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뮤첼 연구소 (10/11)

3. 뮤첼 연구소

금요일이었다. 이게 황제 감금인가? 몸을 갈아 모두 내 편의에 맞춰 주는 채예쁜이 기특해 하루 이틀 같이 있다 보니 어느새 사흘이 지났고, 다들 뮤첼의 연구소를 찾는 나르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래서, 교만이 뮤첼의 편이라고?”

“이젠 계란이가 묻는 거신가? 교만을 감옥에 넣은 자가 라디아탄이다! 그 탓에 교만은 라디아탄이 사랑한 수인을 혐오하지. 때문에 뮤첼 쪽에 붙은 것이란 것도 설명해야 하나!”

“아니, 알아들었어. 그래서? 무슨 공격을 하는데?”

“알 수 없다. 교만이 뮤첼의 연구소에 자리를 잡은 건 뮤첼과 거래를 한 탓이겠지. 그러니 직접 만나지 않으면 알 수 없다….”

“겸이가 죽으면 안 되는 건 여전하고?”

채하현이 품에 누운 내 배를 쓰다듬으며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듯 감정 없이 묻자 나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뿐만이 아니다. 뮤첼을 만났을 때도 겨미는 죽으면 안 댄다.”

“유우겸 내가 봤을 때 전생에 왕이었어. 분명해.”

“일단 겸이 보호가 최우선이네. 푸름, 수박 나르까지 겸이한테 실드 겹겹이 쳐주고, 사탕인 겸이만 보고 있어.”

“그러게, 장소가 장소인 만큼 교만의 왕이 죽어도 겸이한테 붙어 있어야겠다.”

한숨이 절로 났다. 이번 던전에선 파티원들이 또 얼마나 죽을지…. 미리 부활 스크롤을 잔뜩 나눠준 송금이 형의 으쓱한 어깨만 보다 바닥으로 내려왔다.

“만약에 클리어 못 하면 어떻게 돼?”

“글쎄, 수인은 멸망하게찌. 그래도 걱정하지 마라. 그대들의 세상은 여전할 거시다.”

걱정 안 할 수가 없겠는데…?

“아직 무기 착용이 안 되는데 언제라도 바꿔 착용할 수 있게 준비하고, 빨리 클리어하죠.”

긴장되는 발걸음으로 뮤첼의 연구실과 이어진 동굴 앞으로 걸어가자 나르는 살랑거리는 원피스를 제복으로 갈아입었다. 치장이라 효과는 똑같을 텐데. 의아한 얼굴로 나르만 올려 보자 수줍게 웃으며 앞으로 날아왔다.

“멋있어 보이지 않나! 그리고 뮤첼이 나와도 나르는 겨미와 같은 옷을 입은 걸 보면 포기할지도 모른다.”

뭐지 이 귀염둥이는…. 수인이었으면 머리를 마구 쓰다듬어 주었을 텐데. 나르의 배를 코로 한 번 눌러 준 뒤 던전 입장하기를 눌렀다.

무조건 클리어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무거운 발을 움직여 안으로 들어왔는데 동굴은 예전 나르의 기억에서 보던 것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조금 더 질척하다고 할까?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뮤첼의 연구실은 저기 동굴의 끝에 있다.”

“어? 여기…. 거기잖아, 나르 친구들이 저주받은 곳.”

푸름의 말에 나르의 작은 어깨가 움찔하고 떨려왔다. 레미와 체이슨의 이야기만 나오면 기가 죽는 나르에 푸름을 노려보자 푸름도 아차 싶은 건지 입을 가리곤 뒤로 조금 물러났다.

“지금은 안식의 품이랬어. 뮤첼까지 잡으면 환생의 길로 걷는다니까, 다들 힘내 주세요….”

갈수록 자신감이 없어졌다. 내가 힘내는 게 아니라 남들을 힘내게 해야 하다니…. 하지만 송금이 형의 제작 옷까지 입었으니 기대가 되기 시작했다. 저번 던전보다 강해졌지 않은가!

으슥한 동굴을 둘러보고 밖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오늘 건 한 달을 질질 끈 이 지겨운 퀘스트를 마무리 지을 수 있는 날이 될 것이라는 생각하자 걸음을 옮기는 게 조금 더 쉬워졌다.

[숨겨진 던전을 발견했습니다. 뮤첼의 비밀 연구실 입구.]

제일 먼저 보인 몬스터는 벽을 타고 내려오는 슬라임이었다. 어렸을 적 했던 게임의 귀여운 외형이 아닌, 닿기만 해도 저주에 걸릴 듯 불길한 색이었다. 가정 앞에 있던 수박 누나가 마법을 썼지만, 전혀 먹히지 않았다.

“수박이 불을 켜라! 저것들은 몸 안에 있는 핵을 파괴해야 한다! 어두워서 보이지 않으니 어서 불부터 켜라!”

나르의 비명에 수박 누나가 예전에 봤던 빛나는 구슬을 하늘에 띄웠다. 그러자 검은 얼룩이 묻은 슬라임 안쪽에선 동그랗게 핵이 흐릿하게 보였다. 보미 누나가 단도를 던져 그걸 깨트리자 슬라임이 녹아 바닥과 하나가 되었다.

“미친, 그동안 다녔던 던전이 다 헛수고네….”

“여긴 그대들이 모르는 고대의 던전이니 그럴 수밖에! 나르만 믿어라.”

“나르 언니만 믿어라!”

믿음직한 나르의 말 뒤로 수줍게 붙은 나나의 말에 금세 활기를 되찾은 파티원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슬라임의 핵을 파괴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마지막 남은 슬라임의 핵을 파괴하자 커다란 굉음과 동시에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놀라 귀를 막고 바닥에 엎드리자 머리 위로 실드가 둘러졌고, 푸름이 여기로 달려오고 있었다.

뭐지, 무슨 일이지? 우왕좌왕하는 파티원들을 보는데 딛고 있던 바닥이 네 갈래로 나뉘며 바닥이 무너져 내렸다.

“뭐야, 무슨 일이야… 여기 누구 없어요?”

“겨미? 겨미 여기 있나?”

“나르야? 어두워서 안 보여.”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르가 반짝이는 마법진을 그려 맵을 탐색했다. 흐릿한 반짝임에 중앙에 있는 나르의 가까이 가자 돌무더기가 바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군가! 여긴 겨미와 나르가 있다.”

“…아, 잘 들어왔네. 자기야.”

“와, 씨. 뭐예요? 지진? 땅이 무너진 거 맞죠?”

목소리를 들으니 햇살과 화환이었다. 햇살이 수박 누나가 만들었던 것과 같은 빛나는 구슬을 꺼내 주변을 밝혔다.

“깜짝이야. 겸이 님, 지우 못 보셨어요? 지우 있는 쪽으로 뛰어내렸는데.”

“여긴 저랑 나르뿐이에요.”

“아….”

“나르가 길을 안다. 우리는 전부 네 방향으로 나뉘어써! 우리는 남쪽이다.”

“다른 사람들은?”

“채팅이 가능하나? 일단 모여야 해. 우리는 앞으로 가야 하고, 북쪽에 위치한 사람들은 멈춰야 한다.”

나르는 사람의 수와 방향은 알지만 누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일단 다른 사람들은 그 자리 그대로 지키게 하고 우리가 데리러 가야겠네.”

“그렇죠? 맵도 안 뜨고, 동굴이라 자기가 어디 있는지도 모를 테니까….”

[파티]간계밥 : 뭐야, 우리 흩어진 거?

[파티]보미 : 나는 사탕이랑, 뽀또 있는데

[파티]간계밥 : 저는 송금이 형이요

[파티]장꾸 : 우리는 지우랑 수박, 푸름이. 여긴 길이 두 갈래야

[파티]화환 : 그 자리 그대로 지키고 있어요. 우리가 데리러 갈 테니까.

“나르, 지금 두 명이 있는 방향은 어디야?”

“동쪽이다. 저기 앞으로 난 길로부터 오른쪽이지. 네 명이 있는 곳이 북쪽이야. 움직이면 안 대.”

[파티]유우 : 계란이 거기 빛 있어? 길 어디어디 있는지 확인 가능?

[파티]빛과송금 : 라이트 금방 만들어, 5분만.

[파티]햇살 : 장꾸형네는 움직이지 말래요.

[파티]보미 : 우리는..? 여긴 캐스터도, 송금이도 없어서 잘 안 보여

별거 아닌 말이 유난히 애잔해 보였다.

[파티]유우 : ㅋㅋㅋㅋㅋ 데리러 갈 거예요, 나르가!

할 말을 마치고 송금이 형의 말을 기다리고 있는 중 화환이 또 나를 안아 들었다. 불안해서 손에 뭐라도 쥐고 싶어서 그러나?

[귓속말]유우 : 무서워요?

[귓속말]화환 : 겸이가 다른데 떨어졌을까 봐 무서웠지.

그건 아니네. 채하현이 하는 말을 헛소리로 들으며 웃자 내 얼굴을 본 건지 안고 있는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숨이 막힐 것 같아 손을 퍽퍽 내리치자 바로 힘이 빠졌고, 송금이 형의 채팅이 올라왔다.

[파티]빛과송금 : 됐다. 여기도 두 갈림길인데, 어디로 가?

[파티]화환 : 한쪽으로 가보실래요? 나르가 맵 탐색해야 해서

잠시 후 나르가 다시 한번 마법진을 그렸고, 그쪽이 아니라는 말과 우리는 앞으로 나 있는 길로 걸었다. 나르를 한 명씩 끼고 산다면 세상이 아름다워지지 않을까? 유난히 듬직한 나르의 뒷모습을 보는데 햇살이 멈춰 섰다.

“저기, 뭐가 움직이는데요?”

“골렘이다! 길마, 가슴을 노려라, 거기가 약점이다.”

이것 봐, 똑똑이. 여섯 개의 돌로 된 거대한 몬스터들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노란 눈동자를 반짝이며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땅이 울리고, 하늘에선 돌조각이 떨어졌지만, 나르의 실드로 셋 중 누구도 체력이 깎이는 사람이 없었다.

내 마력은 나태의 야장으로 늘어났기 때문에 나르에게 빌려주고도 모자라지 않았다. 화환은 우리 쪽으로 하나둘 다가오는 골렘의 가슴으로 총알을 박아 넣으며 앞으로 달려갔다. 역시 우리 길드 대표 겜창….

햇살이 골렘 쪽으로 불을 밝혀 주기 무섭게 쓰러트리며 달린 덕분에 꽤 쉽게 길을 뚫을 수 있었다.

“와, 크기만 컸지, 별거 아니네요.”

햇살이 감탄하듯 말하자 화환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일반 무기로는 상처도 못 낼 만큼 단단하던데? 송금이 형이 강화해 준 탄알로 겨우 잡은 거야.”

“길마, 전에 썼던 탕! 하는 게 아니었지 않은가! 지금 쓴 것도 송금이 만든 거신가?”

“응, 리자드킹의 불꽃인가? 그걸 섞었다던데. 그래서 한 번에 뚫을 수 있게 됐네.”

반동이 심해 아프다 찡찡거리는 화환의 귓속말에 가만히 어깨를 토닥이며 앞으로 좁게 난 길을 가리켰다.

여기는 얼마나 넓은 건지 한참을 걸어도 만나지 못한 권경배에 나르도 몇 번씩 맵 탐색을 해야 했다. 조금만 더 가면 된다는 말에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자 커다란 물웅덩이와 색색의 꽃들이 잔뜩 피어 있는 신기한 곳에 도착했다.

“여기 해도 안 드는데 이렇게 꽃이 필 수 있나?”

“게임이잖아요. 그래도 신기하긴 하다.”

편하게 주위를 둘러보며 묻는 내 물음에 걷느라 지친 햇살이 대답하며 가까이 가자 나르가 앞을 막아섰다.

“햇사리 그 앞은 안 댄다! 가까이 가지 마라, 저긴 이상한 게 있다.”

“이상한 거?”

햇살의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웅덩이에서 튀어 오르듯 나온 건 도깨비 가면을 쓴 커다란 뱀이었다.

“저것은 죄를 지어 신수가 되지 못한 이무기이다!”

서양의 용인 드래곤은 몬스터고 동양의 용은 신수인가? 국뽕이 넘치는 전개에 마음이 뻐근해졌다. 역시 한국인이 만든 게임….

나르가 손가락질까지 하며 이무기를 가리키자 이무기는 화가 난 듯 나르와 내가 있는 쪽을 향해 달려들었다. 화환이 뒤로 물러나며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에 나를 내려 둔 뒤 나르를 불렀다.

“나르, 겸이 잘 숨겨 줘야 해.”

“나르만 믿어라. 이제 곧 계라니가 올 테니 조금만 버텨라, 길마!”

화환이 나르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은 뒤 양손에 무기를 들고 달려가는 모습을 멍하게 보고 있었다. 나도 싸울 줄 아는데…? 묘하게 자존심이 상해 앞으로 뛰어 나가려는데 나르가 내 꼬리를 잡으며 실드를 둘러주었다. 이 새끼나 저 새끼나…. 이따 보자.

생각보다 이무기가 너무 강했다. 화환은 아까 골렘을 뚫었던 총알로 이무기를 공격하는 것 같았지만 전혀 먹히지 않았고, 이무기는 장난이라도 거냐는 듯 유연하게 몸을 피했다.

그러곤 이상한 소리로 한 번 울자 검은 먹구름이 동굴 천장으로 생겨나더니 이내 거센 비와 번개가 바닥으로 내리쳤다.

나르와 내가 있는 곳도 안전하진 않았다. 순식간에 털이 젖어 몸에 붙었고, 앞도 잘 보이지 않는 상황이 되자 나르가 다시 커다란 실드로 먹구름을 가렸다.

“햇사리! 불을 써라!”

“안 돼, 나 화염계 공격은 못한다고….”

“캐스터도 계열이 나뉘어요?”

“네, 저는 전기 계열이에요.”

“뭐든 좋다! 이무기를 물에서 떨어트려라!”

몸을 한 번 부르르 털어내곤 고개를 뒤로 돌려 싸우는 중인 두 사람을 보자 내 앞의 벽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무기만 나오는 게 아닌가? 공격 자세를 잡자 나르도 긴장하며 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하필 화환이 나를 내려둔 곳에서 골렘이 하나둘 일어나기 시작했다.

“겸이, 위험하다!”

“여기 안 위험한 데가 있긴 하냐고.”

바로 눈앞의 돌이 몬스터로 변하는 걸 봐서 그런지 다리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미친 거 아니야? 뭔 돌멩이가 이렇게 빠르게 움직여?

내가 멍하게 있는 사이 주변에 굴러다니던 커다란 돌을 주워 내 쪽으로 던지려는 골렘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프로텍트를 건 뒤 눈을 꼭 감자 몸에 뭔가 닿은 느낌과 벽으로 처박히듯 날아갔다.

“깽!”

“겨미!”

나르의 비명에도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한 대만 더 맞아도 죽을 것같이 체력이 떨어져 서둘러 힐을 쓰려 했지만, 생각처럼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죽으면 다 물거품이 되는데…. 바닥을 기어 도망쳤지만 골렘은 나를 따라 걸어왔다.

나르는 비를 막는 것만으로도 벅차 움직일 수 없었고, 멀리서 햇살이 놀란 얼굴이 보임과 동시에 다시 한번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계라니, 왜 이제 오나! 겨미가 죽을 뻔했지 않은가!”

“우리 진심으로 뛰어왔는데, 너 이럴 거?”

“흥, 이번 한 번만 봐주게따.”

권경배는 잠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은 뒤 아직 내 가까이에 있는 골렘의 숨통을 끊었다. 세상에, 내가 권경배를 이렇게 반가워할 날이 오다니….

화환도 나르가 말한 총을 꺼낸 건지 동굴이 울릴 만큼 큰 탕 소리와 함께 이무기를 공격했다. 스치기만 해도 터지는 살점에 이무기는 시끄러운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 쳤다.

송금이 형도 반짝이는 실을 풀어 골렘의 발을 막았고, 권경배가 기다렸다는 듯 한 마리씩 쓰러트려 나갔다.

다시 만난 사람들을 반가워하던 햇살이 바로 물가로 달려가 그 안에 손을 넣었다. 그러자 반짝거리는 전기가 물웅덩이 전체를 타고 흘렀다. 놀란 이무기가 처음으로 꼬리까지 밖으로 꺼내며 마구 발버둥을 쳤다.

“길마! 꼬리와 몸이 이어진 부분을 노려라!”

나르의 말에 화환은 숨을 참으며 조준하더니 이내 소총의 총성과 이무기의 고함이 동굴 벽을 타고 울렸다. 포션을 마시며 전투 중인 사람들을 피해 구석진 자리로 옮기는데 화환의 목소리가 들렸다.

“계란.”

권경배도 자기를 부르는 소리에 튀어 나가 너덜거리는 꼬리를 아예 끊어냈다. 마지막으로 화환이 이무기의 일그러진 얼굴 정가운데의 이마로 총을 쏘자 이무기는 다시 물속으로 들어가며 흑백으로 물들었다.

어느 정도 회복한 나는 파티원 주변을 돌다 바로 화환에게로 달려갔다. 어디 다친 곳은 없는지 멀뚱히 선 예쁜이를 살피는데 먼지 한 톨 묻은 곳 없이 건강한 모습에 마음이 놓였다.

“와 씨, 여의주 주는데? 이거 저주받았다는데, 가지고 있어도 괜찮겠지…?”

“뭐야? 나 만렙이라고 이제 나한텐 템 안 들어와?”

“좋은 날 다 갔네, 유우겸도.”

“놀고 있을 때가 아니다! 다른 사람들도 위험하지 않은가! 빨리 움직여라, 겨미!”

“너 나나 때문에 그러지?”

“그, 그러타. 언니가 동생을 걱정하는 게 뭐가 잘못인가?”

잘못은 아니지만 조금 서운했다. 겨미, 겨미, 아기 늑대 하며 쫓아다닌 게 엊그제인데…. 그냥 바닥에 배를 깔고 엎어져 나르를 올려 보았다.

“나 쉬었다 갈 거야.”

나르가 멍한 얼굴로 나를 내려 보았고, 송금이 형에게 여의주를 팔던 권경배는 그 얼굴을 보고 크게 웃었다.

“겨미는 계속, 계속 쉬었지 아는가!”

“좀 전에 나 죽을 뻔했잖아. 놀라서 다리가 안 움직여.”

씩씩거리던 나르가 내 등을 안고 날아올라 화환의 손에 들려 주었다. 채하현 방금 싸워서 힘들 텐데…. 발을 버둥거리자 등을 토닥이며 목덜미에 얼굴을 부볐다.

“걸어갈 수 있어요.”

“알지, 자기 다리 튼튼한 거.”

“내려 달란 말이었는데.”

“싫다는 대답이고.”

그래, 뭐…. 네가 그렇다면. 그러고 보니 채하현은 유난히 붙어 있는 걸 좋아했다. 화장실 갈 때와 씻을 때를 제외하면 어디든 따라왔으며, 내가 따라해 본다고 한번 쫓아다녔을 땐 세상 행복한 얼굴로 웃었으니 말이다. 내가 그렇게 좋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는 입꼬리를 가리며 앞만 보고 걷는데 이상하게 한참을 걸어도 조용한 발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몬스터는 이게 끝인가?”

나르는 긴장한 얼굴로 권경배의 목에 매달려 있었다. 한참을 걸어가는 중, 문득 음악 소리와 ‘얼쑤’, ‘좋다’ 하는 추임새가 들려 왔다. 이건 여기 있는 사람 중 유일한 수인인 내게만 들리는 소리 같아 고개를 갸웃하며 귀를 기울이자 역시, 음악 소리가 맞았다.

“음악 소리가 들려요. 얼쑤라는데?”

“나는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데?”

“나도….”

화환과 송금이 형이 나를 따라 귀를 기울이는 듯했지만,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분명히 들리는데…. 사물놀이 같은 그런 소리요.”

발걸음이 빨라졌다. 주변이 흐리게 보일 만큼 달린 화환 덕분에 큰 소리와 함께 쿵쿵하는 발소리가 더욱 가깝게 들렸다. 앞을 바라보자 거긴 마을 축제라도 열린 듯 시끄러운 음악과 팔을 흔들며 춤을 추는 거대한 도깨비들이 있었다.

구석에 몸을 잔뜩 웅크린 사탕 누나와 사탕 누나를 감싸 안은 보미 누나가 보였다. 그리고 도깨비들 중앙에 울 것 같은 얼굴을 한 뽀또 님까지. 같이 노는 중인가?

“누나!”

“움직이지 마! 가까이 가면 체력이 떨어져.”

“새로운 자들이 왔군! 김 서방들이 늘었어!”

“하하, 좋네, 좋아! 이번엔 무슨 내기를 할까? 이보게, 무슨 내기가 좋겠나?”

순식간에 음악이 멈추었고, 껄껄거리는 도깨비 중 가장 큰 도깨비가 우리가 서 있는 방향으로 걸어오며 방망이를 땅에 내리쳤다.

그 순간이었다, 내가 그 도깨비의 손안으로 옮겨졌고, 대신 화환의 손엔 나무로 깎인 늑대 모양의 나무 인형이 들어가 있었게 된 건. 인형을 확인한 화환이 무작정 내가 있는 방향으로 달려왔다.

“김 서방, 성격이 참으로 급하오. 내 김 서방들에게 10각의 시간을 주지. 그동안 김 서방의 강아지를 찾으면… 그래, 김 서방이 원하는 부탁은 무엇이든 딱 하나를 들어주겠네.”

“찾지 못하면?”

“김 서방들은 우리가 만족할 때까지 우리와 놀아 주어야지.”

말이 끝나자 바로 곁에 있던 도깨비들이 저마다 방망이를 꺼내 바닥을 내려치자 그곳은 별별 물건들이 가득 찬 공간이 되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큰 도깨비가 나를 제 옷 안에 넣곤 도깨비불로 변하자 순식간에 눈앞이 흐려졌다. 눈을 몇 번 깜빡이자 이곳은 사람들이 한눈에 내려 보이게 하늘 위로 떠 있는 연이었다. 미친….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도깨비들과 숨바꼭질]

-도깨비가 변한 물건의 위로 손을 얹고 ‘찾았다.’를 외쳐야 합니다. 변한 물건이 도깨비일 때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며, 세 번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이보게, 김 서방의 강아지.’

뭐래 미친 요괴 새끼가.

‘요괴라니, 우리는 즐거운 걸 좋아하는 도깨비일 뿐인데. 그대의 소통 도구는 모두 막아 두었네. 나는 치사한 걸 아주 싫어하니 말일세.’

뭐야 생각이 들려? 야, 내려 줘. 우리 자기 애탄다고, 나쁜 놈아!

‘어허, 말이 많은 짐승이로군. 저 아래 타들어 가는 초가 되고 싶은 것인가?’

얌전히 눈을 깔곤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내려 보았다. 초라니…. 타면 아프겠지? 눈만 굴려 주변을 내려다보는데 다들 주변에 널린 물건들을 둘러보며 나를 찾고 있었다.

“한 사람당 세 번이면, 겸이 빼고 일곱 명이니까 21번의 기회가 있는 거죠?”

“아니, 우리는 빼야 해. 안 끼워 주는데?”

“우린 씨름했어. 개씨발! 졌더니 재미없다고 우리 구석에 몰아두고 춤추고 노래하더라.”

“나는 오래 버텼다고… 중앙에서, 중앙에서….”

뽀또 님의 어깨를 토닥이는 사탕 누나였다. 화환은 아무 말 없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닥 말고 하늘 좀 봐 줘, 예쁜아!

내 바람과 다르게 화환은 바닥에 널브러진 오래된 빗자루의 위로 손을 얹더니 ‘찾았다’ 하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빗자루는 눈이 하나 달린 작은 도깨비로 변했다.

“김 서방 어찌 알아차린 건가! 내 이번은 잘 숨었다고 생각했거늘!”

들킨 도깨비는 화환의 발치를 맴돌며 눈을 반짝였다. 화환은 그런 도깨비를 본 척도 않고 이번엔 새것으로 보이는 꽃병에 대고 ‘찾았다’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건 아무런 미동 없이 자리를 지킬 뿐이었고, 기회가 한 번 남은 화환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권경배 쪽을 바라보았다.

“낡은 물건 위주로 찾아야겠는데? 일단 여기 모아서 찾아보자, 열 번 남았으니까 신중하게.”

이번 놀이에 끼지 않은 사람들까지 낡은 물건들을 찾아 중앙으로 옮겨 주었다. 그렇지만 남은 기회는 열 번인데 모인 물건은 굳이 세어 보지 않아도 그 수가 넘었다. 아니, 그런데 나는 하늘 위에 있다고…. 이상하지 않은가,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동굴에서 하늘에 뜬 연이라니.

나 여기 있다고! 권경배! 채하현!!

‘김 서방의 강아지, 아무래도 이번 놀이는 나의 승리 같구먼.’

껄껄 숨이 넘어가게 웃는 도깨비 탓에 연이 마구 흔들렸고, 주위를 둘러보던 화환이 그걸 확인한 건지 권경배에게 연을 가져와 달라 이야기했다.

아닐 수도 있겠는데?

‘흠…. 내 실수했군. 하지만 기회는 많이 없지 않은가!’

도깨비의 말이 맞았다. 권경배는 내가 변해 있는 연 대신 짚신 위로 찾았다를 외쳤다. 햇살은 해진 갓을 들었으며 믿었던 송금이 형은 곰방대만 의심스레 바라보았다.

[파티]간계밥 : 유우겸 ㅇㄷ?

나도 알려 주고 싶었다. 태극 무늬가 그려진 연이라고.

야, 도깨비. 우리가 지면 너희랑 얼마나 놀아 줘야 해?

‘내 1200살이 넘어가는 나이이건만 말이 짧아도 너무 짧은 게 아닌가?’

짐승이라 높임말을 못 배워서 그래. 그래서 얼마나 놀아 줘야 하냐고.

‘하해와 같은 맘을 가진 내가 아니었다면 네 목은 이미 떨어졌을 것이야. 300년 전의 김 서방은 천수를 다할 때까지 우리와 있었지.’

미친…. 뮤첼 잡으러 가야 한다고. 너 걔가 얼마나 나쁜 놈인지 모르지?

‘너구리를 말하는 것인가? 알지, 알고말고! 아주 악독한 자야. 우리를 이곳에 가둬 둔 게 그자가 아닌가!’

그것 봐, 내가 걔 잡으러 왔다니까. 잡으면 풀려날 수도 있잖아!

‘…어허, 내 짐승에게 놀아날 뻔했군. 더는 네 말재간에 속지 않는다!’

답답함에 발을 동동 굴리자 연 아래로 길게 이어진 연 꼬리 중 가장 작은 꼬리가 살랑하고 흔들렸다.

이거다! 그동안 갈고닦은 발버둥은 여기에 쓰려고 한 연습이었나? 살랑거리는 연 꼬리를 본 화환이 그 위로 손을 가져다 대었다.

“찾았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시야가 어두워졌고, 도깨비의 옷깃 안에 박힌 머리를 밖으로 꺼내자 눈앞에 화환의 얼굴이 보였다. 무작정 그쪽을 향해 뛰어내리자 화환은 바로 손을 뻗어 내 몸을 받아 주었다.

“나 잘했죠? 내가 흔들어서 알아차린 거죠?”

꼬리까지 살랑거리며 화환의 얼굴을 올려보며 묻자, 화환도 반가운 건지 따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어, 겸이 덕분에 찾은 거야.”

가슴의 털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자랑스러운 얼굴을 하자 나르도 날아와 내 목을 마구 쓰다듬어 주었다.

“겨미는 숨바꼭질도 잘한다!”

“으이? 김 서방의 강아지여, 그대는 짐승이라 높임말을 모른다고 하지 않았나!”

순식간에 이곳에 있는 모든 눈이 내 쪽으로 닿아 왔다. 큰 도깨비의 눈치를 살피다 얼굴을 화환의 가슴팍으로 숨기자 커다란 웃음소리가 동굴 안을 가득 채웠다.

“하하, 즐겁구나, 즐거워! 이렇게 즐거운데 가락이 빠지면 안 되지! 장구, 징, 어서 신나게 놀아보세!”

“줄 건 줘야지. 바라는 거 하나라고 했지?”

“주인 김 서방은 기억력도 좋군! 무얼 원하나, 금은보화를 주랴? 아니면 저 뒤에 붙은 악귀의 힘을 빼 주랴?”

“악귀?”

“안쪽의 온몸을 포박당해 자리 잡은 악귀 말이다.”

안쪽이면 교만을 얘기하는 건가?

“그럼 두 번째 걸로 받아야겠지?”

보미 누나의 말에 권경배와 송금이 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바꾸면 안 된다네. 향이, 향이가 어디 있나!”

고개를 들고 소리치는 도깨비의 말에 멀리서 향로가 하나 굴러와 펑 하는 소리를 냈다. 향로는 작은 도깨비로 변해 큰 도깨비의 바짓단 뒤로 얼굴을 숨겼다.

“이리 숫기가 없어서야. 쯧, 적꽃의 향을 내어 주게나. 그 향이 다 타기 전까진 헛것에 휘둘리지 않을걸세.”

향이라는 도깨비는 옷깃을 주섬거리더니 긴 향을 하나 꺼내 화환의 발아래로 내려놓곤 도망치듯 뒤로 빠졌다. 도깨비라고 다 우락부락하진 않구나…. 이번에도 누구보다 빠르게 나르가 그 향을 주워 내 손에 올려 주었다.

향을 가방 안으로 넣곤 상세 설명을 열었는데, ‘도깨비의 향’이라는 이름만 뜰 뿐 어떤 설명도 없었다. 대신 화환을 올려다보는데 갑작스레 들리는 꽹과리의 소리에 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나 수인이라고…! 서둘러 귀를 막고 화환의 품으로 파고들자 화환이 뒤로 물러났다. 도깨비들이 놀이를 시작한 탓에 인사할 틈이 없었고, 우리는 그대로 그 장소를 벗어나야 했다.

“아, 뭔가 재미있었다.”

“그치? 숨바꼭질 얼마 만이냐….”

“도깨비들, 뮤첼이 여기 가둬 둔 거래.”

“그럼 도깨비들도 여기 지키고 있던 거야?”

사탕 누나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워낙 선한 도깨비들이라 지키기보단 들어오는 사람들이랑 놀았나 봐요. 우리 전에 온 사람도 죽을 때까지 놀다 갔다니까.”

“그게 선한 거야…?”

“일단, 때리고 피 튀는 건 없었으니까요….”

보미 누나의 말에 선한 게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다. 하긴 내보내 주지도 않고 놀이만 했으면…. 그게 벌이지. 좋은 곳으로 가라는 인사를 하는데 사탕 누나가 버프를 둘러 주어 빠르게 다음 파티원들과 만날 수 있었다.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곳에 도착하자 그들은 전부 편하게 누워 있었다.

“뭐야, 여긴 몹 안 나왔어?”

“없었는데요? 지겨워서 혼났네.”

송금이 형의 물음에 지우가 대답했다. 우리는 그 고생을 했는데….

“아! 사탕이, 나나가 어디에 있나! 왜 보이지 않지?”

“나나 지금 자고 있지. 아까 도깨비들이 계속 장난쳐서. 깨워 줘?”

나르가 머쓱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나나가 나타났다. 나나, 나나 노래를 부르더니 도깨비에게 정신이 팔려 잊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나나가 깨어나기 무섭게 나르가 나나의 손을 잡곤 반가워하더니 이내 동굴 이쪽저쪽을 산책하듯 날아다니며 잠시 평온한 시간을 보냈다.

“겨미! 여우가, 여우가 있다!”

“여우?”

“백여우이다, 새로운 왕의 탄생을 알려 주러 이곳에 온 거야! 어서 축복을 받아라!”

“백여우는 음욕 던전에도 있었잖아.”

“그건, 음욕이 만들어낸 생명체야! 이곳에 나타난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나르의 말에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여우는커녕, 백색으로 빛나는 건 해 대신 하늘에 둥둥 떠 있는 구슬뿐이었다. 헛걸 본 것 같은데.

“없는데? 착각한 거 아니야?”

“나나도 봤는데? 저기, 안쪽으로 들어가는 거.”

나나의 손까지 놓곤 답답한지 가슴을 두드리는 나르 대신, 나나가 여우가 있는 방향을 알려 주었다. 하지만 아주 좁은 틈 하나가 있을 뿐 여우는 없었다. 기분 탓인지 약간 빛이 새어 나오는 것 같은데….

“겨미 저 안으로 손을 넣어라!”

“…물면 어떡해?”

“그거시 축복인걸? 얼른 물리고 교만을 잡으러 가자!”

여기까지 오는데 이미 시간이 많이 흘렀기 때문에 바로 바닥으로 내려와 그 틈 안으로 발은 밀어 넣었다. 조금 밝아진 건가? 사실 무서웠기 때문에 슬금슬금 발을 빼자 그 틈으로 하얀빛이 나는 여우가 얼굴을 내밀어 나를 올려 보았다. 진짜 있었네, 여우가….

백여우는 음욕의 던전에서 봤던 흰 여우와 비교할 수 없게 빛이 났다.

“안 물어 주는데?”

여우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중얼거리자 여우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가더니 ‘캬웅’ 하고 울었다.

손에 과자를 들고 있는 나르가 바로 내려와 무릎을 꿇곤 여우를 올려 안았다. 우리 나르가 짐승이랑 말이 통하는 건가 싶어 둘만 번갈아 보자 나르가 작게 한숨을 쉬며 내 등을 두드렸다.

“겨미, 원래의 모습으로 바꾸어라. 동물에게 축복을 해 주긴 싫다고 말씀한다.”

말씀한다니 이건 또 무슨 말버릇이지…. 나르의 말대로 히든 스킬을 해제하자 그제야 내 앞으로 다가온 여우가 새끼손가락을 한 번 물곤 바로 떨어졌다. 아프지도 않고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여우는 할 일을 끝냈다는 듯 나왔던 틈으로 몸을 밀어 넣어 사라졌다. 물린 손가락의 희미한 잇자국이 어느새 동그란 반지 모양으로 변하며 붉게 부어올랐다. 주변에 모인 파티원들도 신기하게 바라보았고, 나는 손가락이 무사한지 확인하기 위해 손을 굽혔다 폈다.

“끝이야?”

“그러타. 무사히 축복을 받았군!”

심드렁한 나와 달리 나르는 신이 나 수인의 설화를 읊기 시작했다. 백여우는 라디아탄과 온 영물이라며, 여우의 축복을 받은 수인만이 왕이 된다는 말과 ‘저분’이라는 극존칭으로 부르며 내게 찾아와 준 게 얼마나 커다란 영광인지 신나게 떠들어댔다.

“겸이 내가 낳을걸….”

수박 누나의 헛소리에 습관적으로 귀를 파는 척 고개를 돌리자 보미 누나마저 끄덕이며 아쉽다고 중얼거렸다. 몇 살 차이도 안 나는데 나를 낳는다니….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제 여기서 더 얻을 건 없는 것 같은데.

“교만 찾으러 갈까요? 벌써 좀 늦은 것 같은데.”

“우리 겸이 수인 모습으로 칠죄종 던전 들어가는 건 처음 아니야? 떨리겠다.”

“쿨 때문에…. 어쩔 수 없죠.”

주변을 둘러보는데 어느 순간 뚝 끊기듯 멈춘 나르의 말에 뒤를 돌아보자 나르는 다시 나나의 손을 잡고 어디론가 날아가는 중이었다. 던전을 찾아가는 건가?

“너 교만 어디 있는지 알아?”

나르가 대답 대신 손가락으로 한곳을 가리켰다. 그곳은 길이라고 부를 수 없을 만큼 어두워 앞이 보이지 않았다.

거의 지척에 갔는데도 그곳은 밝아지지 않았다. 라이트는 빛나고 있는데. 이상함에 걸음을 멈추었지만 나르는 나나를 데리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멍한 얼굴이 나르를 당겨 어둠에 닿기 전 떼어 놓았다.

“야, 너 왜 그래!”

“뭐야, 무슨 일이야?”

“나르가 이상한데?”

화환이 나르의 얼굴을 살피러 가까이 오자 우리가 있던 공간이 일그러지며 웬 궁궐의 모습으로 풍경이 바뀌었다.

붉은 하늘에 떠 있는 구름마저 검붉었으며, 용궁과는 차원이 다른 칙칙함이 가득 베인 궁궐로 말이다. 길을 따라 서 있는 무관들은 하나같이 전립으로 얼굴을 가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일곱 개의 죄악 제1의 죄 ‘교만’의 던전에 입장하셨습니다! 무사히 클리어하시고 명성을 널리 퍼트리세요.]

[칠죄종 던전 발견! 최초 발견자에게 칭호가 지급됩니다.]

‘교만’

-칭호 효과로 모든 칠죄종의 칭호가 하나로 합쳐집니다. 새로운 칭호 획득. ‘칠죄종에 도전한 자.’ 모든 칭호의 효과가 대폭 상승합니다.

반갑지 않은 알림에 나르를 잡은 손에 힘을 주자 나르는 몸을 부들거리며 괴로워했다. 그럼에도 왠지 놓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에 품으로 당겨 안자 캑캑거리는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답답함에 나르를 토닥이는데 궁궐 중앙의 커다란 계단 위로 사람이 나타났다. 그러자 붉은 하늘 위로 커다랗고 붉은 해가 떠올랐다.

-축복을 타고나서 그런지, 저주가 올바르게 걸리지 않는군.

“저주?”

-내 그 작은 아이에게 시킬 것이 있어, 저주를 묻힌 전병을 쥐여 주었지.

거리가 멀어서 그런지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목소리만큼은 귀에 때려 박히듯 크게 들렸다. 저 개새끼, 아기한테 저주를 먹여? 서둘러 나르에게 해독 스킬인 퓨리파이를 걸어 주자 거무죽죽한 무언가를 토해냈다.

“저기 좀 봐. 나르한테 시킬 일이 저기로 들어가게 하는 거였네.”

권경배의 말에 바닥을 확인하자 거긴 펄펄 끓는 용암이 자리하고 있었다. 여기로 우리를 불러 한 번에 다 죽이려고 그랬던 거구나.

나나에게 나르를 맡겨 둔 뒤 중앙으로 길게 난 길로 걸어가자 교만의 왕의 모습이 점점 선명하게 보였다. 황금색 황룡포에, 마찬가지로 황금색의 견사로 장식된 검은 익선관…. 이상한 건 교만의 눈과 양팔, 다리까지 가죽으로 된 수갑에 꽁꽁 싸여 있었다.

“우리가 시간을 잘못 맞췄나?”

“누가 봐도 그런 플레이 중이지? 내가 썩은 게 아니지?”

-짐을 상대로 그리 음탕한 생각을 할 줄이야.

“내, 내가 무슨 생각을 한 줄 알고.”

누가 봐도 음란한 생각을 한 듯 빨개진 볼을 숨길 생각도 없이 내보이는 장꾸 형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저렇게 나오면 나올수록 더 의심스러워지는데….

-내 여기까지 온 성의를 보아, 그 수인을 넘기면 용서해 주지.

“죄인 주제에 용서는 무슨. 야, 내려와서 얘기해.”

서늘한 바람이 한 번 불었다.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기분에 주위를 둘러보는데 검은 안개가 나르와 나나가 있는 곳으로 모여들었다. 곧이어 불투명한 막에 둘러싸인 두 명의 펫이 당황한 얼굴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나, 나르!”

“사탕, 겸이 빨리 비활 해. 저거 뮤첼 같은데.”

가장 상상하기 싫은 일이 눈앞에 펼쳐졌다. 교만과 뮤첼이 한 번에 나오다니. 설상가상 펫 비활성화마저 먹히지 않았고, 서둘러 그쪽으로 달려가려는데 얌전히 서 있던 무관들이 일제히 검을 꺼내며 우리를 향해 달려왔다.

-하하, 드디어 손에 넣었군, 나의 키메라 주제에 다른 주인을 섬기다니….

사탕 누나는 나나를 비활성화에 성공한 건지 검은 막 안엔 막 정신을 차린 나르가 주먹으로 벽을 두드리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겸아, 비활성화!”

“안 돼요! 안 먹혀요, 이젠 버튼까지 없어졌어요.”

내 말에 다른 사람들은 공격해 오는 무관들을 막으며 나르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제 엉엉 우는 나르가 뮤첼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뮤첼이 뭐라 중얼거리자 교만이 있는 곳에선 툭, 툭 하며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나더니 곧바로 하늘 위엔 긴 장검이 하나씩 생겨났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닌데, 나르가, 나르가.

“유우겸, 정신 안 차려! 교만 구속에서 풀려났다고. 향 먼저 피워.”

“나르, 나르는 어떡해?”

“교만이 먼저야, 어차피 뮤첼도 없앨 거잖아!”

이제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검을 받아치는 권경배의 말에 서둘러 수박 누나 쪽으로 달리자 푸름도 내 머리 위로 실드를 둘러 주었다.

“누나, 불 좀 붙여 주세요.”

“이게 송금 오빠가 얘기했던 향이야?”

“네, 일단 빨리요.”

수박 누나가 손가락을 튕기자 순식간에 내 손에 들린 향에선 백색 향이 피어올랐고, 주변에 떠 있던 검은 몇 개를 빼고 전부 사라졌다.

-동쪽 적란 꽃으로 만든 향인가! 이놈들!!

교만의 고함과 함께 큰 바람이 일었고, 교만이 서 있던 자리엔 웬 비루한 노인이 서 있었다.

-하하하, 역시 그 꼴이 정말 재미있다니까. 누가 알았겠나, 교만의 휘황찬란한 모습이 전부 그대의 환각이었다는 걸 말이야!

뮤첼과의 이야기로 방심한 교만에게 보미 누나가 먼저 공격을 했다. 이상하게 교만은 피하지 못한 채 작은 단도에 맞았는데, 눈에 띄게 줄어든 체력에 공격한 보미 누나도 멈칫할 정도였다.

“이거 한 대에 체력이 저렇게 빠진다고?”

“진짜 교만의 왕 맞아요?”

-소문이 사실이었군. 교만의 왕이 왕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약하다고 하더니.

둘이 같은 편 아니었나? 품 안에 있는 나르를 소중한 것을 다루듯 쓰다듬던 뮤첼이 이젠 아예 구경하겠다는 듯 검은 구름에 기대어 앉았다.

화가 난 교만이 손톱으로 자신의 팔을 긁어 피를 내며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체력을 깎는 스킬인 건지 빠른 속도로 줄어드는 체력에 비례하듯 커진 마법진으로 사람이 한 명이 튀어나왔다.

백색 턱에 겨우 닿은 단발머리에 화려한 무사복을 입은 여자였다.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던 여자가 쓰러진 교만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버러지만도 못한 죄인이 감히 나를 소환한 것이냐?

-나찰 님, 부, 부디 저자들을….

나찰이라 불린 사람이 등 한숨을 쉬곤 제 키보다 더 긴 봉을 꺼내 휘둘렀다. 자기보다 더 높은 사람을 부른 건가? 교만이라며….

그동안 만났던 왕들과 달리 다른 존재를 소환하는 행동에 당황함도 잠시, 바로 내 쪽으로 날아오는 공격에 프로텍트를 걸며 물러섰다.

“유우겸, 도망만 쳐.”

말과 달리 확연한 실력 차에 권경배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런 경배를 도와주려 수박 누나와 지우가 달려왔다.

땅에 손을 대고 뭐라 중얼거린 수박 누나의 행동이 끝나기 무섭게 나찰이 있는 바닥 아래로 불길이 치솟자 기회만 노리던 지우가 등 뒤로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등에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손쉽게 피하던 나찰이 봉을 휘둘러 불길을 공중으로 날리며 웃었다.

-저 귀 달린 아이가 가장 귀한 아이구나.

붉은 눈동자를 굴리던 나찰이 순식간에 내 눈앞으로 날아왔다. 미처 피하지 못한 사이 왼쪽 어깨로 둔탁한 통증이 일었다.

나 맞은 거지? 큰형도 매로 안 때리는데 게임에서…. 내 뒷목을 잡아당긴 사탕 누나 덕분에 다음 공격은 무사히 피할 수 있었지만 들고 있던 향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겸아, 괜찮아?”

-아깝다, 무기를 잘못 들었네.

사탕 누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나찰이 바닥으로 봉을 두드렸고, 봉은 순식간에 길이가 줄어들며 그 끝에 칼이 달린 창으로 변했다.

[파티]화환 : 나찰인지 뭔지 우리 애 때린 몬스터 체력바가 안 보이는데 나만 그런가?

[파티]빛과송금 : 나도 안 보이는 거 보니까 저분 말고 교만을 쓰러트려야 될 것 같은데..

[파티]푸름 : 그런데 한눈팔면 겸이 형 죽을 것 같은데요?

[파티]빛과송금 : 나르가 옆에 없으니까 불안하긴 하다.

채팅창에 글을 쓸 수 없을 만큼 나만 집요하게 공격하는 나찰에 푸름이 두 번이나 실드를 쳐 주었다. 하지만 한 대만 맞아도 깨어져 나갔고, 햇살과 뽀또마저 내 앞을 막아 줘 둘은 나란히 한 번 죽었다 살아났다.

[파티]수박맛사탕 : 길마만 공격하는 척 몰래 교만 쪽으로 가. 어차피 교만은 화환이 죽여야 하잖아.

[파티]민초맛사탕 : ㅃㄹㅃㄹ 향도다타간다저거다타기전에죽여야대자나

내 체력 올려 주랴, 미처 못 피한 공격 흘려 주랴 바쁜 사탕 누나도 띄어쓰기 없는 급한 내뱉었다.

응원하고 싶었다. 나도 공격 자세를 유지한 채 이리저리 피하는 것도 한계였기 때문이다. 어서 교만을 잡고 이 사람을 돌려보내 줬으면 하는 말을 눈으로 하자 화환도 꽤 심각한 얼굴을 하곤 큰 총으로 바꿔 들었다.

-왜 피하기만 하는 거지? 거기, 변태 같은 자. 내 말이 들리나?

“누가 변태라는 거야.”

-그대지, 인간인 주제에 귀와 꼬리를 달고 있다니.

분한 만큼 크게 하울링을 하자 처음으로 나찰에게 공격이 먹혔다. 분명히 그림자 늑대가 왼손을 물어뜯었는데도 나찰은 전혀 데미지를 입지 않은 듯 움직였다. 체력바가 없는 걸 보면 이 사람은 공격해도 소용이 없는 건가?

화환이 나찰 쪽 바닥으로 총을 쏘자 비틀거리며 피한 나찰이 내 뒤로 다가와 화환의 시야를 가렸다.

“야, 너 왜 저 늙은이 편드는 거야?”

-…누군 들고 싶어서 편드나, 지금 저 새끼가 한 게 피의 계약이라고. 나는 저 새끼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어.

수박 누나와 약간 결이 같아 보이는데 보이는 것만 그런 게 아닌지 둘은 말도 꽤 잘 통하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공격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미 손과 팔, 볼까지 한 번씩 베여 따끔거렸고, 힐을 쓸 틈도 없이 도망 다니기 바빠지자 사탕 누나가 대신 힐을 써 줄 만큼 말이다.

내가 죽어선 안 되었기에 남은 사람들마저 나찰을 막아섰지만, 미꾸라지같이 피하는 나찰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왜 우리 애만 때리냐고!”

-저 늙은이가 이 아이를 가장 증오하는데? 너 무슨 죄를 지은 거지?

그걸 내가 알면 여기 있겠냐, 산 좋고 물 좋은데 자리 깔고 앉았겠지.

[파티]보미 : 푸름, 수박 겸이한테 실드 중복으로 칠 수 있으면 빨리 좀

채팅 한 줄에 내 위론 두 겹의 실드가 쳐졌고, 예전 질투 던전에서 봤던 커다란 토네이도가 바로 앞에서 생겨났다. 그런데 파티원끼린 공격이 안 되지 않나? 왜 실드까지 이렇게 둘러 준 거지? 일단 잠시 생긴 틈에 뒤로 물러나기 무섭게 커다란 총성이 들렸고, 반가운 알림이 떴다.

[교만의 왕 생명의 근원이 파괴되었습니다! 일곱 개의 죄악 제1의 죄 ‘교만’의 던전이 클리어되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숨겨진 던전이 클리어되었습니다! 유우 님의 파티 화환, 푸름, 수박맛사탕, 간계밥, 지우, 장꾸, 빛과송금, 뽀또, 햇살, 민초맛사탕, 보미 님의 명성이 온 세상에 울려 퍼집니다.]

[일곱 개의 죄악 제1의 죄 ‘교만’의 던전이 클리어되었습니다! 파티원의 명성이 세상에 울려 퍼집니다.]

-최초 보상 교만의 왕 루시퍼의 황금색 보석이 유우 님께 귀속되었습니다!

-최초 보상 교만의 왕관:강림이 모든 파티원에게 지급되었습니다!

-최초 보상 교만의 생명의 근원이 화환 님께 귀속되었습니다!

모든 근원으로 화환 님의 ‘죄를 함께 짊어지는 자’의 저주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저주에 걸린 것치곤 너무 쌩쌩하지 않았나? 이름은 잊고 있었는데 풀렸다는 알림에 화환을 돌아보자 저 변태는 옷을 가슴께까지 걷어 올렸다. 지금 눈이 몇 개인데 속살을 아무렇게나 내보이는 거야? 화환의 가까이 가려는데 내 발아래로 긴 창이 발걸음을 막았다.

-나 이제 갈 건데 인사 안 해 줘?

“뭐래, 방금까지 죽이려고 달려들었으면서.”

-타의였잖아. 그래도 재미있었으면서.

“네, 참 재미있었겠네요. 안녕히 가세요.”

치 하며 입을 삐죽인 나찰이 스르르 사라졌다. 방해물이 없어지기 무섭게 화환에게 달려가 옷을 내려 주었다.

[귓속말]유우 : 길마님 왜 아무데서나 속살 보여주는 건데여

[귓속말]화환 : 자기야, 걱정해?

한숨을 내쉬곤 나르가 잡혀 있는 곳을 보자 뮤첼이 손뼉 치며 기뻐했다. 그동안 나르에게 원하는 건 빼앗은 모양인지 나르는 뮤첼의 손에 들려 있었다.

-재미있는 구경이었군. 시간을 번 덕분에 내 지식도 찾았고, 이제 그대들은 나를 공격하는 것인가?

“나르를 돌려줘.”

-그대, 착각하는 게 있는데 이 아이는 내가 만든 내 것이다.

“개소리 말고, 죽은 망령 주제에.”

눈앞이 반짝이더니 다른 사람들과 떨어진 채 네모난 잿빛 막에 갇혀 버렸다. 이건 또 무슨 지랄이지? 혼자 떨어졌다는 짜증에 앞을 가리는 막을 내리쳤지만 막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야! 이거 안 풀어?”

-그대, 역시 거북의 길을 걷는 자답게 약하기 그지없군. 거기서 잘 보아라. 그대의 소중한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걸 말이야.

뮤첼이 가벼운 손짓으로 송금이 형의 가슴을 꿰뚫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바닥에 쓰러지는 송금이 형을 지나친 뮤첼은 손을 털어낼 뿐이었다. 그리고 권경배가 있는 쪽으로 몸을 틀며 중얼거렸다.

-이것이 어둠의 신과 계약을 통해 얻은 힘이지.

“그만해….”

그의 손짓 한 번에 검은 벼락이 권경배의 위로 떨어졌다.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너무 낯설어 손이 떨려왔다.

-힘이란 이런 것이야. 하늘의 눈치 따위 보지 않고,

송금이 형에게 달려가는 사탕 누나는 검은 안개에 주변을 더듬으며 앞으로 나가다 기침을 하며, 검은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이젠 푸름을 향해 걸어가는 뮤첼의 뒷모습만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원하는 것을 모두 얻을 수 있으며,

더는 보고 있을 수는 없었기에 손을 올려 눈을 가렸다. 탕 하는 화환의 총소리와 땅이 무너지는 소리가 연달아 이어졌고, 손이 축축하게 젖어 갈 무렵 파티창에 마지막 남은 화환의 상태가 검게 변한 것이 보였다.

-모든 생명의 우위에 서 그들을 가질 수 있지.

이상했다. 분명히 전부 부활 스크롤을 가지고 있을 텐데 한 명도 부활하는 사람이 없었다. 손을 내리자 제각각 쓰러진 사람들과 뮤첼의 손안에서 엉엉 우는 나르만 보였다. 머리가 멍한 기분이었다.

“…왜, 왜 아무도 안 일어나요? 부활 스크롤 있잖아. 사탕 누나!”

-하하, 내 저주가 이렇게까지 발전한 것이야. 어때, 소중한 사람들을 잃은 기분은?

“끄윽, 흑… 겨미…. 나르 겨미한테, 흐윽, 가고 싶다….”

여기서 나가야 했다. 가서 모두의 저주를 풀고 나르를 되찾으려면 이 빌어먹을 벽을 깨부숴야 했기에 모든 공격 스킬을 한곳에 쏟아부었다. 하지만 벽은 꿈쩍도 하지 않고, 다리에 힘이 풀렸다. 왜 채팅창까지 조용한 거지? 핸드폰 연동이라도 해 놓고 올걸….

손이 아프도록 벽을 때려도, 마력이 다 닳도록 공격을 해도 꿈쩍 않는 벽에 눈앞이 계속 흐려져 결국 바닥에 주저앉자 그제야 뮤첼이 내 앞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저들을 살리고 싶나?

대답 대신 뮤첼을 노려보자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얼굴의 뮤첼이 나와 눈높이를 맞춰 앉으며 환하게 웃음을 지었다.

-그대의 영혼을 내게 주게. 그럼 그대가 원하는 걸 들어주지.

“무슨 소리야.”

-그대처럼 큰 별의 아이 영혼은 내가 빼앗을 수 없어. 하지만, 그대가 내게 줄 수는 있지. 나는 그게 탐이 나니 그대의 소중한 이들의 생명을 바꾸자는 말이야.

나르마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마구 고개를 저었다. 안댄다, 안댄다 중얼거리자 뮤첼이 나르의 날개를 쥐어뜯듯 잡으며 입을 막았다.

선한 얼굴로 안경을 한 번 추어올린 뮤첼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쉬운 일이야. 그대는 다른 존재를 다시 만들고, 나는 그 수인의 왕이라는 별의 아이 영혼을 갖는 거지.

그동안의 왕들이 한 옳은 선택이 지금 이 갈림길을 말하는 것이었나? 옳은 선택은 어떤 거지? 이렇게 쉽게 포기하라고 필사적으로 나를 지켜준 게 아닐 텐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지만, 내가 지금 이 순간을 돌아봤을 때 후회로 남지 않게 얼굴을 닦아내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 좋아. 대신 저 사람들부터 먼저 살려 줘.”

이게 맞는 선택이지? 다들 전부 오래 한 사람들, 또는 직업으로 삼은 사람마저 있었고, 나는 이제 겨우 한 달 된, 가장 미련 없는 사람이 아닌가…. 내 캐릭터 하나에 열한 명이 무사할 수 있다면 이 선택이 맞는 거다. 작게 한숨을 내쉬곤 나르와 눈을 맞춘 채 한 번 웃어 주었다.

“못 구해 줘서 미안해.”

나르도 마구 고개를 저으며 얼굴을 닦던 손을 내 쪽으로 뻗었고, 그걸 가만히 보고 있을 리 없는 뮤첼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러곤 나를 감싼 벽을 지운 대신 다른 사람을 향해 그 벽을 두른 뒤 손가락을 세 번 튕겼다.

긴장된 얼굴로 뮤첼을 노려보는데 부스럭거리며 한 명씩 자리에서 일어나 내가 있는 쪽으로 달려오려다 투명한 벽에 막히는 게 보였다.

[파티]유우 : 나 다른 아이디 파서 와도 친하게 지내줄 거죠?

뭐라고 말은 하는 것 같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고, 채팅도 올라오지 않았다. 그저 무사한 모습에 안심돼 무의식적으로 그쪽으로 걸어가려는데 뮤첼이 내 앞을 막아서고 재수 없게 히죽거렸다.

-약속 잊지 않았겠지. 자, 어서 빛이 있는 곳으로 가야지.

뮤첼이 뒤쪽을 가리켰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걸어가더니 나를 돌아보며 헛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아델의 영혼이 소멸했다지 뭔가, 내 과거를 봤으면 알겠지. 소중한 나의 부인 말이야.

“니가 죽였잖아, 쓰레기 새끼야.”

-아델을 다시 살리기 위해선 나를 제외한 네 명의 별의 영혼이 필요하다 그분이 알려 주셨어. 내 구원자, 나의 진정한 신!

“너 진짜 개씹쓰레기야. 바퀴벌레보다 더 싫어.”

-그래, 지금 마음껏 욕을 하게, 어차피 그대의 삶은 내 손에 끝나니 말이야.

한 줄기 빛이 비치는 공간에 서자 뒤에선 쿵쿵하는 소리가 울렸고, 나르는 날개를 마구 퍼덕이며 내가 있는 곳으로 오려고 하는 게 보였다. 저러다 또 다칠 텐데….

“겨미를, 풀어 줘라! 내가 있지 아는가, 겨미까지 못살게 굴지 마라!”

-나쁜 걸 배워 왔군. 너를 만든 게 누군데 이러는 거지?

“너 가튼 건 연구실에 박혀 죽어 버려라! 나르와 겨미를 괴롭힐 수 없게! 영영 죽어 버려라!!”

뮤첼은 더 듣기 싫다는 듯 나르를 다시 한번 투명한 원에 가두었다. 붉어진 눈으로 뮤첼을 노려보던 나르는 내 쪽을 향해 울먹이며 겨미를 지키지 못했다 하며 다시 울기 시작했다.

파티원들이 있는 곳을 보자 거긴 땅이 울릴 정도로 벽을 공격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다음 아이디는 화환에게 지어 달라고 해야지.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해도 억울함과 분함은 풀리지 않았다. 무슨 게임이 이래. 이런 나와 다르게 분주하게 바닥에 그림을 그리는 뮤첼은 잔뜩 상기된 얼굴이었다. 막 다 그린 그림에선 어울리지 않게 밝은 빛과 함께 다섯 개의 거대한 동상이 나를 빙 두르며 바닥에서 솟아올랐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 없는가?

고개를 젓자 동상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머리 위로 올렸다. 이렇게 죽으면 유우 캐릭터는 봉인되는 건가? 마지막으로 나르와 다른 사람들을 눈에 담은 뒤 눈을 꼭 감자 바람 소리와 함께 검을 휘두르는 소리가 들렸다.

한 달간의 고난과 고생이 다 저 새끼 좋은 일로 이어지는구나 할 때 커다란 파괴음과 수인 왕국을 재건할 때 들었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들렸다.

[라디아탄의 축복 칭호 효과로 모든 공격이 무효화 됩니다.]

[나르가 분노로 이성을 잃었습니다. 5차 각성이 강제로 개방됩니다.]

[5차 각성 조건을 충족하였습니다. 자기희생. 수인의 구원자로 이 땅에 축복을 선사해 주세요.]

눈을 뜨자 나르는 이미 풀려나 예전에 본 갑옷을 입은 모습으로 바뀌었다. 5차 각성 퀘가 안 뜬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나? 눈만 끔뻑이고 있자 나르의 괴로운 신음이 들렸다.

나르는 온몸을 떨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강제개방 탓인가? 배낭을 뒤적여 라디아탄의 주머니에서 하나 남은 각성 스킬 구슬을 손으로 깨부쉈다.

-‘진’ 강림

매개체를 통해 위대한 존재를 소환할 수 있습니다.

구슬을 깨자 나르의 상태는 눈에 띄게 좋아지며 천천히 숨을 고르더니 양팔을 벌리며 커다란 마법진을 그렸다. 그 마법진이 닿자 내 주변의 동상들과 파티원들이 갇혀 있던 벽이 전부 사라졌다.

뮤첼 또한 검은 피를 토하며 땅으로 쓰러지는 게 보였다.

“무기를 바꿔라. 지금부터 그대들을 지키는 데 사용할 수 있도록 축복을 내렸으니, 그것이 이제 그대들을 옳은 길로 인도할 길잡이가 될 것이다!”

원래의 모습인 나르의 목소리는 크고, 힘이 있었으며 낯설었다. 무기를 바꿔 끼는 사람들을 보다 배낭 가장 안쪽에 있던 낡은 책을 냈다.

열 수 없었던 전과 달리 쉽게 열린 책은 예전에 봤던 이상한 글자들이 한 줄씩 써지는 게 보였다. 다른 사람들이 든 무기는 하나같이 백색에 황금색 글씨가 쓰였는데 내 것만 왜 그러지….

화환은 한달음에 내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마침 뮤첼이 자리에서 일어나 어둠을 퍼트리는 중이었다.

-이제! 다 된 것이었는데!! 네놈이!

주변으로 안개가 일렁이더니 곧 사람들을 감싸 안았지만, 사탕 누나가 메이스를 바닥에 내려치자 잠시 주춤하는 게 보였다.

“그대, 나의 주인. 어서 기도문을 읽게.”

손에 들린 책을 다시 한번 열자 찬찬히 글자가 재배열되며 한글로 바뀌었고, 그 자리 그대로 선 나를 지키듯 푸름이 달려와 앞으로 방패를 내밀고 섰다. 화환이 뮤첼에게 달려감과 동시에, 이제 겨우 읽을 수 있게 배열된 글에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었다.

“더럽혀진 ‘시선’과 빛의 ‘세상’의 주인의 눈이 다시 한번 마주치니, 기다렸던 모든 ‘악’의 ‘이면’이 지상으로 떠오르고, 비로소 그 죄를 ‘심판’할 이가 이 땅에 다시 한 ‘강림’할지어다.”

그동안 모아 왔던 칠죄종 던전의 아이템 이름이 이렇게 쓰이는 건가? 마력이 급격하게 빠져나갔고, 이상하게 어지러움에 눈을 감자 발이 바닥에서 떨어지며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내 귀한 아이야, 드디어… 드디어 저 악인을 벌할 기회를 내게 주는구나.’

[‘유우’의 요청에 라디아탄이 응답합니다.]

반가운 목소리에 눈을 뜨자 나는 이상한 옷을 입곤 하늘에 떠 있었다. 백색의 가운 같은 걸 걸치고만 있었는데 몸 위로 황금색의 글자가 가득했으며,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내려왔다. 이게 내 무기 효과인가?

바닥에 내려와 라디아탄의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리는데… 라디아탄은 더 이상 예전 거북의 모습이 아니었다. 귀엽게 봐 줄 수 있는 거북은 없어졌고, 목과 꼬리가 뱀처럼 길었으며, 등껍질 또한 녹색이 아닌 검은색으로 변했는데 다리가 유난히 길었다.

“라디아탄?”

-내 저놈의 본모습을 꺼내 보일 테니, 나의 아이의 사람들이여 그대들은 새로운 무기로 저 악인을 벌하거라.

라디아탄이 긴 꼬리로 내 볼을 한 번 쓰다듬어 준 뒤 뮤첼이 있던 곳을 마구 밟으며 짓이기기 시작했다. 라디아탄의 발길질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선지 다들 뒤로 빠졌고, 나르와 화환이 내 앞으로 걸어왔다.

“자기야, 누가 이렇게 헐벗긴 거야?”

“몰라요, 그 책 읽으니까 이렇게 되던데?”

화환이 입을 삐죽이며 내 옷깃을 만져 주었고, 나르가 바닥에 앉으며 눈을 마주했다.

“그대, 나의 주인인 아이여.”

“이젠 겨미라고 안 해 주는 거야?”

“내가… 이런 모습인데도 그렇게 불러도 되는 것인가?”

“나르는 나르잖아.”

“그대는 내가 듣고 싶어 하는 말만 해 주는군. 겸이, 이제 나는 그대를 지킬 만큼 강해졌다.”

고개를 끄덕이는데 뮤첼이 라디아탄의 얼굴이 있는 곳까지 날아오르는 게 보였다. 왜 저 새끼는 너구리 주제에 하늘도 나는 거지?

-거북이 마지막 아이를 지키러 온 건가? 그래 봤자 그대는 한낱 거북일 뿐.

뮤첼이 손가락 끝에서 검을 구슬을 마구 생기더니 사방으로 뿌려졌다. 가만히 보고만 있을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서둘러 실드와 무기를 드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나르가 땅으로 발을 한 번 구르자 파티원들과 내 머리 위론 금색의 마법진이 생기더니 우리에겐 뮤첼의 공격이 통하지 않았다.

“미친, 나르 커지더니 더 능력 있어졌네.”

사탕 누나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건 나르가 처음 나태의 던전에서 만들어 줬던 실드였고, 그때는 내 마력까지 빌려 10분을 크게 만드는 게 다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누가 말리기도 전 하늘로 뛰어오른 나르의 등 뒤론 새하얀 날개가 돋아났고 곧바로 라디아탄의 곁에서 뮤첼을 내려다보았다.

-은혜도 모르는 키메라! 그대는 누구의 손에 창조되었지?

“그대는 쓰레기가 맞는군. 타인의 영혼을 조각내어 이어 붙인 빈 껍질을 만든 주제에…. 나의 영혼은 내 주인을 거쳐 간 수많은 사람이 내게 선물해 준 것이다. 더는 죄인의 손에 놀아나지 않는다.”

저거 진짜 우리 나르 맞지? 처음 보는 나르의 모습에 나르만 올려 보고 있으니 송금이 형이 마력 포션을 급하게 열어 내 손에 들려 주었다. 이 보호막이 내 마력으로 유지되는 걸로 아는 건가?

포션을 마시자 화환과 수박 누나도 날개를 꺼내 공중으로 올라갔고, 말로 얻어맞은 뮤첼의 얼굴에 비웃음이 일기 시작했다.

-그럼 먼저 네가 주인이라 부르는 저 수인놈을 먼저 없애야겠군,

이상하게 혼자 있을 때만큼 두렵지 않았다. 가까이 있는 푸름의 뒤로 바짝 붙어 설 뿐이었다.

뮤첼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그러자 땅에선 검은 기둥이 솟아나 우리가 서 있던 곳과 궁궐까지 검은 막이 하늘 위로 펴졌다.

“나만 그래? 세상을 구하는 것 같은데….”

“나도, 영웅 되는 줄….”

커다란 석궁을 든 장꾸 형이 송금이 형 가까이 걸어오며 중얼거리자 보미 누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세계라면 세계지…. 수인 세계.

특이하게 검신까지 백색에 금빛 문양이 그려진 검 두 자루를 신기하게 보던 보미 누나가 우리 쪽으로 내리치는 번개를 가볍게 받아치자 번개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미친, 이거 계속 쓸 수 있겠지?”

“안될 듯…. 너무 사긴데.”

“이것만 있으면 훈민정음도 이겼을 텐데….”

세계전 못 간 게 아직 아쉬운가. 나르까지 붙어 싸우자 아무리 이상한 결계가 쳐져 있다고 해도 뮤첼은 처참하게 얻어맞고 있었다.

얼굴과 몸 곳곳에 피를 흘리던 뮤첼은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더니 제 몸에서 흐른 핏방울을 모두 공중으로 띄워 ‘재생’이라 중얼거렸다. 그러자 그 피는 뮤첼의 몸으로 흡수되어 들어갔다.

뮤첼이 손을 한 번 휘젓자 거기선 거센 바람이 일었다. 뒤에 서 있던 수박 누나와 화환은 어마어마한 타격이라도 받은 듯 기침을 하며 피를 토해냈다.

놀란 사탕 누나가 그 둘이 있는 곳으로 날아가자 권경배가 사탕 누나에게로 오는 공격을 받아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거리가 닿는 사람들에 피를 채워 주곤 프로텍트를 걸자 아까 들렸던 라디아탄의 속삭임이 한 번 더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나의 아이여, 수인 왕국처럼 이곳을 정화해 주게.’

퓨리파이 얘기하는 거겠지? 꼬리로 뮤첼을 채찍질하는 라디아탄 쪽을 힐끔거리다 정령의 거울을 꺼내 들곤 라디아탄 쪽의 기둥을 향해 스킬을 사용했다.

-크아악, 버러지 같은 놈!

밝은 빛이 닿자 뮤첼은 몸이 타들어 가는 듯 소리를 지르며 내 쪽으로 날아왔다. 하지만 뮤첼을 막아선 사람들 덕분에 그는 내 가까이 올 수 없었다.

방향을 조금 더 틀어 쿨이 다 찰 때까지 기다리자 나르에게 막힌 뮤첼이 자신의 팔을 그어 일부러 피를 흘렸다. 그 피들은 땅에 닿기 무섭게 검은 뱀으로 변해 내가 있는 곳으로 기어 오기 시작했다.

“언니, 바닥!”

“저 미친 새끼.”

보미 누나와 장꾸 형이 서둘러 바닥으로 기어 오는 뱀을 썰었다. 하지만 반으로 썰린 뱀은 두 마리로 다시 살아나 수만 늘어났다. 송금이 형이 그걸 보더니 내가 다시 한번 퓨리파이를 쓸 때 배낭에서 불길이 들어 있는 유리병을 바닥으로 던졌다.

“형 그건 뭐예요?”

“리자드킹 불꽃….”

“와… 길마님이 왜 형이랑 던전 오는 걸 재미있어하는지 알겠네.”

송금이 형은 수줍게 웃었다. 다섯 개의 기둥을 향해 한 번씩 퓨리파이를 쓰자 뮤첼이 만든 결계가 가루로 변하며 사라졌다.

결계가 사라지자 뮤첼은 팔을 양옆으로 벌리곤 혼자 이상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라 경계하며 그쪽을 주시했다. 푸름도 긴장되는 건지 굳은 얼굴로 하늘을 올려 보고 있었다.

-멈추게, 완전한 제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니 지금 공격은 통하지 않아.

뮤첼의 주문이 끝나자 질척이는 검붉은 뭉텅이가 뮤첼을 집어삼키듯 감싸며 크기를 늘려 갔다. 징그러워 한 걸음 뒤로 물러나는데 뱀의 사체를 발로 밟고 있던 보미 누나가 내 옆으로 달려왔다.

“겸이, 언니라고 불러 볼래?”

“…누나 머리 다치셨어요?”

“아니, 머리 기르니까 예뻐서.”

“겸이 형, 우리 이렇게 고생하는데 나중에 왕국 땅이라도 좀 떼 주나요?”

살 만한 사람들이 서로 내 옆으로 와 자신이 얼마나 고생하는지를 낱낱이 읊기 시작했다. 웬일로 뽀또 님도 옆에 와 도깨비를 만났을 때부터 힘들었다며 칭얼거렸고, 장꾸 형은 성에 방 한 칸이면 된다는 소박한 바람을 내비쳤다.

“난 됐어, 무기며 장비까지…. 전부 겸이 퀘스트로 얻은 거잖아.”

송금이 형의 옳은 말에 다른 사람들마저 그건 그렇다 고개를 끄덕이자 화환이 집중하라는 듯 하늘을 향해 총을 한 번 쏘았다. 자기 안 끼워줘서 삐졌나?

뮤첼 쪽을 힐끔거리자 그를 가두고 있는 불길함이 전부 그에게 흡수된 듯 색이 옅어졌다. 대신 나타난 건 라디아탄만큼 커다란… 괴물. 괴물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생명체였다.

너구리의 모습조차 온데간데없었고, 뿔이 세 개나 있는 그저 커다랗고 번들거리는 몸을 가진 괴물 말이다. 검붉은 몸은 닿기만 해도 익어 버릴 듯 연기가 났으며, 짧은 팔 대신 크고 튼튼한 다리와 붉은 피막으로 이루어진 날개까지 달려 있었다. 뮤첼이 기다리던 새로운 육체가 저것이었나?

“개미친, 뭐야 저 꼴은.”

-때가 되었군, 진정한 주인이 나타나도록 나를 도와주겠나.

“공격하라는 거야?”

라디아탄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우리가 있는 곳으로 후하고 바람을 한 번 불어 주었다. 그러자 날개가 없던 사람들과 내 등에 반투명한 날개가 생겼다. 그 날개를 한 번 파닥이자 다리가 땅에서 떨어지더니 위로 천천히 날아올랐다.

-안식의 품에 있던 사람들에게 빌려 온 것이야. 부디, 그들에게 미래를 내어 주게.

떠오른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다 바로 뮤첼이 있는 곳으로 날아가며 하울링을 썼다. 평소 같은 검은 그림자가 아닌 황금색의 풍성한 갈기가 바람을 맞으며 뮤첼의 팔, 다리를 물어뜯었다.

다른 사람들 또한 뮤첼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뮤첼은 이성을 잃은 듯 발을 버둥거리며 땅을 마구 흔들기 시작했다.

내가 정화한 수인 덕분인지 좀비 같은 몬스터는 안 나왔지만 대신 땅에선 수많은 돌이 치솟았다. 땅을 바로 보며 그 돌을 피하는데 화환의 총성이 두 발 이어졌다.

“채하현, 말이라도 하고 쓰라고!”

또 체력이 다 닳는 스킬을 쓴 건지 화환의 곁으로 사탕 누나가 날아갔다.

화환의 공격 덕분인지 뮤첼의 복부라 추정되는 곳은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괴로움에 마구 발버둥을 치는 뮤첼을 봐줄 생각이 없는 라디아탄이 바닥에 거대한 마법진을 그렸다.

그 마법진에선 가시덤불이 피어올라 뮤첼의 살갗을 파고들며 그의 움직임을 막았다. 보는 내가 다 아파 보여 뒤로 물러나는데, 라디아탄도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꼼짝없이 갇힌 뮤첼이 가시덩굴에서 빠져나오려 버둥거리다 갑자기 피눈물을 흐르기 시작했다. 공기의 흐름이 멈춘 건 그 순간이었다.

우리 등 뒤에 있던 날개가 갑자기 사라졌고, 바닥으로 몸이 떨어지는데 언제 온 건지 나르가 나와 푸름을 안아 바닥에 내려 주었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뮤첼이 우는 순간 바닥으론 검붉은 피가 퐁퐁 솟더니 검은 손이 그를 잡아 그 안으로 데려가려 했다.

-네 바람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라디아탄이 숨을 몰아쉬며 이야기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하늘에서 큰 종이 달린 지팡이를 든 천사들이 내려왔다. 이게 마족과 천족의 싸움이 되는 원인인가?

곳곳에서 터지는 감탄사에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자 가장 큰 종을 가진 천사 한 명이 뮤첼의 앞에서 종을 울렸다. 그 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검은 연기를 내며 그를 잡고 있던 손이 녹아내렸고, 라디아탄이 거북이의 모습으로 돌아오며 내 바로 앞으로 내려왔다.

-거울을, 이번엔 저 어둠을 정화할 수 있겠는가?

라디아탄이 내 어깨 위로 손을 얹곤 뮤첼이 있는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끄덕이며 거울을 꺼내 들었다. 이번이 마지막이었으면….

뮤첼이 있는 곳에 퓨리파이를 사용하자 내 마력은 아까와 전혀 다른 속도로 빠져나갔다.

-라디아탄!!

라디아탄의 힘 덕분인지 황금색으로 뻗쳐나간 빛에 뮤첼은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녹아내렸다. 징그러운 모습으로 손을 뻗는 뮤첼이 완전히 사라지자 뜬금없이 어뉴어의 BGM이 흘러나왔다.

이제 진짜 끝인 건가? 뮤첼은 이미 사라졌지만, 스킬은 끝나지 않았다. 아니, 더 강한 빛이 일더니 순식간에 이곳은 빛무리로 가득 차게 되었다.

-내 아이여, 그대의 소명은 이제 끝이 났다. 수인의 영혼은 제가 있을 자리로 돌아갈 것이야.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입만 벙긋거리는데 라디아탄이 하늘로 올라갔다.

-여행은 즐거웠나?

끝나면 후련할 줄 알았는데 왜 이렇게 아쉬운 건지…. 고개를 끄덕이자 라디아탄이 완전히 사라지며 내 인벤토리로 ‘라디아탄의 감사 상자’가 들어왔다.

[수인 히든 퀘스트가 완료되었습니다! 유우 님의 파티 화환, 푸름, 수박맛사탕, 간계밥, 지우, 장꾸, 빛과송금, 뽀또, 햇살, 민초맛사탕, 보미 님의 명성이 온 세상에 울려 퍼집니다.]

[수인 구원 퀘스트 완료! 수인들의 영혼들이 왕국으로 돌아옵니다.]

[진정한 수인 왕국의 왕이 되셨습니다. 그를 도운 열한 명의 헌터들의 동상이 수인 마을 입구에 세워집니다. ‘수인의 구원 조각’(칭호)4 파티원에게 지급됩니다]

“끝난 거야?”

연달아 뜬 알림에 화환이 내 옆으로 내려와 서며 물었다. 하늘이 맑아지며 땅으로 많은 빛이 쏟아져 내려왔다. 그때 갑자기 뿅 하는 귀여운 소리와 작은 솜뭉치가 눈앞에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헌터님. 헌터님의 여정을 지켜본 디유입니다!’

“어? 얘 또 왔네.”

“디유 맞지?”

우르르 몰려오는 사람들 사이 혼자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나르가 이상했지만, 이 솜뭉치가 무슨 일로 다시 나타난 건지가 더 궁금했다.

“이번엔 무슨 일이야?”

‘수인족 히든 퀘스트를 멋지게 클리어하신 걸 축하드립니다!’

손도 없으면서 또 박수 소리를 내는 디유를 보고만 있자 큼큼하며 목을 한 번 가다듬곤 우르르 몰려 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기 시작했다.

‘예상하셨던 바와 같이 다음 콘테츠는 천마족의 전쟁입니다. 그 이유는 뮤첼을 도와 수인들을 멸망에 이르게 한 어둠의 왕 때문인데요! 갑작스런 수인 왕국의 부활과 전쟁의 서막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헌터님들의 뮤첼 소탕을 pv로 만들어 타이틀 화면에 게시해도 될지 허락을 구하러 디유가 온 것입니다!’

“던전 도는 것만 쓰는 거야?”

‘네! 길드 성과, 개인적이라 생각되는 일들을 일절 사용하지 않습니다.’

“아… 그럼 얘 얼굴만 가려줄 수 있나? 질투 던전이랑, 여기서 계속 얼굴 다 보이고 있었잖아. 쟤 복학하면 피곤해질 텐데.”

‘이번 던전은 유난히 길었는데…. 디유가 하는 일을 아니니 말을 전해 놓겠습니다! 지금 눈앞으로 뜬 팝업창을 읽어 보시고 수락을 눌러 주세요.’

이게 그건가?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주인이 먹는 뭐, 그런? 생각지 못한 권경배의 배려에 친구 하난 잘 뒀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약관이며, 수많은 글을 읽을 자신이 없어 그냥 수락을 눌렀고,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인지 곧바로 디유는 감사하다는 말과 8월 초 업뎃 후 공개된다는 말을 끝으로 스르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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