게 내밀었던 것 말이다.

“저는 옛날부터 빼앗기만 하고 살았어요.”

늘 찝찝하던 기분을 말로 뱉으니 이거 하나만으로 그동안의 불안이 모두 정의되었다. 형들에게선 부모님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식을, 친구를 빼앗지 않았나. 그 사고 하나로, 아니 내 지루함 하나로 일어난 사고에서.

“그런데, 이렇게 무거운 애정을 받아도 되는 걸까요?”

채하현 앞에선 죽어도 나오지 않던 주제가 술기운 덕인지 막힘없이 흘러나왔다. 사탕 누나가 의외라는 듯 나를 빤히 보고만 있었다. 그것도 잠시, 이내 할 말을 정했다는 듯 가볍게 웃으며 내 머리칼을 헝클어뜨리듯 쓰다듬었다

“인색 던전에서 들었던 말이 그거랑 관련된 거구나. 이건 내 생각인데, 받기만 하지 말고, 나눠 주면서 살아. 세상에 정상적으로 흠 하나 없이 멀쩡한 사람이 어디 있겠어, 서로 흠 난 곳을 채워주며 둥글게 삶을 굴려 가야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자 이제 정리하고 들어가자며 테이블 정리를 시작했다. 사탕 누나를 따라 부산하게 움직이니 벌써 3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남자 침실은 1층이니 아무 데나 빈 곳에 들어가면 된다며 올라가는 누나에게 인사를 하고 채하현이 있는 방을 찾아다녔다.

푸름과 권경배가 뒤엉킨 채 누워 있는 방과, 송금이 형과 뽀또 님이 자고 있는 방 안쪽으로 이어진 작은 방에 혼자 누워 있는 채예쁜이 보였다.

술도 못 먹는 사람 옆에 술 냄새를 풍기고 잠을 잘 수 없지. 빠르게 씻은 후 방으로 돌아가 색색거리는 숨을 내쉬며 잠든 채하현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형.”

대답 없이 꼼지락거리며 나를 안아 주는 손길에 뜨끈한 뭔가가 가슴에서 울컥하고 치고 올랐다.

“채하현.”

“….”

“자기야?”

얼굴을 찌푸린 채 뜬 눈에 내가 담기자 눈꼬리가 저절로 내려갔다.

목표가 생겼다. 내가 이렇게 가슴이 먹먹하게 행복한 만큼 채하현도 꼭 이렇게 만들어 줄 거라는 목표 말이다. 다시 감기는 눈을 빤히 보다 입술 위로 도장 찍듯 꾹꾹 입을 맞추곤 채하현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눈을 감았다.

역시 나는 채하현이 너무 좋다.

생각보다 너무 잔 것 같은 기분에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분명히 옆에 채하현이 자고 있었는데, 눈을 뜨니 좁을 방에 혼자 누워 있었다. 아침부터 기분이 좋지 않아 문이 보이는 곳으로 몸을 돌려 굳게 닫힌 곳을 노려보았다.

채공주 주제에 역마살이 낀 건가? 데리러 오기 전까지 꿈쩍도 하지 않을 심산으로 그대로 누워 있으니 바깥에선 복작이는 사람들 소리가 들려 왔다. 궁금한데….

“아, 일어났네. 겸아, 아침 먹자.”

“….”

마침 들어온 채하현의 말에 괜히 짜증 나 아무 말 없이 앞이 팔을 벌리자 채하현은 문을 닫곤 내가 있는 곳으로 다가와 꼭 한번 안아 주었다.

“무서운 꿈 꿨어?”

“…눈 떴을 때 앞에 있으면 안 돼요? 왜 이렇게 없어져.”

“아, 내가 보고 싶었던 거구나. 겸이 속 쓰릴까 봐 아침 먹이려고 준비하러 갔던 건데.”

목덜미에 얼굴을 부비며 귀염 떠는 채하현의 말꼬리가 길어졌다. 아무래도 기분이 좋아진 것 같은데…. 내 기분이 별로였기에 서둘러 털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침이고 뭐고 네 얼굴만 보면 없던 병도 다 나을 텐데…. 그래도 나 아플까 봐 예쁜 짓 했다는 말 같아 금새 기분이 좋아졌다.

아침은 북엇국이었다. 왕고사리 같은 손으로 언제 이런 걸 다 끓인 건지…. 생선을 안 먹는 내 자리에 계란과 국물만 가득 담긴 국을 내려두는 채하현을 기특하다는 눈으로 올려 보았다. 둘만 있었으면 엉덩이라도 토닥여 주는 건데.

“와, 씨. 채길마랑 결혼할걸…. 개맛있네.”

“누나 언젠 겸이랑 할걸 그랬다고 하시더니, 이젠 길마님이에요?”

“누나 이상형이 조신한 남자야, 계란아. 얼마나 예뻐 술 먹었다고 혼자 일어나서 국 끓이고.”

채하현이 예쁘긴 하지. 국만 마시고 있으니 11시까지 퇴실이라며 부산을 떤 사람들이 밥을 마구 들이켜곤 정리를 시작했다. 짐을 정리하고, 재활용 쓰레기를 묶어 내놓으며 정신없었고 짧은 여름휴가가 끝났다.

푸름 [사진]

푸름 [사진]

푸름 [패치노트 떴어요!]

“어, 이런 것도 알려 줘?”

“응, 공카. 너 들어가 봤냐?”

고개를 저으며 푸름이 보내 준 사진을 눌러 보자 거긴 친절하게 내일 업데이트할 내용이 적혀 있었다.

안녕하세요, 어뉴어의 모험가 여러분! 여러분의 귀염둥이 어뉴어의 마스코트 디유가 인사드립니다. ‘٩。•◡•。۶’

이번 업데이트는 수인족이 대대적으로 리뉴얼되는데요, 자세한 사항은 업데이트 후 공지를 확인 부탁드립니다.

이번 업데이트는 토요일 오전 6시부터 진행됨을 알려드리며, 업데이트 내용을 간략히 알려드리려 작성되었습니다!

아래 내용은 실제 업데이트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

[세계전 정규시즌 종료 안내]

-세계전에 참여한 길드에겐 세계전 보상 상자가 지급됩니다. (세계전 보상 코스튬)

-순위에 따라 보상이 차등 지급됩니다.

[수인 왕국 재건 안내]

자세한 사항은 업데이트 공지를 확인해 주세요!

[수인 리뉴얼 안내]

-‘강림’ 스킬이 활성화 되어 수인족의 본 모습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왕국 버프로 치명, 물리 방어력이 5% 상승합니다.

-새로 생성되는 수인족들은 수인족 마을이 아닌 왕국에서 첫 모험이 시작됩니다.

[NEW! 신규 레이드 : 수인족 레이드 난이도(★★★★☆)]

-수인족 왕국 퀘스트로만 입장이 가능합니다.

-수인족 왕국을 멸망시킨 ‘뮤첼’이 나타납니다.

자세한 사항은 업데이트 공지를 확인해 주세요!

[NEW! 신규 레이드 : 빛과 어둠(★★★★★)]

-매주 금요일 18시 안식의 땅에 입구가 떠오릅니다.

-레이드에 입장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던전 ‘천마전’에 참석 후 일정 점수를 모아야 입장할 수 있습니다. (3000점)

-레이드와 ‘천마전’은 15인 파티 입장 던전입니다.

-‘천마전’은 월, 수, 금에 활성화되며, 일일 입장 제한 횟수가 3회 존재합니다.

-‘천마전은’ 5개의 스테이지로 각 스테이지의 클리어 시간에 따라 점수가 누적됩니다.

(스테이지 3분 안에 클리어할 경우 200점 / 5분 150점 / 5분 이상 50점)

[결혼 시스템 오픈]

-결혼 예복 구매 후 각 나라의 수도 광장에서 결혼식 관리자를 찾아 일정 금액을 지불 시 예식장 예약이 가능합니다.

-예식장은 네 곳 중 한 곳을 고를 수 있습니다.

(신비한 수중 헤미르, 하늘 경관이 아름다운 테니렌,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마족 평원, 꽃과 풍경이 상쾌한 정령의 숲)

※특수 아이템 사용 시 숨겨진 예식장이 등장합니다.

수인 왕국이 재건되었는데 이렇게 지나칠 순 없죠!

업데이트가 끝난 토요일 현실 시간 18시부터 24시까지 수인 왕국에 축제가 열릴 예정입니다 ٩(*•̀ᴗ•́*)و

다양한 보상과 즐거운 볼거리, 왕의 즉위식이 열릴 예정이니 많은 참석 부탁드리며 디유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۶•౪•)۶♡٩(•౪•٩)

(축제 기간 왕국 입장 시 입장료가 50% 할인됩니다.)

“강림 내 히든 스킬 아니었나….”

“왜, 다른 수인도 쓸 수 있게 된대?”

“네…. 강림 스킬 활성화된다는데요?”

“미친, 수인 많이 늘어나겠네.”

신호에 멈춰 선 채하현에게도 보여 주자 스킬이 아닌 레이드와 결혼에 더 흥미가 생긴 것 같았다.

“여기, 뮤첼 나오는 데면 우리 다녀온 던전 아니야? 레이드로 변하는 것 같은데.”

“즉위식이면… 유우겸 너 꼭 접속해야겠다. 거기 왕이 너라며.”

낄낄거리는 권경배는 오랜만에 공카를 둘러보겠다며 곰 같은 손으로 작은 핸드폰을 두드렸다. 그런 권경배를 한 번 노려보곤 창가에 얼굴을 기대자 채하현이 내 손을 한 번 꼭 잡았다 놓으며 운전했다. 쟤는 숨만 쉬어도 예쁜 주제에 왜 추근대는 것도 잘하는 거지….

일단 업데이트가 끝나면 칭호를 나눠 끼고 내 꺼라 침부터 발라야겠다.

“야, 너 공카 가입 안 했지?”

“그렇다니까, 왜?”

“사진 보내줄게 봐봐.”

내내 웃고 있던 권경배가 화면을 캡처하는 건지 몇 번 소리가 들리다 피안 단체 채팅방에 사진이 올라왔다. 뭐가 그렇게 재밌다는 거지?

계란 [사진]

계란 [겸이덕분에 지우 흑역사 찾음ㅋㅋㅋㅋ]

제목 : 늑대 펫으로 어캐 둠?

작성자 : zㅣ우

개쌉 초보마을 지나치는데 늑대가 광장에서 까마귀 쫓고 있던데 업뎃함? 일단 친밀도 쌓으려고 고기 주니까 먹튀하던데ㅠ

지인이 들튀는 안 된다는데.. 털이 부드러워서 꼭 갖고 시픔 ㅠ

꼰대가르숑 : 그거 피안 길마 펫 ㅇㅇ 가서 물어보셈

└잘도 알려주겠다

공익인간 : 그거 웨어울프아님? 새로 뜬 수인 히든..

└구라ㄴ 여태 수인중에 동물외형 된 사람 1도 못 봤는데 뭔 헛소리야.

└성지순례 왔습니다. 이번 취업 성공하게 해주세여

└로또 1등 당첨되게 해주세요

└히든 던전 10개만..

└ㅋㅋ누가이런걸믿는다고건강하고 오래살게해주세여

뽀또 [ㅋㅋㅋㅋㅋ 지우 글 아직 안 내렸네]

햇살 [저 들튀 안 된다고 알려준 지인이 저예요]

햇살 [저러고 저날 피안 가입했지ㅋㅋㅋㅋㅋㅋㅋ]

계란 [피안 검색하니까 재밌는 거 많네....]

계란 [사진]

계란 [사진]

계란 [사진]

제목 : 피안 뭐임? 기여운펫은

작성자 : 어뉴어미남

전부피안한테감? 고양인지 샌지 날개달린잡종은어디서구함 ㅈㅂㅈㅂㅈㅂ알려주면100골 줌

시비충 : 님 100골드로 맞춤법 책이나 사서 띄쓰나 배워야 할 듯

└급해서그렇게쓴 거지 원래잘 씀 ㄲㅈ

└ㄴㄴ 원래도 못 쓰는 듯,,, 세종대왕님이 님 보면서 한숨 쉼

└지랄ㄴㄴ 나 한대다님 깝 ㄴㄴ

└몇반? 담임 이름 머임?

└1반 김진수

└계정 거래 막히지 않았나? 졸라 애잔해서 봐준다 ㅂㅅ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1반ㅋㅋㅋㅋㅋㅋㅋ 김진수 ㅋㅋㅋㅋㅋㅋㅋㅋ

제목 : ㅆㅂ 나 구름이 봄

작성자 : 잌용

울길드원 쩔 가는데 피안 날아다니는 펫이 구름이 와이번 타고 날아다니드라….

구리미 : 구름이랑 하는 세 명 요즘 레드 돌던데 거기 늑대랑 졸라 친한 듯…. 늑대 뉴비 아니었나본데?

└ㄹㅇ? 그 앞에 있으면 구름이 볼 수 있냐?

└ㅇㅇ 달이도 있음

제목 : 피안옷봄?

작성자 : 이ㅌㅐ리타올

저거다합치면어마어마하지 않나?? 요즘 거기 뉴비레드땃다던데ㅔ던데입장료로사서나눠줬나?제복 0실물첨봄,,가까이가고싶었는데귀한분들같아보여서누추한내가가까이갈 수가없더라.....

시비충 : 1반 진수 공카 아이디 바꿨네.

└뭐임 ㅆ1바님 나스토킹함? 고소할거임ppt딴다

└pdf 자나 진수야! 글에서 진수 냄새나서 알아찌^^! 띄쓰 여전하네 대쪽같은 ㅅH끼….

수바기 : 머임 제로면 우리 애 본 거 아녀? 님 어디서 보셨나요?

└수인족왕국성안으로들어가는거봄ㅎㅎ 근데진짜수박맛사탕님이신가요?

└ㄴㄴ짭 ㅅㄱㅇ

제목 : 길드전 훈민정음 왜 옴?

작성자 : 5taku

원래 이런 콘텐츠 참여 안 하지 않았나? 존ㄴㅏ 개놀랬네 하필 1차전이 우리 길드랑 붙어서 개박살남 훈민정음이 훈민정음했다.

짭타올 : 님거기유명한대임?나첨듣는데

└ㅇㅇ

└진수야 띄쓰는 언제 배울 예정임?

└님ㅅㅂㅊ임? 졸라지독한노미 붙었네난테왜구래요ㅠ

제목 : 히든던전은 피안이 다 해먹네

작성자 : ㄸH타올

수인왕국뜬거봄? 피안어캐드러가냐

시비충 : 진수야

└님 나 좋아함?어캐아는 거임진짜.. .

└누가 봐도 진수임. 진수 유명해졌더랗ㅎ 형한테 안 고마워?

└ㅆㅂ 누가형임? 나아라?

└형은 대학 졸업장 있거든^^!

└가방끈으로줄넘기할거도아니면서ㅉㅉ

제목 : 유우 님 우리 길드로 부를려면 어캐야됨?

작성자 : 천연발효효자

졸라 복덩이 아님? 일단 길갑 시키고 싶은데 내가 제로 사 줄 돈은 없지만 충성을 바칠 수 있음. 솔직히 피안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약소고 사람도 없지만 예뻐해줄 수 있음! 해줄 수 있는게 없지만 같이 키워나가면 존잼이게 해줄수는 이따 !

ㄷㄷH미리 : 옥상에서떨어져서뇌가빠지지않는이상님길드안갈 듯

└@시비충님 1반 진수 찾음

└ㄱㅅㄱㅅ 500골 입금완. 진수야 요즘 왜 뜸했어? 찾아짜나 ㅠ

└님돈주고내정보삼?ㅆㅂ 저님안조아함ㅈㅅ

└돈줄게 어뉴어 아이디 알려줄래? 형이 잘할게

└ㄲㅓㅈㅕ 이제 띄쓰 배워서 못 찾게 될거임

└이정도면 정 들어서 알려줄만도 한데.. 진수 형이랑 밀당하니?

계란 [1반 진수 ㅋㅋㅋ]

사탕 [시비충 진수한테 반한 듯 ㅋㅋㅋㅋ]

지우 [ㅁㅣ친저거어캐찾았어요?]

수박 [지우가 진수니? 띄어쓰기 ㅇㄷ?]

지우 [아니예여ㅠㅠㅜ 수치스러워서.. 겸이 형 바로 글삭 했어요 오해하지 마세요]

수박 [수상해]

사탕 [수상한데~]

운전 중인 채하현에게도 읽어 주며 같이 지우가 1반 진수가 아니냐 놀려대다 보니 어느새 우리 집 아래에 도착했다.

“나 먼저 올라간다.”

“응, 조심히 들어가.”

권경배는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고개만 끄덕였고, 인사를 마친 채하현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겸이는 우리 집 갈 거지?”

“형, 업뎃 끝나면 결혼할래요?”

“응? …이렇게 갑자기 청혼이야?”

“그럼 예고하고 해요? 괴도도 아니고. 그래서 싫어요?”

“아니, 좋아요.”

솔직히 갑작스럽긴 하지…. 괜히 민망해졌기에 죄 없는 채하현에게 좀 투덜거렸더니 이 여우같은 놈이 내가 말을 바꾸기라도 할까 봐 곧바로 좋다는 말을 내뱉었다.

당연히 긍정의 말이 나올 걸 알고 있었음에도 내 생각만이 아닌 채하현의 입으로 듣는 대답에 설레다 못해 쿵쿵 뛰는 심장 소리가 너무 크게 느껴졌다.

“빨리 가서 일단 연인 상자부터 까요.”

손을 가만두지 못하고 꼼지락거리며 대답하자 채하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집 쪽으로 차를 돌렸다.

[Hunter : A New Adventure 03번 채널로 입장합니다.]

[환영합니다, 헌터님!]

[길드]간계밥 : 사람 사는 거 똑같다더니 다들 여기서 또 보네요.

[길드]장꾸 : 나도 가고 싶었는데.. 겨마 형아 안 보고 싶어?

[길드]햇살 : 다들 안 피곤 하냐고요ㅋㅋㅋㅋㅋㅋㅋ

[길드]겨울 : 피곤한 건 몸 써서 풀어야지 장판이 형 ㅇㄷ?

떠들썩해지기 시작한 길드 채팅창을 닫곤 채하현의 옷깃을 끌어 정원으로 나갔다. 그래도 결혼하는 건데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곳보단 조용한 곳이 좋을 것 같은데…. 마침 나무와 꽃에 가려진 곳에 작은 벤치가 있어 그 위로 올라가 옆자리를 툭툭 내리쳤다.

“자기야, 이렇게 으슥한 곳에서 뭐 하려고 데려온 거야?”

장난기 가득한 눈이 빛나고 있었다. 추행으로 맞장구를 쳐야 하는 건가? 채하현과 내 발만 번갈아 보다 결국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배낭 안에 있던 작은 상자를 꺼냈다. 그제야 앞으로 걸어온 채하현은 옆자리가 아닌 바닥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저 진짜 열어요?”

“응, 궁금하다 얼른 열어 봐.”

“이제 못 물러요, 알죠?”

채하현은 고개만 끄덕이며 앞에 놓인 상자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긴장이 되는지…. 눈을 꼭 감고 상자 뚜껑을 들어 올리자 의문이 가득 담긴 감탄사가 작게 울렸다.

“어?”

“뭐야, 뭔데요?”

바로 눈을 내려 상자 안의 내용물을 살피는데, 거긴 반지 두 개와 조그마한 종이 하나가 나왔다. ‘결혼식 예약 티켓-수인 왕국’ 일단 중요한 건 반지가 아닐까? 서둘러 히든 스킬을 해제한 뒤 두 개의 반지를 집어 들자 채하현이 얌전히 손을 내밀었다.

“자기야, 뭐 해. 나 팔 아픈데.”

꾸준히 뻔뻔한 채하현은 손을 한 번 들썩였고, 결국 그 손을 잡아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주자 환하게 웃으며 눈을 맞추었다.

“게임인데 그렇게 좋아요?”

“응. 지금 이러는 거 보니까 현실에서도 조만간 끼워 줄 거라는 기대가 막 드는데, 자기야.”

“어이없네…. 저 궁금한 거 있는데 물어봐도 돼요?”

채하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직 내 손에 들린 반지를 끼워 주었고, 그러자 새로 칭호를 얻었다는 알림이 눈앞으로 한 줄 떠올랐다. 미친…. 꼭 이렇게 티를 내야 하는 건가?

“뭐가 궁금한데?”

“…나 언제부터 좋아했어요?”

“음….”

“제가 알다시피 눈치가 빠를 편인데, 형이 워낙 나비 같아서 언제인지 가늠도 안 가잖아요.”

“뭐야, 자기야. 나 나비 같아? 예쁘단 거네.”

“봐 이러는 거. 그래서 언제인데요?”

내 속을 태우려는 불순한 의도가 눈에 빤히 보일 만큼 천천히 눈을 굴리며 생각하는 척을 하기 시작했다.

“뭐야, 왜 안 알려줘?”

“자기야.”

채하현이 눈을 내리깔더니 입꼬리를 가리고 연약한 척 내 무릎에 얼굴을 폭 묻곤 뭐라 뭐라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또 장난치는 건가?

“하나도 못 알아듣겠잖아요….”

머리를 톡톡 두드리자 그제야 고개를 들고 웃는 걸 보니 말해 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혹시 첫눈에 반했다, 뭐다 이래서 부끄러워하는 걸까? 하는 수 없이 대답을 듣는 걸 포기하곤 그동안 렙업이다, 퀘스트다 정신없어 가보지 못했던 관광명소들을 찾아다녔다.

Epilogue

업데이트가 끝나자마자 접속을 한 권경배의 다급한 말에 서둘러 채하현과 캡슐 안으로 들어갔다. 익숙한 부유감에 눈을 감자마자 라디아탄의 웃음소리에 화들짝 놀라 눈을 뜨자 웬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처음 히든 스킬을 얻어 라디아탄과 만났던 날, 환하게 웃고 있는 라디아탄이 보였다. 아마 작고 약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같아 멍하니 화면만 바라보았다.

그 뒤로는 나르가 보였다. 아직 저주에 걸려 검은 액채를 뚝뚝 흘리는 모습부터, 내가 봤던 나르의 과거까지. 그리고 처음 등장한 뮤첼.

거의 나의 일대기같이 이어진 영상에 웃으며 과거를 곱씹다 보니 어느새 나르가 떠난 그날의 영상이 흘러나왔다. 홀린 듯 나르의 모습만 보고 있었다. 우리 애는 늘 감정이 얼굴을 통해 나오는구나….

권경배의 요구 덕분인지 내 얼굴을 검게 가려져 나오지 않았지만, 뚝뚝 흐르는 눈물은 누가 봐도 울고 있는 걸 알 만큼 자세히 보였다.

‘나르의 가족들이 아, 앞으로 행복해지는 마법…. 마법을 흐윽….’

알고 있는 장면임에도 가슴이 울컥했다. 사탕 누나 또 울겠네 하는 생각을 하며 흐려지는 눈을 부비자 이제 나와 이마를 맞대며 사라지는 나르의 모습이 보였다.

그 뒤로는 처음 보는 영상이었다. 여러 개의 빛이 웅성거리며 다투고 있었다.

‘일부러 그 너구리를 꾀어낸 것이 확실하오. 이건 우리에게 전쟁을 선포한 것이 아니겠소?’

‘확신은 할 수 없지 않은가…. 전쟁이 일어나면 또 얼마나 많은 무고한 생명을 잃겠어? 조금 더 생각을….’

‘언제까지 이리 방어적으로 굴 것이오! 이번이 몇 번째인데. 나는 더 이상 참지 않을 것이오.’

누군가 분노하는 모습이 빛과 함께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자 황금색 의자에 앉은 커다란 사람의 슬픈 얼굴이 클로즈업되었다.

잠시 뒤 화면은 180도 바뀌었다. 어두운 공간에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고, 족히 몇만은 되어 보이는 마족들이 서 있었다.

‘이쯤 하면 알아들었겠지, 공존이 답이 아니라는 걸 말이야.’

가장 높은 곳엔 나태의 여동생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닮은 사람이 텅 빈 눈으로 허공을 보고 있었다. 그녀의 손짓 한 번에 모여 있던 무장한 사람들이 일제히 날개를 꺼내며 하늘에 열린 구멍으로 날아올랐다.

‘언제까지고 우리를 지하에 처박아 둘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그건 착각일 것이야.’

붉은 입술과 꼭 닮은 색의 액체를 마신 사람은 날아가는 마족의 뒤만 보다 곧 피막에 쌓인 날개를 꺼내 날아오르며 영상이 끝이 났다.

바로 시야가 환해지더니 보이는 건 마지막 메인 퀘스트를 끝낸 크롤린의 왕성 안이었고, 눈을 두어 번 부비는데 처음 보는 알림이 눈앞으로 떠올랐다.

[연인 화환 님께서 접속하셨습니다.]

내가 1분쯤 더 일찍 접속한 건데 이런 알림이 뜬다고? 서둘러 접속을 종료했다 다시 로그인해 들어가자 눈을 동그랗게 뜬 화환이 바로 앞에서 나를 내려보며 웃기 시작했다.

“봤어요? 알림 뜬 거.”

“응, 별게 다 나오네. 영상 겸이 멋지더라. 주인공 같았어.”

“네…. 오랜만에 나르 보니까 반가웠는데, 형은요?”

“나도요.”

익숙하게 나를 안아 올려 파티를 건 화환이 파티장을 내게 넘겨 주었다. 하우징으로 가라는 말이지? 바로 이동을 누르자 눈앞이 한 번 어두워졌다 풍경이 바뀌었는데… 여기는 성 입구가 아닌 왕국의 커다란 입구 앞이었다. 뭐지?

“하우징으로 이동했는데…?”

화환이 성문 앞으로 걸어가는데 [18시 정각 왕국이 개방됩니다]라는 알림이 뜨며 두어 걸음 뒤로 밀려나 버렸다.

“지금은 못 들어가는 것 같은데?”

“와 씨 뭐야, 내 집 잃은 줄 알았네.”

마침 도착한 사탕 누나도 우리를 보더니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곧 길드 채팅으로 수박 누나가 잠시 집을 잃은 부랑자들은 길드 성에 있다며 길드원들을 부르기 시작했다. 하는 수 없이 길드 성으로 이동하자 어느새 모인 겜창들은 하나같이 낯선 얼굴로 소파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겨미, 영상 잘 봤어?”

“네, 완전 저 일대기였는데, 다들 스킵 안 하고 보셨어요?”

“응, 낯선데… 익숙해서 이상하더라.”

송금이 형이 어색하게 웃었고, 권경배는 공카에도 올라와 있다며 나중에 저장해서 보내 주겠다는 헛소리를 했다. 그나마 살아나는 분위기에 웃으며 주위를 둘러보자 나나가 이곳저곳에 물방울을 퍼트리고 다녔고, 다들 귀엽다는 듯 나나만 보다 씁쓸한 얼굴로 웃었다.

“그나저나 18시면 6시지? 축제랑 동시 입장인가?”

“그렇겠죠? 아직 두 시간이나 남았어요….”

“여기 오랜만에 다 모여 있는 것 같네.”

“뭔가 낯설지 않아? 원래 우리 매일 여기 있었는데….”

그러고 보니 그랬다. 요즘은 내 성에만 있었기에 반갑기보단 이상하고, 어색했다.

“아, 여기 온 김에 상급 포획 틀 가지고 릴스 잡으러 가면 되겠다.”

“헌터 업무요?”

“응, 같이 갈 사람?”

“나나나나!”

수박 누나가 번쩍 손을 들었고, 겨울이 형도 슬금슬금 내 쪽으로 걸어왔다.

“나도 같이 잡아도 돼?”

“이거 첫 업무 아니에요? 형도 잡아야 해요?”

“겨울이 결장이랑 던전만 돌았거든. 난 업뎃 내용 좀 확인하고 와야겠다, 잘 다녀와.”

보미 누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화환이 길드 창고로 가 포획 틀을 내 손에 들려 주었다. 실패가 많을 수도 있으니 이 정도는 챙겨야 한다며 포획 틀을 주었고, 겨울 형도 따라 한가득 배낭으로 챙겨 넣었다.

헌터 퀘스트는 어뉴어의 다섯 나라 광장에서 받을 수 있었다. 목적지로 이동하기를 누르자 우리는 한눈에 보기에도 척박한 절벽 바로 아래로 이동되었다.

여기가 목적지가 맞나? 주위를 둘러보는데 하늘 위로 거대한 무언가가 일제히 한 방향으로 날고 있었다. 세 명의 사람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돌 틈에 몸을 숨겼다.

“저게 릴스예요?”

“응, 그리핀 같지?”

사실 햇빛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아 확인은 못 했지만, 화환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싶어 다시 한번 올려다보았다.

“저거 무리로 움직이거든? 한 마리 떨어져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잡아야 해.”

“잡기 힘들어요?”

“그건 아닌데 스킬이 귀찮아서. 상태 이상 걸거든. 수가 많아서 해제할 때마다 다시 걸어서….”

수박 누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곤 한참 날아다니는 모습만 올려보는데 겨울이 형이 뒤쪽을 가리키며 화환의 등을 두드렸다. 돌아보니 거긴 잠시 쉬려는 건지 땅으로 내려온 세 마리가 이동 중인 무리와 반대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파티]수박맛사탕 : 은신 걸어줄게 조용히 움직이자

[파티]유우 : 딸피 됐을 때 포획 틀 던지면 되는 거죠?

[파티]수박맛사탕 : ㅇㅇ 실수로 죽이지 않게 조심해

곧이어 몸이 일렁이며 흐릿하게 보였다. 그걸 확인한 화환이 먼저 릴스 세 마리의 뒤를 따라가는데, 점점 재미있어지기 시작했다.

커다란 물웅덩이에서 물을 마시는 릴스에게 가장 먼저 공격을 한 건 화환이었다. 발을 묶으려는 건지 세 번의 격발로 한 쪽씩 날개를 부러트린 화환에 수박 누나가 기다렸다는 듯 꽝꽝 언 실드를 크게 둘렀다.

역시 경력직.

“아, 씨발…. 무기력 걸렸네. 겨울이 오빠, 해제 좀.”

라디아탄의 칭호 효과로 나를 뺀 세 명이 한순간에 전의를 잃었을 때 릴스가 우리를 향해 달려왔다. 시간을 벌기 위해 하울링을 사용하자 겨울이 형이 무사히 상태 이상 해제했다.

먼저 왼쪽에 있는 릴스를 공격했다. 두 번의 할퀴기로 붉게 변한 체력바가 반짝이자 화환이 나를 말렸다.

“겸아, 그만. 이제 포획 틀 던져 봐.”

배낭 안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넣어둔 포획 틀을 꺼내 씩씩거리며 내게 달려드는 릴스에게로 무작정 집어던졌다. 왜인지 포획 틀은 바닥으로 그냥 떨어졌고, 달려드는 릴스에게 한 대 맞을 것 같아 눈을 감으니 화환이 나를 안고 하늘로 올라 공격을 피했다.

“…뭐예요? 던졌는데 왜 안 잡혀요?”

“그거, 손잡이는 잡고 던졌어야지.”

깔깔거리는 수박 누나와 겨울이 형의 웃음소리에 얼굴로 열이 올랐다. 아니 알려 주지도 않고 던지랬으면서…. 오랜만에 화환의 팔을 발로 찼고, 웃느라 방심 중이던 두 사람은 나란히 상태 이상에 걸려 겸이를 찾아댔다.

“너 포획 틀 내동댕이쳤다며?”

“누가 그래?”

찔려 발끈하며 권경배 뒤에 서 있는 겨울이 형을 노려보았다. 화환은 절대 말했을 리 없고, 수박 누나도 혼자 즐거운 걸 좋아하는 숨은 변태 같은 사람이니 남은 건 겨울 형밖에 없지 않은가. 찔리는 얼굴로 내 눈을 피한 형이 보미 누나의 옆에 딱 붙었고, 그에 질세라 나도 화환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야, 유우겸. 아이템 눌러 보면 상세 설명이라는 게 떠. 그런 것도 좀 읽고 살아라.”

알고 있는 사실에 고개를 번쩍 들고 이를 내보이며 으르릉거리자 화환이 내 등을 토닥이며 시계를 확인하는 중이었다.

“이제 20분쯤 남았네. 겸이 포획 틀 열세 번 던져서 겨우 잡았는데 업무 완료하러 가야지.”

릴스는 내가 가져온 포획 틀을 다 쓰고도 잡히지 않았다. 겨울이 형에게 받아 겨우 잡은 릴스를 그냥 보내기 아까워 길드 성에 누워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광장으로 이동했다.

퀘스트를 준 NPC에게 릴스가 담긴 포획 틀을 전해 주자 기뻐하며 일반 퀘스트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큰돈을 보상으로 받았다.

“와…. 형 갖고 싶은 거 있어요? 저 처음으로 번 돈인데, 말만 해요.”

[수인족 왕국의 축제가 열리기 한 시간 전입니다. 왕과 구원자 들은 수인 왕국에서 왕의 즉위식을 빛낼 준비를 시작해 주세요.]

[이동하기] [잠시 후 이동]

“겸이 간식 사 먹어야지. 바로 이동할게.”

화환이 반짝이며 사라지는 걸 확인한 뒤 바로 따라 이동하자 도착한 곳은 내 하우징 입구였다. 평소와 다르게 호화로운 분위기에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인 건지 입구에 서 있다 열두 명 모두 모였을 때 안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나팔 소리와 함께 성의 입구까지 두 줄을 서 있는 붉은색 정복을 입은 수인들이 일제히 검을 쳐들며 우리가 갈 길을 알려 주었다.

낯선 얼굴로 안으로 들어가자 처음 듣는 잔잔한 피아노 선율이 흐르고 있었고 수인 한 명씩 붙어 옷을 갈아입는 걸 돕기 시작했다.

[길드]수박맛사탕 : ** ** 원래 이렇게 부담스러운 곳이었나?

[길드]빛과송금 : 우리 매일 가든 하우스로 와서 몰랐던 걸까?

[길드]간계밥 : ㄴㄴㄴ 절대 이런 곳이 아니었어요 저는 정문으로 다녔는데

[길드]지우 : 겸이 형 오해는 풀리셨어요?

나도 낯설어 일단 강림을 해제한 채 주는 대로 옷을 입으며 채팅을 무시하자 어깨 위로 화려한 망토가 얹혔다. 발아래까지 끌리는 망토는 목이 닿는 부분엔 희고 부드러운 털이 장식되어 있었다.

눈을 가릴 수 있는 가면을 마지막으로 옷 입기가 끝이 났다. 두 명의 수인에게 안내받아 도착한 곳은 커다란 응접실이었다.

“옷이 날개라더니…. 우리 겸이 진짜 왕 같은데?”

“가면 봐, 배려 멋지네….”

“누나, 형들은 되게… 부잣집 자제분들 같은데요…?”

“그러니까, 이 나이에 나비넥타이라니 가당키나 하냐고.”

송금이 형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뒤 화환의 옆자리에 앉으며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거긴 다들 맞춘 듯 검은 슈트에 백색 나비넥타이를 맨 채 서로 놀리고 있었다.

“어, 겸이도 반지 꼈네. 둘이 결혼은 언제 하려고?”

어제 연인 상자를 열고 받은 반지였다. 아까 접속했을 때 보인 알림도 이것 때문인가? 싶어 가만히 손만 내려보는데 화환은 자랑하듯 다른 사람들에게 손을 보여 주며 장난스레 웃었다.

“오늘 할까? 사람도 많을 건데, 구경하러 오라고 하면서 축의금이나 받게.”

“그럼 나랑 푸름이가 걷을래! 10%만 떼 줘.”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화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데, 사탕 누나가 손을 들며 이야기하더니 송금이 형 옆으로 걸어가 숙덕이기 시작했다. 또 이상한 걸 만들려고 그러나?

궁금하긴 했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기에 배낭 안에 모셔 두었던 예식장 티켓을 꺼내 들었다. 왕궁에서 열린다고 했으니, 잠시 열어 두어야 하겠지….

오늘 예약 가능 시간을 확인하자 현실 시간 8시, 10시, 12시 세 개 중 하나를 고를 수 있었다.

“8시? 할까요? 6시 왕국이 열리면서 바로 즉위식 시작될 것 같은데 종일 하진 않겠죠.”

그러자 고개를 끄덕이는 화환을 힐끔거리다 서둘러 예약한 뒤 대금을 결제하자 곳곳에서 놀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언제나 그렇듯 한 귀로 듣고 흘리며 푸름의 곰으로 변한 모습까지 보며 웃다 보니 어느새 수인 왕국의 축제 시간이 다가왔다.

커다란 폭죽 소리와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말소리. 성의 탑 위에 올라 막 들어오는 유저들과 즐거운 얼굴을 한 수인 주민들을 둘러보는데 퀘스트 창이 반짝이며 존재감을 내보였다.

[수인 왕의 첫 번째 퀘스트. 별의 아이 세 명에게 축복을 내려 주세요.]

-즉위식 마지막을 장식할 특별 이벤트가 발생했습니다.

별 가루를 아이들 머리 위로 뿌려 주는 건지 배낭 안에 세 뭉치의 별 가루가 들어왔고, 노크 소리가 들려 왔다.

안내에 도착한 곳은 성 입구였다. 거대한 마차와 열 필의 말이 있는 곳이었다. 화환과 나는 마차로, 남은 파티원들은 제각각의 말에 올라앉자 성문이 열렸다. 주위론 수인 정예라 적힌 정복을 입은 수인들과 소박하지만 화려한 퍼레이드가 시작되었다.

[길드]겨울 : ㅅㅂ 이렇게 또 소외시키네. 소문 낼 거임 포획 틀 집어 던진 거

[길드]유우 : 벌써 냈으면서 큰소리 ㄴㄴ해요, 형.

[길드]간계밥 :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겨울 형의 말을 무시한 채 주위를 둘러보자 거긴 유저보다 훨씬 많은 수인족들이 일제히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레미, 체이슨 그리고 사탕 누나와 푸름이, 함께 1차 각성 퀘에서 우리를 공격하려던 사람들까지. 무사히 다 돌아왔구나.

[길드]유우 : 오른쪽에 레미랑 체이슨 있어요

[길드]푸름 : 와,,

[길드]민초맛사탕 : 존1나 다들 내 자식 같고 뭉클한데 나 이상한 거?

[길드]빛과송금 : ㄴㄴ 장꾸 오열중이야.

어깨를 떨고 있는 장꾸 형의 옆엔 밝은 얼굴로 수인 왕국이 던전이었을 때 자기가 죽인 사람들이 있다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이상한 관광에 마음의 안식을 찾기 위해 화환의 옆으로 바짝 붙어 섰다.

이쯤 됐으면 피안에서 유일한 정상인은 나뿐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일어 한 행동인데 가장 또라이의 눈엔 뭐가 씐 건지 내 곁으로 바짝 붙어 서며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퍼레이드는 수인 마을을 크게 한 바퀴 돈 후 끝이 났다. 그 뒤엔 왕성 연회실에서 빛을 담은 왕관이 머리에 올라왔고, 정신을 차리니 지쳐 왕좌에 앉아 있었다. 미친 이게 뭐라고 이렇게 지치는 거지?

궁 밖은 시끌벅적한 소리가 쉼 없이 울렸고, 별의 축복을 내려 주기 전 잠시 쉬는 시간이었는데, 남은 사람들도 다 아래에 앉아 진이 빠진 얼굴로 나만 올려 보고 있었다.

[세 명의 아이들이 무사히 왕국으로 돌아왔습니다. 10분 후 축복의 장면이 채널에 방송 예정입니다.]

왕관을 받을 때 들린 알림이 한 번 더 울렸다. 방송이고 뭐고 빨리 좀 끝내고 쉬고 싶은데…. 이렇게 오래 수인 모습으로 다닌 건 처음이었기에 의자 위에서 거의 눕듯 앉아 눈만 굴리고 있었다.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나르…?”

들어온 아이는 누가 봐도 나르였다. 고양이 귀가 아닌 커다란 토끼 귀를 쫑긋거리며 아벨과 손을 잡고 들어온 나르 말이다. 나르가 뮤첼의 아이가 맞는 거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벨과 나를 번갈아 보던 나르는 이내 낯선 사람을 본다는 듯 아벨의 바짓자락을 잡곤 얼굴을 숨겨 버렸다.

“뭐야, 나르 아니야?”

“맞는 것 같은데…?”

“저 얼굴이 흔하냐고. 나르, 나 계라닌데 모르겠어?”

앳된 얼굴은 이제 울 듯 찌푸려졌으며, 순식간에 손바닥만 한 토끼의 모습으로 바뀌어 버렸다. 바닥에 딱 붙어 부들부들 떠는 나르의 모습에 아벨도 당황한 얼굴로 내려 보다 결국 품에 안아 주었다.

[길드]민초맛사탕 : 나르도 기억 못 하는 거야?

사탕 누나의 말에 일단 배낭 안에 있던 나르의 가방 안으로 그동안 모아 둔 간식거리를 차곡차곡 챙겼다. 이건 처음 만난 날 먹은 초콜릿, 이건 나태를 쓰러트리고 화환이 나눠 준 쿠키. 이건…. 이상한 기분에 입술만 물곤 가방이 닫히지도 않게 간식을 챙겨 넣었다.

“로니, 이렇게 있으면 축복을 못 받잖니.”

“이름이 로니야?”

내 쪽을 힐끔거리는 아이를 보다 그 가까이 걸어가 머리 위로 별 가루를 뿌려 준 뒤 아벨에게 나르의 가방을 건넸다.

“이건 선물이요, 간식.”

울먹이던 아이가 결국 울음을 터트리더니 아벨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씁쓸한데, 나르가 라디아탄의 힘을 빌릴 수 있었던 이유를 알게 되어 조금 후련했다. 이제 엄마인 아벨과 행복할 일만 남은 것 같아 아주, 아주 조금 뿌듯함도 밀려왔다.

[길드]유우 : 나르 안고 있는 사람이 아벨이에요. 뮤첼 아이가 두 번째 별의 아이가 맞았네요.

[길드]수박맛사탕 : 뮤첼 ***는 자기 애도 못 알아보고 죽인 거? ***네

[길드]민초맛사탕 : 우리 나르가 엄마랑 판박이다

제 모습이 이렇게 작을 리가 없을 거라던 나르, 아니 로니는 나르보다 훨씬 작은 토끼가 본체였네. 그저 한 번 웃어 준 뒤 돌려보냈다. 갓난아기의 모습인 두 번째, 세 번째 별의 아이는 고양이 수인과, 새하얀 날개가 달린 백조의 수인이었다.

나르의 안에는 셋이나 되는 별의 아이가 있었구나. 무사히 별가루를 뿌려 주자 어느새 해가 져 어둑한 하늘 위로 수십 개의 폭죽이 터졌고, 본격적인 축제가 시작되었다.

축제는 시간이 갈수록 북적였다. 마치 예전 영상에서 본 것과 같이 말이다. 무투 대회, 발명품, 채집, 최고의 연인 총 네 개의 종목의 큰 이벤트가 열린다는 알림이 떴다. 마지막 다섯 번째 보상 상자는 아무도 닿을 수 없는 성의 꼭대기에 올라 있었다.

축제가 끝날 때 왕에게 내려와 수인들이 한 해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축복과 유저들에게 버프를 내린다 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 전에 결혼식이 열린다는 것이다. 해가 뜰 때쯤 시작하는 결혼에 다른 길드원들은 축제 구경을 나갔다. 화환과 나는 성의 중앙 숨겨진 지하로 들어가 차가운 물로 몸을 씻는 중이었다.

“미친, 그냥 결혼식 딱 하고 끝나는 게 아니었어요?”

“자기야, 믿지 못하겠지만…. 나도 초혼이야.”

“아… 적어도 세 번은 한 줄 알았지.”

“내가 이혼남이어도 좋아했을 거면서.”

“이건 또 무슨 헛소리야? 몸이나 빡빡 씻어요.”

채예쁜은 화환의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 다행히 다 벗고 사이좋게 때를 밀어 주는 목욕탕이 아니라 어디서 나오는지 모를 물을 그냥 가운을 입은 몸 위로 끼얹는 것뿐이었다.

물을 끼얹고 나오자 이번엔 혼례복을 구매해 달라는 말에 캐시샵으로 들어가 NEW! 가 떠 있는 예복을 구매했다. 착용하기를 하자 옆에서 도와주던 수인들이 내 머리 위론 백색의 반투명한 천을, 화환의 머리 위론 붉은색의 천을 뒤집어씌웠다.

처음으로 수인 왕국이 마음에 드는 순간이었다. 아벨의 결혼식에서 붉은색 천을 썼던 사람이 아벨이었기 때문이다.

[귓속말]유우 : 형, 그거 알아요?

[귓속말]화환 : 응?

[귓속말]유우 : 빨간 천 쓴 사람이 신부예요.

[귓속말]화환 : 와, 나 자기한테 시집가는구나

[귓속말]유우 : 응, 자기야. 돈 많이 벌어올게 나 왕이야, 알지?

화환은 어깨를 떨며 웃어댔고, 그걸 못 본 척하며 우편으로 들어온 세금을 한번 더 확인했다.

결혼식을 알리는 알림이 뜬 뒤로 커다란 나팔 소리가 세 번 울리며 성의 문이 열렸다. 서둘러 왕성 입장 설정을 모든 사람 입장 가능으로 조정하자 발아래로 화살표가 생겼다.

화환과 함께 걸어 나가니 2층 거대한 테라스에 도착했다. 맨 앞줄엔 피안의 길드원들이 마을 사람들과 함께 소리를 지르며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여러분! 피안 길마는 도둑놈입니다!!!”

누가 들어도 수박 누나였다. 축제라 예쁜 옷으로 갈아입고선 양손 가득 인형과 군것질거리를 든 채 위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장꾸 형은 예쁘게 키워 남 좋은 일을 시켰다며 주저앉아 바닥만 내리치는 중이었다.

역시… 또라이들. 그중 가장 또라이와 결혼식을 올리는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조금 부끄러웠다.

[길드]민초맛사탕 : 겸아 친정은 여긴 거 알지?

[길드]보미 : 마자마자 저 길마 이름만 길마지 하는 건 1도 없음

[길드]보미 : 말 안 들으면 찾아와 패버리게

[길드]간계밥 : 형ㅋㅋㅋㅋㅋ 힘내세요..!

전혀 힘이 나지 않는 권경배의 말을 끝으로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하늘로 등이 하나둘 떠오르며 해가 뜨기 전 주위를 밝혔고, 주변의 풍경이 모인 사람들의 입이 떡 벌어질 만큼 화려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벽돌로 만들어진 벽에 백색의 천이 둘렀고, 곧이어 붉은 리본이 자리 잡았다. 정원엔 테이블과 의자가 생겼으며, 반짝이는 별이 하나씩 자리를 잡는 그때 하늘에서 한 줄기 빛이 내렸다. 반투명한 모습의 라디아탄이었다.

아니, 이 게임은 라디아탄을 너무 써먹는 게 아닌가? 무려 네 번째 재회에 반가움보다 뾰로통한 기분이 먼저 차올랐다. 그런 나와 다르게 신비로운 분위기에 빠진 사람들이 저마다 놀란 듯 숨을 크게 들이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의 아이의 반려여, 그대의 맹세를 눈에 새기기 위해 내 친히 땅으로 내려온 것이다.

“자기야, 라디아탄 되게 자주 보는 것 같지 않아?”

“수인의 살아 있는 신이라 그런 거 아닐까요?”

“신의 사자라는데, 나 벌써 세 번이나 봤어.”

“저는 네 번이요….”

화환과 속삭이며 웃자 라디아탄이 의아한 얼굴로 가까이 다가오더니 내 얼굴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나의 아이가 행복하게 웃고 있군. 그대, 축복받은 아이의 길을 함께 걷던 자지. 고난을 뛰어넘고, 역경을 버텨낸 강한 그대여, 그대는 이들의 왕의 반려가 될 자격이 충분하다. 그러니 감히 묻겠다. 그대는 나의 아이의 길을 지금처럼 밝혀 줄 자신이 있는 건가?

화환은 얼굴을 굳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한 건지 어깨마저 딱딱하게 굳힌 채 라디아탄을 보고 있었다. 뭐야, 누가 보면 라디아탄이 내 아빠인 줄 알겠네.

화환의 옷자락을 슬쩍 당기며 올려보자 그제야 다시 나를 돌아본 화환의 얼굴에 웃음이 천천히 피어올랐다.

-구원자, 나의 마지막 아이야. 그대는 지금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인가?

여행은 즐거웠냐는 물음이 생각났다. 그때는 미처 경황이 없어 고개만 끄덕였지만…. 지금은 자신 있게 답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살아온 날을 돌아봤을 때 가장 즐거운 여행이었다고 말이다.

지금도 즐겁다고, 누구보다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중이라는 걸 확신한다는 의미로 긴말 대신 라디아탄과 눈을 맞추며 크게 웃으며 뒤 고개를 끄덕였다. 라디아탄이 자기가 더 행복한 얼굴로 웃으며 양옆으로 손을 크게 벌리자 하늘 위로 천천히 해가 뜨며 어둠이 점점 물러나기 시작했다.

-늘 행복한 순간을 살아가길.

반짝하는 빛과 함께 라디아탄이 사라진 하늘은 밝아졌고, 그를 처음 만난 산과 성이 기대어 있는 산으로 커다란 무지개가 생겼다.

그 무지개는 이내 사라졌고, 정원을 채우고 있던 사람들의 손 위로 작은 선물 상자로 변해 내려왔다. 나와 화환의 앞엔 가장 커다란 상자가 자리 잡았으며, 묶인 리본을 풀자 거기엔 알이 두 개 자리 잡고 있었다.

“뭐야, 지금 펫 준 거예요?”

“그런 것 같은데? 우리 애 생겼어, 자기야.”

주변을 둘러보자 거기는 펫이 아닌 치장용 악세와 운이 좋은 몇 명의 사람들에겐 특수효과가 붙은 아이템이 나왔다. 이게 그 답례품이겠지?

화환의 연인이라는 칭호는 어느새 반려로 바뀌었고, 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도 조금 더 화려한 외형으로 바뀌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끝났겠지? 서둘러 작은 늑대의 외형으로 변해 화환의 바짓자락을 긁자 그는 알을 배낭으로 넣곤 나를 안아 올렸다.

“19세 게임 맞아요? 어떻게 첫날밤도 안 보냈는데 애가 생기지?”

“그래서, 우리 애들 안 깨워 줄 거야?”

“…그건 아닌데. 이름은 뭐로 할까요?”

“태어나면 생각해 보자.”

채하현이 난간을 훌쩍 뛰어내려 사람들의 곁으로 다가갔다. 나르 동생일 거니… 튜나르, 튜나? 이름이 무슨 상관이겠어, 예뻐만 하면 되지. 창의력 0인 머리통은 생각하기를 거부했다.

“야, 채길마 신행 어디로 가냐?”

검은 연기가 흔들리는 뿔이 달린 머리띠를 쓴 수박 누나가 만족한 얼굴로 묻자 대답은 엉뚱한 데서 들렸다.

“축제 끝나야 갈 수 있지 않나? 어쨌든 겸이가 왕이잖아.”

“그건 그렇지. 아, 유우겸 레이드 공지 봤냐?”

“아니, 안 봤는데?”

“그거 칠죄종 전부 깨야 입장권 준다던데?”

“그럼 거기 그냥 던전으로 변한 거야?”

“그렇겠지. 구원자 무기 뜬대.”

“우린 다시 갈 필요 없겠네. 나르가 다 찾아 줬잖아.”

“야. 겨미…. 칠죄종인지 그거 어캐 깨냐?”

겨울이 형이 불퉁한 얼굴로 가까이 다가오는 걸 보는데 갑자기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둘러보자 어디서 많이 보던 검은 로브의 사람이 길을 뚫으며 우리가 있는 곳으로 달리듯 걸어오고 있었다.

“씨발, 겨우 여기까지 왔네. 미친 사람 개많아…. 겨미 자기야!”

“구름이 누나 와 계셨어요?”

“축의금도 빵빵하게 냈어, 입구에서 푸름이랑 사탕이 걷고 계시더라….”

구름이가 강탈이라도 당한 듯 우울한 얼굴로 말을 얼버무렸다.

“겸이 님? 유우 님? 처음 뵙네요.”

“어, 써니 언니?”

“수박이 오랜만이지, 일단 겸이 님하고 인사 먼저 하고.”

써니면 써니사이드업으로 하늘 길마가 아닌가…. 어색하게 눈을 피하자 무릎까지 굽혀 내 얼굴을 빤히 보던 사람이 후드를 벗곤 환하게 웃으며 내 손을 맞잡았다.

“왜… 이러세요?”

“아니 소문으로만 들었지, 이렇게 만난 건 처음이라.”

주황색의 커다란 여우 귀를 쫑긋거더니 내 손을 만지작거렸다. 그때 옆에 있던 겨울 형이 구름이 누나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시간이 있냐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나태 던전이 그렇게 가고 싶은 건가….

“겨미 자기야, 나태 약점이 뭐야?”

“그 던전 지금 열린 거예요?”

“응, 축제 기간엔 전부 열어 두고 요일별로 다른 던전 열린다는데?”

“그럼 이벤트는요?”

“아 맞다, 이벤트….”

“일정 보니까 이벤트도 오늘 18시부터 하던데, 지금이 6시니까 넉넉해.”

일정표가 있었나? 부지런한 구름이 누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곤 이마에 있는 보석이라 알려 주었다.

“나태뿐만 아니라 전부 똑같아요.”

앞에 있던 사람들이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마스크라도 쓰고 가라 알려줄 걸 그랬나?

왕성 입장 가능 조건을 길드원으로 바꾼 뒤 가든 하우스에 들어왔다. 곧이어 축의금 정산이 끝난 두 남매가 세상을 다 가진 얼굴로 나타났다. 생각보다 금액이 많았고, 10%씩 챙긴 후 제각각 쿠션 위로 자리를 잡고 누웠다.

“사람 빠지는 것 봤어요? 다 나태 간 거겠죠? 거기 냄새 엄청 심한데….”

“그러게, 그래도 영상 때문에 예상은 하고 가시지 않았을까? 우린 그땐 아무것도 모르고 갔던 때라 힘들었는데.”

“맞아요. 나르 없었으면 저 죽어서 거기서 퀘스트 끝났을걸요.”

나르를 떠올리자 선물로 받은 알이 생각나 화환의 팔 위로 손을 턱 얹곤 고개를 들었다.

“형, 부화기 있어요?”

“응, 송금이 형이 두 개 보내줬어. 부화하자고?”

고개를 끄덕이자 앞으로 부화기를 꺼낸 알을 넣어 부화 시작을 설정했다. 72시간이라는 예상 부화 시간이 뜨자 이상함에 골똘히 부화기만 내려다보았다.

“72시간이면 여기서 3일 아니에요? 왜 이렇게 길지.”

중얼거리며 부화기 앞에 코를 박고 바닥에 엎드리자 화환이 말없이 내 등을 두어 번 쓰다듬었다.

던전을 클리어한 사람들이 이벤트 시간이 되어서 수인 왕국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막 열린 무투 대회를 구경하다 송금이 형의 부탁에 입고 있던 상의를 벗어 준 뒤 발명상의 심사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어, 무투 대회 결승전이라는데요? 한글 님이랑 써니 님 올라갔대요.”

“누가 이길 것 같아?”

“한글 님이요….”

푸름이 겨울 형의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같이 던전을 돈 탓에 내적 친밀감이 쌓일 대로 쌓인 겨울 형이 푸름을 한 번 노려보았고, 막 시작된 시합에 뻥긋거리던 입을 꾹 다문 채 앞만 보고 있었다.

1등은 당연히 송금이 형일 거로 생각했는데, 역시나 내 예상을 보기 좋게 빗나갔다. 하늘 위로 던지면 수백 개의 폭죽이 터지는 시비충 no.275번이 1등을, 2등은 드래곤 하트로 만든 목걸이를 내놓은 금비 님이, 송금이 형의 옷은 3등에 자리 잡았다.

“시비충이 제작직이에요?”

“응, 폭탄마라던데. 그렇게 시비를 걸고 다녀도 다른 사람들이 아무 말 못 하는 이유지.”

“생각보다 능력자네.”

화환의 손에 들린 시비충의 폭탄을 올려 보았다. 이게 폭죽이라고? 암만 살펴보아도 그저 만화에 자주 나오는 검고 둥근 외형이라 터질 때의 모습이 상상이 안 되는데….

“피안 길마님.”

한참 폭죽을 가장한 폭탄을 둘러보는데 낯선 말소리가 뒤에서 들려 왔다. 화환이 자기를 부른 사람 쪽으로 몸을 틀자 거긴 하늘색 머리에 은태의 모노클을 낀 단정한 얼굴의 유저가 있었다.

그쪽을 빤히 바라보자 멋쩍은 듯 웃는 사람의 머리 위를 보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아이디가 자리 잡고 있었다.

‘시비충’

역시 사람은 겉모습으로 판단하면 안 되는 거구나.

“길드원 안 구하세요?”

시비충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옆에선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나 그쪽을 보니 사탕 누나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마시던 음료를 떨어뜨리곤 이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게 보였다.

“시비충 님, 전에 제가 오라고 했을 땐 무릎 꿇고 빌면 생각해 본다고 했잖아요….”

인성이 이렇게 다채롭게 빻을 수도 있구나.

“아…. 제가 꿇을까요? 저 무릎 되게 싼데.”

“뭐야, 미친놈인가? 그러면 또 얘기가 다른데…. 1반 진수 때문에 이래여?”

내심 반가워하는 목소리로 웃음을 참는 사탕 누나가 이제 당당하게 얼굴을 들곤 말했다.

“진수 알고 계세요? 걔 피안 들어가면 아이디 알려 주겠다 해서. 역시 안 될까요?”

사탕 누나가 시비충을 훑어보았다. 마음엔 들지만 저번 날의 수모가 생각나는 듯 시시각각 표정이 바뀌었다.

“님 진수 찾으면 뭐 할 건데요?”

“개심하게 놀려먹어야죠. 캐릭터 알면 가까이서 농락할 수 있잖아요. 일단 목표는 울리는 거긴 한데.”

“의도가… 심금을 울리네요. 직관 가능할까요?”

“사탕 님 그런 거 좋아하시는구나. 관음하는 거.”

“관찰력도 좋네. 합격입니다. 채길마, 괜찮지?”

사탕 누나는 해맑게 기뻐하는 시비충과 할 얘기가 있다며 으슥한 곳으로 걸어갔다. 가만 보니 사탕 누나도 채하현과 친한 이유가 있었네. 이러다가 피안은 유명한 또라이 집단 길드가 되는 게 아닐까….

무투 대회의 1등은 역시나 한글 님이 차지했다. 시비충과 채집 1등의 처음 보는 유저, 그리고 연인 보상은 참여율이 저조해 급하게 짠 두 사람이 나란히 앞으로 나와 상자를 받아 갔다.

성 위에 떠 있던 상자 하나가 내 손으로 내려왔고, 상자 뚜껑을 열자 펑 하며 울리는 폭죽과 함께 별 무리가 성 전체를 감싸며 떨어져 내렸다.

시비충은 무사히 피안으로 들어왔다. 자축하는 건지 1등을 안겨 준 폭죽을 하늘 위로 높이 던졌다. 펑펑 하는 큰 소리와 함께 하늘 위로 색색의 폭죽이 터지며 수인족 왕국의 축제가 무사히 막을 내렸다.

[Hunter : A New Adventure 03번 채널로 입장합니다.]

[환영합니다, 헌터님!]

보이는 건 화환의 얼굴과 익숙하게 보던 유리 벽 바깥쪽,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꽃들이었다. 역시 어뉴어의 우리 집. 익숙한 분위기 낯선 것이라곤 밖에 보이는 정원사가 셋이나 생겼다는 것 하나였다.

“자기야, 우리 애들 태어났대.”

“안 보이는데요?”

화환이 무언가 만지작거리더니 갑자기 눈앞으로 조그마한 두 인영이 나타났다. 한 명은 화환을 꼭 빼닮은 미니어처 버전이었다. 다른 걸 굳이 찾자면 이마에 뿔 하나 정도?

다른 한 명은 바닥을 구르고 있는 작은 늑대였다. 가장 작은 외형을 하는 나보다 훨씬 작았으며, 색이 검정이라는 것 빼곤 누가 봐도 내 캐릭터의 진짜 아기 버전이었다.

“미친….”

“귀엽지? 누구 데려갈래? 주인 정해 달라는데.”

“저, 얘 해도 돼요? 저랑 똑같이 생긴 애.”

이게 아기 늑대지 내가 아니라…! 눈높이에 맞춰 앞에 엎드리자 쪼그만 게 성격은 나쁜 건지 아르릉 하며 화를 내다 화환에게 달려가 버렸다. 뭐야. 되게 하찮은데, 상처다….

“얘는 내가 좋은가 본데?”

화환의 다리를 긁는 아기를 노려보다 내 주위를 빙빙 돌고 있는 아이의 옷자락을 물어 쿠션 뒤로 들어갔다.

“너는 내가 좋은 거지?”

아무런 말 없이 함박웃음을 짓는 아이의 이름을 르네로 설정한 뒤 배낭 안에 남은 간식을 모조리 르네의 앞에 꺼내 주었다.

“자기야, 이름 벌써 정한 거야?”

“으릉.”

저 늑대는 왜 이렇게 화를 내는 거지? 동족 혐오인지 가까이 오지도 않고 화환의 뒤로 숨으며 으르릉거리기만 했다. 서열을 확인시켜 줘야 하는 건가?

때마침 권경배가 가든 하우스의 문을 열며 안으로 들어왔다.

“미친…. 뭐야, 둘이 애 낳은 거예요? 어뉴어도 썩어 가는 건가?”

“아니, 멍청아. 라디아탄이 결혼 선물로 준 알 이제 막 부화한 거야.”

“멍총아.”

“겸아, 우리 애가 욕부터 하잖아.”

“형, 다른 애는 계속 화만 내는데 그게 중요해요?”

“겸이 미니어처라 그런지 하찮아서 귀엽잖아.”

“하찮다니…. 애가 듣는데. 쟤도 다 알아듣는다고요!”

권경배의 표정이 점점 굳어가더니 고개를 저었다.

“겜생 개피곤할 게 눈에 훤한데 이거 착각이겠죠?”

오늘도 역시…. 조금 시끄럽지만 평화로운 게임 생활이 시작되고 있었다.

완결 (co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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