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길드전은 쟁과 함께
“방어팀이 사탕, 겸이, 지우, 달이, 장꾸, 푸름, 보미, 나. 공격팀이 수박, 계란, 하늘, 구름, 겨울, 별이, 뽀또, 햇살, 장판, 코코.”
“부활 스크롤은 다들 우편으로 받으셨죠? 송금 오빠가 포션이랑 버프 템도 보내드릴 거라고 확인해 달라셨고….”
“겸이. 꼬까 우편으로 보냈다고 잘 싸우고 오래.”
화환의 말에 바로 우편을 확인했다. 244, 이제 6만 더 올리면 만렙이지만 여전히 걱정 가득한 송금이 형이 또 장문의 편지와 함께 새 장비를 보내 주었다. 정모 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레벨을 올릴 줄 몰랐는데….
“깃발 지키는 거면 공격하러 오는 사람들 막는 거예요?”
“응, NPC 소환도 하고. 그거 소환하는 사람 종족에 따라 다르니까 겸이도 한번 해 봐. 어떤 친구 나오나 궁금하다.”
여전히 삐진 나르가 화환의 옆구리에 딱 붙어 고개를 팩 돌렸다. 그런 나르를 모르는 척 나르가 싫어하는 장꾸 형의 다리 위로 올라갔다.
내가 너무 오냐오냐 키우는 건가?
삐빅 하는 알림 소리와 눈앞에 떠올랐다. 길드전 10분 전이니 포탈을 타고 전투 장소로 이동하라는 알림이었다.
포탈이 뭔가 싶어 주위를 둘러보는데 권경배가 나를 받아서 들곤 화면 오른쪽에 ‘길드전 영지 가기’를 알려 주었다. 그걸 누르자 어두컴컴한 하늘과 길게 늘여진 성벽이 보였다.
길드전에 참여하는 길드는 총 64개의 길드고, A, B, C, D 조로 나뉘어 토너먼트식으로 올라간다고 했다. 이번 상대는 아마 그냥 참여만 하러 온 것일 거라며 길과 방법을 익혀 두라는 권경배의 말에 긴장으로 차가워진 손만 꼬물거렸다.
깃발이 있는 성 입구에서 시작되었다. 거기 모인 사람들이 전부 웃으며 얘기 중이었고, 긴장하는 건 나밖에 없었다. 일단 가장 큰 외형으로 바꾼 뒤 주위를 둘러보자 성 아래쪽엔 이미 소환된 NPC들이 무기를 들고 있었고, 멀리 적의 성이 보였다.
“저기, 저 성에 깃발 뺏으러 가는 거야?”
“어, 저기 하늘에 있는 문 깨고 들어가야 해. 그래서 웬만하면 날 수 있는 사람들 위주로 공격팀에 넣은 거.”
권경배가 따라오라며 성문 바로 앞에 있는 커다란 구슬을 보여 주었다.
“이게 NPC 소환하는 포탈인데, 옆에 여기 손 얹으면 알아서 마력 빼 가고 사람 보내 주는 거야.”
“시작하면 바로 소환해?”
“응, 그래도 너무 많이 소환하지는 마. 마력 딸리면 힐 못 하잖아.”
고개를 끄덕이자 사탕 누나가 다가와 부화기에 넣은 알을 보여 주며 크게 웃었다.
“우리 애는 눈 뜨자마자 전투부터 보겠다, 겸아.”
“어? 여기 들고 와도 돼요?”
“응, 곧 깨어날 때라 어쩔 수 없이 데려왔어.”
사탕 누나의 손에 들린 알을 보다 보니 30초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공격을 맡은 사람들도 하나, 둘 날아오르며 준비했고 나는 바로 소환 포탈 앞으로 달려갔다.
한 번 더 삐익 하는 소리와 함께 길드전이 시작되었다. 사람들이 순식간에 적팀의 성으로 달려갔고, 권경배가 알려준 대로 포탈 옆의 작은 원에 손을 얹으려는 나를 화환이 말리듯 불렀다.
“겸아, 이리 와.”
“이거 안 해요?”
“응, 이번에 만난 애들 포기했네. 금방 끝나겠다.”
솔직히 해 보고 싶었는데…. 아쉬움에 포탈 앞만 어슬렁거리는데 적 깃발의 체력이 50% 남았다는 알림이 떴다. 저기 가려면 날아야 하는 거지? 이따 구름이한테 태워 달라고 해 볼까?
[피안 길드가 승리하셨습니다! 7시 30분에 있을 다음 전투를 준비해 주세요.]
“현실 시간인 거죠? 한참 멀었네.”
“응, 게임 시간으로 여섯 시간 정도 남았네.”
첫판부터 괜히 긴장한 건가 싶어 서둘러 하우징으로 돌아가기를 눌러 성 앞에 도착했고, 당연하게 가든 하우스로 달려갔다.
여기선 가장 작은 외형으로 쿠션 위에 빈둥거리는 게 제일 편했다. 나르를 안 데려온 게 마음에 걸렸지만, 내가 싫다는데 어쩌겠어…. 한참 빈둥거리는데 하늘이 형에게 귓속말이 왔다.
[귓속말]하늘이 : 겸이 형님.
[귓속말]유우 : 왜 이러세여
[귓속말]하늘이 : 반나절이나 붕 떴는데, 레드 ㄱ?
[귓속말]유우 : 와
[귓속말]하늘이 : 갔다오면 길드전 더 힘내서 잘할 듯 ㅎ
[귓속말]유우 : 다음 쉬는 시간에도 갈 건 아니죠?
[귓속말]하늘이 : 그때 보고요, 형님 팟 ㄱㄱㄱ
하는 수 없이 파티 수락을 하고, 던전 앞으로 가자 이젠 여기에 사는 건지 당연하게 던전 앞에서 웃는 얼굴로 기다리는 네 사람이 보였다.
“형, 누나들 진짜 던전에 미친 것 같아요….”
“너도 30분에 한 번씩 전화로 쪼여 봐… 이럴 수밖에 없지.”
“채하현 안 온대?”
“길마잖아. 바쁠 것 같아서 안 불렀는데?”
“와, 저 길마님 없이 여기 처음 와요….”
“겸이 자기 드디어 엄마 품을 벗어난 거야?”
“뭐래, 빨리 돌아요, 딱 3번만 돌 거니까.”
막 던전 입장하기를 누르자 화환에게서 귓속말이 도착했다. 자기 얘기하는 건 어떻게 알고 연락을 하는 건지 또 입꼬리가 신이 나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귓속말]화환 : 자기야 어디야?
[귓속말]유우 : 왜요, 저 보고 싶어서 잉잉 우는 중이에요?
[귓속말]화환 : 나르가.
좋다 말았네.
[귓속말]]유우 : 안 알려줌.
후끈하게 오르는 온도에 서둘러 얼음을 빼물곤 던전 안으로 한 걸음씩 걸어 들어갔다.
마지막 세 번째 던전을 돌 때쯤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나르가 권경배에게까지 울고불고 매달리며 나를 찾았는지 발신자는 권경배였다.
길드 채팅창에도 사탕 누나와 보미 누나가 나를 찾는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미리 입단속을 시켜둔 덕분에 레드 던전인 걸 들키지 않았는데, 그때 화환의 길드 채팅 한 줄이 올라왔다.
[길드]화환 : 구름이네 다들 말 없는 거 보니까 겸이 데리고 레드 간 거네.
다른 눈치는 없는 주제에 이런 건 또 어떻게 빨리 알았지?
[길드]구름이 : 아닌데.
[길드]하늘이 : 응.......아닌데...?
[길드]구름이 : 점 그만 찍어 점돌이 **야 들켰잖아.
[길드]별이 : 이왕 들킨 거 맘 편하게 한 번만 돌고 보내줌 ㅎㅎㅎㅎㅎㅎㅎ
[파티]유우 : 와, 하늘이 형 거짓말도 못해 실망이다.
“야, 너 채하현 화내는 거 못 봐서 그래. 그게 계속 생각나서 나도 모르게 점이 처지는 걸 어떡해….”
“맞아, 원래 늘 멍하게 있던 애들이 한 번씩 화내면 무섭지.”
구름이까지 맞장구를 치자 고개가 갸웃하며 돌아갔다. 화내는 채하현이라…. 아직 건재한 콩깍지 덕분에 그 얼굴로 화를 내 봤자, 별로 무서울 것 같진 않은데.
“일단 화내기 전에 빨리 반납하자. 아까 데리고 올 줄 알고 얘기 안 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얘기해 둘 걸 그랬네.”
달이 형마저 앞으로 달려 나가며 공격 스킬을 퍼붓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보니 더욱더 궁금해졌다. 예쁜이가 화내 봤자 화난 예쁜이지, 뭐 다를 게 있을까?
40분쯤 뒤에야 던전이 클리어되었다. 이만하면 드래곤 하튼지 뭔지 나올 법한데 아직 소식이 없어 답답함에 한숨만 쉬는데 구름이가 배낭에서 리본을 하나 꺼내 내 귀 아래 달아 주었다.
“뭐야, 누나 더워서 정신이 혼미해요?”
“아니, 그나마 예쁘게 돌려주면 덜 화내지 않을까 해서….”
떼어내지 못하게 앞발을 양손으로 잡았다. 달이 형이 송금이 형을 초대해 하우징으로 소환해 달라며 얘기했다. 곧 눈앞에 수락을 묻는 알림이 떴다. 뒷발로 마구 귀를 긁다 수락을 누르자 익숙한 가든 하우스 실내에 도착했는데….
“아니, 내 집이 길드성이야? 왜 여기 다 모여 있어요? 좁은데.”
“여기 뭔가 마음이 편해.”
“어, 나도.”
자기는 겨미를 기다리는 중이라며 장꾸 형이 내 쪽으로 손을 뻗다 이내 귀 아래 달린 리본을 확인하곤 어깨를 부들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이것 봐, 예쁘게 돌려주긴 무슨. 웃음거리만 되는구만. 열심히 발버둥을 쳐 바닥으로 내려온 뒤 귀를 아플 만큼 벅벅 긁었지만, 리본은 어떻게 달린 건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고, 귀만 욱신거렸다.
“나르 좀 전에 화환이랑 겸이 찾으러 초보 마을로 갔는데, 불러 줘야겠네.”
송금이 형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잠시 후 밝을 빛과 함께 화환과 어깨에 기대 울상을 짓고 있는 나르가 앞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겨미….”
나르쪽을 올려 보자 내게 날아와 꼬물거리던 나르는 누가 준 건지 모를 배낭 안에 들어 있던 간식거리를 바닥으로 늘어놓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저 손바닥만 한 가방에 들어 있었지? 간식을 전부 꺼낸 나르가 그 앞에 죄인처럼 털썩 주저앉았다.
“겨미, 나르가 잘못해따. 괜히 고집 부려따.”
“…갑자기 왜 이래? 아까까진 모르는 척하더니.”
[귓속말]간계밥 : 사탕 누나 인어 부화했거든, 깨자마자 나르랑 친해졌는데 아쉬운가바 자기 동생 아니라.
[귓속말]간계밥 : 되게… 요정 같음
[귓속말]유우 : 누나는?
[귓속말]간계밥 : 푸름이랑 너한테 절해야 하니까 애기한테 절하는 거 가르친다고 민속마을 감ㅌㅋㅋㅋㅋ
[귓속말]유우 : 민속마을이 왜 있는 건데…
이 여우 같은 나르가 슬금슬금 눈치를 보더니 무릎걸음으로 걸어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더니 귀 아래 묶인 리본을 뜯어 바닥에 내팽개친 뒤 화환의 뒤로 날아가 몸을 숙였다.
“겨미, 나르 동생이 갖고 시퍼.”
“너 외동이 좋다며.”
속삭이는 나르의 말에 일부러 큰 소리로 대답하자 화환이 힐끔 뒤를 돌아보며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역시, 외동은 외롭지. 자기야, 우리 애가 동생이 갖고 싶대.”
성희롱이 분명했다.
“여, 여동생이 조타.”
동생이 무슨 힘내 볼게, 나와라 뚝딱하면 나오는 건 줄 아나….
“안 돼. 어제 그렇게 난리를 쳐 놓곤. 나르는 외동이야.”
“어, 우리 2세 계획은?”
“그거 길마님 혼자 정한 거잖아요. 우리는 무슨.”
나르가 축 처진 어깨로 가방이 있는 곳까지 날아가 다시 차곡차곡 간식거리를 집어넣었다. 인어가 얼마나 귀엽기에 패악 부리던 것도 잊고 저러는 거지?
사탕 누나의 펫을 본 건 막 길드전 입장을 할 때였다.
성문의 깃발 앞에 모여 카운트다운 할 때 내 앞으로 날아온 인어는 진짜 요정 같았다. 주변에 떠 있는 물방울이며, 보랏빛 눈동자에 분홍 머리. 꼬리까지 오묘한 보랏빛이었는데, 나르가 그 옆에 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겸아, 겨미님? 겸이 님! 우리 애 좀 봐, 나르보다 누나 같지?”
“그러게요, 펫은 평생 이 모습이에요?”
“응. 윽, 귀여운 걸 너무 봐서 심장에 안 좋아.”
“형, 등급도 좋은데 진짜 나르 옷 한 벌이면 돼요?”
“사탕이 나르는 오시 필요 없다! 나나에게 주어라!”
“나나?”
푸름이 한숨을 푹 쉬곤 이름의 짓게 된 과정을 설명했다. 콩순이 인형을 좋아했으니 콩순이로 짓겠다는 걸 말리니 이번엔 미미로 지을 거라는 말이 들려 왔다며. 미미가 뭐냐고, 인형 이름에 왜 이렇게 집착하냐 싸우다 결국 나나가 되었다는데, 나나나 미미나….
한참을 떠들고 있다 보니 길드전이 시작되었다. 이번엔 소환해 봐도 되는 건가 싶어 화환의 눈치를 살피니 멀리 성벽을 보던 화환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 눈을 찡긋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걸 배워서 써먹어야 하는데…. 구슬 위로 손을 올리자 마력이 금세 반으로 줄며 포탈에선 수인족 NPC가 대거 등장했다.
“와, 무기 봐. 푸름이 저거 안 해 봤지?”
“네. 신기하다. 형, 다음엔 제가 해도 돼요?”
대답할 틈도 없이 날아오는 적들에게 공격 스킬을 난사했다. 어떻게 이렇게 빠르게 온 거지? 나르가 실드를 쳐준 덕분에 간간이 광범위 스킬을 날리며 포션을 마실 틈이 생겼다.
주위를 둘러보자 생각보다 잘 싸워 주는 NPC에 뿌듯함도 잠시, 내 쪽으로 커다란 불길이 일더니 꼼짝없이 갇힌 신세가 되었다.
실드도 이제 깨질 텐데…. 발을 구르다 프로텍트를 사용하는데 해일처럼 큰 파도가 앞의 불을 전부 꺼주었다. 놀라 고개를 돌리자 거기엔 사탕 누나와 나나가 뿌듯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고, 나르가 쪼르르 날아와 그을린 곳은 없는지 온몸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겨미! 겨미는 나르 뒤에 있어라! 안 대게따.”
누가 봐도 약해 보이는 나르가 듬직하게 얘기했다. 나르의 등 뒤라고 해 봤자 얼굴 하나도 제대로 가려지진 않겠지만 알겠다 답하자 나르는 안전한 곳으로 나를 데려갔다.
[적 깃발의 체력이 70% 남았습니다.]
알림이 울린 건 지원군이라도 부른 건지 사람 몇 명이 더 날아올 때였다. 장꾸 형이 그쪽으로 화살을 비 오듯 쏟아 내었고, 달이 형이 우리 쪽으로 날아오는 공격을 막아 주며 앞으로 달렸다.
“와, 급하긴 한가 봐, 길마까지 온 거 보면.”
“누구요? 월클 길마면, 월요일?”
보미 누나와 푸름이가 속닥거리는 게 들렸다. 원래 길드 마스터가 본진을 지키는 건 당연한 건가?
화환에게로 달려는 월요일이 보곤 바로 프로텍트를 걸며 곁에서 체력을 올려 주었다. 저 간 큰 놈이 우리 집 예쁜이한테 뭐 하는 짓이야.
“아우우-!”
세 명까지 늘어난 사람에 결국 하울링을 쓰자 첫 PK를 경험했다는 알림과 칭호가 하나 획득되었다!
-꼼쫌똠쏨 처치! 명성이 2 올랐습니다.
-길드 마스터 월요일 처치! 명성이 5 올랐습니다.
[원드클래스 길드 마스터 월요일 님께서 유우 님에게 처치당하셨습니다.]
“뭐야, 길마 죽이면 이렇게 보이는 거예요?”
“응. 우리 자기, 나 구해 주러 온 거야?”
“네. 여기 힐러는 둘뿐인데 사탕 누나는 바쁘잖아요.”
별거 아니라는 내 대답에도 화환은 기쁜 건지 눈이 보이지 않을 만큼 환하게 웃었다. 그만 좀 홀리지.
“어떡해, 진짜 반하겠다.”
뭘 어떡해 옆에 딱 붙어살면 되지. 굳이 쉬운 길을 두고 돌아가지 말고 내 곁에 있으면 될 일이었다. 오늘치 멋짐을 다 보여준 뒤 화환의 곁에서 체력만 계속 올려주다 보니 이번 길드전도 승리로 끝이 났다. 이러다 진짜 1등 하는 건 아닌지 내심 기대가 되기 시작했다.
[피안 길드가 승리하셨습니다! 8시 정각에 있을 다음 전투를 준비해 주세요.]
“수고하셨습니다.”
“와, 하늘 있어서 그런가 쉽게 깼네.”
“아니다. 나르가 있었지 않나!”
또다시 가든 하우스에 모인 사람들이 저마다 무용담을 내뱉고 있었다. 구름이 스킬 하나로 적을 세 명을 죽였다는 것부터, 딸피로 1:1 싸우다 이겼다는 지우의 자랑까지…. 모두의 말소리가 끊긴 건 붉은 색으로 알림이 한 줄 떠올랐을 때였다.
[악동 길드가 피안 길드에게 전쟁을 선포하셨습니다.]
-한 시간 이내 수락하지 않으면 패배로 간주, 길드 명성 50%가 악동 길드에게 지급됩니다.
“길드전 중인데…?”
“존나 상도덕 없는 새끼들, 지네 졌다고 저러는 거잖아.”
“와, 길드전 하러 갈 때 성 털로 오겠는데?”
[세계]회전목마 : 비매너 어디 안 가쥬? 길드전 중에 쟁 거는 클라쓰!
[세계]고삼차 : 훈민정음에 개털리고 피안에 화풀이하는 거잖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세계]이불면증 : ㅈㅁ 피안 털리면 레드 가죽 풀리는 건가욥?
[세계]이불면증 : 악동 응원합니다
[세계]구름이 : 님 때문에 유우 님이 던전 안 연대여 ㅊㅊ
“어떻게? 몇 명 남아서 길드성 지켜?”
낄낄거리며 키보드 배틀 중인 구름이를 무시한 채 달이 형이 화환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여기로 비싼 템들 옮긴 걸 모르겠구나….
쿠션 위로 빈둥거리며 누워 있는데 나나와 나르가 쪼르르 날아와 내 곁에 누웠다. 귀여운 애가 하나 더 늘었을 뿐인데 평소보다 훨씬 빠르게 마음의 안식이 찾아왔다.
“괜찮아. 빈집 털어봤자, 뭐.”
“빈집?”
“어, 희귀템들 여기 비밀방에 다 모아 뒀어. 겸사겸사 송금이 형 작업실도. 소리는 하우징에서 작업하니까 괜찮고.”
“맞아요. 지금 길드 창고에 있는 건 소모품뿐일걸요? 그것도 이번 길드전 때문에 뿌려서 얼마 없겠지만.”
치사하게 굴면 똑같이 굴어야 한다는 권경배의 말에 달이 형도 어색하게 웃었다. 자기는 절대 피안에 싸움을 걸지 않을 거라는 하늘이의 속삭임에 보미 누나가 불만이라는 듯 화환을 노려보았다.
“그래도 괘씸한데 몇 대 패주면 안 돼?”
“맞아, 우리가 먼저 치면 되잖아. 멍청이들이 아직 시간이 남은 걸 모르고 지금 처 걸고 지랄이야.”
화환은 사탕 누나의 말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다 전쟁을 수락하곤 똑같이 악동 길드의 전쟁을 걸었다. 이 사람들은 좀 전에 힘들게 싸워 놓곤 또 싸우러 가는 건가? 모르는 척 누워만 있자 큰 손이 나를 덜렁 들어 올려 품에 안았다.
“아, 전 안 가도 되잖아요.”
“가야지, 부길마까지 할 뻔한 길드랑 싸우러 가는데.”
“부길마? 겸이 권력욕이 있어?”
구름이 굳이 안긴 내 곁에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곤 물었다.
“사내연애가 겸이한테 부길마 준다고 꼬셨다던데.”
“걔 악동 길마잖아, 웃기네. 겸이 많이 탐났나 봐.”
구름이 말에 시큰둥하게 대답한 화환이 어깨로 나를 걸쳐 놓았다. 이 새끼가 외간 여자랑 얘기하면서 날 짐짝 취급해? 짜증이 치밀어 눈에 보이는 어깨만 이로 왕왕 물어뜯자 쉬고 싶어서 화난 거냐며 등만 토닥였다. 그런 거 아니라고!
화환의 파티를 받은 후 정신을 반쯤 빼고 옮겨진 곳은 바로 악동 길드의 성이었다. 절벽 위 아슬하게 위치한 곳이었는데 여기 며칠만 있다 보면 정신병이 돋을 것 같은 어둡고 칙칙한 곳이었다.
“와, 위치는 별론데 성은 우리 길드성 두 배는 되는 것 같아요.”
“응, 길드전 콘텐츠 처음 만들어졌을 때 여기가 우승이었거든. 그거 보상이야.”
“그럼 뭐하냐, 지금 악동 길마가 돈 주고 산 길드잖아.”
“길마 자리를 산 거예요?”
“오백이었나? 길드 이름도 귀엽잖아.”
“와… 길마 혼자 먹은 거예요?”
“응, 그래서 원래 길드원이었던 사람들 전부 길탈했지.”
길드성은 이제 전투가 시작된 건지 번쩍거리는 빛이 잔뜩 일었다. 신기하게 건물은 부서지지 않았는데 끊임없이 나오는 사람들을 보다 화환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그래도 이렇게 붙어 있으니까 좋네.
“저 개새끼, 숨어서 안 기어 나오는 것 좀 봐.”
사탕 누나의 짜증스러운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성 입구를 바라보자 거긴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사내연애의 뒤에 딱 달라붙어 우리를 내려보는 베르였다. 이젠 저기에 붙은 건가?
“능력 좋네.”
“자기야, 내 앞에서 지금 다른 남자 칭찬하는 거야?”
얼굴은 네가 제일 예쁘니,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로 뺨에 손도장 하나를 찍어 주었다.
생각보다 꽤 치열한 싸움을 하는 중이었다. 전력은 우리가 우세였지만 머릿수는 한참 모자란 탓에 짜증이 한계치까지 오른 수박 누나가 송금이 형을 불러 왔다. 아마 나태의 던전에서 썼던 합동 기술을 쓸 생각으로 부른 거였겠지만, 그건 틀린 선택이었다.
“민초맛사탕이랑 인사는 했어요? 꽤 오래 찾고 있었다던데.”
어느새 가까이 온 베르가 놀리듯 사탕 누나와 송금이 형을 바라보며 물었다. 저 개새끼. 아니 강아지는 무슨 죄야, 씹새끼.
“무슨 개소리야?”
“아, 아직 모르나… 에그타르트 님이잖아, 몰랐는데 너 엄청나게 찾아다니는 중이라며?”
사방이 고요해졌다. 사탕 누나가 눈만 끔뻑이다 송금이 형 쪽을 돌아보았고, 송금이 형은 낮게 한숨만 한 번 내쉬었다.
“와, 너무하다. 아무도 안 알려 준 거야? 간계밥이랑 화환은 알고 있었잖아. 송금 님도 민초맛사탕이 이사랑인 거 알고 있었지 않아요?”
비꼬는 베르의 말에 처음으로 화환이 무기를 꺼내 들었다. ‘탕’하는 총성과 베르가 검게 물들어 갔으며 곧이어 ‘길드성’이라는 채팅에 한 명씩 길드성으로 이동했다.
사탕 누나와 송금이 형마저 가서 얘기하자며 사라졌고, 주변을 한번 둘러보던 화환도 이동하는 건지 눈앞이 조금 흐려졌다.
“누나, 그게….”
“내가 얘기하지 말아 달라고 했어. 좋은 기억도 아닌데 괜히 다시 떠올리게 하고 싶지 않아서.”
“…내가 찾고 있는 건 알고 있었어요?”
“아니, 그것도 정모 때 알았어. 저번 주.”
눈치만 슬쩍 보곤 화환의 어깨를 두드렸다. 우리가 피해 줘야 할 것 같은데….
[파티]화환 : 왜, 뽀뽀해 줘?
[파티]유우 : 나중에요. 둘만 있게 해 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멀뚱히 서 있던 보던 화환이 수줍은 얼굴로 웃더니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자리를 옮겼다. 오랜만에 오는 연회실이었다.
“언제, 언제 해 줘?”
“다음 생에.”
“벌써 다음 생까지 약속하는 거야?”
자리에 앉으며 또 방정을 떠는 화환을 한심하게 바라본 뒤 간식들을 배낭에 챙겼다.
“네, 네. 그러니까 조신하게 살아요.”
얼굴밖에 볼 게 없는 길마가 수줍게 웃으며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조금 억울한데…. 그 얼굴이면 남자든, 여자든 마구 홀리며 살았을 게 아닐까? 일단 끼고 살기 전 뜨거운 물로 온몸을 소독할 필요가 있었다.
“겨미, 사탕이 화나따?”
나나의 손을 꽉 잡은 나르가 가까이로 날아왔다.
“응, 나르 나나 잘 챙겨 줘.”
“언니니까 당연하다.”
“언니?”
“그러타, 겨미. 나나가 언니가 갖고 싶다고 해서 내가 해 주기로 해따!”
뭔 헛소리를 이렇게 당당하게 해? 한소리 하려 입을 떼자 눈치 없는 화환이 내 입에 과자를 밀어 넣었다.
“길마님, 저리 좀 가 봐요. 지금 우리 나르가 중성화하겠다는데 이게 들어가겠어요?”
“자기야, 백설이도 중성화했다며.”
쓸데없이 기억력만 좋아서…. 화환을 노려보다 자기주장 중인 오똑한 코를 한 번 핥아 주었다. 닥치라는 표현을 로맨틱하게 하려면 이 정도면 되겠지?
“겸이 시력 나쁜가 봐. 거기 아니라 조금 더 아래잖아.”
“뭐래요, 나 시력 되게 좋은데.”
불퉁한 대답에도 화환은 기분이 좋은지 아예 나를 끼고 앉은 체 입술을 내밀었다. 아니 미친…. 아직 마음의 준비는커녕 사귀지도 않는데 이건 너무 빠른 거 아닌가? 서둘러 볼록 나온 입술을 앞발로 막으며 물러났다.
“저 혼전 순결이라니까요.”
“날 잡자니까, 내가 알아보면 되지?”
배낭을 한번 내려 보았다. 수인 왕국 성에서 얻은 칭호면 결혼도 가능한데….
“겨미, 길마랑 겨론하나?”
나르의 말에 현실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화환은 그저 기르는 강아지처럼 귀여워하는 것뿐이지…. 양아치 새끼! 귀 끝이 화끈했다.
“아니, 안 해.”
화환의 손을 벗어나 테이블 위로 뛰어내려 귀를 벅벅 긁고 있자 귓속말 채팅창이 반짝였다.
[귓속말]간계밥 : 야
[귓속말]유우 : ㅇ?
[귓속말]간계밥 : 미친놈이라더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임 ㅋㅋㅋㅋㅋㅋ
[귓속말]유우 : 심각해
[귓속말]유우 : 요즘 같이 들어갈 관이나 알아볼까 고민 중
[귓속말]유우 : 혹시 불이의 사고로 내가 먼저 죽으면 길마님 같이 묻어줄 수 있?
[귓속말]간계밥 : 업ㅅ지 ㅂㅅ아 범죄임 ㅠ
[귓속말]유우 : 울면서 빌면 봐주지 않으까….?
[귓속말]간계밥 : 뇌 빼놓고 얘기하지 말라고 ㅠ
권경배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늘 그렇듯 권경배의 반응은 중요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채길마 코를 꿰어 데리고 살지 고민이 더 중요하다.
반년을 따라다녀 겨우 한 번 데이트 할 기회를 얻은 큰형보단 내가 낫지. 자기합리화를 한 뒤 길드전에 입장했다.
가장 늦게 들어온 건 사탕 누나였다.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은 듯 무표정으로 앞만 보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아무도 누나에게 말을 걸 수 없었고, 막 시작한 길드전에만 필사적으로 집중하는 중이었다.
[길드]구름이 : 애들 그쪽으로 한 명도 안 가는데? 여기 지원 좀.
[길드]수박맛사탕 : ㅇㅇ 질 거 뻔하니까 시간벌기네
[길드]겨울 : 아직 이런 거 업적 삼아 길드원 구하는 데가 있음?
[길드]보미 : 긍까 빨리 와 1초가 아까움 ㅆㅂ
길드 채팅을 확인한 화환이 사탕 누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탕이랑 나만 남고 다들 적 깃발 치러 가죠.”
“아니, 겸이가 남아.”
“이사강.”
“뭐라도 두드려 패고 싶어서 그런 거야.”
눈치만 볼 수밖에 없었다. 나도 알고 있던 사실이었고, 알리지 말라 권경배에게 몇 번이나 당부했으니 말이다.
먼저 날개를 펼친 사탕 누나를 선두로 사람들이 하나둘 날아올랐다. 나르도 나나와 함께 가겠다며 자리를 옮겼고, 여긴 적 깃발의 체력 알림만 하나, 둘씩 뜰 뿐 정적만 흘렀다.
[피안 길드가 승리하셨습니다! 8시 30분에 있을 다음 전투를 준비해 주세요.]
긴 5분이 지나고 뜬 알림에 수고했다는 인사 대신 바로 길드성으로 이동했다. 가장 먼저 보인 건 권경배와 사탕 누나였다. 대치 상황인 건지 말없이 서 있는 사람들에 뒤로 물러나자 익숙한 손이 내려왔다.
화환이었다. 언제 온 건지 둘 사이에 멈춰 선 화환이 안전부절못하는 권경배의 어깨를 토닥였다.
“누나, 죄송해요. 그게….”
“됐어, 얘기 들었어. 그런데, 솔직히 좀 실망이긴 하다.”
권경배는 드물게 기죽은 얼굴이었다. 이런 상황에서까지 모르는 척 있기엔 종잇장만 한 양심이 찔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누나 계란이 잘못 아니에요. 정모 날 저녁에, 아니 그날 제가 얘기했어요, 둘 사이에 끼지 말라고.”
사탕 누나가 놀란 듯 내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쟤는 누나한테 알려 주고 싶어 했어요….”
“와… 전에 화환 저주 얘기 안 했을 때, 그때 왜 네가 그렇게 화냈는지 이해가 간다. 이런 기분이었구나.”
우리 겸이, 겸이가 아닌 너라고 불린 건 처음이었다. 사탕 누나는 더는 할 말이 없다는 듯 안으로 들어가 버렸고 남은 셋은 차마 길드성으로 들어갈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주위만 맴돌았다.
“자기야, 길챗 봐. 길드성 소모품 싹 털렸대.”
“지금 그게 중요해요?”
“나는 늘 자기가 중요하지.”
꾸준히 말이 통하지 않는 대쪽 같은 놈을 노려보곤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둘은 친구니 이럴 때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고 있지 않을까?
“길마님, 어떻게 해요? 누나 화 많이 났는데.”
“형… 무릎 꿇고 빌면 용서해 줘요?”
“너희 왜 친구인지 알겠다. 그냥 둬. 쟤 화났을 때 사과한다고 치대면 더 화내.”
그래도 우리보단 친구가 하는 말이 맞겠지? 신뢰가 긴 하지만 이럴 때는 들어 나쁠 게 없어 보여 고개를 끄덕이자 화환이 성으로 들어갔다.
“야, 유우겸, 우리 좆 된 거지?”
“아마? 그래도 이렇게 최악으로 들킬 줄 몰랐는데….”
권경배가 옷깃에 고개를 푹 묻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더 있으면 울 것 같은 모습에 상황과 안 맞지만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역시 울면서 빌어…!”
“자기야, 누나 말고 나한테 관심을 줘야지.”
치욕스러웠다. 기껏 권경배를 놀릴 기회가 있었는데 놀리긴커녕 입이 잡힌 채 눈만 굴려야 한다니. 짜증이 치밀어 그대로 로그아웃을 한 뒤 현실로 나왔다.
사실 핑계였다. 축축 처지는 분위기에 자리를 지키고 있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핸드폰을 들어 사탕 누나의 연락처만 눌러 보다 결국 여덟 시 반이 되기 직전 캡슐 안으로 들어갔다.
전투 필드엔 다행히 빠지는 인원 없이 모든 길드원이 참석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원이 바뀌어 있었다. 공격팀이던 겨울이 형이 사탕 누나 대신 방어팀으로 교체되는 것으로 말이다.
삐익 하는 소리와 함께 시작된 길드전은 생각보다 치열했다. 원거리 딜러들만 몰려와 각종 스킬을 깃발에 때려 붓는 적길들의 전술 탓에 깃발에 딱 붙어 있던 사람들마저 앞으로 나가야 했다,
거의 동시에 두 길드의 깃발 체력이 떨어졌음을 알리는 알림이 떴다. 세계전에 나가려면 여기서 지면 안 되는데….
서둘러 수인족 NPC를 소환해 달려 나가는 NPC의 뒤를 쫓아가며 다른 길드원들에게 힐을 넣었다. 눈짓으로 인사하는 길드원들을 지나쳐 방어선 최전방에 닿자 커다란 실드를 펴는 푸름이 포션을 마시고 있었다.
장꾸 형도 진지한 얼굴로 활시위를 당겨 적들을 처치했다는 알림을 띄웠다. 기다렸다는 듯 달이 형이 저번에 봤던 그물로 적을 감싸자 내 가까이 다가온 화환이 커다란 라이플을 꺼냈다. 역시 이름만 길마가 아닌 건지 연발로 나가는 탄알에 적들은 속수무책으로 나가떨어졌다.
5퍼 차이로 겨우 승리한 후 하우징으로 이동했다. 아마 송금이 형은 아직 여기 있을 텐데…. 바로 파티 탈퇴 후 송금이 형에게 파티를 걸었다.
[파티]유우 : 저 소환좀 해주세요!
날 수 없고, 나르도 없으니 송금이 형이 있는 방으로 가려면 방법은 이것뿐이었다.
“형.”
“고생했어, 다음이 준결승이지?”
“네. 뭐 하고 계세요?”
“포션 만들지…. 다 털렸잖아.”
가장 작은 외형으로 크기를 줄인 뒤 송금이 형이 앉은 의자 아래로 가 엎드렸다. 쉬지 않고 움직이는 송금이 형이 만든 백색 소음에 눈꺼풀이 내려와 하품을 크게 하고 눈을 감았다. 사탕 누나랑 화해는 했는지 물어야 하는데….
잠결에 끼익하는 의자 끄는 소리와 채하현의 목소리가 잠깐 들렸다. 절로 떠오른 얼굴에 가슴이 간지러워 발톱을 세워 벅벅 긁으니 안아 올리는지 몸이 들렸다.
도착한 곳은 화환의 무릎 위였다. 불편한 자세를 비틀어 최대한 편하게 눕자 작게 줄인 목소리가 들려 왔다.
“내일 만나기로 했다고?”
“응, 얼굴 보고 얘기하고 싶대.”
“혹시 모르니까 병원 예약해 둘까? 걔 유단자야, 형.”
“너까지 겁줘?”
화환이 웃는 건지 몸이 작게 떨려 왔다. 요망한 놈 가만히 있으라고. 앞발로 허벅지를 내리치자 다리 위에 있던 몸을 옮겨 품에 안고 등을 토닥였다. 이러는데 내가 안 반하겠냐고.
“겸이가 꿈에서도 너 때리나 보다.”
“얘는 왜 바닥에서 자고 있었어?”
“포션 만드느라 신경 못 썼더니 자던데? 아, 다음 상대 떴더라. 훈민정음.”
“응, 엄청나게 얻어맞고 오겠지?”
“결승에서 만났으면 2위인데…. 3위 결정전까지 하면 열 시는 돼야겠네.”
“왜, 뭐 할 거 있어?”
웅웅 울리는 목소리 덕분에 다시 한번 잠이 들려는데 화환이 내 발바닥을 만지작거렸다. 얘는 왜 이렇게 발바닥에 집착하는 거지? 탈탈 털어내곤 눈을 뜨자 검은 머리카락이 먼저 보였다.
“깼어?”
“…길마님 때문에요.”
“왜 여기 숨어 있어, 한참 찾았네.”
“왜, 또 던전 가려고요?”
“아니, 없으니까 허전해서.”
눈치 없는 입꼬리가 또 간질거렸다. 없다고 찾아다니고, 눈에 보이면 어떻게든 끼고 있으려는 거 보니 아예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구나. 화환의 눈을 피해 고개를 돌리자 의미심장한 얼굴로 웃는 송금이 형이 보였다.
“둘이 연애해? 그런 건 몰래 해야지.”
“아니, 내가 일방적으로 쫓아다니는 중.”
화환이 장난스레 대답했다. 어이없네. 누가 누굴 쫓아다니는 중인데. 으르릉하는 소리와 함께 이를 한 번 내보였다.
“이것 봐. 우리 자기가 날 이렇게 싫어해.”
“부끄러운 거 아니야?”
“아… 형!”
껄껄 웃는 송금이 형에게 포션을 잔뜩 받은 화환이 나를 어깨 위에 걸친 채 밖으로 행했다.
“얻어맞고 올게. 겸이 집 잘 지켜 줘, 형.”
“다녀와. 아, 소리도 포션 받아 가라더라.”
“계란이 보내야겠네. 다녀올게요.”
방을 나오자마자 파티가 해산되고 화환에게 파티 신청이 걸려 왔다.
“아직 다음 경기시간 아니지 않아요?”
“응, 길드성에 겸이 보고 싶다는 손님이 와서….”
“저를요?”
“네에. 겸이를요. 성 들렀다 길드전 들어가면 될 거야.”
고개를 끄덕이자 바로 성으로 이동하는 건지 눈앞이 한 번 흐려졌다.
“와, 화환 개 오랜만이다. 건 1년 만인가?”
“네, 잘 계셨죠?”
“응, 훈민정음 오라니까. 그랬으면 이렇게 안 마주쳤잖아.”
길드성 앞에 도착하자마자 마주친 근육 빵빵한 사람은 누나보단 왠지 누님이라 불러야 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훈민정음이면 다음 우리 대전 상대일 건데 왜 적이 여기까지 찾아온 거지? 궁금함에 고개를 들자 앞에 선 사람은 얇게 쌍꺼풀진 눈을 크게 뜨며 나를 훑어보고 있었다.
“유우 님? 뭐야, 늑대라더니 아직 아기였어?”
화환이 얼른 내 얼굴을 숨기듯 자기 품으로 당겨 안자 귀를 울리는 큰 웃음소리와 함께 보미 누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글 언니, 잘 지내셨어요?”
“보미도 여기 있었어? 내가 탐낸 애들은 전부 화환 밑에 있네….”
“하하, 저희 다음 대전 상대던데…. 어쩐 일이세요?”
“응,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할 말이 있어서.”
일단 들어가자며 보미 누나가 성문을 열곤 안으로 걸어갔다. 뒤따라 걷던 화환이 구석진 자리에 앉으며 나를 숨기듯 겉옷으로 감쌌다.
[귓속말]화환 : 자기야, 자는 척해.
[귓속말]화환 : 최대한 눈에 안 띄게.
뒤척이는 척 고개를 끄덕이며 보미 누나의 어색한 웃음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네, 하실 말씀이 뭐세요?”
“너희 세계전 가려고 길드전 신청한 거지?”
“네, 누나도 그런 거 아니세요?”
채예쁜이의 입에서 나온 누나는 이상했다. 그러고 보니 보미 누나에게도 누나라고 부른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괜찮더니 지금은 왜 이렇게 어색하지? 아마 상대를 불편해하는 감정이 들어 나는 것 같았다.
“응. 그냥 피안이 움직인다길래…. 심심해서 따라왔지. 이렇게라도 안 하면 통 마주칠 일이 없잖아.”
[귓속말]유우 : 길마님, 훈민정음이 센 데예요? 그래서 이렇게 어려워하나?
[귓속말]화환 : 응, 우리나라 서버 돈이 거기로 40% 가 들어간대. 우스갯소리로 길드원이 국회의원이네, 뭐네 하는 말도 있던데. 일단 잘 보여 나쁠 건 없잖아.
“훈민정음은 세계전에 관심 없어. 그러니까 포기해 줄게.”
생각보다 대단한 사람에 조금 전 봤던 얼굴에 갑자기 후광이 보이는 기분이었다. 아니 그런데 포기한다고?
“맨입으론 아닌 거죠?”
“당연하지. 대신 수인 히든 우리 쪽으로 넘길래? 지금 하는 퀘도 전부. 돈도 템도 부르는 대로 구해서 넘길게. 나쁜 조건은 아니지 않나?”
“아…. 지금 하는 퀘는 거의 막바지인데요? 혹시 이거 거절하면 저희한테 불이익이 있는 건가요?”
보미 누나가 당황한 듯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골라 대답했다. 내 퀘스트가 그 정도로 탐나는 건가?
밀려오는 뿌듯함에 이유 없이 가슴을 크게 펴자 권경배의 장난스런 귓속말이 도착했다.
[귓속말]간계밥 : ㅁㅊ 훈민정음 면접권 따기도 ㅈㄴ 빡센데
[귓속말]간계밥 : 우리 친구지? 그치? 겸아! 겸아?
[귓속말]유우 : ㄲㅈ
“아니, 거래지 협박이 아니야. 게다가 나도 이건 좀 별로인 방법 같아서 얘기하면서도 찝찝하네.”
“겸아.”
화환이 내 등을 톡톡 두드리며 불렀다. 자는 척하라며…. 얼굴을 찌푸리곤 이를 드러내자 씩 웃던 화환이 내 눈을 한 번 닦아 주곤 앞이 보이게 돌려 안았다.
“역시, 아기 늑대네. 유우 님 안녕하세요, 훈민정음 길드 마스터 한글입니다.”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하는 행동에 고개만 한 번 꾸뻑 숙였다. 맞다. 나도 낯을 가리는 편이다….
“저희 길드로 옮기는 건 어떠세요? 피안에서 요청하는 모든 부탁은 전부 들어드릴 거고, 길드전도 항복할 건데.”
“왜, 저를 부르는 거예요? 레드 던전 때문이에요?”
말도 할 줄 알았냐며 놀란 얼굴의 한글 님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것도 탐나긴 하는데, 멀쩡히 잘 활동하는 사람을 빼 올 만큼은 아니죠. 큰딸이 올해부터 어뉴어를 시작했는데, 히든 퀘를 해보고 싶다고 노래를 불러서요.”
[귓속말]유우 : 어떻게 해요?
[귓속말]화환 : 솔직히 안 갔으면 좋겠는데, 겸이한텐 가는 게 좋을걸? 한글 님이면 연계퀘도 경험 있을 거고, 길드 지원도 우리보다 훨씬 좋을 거니까.
[귓속말]유우 : 그래서 가라고?
[귓속말]유우 : 혹시 지금 이거 쫓아내는 거예요?
[귓속말]유우 : 진짜 사망하고 싶은가? ㅗ 개양아ㅊㅣ ㅅㅐㄲㅣ야ㅗ
채하현을 배신자 보는 것처럼 노려보았다. 양아치라고 불렀더니 진짜 양아치가 된 새끼…. 나보다 세계전이 중요하다는 거지, 지금?
[귓속말]화환 : 아…. 우리 자기 말려주길 바라구나.. 겸이 안 갈 거잖아. 그러니까 겸이 입으로 안 간다고 하는 거 듣고 싶어서.
비굴하게 보이는 단어에 생각나는 대로 써 내려가던 행운의 편지 내용을 지웠다.
알고 있었으면 진작 그렇게 말하지, 하마터면 ‘이 편지는 영국으로…’라 운을 떼는 말로 채예쁜이를 심란하게 만들 뻔했네. 억지로 원하는 답을 끌어낸 거지만 당황한 얼굴을 가지 말라 붙잡는 얼굴로 덮어씌웠다.
이게 내 마음도 편하고 채공주의 앞날도 건강할 거였으니 말이다.
“그러면 그냥 여기 있을래요. 연계 퀘도 지금 거기 맞는 무기까지 다 구한 상태라 옮긴다고 해도 훈민정음 길드원이랑 가는 것도 어려울 것 같고… 처음 시작할 때부터 도움받던 분들인데 두고 가긴 좀….”
“피안은 세계전을 노리는 게 아니었나요?”
보미 누나와 권경배를 한 번 노려보았다. 나야, 세계전이야 하는 마음으로 노려본 건데 용케 알아차린 둘은 한 번 마주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나라는 거지? 당당하게 채하현의 허벅지 위에 네 발로 서자 한글 님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괜찮대요. 퀘스트가 끝나고 더 강해져서 다시 노리면 되는 거니까.”
[귓속말]보미 : 맞다, 맞다. 우린 퀘 끝나면 칭호 효과도 상승이니까!
“아쉽다. 겸이 님 되게 마음에 드는데…. 그럼 이따 길드전 때 보기로 하고, 마음 바뀌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한글 님이 웃으며 사라졌다.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보미 누나가 소파 등에 몸을 기대앉으며 크게 한숨을 쉬었다.
“와, 개쫄았네….”
“누나 왜 그렇게 한글 님을 겁낸 거예요?”
채하현의 다리 위에서 뛰어내려 몸을 부르르 떨곤 보미 누나의 발치에 다가가 앉았다.
“나 예전에 한글 님한테 열 번 연속으로 깨진 적 있거든…. 그 뒤론 저절로 공손해지던데.”
“그나저나 훈민정음까지 유우겸을 데리고 가려고 할 줄은 몰랐네요.”
“난 계란이가 우리 겸이 데리고 왔다는 게 아직 안 믿겨.”
“누나, 나는 왜 계란이고 쟤는 우리 겸인데? 우리 같이 돈 던전이 얼만데….”
권경배의 억울한 말에 보미 누나가 웃으며 대꾸 없이 고개를 팩 돌렸다. 너는 좀 그렇지…. 덩치부터 우리라는 단어를 앞에 붙여 부르면 패버릴 것 같으니 말이다.
“야, 너 왜 안 갔냐. 거기 들어가기 하늘의 별 따기인데. 게다가 달마다 떨어지는 돈도 엄청날걸.”
“돈은 안 아쉬운데. 수인족 왕국으로 하우징 옮기는 사람들 많아져서 국고가 빵빵해. 그거 매달 업뎃 후에 나한테 10% 들어온대.”
“내가 겨울이가 아니라 겸이랑 결혼했어야 했나?”
깔깔 웃던 보미 누나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장난스레 얘기했다.
“그러고 보니 다음 주면 길드 랭킹 보상도 들어오네. 겸이 주머니 빵빵해지겠다.”
화환까지 놀리듯 중얼거리자 권경배가 환전하는 법을 알려주겠다며 수수료를 떼먹으려 했다. 원래 첫 월급은 부모님 내복 사주는 거라던데…. 빨간 내복 요즘도 팔겠지? 한참 빈둥거리다 보니 길드전 알림이 떠올라 서둘러 이동했다.
[길드]화환 : 이번 전투는 지는 게 뻔하니까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놀다 온다는 생각으로 다녀옵시다. 끝나고 악동마저 털러 가고.
NPC소환 구슬 앞에 서자 곧이어 길드전이 시작되었다. 역시 훈민정음. 그동안 만났던 길드완 차원이 다른 속도로 우리 날아오는 사람들을 확인하며 수인족을 소환했다.
나르도 이번이 위험한 걸 듣고 내 쪽에 딱 붙어 적을 노려보며 실드를 쳤다. 어느 정도 소환된 NPC를 보곤 포션을 마시자 커다란 운석이 깃발 쪽으로 날아들었다.
“미친, 한글 님 여기 오셨네.”
푸름이 겨우 실드로 깃발을 지켰지만 우리 깃발의 체력은 95% 남았다는 알림이 먼저 떴다. 거의 몸으로 막은 듯 빨갛게 변한 푸름의 체력을 올려준 뒤 하울링을 사용했지만, 밀고 들어오는 사람들은 끝이 없었다.
훈민정음은 사람이 많을 뿐만 아니라 한명 한명이 너무 강했다.
서둘러 프로텍트를 치곤 앞으로 달려가며 길드원들의 체력을 올려주었다. 나르는 얌전히 있으라며 엉덩이를 때렸지만, 워낙 작은 손바닥이라 토닥이는 정도로밖에 느껴지지 않아 못 들은 척 그냥 앞으로 달렸다.
막 장꾸 형의 체력을 올려줄 때였다. 바로 앞으로 떨어지는 번개에 놀라 뒤로 물러나자 그걸 노렸다는 듯 정확하게 나를 노리고 두 번째 번개가 떨어졌다.
‘깨갱’ 하며 바닥을 구르자 죽었다는 알림과 함께 즉시 부활을 하겠냐는 물음이 떴다. 길드전에서의 부활 방법은 두 가지였다. 돈을 내는 즉시 부활과 60초 기다리는 본거지 부활. 물질만능주의 같은 알림을 신기하게 보자 주변이 잠잠해졌다.
또 어마어마한 공격이 내려오는 건가? 서둘러 즉시 부활하기를 선택하고 색이 입혀지는 풍경을 보는데….
먼저 보인 건 쓰러진 나를 내려다보는 나르의 붉은 눈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나르의 작은 몸에서도 일렁이는 탁한 빛이 일었고, 전투 중이던 수인들도 나르와 똑같은 상황이었다.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체력을 올리자 기다렸다는 듯 나르의 몸이 떨렸다. 그러곤 바로 바닥으로 처음 보는 붉은 마법진이 그려졌다.
우리 성의 입구 전체를 뒤덮듯 커진 그림에서는 땅이 갈라지듯 커다란 소리와 함께 검은 식충 식물이 튀어나왔다. 그 식물이 전부 자신의 의지로 움직이듯 훈민정음 길드원들을 잡아 공격했다.
전세가 뒤집힌 건 순식간이었다. 나르의 마법을 피한 사람들은 붉은 눈으로 공격력이 더 강해진 수인에게 당해 삽시간에 성벽까지 밀려났고, 유일하게 피한 한글 님만이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뭐야….”
무슨 상황인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아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것도 잠시 썰물 빠지듯 빠져나가는 마력에 포션을 마셨지만 금새 마력이 바닥났다. 동시에 나르의 마법진도 빛을 잃었고, 식물들은 메말라 갔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적을 궁지로 몰다니….
나르의 마법이 사라지자 곳곳에선 되살아난 사람들이 천천히 일어나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도 따라가기 벅찬 상황에 멈춘 상태 그대로였다.
“자기가 죽어서 NPC랑 나르가 화난 거야…?”
멀리서 근근히 살아 있는 화환이 놀란 듯 나를 보며 물었다.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솔직히 맞는 말인 것 같긴 한데,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르가 화 난 건 알겠는데 왜, 소환된 NPC마저 화를 내는 거지?
“역시 재미있다니까. 유우 님, 아직 안 늦었는데…. 훈민정음에 올 생각 진짜 없으세요?”
어느새 뒤로 나타난 한글 님이 웃으며 물었다. 놀라 뒤로 빠지려는데 나르가 씩씩거리며 붉은 마법진을 작게 한글 님 아래로 그렸고, 거기선 거대한 이빨 같은 게 나와 한글 님의 발을 묶었다.
“그 아이가 말로만 듣던 펫이죠? 듣던 것보다 더 귀엽네.”
“겨울이 형, 저 활력 한 번만 주세요.”
아직 씩씩거리는 나르를 보다 겨울이 형을 향해 소리치자 곧바로 활력이 들어왔다. 아직 부족한 마력에 포션을 마시자 다시 한번 나르가 마법진을 그렸다.
나르의 마법은 이제 막 살아나 체력이 간당간당한 사람들을 다시 한번 집어삼켰지만, 한글 님만큼은 당하지 않고 나르의 약 올렸다.
겨울이 형도 이젠 이 마법진이 내 마력으로 유지된다는 걸 알아차린 듯 마력이 떨어질 때마다 활력이 들어왔다. 꿀 같은 스킬 덕분에 몇 번 죽을 훈민정음 길드원들은 이제 본거지 부활을 하는 것 같았다.
“뭐야, 겸이 님? 그거 나르 스킬이야? 빨리 말해 줬으면 처음부터 활력 먼저 넣어주는 건데….”
“저 죽은 것 때문에 나르가 화났나 봐요.”
“펫도 화가 나?”
씩씩거리는 나르가 결국 한글님을 포기하고 내게 날아왔다. 내 몸 이곳저곳을 살피던 나르가 등에 있는 그을림을 보곤 땅을 한 번 내려쳤다.
푹 하고 파인 바닥에 당황함도 잠시. 최대한 불쌍해 보이게 몸을 바닥에 딱 붙인 뒤 올려다보자 잔뜩 화가 난 듯 눈꼬리를 올린 나르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얌전히 있으라 하지 않았나! 왜 이러케 말을 안 드러!!”
또 제가 주인인 양 소리를 치는 나르의 손에 코를 한 번 찍자 나르의 표정이 조금 풀린 것 같았다.
“그래도 나만 살면 뭐 해. 다른 사람들은 다 죽는데….”
나르가 나를 노려보다 내 몸 위로 몇 겹이나 되는 실드를 내 마력으로 쳐 주었다. 그러더니 화환과 한글 님이 싸우는 곳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미처 확인하지 못한 화환의 체력은 어느새 반이 닳아 있어 서둘러 힐과 프로텍트를 걸어주었다. 열세에 몰린 화환을 보고 하울링으로 잠시 쉬는 시간을 만들어 주었지만, 화환은 검게 물들며 죽어 버렸다.
[피안 길드의 길드 마스터 화환 님을 한글 님께서 처치하였습니다!]
한글 님이 주위를 한 번 둘러보더니 내 앞으로 걸어왔다. 나르가 잔뜩 날개를 부풀리며 내 앞을 막아서자 한글 님이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듯 양손을 가볍게 위로 올리며 다가왔다.
“NPC 공격력이 왜 갑자기 오른 거예요? 것도 수인이던데…. 유우 님이 뭔가 한 건가요?”
“겨미는 수인들의 왕이 될 아기다! 그대는 그대의 왕이 얻어맞고 있는데 화가 나지 않나?”
앙칼진 나르의 대답에 멍하게 있던 한글 님이 눈을 크게 뜨곤 나와 나르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게 무슨 말이야? 왕궁이 내 하우징이긴 한데… 수인들의 왕이라니….
“수인 히든 직업은 수인들의 왕인가….?”
“아라쓰면 이제라도 무릎을 꿇어라, 천족! 수인들은 전투 민족이다. 척지고 시픈 거시 아니겠지?”
“만약에 내가 계속 유우 님을 죽이면 어떻게 되는 건지 알려줄래?”
“그대 하나 때문에 천족과 마족이 아닌 천족과 마족, 그리고 마족의 편에 수인족이 설 거시다.”
“이거 다음 시즌 떡밥인 거야?”
겨울 님이 내 뒤에 딱 붙어 물어 왔다. 아니, 님들이 모르는 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무언갈 알아차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한글 님이 괜히 찝찝해 나르의 옷자락을 물어 뒤로 끌었다.
“좋은 구경시켜 줘서 져 주고 싶은데…. 두 번이나 거절당한 게 서운해서 져 주진 못 하겠다. 그래도 유우 님은 안 건드릴 테니까 앞으로 친하게 지내요, 우리.”
말이 끝나기 무섭게 깃발을 공격하는 한글 님과 훈민정음 길드원에 우리 깃발은 순식간에 체력이 바닥을 쳤다.
[피안 길드가 패배하셨습니다. 9시 정각에 있을 3위 결정전을 준비해 주세요.]
머리가 복잡했다. 바로 길드성으로 향하던 길, 다른 사람들 또한 같이 움직인 건지 앞에서 마주쳤다. 아직 옆에 딱 붙어 나르의 눈치를 살피던 겨울이 형이 떨어진 것도 그 순간이었다.
“누나, 들었어? 겸이가 수인 왕이 될 거래.”
“겸이가 수인 왕이라고?”
“나르가 그랬다니까, 수인들의 왕이 될 아기라고…. 다음 시즌은 천마전일 거라는데?”
보미 누나가 달려와 나르를 보며 진짜 왕이냐고, 천마전은 뭐냐 묻자 나르는 이상한 사람들을 다 본다는 듯 내 뒤로 숨었다.
“겨미가 왕인가?”
“어? 아까 나르가 그랬잖아.”
“나르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겨미가 깨갱 해서 화가 났는데?”
“아까, 유우, 아니 겸이 죽었을 때! 수인 NPC랑 갑자기 눈 빨개져서 바닥에 풀 소환하면서 얘기했는데?”
“맞아, 말 안 듣는다고 나 때리면서 그랬어. 천족 대 마족이 아닌 천족 대 마족 그리고 마족의 곁에 수인이 있을 거라고….”
나르가 고개를 저으며 모른다고 말했다. 우리 나르에겐 이 정도 연기력은 없으니 모르는 건 확실한 것 같은데….
“그럼 유우 님이 이따 한 번 더 죽어 보자. 나르 눈 빨개지면 얘기해 주겠지.”
너도나도 빨개진 수인의 눈을 봤다며 수군거리는 중 겨울 님이 해맑게 중얼거렸다.
“겨미를 왜 주기나! 너나 죽어라, 멍청이!!”
소리를 빽 지른 나르가 그대로 날아가 겨울 님의 배에 머리를 박았다. 겨울이 형이 ‘악’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쓰러져 뒹굴었지만, 그 누구도 신경 쓰는 사람이 없었다.
뿌듯한 얼굴로 나르를 돌아보자 나르가 내 꼬리를 잡곤 화환에게 끌고 갔다. 또 강한 사람에게 붙으라는 건가? 한숨을 크게 쉬며 화환의 다리 옆에 앉으니 화환은 잘했다는 듯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업뎃하고 나면 알겠지. 그만 괴롭혀, 훈민정음도 마다하고 여기 남았는데.”
다들 놀란 듯 웅성거리며 내 쪽을 힐끔거렸다. 구름이는 그럴 것 같았다 고개를 끄덕이더니 하늘도 까였는데 당연하다며 웃었다.
“다음이 마지막이에요? 3위 결정전?”
“응, 다음은 이겨야지?”
아마 다음 전투에선 나르의 감시를 받겠지. 대진운이 좋아 그다지 강하지 않은 길드와 붙을 예정이니 걱정하지 말라는 화환의 말에 알았다, 대답한 후 주위를 둘러보았다.
“겸이, 할 거 없지?”
“있죠, 누워서 쉬기. 저 한 달 동안 게임하면서 두 번째로 죽어본 거라 쉬는 시간이 필요해요….”
“그래. 채하현, 우리 겸이 자기 안아서 곱게 모셔. 레드 딱 세 판만 돌자!”
“빨리, 빨리. 이러다 세 번째 도는 중에 시작하겠어.”
겜참을 만만하게 봤다. 길드전은 움직이는 축에도 못 낀다는 듯 몸을 푼 하늘이 형이 먼저 자리를 떴다. 나는 일반인이라고…. 진짜 던전에 가는지 물으려 고개를 들자 화환이 예쁘게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뭐 해, 겸이. 작아져야지.”
이 예쁜이도 겜창인 걸 잠시 잊었다. 하나둘씩 늘어나는 파티원을 확인하며 크기를 줄이자 소환 신청이 왔다. 제발 오늘은 드래곤 하트가 나와주세요….
역시 이번 던전도 드래곤 하트는 나오지 않았다. 다행인 건 길드전에 아슬하게 입장할 수 있었고, 결국 겜생 첫 길드전은 3위로 막을 내렸다.
계속 (col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