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수인 왕국 (6/11)

2. 수인 왕국

[귓속말]보미 : 겸이 길드성이야?

[귓속말]유우 : 네, 누나.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을 열고 들어오는 보미 누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겨미! 왜 이러케 안 왔나. 나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나르 보미 누나랑 있었어?”

“그러타, 보미 무기 던전도 갔다 왔다!”

“고생했겠네.”

“그게 중요한 거시 아니다! 도망쳐라 겨미, 변태들이 올 거시다!”

“변태들?”

[길드]구름이 : 유우님? 유우 님이다!

[길드]별이 : 길드성이라고 위치 뜨는데?

[길드]구름이 : 한 시간만

[길드]구름이 : 아, 한 시간만 딱 계세여ㅜㅜ 제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길드]하늘이 : ㄴㄴ 저희가.

[길드]달이 : 얘들아..! 제발 부끄럽게 그러지 좀 마

[길드]구름이 : 님 봐서 안 던지고 깨는 거임. 하느리 같았어봐 벌써 길드성 문 열었다.

[길드]계란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민초맛사탕 : 겸이 인기봐ㅋㅋㅋㅋㅋㅋ

빠르게 올라가는 채팅창을 꺼버리고 나르를 올려 보았다. 평소와 다르게 긴 머리를 땋은 나르는 옷차림도 화려한 하와이안 셔츠를 입고 있었다.

“우리 나르 꼬까 입었네?”

“겨미! 겨미의 눈에 이게 꼬까로 보이나?”

하얗게 질린 나르가 바들거리며 소리쳤다. 실내가 쩌렁쩌렁 울리게 큰 소리였지만 너무 억울해 보이는 모습에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아 미친, 겸아 나르 잘 어울리지 않아?”

“아… 니요. 이상해요.”

귀엽게 어울렸지만 나르 앞에서 그렇다 대답할 수가 없었다.

“겨미, 여기 있으면 안댄다. 얼른, 레벨 올리러 가자!”

“누나 같이 가실래요?”

혼자 가면 사람들한테 둘러싸여 퀘도 못 하는데….

“수박이 불러줄게. 퀘 밀려면 나보다 수박이가 더 좋을 거야. 어디로 보낼까?”

“하젤 마을이요!”

“빨리 도망가 있어.”

퀘스트 길잡이를 활성화하자 눈앞이 흐려졌다. 분명히 마을로 이동된다고 뜬 것 같았는데 도착한 곳은 마을이 한눈에 내려 보이는 산 위였다.

“여기 아니지 않아?”

“저어기 마을에서 시작이 아닌가? 겨미 길을 잃어따.”

“뭐지, 오륜가?”

산을 내려가려는데 수박 누나에게 파티 신청이 걸려왔다. 수락하기 무섭게 파티장이 넘어와 파티원 소환을 하자 웃음을 가득 머금은 수박 누나가 나타났다.

“겸이 안녕. 채팅창 난리 났던데 봤어?”

“안녕하세요, 앞에 조금만… 봤어요.”

“저래 봬도 어뉴어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 네임드니까… 힘내!”

못 들은 척 퀘스트 마크가 뜬 곳으로 걸어가려는데 갑자기 나르가 내 꼬리를 붙잡고 불안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겨미, 여기 뭔가 이상하다.”

나르의 손이 점점 떨리더니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동시에 바닥이 검은 안개로 둘러싸이기 시작했다.

-나의 이면에 온 걸 환영하네, 마지막 별의 아이야.

“뮤첼? 네가 어떻게… 여기 있는 거야?”

-내가 맡겨둔 지식을 돌려받으러 왔지. 아직 몸이 완성되진 않았지만, 마음이 급해서 말이야.

뮤첼이 나르를 바라보자 일렁이던 안개가 나르를 둘러쌌다. 어서 구해야 하는데…. 머릿속이 하얘져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겸아! 비활성화 해, 얼른!”

수박 누나의 목소리에 서둘러 비활성화를 켜자 나르가 울먹이며 흐려졌다. 나르가 무사히 돌아간 걸 확인한 수박 누나는 기다렸다는 듯 뮤첼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나르는 괜찮다. 빼앗기지 않고 무사히 잠들었다. 되뇌며 불길에 일렁이는 뮤첼을 노려보았다.

“너 같은 새끼한테 뺏기려고 애지중지 키운 게 아니야!”

-이상하군, 그것은 내가 만든 내 소유물인데…. 그대가 왜 방해하는 거지?

“웃기지 마! 나르는 네 소유물 같은 게 아니라고.”

“겸아, 공격이 안 통하는데?”

수박 누나의 말대로였다. 매섭게 퍼부어지는 공격이 모두 뮤첼을 통과했으며 머리칼 한 올조차 흐트러짐이 없었다. 환각일 수도 있으니 리무브를 썼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무슨 짓은 한 거야….”

-이건 안개에 비친 그림자일 뿐이야. 나의 아이를 돌려주면 그대들을 무사히 보내주지. 이건, 마지막. 배려야.

화가 난 듯 단어 사이사이를 끊어 말하는 뮤첼이 붉은 눈으로 우리를 보고 있었다.

“내가 말했지. 네 아이가 아니라 우리 나르야.”

뮤첼이 순식간에 내 목을 잡은 채 하늘로 들어 올렸다. 컥 하고 막히는 숨에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손에선 힘이 풀리지 않았다. 수박 누나도 놀라 내가 있는 곳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큿. 누, 나 도망….”

도망치라고 말해야 하는데 나오는 건 힘겨운 숨소리뿐이었다.

“이 개새끼야! 손 안 놔?”

뮤첼이 달려오는 수박 누나를 하찮게 바라보았다.

-나는 너구리다. 멍멍 짖는 건 이 아이야, 인간.

지금 그게 중요한 건가? 뮤첼이 반대쪽 손을 들어 내 가슴을 뚫은 뒤 바닥으로 내던졌다. 세상이 흑백으로 변하며 사망했다는 알림이 반짝였다.

[사망하셨습니다.]

-부활 버튼을 누르면 가까운 마을에서 부활 가능.

게임에서 죽은 건 처음이라 신기할 뿐이었다. 풍경이 흑백으로 보이는 것과 움직일 수 없는 것만 빼면 별다를 게 없지만 말이다.

-다시 볼 날을 기대하지. 나의 아이를 말이야.

말을 마친 뮤첼은 안개와 함께 사라졌다.

“와, 씨발. 저 새끼가 최종 보스지? 겸이 마을로 부활하지 마. 그거 경치 깎여.”

[길드]수박맛사탕 : 힐러 아무나 시간되는 분

[길드]수박맛사탕 : 아니면 부활 스크롤 좀..

[길드]수박맛사탕 : 우리 애 뒈짐

[길드]간계밥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걔 겜하고 처음 죽은 거 아님?

[길드]민초맛사탕 : 겸이… 170 퀘 미는 중 아니야?

[길드]수박맛사탕 : 우리 최종보스 만나서 겸이만 죽었어

[길드]푸름 : ㅁㅊ

[길드]수박맛사탕 : ㅇㅇ.. ㅁㅊ

[길드]빛과송금 : 수박아 우편 보냈어.

[길드]유우 : 감사합니다ㅜ

[길드]구름이 : ㅜㅠㅠㅠ 나도 같이 퀘 밀래...

수박 누나가 스크롤을 찢자 몸에 빛이 나더니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자리에 앉아 체력을 올리고 있는데 수박 누나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와, 그런데 공격이 안 통하면 어떻게 잡지?”

“아직 몸이 완성되지 않았다는데요? 완성되면… 때릴 수 있지 않을까요?”

“하긴 깨라고 만든 퀘스튼데 그렇겠지? 나르도 많이 놀랐겠다.”

맞다, 나르. 서둘러 펫 활성화를 하자 울쌍인 나르가 우리 쪽으로 달려왔다.

“겨미, 다치진 않았나?”

“응, 그냥 한 번 죽었다 살아난 것뿐이야.”

나르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곧이어 내 몸 이곳저곳을 더듬었다. 헛소리라고 생각했는지 다친 곳이 있나 없나 확인하는 것 같았다. 그게 간지러워 깔깔거리고 뒤로 넘어가자 나르의 얼굴도 한결 나아졌다.

“내가 레벨을 올리라 했지 않나! 얼른 이러나라, 퀘스트를 하러 갈 거시다!”

“나 죽었다 살아나서 못 걷겠어. 좀만 쉬자 우리.”

“자가저라! 내가 안아 준다.”

“나르야, 내가 안아 주면 안 돼?”

“수박은 사냥해야지.”

뻔뻔한 아이가 하나 더 있었네…. 스킬로 몸을 줄이자 저번과 마찬가지로 나르가 내 등을 안아 마을로 향했다.

첫 번째 선행 퀘스트는 겨울에 쓸 장작을 모아 달라는 것이었다. 줍기만 하면 되는 것이라 쉬었는데 두 번째가 문제였다.

“아니 이런 미로에서 어떻게 보물을 찾아요?”

“여긴 공략도 없어. 매번 맵이 바뀌는 것 때문에 몸 써서 깨야 해.”

“누나, 여기 태우는 건 안 돼요?”

“…여기 태우면 저기 뒤에 산도 전부 타서 현상금 걸리더라.”

태워본 사람의 얼굴이었기에 더는 묻지 않았다. 산세가 험한 탓에 관광객의 발길을 잡기 위해 만든 미로는 생각보다 본격적이었다. 미로에 진심인 사람이 만든 건지 스킬은 당연히 쓸 수 없었고, 비행조차 되지 않았다.

“그래도 몬스터는 없어. 빨리 찾아오자.”

“와…. 참 반가운 말이네요.”

가볍지 않은 다리를 움직여 넝쿨이 가득한 미로로 들어갔다.

얼마나 걸었을까, 뒤에서 들리는 이상한 소리에 고개가 갸웃거렸다. 발소리라기엔 무거웠고, 지진이라기엔 또 가벼운 소리였다.

“겨, 겸이 뒤, 뒤 좀 바라!”

“으아아!”

돌아볼 필요가 없었다. 수박 누나가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달렸기 때문이다. 뭐야, 몬스터인가? 공격도 못 하는데. 따라 달리며 뒤를 확인하자 커다란 바위가 굴러오고 있었다.

셋이 나란히 깔릴 수 있을 만큼 큰 바위에 살기 위해 무작정 앞으로 달렸다.

“누나! 몬스터는 없다는 게, 이런 뜻이었어요?”

“나도 몰랐어! 뭐야, 저게!”

“겨미, 겨미! 저기 앞에 길이 하나 더 있다!”

나르가 가리킨 방향엔 좁은 길이 하나 보였다. 일단 그 안으로 들어가자 수박 누나도 따라 왔고, 겨우 돌을 피할 수 있었다.

“와 뒈지는 줄.”

“저도요…. 아니 저건 반칙 아니에요? 죽이려고 그러는 건가?”

“그러니까. 그냥 태워버릴 걸 그랬어.”

고개를 끄덕이며 안으로 들어가자 나르가 바닥을 내려 보고 있었다.

“겨미 이게 저기 앞에도 있다.”

“어, 그러게?”

눈에 보기에도 험한 길이었지만 반짝이는 표시가 앞으로 몇 개가 더 있었다.

좁은 길을 기어 그 표시를 따라가자 그 끝엔 지금까지의 풍경과 전혀 다른 잔디밭이 나왔다. 작은 연못과 처음 보는 물고기들에 탁 트인 하늘까지…. 어디를 둘러보아도 모난 곳 없이 예쁜 풍경이었다.

“헐, 미친 이런 게 있었어?”

“누나 이 퀘 깬 거 아니세요?”

“태워버려서 몰랐지….”

“겨미! 여기, 보물! 나르가 찾아따!”

잔디밭 중앙에 있는 보물 상자 가리키며 방방 뛰었다. 가까이 가 상자를 들어 올리자 포탈이 생기며 상자가 배낭 안으로 들어왔다.

“나가면 되는 것 같은데.”

“그렇죠? 와…. 힘들었다.”

“맞아. 이런 것보단 사냥해서 딱 끝나는 게 좋아.”

이하동문이라며 포탈을 타자 퀘스트를 줬던 마을 사람의 앞이었다.

무사히 퀘스트 완료를 하고 던전으로 향하는데 나를 찾는 길드 채팅이 올라왔다.

[길드]별이 : 유우 님…

[길드]하늘이 : 어디세여?

[길드]화환 : 우리 애 바빠, 귀찮게 굴지 마.

[길드]구름이 : 유우 님 위치 1억골 ㅅㅅㅅ

“겸이 빨리 던전 가야겠는데?”

“아니 1억이나 주고 살 만큼 가치가 있는 거냐고요….”

“잠시만, 5억 주면 알려준다고 해 볼게.”

장난스레 웃으며 채팅을 하는 수박 누나를 못 본 척 걸어가자 멀리서 던전 입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나르가 날아오르며 던전을 가리켰다.

“어? 겸이 여기 히든이다. 질투가 아니라 히든!”

[귓속말]유우 : 길마님.

[귓속말]화환 : 겨미 형아 안 보고 싶어?

[귓속말]유우 : ㅂㄹ 던전 앞인데 나르가 히든 던전이래요ㅎ

[귓속말]화환 : 우리 길드에 새로운 사람 올 때마다 생기네. 파티 주세요.

화환에게 파티 초대를 하곤 권경배도 불렀다. 이제 두 자리가 남았는데 접속한 사람 중 친한 사람이 별로 없었다,

“누나 두 명은 누구 부를까요?”

“사탕이랑, 장꾸 오빠? 없네. 구름이 님 불러줘. 유우, 유우 노래를 불렀거든.”

채팅창을 확인해보니 구름이가 혼자 거의 도배하듯이 울부짖고 있긴 했다. 하는 수 없이 파티 신청을 하자 바로 수락하는 게 보였다. 6명 다 찬 파티원들을 소환하고 기다리는데 나르가 갑자기 내 몸을 들고 날아올랐다.

“우리 던전 들어가야 하는데?”

“겨미, 구름이에게 잡히면 마구마구 만진단 마리다.”

도착한 사람들의 눈이 전부 우리에게 닿았다. 권경배는 나르의 새 옷을 놀렸고, 사탕 누나는 양팔만 덜렁 들린 내가 우스운지 깔깔거리며 스크린샷 버튼을 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유우 님…?”

온몸을 검정 자객 코스튬으로 맞춘 가장 작은 사람의 입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 사람이 구름이인가?

그 목소리에 당황한 듯 나르의 어깨가 움칠 튀더니 내 겨드랑이를 잡은 손에 힘이 빠졌고, 동시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어, 어…! 하며 나르가 놀라 내 쪽으로 날아오는 게 보였지만, 나르보다 먼저 등을 받쳐 드는 손이 있었다.

“겨미!”

“와, 씨… 또 죽는 줄 알았네.”

“자기야, 거기서 떨어진다고 죽을 만큼 피통이 작진 않을걸.”

“말이 그렇다는 거죠.”

“겨미, 갠찬나? 나르가 실수해따.”

영악한 짐승은 또 혀 짧은소리를 내며 날아오다 내 등을 감싼 손의 주인을 확인하자 이내 멀찍이 떨어져 나갔다.

“유우 님, 저 구름인데 저도 겸이라고 불러도 돼요?”

머리 위에 들리는 나긋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복면으로 얼굴까지 모두 가린 사람이 내 몸을 돌려 눈을 마주쳤다.

“진짜 늑대 외형이네. 근데 왜 이렇게 조그맣지….”

구름이의 손이 내 등이며 손이며 마구 주물럭거렸다. 나르가 허튼소리를 한 것이 아니었다!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쳐봐도 손에 힘만 더 들어갈 뿐이었다.

“…내려주면 돼요.”

“안 내려주고 유우 님이라고 불러도 돼요.”

역시 화환의 친구였다. 미친놈은 어디서 자기와 똑같은 사람만 찾아 사귀는지…. 도와줄 사람을 찾았지만 다들 심각한 얼굴로 수군거리고 있었다. 나르마저 그쪽으로 날아가려는지 몸을 틀었다.

겜생 잘못 산 내 탓이지…. 이 고난을 벗어날 방법은 내가 찾아야 했기에 얼른 다리를 버둥거렸다. 괜히 힘만 빼는 것 같았지만 이까지 내보이며 버둥거리자 귓속말 채팅창이 반짝였다.

[귓속말]화환 : 형아 하고 부르면 도와줄게.

[귓속말]유우 : 길마님.

[귓속말]화환 : 형아.

[귓속말]유우 : 길마형님.

화환이 웃음을 참는 건지 어깨가 잘게 떨렸다. 저 새끼 내가 얼마나 힘내는 중인데…. 몸에 힘을 빼고 그쪽을 보자 미친놈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귓속말]화환 : 하현이 형아.

[귓속말]유우 : 도랐어요?

[귓속말]화환 : 아무래도 우리 겸이가 오늘도 안겨서 던전 돌 생각인가 보다.

[귓속말]유우 : 던전 들어가기 싫다는 거 돌려말하는 중이죠?

화환이 내 쪽을 한 번 보다 던전 입구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구름이는 내 이가 궁금한 건지 입술을 굳이 들어 올려 뾰족하게 난 송곳니를 만지기 시작했다. 그걸로도 부족해 입을 벌리려는 건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귓속말]유우 : 형아, 살려주세요. 길마님 형아!

그제야 미친놈이 내 쪽으로 걸어왔다.

“우리 집 애 그만 괴롭혀.”

“뭐래, 여태 보고만 있었던 주제에.”

내 쪽으로 뻗은 손을 구명줄이라도 되는 듯 붙잡자 구름이의 손에서 나를 넘겨받은 화환이 등을 토닥여주었다. 이렇게 쉽게 구해줄 수 있었으면서…. 화환의 어깨를 내리치자 조용히 던전 앞으로 걸어갔다.

[귓속말]화환 : 자기야, 다름엔 하현이 형아라고 해줘야 해.

[귓속말]유우 : ㅅㄹ^^ㅗ

[귓속말]화환 : 뭐야, 사랑한다고?

[귓속말]유우 : 말을 말자 ㅎ

입장 확인 알림이 뜨기 무섭게 입장하기를 누르자 던전이 한눈에 보이는 곳이었다.

마치 석양이 지는 것 같은 붉은 하늘과 폐허가 된 도시. 금방이라도 무언가 튀어나올 분위기였는데, 묘하게 익숙한 공간 같았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그때 사탕 누나가 놀라며 흡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여기 거기잖아. 겸이 튜토리얼 할 때 왔던 곳.”

“숨겨진 수인 왕국요?”

“흔적인지 뭔지 찾던데. 저기 좀 봐, 분수 아니야?”

이 히든 던전은 뮤첼 덕분인가? 마을 입구와 어렴풋이 보이는 분수만 확인할 수 있었는데 입구 뒤쪽으로 비틀거리며 걷는 사람 인영이 보였다.

“구울?”

“그런 것 같지?”

구름이의 물음이 사탕 누나가 고개를 대답했다. 그리고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백색 빛이 나는 무기를 들었다.

세이브 존을 벗어난 건 그 직후였다. 누구보다 빠르게 앞으로 달려나간 구름이와 권경배를 따라 나가는 화환 덕분에 아직 손에 들린 몸이 힘없이 따라갔다.

[히든:저주의 최초 희생 ‘숨겨진 수인 왕국’ 던전에 입장하셨습니다! 무사히 클리어하시고 명성을 널리 퍼트리세요.]

어김없이 울리는 알림을 확인하기도 전, 생전 처음 맡는 냄새가 코를 때리고 지나 토기가 잃었다. 미친, 이 냄새는 뭐야?

놀란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자 구름이가 구울을 반으로 가르고 있었다. 그것 때문인지 역겨운 냄새는 더 짙어진 거였다. 나는 서둘러 화환의 옷깃에 코를 묻었다.

“나르, 나태 때 썼던 거 다시 못 써?”

“으응…. 겨미, 괜찮나?”

나르가 내 뒷다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당연히 대답은 할 수 없었다. 입을 열기만 해도 무언가 쏟아질 듯 뒤집힌 속에 뒷발로 화환의 옆구리만 힘없이 쳐댈 뿐이었다.

“으, 씨발. 나도 좆 같은데 수인은 오죽하겠냐고. 존나…. 이런 것만 현실감 있는 게임.”

가장 가까이서 구울을 잡은 구름이가 코를 막은 듯 코맹맹이 소리로 이야기했다.

“겨미, 지금 그 스킬은 쓸 수 없다. 이곳은 뮤첼의 저주가 퍼진 공간이라 내 스킬 자체가 사용되지 않는다.”

뮤첼 씹새끼. 내가 진짜 죽이고 만다. 뿌득뿌득 갈리는 잇소리를 들은 건지 나르가 앞으로 날아왔다.

“겨미 죽었나? 길마, 겨미가 움직이지 않는다!”

“안 죽었을걸? 봐, 숨 쉬잖아.”

나르가 뭘 본 건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그렇게 쉽게 죽을 사람으로 보이는 건가? 화환이 부스럭거리더니 망토를 벗어 나를 완전 돌돌 싸맨 후 누구에게 들려주었다.

“수박, 겸이한테 실드 쳐 줘. 없는 것보단 낫겠지.”

“아, 실드는 공격 방어밖에 안 되는데 일단… 해볼게.”

실드를 친 게 맞긴 한지 변함없이 코를 때리는 냄새에 천으로 더 파고들었다. 전체 공격이 어떻고, 이번 페이즈부터 빨리 끝내자나, 뭐라나.

눈까지 꼭 감고 얌전히 있으려는데 갑자기 옷 안으로 큰 손이 들어왔다. 시원한 향을 내는 허브를 얼굴 가까이 내려놓는 걸 보니 화환인 것 같았다. 미련 없이 빠져나가는 손이 조금 아쉬워 가까이 있는 손가락은 한 번 핥아주었다.

그때였다. 주춤하던 손이 빠져나가고 굳이 조금 나 있던 틈으로 얼굴을 밀어 넣은 화환이 내 볼에 자기 얼굴을 부비는 정신 나간 짓을 한 건.

미친 새끼. 아니 미친 새끼라고 불러서 점점 더 해괴한 행동을 하는 건가? 가능성이 없진 않은 것 같아 얼굴을 슬쩍 밀어내자 웃음소리를 내더니 천천히 밖으로 빠져나갔다.

이상했다. 이런 사소한 행동에 숨이 가빠지는 내가. 따지고 보면 이상한 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음욕의 던전에서 왜 화환의 얼굴로 변한 건지, 더운 건 질색하는 주제에 어깨 위를 덮는 큰 손이 불쾌하진 않았는지…. 왜 저 미친놈이 계속 기다려지는 건지. 설마, 내가?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얼굴에 잠시 홀린 건가? 예쁘긴 하잖아. 아니면 자기라고 불러서 진짜 자기가 되고 싶은 건가?

연애랑은 담을 쌓고 산 탓에 정리는커녕 더 복잡해져 한숨이 절로 났다. 차라리 수학 문제처럼 명확한 답이 있으면 좋으련만 사람 마음에 그렇게 명확한 답을 바라는 건 욕심이겠지.

착각일 거다. 너무 예쁘게 생겨 뇌가 착각한 거일 수도 있지 않은가! 가만히 화환과 입 맞춰보는 상상을 해보려다 노후계획까지 세울 것 같아 그만둬버렸다.

1페이즈가 끝난 건 아닐 거라는 답을 막 내렸을 때였다. 징그러운 소리를 내며 죽어가는 몬스터들의 목소리가 없어질 때쯤 눈을 떴다. 어떻게 안 건지 바로 안으로 들어온 나르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곤 내 얼굴을 살폈다.

“겨미, 괜찮나?”

고개를 끄덕이자 내 코 가까이 허브를 들이밀었다. 누구 새낀지 기특한 모습이 참 예쁘네.

“와, 겸이. 지금 여기 수인 정예 구울 나왔어.”

“자기야, 저 무기 좀 봐.”

사탕 누나와 화환이 번갈아 이야기했다. 안 보이니 궁금할 거라 생각한 거겠지.

“누나, 저 튜토리얼보다 어려워요?”

“아니…. 그때는 스킬이 안 먹혔잖아.”

“다행이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전투를 시작하는 건지 마력이 빠져나가는 게 파티창으로 보였다. 사탕 누나의 말대로 어렵진 않은 건지 체력은 그다지 줄지 않아 마음이 놓였는데 한편으론 답답했다. 언제까지 이렇게 업혀 다녀야 하지?

“겸이 고개 들지 마, 여긴 더 심하다.”

[파티]유우 : 누나 무겁죠, 미안해요ㅜ

[파티]구름 : 사탕이 무거워? 내가 안을까?

[파티]민초맛사탕 : ㄴㄴ

“생각보다 재미있어. 너무 걱정 말고 한숨 자.”

[귓속말]유우 : 이 상황에 어떻게 자요…

보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아 서둘러 귓속말로 바꾸자 사탕 누나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우리 이 던전만 돌면 이번 달 길드 랭킹 10위 안에 들 것 같아, 겸아. 겸이 덕분이야.”

[귓속말]유우 : 그럼 저도 보상 빵빵하게 받아요?

“당연하지, 채하현보다 더 받을걸.”

말이라도 고마워 팔에 얼굴을 부비자 등을 토닥이는 손길이 느껴졌다. 왜 이런 좋은 사람이 화환이랑 친구인 거지?

그렇게 이번 페이즈도 죽은 사람 하나 없이 끝이 났다. 다음 페이즈로 가기 전 생긴 세이브존에서 체력을 올려준 뒤 포션을 마시는데 구름이가 가까이 왔다.

“겸이 님, 왜 히든 던전인 거 안 알려 줬어요? 저 별이한테 역적으로 몰리는 중이잖아여.”

“그럼… 그냥 나가실래요? 안 갔으면 좋겠는데. 뭐 굳이 가시겠다면 안 말릴게요.”

“겸이 님, 하늘로 안 오실래요? 성격이 삐뚤어진 게 피안보다 하늘에 더 어울리는데.”

“뭐예요? 하늘나라로 보내겠다고 선전포고하는 거예요?”

“이거 봐, 딱 우리 과네. 하늘로 오시면 제가 템도 주고, 돈도 주고 던전도 다 돌아드릴게요.”

“지금 비공계라 모르시나본데… 저 송금이 형이 제작해 줘요. 던전은 던전 노예가 넷이나 있는데?”

“돈은? 돈도 준다니까!”

“저 히든 던전도 있어서 돈도 별로….”

“와, 씨…. 채하현 신입 잘 물어왔네.”

“내가 물어온 게 아니라 하늘에서 뚝 떨어졌지. 착하게 살았나 봐, 그동안.”

구름이가 욕을 하며 화환의 다리를 퍽퍽 찼다. 저 미친놈은 때려도 내가 때리는데!

구름이 쪽을 노려보며 소심하게 이를 내보였다. 아직 망토 안에 숨어있던 나르가 주변을 둘러보곤 다시 안으로 고개를 파묻는 게 보였다. 오늘 뮤첼을 봐서 많이 놀란 건가?

“나르 자고 있을래? 끝나면 깨워줄게.”

“그러다 겨미가 위험하면…!”

“괜찮아. 나르 마법도 못 쓰는데 둘 다 위험한 것보단 낫잖아.”

힘없이 고개를 끄덕인 나르를 비활성화한 뒤 세이브존을 벗어났다.

마지막 페이즈는 고요했다. 붉은빛과 캄캄한 그림자로 스산한 분위기는 여전했지만, 몬스터는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뮤첼이 보스로 나오진 않겠지?

다행히 코를 때리던 냄새도 없어져 편안히 걸어갈 수 있었다.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걷자 옆에 있던 구름이 심각한 얼굴로 멈춰 섰다.

“여기 보스 없는데?”

“그러게. 찾아야 하는 건가? 자기야, 저기 산이 라디아탄 있던 곳이지?”

“네. 저기 중앙에 큰 나무 있는 데요.”

“산이랑 또 어디지? 뮤첼 나왔던 데가?”

“거긴 지났을걸요? 마을 들어와서 바로 만났으니까.”

“야, 유우겸. 나르는? 나르도 모른대?”

“재웠어. 혹시나 보스가 진짜 보스일까 봐.”

화환이 멀리 보이는 산을 올려다보았다. 저기가 미심쩍은 건가? 그러고 보니 안 가본 곳은 라디아탄이 있던 산과 묘지뿐이긴 한데….

“그럼 나랑 계란이랑 구름이가 라디아탄이 있던 산으로 가볼게. 겸이, 수박이, 채하현이 공동묘지 쪽으로 가자.”

사탕 누나가 날개를 꺼냈다. 한 번 와 봤던 덕분인지 바로 산으로 향하는데 구름이가 갑자기 크고 징그럽게 생긴 와이번을 소환했다.

“뭐야, 구름 님. 그거 펫이에요?”

“응. 와이번 둥지 첫 소탕자가 받는 보상. 멋지지?”

구름이 보란 듯 하늘을 한 바퀴 맴돌았다. 서버에 하나밖에 없는 거라며 자랑을 늘어놓다 멀어지는 사탕 누나의 뒤를 급하게 쫓았다.

“우리도 묘지로 가야지. 난 어딘지 몰라.”

“저기, 뒤쪽 비석 있는 데. 근데 겸이 아까 죽은 건 뮤첼 때문인 거지?”

“응, 나르 말대로 진짜 너구리 수인이더라. 안경 쓴.”

“누나 그것까지 봤어요?”

“응, 뭐라는 건지 말은 안 들렸는데 얼굴은 잘 보였어.”

나한테는 검은 안개와 흐릿한 잔상만 보이곤 말소리가 잘 들렸는데.

“그럼 뭐라고 했는지는 못 들은 거예요?”

“응. 겸이는 들었어?”

“나르한테 맡겨둔 자기 지식을 받으러 왔대요.”

“아, 그러고 보니… 나르가 얘기한 적 있었지? 뮤첼의 지식을 가지고 500년을 살았다고.”

나태의 던전에서 한 얘기인가? 수박 누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나르를 비활성화하라 알려준 거였네. 아마 혼자 있었으면 나르를 뮤첼에게 빼앗겼을 거란 생각에 등에 있던 털이 설 때쯤 묘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전부 뒤집힌 채 꽂혀 있는 묘비가 소름 끼치게 이상했다. 오싹한 분위기에 뒤를 돌아 다른 사람들 쪽을 보자 둘 다 얼굴만 찌푸리고 있을 뿐 다행히 무서워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절대 화환이 걱정되거나 이런 게 아니라 그냥 순수하게 궁금해서 돌아본 거다. 아무도 하지 않을 의심이지만 괜히 혼자 찔려 아무렇지 않게 주변을 둘러보는 척했다.

[파티]화환 : 여긴 별거 없는 것 같은데, 거긴 어때?

[파티]구름이 : 여기 아무것도 없는데? 그냥 말라비틀어진 나무뿐이야.

“저기, 중앙에 멀쩡한 거 하나가 있는데?”

수박 누나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은 전에 저주의 흔적을 발견한 조형물이 있던 자리였다. 처음으로 사탕 누나의 곡괭이질을 본 곳이라 내적 반가움에 그쪽으로 가까이 가자 조형물 대신 못 보던 비석이 땅에 묻혀 있었다.

이건 뭐지? 발을 뻗어 위를 가린 흙을 털어내려는 순간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왜 우리는 구해주지 않는 거지?

-라디아탄의 아이가 저주의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거지?

-용서하지 않을 것이야.

-그대도 함께 짊어지도록.

-우리가 그대를…

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저주의 아이면 나르를 얘기하는 것 같은데…. 구해주고, 아프고 이건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어 소리가 들리는 곳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

그때 천천히 갈라지던 땅에서 검은 손들이 솟아올랐다. 아슬하게 몸이 잡히기 전 힘껏 뛰어올랐지만, 연이어 올라오는 다른 손에 다리가 잡혀 땅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놀란 듯 스킬을 쓰는 수박 누나와 달려오는 화환이 보였다. 멀리서 이쪽을 향해 날아오는 사람들을 확인할 찰나 눈앞이 검게 변하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발이 움직일 수 있게 된 건 조금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좁고 어두운 동굴 같았는데 눈을 뜨자 흐릿한 옛날 영상처럼 화질이 좋지 않은 영상이 바로 앞에서 재생되었다.

‘우리 왕국은 라디아탄 님의 가호가 있어 늘 이렇게 좋은 농작물이 자랍니다!’

기쁘게 웃는 수인 한 명이 크고 북적이는 수인 왕국을 소개했다. 수인과 다른 종족들이 어우러졌으며 축제라도 하는 듯 왕성이 색색으로 빛나며 시끌벅적했다.

그것도 잠시, 사진처럼 휙휙 넘어가는 시간의 흐름 속에 어린 뮤첼이 보였다. 소심한 성격인 건지 잔뜩 어깨를 좁히곤 자신을 괴롭히는 무리에게 말 한마디 못하는 모습으로 말이다.

그 뒤로 그보다 한 뼘이나 작은 어린 여자아이가 제 몸만큼 큰 몽둥이를 들고 달려와 뮤첼을 구해주었다.

‘오빠! 그렇게 웅크리고 다니니까 다들 무시하는 거잖아!’

‘하, 하지만….’

‘내가 얘기했지? 큰 수인도 별거 아니라고.’

동생인 건지 뮤첼을 닮은 어린아이가 집으로 가자며 그의 손을 끌었다. 도착한 곳은 왕국과 한참 떨어진 낡은 집이었다.

그 뒤로는 성인이 된 뮤첼이 라디아탄을 만나 별의 축복이라는 걸 내려받는 모습이었다. 노란빛의 별 무리가 뮤첼에게로 스며들었고 라디아탄도 기쁘게 웃었다.

‘라디아탄, 그대는 나의 신이십니다.’

연금술로 회복약을 만들어 왕국으로 집을 옮긴 뮤첼이 라디아탄의 손등 위로 입을 맞추며 얘기했다. 하지만 라디아탄은 걱정 어린 눈으로 뮤첼을 내려 봤고, 그 이유도 금방 알 수 있었다.

‘나의 아이야, 아무리 미물일지라도 다른 이의 생명을 빼앗는 일은 용서받지 못한단다.’

‘…그 생명이 다른 이의 생명을 이어주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건 희생당한 생물의 영혼을 묶어두는 것이야. 왜 이리 어리석은 짓을 반복하는 건가? 자네에게 영혼을 빼앗긴 가축들이 화가 나 있어. 머지않아 큰 화를 입을 네 모습이 눈에 선해서 이러지 않나.’

머지않아서가 아니었다. 뮤첼의 집에선 그의 동생이 검게 물든 다리를 끌어안고 울고 있었기 때문이다.

놀라 달려가려던 뮤첼은 무언가 눈치챈 듯 주머니 안에 회복약을 검은 다리 위로 부었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었고, 뮤첼은 그저 동생을 안아 방으로 옮겨주었다.

다리에만 있던 멍울은 점점 몸을 타고 올라가고 있었다. 화환도 저 저주를 받은 건가?

집 안에서밖에 생활할 수 없게 된 동생이 시름시름 앓다 정신을 놓아버린 날은 뮤첼의 결혼식이었다. 자그마한 얼굴에 꽉 차 있는 이목구비가 하나같이 예쁜 토끼 수인이었다.

흰 백발에 붉은 눈. 꼭 화가 난 나르를 떠올리게 하듯 익숙한 외모에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뮤첼과 나르를 닮은 수인은 그냥 보기에도 행복해 보였다. 부인의 임신 소식과 함께 저주에 걸린 걸 알기 전까지 말이다.

뮤첼은 깊은 동굴 속 연구실에서 회복약이 아닌 치료약을 만들기 시작했다. 재료는 예상한 대로 수인이었다. 그리고 그 약의 첫 희생자는 자신의 동생이었다.

자신의 부인을 살리기 위해선 거리낄 게 없다는 듯 가차 없이 살인을 하던 뮤첼은 부인의 진통이 시작될 즈음 집으로 돌아갔다.

‘부정함이 가득 묻은 몸으로 생명의 탄생을 보면 안 되지, 안되고말고.’

이때부터 미치기 시작했나? 손톱을 물어뜯으며 문 앞을 서성이던 뮤첼은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동시에 문을 벌컥 열었다. 산파가 남자아이라며 보여주는 것도 마다한 채 밖으로 내보내곤 바로 의식을 잃은 부인 입에 검붉은 물약을 쏟아부었다.

겨우 한 모금 넘어갔으려나? 갑자기 부인이 몸을 부르르 떨며 마구 피를 토하기 시작했다. 꼭 레미와 체이슨을 보는 것 같았는데, 그때의 감정과는 전혀 다른 화가 먼저 났다.

저게 어떻게 치료약이라는 확신을 가진 건지, 자기부터 먹지 않고 다짜고짜 부인에게 먹이는 건 왜 그런 건지 답답함에 발톱을 세워 바닥만 긁어냈다.

미친 뮤첼은 부인의 상태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듯 서둘러 남은 약을 입안으로 퍼붓기 시작했고, 누가 들어도 안타까운 목소리로 얘기했다.

‘제발, 제발 조금만 더 마셔봐… 아벨, 제발….’

아벨이라 불린 수인이 눈만 돌려 뮤첼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결혼식 때 봤던 애정 어린 눈빛이 아닌 증오와 분노가 가득한 눈빛으로 말이다. 그것도 잠시, 곧이어 그 눈에선 빛이 빠져나갔으며, 숨만 쉬는 인형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아벨은 뮤첼의 연구실 가장 안쪽의 포근한 방에 옮겨졌다. 뮤첼은 태어난 아이는 신경조차 쓰지 않은 체 연구에 몰두했다. 그럴수록 수인 마을은 점점 피폐해졌다. 보다 못한 라디아탄이 뮤첼의 연구실로 발을 들였다.

‘결국 살인까지 하게 된 건가? 별의 축복을 받은 아이가 어찌 이리 어리석은 짓을 한단 말인가!’

뮤첼은 묵묵히 책상 위로 묻고 있던 얼굴을 들어 올려 라디아탄을 보며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라디아탄, 이젠 내가 뭘 원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아벨만은, 아벨만 구하고 싶었던 것인데…. 알면 알수록 연금술이라는 것은 제게 새로운 걸 원하게 합니다.’

뮤첼이 기괴하게 웃으면서 울었다. 라디아탄은 금지된 서적을 연 탓에 그렇다며 들고 있던 지팡이를 휘저어 책 위로 금색의 마법진을 그려놓더니 한심하게 뮤첼을 내려 보았다.

‘그대가 진정으로 원하는 건 무엇이지?’

‘…아벨, 아벨의 웃는 얼굴이 기억이 나지 않아요. 그녀의 웃는 얼굴, 그것이 제가 가장 원하는 것입니다.’

‘소생은 선택받은 존재만이 가능해. 우리에게 그건 순리를 깨부술 힘 따위는 없지. 하지만, 그대 그거 아는가? 저승의 서고에는 그 방법이 적힌 책이 있다더군. 명이 다하고 난 뒤에야 알 수 있을 테니 허튼짓은 그만두고 여기 갇힌 불쌍한 영혼들을 풀어주게.’

갑자기 뮤첼이 크게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기다렸다는 듯 테이블 위 놓인 칼로 제 팔을 길게 그어대더니 그 피로 마법진을 그려 라디아탄을 밖으로 내쫓았다.

꼭 원하는 걸 들은 사람처럼 기쁜 얼굴로 흥얼거리던 뮤첼은 라디아탄이 묶어둔 금서를 가볍게 열어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 뒤로도 연구는 계속되었다. 몬스터, 산에 사는 동물, 약초를 캐러 여기까지 들어온 사람들까지 전부 뮤첼의 재료가 되었다.

보다 못한 라디아탄이 선택한 별의 아이를 보낸 적도 있었다. 열 살이 채 되지 않을 만큼 작은 아이는 자신이 두 번째 별의 아이라 소개했다. 이상하게 얼굴이 보이지 않았고, 뮤첼은 그 아이에게 약을 탄 차를 먹여 손쉽게 제압할 뿐이었다.

영상은 나르를 만들어 내는 데에서 끝이 났다. 번영했던 수인 왕국이 한순간에 무너진 것까진 알겠는데 저주는 왜 모든 수인이 받은 거지?

-그 저주가 우리를 물들였어.

-태어난 아이들은 수인의 축복인 강림조차 쓸 수 없었고….

-이제 수인은 여행자들만이 남았지.

“뮤첼을 죽이면, 저주가 풀리는 거예요?”

-그렇다. 하지만 그대는 뮤첼보다 약해.

-저주는 뮤첼이 연구에 별의 아이 영혼을 넣은 탓이야.

-세 번째, 네 번째의 귀한 별들이…

-태어나자마자 저버렸어, 빛이, 반짝이던 빛이…

“태어나자마자?”

-이상한 구슬을 든 뮤첼이 임산부들만 찾아갔지.

-별의 아이 영혼이 더 필요하다며,

-굶주린 그들에게 음식과 돈을 내어주곤

-아기를 데려가 버렸어.

-그대는 우리를 위해 뮤첼을 쓰러트릴 수 있는가?

여태 듣던 목소리와는 차원이 다르게 크고 힘 있는 목소리가 질문을 던졌다. 이 사람이 보스인 건가? 그런데 생전 처음 본 사람 주제에 왜 자기들을 위해서래….

“아뇨, 겸사겸사? 우리 길드 마스터님도 저주에 걸렸고, 나르도 지금 뮤첼이 계속 노리는 중이라서요.”

사실 겸사겸사 해치우는 것도 감사하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저쪽은 우르르 몰려 있었고 연약하고 작은 나는 혼자이기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재미있는 아이이군. 좋아, 나와 싸우지. 그대가 이긴다면 우리가 가진 정령의 보물을 주지.

정령의 보물이라는 말에 웅성거림이 커졌다. 대충 알아들을 수 있는 것만 들어보니 지금의 이 성을 가진 건 다 그 보물 덕분이라는데 그걸 덜컥 준다니 반발이 심한 모양이다.

-이 아이는 우리를 구원해 줄지도 모르는 아이야. 당분간은 괴롭겠지만 조금만 참으면, 원래의 길을 갈 수 있지.

원래의 길이라는 게 저승인가? 불현듯 레미와 체이슨이 떠올랐다. 퀘스트의 보상으로 안식을 찾았다고 했는데….

“뮤첼이 건 저주가 살아있는 시체 어쩌고예요?”

-그렇다. 연금술사가 죽고 난 후 그가 만든 키메라를 통해 천천히 퍼지기 시작한 저주를 완전히 밖으로 끌어올렸지.

-아벨, 아벨의 구원 길이 사라진 탓이야.

-아벨이 사랑하던 수인 마을을,

-죽어서 맴돌게 만든 거야, 그가.

“그 저주라면, 한 명만 나한테 죽어보지 않을래요? 전에 본 적 있는 저주라….”

웅성거리던 사람 중 가장 작은 외형의 구울이 한 발 가까이 왔다. 자기가 제일 약하니 금방 죽을 수 있을 거라며, 보석까지 빼앗긴다면 어차피 망령이 될 테니 어떻게 돼도 좋다며 눈을 감았다.

서둘러 공격 스킬을 사용했다. 조금이라도 편했으면 하는 마음에 하울링과 할퀴기를 사용하자 작은 구울은 눈을 감은 채 한 줌 빛이 되어 반짝였다.

-빛이 되어 떠난 건가?

-원래의 길을 찾아?

-그렇지 않아,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열리지 않았어. 그저 안식에 깃든 것뿐이지. 그대, 작은 나의 종족의 아이여. 우리에게 자비를 내려주지 않겠나?

“너무 오래 걸릴 것 같긴 한데…. 일단 해볼게요.”

이게 맞는 건가, 하는 생각과 동시에 이 많은 구울들에게 어느 세월에 안식을 주지? 하는 의문이 들 때 큰 그림자가 가까이 다가왔고, 그에 반응하듯 웅웅 하며 배낭이 울렸다.

서둘러 배낭을 확인하는데, 잊고 있던 라디아탄의 주머니에서 반짝거리는 빛이 나고 있었다.

각성 스킬 구슬! 왜 잊고 있었지? 부활을 배웠던 것을 생각하며 서둘러 주머니를 열어 사용 가능이라는 구슬 세 개를 연달아 이로 물었다.

[퓨리파이]

-모든 독과 저주를 정화합니다.

[안티하울링]

-광범위의 적에게 공포를 주어 공격의지와 방어력을 대폭 하강시킵니다.

[프레즐]

-광범위의 적에게 500,000의 데미지를 줍니다.

혹시 죽이지 않고 저주를 해제하는 것도 되는 건가 싶어 퓨리파이를 쓰려는데 핸드폰으로 전화가 오는지 반짝이는 알림이 떴다. 아마 두고 온 파티원 같은데…. 일단 바쁘니까 나중에 연락하기로 하고, 퓨리파이를 사용했다.

마력만 빠져나가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건 아니고. 결국 안티 하울링과 프레즐을 쿨이 되는 대로 사용하자 어느새 절반 가까이 수가 줄어들었다.

포션 쿨을 기다리다 결국 울리는 전화 대신 파티 채팅창을 열었다. 거긴 이미 몇 페이지가 넘어갈 만큼 걱정 어린 말들이 올라와 있었다. 난 아무렇지 않은데… 괜히 걱정시킨 것 같은 마음에 서둘러 걱정하지 마라, 미안하다는 말을 하려고 했다.

[파티]유우 : ㄱㅊ ㄱㄷ

정말 노력했다. 하지만 포션 쿨이 끝난지라 얼른 이 사람들에게 안식을 준 뒤 나가야 했으니 어쩔 수 없이 말이 짧아졌다.

[파티]간계밥 : ***인가, 진짜? 왜 이제 연락하냐고.

[파티]민초맛사탕 : 겸이 아직 그 안이지?

[파티]수박맛사탕 : 우리 혹시 다른 데로 날아갔다 탐험중..ㅜ

[파티]간계밥 : 너 뭐 하는데 그렇게 마력이 딸려?

[파티]화환 : 아까 거기서 기다리면 되나?

[파티]화환 : 겸이 혼자 보스 잡나본데.

[파티]구름이 : 앗 내 머찐 모습을 보여줄 기회가…!

[파티]민초맛사탕 : ㅋㅋㅋㅋㅋㅋㅋ 우리가 애는 하나 잘 키웠어… 누나들 힘들까봐 겸이 혼자 간 거야?

괜히 켜 둔 건가 싶게 울리는 채팅창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마지막 남은 큰 구울의 앞으로 다가갔다. 받을 건 받아야지.

“정령? 그거 주셔야죠.”

-잊은 줄 알았더니. 여기 있다. 고맙군, 그대. 꼭 뮤첼을 해치우고 우리에게 다음으로 갈 기회를 주길. 그대의 앞날을 늘 응원하겠네.

[정령의 보물을 획득하셨습니다.]

고개를 끄덕이곤 가까이 다가갔다. 체력이 간당간당하게 남은 구울의 곁에서 마지막 공격 스킬을 쓰자 스르륵 빛으로 돌아갔으며, 나는 몸이 쑥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구울의 왕이 처치되었습니다! 히든:저주의 최조 희생 ‘숨겨진 수인 왕국’ 던전이 클리어되었습니다! 유우 님께서 히든 던전의 소유주가 되었습니다. 히든:저주의 최조 희생 ‘숨겨진 수인 왕국’ - 유우. 다른 헌터님이 던전 입장 시 입장료가 발생합니다.]

-클리어 보상으로 유우 님에게 정령의 보물이 귀속되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숨겨진 히든 던전이 클리어되었습니다! 유우 님의 파티 수박맛사탕, 화환, 간계밥, 민초맛사탕, 구름이 님의 명성이 온 세상에 울려 퍼집니다.]

[하젤마을 인근 던전이 히든 던전으로 판명되었습니다. 히든 던전의 주인에게 허락을 받고 클리어해 보세요!]

-레벨이 올랐습니다. 218Lv 달성!

“뭐야, 우리 애 왜 이렇게 꼬질꼬질해?”

수박 누나의 말에 눈을 뜨자 아까 끌려 들어갔던 묘지 그대로였으며, 누나의 말대로 온몸이 흙투성이였다.

몸을 탈탈 털며 자리에서 일어서자 익숙한 얼굴들이 있었는데 잠깐 사이 무슨 가슴 찡한 영화 한 편을 본 기분이라 가슴이 묵직했다.

“어떻게 된 일이야?”

“맞아, 진짜 지하세계라도 다녀온 거야?”

“네, 제가 다 이기고 왔어요.”

뿌듯함에 크게 웃으며 얘기하자 화환이 앞에 쪼그려 앉으며 머리에 묻은 흙과 모래를 털어주고 있었다.

“보스는 구울 왕? 겸이 강해졌네.”

어깨가 으쓱해졌다. 나르가 칭찬을 들을 때 이런 기분이었나?

“한 시간이나 지났는데, 겸이 님 안 힘드셨어요? 그래도 얘기는 해주지…. 저희 온 산을 다 뒤졌다고요….”

“죄송해요, 앞에 웬 영상이 하나 떠서 그거 보느라.”

“영상?”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젓곤 구름이 쪽을 힐끔거렸다. 나중에 얘기해 줄 게 웅얼거리며 할 게 있다고 먼저 나가 있으라 얘기한 후 중앙의 분수로 달리며 히든 스킬을 해제했다.

구울의 왕이 준 정령의 보물을 손에 들자 새로운 퀘스트 알림이 떴기 때문이다.

[새로운 퀘스트가 발생하였습니다. 수인 왕국 정화.]

-정령의 보물:세상을 비추는 거울을 사용하여 수인 왕국을 정화해 주세요.

왕궁 중앙 분수에서 거울을 비추며 정화 스킬 사용[0/5]

분수대가 보이자 거울을 꺼내 들었더니 마치 여기서 사용하라는 듯 분수대를 빙 두르는 다섯 개의 작은 원이 보였다. 원래 이렇게 친절한 게임이었나?

“뭔데, 우리 겸이 님이 사람이 됐지?”

호락호락하게 말을 들을 리 없는 사람들이 쪼르르 뒤를 따라오다 구름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돌아보자 자기 딴엔 숨는다고 한 건지 머리가 삐죽 튀어나오게 작은 돌무더기 뒤로 숨어 있는 게 보였다.

요즘 아기들도 숨바꼭질은 그렇게 다 보이게 안 숨겠다….

“거울? 겨미 오늘은 얼마나 잘생겼나 확인해 보는 거야?”

“자기야, 나 서운해. 미모 관리는 내 눈을 보고하라고 했잖아.”

“미쳤나… 언제 그랬어요, 헛소리 좀 그만해요.”

“채하현이랑 우리 겸이 님 서로 여보자기 하는 그런 사이야? 그럼 나는요, 겸이 님!”

말문이 턱 막혔다. 누가 미친놈 친구 아니랄까 봐 망상하는 것까지 닮은 건가? 한숨만 내쉰 뒤 저 썩어빠진 머리통부터 정화됐으면 하는 마음으로 퓨리파이를 사용했다.

아까와는 달리 밝은 빛이 거울을 통해 쏟아져 나갔으며, 빛이 닿은 땅에선 푸른 새싹이 하나둘 올라오기 시작했다.

밝아진 분위기에 놀랐는데, 마찬가지로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사람들이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향기를 내는 언덕 위를 바라보았다.

“뭐야?”

“우리 애 이런 건 언제 배웠지? 이제 우리 품을 떠날 것 같아 마음이 아픈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각성 스킬 구슬을 잊고 있었다는 걸 이야기하면 또 엄청나게 놀릴 것 같기 때문이다. 얌전히 다음 원으로 발을 옮겨 포션을 꺼내는데 사탕 누나의 활력이 들어왔다.

눈치가 비상한 누나는 내 마력이 떨어지는 족족 활력을 써 주었고 마지막 정화를 마치자 어디선가 종소리가 들려오며, 글로 된 알림이 아니라 맑은 목소리의 알림이 들렸다.

[수인 왕국이 무사히 정화되었습니다. 히든 던전의 몬스터가 더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어? 구울까지 정화된 건가?”

[수인 왕국의 재건과 다른 히든 던전으로 변경이 가능합니다.]

앞에 두 가지 선택지가 떴다. 히든 던전으로 만들면 여기 살던 수인의 영혼은…. 눈을 돌려 모여 앉은 사람들을 힐끔거리는데 모두가 잔디밭에 앉아 나를 올려다보고만 있었다.

“어떻게 해요?”

“겸이 하고 싶은 대로. 히든 던전 되면 파밍하면 되고 왕국으로 바뀌면 쉬러 오면 되잖아. 여기 라디아탄이 있던 숲도 정화돼서 예뻐.”

사탕 누나의 말에 그쪽을 보자 빽빽한 나무들이 우뚝 솟은 산이 보였다. 반쯤 기울었던 마음이 확실해지는 순간이었다.

언제 머뭇거렸냐는 듯 왕국 재건을 선택하자 기다렸다는 듯 바닥엔 마법진이 그려지며 천천히 건물들이 다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가장 부흥했을 때의 수인 왕국으로 말이다.

/[재건이 완료되었습니다. 수인 마을이 다시 일어났다는 말이 온 수인들에게 울려 퍼집니다. 왕국의 주인 유우 님에게 매월 업데이트 후 세금이 지급됩니다. 길 잃은 수인 영혼이 이곳으로 돌아오길 원합니다.]/#볼드

[길드]푸름 : 이거 뭐예요? 알림 뜬 거 보셨어요?

[길드]간계밥 : ㄴㄴ 수인한테만 뜰걸… 우리 겸이 왕까지 됐네.

[길드]화환 : 여기 입장료도 받나본데?

[길드]푸름 : 좌표 떴으니까 가볼게요, 겸이 형이 한 거예요?

[길드]푸름 : 저 형 진짜 운영자 아니죠?

[길드]구름이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구름이 : 땅굴 여행하고 오니 내가 왕국 주인?!

[길드]별이 : ㅡㅡ

[길드]달이 : ㅡㅡ

[길드]하늘이 : ㅡㅡ

“어, 나 보상 들어왔는데? 수인 보석. 장비에 장착 가능하대.”

보상이라는 수박 누나의 말에 배낭을 열었다. 가장 고생한 건 난데 내 배낭은 새로운 아이템을 알리는 알림이 단 하나도 없었다.

“나도, 힐증이네… 사탕아, 살래? 수치 좋아.”

“와, 나 곡괭이 받았어. 여기서 나는 특산품 철로 만든 거라 내구도가 안 닳는대… 미친 개좋다…”

곡괭이를 받은 사탕 누나가 손에 쥔 무기 대신 곡괭이를 든 채 두어 번 휘저었다. 도대체 어떻게 곡괭이에서 저렇게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나는 거지….

“와, 형. 여기 입장료 엄청나게 받는데요? 이거 왕국 부흥에 쓰는 거죠…? 뒷주머니로 안 들어가죠…?”

“아, 들켰다….”

푸름이 도착했다. 이제 다른 수인들도 올 거라며 으슥한 곳으로 발을 옮기려는데 푸름이 우뚝 멈춰선 체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하우징 여기로 옮길 수 있대요. 먼저 숨어 계세요! 저 제일 좋은 데로 알아보고 올 거니까!”

푸름이 왕성과 가까운 곳으로 달려가며 얘기했다. 그럼 내가 여기 주인이니까 성은 내 꺼라는 건가? 파티원들이 구경하는데 정신이 팔린 사이 몰래 뒤로 빠져나갔다.

왕성은 뒤론 산을 두르고 앞으론 강물이 흐르는 배산임수 지리에 적합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산을 깎아 만든 건지 유난히 높고 튼튼해 보여 가슴이 뛰었다. 내 집 마련이 아닌 내 성 마련이라니…!

성문은 흐르는 강물 위로 길게 있는 도개교를 지나 들어갈 수 있었다. 아무나 들어올 수 없게 닫힌 철문 앞으로 걸어가자 입장하겠냐는 알림이 떴다. 파티 채팅과 길드 채팅이 연달아 울렸지만 일단 들어가서 확인하기로 하고…. 입장하기를 누른 뒤 안으로 들어왔다.

[길드]별이 : 우리는 못 가고 수인만 갈 수 있나?

[길드]장꾸 : 아니 나는 왔는데?

[길드]민초맛사탕 : 여기 위치는 어캐 아랐냐고ㅋㅋㅋㅋㅋㅋㅋ

[길드]빛과송금 : 나랑 근처에서 채집하다,, 그런데 던전 위치는 하젤 근처 아니었나?

[길드]화환 : 응, 형은 어디서 찾았는데?

[길드]빛과송금 : 정령의 숲 바로 옆인데?

정령의 숲? 그래서 이렇게 사방이 산과 나무로 둘러싸인 건가? 문을 닫고 성안을 바라보자 커다란 정원에는 꽃들이 잔뜩 피어 있었다.

[파티]화환 : 우리 자기가 역마살이 끼었나, 또 없어졌네.

[파티]구름이 : 자유로운 자기. 자기야, 나도 자기라고 불러도 돼?

[파티]유우 : 되겠어요?

[파티]민초맛사탕 : 삼각관계야?

[파티]수박맛사탕 : 셋이서 사귈 수도 있지, 누나 그렇게 꽉 막히지 않았어, 겸아.

[파티]유우 : 제가 꽉 막혀서 그건 별로...

[파티]화환 : 나도 질투가 심해서 그건 좀..

[파티]구름이 : 다자연애? 이런 건가? 난 좀 좋은데 ㅎㅎㅎㅎ

[파티]간계밥 : ㅋㅋㅋㅋ 그래서 겸이 어딘데?

[파티]유우 : 나 여기 성 들어왔어.

[파티]구름이 : 겸이 님 전 이만 길드원 소환해 주러 가야겠어여 ㅜ 별이 언니 삐치면 오래가서,,! 히든 던전 재미있었어요~

구름이가 파티를 나가고 마을로 사람들이 많이 몰려오는 건지 주변이 시끄러웠다. 일단 바로 파티 소환을 해 네 명을 성안으로 불렀다.

한참 둘러보던 사람들과 찾은 곳은 정원과 성이 맞닿아 있는 유리로 된 가든 하우스였다. 정원이 한눈에 보였고, 폭신한 쿠션들이 가득한 곳이었다.

“으, 피곤하다.”

“벌써 열두 시가 넘었네.”

폭신한 쿠션 위로 눕듯 앉으니 절로 앓는 소리가 났다. 당연하게 옆으로 와 붙어 앉는 화환을 힐끔거리다 옆에 붙어 구울의 왕이 보여준 영상을 간략하게 소개했다.

“와, 사랑꾼인 줄 알았는데 그냥 미친놈이네.”

“그러게, 그럼 아기랑 부인은?”

“부인은 뮤첼 연구실에 있었는데… 1차 전직 퀘 때 멈춘 시간 어쩌고 계약이 파괴되었다고 한 거 보면 죽었지 않을까요? 몇백 년 전이기도 했고. 아기는 모르겠어요.”

혹시 나르가 뮤첼의 아이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했지만, 나르의 탄생까지 지켜본 덕에 그럴 리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내일 깨워주기로 한 나르나 성으로 초대해 달라는 푸름이를 위해 하우징 관리에서 입장 가능한 사람을 길드원으로 바꿔주곤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아무튼, 다들 고생 많으셨어요. 전 이제 경험치 던전 넣고 자러 갈게요.”

“응, 내일도 이 시간에 오는 거지?”

“네, 누나. 아. 여기 길드원 입장할 수 있게 해 뒀으니까 나중에 구경하고 저 알려주세요.”

고개를 끄덕이는 사탕 누나를 확인하곤 티켓을 찢었다. 내일 접속하면 히든 스킬부터 써야겠네.

산책 시간인 여섯 시 반. 백설이가 마구마구 얼굴을 핥은 덕분에 눈을 떴다. 똑똑한 강아지 같으니…. 한쪽 구석에 챙겨둔 짐을 풀어내자 알아서 리드줄을 벅벅 긁어대는 백설이었다. 목에 걸고 지갑과 핸드폰만 챙겨 밖으로 나갔다.

털옷을 입고도 덥지도 않은지 꽤 멀리까지 나왔다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어느 지점부터 안 걷겠다며 그 자리 그대로 우뚝 선 백설이를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더운 날씨 탓에 어느새 몸은 땀 범벅이었고, 씻으러 가려는데 백설인 밥을 달라며 밥그릇을 탕탕 내리찍었다.

아침엔 눈 영양제, 관절 츄잉 껌…. 백설이의 영양제와 밥을 챙겨준 뒤 욕실로 들어가며 핸드폰을 확인하자 길드 채팅이 잔뜩 쌓여 있었다.

채팅은 거의 사진이었다. 왕궁 곳곳을 다니며 스크린 샷을 찍은 것 같은데 이 사람들은 잠도 없는 건가? 씨리얼을 말아 식탁에 앉자 백설이가 눈을 반짝이며 다가왔다.

“넌 안 돼.”

잔뜩 불쌍한 얼굴을 하더니 그 아래 엎어졌다. 그 모습이 미안해 얼마 먹지도 않은 그릇을 개수대로 밀어 넣곤 백설이를 안아 소파로 갔다.

잠시 얌전히 안겨 있던 백설이는 이내 바닥으로 내려가더니 자기 쿠션에 엎어져 잘 준비를 했다. 눈이 천천히 감기는 백설이의 사진을 잔뜩 찍어 작은형에게 보내주곤 경험치 던전만 갱신한 뒤 나도 침대로 파고들었다.

초인종 소리에 눈을 뜬 건 점심 무렵이었다. 백설이는 어느새 내 옆에서 자고 있었고 인기척에 부스스 일어나 짜증 섞인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이없네….

“누구세요….”

잠이 덜 깬 목소리에 권경배가 ‘나’ 하는 대답을 했다. 얘는 할 일도 없나?

“잤냐?”

“응, 새벽에 산책 다녀왔더니 피곤해서.”

“밥 먹자고, 엄마가 복날이라고 삼계탕 만들어 줬어. 백설이 것도.”

“와, 어머님 요즘 뭐 필요한 거 없으시대? 매번 받기만 해서 죄송한데.”

“너 다음 달 생일이잖아, 그때 같이 밥이나 먹든가.”

“벌써 그렇게 됐나?”

부지런히 들고 온 음식을 차리는 권경배가 보였다. 어떻게 저렇게 큰 손으로 꼼꼼하게 상을 차리는지, 조금만 작았어도 데리고 살 뻔했네.

“야, 너 여자였으면 나한테 시집왔다. 진심.”

막 험한 답이 돌아오려던 찰나 자리에 냉큼 앉아 수저를 들었다. 권경배가 한숨을 푹 내쉬곤 남은 반찬 정리는 하더니 마주 앉아 내가 자주 먹는 반찬을 내 쪽으로 밀어주었다.

이러니까 그런 소리를 듣지. 한 번 더 놀릴까 하다 이번엔 숟가락이 날아올지도 몰랐기에 얌전히 국물만 떠먹었다.

“아, 너 성에 숨겨진 방도 꽤 있더라?”

“숨겨진 방?”

“응, 밤에 접속하면 같이 가보자.”

알겠다 대답하곤 밥을 먹는데 권경배가 백설이의 삼계탕 고기를 찢어 조금씩 먹여주는 게 보였다. 저게 강아지를 키우는 집 아들인 건가? 야금야금 받아먹던 백설이도 권경배가 마음에 든 건지 옆에 착 달라붙어 갖은 예쁜 짓을 다 하기 시작했다.

권경배는 백설이 저녁은 반만 주라는 말과 함께 사라졌다. 그 후 배부른 강아지는 장난감을 잔뜩 물고 왔으며 지치지도 않는지 뛰어놀았다.

백설이 덕분인지 하루가 너무 짧았다. 벌써 백설이는 잠이 들었고, 그제야 나는 종일 백설이에게 치이느라 지친 몸을 이끌곤 캡슐 안으로 들어갔다.

“왔다! 여기로 올 줄 알았지.”

접속하자 제일 먼저 보이는 건 권경배의 얼굴이었다. 오늘 게임 망했네.

“뭐야, 왜 여기 있어?”

“너 어제 여기서 접종했잖아. 기다렸지.”

“너 왜 이렇게 기분이 좋아?”

“길마님이랑 내기했거든, 산 쪽에 숨겨진 방 안에 보물 있다, 없다.”

“할 일 참 없다.”

권경배가 설레는 얼굴로 내 앞을 서성였다. 20분만 기다리라며 화환이 올 거라며 싱글벙글 웃는 얼굴이 괜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낮에 잠시 접속했을 때 이미 히든 스킬을 써 놨기 때문에 발을 가볍게 굴러 쿠션 위에 몸을 둥글게 말아 누웠다.

“야, 자지 마. 문 열어주고 자야지.”

“안 자, 그냥 누워 있는 거야.”

백설이가 자는 모습을 따라 누운 것뿐인데 생각보다 편했다. 이리저리 뒹굴거리며 천장으로 보이는 푸른 하늘만 멍하니 보고 있는데 불현듯 나르가 생각났다. 얼른 펫활성화를 하자 나르가 순식간에 눈앞으로 나타났다.

“겨미!”

“나르 잘 잤어?”

“보고 시퍼따! 나르가 없어서 힘들지 않았나?”

“응, 여기 이제 내 집이야. 나르 없어서 힘들게 구했어.”

나르가 기쁜 얼굴로 내 목덜미에 온몸을 부비기 시작했다. 오래 잔 건 아는 건가? 미안한 마음에 발톱을 숨겨 등을 토닥이자 마음껏 몸을 부빈 나르가 고개를 들었다.

“겨미, 그런데 집이 좁다….”

“야, 나르. 여긴 가든 하우스고 밖으로 나가보자. 유우겸보다 내가 더 많이 봤으니까 구경시켜 줄게.”

권경배의 큰소리에 나르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좁아지더니 둘이 나란히 밖으로 나갔다. 이제 좀 조용하네. 점점 감겨오는 눈을 억지로 뜨다 잠깐 눈이 감길 무렵 화환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반갑다고 말을 건네거나 가까이 가기도 귀찮아 꼬리만 두어 번 흔들어주자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 무릎을 굽혀 앉은 화환이 내 얼굴을 잡고 눈을 맞추었다.

“우리 애가 왜 반송장이 되었지?”

이렇게 말하는 디자인은 누구한테 배운 걸까? 의문이 들어 으르릉 소리와 함께 이를 내보였더니 재미있는 거라도 본 듯 화환의 얼굴엔 웃음이 걸렸다.

아, 잘못 걸렸네. 복작복작한 둘을 기껏 내보냈더니 더 귀찮은 사람이 온 것 같은 기분에 눈을 들어 그 말간 얼굴을 올려보자 화환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이 미친놈이 또 내 얼굴에 자기 얼굴을 갖다 대고 부비적거리는 것이었다.

“아, 좀. 내가 진짜 동물인 줄 아나.”

기본 외형이라 평소보다 큰 발바닥으로 얼굴을 밀어내자 그 발바닥 위로 쪽쪽거리며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이 새끼는 불여우다. 외형만 마족이지 속에는 불여우 서른다섯 마리 정도 사는 그런 사람이 분명했다.

불이라도 닿은 듯 발을 털어내곤 쿠션 위로 마구 닦아내자 화환의 얼굴이 뾰로통해졌다.

“자기야, 오랜만에 봤는데 이러기야?”

“왜 또 헛소리야…. 우리 새벽에 본 거 생각 안 나요? 아직 그럴 나이는 아닐 건데.”

“원래 두 시간마다 한 번씩 봐야 하는 거 아니었어?”

“아니었죠.”

푸스스 웃던 화환이 이젠 내 허리를 감싸 안으며 등에 얼굴을 부볐다. 이 새끼는 내가 자기를 좋아하는 건지도 모른다는 걸 알고 이렇게 행동하는 건가?

가슴께가 간지러운 게 썩 나쁜 기분만은 아니라 그냥 두었다. 가끔은 이런 것도 좋네. 화환은 밀어내지 않고 조용히 있는 내가 의심스러운 건지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살폈다.

솔직히 좀 귀여웠다.

망했네, 귀여워 보이기 시작하면 끝난 거라던데…. 나 진짜 이 미친놈을 좋아하나 봐.

“자기야, 혹시 집에 우환이 찾아왔었어?”

“왜 또 지랄이지?”

“그렇잖아, 평소엔 얼굴만 가까워져도 세상 무너진 얼굴로 밀어내더니. 변했다, 우리 겸이가….”

선생님께 관심이 있는 것 같아서 그렇답니다, 이번 기회에 깊이 알아가는 건 어떠신가요. 하고 좋게 얘기할 순 없었다. 구름이 말대로 내 성격이 삐뚤어지긴 한 건지 당장 지고 싶지 않은 마음에 한쪽 입꼬리만 올리곤 아래를 보듯 화환과 눈을 마주했다.

“우리 자기가 나긋나긋 한 건 싫어하는구나. 빨리 말하지 조금 더 힘내 볼 수 있었는데….”

화환의 말투를 따라 하며 최대한 선한 얼굴을 만들자 당황해하는 얼굴이 보였다. 점점 재미있어지기 시작했다. 이런 기분이라 매일 나를 놀리는 건가? 아직 허리에 감긴 손을 내려 보다 천천히 고개를 숙여 그의 어깨에 얼굴을 부비자 화환의 어깨가 움찔하며 떨려왔다.

“술 마셨어?”

“자기야, 나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아, 이젠 내가 별로구나….”

일석이조. 그거였다! 모르는 척 사심을 채우며 이 미친놈을 놀려먹을 수 있는. 그러니까 꿩 먹고 알 먹는다, 도랑 치고 가재 잡는다. 뭐, 이런 거지? 갑자기 허리를 안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우리 애가 이럴 애가 아닌데….”

“이젠 내가 별로라고? 어쩔 수 없지. 그만 놓아줄게요. 그러니까 좀 떨어지라고! 이쯤 했으면 떨어질 때 안 됐어요?”

점점 답답해지는 허리에 이러다가 부러지는 게 아닌가 걱정이 먼저 들었다. 게임에서 부러져봤자 포션을 마시면 되는 거 아닌가 싶지만 참기엔 찝찝해 바락바락 소리쳤다. 역시 미친놈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니었다.

“날이 더워져서 뭐 잘못 먹고 미친 줄 알았네. 놀랐잖아, 자기야.”

“길마님 따라 한 건데요? 왜 이렇게 자기 객관화가 안 되지…. 혹시 사시는 세계는 늘 한여름인가요? 그래서 그렇게 돌아버린 거죠?”

“너무해, 나는 자기한테만 이러는 건데.”

“혹시 저 좋아해요? 부끄러워서 미친 모습으로 지내는 건가?”

“어려서 그런가? 상상력이 참 좋아….”

화환의 말이 끝나기도 전 문을 벌컥 연 나르가 세상을 다 가진 표정으로 안으로 들어왔다. 사실 착각이라기보단 희망 사항이었는데….

혹시나 저 미친놈도 내게 관심이 있지 않나 하고 떠보는 의미가 없잖아 있었다. 역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해 주는 건 기적이구나.

아무렇지 않은 척 화환을 발로 밀어내곤 나르에게 달려갔다. 겨미 집이 왕궁이다, 나르는 겨미가 너므 조타. 하며 혀 짧은소리를 내는 나르의 머리를 가만히 쓸어주는데, 권경배가 얼른 숨은 방으로 가자 등을 떠밀었다.

숨겨진 방은 쉽게 찾을 수도 없이 힘든 위치에 있었다. 성 뒤를 쭉 감싼 산은 거의 낭떠러지 수준이었는데, 그 중앙의 동굴 안에 있기 때문이다.

성의 가장 높은 탑 창문으로만 날아서 갈 수 있었다. 화환은 당연하게 내 쪽으로 팔을 뻗어 안아 주려 했지만 서둘러 나르 쪽으로 달려가며 몸을 작게 줄였다.

“겨미는 내가 조타. 길마, 거기 계란을 안아라.”

본의 아니게 짐짝 취급을 당한 권경배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웃는 얼굴로 제 날개를 펼쳤다. 가만히 내 얼굴을 살피던 화환을 피해 고개를 돌리자 이내 나르가 날아올랐다.

“겨미. 나르가 앞으로 더 강해질 거다. 뮤첼이 와도 겨미를 지켜줄 수 있게!”

나르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뮤첼을 만났을 때 아무것도 해보지 못하고 두려움에 덜덜 떨었던 게 계속 마음에 쓰였던 걸까?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곤 나르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얘는 언제 이렇게 커서 듬직한 말까지 하는 거지?

이따 나르가 좋아하는 쿠키를 잔뜩 줄 생각으로 배낭을 훑어보는데 화환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

동굴 입구에 도착한 뒤로도 안으로 한참을 걸어야 했다. 권경배가 비밀의 방을 발견하기까지의 과정을 들으며 걷다 보니 앞에 커다란 문이 나타났다. 모두 그쪽을 보고 있었는데 나르는 더 깊은 안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겨미, 질투다. 질투가 저기 안쪽에 있다.”

“세 번째 칠죄종?”

고개를 끄덕이는 나르를 보다 다른 사람들에게로 눈을 돌리자 조금 심각한 분위기가 흘렀다.

“지금 모인 사람들이 많이 없어서…. 아예 밤늦게 다시 오든지, 아니면 내일로 미루든지 해야 할 것 같은데. 그래도 돼?”

“된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던전을 들어가면 우리는… 우리가 한 고생은 다 헛수고가 된다.”

“그럼 왕궁을 닫아둘게. 여긴 왕궁을 통해서만 올 수 있는 곳이잖아.”

나르에게 보여주듯 설정을 열어 입장 불가를 선택하자 권경배가 뭐라 하려는 듯 입을 열며 사라졌다. 물론 화환도 함께 말이다.

[길드]간계밥 : ***야! 예고도 없이.

[길드]구름이 : 겨미님 무슨 일이에여ㅜ 저희 아지트가... 아지트가...

[길드]별이 : 와 씨... 그런데 우리 아직 겸이님 못 본 거 실화인가요?

[길드]하늘이 : ㅎㅎㅎ 겨미님이랑 얼굴 틀려고 온 건데 나는...

[길드]달이 : 우리 세계전 하러 온 거잖아.

[길드]구름이 : 달이님.. 눈치 챙겨!

[길드]유우 : ㅎㅎ

[길드]구름이 : 겨미님 오늘은 던전 안 가요?

[길드]유우 : 메인퀘 밀다 나오면 가야죠?

[길드]별이 : 그럼 오늘은 우리랑 다니면 되겠다.

와, 정말 안 좋은 생각 같은데…. 일단 숨겨진 방 확인부터 하라는 권경배의 귓속말에 앞에 있던 문을 열었다.

한걸음 안으로 들어서자 그곳엔 책이 가득했다. 하얀 러그 위로 보기에도 편해 보이는 흔들의자가 자리 잡고 있었는데, 서재인가? 의자 앞의 테이블에는 책 한 권 들어갈 법한 상자가 있었는데 아무리 봐도 보물 상자라기엔 작아 보였다.

[귓속말]유우 : 여기 서재 같은데?

[귓속말]간계밥 : 보물은?

권경배의 말에 의자 위로 올라가 앉자 테이블 위론 금방 끓인 듯 연기가 피어오르는 차가 생겨났다. 네 발로는 불편해 히든 스킬을 해제한 뒤 상자부터 손에 들었다.

[귓속말]유우 : 수확제 무투대회 보상 하나 있어.

[귓속말]유우 : 스킬 들어 있다는데?

잠시 말이 없는 권경배를 기다리다 나르를 끌어안으며 다시 한번 상자의 정보를 띄워보았다.

/[수인마을 수확제 무투대회 우승자의 보상]/#볼드

-스킬이 들어 있습니다. 소모성 아이템으로, 여는 사람의 직업에 맞게 히든 스킬이 부여됩니다. 10% 확률로 히든 스킬 획득이 가능합니다.

[귓속말]간계밥 : 겸이 형, 제가 그동안 너무 방만했죠? 잊어주시고 새.롭.게 변한 저를 한 번 확인해 보지 않으실래요?

“나르, 이거 좋은 거래.”

“그러타. 나르도 알고 이따. 이건 스킬 상자다.”

“너도 욕심나? 왜 귀여운 척이지?”

“겨미, 나르는… 하, 항상 기여워따.”

[귓속말]유우 : 이거 펫도 쓸 수 있어?

[귓속말]간계밥 : 스킬 상자라면서요, 쓸 수 있겠어요?

그건 그렇지…. 새롭게 변한 권경배의 비꼬듯 꼬인 말에 아무 말 없이 배낭 안으로 넣었다. 가지고 있다 권경배나 놀려먹어야지.

언제 오냐며 아직 성 입구에 있다는 구름이의 말에 서둘러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툴툴거리는 나르를 안아 올리곤 성 밖으로 이동하자 성문 앞에 자리를 잡은 네 명의 사람이 보였다.

하나같이 아이디를 가린 채 어두운 색의 옷을 입곤 얼굴까지 가린 네 명의 사람 중 가장 작은 사람이 내 쪽으로 달려와 바로 파티를 걸었다.

“겸이 님!”

나를 부르는 말과 다르게 구름이는 나르에게 손을 뻗었다. 나르는 무슨 역적이라도 보는 눈으로 노려보며 손을 피했다. 참, 나르는 구름이를 무서워했지….

“그런데 저 메인퀘 진도 190 정도인데 진짜 같이 다니실 거예요?”

“당연하죠, 인사해. 유우 님.”

뒤에 있던 세 명이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늑대 외형이라고 들었는데… 안녕하세요, 저 하늘이요.”

“전 별인데, 어제 왜 구름이만 데리고 갔어요? 여기서 내가 제일 센데.”

“겸이 님, 달이예요.”

구름이 별이가 여자 캐릭터였고, 남은 둘은 남자인가? 꽁꽁 감춘 외형 탓에 성별도 잘 확인할 수 없어 어색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나르를 잡으려는 구름이 탓에 출발이 늦어졌다. 결국 구름이의 손에 들린 나르는 울 것 같은 얼굴이었지만 모르는 척하며 길찾기를 눌렀다,

“그런데 몇 살이세요? 구름이도 모른다는데.”

“저, 23살이요. 말씀 편하게 하세요.”

“제일 어리네. 나랑 하늘이가 스물여섯 살이고 별이 언니가 스물여덟, 달이 님이 스물아홉이지?”

“응. 달이 형 아홉수야.”

어차피 세계전만 하고 가는 거 아닌가? 유난히 살갑게 구는 구름이의 말에 그저 고개만 끄덕이곤 퀘스트 지역을 확인했다. 이번에도 하젤 마을이었다.

“저 하젤 마을 먼저 가서 불러드릴게요.”

“거기 되게 오랜만이다. 어중간한 렙대 마을은 이게 문제….”

바로 이동하기를 누른 덕분에 바로 퀘스트를 진행하게 되었긴 한데…. 조금 찝찝했다.

첫 퀘스트는 마을의 명물 오렌지를 닮은 레이론 수확을 도와주는 것이었다. 웬일로 나르가 가장 열심히 도와주었다. 혹시 스킬 상자를 가지고 있어서 그런 건가? 아까부터 묘하게 친절하게 구는데…

반짝이는 눈으로 연신 내 쪽을 힐끔거리는 나르가 부담스러울 즈음 첫 번째 퀘스트가 끝이 났다. 보상으론 시원한 레이론 주스와 소량의 돈, 경험치가 들어왔다.

사냥이 아닌 수확은 도와줄 수 없는지라 그늘에 옹기종기 모여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한 잔씩 나눠주었다.

“재미없지 않아요?”

“아니,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데?”

“우리 나르 좀 봐. 자기 얼굴만 한 걸 양손으로 쥐고 날아다닌다고….”

“나 스샷 500개 찍었어, 언니 그쪽 각도 잘 찍었지?”

아무래도 나르를 꾸며준 사람은 별이와 구름이 같았다. 그래도 우리 애가 좀 귀엽긴 하지. 나르의 칭찬에 왜 내 어깨가 솟는 건진 잘 모르겠지만 일단 뿌듯함에 기분은 좋았다.

두 번째 퀘스트는 레이론을 노리는 과즙벌이라는 몬스터 처치였다. 손바닥만 한 벌 같은 몬스터였는데, 한 마리가 레이론 다섯 개의 과즙을 먹는다고 했다. 엉덩이론 침을 쏘고 입으론 부식액을 쏟는 몬스터니 조심하라는 당부가 이어졌다.

드디어 제대로 된 적에게 새로 배운 스킬을 써 볼 기회가 왔다. 곤충이긴 하지만… 얼른 퀘스트 수락을 누르곤 과수원으로 달려가자 달이 형이 처음 보는 커다란 실드를 펴고 있었다.

“달이 형, 그건 뭐예요?”

“아, 여기 얼마나 지키냐에 따라서 보상이 바뀌거든. 닿으면 감전되는 실드야.”

“와…. 대단하다. 그걸 다 기억하고 계세요?”

꼬리까지 살랑거렸다. 솔직히 벌레라기에 걱정도 조금 됐는데, 역시 네임드.

[길드]구름이 : 채하현, 우리 자기 달이한테 반했어. 어떻게 우리 자기가…

[길드]하늘이 : 달이 형이 멋있긴 하지…

[길드]유우 : 누나, 헛소문 퍼트려서 파티 퇴출 ㅃㅃ

[길드]별이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구름이 : ㅈㅅㅈㅅ 벌 내가 다 잡을게. 자기야, 눈 크게 뜨고 봐야해♥

[길드]보미 : ㅋㅋㅋㅋ 우리 애는 거기서도 인기가 많네ㅎㅎㅜ 겨마 누나 좀 오ㅣ로워..

[길드]민초맛사탕 : 나도 끼워줘… 삼각관계를 넘어선 사각관계,, 직관 꿀잼이겠다.

[길드]구름이 : 사탕아 그러니까, 겨미가 달이오빠한테 글쎄 꼬리를 살랑였지 머야!!

[길드]민초맛사탕 : 겨미 ㅠ 채길마는 어ㅉㅓ고

눈 크게 뜨고 보라던 사람은 가운데 멀찍이 서 혼자 낄낄거리며 웃고 있었다. 진짜 퇴출을 해야 하나?

내 눈치를 한 번 보던 구름이가 입꼬리를 갈무리하며 전에 봤던 와이번을 소환했다. 나르는 처음 보는 건지 그쪽으로 날아가 기웃거리다 결국 구름이에게 안겨 와이번의 등 위로 올라갔다.

나르도 이제 구름이랑 친해진 건가? 구경만 할 요량으로 바닥에 주저앉자 머리 위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겸아.”

“네?”

“성문 닫은 거, 이어지는 퀘 때문이지?”

고개를 들어 달이 형을 올려 보자 어깨를 한 번 으슥해 보이더니 옆자리에 주저앉았다.

“어떻게 안 거예요?”

“수인 히든 직업 처음 뜬 거잖아. 원래 히든 첫 종족 퀘는 늘 있었으니까…. 아마 나 말고도 눈치챈 사람 꽤 있을걸.”

“와, 생각도 못 했네.”

“내가 알려줬으니까, 뭐 보상 같은 거 없나?”

“절이라도 받으실래요? 가진 게 없어서 몸으로 때우는 수밖에 없는데.”

“아, 겸이 몸엔 관심 없는데….”

“…….”

[길드]구름이 : 좃대써 우리 겸이 차였는데?

[길드]민초맛사탕 : 뭔데, 뭔데? 잠시 동안 무슨 일이 생긴 건데…?

[길드]구름이 : 우리 겸이 충격에 입이 얼어써 ㅠㅜ

[길드]구름이 : 겸아 내가 이짜

조용히 구름이를 파티 퇴출시킨 뒤 완료된 퀘스트 보고를 위해 마을로 걸어갔다.

“겨마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겨미, 구름이를 용서해 조라!”

나르까지 구름이의 곁에 딱 붙어 구름이를 옹호하고 있었다. 저 아기 와이번에 홀린 거지? 어제까지만 해도 오들오들 떨어 놓곤….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보고를 하자 나르가 내 옆에서 방방 뛰며 구름이를 봐주라 안달이었다.

[길드]별이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하늘이 : ㅋㅋ 쫓겨날 줄 알았음.

[길드]민초맛사탕 : ㅋㅋ 구름이 쫓겨남?

[길드]구름이 : 겸아ㅠㅜㅠㅠ 달이가 겸이 몸에 관심 없다고 그런 건데 ㅜ 난테 화풀이 ㄴㄴ 해ㅠㅠㅡㅠㅠ

[길드]보미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세상에..

[길드]민초맛사탕 : **! 나도 따라갔어야 했어! 곡괭이 **** ** 왜 이렇게 좋은 게 떠서.. 겸아, 우는 거 아니지?

[길드]간계밥 : 우리 겸이 형님 괴롭히자 마세여, 누나들.

[길드]빛과송금 : 계란이 뭐 받았니..?

아무 말 없이 다음 퀘스트 지역으로 이동하자 채팅창은 나를 찾는 글로 도배가 되었다. 이쯤 되면 자기를 버린 거냐며 잉잉 울면서 나타날 화환이 나타나지 않는 게 신경 쓰였지만 빠르게 다음 곳으로 이동할 뿐이었다.

[길드]달이 : 구름이 때문에 레드 던전 얘기도 못 했잖아.

[길드]구름이 : 그러게 누가 그렇게 의미심장하게 말하래요?

[길드]달이 : 그렇지? 내 잘못이긴 하지..

넷 중 가장 어린 구름이에게 잡혀 사는 건가? 자기 잘못이라며 작게 한숨을 내쉬는 달이를 보자 조금 불쌍해 보였다.

“레드 던전이요? 레드 드래곤 나오는데?”

“응, 우리 길드 제작자가 구해달라는 게 있어서.”

“당분간 열진 않을 건데… 뭐 필요하신데요?”

“…드래곤 하트.”

처음 듣는 아이템에 고개를 갸웃하자 뒤에 있던 별이가 고개를 내밀었다.

“그거 백번 돌면 하나 나올까 말까 하는 템이야…. 우리도 레이드만 스무 번 넘게 돌아도 안 나오던데.”

“하현이한테 얘기했더니 던전 주인한테 물어보래서 물어볼 기회만 노리다 이렇게 됐네.”

“백번이나 돌면 저 익어서 죽을 텐데, 혹시 캐스터 있어요?”

아무리 우리 길드 세계전 지원을 왔다고 해도 이렇게 사사로운 부탁을 수박 누나에게 할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백번이 될 수도 있다니 더욱 말하기 꺼려지지. 내 물음에 달이는 미안한 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이스 실드 배운 사람은 없어. 그건 수박 님 축복 스킬이잖아.”

“축복 스킬이요?”

“비슷한 건데, 정령의 축복. 히든 스킬이랑 비슷한데 더 얻기 힘들지.”

“대신 내가 최대한 빨리 클리어해 줄게.”

믿어도 되는 건가? 그래도 더워서 힘들 게 뻔했다. 돌아가는 걸 보아하니 드래곤 하트를 찾을 기대로 피안에 온 것 같은데…. 하지만 일단 오늘은 안 됐다. 수인 모습으로 시름시름 앓을 순 없으니 적어도 히든 스킬 쿨이 다 지난 다음에 가야 했다.

“그럼 내일 몇 번만 가보실래요?”

“응, 정 안 되겠으면 수박이 의뢰해볼게.”

고개를 끄덕이곤 길드 채팅에 망상 소설을 쓰고 있는 구름이를 다시 파티로 불러들였다. 내일부터 열심히 도와줘야 하니 일단 오늘 최대한 메인퀘를 밀어둬야 하기 때문이다.

막 캡슐을 나오자 새벽 두 시가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던전을 연달아 세 개나 돌아 피곤해 죽을 것 같았지만 그만한 레벨과 진도를 맞춰 둔 덕에 마음이 가벼웠다.

가볍게 세수와 양치만 한 뒤 침대 위로 누웠는데 졸리긴 무슨 눈이 말똥해졌다. 이게 너무 피곤하면 잠을 잘 수 없다는 건가?

천장만 보고 있는 중, 갑자기 백설이가 침대 위로 뛰어오르더니 내 발치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귀여워. 안아 주고 싶었지만, 되레 잠을 깨울 것 같아 최대한 몸을 말아 편하게 누울 수 있는 자리를 내어주었다.

이게 강아지를 키우는 사람의 행복인가? 어중간한 위치 선정에 몸은 구겨졌지만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들으니 뭔가 뿌듯해졌다.

그런 백설이와도 헤어짐은 빠르게 찾아왔다. 공항에 떨어지자마자 달려왔다며, 막 산책 후 아침을 먹으려는데 작은형이 집으로 데리러 왔으니 말이다.

“백설이, 아빠 안 보고 싶었어?”

이 똥강아지는 오랜만에 보는 제 주인이 그렇게도 좋은 건지 온몸을 흔들어 반겨주었다. 귀까지 뒤로 접고 낑낑 울며 작은형의 다리를 긁어 자기를 안아 올리라 명령하는 것 같았다.

“점심쯤 온다고 안 했어?”

“비행기 시간 당겼지. 겸이 보고 싶어서.”

“…겸이가 아니라 백설이 빨리 보고 싶어서겠지.”

장난스레 웃으며 이야기하자 형도 따라 웃어 보이더니 백설이를 안아 올려 온 얼굴에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동안 화환이 내게 했던 행동들이 다 자기네 애완동물을 예뻐하는 주인의 입장이었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걸 말이다.

선물이라며 각종 술을 내게 안겨준 형이 오후 출근이 잡혀 오래 못 있겠다며 미안한 얼굴로 돌아갔다. 집이 텅 비어버린 것만 같았다. 그거 며칠 있었다고 빈자리가 이렇게 허하게 느껴질 수 있는 건가?

입맛이 없어 아침은 건너뛴 나는 소파 위에 길게 누웠다. 그때 거실 선반 아래로 미처 못 챙긴 백설이의 삑삑이 공이 보였다. 바보 유백설. 엄청 좋아하던 장난감이었으면서.

서둘러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받은 선물을 정리하고 오랜만에 청소도 하며 의미 없이 시간을 보낸 후 게임에 접속했다. 다들 이렇게 공허한 기분이라 게임에 빠지는 건가?

접속하자마자 히든 스킬부터 사용했다. 순식간에 낮아진 시야에 고개를 젓곤 인사를 하기 위해 채팅창을 열었다.

[길드]구름이 : 오셨슴까, 형님. 기다리고 있었슴다.

[길드]간계밥 : 백설이 벌써 갔어? 조금 이따 내려가려고 했는데.

[길드]유우 : ㅇㅇ! 안녕하세요.

[길드]민초맛사탕 : 어솨, 겨미.

[길드]별이 :ㅎㅇㅎㅇ

[길드]달이 : ㅎㅎㅎㅎ 겸이 파티좀

[길드]민초맛사탕 : 수상해, 어제부터 하늘이 우리 겸이 끼고 사는 것 같은데 내 착각이지?

[길드]구름이 :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길드]별이 : ㅎㅎㅎㅎㅎㅎ

[길드]하늘이 : ㅎㅎㅎㅎㅎ

[길드]유우 : 파티에 구름이 누나 없으면 바로 감ㅎ

[길드]하늘이 : 구름아, 그렇게 됐다.

[길드]별이 : 구르마, 혼자 잘 지내고.

[길드]달이 : 구르마, 늘 씩씩하게. 알지?

[길드]구름이 : ㅆㅂ

파티 신청을 수락하자 새로 온 겜창들은 기다렸다는 듯 페르니아에서 나를 소환했다. 파티원 중 구름이가 있어 잠시 고민했지만, 달이 형이 생각보다 소심하단 걸 알기에 바로 수락했다.

“와, 겸이 진짜 늑대였네.”

고개를 끄덕이며 나르를 활성화하자 뿅 하며 나타난 나르는 바로 구름이에게 와이번을 태워 달라 징징거리기 시작했다.

“구름이, 얼른 약속을 지켜라. 편들어주면 또 태워주겠다 약속하지 않았나!”

“아냐, 화 풀리면, 이었지.”

“그대는…! 거짓말쟁이다!”

“이제 알았어?”

“겨미! 구름이랑 놀지 말라! 나쁜 사람이다!!”

바로 말을 바꿔 구름이를 욕하는 나르를 모른 척하며 파티원을 둘러보자 어제 내 퀘스트를 도와주었던 네 명이 전부였다. 여기는 여섯 명 정원인데?

“이렇게 가는 거예요?”

“겸이 던전 노예 하나 불렀어. 조금만 기다리라는데?”

“누구요? 던전 노예가 한둘이 아니라….”

무려 다섯이나 된다고요. 대답이 들리기도 전 파티원이 한 명 더 늘었다. 미친놈으로 말이다. 이왕이면 수박 누나가 좋은데….

“채하현은 한 번을 일찍 오는 날이 없네.”

하늘이가 꿍얼거리자 웃음으로 답을 대신한 화환이 내 옆으로 걸어왔다.

“원래 주인공은 나중에 등장하는 법이잖아.”

“누구예요? 누가 우리 집 또라이를 부른 거예요?”

불퉁한 목소리로 묻자 구름이만 깔깔거리며 웃었다.

“벌써 너 또라이인 것까지 아는 거야?”

“뭐야, 구름이 화환 좋다고 따라다닐 땐 언제고.”

“아, 언니! 그건 어렸을 때잖아요.”

“그렇지, 작년 겨울이면 어렸지….”

하늘이의 말에 구름이가 입을 닫았다. 역시 세상 요망한 길마 새끼는 여기저기 사람들을 홀리고 다닌 모양인데, 나도 그중 하나인 것 같아 기분이 나빠졌다.

[귓속말]화환 : 자기야, 질투는 8시나 돼야 갈 수 있겠는데. 지우가 자격증 공부하느라 바빠서 그때 접속할 수 있대.

[귓속말]유우 : ㅇㅎ! ㅇㅇ

성의껏 대답하자 다 모였으니 들어가자는 달이의 말이 들렸다. 아, 들어가기 싫은데….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들어가지 않을 수 없어 바로 입장을 시작했다.

아직 던전 안으로 들어가기도 전인데 역시 숨이 턱턱 막히는 온도에 혀를 내어 헥헥거리자 냉기가 도는 푸른색의 망토가 머리 위로 내려왔다.

“자기야, 작아져야 형아가 안아 주지.”

마음 같아선 용감하게 네 발로 던전을 클리어하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은 탓에 바닥으로 내려온 망토를 밟고 천천히 작아졌다. 주위에선 놀란 듯 잠시 웅성거림이 들렸으나 그걸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실드 없이 온 건 오랜만이라 그런가, 유난히 축축 처지는 몸에 화환이 안아 주는 대로 얌전히 있자 시원한 망토가 내 몸을 돌돌 둘러싸기 시작했다.

“이래서 겸이가 안 오려고 한 거구나.”

“응, 애가 더운 거에 약해.”

무슨 말을 하든 서늘한 망토 안에 박힌 체 몸을 식히기 바빴기에 신경 쓸 수 없었다.

던전 클리어는 빨랐다. 랭커와 유명인이 섞여 그런지 클리어하는 데 두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고, 그렇게 다섯 번쯤 돌았을까? 막 입구에 선 화환이 망토 안으로 손을 넣어 등을 쓰다듬더니 묶어뒀던 옷자락을 풀기 시작했다.

“좀 쉬자. 애 익겠어.”

망할 게임, 더위 한번 리얼하네…. 화환의 손안에서 버둥거려 바닥으로 내려오자 나르가 날아왔다.

“겨미 익었나?”

대답할 힘이 없어 고개만 저었다. 잔디밭에 세상 무너진 자세로 앉아 숨을 고르자 구름이가 시원한 음료수라며 ‘세이렌의 성수’를 건네주었다.

뭐지. 여기 인어도 나오는 건가? 일단 주는 걸 받아 마시자 시원하고 뭔가 말캉하게 씹히는 게 있었는데 그걸 씹으면 씹을수록 이상하게 몸이 힘이 돌아왔다. 이거 효과만 봐도 엄청 좋은 것 같은데….

성수를 품에 안으며 구름이를 올려 보자 안 뺐을 거라는 듯 한발 뒤로 물러나 자리에 앉았다.

“뭐야, 구름이. 성수 아깐 없다며.”

“하늘아, 너 같으면 말 지지리 안 듣는 너한테 주겠니, 아님 무보수로 익어가면서 던전 돌아주는 우리 겸이한테 주겠니?”

“…….”

“누나 이거 뭐예요?”

궁금한지 옆에 알짱거리는 나르에게 슬쩍 밀어주자 세상을 다 가진 듯 웃으며 또 내 볼에 입을 맞추곤 꼴깍거리며 성수를 마셨다. 오랜만에 나르가 귀엽게 보이는 순간이었다.

“그거 세이렌 던전에 하나씩 뜨는 거야. 나중에 같이 갈래? 거기 엄청 예뻐.”

“저도 갈 수 있어요?”

“응, 내 던전이니까. 다음에 같이 가자.”

반 정도 남은 성수를 뇌물처럼 조용히 구름이에게 밀어주었다. 그게 재미있었는지 크게 웃어대던 구름이가 뒤에 서 있던 하늘이의 손에 들려주었다,

네임드라고 해서 다들 어려웠는데…. 똑같은 사람이구나. 그러고 보니 내 배낭 안에 있던 스킬 상자가 생각났다. 권경배에게 줘야 하나?

[귓속말]유우 : 야

[귓속말]간계밥 : ㅇㅇ?

[귓속말]유우 : 제 [수인마을 수확제 무투대회 우승자의 보상] 아이템 좀 보세요!

[귓속말]유우 : 이거 어쩌지?

[귓속말]간계밥 : 너 써야지.

[귓속말]유우 : 다 같이 도와줘서 성까지 먹은 건데 다른 사람한테 아무 말도 안 하고 나 혼자 챙겨도 되나?

[귓속말]간계밥 : ㅋㅋㅋㅋㅋㅋㅋ 아니면 화환 형한테 한 번 물어봐. 너 쓰라고 할 것 같긴 한데 니가 찝찝해하면 뭐든 해 주겠지.

역시 길마는 길마인가? 화환은 내가 들어갈 망토에 얼음 골렘의 핵을 넣는 중이었다. 충분히 쉬었으니 다시 가자는 듯 망토를 열어 나를 보던 미친놈을 보곤 한숨을 내쉬었다.

[귓속말]유우 : 제 [수인마을 수확제 무투대회 우승자의 보상] 아이템 좀 보세요!

[귓속말]유우 : 길마님, 이거 숨겨진 방에 있던 건데..

[귓속말]화환 : 겸이 진짜 겜사 직원이야?

[귓속말]유우 : 또 개소리네.

[귓속말]화환 : 짖을까? 그런 취향이야?

서둘러 망토 안으로 몸을 밀어 넣곤 화환에게서 등을 돌린 체 던전 입장하기를 눌렀다.

[귓속말]화환 : 겸아, 그런 건 혼자 몰래 쓰는 거야.

[귓속말]유우 : 그러기엔 제 양심이 너무 여리네요.

화환이 혼자 웃기 시작했다. 뭘 웃어, 양아치 같은 놈이…. 진심을 말하는 중인데 비웃는 것 같아 움직이는 공간이 있는 앞발로 닿는 데를 내려쳤다.

[귓속말]화환 : 자기야, 아프잖아...

[귓속말]유우 : 누가 선생님 자기인가요?

[귓속말]화환 : 어젠 나더러 자기라더니 벌써 마음이 변한 거야?

[귓속말]유우 : 변할.. 마음이 없지 않았을까요..?

[귓속말]화환 : 상처다... 오늘 자기 전에 좀 울다 자야겠어.

[귓속말]유우 : 헛소리 말고.. 어떻게 해요? 한 명만 딱 골라서 주기엔 좀 그런데.

공격하기 바쁜 건지 화환은 한참이 말이 없었다. 고민하는 건지 신경 쓸 틈도 없이 몸을 축 늘어지자 가볍게 추어올리더니 어디론가 크게 뛰었다. 뭐지? 아직 몬스터 페스티벌엔 닿지 않은 것 같은데.

“겨미, 여기 몬스터가 바뀌어따!”

그게 무슨 말이지? 바뀌다니? 궁금했지만 겨우 숨을 쉬는 게 전부였다. 얌전히 누워 있는데도 점점 더 높아지는 온도에 결국 낑 하는 작을 소리가 흘렀다.

“하늘아, 겸이 좀 안아봐. 얘 더는 못 버틸 것 같으니까 최대한 멀리 떨어지고.”

화환이 나를 하늘이에게 맡기는지 몸이 들썩였다. 놀란 나르의 파닥거리는 소리와 빠르게 움직이는 발걸음이 괜히 조급함을 불러왔다.

어느 정도 떨어진 건지 멈춘 별이 형이 망토를 슬쩍 들어 내 얼굴을 살폈다. 나르가 보기에도 상태가 안 좋아 보였는지 내 얼굴을 입으로 호호하고 불었다.

“겨미 갠찮나? 길마가 갔으니 금방 없앨 것이다! 다음이 몬스터 페스티벌이다. 조금만 참아라….”

끙하고 한 번 울어준 쥐 다시 시원한 골렘의 핵에 얼굴을 갖다 대었다.

“던전이 왜 갑자기 변한 거야?”

“겨미한테만 얘기해 줄 거시다. 너는 겨미나 잘 안아라.”

잘한다 우리 나르….

“쪼그만게… 혹시 인성도 덩치만큼 압축시켜서 이렇게 떽떽거리나?”

“하느리는 멍청이인가? 겨미가 아픈데 지금 그런 얘기를 할 수 있겠느냐고.”

나르가 하늘이 형을 때리는지 퍽퍽 소리가 났고, 조금 더 시간이 흐르자 커다란 총성과 함께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까지 났다. 바뀌었다는 몬스터를 잡은 것 같은데….

더위가 조금 가신 것 같은 기분에 고개를 내밀자 리자드 무리는 없고 대신 온몸에 불이 붙은 거대한 리자드가 있었다. 드래곤보다는 작았지만 뾰족한 눈꼬리는 더 사납게 보였다.

“저게 뭐야?”

내 물음에 나르가 망토 안으로 들어와 내 목덜미로 얼굴을 묻었다.

“리자드 킹이다, 겨미. 돌연변이라 보기 힘든 거신데 하필 오늘 나와서 겨미가 힘드러찌.”

작게 속삭이며 대답하는 나르를 보다 모르는 척 발로 하늘이 형을 걷어 차버렸다. 나르한테 잘못한 게 있는 것 같아 대신 복수한 건데 용케 알아차린 나르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나르의 웃음이 사그라들 무렵 고개를 숙여 나르를 따라 작게 속삭였다.

“쟤가 왜 나온 거야?”

“여긴 리자드 굴이지 않은가! 이유는 없다. 그냥 어쩌다 나오는 귀한 몬스터다.”

페스티벌이 시작된 건지 하늘이 형이 바닥으로 나를 내려준 뒤 앞으로 나갔다. 서둘러 망토를 털어내곤 달이 형 가까이 걸어갔다.

“템 분배 알고 있죠? 드래곤 하트만 하늘 님들이 가지고 가시는 거예요!”

달이 형이 정말 아쉬워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보자 알 수 있었다. 엄청 귀한 아이템이 떴다는 걸 말이다. 저절로 꼬리가 살랑거렸다.

송금이 형한테 오랜만에 선물 줄 수 있겠네. 체력이 빠진 파티원들에게 힐을 넣어주곤 프로텍트를 둘러준 후 다시 망토 안으로 들어가자 화환이 따라와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겸이 기특하게 곳간 채울 생각을 다 했어?”

“아니요, 내 주머니 채울 생각이죠.”

앞발로 손을 턱 밀어내자 언제 이렇게 컸냐는 듯 눈이 반짝이며 옷 채로 나를 들어 올렸다.

“그래서 몬스터는 왜 바뀐 거래?”

“어쩌다 한번 나오는 희귀 몬스터래요. 것보다… 좀 내려줘요, 이제 걸어 다닐 수 있다고요.”

“손이 허전해서 싫은데요.”

깜빡했다. 이 미친놈은 싫어하면 싫어할수록 더 하는 새끼라는 걸. 한숨을 내쉬고 몸에 힘을 빼자 그제야 어깨 위로 안아 들었다.

“채하현, 우리 자기 그만 희롱하고 빨리 싸우라고. 다음 해츨링이야.”

“구름이, 겨미는 힘들어서 안겨야 한다. 얼른 공격이나 해라!”

와이번을 태워주지 않은 것에 앙심을 품은 나르가 앙칼지게 대답했다. 그나저나 구름이는 왜 자꾸 남의 집 길마 이름을 저렇게 부르는 거지?

던전에서 나오자 달이 형이 거래를 걸어왔다. 아까 불타던 리자드에게 받은 아이템이구나. 얼른 거래를 받자 화염 리자드 킹의 심장, 발톱, 이빨과 가죽까지 올라왔다.

아직 불꽃이 붙어 있는 걸 잠시 구경한 뒤 바로 송금이 형에게 보내버렸다.

[뇌 ( /◔3◔)/ 물]

무려 이모티콘까지 써 주었다. 이 정도면 오랜만에 주는 거라도 좋아하겠지. 뿌듯함에 고개를 끄덕이자 다시 한번 가고 싶은 사람들이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시간을 보니 이제 겨우 4시가 넘어갔고, 딱히 하고 싶은 것도 없었기에 한 번 더 던전으로 향했다.

[귓속말]화환 : 생각해 봤는데 12명이서 PVP 해서 1등 보상으로 주는 건 어때? 이름도 무투대회니 그게 좋을 것 같은데. 오늘 질투 던전 때문에 다 모이잖아. 던전 클리어하고 잠깐 하면 되겠다.

이런 미친 똑똑이 같으니! 옷에 박혀 있던 머리를 다섯 번의 도리질 만에 털어내고 화환을 올려 보았다. 이름만 길마가 아니었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몰려오는 열기에 일단 손이 닿는 머리통을 쓰다듬어준 뒤 망토 안으로 들어갔다, 화환은 혼자 웃으며 내가 들어가는 걸 도왔다. 그래, 많이 웃어 둬라. 오늘은 미친 짓 하는 걸 이해해 주고 다정하게 토닥여 줄 수 있으니까.

“자기야 내가 그렇게 기특해?”

취소다. 내 앞길도 깜깜한데 왜 이런 미친놈을 토닥여 줘야 하겠는가. 화환의 머리를 쓰다듬었던 손을 휘둘러 어깨와 가슴을 두드려준 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레드 던전은 그로부터 여덟 번을 더 돌곤 끝이 났다. 중간부턴 나르도 지겨운지 하품을 연신 해대기에 비활성화를 해주었다. 드래곤 하트는 얼마나 귀한 아이템이길래 이만큼 던전을 돌아도 볼 수 없는 거지?

지친 몸을 바닥에 붙인 뒤 더는 못 간다는 말을 하고 나서야 겨우 던전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귓속말]빛과송금 : 겸이 형님, 이모콘티가 신세대이심니다!

[귓속말]유우 : ㅋㅋㅋ 그동안 격조해씀니다.

[귓속말]빛과송금 : ㅋㅋㅋㅋㅋㅋㅋㅋ 겸아, 그런데 이 아이템 어디서 구한 거야?

[귓속말]유우 : 그거 레드 던전 돌다가 페스티벌 가기 전에 변이된 리자드 킹이 나와서 구했어요.

[귓속말]빛과송금 : 더 구할 수 있을까?

[귓속말]유우 : 나르가 귀한 몬스터라고 하던데.. 아마 던전 계속 돌다 보면 더 나올 거예요 한 5번에 1마리?

[귓속말]빛과송금 : 아.. 이걸 세공해서 보석으로 만드니까 쓸 만한 보석이 나와서.

“길마님. 송금이 형 리자드킹 아이템이 좋다는데 몇 번만 더 돌까요?”

“그럼 우리 길드원이랑 가자. 획득률 높은 칭호 가진 애들 추려서 올게.”

[귓속말]유우 : 형, 길마님이랑 아이템 획득률 칭호 있는 사람들 모아서 던전 조금 더 돌아볼 게요. 안 나와도.. 어쩔 수 없는 거 아시져?ㅎ

[귓속말]빛과송금 : 선물 보냈어. 두세 개씩 쓰면 아마 클리어 한 번은 버틸 거야. 힘내, 겸이.

반짝이는 우편함을 확인해보니 자그마한 얼음이 500개나 와 있었다. 던전을 몇 번이나 돌라는 거야…?

아이템 설명을 확인하자 하나를 물고 있으면 30분 동안 불내성이 생긴다고 적혀 있었다. 이걸 먹고 골렘의 핵을 달고 다니면 괜찮겠지….

망토 안에 넣어둔 아이스 골렘의 핵을 꺼내 나오자 벌써 던전 앞에 모인 사람이 있었다. 사탕 누나, 장꾸 형, 권경배와 보미 누나…. 와, 늘 보던 얼굴들인데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 반가웠다.

“겸이 수박이 없이 여기 어떻게 들어가?”

“저 송금이 형이 얼음 줬어요. 30분 불내성 생긴대요, 누나.”

물고 온 골렘의 핵을 권경배의 앞에 내려놓곤 대답했다.

“이거 배에 달아 줘.”

조각조각 내서 발바닥에 붙이면 좋겠지만 주인이 있는 물건이라 그건 포기했다. 움직인 건 권경배가 아닌 화환이었다. 온종일 두르고 있던 망토를 주워오더니 내 배에 골렘의 핵을 달곤 등 위론 크게 리본을 묶은 모양새였다.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아기 띠만큼 해괴한 몰골은 아니라 다행이었다. 발을 움직이는 게 힘들어 어기적거리며 걷게 되었지만, 뭐…. 안겨 가는 것보다 나았다.

얼음 하나를 물고 던전 앞으로 걷는데 뒤에서 따라오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니 전부 입꼬리를 삐죽이며 웃음을 참고 있는 것 같았다. 어이없네…. 이렇게 노력하는데 비웃어?

고개를 돌리곤 바로 던전 입장하기를 누르자 풍경이 바뀌었다. 그제야 사람들은 무기를 꺼내 들곤 앞으로 달려갔다.

얼음의 효과는 굉장했다. 물고 있는 덕분에 말은 못 했지만 채팅이 가능하니 그다지 불편하지도 않았다.

던전을 다섯 번쯤 더 돌았을까. 드디어 리자드 킹이 나왔는데 이번에는 저번과 색이 달랐다. 온몸이 검은 불길에 휩싸여 있어서 가까이 다가가기 힘든 건지 권경배가 주춤거렸다.

“배, 다리 들고 공격할 때 배를 노려. 다른 곳은 웬만한 드래곤만큼 방어력 세니까.”

화환의 말에 장꾸 형이 활을 바꿔 들었다. 꽤 두꺼워 보이는 활에 저걸 쏠 수나 있을까 하는 걱정을 했지만 역시 쓸모없는 걱정이었다.

한 방 한 방 집중해 쏘는 활은 리자드 킹이 양팔을 든 순간 백색의 배에 적중했고, 귀가 아플 만큼 큰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무너지듯 쓰러졌다.

“와, 이게 뭐야.”

막타 친 장꾸 형에게 아이템이 들어간 것 같았다. 장꾸 형이 손바닥 위로 아이템을 올려두었다. 검은 불길에 둘러싸인 돌은 손바닥 위에서도 타고 있었다. 아까 전의 아이템과는 색부터 달랐는데, 가진 능력이 다른 건가?

[파티]유우 : 형, 빨리 송금이 형한테 보내줘요. 세공하면 좋은 보석이 된대요.

“나 차단당했어. 오늘 아침에….”

[파티]유우 : 차단이요?

장꾸 형이 거래를 걸어 뜬 아이템 전부를 나에게 넘겨주었다.

“송금이 작업실 놀러 가서 뭐 하나 깨 먹었거든…. 당분간 말도 걸지 말라던데.”

[파티]유우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겸이는 왜 채팅으로 얘기하는 거야? 거리감 느껴지게. 아까는 한마디도 안 하고, 형아 서운해.”

아이템을 송금이 형에게 보내곤 장꾸 형을 올려 보다 아 하고 다 녹아가는 얼음을 보여주었다.

“우리 겸이 건치네. 그거 머금고 있어야 하는 거야?”

“자기야, 그렇게 속살을 내보이면 어떡해….”

저 미친놈이.

[파티]유우 : 이가 오복 중에 하나라잖아요. 길마님, 복 잃고 싶은 거 아니면 헛소리 ㄴㄴ

이를 털어버리겠다는 말을 고상한 포장에 감춰 얘기하자 화환이 굳이 이를 내보이며 크게 웃었다.

“그 복 없어지면 겸이 옆에 붙어살아야지. 겸이가 과일도 갈아주고, 아기처럼 키우고 싶다는 말 돌려서 하는 거지?”

[파티]유우 : 혹시 뇌에 문제가 있어요? 어쩜 저렇게 찰떡같이 말해도 개떡같이 알아듣는 거지.. 그것도 능력이에요.

“겸이는 부끄럼쟁이라 돌려 말하는 걸 잘하잖아.”

따끈한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오랜만에 귀만 긁어댔다. 헛소리만 듣는 불쌍한 내 귀…. 그렇게 몬스터 페스티벌까지 끝내고 나서야 길고 길었던 레드 던전이 끝이 났다.

저녁 시간, 백설이도 없고 혼자 있기 싫었지만 분명 내가 여기 붙어 있는 걸 권경배가 알면 우리 집으로 내려올 게 분명했다. 그렇기에 일단 로그아웃을 한 뒤 물 한 병 들고 거실로 나왔다.

휑한 거실은 언제쯤 적응이 될 건지. 벨소리가 울린 건 막 물 한 모금을 머금을 때였다. 발신자는 방금까지 헛소리를 해댄 미친놈이었고, 받지 말까 하다 통화 버튼을 누르고 귀 위에 얹어둔 채 소파 위로 길게 누웠다.

[자기야.]

“누구세요?”

[누구게?]

“전화 잘못 거신 것 같은데….”

[이것도 운명인데 서로 알아가 보는 건 어때요?]

“또 헛소리네.”

[또 나만 진심이었지?]

낮게 웃는 목소리가 괜히 간지러워 웃음이 났다. 괜히 드는 민망함에 주변을 둘러본 뒤 핸드폰을 손에 쥐고 무릎을 모아 앉았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백설이 갔다며, 혼자 또 쓸쓸하게 있을 거 생각하니까 마음이 안 좋아서 전화했지.]

“철들었나? 그런 생각도 할 줄 알아요?”

[반했어?]

“방금 그 말만 안 했어도 반할 뻔했는데. 아쉽게 됐네요.”

전화기 너머론 또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조금만 덜 예뻤어도 당장 끊어버리는 건데. 채하현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게 꼭 눈에 보이는 것만 같아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러게, 저녁은 언제 먹으려고? 벌써 여섯 시 반이야.]

“이따가요, 배가 안 고파서.”

[어쩐지, 경배가 접종하기 전까지 걱정하더라.]

“권경배가요?”

[응, 너 요즘 더워서 잘 안 먹는 것 같다고. 내일 뭐 챙겨 먹이겠다는데?]

“진짜… 10센치만 작았어도 나한테 시집오는 건데.”

[누구? 나?]

“그쪽 분이겠어요? 자나 깨나 내 걱정하는 우리 동갑 아빠지.”

[자나 깨나 겸이 생각하는 나는 어때?]

할 말이 없어 가만히 있자 드디어 제 마음을 받아주는 거냐며 오두방정을 다 떤다. 얘는 왜 이렇게 사람을 헷갈리게 하는 거지? 물어보고 싶어도 아직은 안 됐다. 그건 마음 편하게 게임을 접을 수 있을 때 물어볼 말이었다.

그 뒤로도 미친놈의 구애 활동은 30분 동안 이어졌다. 아기는 몇 명이 좋겠냐며, 외동은 외로우니 둘이 좋겠다는 자문자답에, 영어 유치원 예약이 어떻고…. 50살이 되면 이제 한적한 시골로 가서 오붓하게 농사를 짓자며 내 미래계획까지 홀로 그려내고 있었다.

“아기는 학이 물어다 줘요? 무슨 애야, 남자 둘 사는 집에.”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지지 않을까?]

“헛소리가 왜 이렇게 끊임이 없지? 혹시 마인드맵 그리면서 통화 중이세요?”

[뭐야, 자기야. 이제 내가 뭘 하는지 궁금해? 난 자기 생각밖에 안 한다니까.…]

“밥이나 먹어요. 벌써 일곱 시가 넘었네.”

[자기도 먹으면.]

“왜, 아주 밥 먹을 때마다 검사 맡으라고 하지.”

[정말? 그래도 돼?]

“당연히 안 되죠. 이따 봐요.”

[네. 겸아, 이따 봐.]

통화가 끊기고 후끈한 볼에 서둘러 주방으로 들어가 냉장고를 열었다.

“다 모였나?”

“아, 길마님 지우 지금 집 도착했대요. 5분만 기다려 주세요….”

햇살의 말에 수인 왕궁 성문 앞에 모인 파티원들의 긴장된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나르마저 숨을 후하고 내쉬었으니 말 다 했지.

“겸이 지금 레벨 몇이야?”

송금이 형이 배낭을 보며 물었다.

“저 232요. 꾸준히 경치 던전은 도는데 너무 안 올라요….”

“원래 그때는 그렇지. 지금 장비 펠린 셋인가?”

고개를 끄덕이자 바로 거래가 걸려왔다. 230 렙제가 걸린 장비였는데 외형이 붉은빛과 검정이 섞인…. 누가 봐도 비싸 보이는 장비였기에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착용했다.

“혹시 몰라서 이번 장비는 방어랑, 체력만 몰빵 한 건데 이번에 구한 아이템으로 만든 보석도 세공했으니까 꽤 괜찮을 거야.”

“와, 형 이거 체 뻥 완전 좋은데요?”

송금이 형에게 꼬리를 흔들며 얘기하자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이렇게 쓰다듬을 받으면 나중엔 머리털만 반질반질해지지 않을까? 하는 이상한 걱정이나 하고 있자 지우가 머쓱한 얼굴로 등장했다.

“와, 겸이 형 하우징이에요? 완전 좋다.”

어깨를 으쓱하곤 왕궁 설정에서 파티원만 입장 가능으로 바꾼 뒤 안으로 들어갔다.

“늦었으니까 설명은 가면서 들을까, 나르.”

“질투는 자기를 때린 사람의 스킬을 그대로 복제한다.”

“와… 스킬 안 쓰고 평타로 때려도?”

“그럼 어떻게 해? 환이 형이나 보미, 수박 누나 스킬 복제하면 망하는 거 아니야?”

“길마, 그대는 공격하지 말아야 해. 그대의 스킬은 자신의 체력을 소비하지만, 겸이도 한 방이지 않는가!”

나르가 내 머리를 톡톡 두드리며 얘기했다. 그래도 거의 250인데 한방이라니…. 이를 한 번 내보이는데, 생각해 보니 한 방일 만했다. 나태와 탐욕의 죽음을 바로 옆에서 봤기에 파괴력이 강한 건 잘 알았다.

“겸이만 지키면 되는 거지?”

화환이 나르를 보며 얘기했다. 그렇겠지, 내가 죽으면 던전은 닫히는 거니 말이다.

“그러타. 똑똑해졌군, 길마.”

“음… 일단 실드는 쿨 되는 대로 겸이한테 쳐주고, 겸이는 송금이 형 옆에 딱 붙어 있어. 사탕이는 겸이 체력 신경 써 주고. 혹시 몰라서 길드 창고에 있던 부활 스크롤 다 챙겨왔는데 다행이네.”

나눠주겠다며 우편 확인하라는 화환의 말이 듬직했다. 반면 권경배는 불안한 모양이다. 가장 강한 공격이라는 말 때문인가?

송금이 형이 챙길 게 있다고 잠시 길드성으로 다녀온 후 던전으로 입장했다.

이번은 보라색 보석인 건가? 주위를 둘러보자 보라색 보석들이 박힌 넓은 동굴이 보였다. 다른 왕들은 거의 성 같은 곳에 있었는데 질투만 이런 동굴에 있는 건가? 숨을 장소도, 공격을 피할 만큼 넓지도 않은 실내에 긴장되기 시작했다.

“이럴 것 같아서 챙겨오긴 했는데…. 겸아, 내 뒤에 꼭 붙어 있어.”

“뭘 챙겨오셨어요?”

“역린으로 만든 보호막.”

레드 던전 보상으로 만들 수 있는 거라 몇 개 없는 거라고 울상을 짓는 송금이 형의 손바닥엔 500원짜리 동전만 한 구슬이 두 개 올려져 있었다.

/[일곱 개의 죄악 제3의 죄 ‘질투’의 던전에 입장하셨습니다! 무사히 클리어하시고 명성을 널리 퍼트리세요.]/#볼드

- 던전 페널티 발생. 아이템 획득 확률이 소폭 감소합니다.

- 던전 페널티 발생. 공격력이 소폭 감소합니다.

- 던전 페널티 발생. 방어력이 소폭 감소합니다.

- 던전 페널티 발생. 회피율이 소폭 감소합니다.

- 던전 페널티 발생. 포션 사용 쿨 타임이 소폭 상승합니다.

/[칠죄종 던전 발견! 최초 발견자에게 칭호가 지급됩니다.]/#볼드

‘질투’

-칭호 효과로 명중 효과가 7% 증가합니다. 칠죄종 칭호를 모두 획득 시 칭호 효과가 대폭 상승합니다.

질투의 왕은 동굴 벽에 기대어 앉은 채 우리가 있는 곳을 보고 있었다. 보라색의 화려한 드레스 차림에 마찬가지로 보라색 허리까지 내려오는 머리칼.

누가 봐도 예쁜 사람은 남자였다. 어이없어하는 것도 잠시, 화장으로 얼룩진 얼굴이 재미있다는 듯 깔깔 웃었고 그와 동시에 눈이 마주쳤다.

왕은 수인이었다. 에메랄드빛 깃털의 날개가 등 뒤로 펼쳐지더니 곧바로 내 눈앞으로 날아왔다. 마법에라도 걸린 듯 피할 수 없는 시선에 그대로 얼어 있자 내 앞으론 두 겹의 실드와 푸름이 달려와 섰다.

푸름이 막아서서 시야를 막아주어 겨우 정신이 든 것 같았다. 고개를 저으며 송금이 형의 뒤로 달려 몸을 숨겼다.

“수인 왕국이라 수인이 나온 건가?”

“그런 거 아니에요? 쟤 날면 피곤할 것 같은데….”

“동굴이 좁아서 날진 못할 것 같은데?”

연신 종알거리던 권경배의 말은 송금이 형이 질투의 공격을 피하며 나를 들고 뛰어오른 순간 없어졌다.

왜인지 나만 노리는 질투의 왕은 특별한 공격을 하지 않음에도 위협적이었다. 더는 물러날 곳이 없는 우리를 보다 못한 권경배가 광폭화를 써 질투를 구석으로 몰아주었다.

“같은 수인이라 겸이만 노리는 건가?”

“왕이랑 눈 마주치면 몸이 얼어요, 그런데 계속 빤히 보고 있어서… 피하기가 어려워요.”

“나르는 그런 말 없었는데?”

나르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 순간 동굴 안에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어느 순간 질투의 왕의 손에는 권경배의 검과 같은 모양의 바람으로 만든 검이 들려 있었다.

눈을 마주치면 안 돼….

권경배가 막을 틈조차 없이 보랏빛 연기에 둘러싸인 질투의 왕이 내 쪽으로 달려왔다. 그 움직임을 주시하지 못했던 탓에 피하는 게 조금 늦었고, 어깻죽지로 긴 상처가 그어지며 피가 흘러나왔다. 놀랄 틈도 없이 스쳐간 검이 바로 내 발을 관통해 바닥에 꽂혔다.

“깨갱!”

“겨미!”

아픔보단 놀람이 더 컸다. 꼼짝할 수도 없었고, 바로 눈앞으로 다가온 질투의 얼굴에 그대로 몸이 굳은 것 같았다.

-그대는 우리의 왕이 될 자격이 충분하지 않아.

잔뜩 쉬어 거친 목소리가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그때 보미 누나가 질투의 검을 두 동강 내었고, 바람이 크게 불며 발이 자유로워졌다.

“그게 무슨 말이야?”

-혼자선 아무것도 못 하는 허수아비.

-그대가 뮤첼과 다를 게 무엇이지?

말을 할 때마다 바뀌는 목소리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뮤첼과 같다니… 적어도 나는 다른 사람을 희생…?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분노의 던전부터 나는 죽어선 안 된다며 대신 희생해주던 파티원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대는, 열두 명의 희생으로 이곳에 서 있는 게 아닌가?

-얼마나 많은 죽음을 딛고 서 있는 거지?

-이 자리에 오기까지, 그대의 사람들은 몇 번이나 죽음을 맞이했지?

-그럼에도 그대는 여기 설 자격은 있는가?

보미 누나의 단검이 가슴에 꽂힌 채 물러나면서도 쉼 없이 물어오는 질투가 다시 한번 바람으로 검을 만들어 손에 쥐었다.

“저, 씨발 미친 보라돌이 새끼가. 우리 애 괴롭히지 마!”

사탕 누나가 곡괭이를 들고 질투에게 달려가며 휘둘렀다. 영혼의 단짝인 수박 누나가 따라 스킬을 써 댔고 송금이 형이 묵묵히 내 앞을 막아서며 장난스레 웃었다.

“겸이가 바란 희생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정한 희생이야. 또 혼자 끙끙거리는 거 아니지?”

“우리 애 소심하다고, 개새끼야!”

멀리서 들리는 각종 가축의 새끼들 소리에 그냥 웃음이 터졌다. 이젠 나도 이 정도는 버틸 수 있게 된 건가? 그냥 마음이 따뜻해졌다. 다른 사람도 다 재미있는 건지 곳곳에선 웃음소리가 나왔고, 그제야 히든 스킬과 강한 스킬들이 질투의 왕에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르의 예상대로 질투는 어느 순간부터 보미 누나의 스킬만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초승달 모양의 단검 두 개를 쥔 채 토네이도를 만들어 공격하는 스킬이었다. 거긴 살짝만 닿아도 크게 베이는 탓에 권경배와 지우가 두 번, 푸름이 한 번씩 죽었다 살아나야 했다.

“보미! 바람과 상관있는 스킬이 있는 건가?”

“응, 히든…. 왜?”

“질투의 왕이 새다! 새면 바람 속성이지 않은가!!”

“어쩐지, 내가 쓰는 것보다 강하더라….”

나르의 말에 보미 누나가 머쓱하게 웃곤 질투에게 다른 스킬을 보여주겠다는 듯 마구 날렸다. 하지만 질투는 그 토네이도가 마음에 든 건지 주야장천 그것만 써댔고, 나를 제외한 파티원들은 몇 번씩 죽어가며 어렵게 질투의 왕의 체력을 깎아내렸다.

암만 생각해도 화난단 말이야… 지가 뭘 안다고 뮤첼을 들먹여. 송금이 형이 두꺼운 화살을 날리는 사이 몰래 하울링이 닿는 범위로 가까이 가서 크게 한 번 울었다.

“아우우-!”

다섯 마리의 커다란 늑대들이 나타나 기다렸다는 듯 왕을 물어뜯었다. 놀란 듯 내 쪽을 바라보는 질투의 왕에 바닥을 박박 긁어모은 흙을 한 번 뿌린 뒤 송금이 형에게 달려갈 때였다.

“아우!”

질투의 왕이 희한한 목소리로 울어댔다. 꼭 앵무새가 사람을 따라 하는 목소리 같았는데, 바로 내 쪽으로 달려오는 바람의 늑대들이 보였다. 바로 몸을 웅크리자 따닥 하는 소리와 함께 늑대들의 이빨이 내게 닿기 전 사라졌다.

“혀, 형 구슬 쓴 거예요?”

“응, 두 개 다 썼더니 겨우 막아졌네.”

“겨미 송그미 옆에 있으란 말 못 들었나! 왜 말을 안 듣는 거신가!”

“쟤가 나한테 뮤첼이랑 똑같다고 했단 말이야. 한 대 때려줘야지.”

못마땅한 얼굴의 나르가 내 엉덩이를 두드리며 실드를 한 번 더 쳐준 뒤 질투에게 날아갔다. 쪼그만 게 무슨 잔소리를 저렇게 해….

“이 정도면 됐다! 다들 물러서라!”

나르가 소리치자 공격 중이던 사람들이 하나둘 벽으로 붙어 길을 내어주었다. 곧 나르의 마법진이 질투 발아래로 떠오르더니 질투의 발을 묶었고, 화환이 천천히 걸어 나오며 보기에도 무거워 보이는 소총을 꺼내 질투의 이마로 조준했다.

질투는 내 얼굴을 빤히 보고 있었다. 곧 죽을 건데 뭐가 그렇게 궁금한 거지?

아무런 감정이 실리지 않은 멍한 눈은 내게서 떨어질 생각을 안 했고, 곧바로 탕하는 총성이 울림과 동시에, 질투는 처음으로 환한 미소를 지으며 죽어갔다. 미친놈….

/[질투의 왕 생명의 근원이 파괴되었습니다! 일곱 개의 죄악 제3의 죄 ‘질투’의 던전이 클리어되었습니다!]/#볼드

/[축하드립니다! 숨겨진 던전이 클리어되었습니다! 유우님의 파티 화환, 푸름, 수박맛사탕, 간계밥, 지우, 장꾸, 빛과송금, 뽀또, 햇살, 민초맛사탕, 보미 님의 명성이 온 세상에 울려 퍼집니다.]/#볼드

-레벨이 올랐습니다. 247Lv 달성!

/[일곱 개의 죄악 제3의 죄 ‘질투’의 던전이 클리어되었습니다! 파티원의 명성이 세상에 울려 퍼집니다.]/#볼드

-최초 보상 레비아탄의 자주 보석이 유우 님께 귀속되었습니다!

-최초 보상 질투의 목걸이:이면이 모든 파티원에게 지급되었습니다!

-최초 보상 질투의 생명의 근원이 화환 님께 귀속되었습니다!

-최초 보상 질투의 안식 버프로 파티원 모두의 디버프를 해지합니다!

“보미 누나 스킬 엄청 강하다….”

지우의 감탄에 보미 누나가 으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보미 누나가 인간 첫 히든 직업 갖지 않았어요?”

“맞아, 듀얼 윌든가?”

“응, 그런데 나 때는 이런 퀘가 없었어. 시련의 탑인가 그거 깨기만 시켰는데…”

어깨를 톡톡 두드리는 보미 누나를 권경배와 지우가 양쪽으로 달라붙어 주무르기 시작했다. 고인물이 이렇게 격한 전투를 하시느라 고생하셨다며 놀려대다 결국 한 대 맞는 거로 끝이 났지만….

질투의 왕이 있던 동굴은 이제 텅 빈 공간만 남았다. 원래 던전의 자리가 아니었는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간 동굴은 아까보다 넓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 가든 하우스에 저마다 편한 자세로 누워 뒹굴거렸다. 자기 집 두고 왜 여기 있는 건지…. 스킬 상자 생각에 화환에게로 달려가 다리를 두드렸다.

“왜, 자기야. 안아줘?”

또 헛소리하네…. 얼른 배낭 안에 있던 상자를 화환의 앞으로 내려놓았다. 화환이 상자를 확인한 후 씩 웃더니 누워 있던 파티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겸이가 잠긴 방에서 스킬 상자를 하나 얻었는데, 이거 pvp 해서 이기는 사람이 갖는 거 어때?”

“그거 겸이 건데, 겸이 안 쓰고?”

“응. 나눠주고 싶대.”

못 들은 척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다 화환의 다리에 얼굴을 묻었다. 이게 뭐라고 쑥스러운 거지….

“어, 그런데 성안에 잠긴 곳 몇 군데 더 있지 않아요?”

“맞아, 지하로 가는 길은 아예 입구부터 막혔던데. 왜?”

“겸이 보상이 잠긴 방에서 나온 거라며.”

“그럼 보물찾기 먼저 하는 거예요?”

지우의 물음에 겸이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부담감에 억지로 고개를 끄덕이곤 상자를 다시 배낭 안으로 넣어두었다.

“던전 앞이랑, 지하 말고 또 어디 있어요?”

내 물음에 사탕 누나가 재미있겠다며 단체 메신저까지 확인해 가며 찾은 곳은 세 곳이 더 있었다. 다른 곳이 더 남아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찾은 곳부터 가보자는 말에 가장 가까운 곳으로 향했다. 겸사겸사 성도 구경하면 되겠지.

2층의 가장 구석 있는 줄도 몰랐던 문이었는데 내가 문을 열자 언제 잠겨 있었냐는 듯 쉽게 열렸다. 문 안으로는 하인들이 사용하는 숙소인 건지 퀘퀘한 먼지와 침대 두 개가 덜렁 놓여 있었다.

이번엔 꽝이냐는 권경배의 투덜임에 나르가 잡동사니가 가득 쌓인 선반 가장 위의 상자를 꺼내 내려왔다.

/[수인마을 수확제 최고의 연인 보상]/#볼드

“진짜 있네…”

“나르가 찾았다.”

가슴을 크게 열고 대답한 나르가 내 손위에 상자를 내려놓곤 빨리 다음 방으로 가자 보챘다. 아마 자기가 또 찾아 멋진 모습을 보여주려는 것 같았는데, 그저 귀엽기만 해 그건 실패였다.

1층 주방 안의 잠긴 음식 창고에서는 [수인마을 수확제 최고의 채집 품 보상이, 잠긴 지하에선 [수인마을 수확제 최고의 발명품 보상]까지 발견했지만 나르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하나가 더 있어야 한다.”

“응? 총 다섯 개야?”

[길드]민초맛사탕 : 겸이 성 잠긴 방 2층 구석, 주방, 지하 말고 또 아시는 분?

[길드]별이 : 마구간?

[길드]달이 : 거긴 원래 말 밖에 못 들어가잖아.

[길드]수박맛사탕 : 언니 거긴 왜 들어가 본 거예여? ㅋㅋㅋㅋ

[길드]별이 : 으슥한 게 아늑해 보여서..

[길드]구름이 : ㅋㅋㅋ 죄삼다.. 보기엔 멀쩡해도 하늘인걸 잊지 마세여ㅎ

별다른 말도 없었기에 나르만 보고 있자 나르가 앞으로 날아왔다.

“겨미, 이곳은 수인왕국이지 않은가…. 수인들은 숫자 5를 조아한다.”

“5?”

“응. 라디아탄이 다섯 개의 축복을 전해 주었고, 빛의 신의 다섯 번째 사자이기 때무니지.”

“겨우 그것 때문에?”

“아니다. 별의 아이도 다섯 번째가 가장 마지막 아이이다. 마지막 아이까지 찾은 라디아탄이 비로소 신의 곁에서 안식을 찾을 수 있으므로 가장 중요한 수가 다섯인 것이다.”

“그래서 이 상자가 네 개일 리 없다는 거야?”

“응. 첫 번째 방으로 가자. 거기에 뭔가 이상한 게 있었던 것 같다.”

“저는 이만… 내일 쓸 재료 준비하러 가야 해서 먼저 가볼게요.”

지우가 손을 들며 미안한 듯 말하곤 모두의 인사를 받은 후 스르르 사라졌다. 열한 명이 된 파티원들은 전부 탑으로 향했고, 버릇처럼 화환의 앞으로 걸어가 다리를 퍽퍽 내리쳤다.

“자기야, 나르보다 내가 좋은 거야?”

맞을 만한 말인 건 아는지 나를 들어 올리곤 귓가에 조그맣게 속삭였다. 누가 미친놈 아니랄까 봐….

“아니요, 나르는 힘 많이 써서 길마님한테 온 거예요. 싫으면 내려주든가.”

화환이 또 하찮은 걸 다 본다는 듯 웃어대다 날개를 꺼냈다. 전보다 상한 듯한 날개는 아프지도 않은지 두어 번의 날갯짓으로 빠르게 동굴 앞까지 날아왔다.

도망치듯 바닥으로 내려와 안으로 걸어왔다. 던전 바로 앞의 문을 열자 나르가 책장 앞에서 한참을 살펴보다 아무렇게나 꽂힌 종이 한 장을 건네주었다.

“겨미 읽어라. 이걸.”

지렁이가 기어 다닌 듯 꼬부랑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한참을 바라보니 눈앞의 글자는 한글로 바뀌며 다시 써졌다.

“소리 내서 읽어야 한다.”

“버림받은 불쌍한 우리 수인을 불쌍하게 여기신 신께서 그의 다섯 번째 사자를 이 땅에 보내셨으니, 그 이름은 라디아탄이오.”

한 구절을 읽자 문이 닫히곤 벽이 웅웅 하며 떨려오기 시작했다. 놀란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다 여전히 나를 보고 있는 나르를 올려보곤 다시 글을 읽어내리기 시작했다.

“그의 권능으로 다섯 가지 축복을 우리에게 내리시니 그의 첫 번째는 수확의 기적을, 두 번째 다정한 입맞춤으로 사랑의 설렘을 내려주셨으며, 세 번째 대지 위를 걷는 그의 발자국 하나하나에 새싹이 돋아나고, 네 번째 왕국이 빛을 머금으며, 마지막 무지한 이들의 머리 위로 가호를 그려 지식 선사하시니, 그는 우리들의 신이오, 축복 그 자체로다.”

“그가 다시 신의 곁에 설 날은 다섯 번의 큰 별이 내린 후일 것이며, 그 별들이 우리 수인의 든든한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니, 나의 후손들아, 필요치 않은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지어다.”

목소리가 멎음과 동시에 벽 한쪽을 덮고 있던 책장이 열리기 시작했다. 진짜 숨겨진 방인 건가? 밝은 빛을 내는 그 안엔 작은 테이블과 그 위로 보이는 은색의 상자가 하나 있었다.

여기로 들어가는 거지? 주위를 둘러보다 그 안으로 한 발 들어서는데 다른 사람들은 들어올 수 없는 건지 다들 앞만 더듬거리며 나를 보고 있었다.

뭐라고 얘기를 하는 것 같은데 그것마저 들리지 않아 서둘러 상자를 챙겨 나가기 위해 테이블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상자를 배낭에 넣음과 동시에 밝은 빛이 터지며 하늘에선 라디아탄이 빛과 함께 내려오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반갑다는 미소를 지으며 말이다.

-나의 아이야, 벌써 이렇게 자란 것인가?

“원래 남의 집 애들은 빨리 큰다잖아요….”

반가움보단 서운함이 앞섰다. 왜 뮤첼 새끼를 별의 아이로 만들어서 사람을 이 고생을 시키냐고….

-하하, 변하지 않은 게 있군, 그 성격 말이야. 그대, 내가 사랑한 이 땅의 구원자가 될 아이야.

“구원자 잘못 찾으신 것 같은데… 전 너무 약해요.”

-그대의 따뜻한 마음과 다정함이 이 땅에 내린다면, 그것이 구원이요, 곧 내가 바라는 것이지.

라디아탄이 가까이 다가오며 내 어깨 위로 손을 올렸다.

-저것 보게. 저리 많은 사람이 전부 그대를 걱정하는 중이야. 그대가 지쳐 쓰러지더라도, 손을 내밀며 앞으로 끌어줄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무엇이 걱정이지?

“제가 만약에, 만약에… 전부 실패해서 시간만 낭비한 거면 어떻게 해요? 다들 저를 싫어하게 되면….”

눈치 없는 입술이 또 삐죽거렸다. 울컥하고 치미는 감정에 입술만 앙물자 라디아탄이 조용히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대는 우리 수인의 마지막 남은 기적이라네. 그러니 이렇게 축 처진 어깨를 보이면 안 되지 않겠나?

라디아탄의 팔에 이마를 기대곤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희생당한 수인과 피안 길드원을 위해서라도 당당하게 서 있어야지. 마음을 다잡고 눈을 꼭 감았다 뜨며 라디아탄을 올려 보았다.

“그런데 여긴 어쩐 일이세요?”

-선물을 주기 위해서지. 그대의 무기가 은색 상자에 들어 있단다. 남은 건 나누어 주어도 되니 그것만큼은 그대가 가져야 하네.

나도 무기가 있긴 하구나…, 꼬리가 살랑였다. 물론 송금이 형이 메이스를 만들어주긴 했지만 다른 열한 명의 사람들은 나르가 찾은 무기 던전에서 다 하나씩 받았잖아.

내 꼬리를 확인한 라디아탄의 투박한 손이 툭 소리 나게 떨어져 나갔고, 이내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나며 이제 갈 시간이라는 듯 빛에 둘러싸이기 시작했다.

-그대의 여정을 지켜보는 일이 나의 낙이 되었지. 자네의 곁엔 항상 내가 있을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게.

빛과 함께 사라진 라디아탄이 있던 곳을 한참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웠다고 얘기해 주고 싶었는데…. 아쉬움에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는데 뒤쪽에서 콩콩하며 뭔가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아, 아직 다들 기다리고 있구나.

서둘러 사람들이 서 있는 입구로 달려 원래의 잠긴 방으로 돌아왔다.

“겨미, 라, 라디아탄미 맞나?”

“응, 여기 있던 상자에 내 무기가 들어 있대. 그거 알려주러 왔다고 했어.”

기지개를 한 번 켜곤 화환의 다리를 긁어댔다. 오늘 너무 많은 일이 있었기에 걸을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건 절대 사심을 채우는 게 아니다.

pvp는 자리를 비운 지우에 다음 날로 미뤄졌다. 1등 보상으로 스킬 상자를 건다니 지우가 꼭 자기도 하겠다 보챘기 때문이다. 일단 무투대회 상자는 pvp 1등에게 주고 남은 상자 중 발명 어쩌고는 송금이 형 꺼겠지?

오전 운동 내내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캡슐 안이었다. 얼른 들어가서 pvp를 개최하고… 하늘 길드원들과 레드 던전이나 돌아야지.

[길드]유우 : 안녕하세요.

[길드]구름이 : 겸이!

[길드]유우 : 안 사요.

[길드]달이 : ㅠㅜ

인사를 하자마자 오는 하늘 길드원의 채팅을 가볍게 무시한 뒤 나르를 깨웠다.

“겨미!”

“잘 잤어?”

“잘 자따. 겨미 잘 잤나?”

나르가 쪼르르 날아와 또 볼에 마구 입술을 부비기 시작했다.

이 여우같은 키메라…. 오늘은 나르와 느긋하게 메인퀘를 밀 예정이었다. 혹시 다음 칠죄종이 뜬다 해도 내일이 길드전이니 오늘만큼은 쉬기로 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번 던전은 일반 던전이라는 말에 얌전히 던전 앞에 앉아 길드원이 들어오길 기다리는 중이었다.

“와, 여기서 다 보네.”

오랜만에 보는 베르였다. 피안에 있을 때와는 옷차림부터 달랐는데 같은 길드원 셋을 거느린 채 내 앞으로 걸어오는 중이었다. 나르는 또 작은 날개를 부풀리고 베르를 노려보는 중이었다.

“역시… 아직 피안 길드원들이 쩔 엄청나게 해주나 봐, 레벨이….”

기분이 나빴다. 그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세상에 자기만 잘난 사람처럼 구는 게 역겨웠다.

“네, 화환 형이 너무 잘 도와주셔서요.”

하지만 나는 베르가 어떤 말에 발작하는지 알기 때문에 웃으며 대꾸를 했고, 마침 기다렸다는 듯 권경배에게서 연락이 왔다.

[귓속말]간계밥 : ㅇㄷ?

[귓속말]유우 : 새로 뜬 던전 앞인데 베르가 시비걸어.

바로 확인한 건지 파티 신청이 걸려왔고 수락하자마자 화환과 사탕 누나, 권경배가 있는 파티 채팅창에선 ‘솬ㄱ’ 라는 말이 올라왔다. 이럴 때 말은 잘 들어야지. 기다렸다는 듯 파티원 소환을 하자 곧바로 세 개의 빛무리와 함께 사람들이 내 앞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와, 씨발 오자마자 눈 버렸네.”

사탕 누나의 된소리에 베르의 어깨가 움칠 떨려왔다. 그러게 가던 길이나 가지 왜 시비를 걸어. 얼른 화환의 다리를 긁자 바로 큰 손이 내려와 안아 올렸다.

“아직 그렇게 오냐오냐 감싸고 돌아?”

“전에도 내가 얘기했죠? 오냐오냐하든 둥가둥가하든 뭔 상관.”

“말 좀 걸었다고 쪼르르 이른 새끼나, 그 말 듣고 몰려온 사람이나….”

“우리 집 애가 왜 그쪽 새끼야? 아직 나오는 대로 떠드는 건 안 변했네. 말 가려가며 할 나이 아닌가?”

화환이 내 등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진짜 애들이 듣는다면 뒷목 잡고 넘어갈 말이었지만 마음만은 든든한 덕에 오늘은 어깨만 토닥여주었다. 내 편이라니… 개든든하다.

“그딴 식으로 구니까 너네 한물갔다는 소리가 들리는 거야.”

“와, 어이없어. 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닌 것 같은데. 그리고 내가 전에 얘기했죠? 한 번만 더 우리 애 귀찮게 굴면 가만 안 둔다고.”

“한물간 피안에 탈탈 털리고 싶은가 보다. 악동이.”

“스무 명도 안 되는 주제에 왜 이렇게 설치지?”

우리가 스물도 안 됐나? 미리네에서 온 사람들도 꽤 되는 것 같은데…. 게다가 하늘에서 네 명이나 와줬고. 레드 던전 돌아준다고 하면 흔쾌히 도와줄 사람들인데. 의아함에 화환을 올려다보자 계속 보고 있었다는 듯 바로 눈이 마주쳤다.

[파티]유우 : 우리 스무 명 넘는데..

[파티]화환 : 전투 멤버만 추리면 안 되는 거 맞아.

[파티]유우 : 하늘 님들도 있는데?

[파티]간계밥 : 다 끼면 18?

“어중이떠중이들 머릿수만 많은 주제에 뭘 믿고 지랄이지?”

[파티]간계밥 : 맞는 말임, 보미 누나만 가도 반타작 낼 수 있을 듯ㅋㅋㅋㅋㅋ

“겨미, 나르가 때려주어도 되나?”

맞다 우리 든든한 나르가 있었지. 아직 베르를 붉은 눈으로 노려보던 나르가 안기며 물었다. 나르의 움직임 덕분인지 사탕 누나를 노려보던 베르의 시선이 화환에게 닿았고, 곧이어 손에 들린 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무서워서 못살겠네. 일부러 화환 쪽으로 얼굴을 묻자 큰 손이 눈을 가려주듯 얼굴 위로 올라왔다.

“보지 마, 닳아.”

“내일 길드전만 끝나고 한번 봬요. 성 다 털어줄 거니까.”

“겸아, 던전 입장해.”

권경배의 말에 화환이 던전 앞으로 걸어갔다. 바로 입장하기를 누르자 넓은 들판이 나타났고, 무언갈 곰곰이 생각하던 사탕 누나가 가까이 다가왔다.

“우리 길드 창고 겸이네 집으로 옮겨둘 수 있나? 거기 지하에 잠긴 방이면 다 들어갈 것 같던데.”

“그런데 저 없으면 못 열잖아요.”

“그러니까. 좀 치사하긴 한데 우리 레드 던전 보상만 해도 어마어마해서 뺏기면 속 쓰릴 것 같거든….”

“그건 그래요.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라도 머릿수가 많으니까… 언제 성까지 들어올지 모르긴 하죠.”

“응, 소모품 같은 건 그냥 두고, 중요한 아이템만 옮기자.”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혼자 쓰긴 넓은 곳이었고, 딱히 쓸 일도 없는 방이 넘쳤기에 알아서 하라 얘기하며 던전 안으로 들어갔다.

저번과 마찬가지로 사탕 누나의 매서운 몽둥이질 덕분에 몬스터들이 픽픽 나가떨어지며 금방 클리어되었다.

그 뒤로는 바로 이사가 시작되었다. 길드성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창고 안쪽은 장로 이상의 길드원들만 드나들 수 있는 문이 있는데, 거기가 희귀 아이템 보관 창고라고 했다.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열린 문 안에는 놀랍게도 사람이 한 명 서 있었다. 양손 가득 아이템을 들곤 어깨를 움찔하는 게… 꼭 도둑질 중인 것 같은 사람이.

“도둑이야…?”

“놀래라. 어쩐 일이야?”

“여기 물건 좀 옮기게.”

화환의 대답에 송금이 형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들고 있던 아이템을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그러더니 자기가 너무 막 써서 그런 거냐며 울 것 같은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형도 그럼 옮길래?”

“나도?”

“응, 겸이 하우징으로 등록돼 있으면 열쇠 하나 만들어 달래서 이동하면 되니까…. 그쪽으로 옮겨도 크게 불편할 것 같진 않은데.”

“맞다, 송그미. 거기 서재엔 제작서도 많이 이따.”

나르의 맞장구에 송금이 형이 조금 고민하는 것으로 보였다. 나르는 또 언제 그렇게 꼼꼼히 본 거지?

“게다가 그곳은 철로 유명한 왕국이어따. 무기 제작에 더 좋은 환경이다!”

“너 왜 그래? 갑자기.”

“겨미 성은 사람이 없어서 심심하다….”

나르를 빤히 보자 어색하게 내 눈을 피했고 대신 사탕 누나가 손에 곡괭이를 들곤 송금 형에게 보여주었다.

“이 곡괭이 왕국이 던전일 때 보상으로 받은 건데, 내구도가 안 깎여. 전에 특산물 꾸러미에도 있지 않았나?”

이사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사탕 누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배낭에서 커다란 보따리를 하나 꺼낸 송금이 형이 창고 안의 물건을 전부 옮겨 담더니 얼른 가자 보챘기 때문이다.

길드 창고가 될 공간은 절벽에 있는 곳 중 가까이 있는 비밀의 방이었다. 거기 안쪽에 있던 빈 공간이 송금이 형의 새로운 작업실이 되었다. 비빌의 방에 있는 책들이 제작서라는 나르의 말에 송금이 형은 굳이 좁은 그 방을 고른 것이었다.

제작자답게 뚝딱뚝딱 선반을 만들어 가져온 아이템을 정리하는 걸 보다 화환에게 하우징 손님을 위한 열쇠 제작법을 배워 만들어 보는 중이었다.

하우징 관리에서 손님맞이… 출입문만이 아니라 비밀의 방 네 개의 열쇠도 만들 수 있네.

열쇠 한 묶음은 20개였는데 혹시 몰라 성 열쇠와 비밀의 방 열쇠를 10묶음씩 만들어 송금이 형에게 발명상 상자와 함께 우편으로 보내주었다.

“겸아, 달이 형이 던전 언제 가느냐고 물어보는데?”

“아…. 까먹고 있었다. 지금 갈까요?”

“레드 가는 거야? 나도 가고 싶은데, 거긴 힐러 두 명까지 필요 없지? 아쉽다.”

“네. 한 명도 필요 없는 것 같아요….”

파티탈퇴를 하자 기다렸다는 듯 하늘이 있는 파티에 초대가 되었다. 나르는 송금이 형을 도와주겠다며 성에 남았고, 결국 화환과 성을 빠져나왔다.

“자기야, 내가 안아 준대도?”

“… 얼음 있다니까요.”

“이젠 내가 별로야? 아까도 안아 달라고 잉잉 울었으면서.”

“누가 들으면 진짜인 줄 알겠네. 제가 언제 잉잉 울었어요.”

“아하, 다른 사람들 앞이라 부끄러워서 그래?”

막 던전을 클리어하고 나와 다시 얼음을 물려고 할 때였다. 오늘도 어김없이 미친 예쁜이의 입에선 헛소리가 튀어나왔으며, 다른 사람들은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우리를 볼 뿐이었다.

구름이만 빼고, 말이다. 언제 끼어들까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는 중이었는데 하나도 버거운데 둘로 늘어나면 더 피곤할 것 같아 서둘러 던전 입장을 눌렀다.

[귓속말]빛과송금 : 겸아, 열쇠 보내줄 때 뭐 하나가 잘못 딸려온 것 같은데..

[귓속말]빛과송금 : 사실 아까 알았는데 꿀꺽할까 고민하다 이제야 물어봐

[귓속말]유우 : ㅋㅋㅋㅋㅋㅋㅋ 양심이 물욕을 이긴 건가여?

[귓속말]유우 : 이번에 장비 너무 좋아서, 다음엔 그거 쓰시고 더 좋은 거 만들어 달라는 뇌물이에요, 형.

던전 중반까지 이어지던 감사 인사가 끊긴 건 막 상자를 썼다며 효과를 개인 메신저로 보내온 사진과 함께였다.

/[기발한 천재]-패시브/#볼드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제작한 아이템에 특수효과가 붙을 확률이 2% 증가합니다.

특수효과라니 이걸 시험해 보러 간 것 같았다.

[세계]빛과송금 : 제 [찬란한 승리의 팔찌] 좀 보세요!

[세계]방구석여포 : 5억 ㅅㅅㅅㅅ

[세계]주방세재 : 7억

[세계]즈언하 : 아니 ㅅㅂ 특수효과 머임? 나비 임팩트?

[세계]이미존재하는 : 끼면 팔에 나비가 날아다니나여… 송그미님?

[세계]랄라세일: 20억 ㅅㅅㅅ

어, 송금이 형 라이벌인데? 랄라세일마저 달려들 만큼 좋은 건가? 세 번째 던전에 입장할 때 뜬 세계채팅에 그걸 한참 읽으며 걷자 화환이 나를 빤히 내려 보았다.

[귓속말]화환 : 자기야.

[귓속말]화환 : 왜 혼자 그렇게 뿌듯한 표정이야?

[귓속말]유우 : 특수효과 붙은 템이 그렇게 좋아요?

[귓속말]화환 : 응. 능력치가 엄청 좋아야 붙을까 말까 하는 거잖아.

[귓속말]화환 : 세쳇 보고 있었구나, 우리 자기가. 형아 열심히 싸우는 동안… 자기야, 나 서운해.

[귓속말]유우 : 응, 자기야. 난 자기가 이렇게 서운해할 때마다 너무 귀엽더라.

누가 미친놈 아니랄까 봐 화환이 혼자 웃어대기 시작했다. 혹시나 같이 묶어 미친놈으로 볼까 두어 걸음 떨어졌고, 그걸 또 확인한 건지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귓속말]화환 : 여태 우리 자기가 귀여운 나 보려고 그렇게 매정하게 굴었구나.

[귓속말]화환 : 뽀뽀해 줄까?

또라이 새끼! 바로 바닥에 주저앉아 헛소리에 고통받은 귀를 씻듯 긁었다. 아, 눈을 닦아야 하나? 학을 떼며 싫어하면 웃었고, 그렇다고 맞춰주면 좋다고 2절 3절까지 이어가는 미친놈을 어떻게 해야 당황시킬 수 있을까….

고민하다 미친놈에겐 똑같이 미친놈으로 나가야 할 것 같아 조심스레 채팅창을 열었다.

[귓속말]유우 : 응. 자기야 으슥한데 찾아 놔야 해. 부끄러우니까.

이가 으득 갈렸다. 내가 아무리 채하현을 좋아한다고 해도 뇌가 꽃밭인 저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할 날이 왔다니. 접종하면 제일 먼저 손을 씻고 눈을 씻을 것이다!

[귓속말]화환 : 형아만 믿어.

‘손만 잡고 잘게’와 동급으로 믿기지 않는 말이었다. 지금이라도 욕을 해 주어야 하나? 이럴 줄 알았으면 접속하기 전 잘 먹히는 욕을 찾아보고 올걸.

미친놈은 티가 나게 주위를 둘러보며 전투 중이었다. 설마 진심으로 받아들인 건 아니겠지? 밥 먹고 양치하긴 했는데.

[귓속말]유우 : 길마님, 생각해 보니 너무 이른 것 같아요. 저 혼전 순결주의라 손잡는 것도 안 돼요. 설마 실망한 건 아니죠?

[귓속말]화환 : 이거 일단 결혼부터 하자고 꼬시는 거지?

[귓속말]유우 : 또 사람 말을 개떡같이 이해하네.

[귓속말]화환 : 우리 자기 미신 믿어? 손 없는 날이 언제지?

[귓속말]유우 : 엄청 믿죠. 저 점 보러 갔을 때 서른 살에 결혼해야 화목하게 산대요. 길마님 7년 기다리지 말고 행복하세요..

거짓말이다. 태어나서 점은 물론 타로도 한 번 본 적 없었다. 이번 얘기는 화환에게 잘 먹힌 건지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처음으로 이긴 기분에 꼬리가 살랑거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아니 얘를 꼬셔 데리고 살 궁리를 해야 하는 입장인데 이렇게 철벽을 쳐도 되나? 다시 얘기할까. 5년, 아니 3년만 기다리라고….

[귓속말]화환 : 우리 겨미가 이상한 곳에 갔나보다. 다음에 형아랑 손잡고 날받으러 가서 다시 한번 봐.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은 미친놈. 눈치 없이 삐죽이는 입꼬리를 숨긴 채 빠르게 걸어 화환의 옆으로 다가갔다.

겜창의 필수 조건은 체력임이 분명했다. 열 몇 번을 돈 던전에 나오라는 드래곤 하트는 안 나오고 리자드 킹만 한 마리 만났었다. 입이 얼얼해 중간부턴 또 안겨 다닌 것도 말하면 입만 아플 일이었고, 결국 송금이 형이 애 잡겠다며 한마디 해 준 덕분에 무사히 풀려날 수 있었다.

“진짜, 길드전 도와주는 거로 레드 던전을 이렇게 하드하게 돌아야 하면… 피안 손해 아니야?”

“아니지, 겸이만 손해지.”

“그럼 던전 열어두는….”

“안 돼. 아까 보니까 우리 던전 앞에 갈 때마다 랄라세일 펫 늘어나던데, 못 봤어?”

랄라세일 얘기가 나오자 송금이 형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그러더니 배낭을 뒤적여 팔찌 하나를 꺼내 보여주었다.

두꺼운 은색 링에 촘촘히 박힌 보석 사이로 중간중간 커다란 푸른 보석이 자리 잡고 있는, 장신구에 관심이 없는 내가 봐도 예뻐 보이는 팔찌였다. 게다가 푸른 보석 위로 반짝이는 나비들이 하나씩 주위를 맴도는 것까지 신비로워 계속 눈길을 끌었다.

“이게 그거예요? 특수효과?”

“응, 괜찮지?”

“안 팔았네요? 랄라세일 20억부터 부르던데.”

[귓속말]빛과송금 : 만렙 장비라 겸이는 못 끼는데, 다른 사람도 칠죄종 셋 효과가 더 좋아서 이걸 낄만한 사람이 없네.

“걔한텐 못 팔지. 좀 묵혔다 두 배로 팔아먹을 생각일 건데…”

“와, 장신구 하나에 40억이요?”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하는데 구름이의 눈이 반짝였다.

“그으럼, 제가 사면 안 돼요? 30억 드릴게요.”

“누나가요?”

“응, 나 특수효과 붙은 템 갖고 싶었는데 거래소엔 너무 터무니없는 가격뿐이라….”

송금이 형이 허락을 구하듯 나를 한 번 쳐다보았다. 저건 형 템이니 마음대로 해도 될 건데.

[귓속말]유우 : 형,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데,, 그거 형 거예요. 저 신경 쓰지 마시고 하고 싶은 대로 하시면 돼요.

송금이 형이 한 번 웃어 보이곤 구름이와 거래를 시작했다. 30억이면 거의 30만원인데, 겜창들의 기준으론 별로 큰돈이 아닌가? 화환이 잘했다는 듯 내 등을 토닥였다. 뭘 알고 이러는 거야.

문이 벌컥 열리곤 보미 누나와 나르, 사탕 누나가 나란히 안으로 들어왔다. 아마 베르 얘기를 들은 건지 씩씩거리던 보미 누나가 화환을 보다 내 얼굴을 허벅지 위에 얹어두곤 마구 주물럭거리며 중얼거렸다.

“내일 길드전 끝나고 쟁 걸어?”

주위를 둘러보던 나르도 구름이를 확인하자 눈을 흘기며 내 등 뒤로 날아왔다. 아직 제가 삐져 있다는 걸 구름이에게 보여주기라도 하는 듯 볼을 부풀리며 말이다.

“안 걸면 사탕이 누나 데리고 길탈하고 혼자 길드 만들 거라는데?”

“뭐야, 언니 어디랑 붙어요?”

나르에게 손을 뻗던 구르미가 보미 누나를 보며 물었다.

“악동. 계속 우리 애를 건드려 짜증 나게.”

“와, 거기 길드원 100명 넘었다는데.”

“벌써? 진짜 아무나 막 받는 중이구나….”

“네, 그렇다는데 그래도 100명이면, 머릿수가 너무 차이 나지 않나?”

사탕 누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내 발바닥을 조물거리고 있던 화환은 아무 생각 없다는 듯 고개를 숙여 내 발에 가까이 다가왔다. 이건 또 무슨 해괴한 짓이야.

“뭐, 뭐야. 길마님 겁나서 미쳤어요?”

“응, 자기야. 무섭네.”

무서움 따위 모른다는 밝은 목소리로 대꾸하곤 코를 발바닥에 가져다 대기 시작했다. 곧이어 숨이 닿았고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아대는 행동에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기분이었다.

“좀 놔요. 뭐 하는 거야, 힘만 센 놈이!”

“강아지들은 꼬순내 나지 않나? 우리 겸이 발에선 따뜻한 흙냄새 나.”

결국 화환의 어깨를 한 대 차준 뒤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흙냄새면 흙냄새지, 따뜻한 흙냄새는 뭐야.

문득 시간을 보니 저녁 시간이 가까웠고, 저녁 먹고 이따 사람들이 좀 모이면 다시 접속해서 산타마냥 템이나 나눠주고 다니면 되겠다 싶어 아직 뒤에 붙어 있는 나르를 바라보았다.

“나 경험치 던전 갈 건데, 나르는?”

“겨미, 나르는 성에서 자게따!”

“집 생겨서 나르가 제일 좋아하네…. 이따 올게.”

남은 사람들에게도 인사를 한 뒤 던전 안으로 이동 후 접속을 종료했다.

해가 져도 날씨는 여전히 더웠다. 저녁을 생각보다 많이 먹은 탓에 속이 안 좋아 잠시 산책이라도 할까 싶어 나온 건데…. 날씨를 생각 안 하고 나온 탓에 다시 들어가야 하나 싶었지만, 이왕 나온 김에 집 근처에 위치한 카페로 들어왔다.

날이 더운 탓에 넓은 카페 안도 사람들로 북적였는데 운이 좋은 날인지 바로 창가 쪽 자리가 하나 났다.

커피를 받아들곤 멍하니 앉아 바깥 풍경을 구경하는 중이었는데, 길 건너 가로수 사이로 익숙한 머리통이 저물어가는 햇빛 사이에 유난히 반짝이는 얼굴로 걷고 있었다.

쟤는 언제 나왔대. 혹시나 이쪽을 한 번 돌아봐 주지 않을까 빤히 보고 있었지만, 뒤에서 달려온 자그마한 체구의 사람에게 눈이 고정된 채 아무리 기다려도 내 쪽으로 눈을 돌리지 않았다. 뭐지, 저 새끼는 여자친구도 있는 주제에 날을 잡네, 마네 한 건가?

주머니 안에 있던 핸드폰을 들어 화환의 연락처로 바로 전화를 건 순간 옆에 있던 여자분께서 이쪽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한 후 다른 곳으로 걸어가는 게 보였다.

[자기야, 나 보고 싶어서 전화했어?]

“…길마님은 주변을 좀 둘러보며 걸을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응?’ 하며 두리번거리던 화환이 내가 있는 카페를 확인한 건지 세상 다 가진 얼굴로 웃기 시작했는데, 저 사람은 외출을 자제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하얗고 말랑하게 생긴 주제에 예쁘기까지 하니 위험하다. 채하현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말이다.

[웬일로 외출을 했어? 계란이가 겸이는 여름엔 집 밖으로 안 나간다던데.]

“…저녁을 많이 먹어서.”

[역시 운명인가? 딱 마주친 것만 봐도 가능성 있어 보이는데. 내가 들어갈까? 가까이서 보고 싶어.]

불여우. 사람 말문 막히게 만드는 데 천재인 불여우 새끼.

“여기 자리 없어요. 뭐 마실래요? 하나 주문해서 나갈게.”

[겸이랑 똑같은 거요.]

채하현을 힐끔 노려보곤 자리에서 일어나 얼마 마시지 않은 아메리카노를 테이크아웃 잔에 옮겨달라 부탁하며 한 잔 더 주문했다. 진짜 운명인가? 이렇게 시작하는 게 맞나?

[자기야, 나 길 건너.]

“네, 저도 이제 나가요.”

문을 열고 주위를 둘러보자 채하현이 손까지 저으며 걸어오는 게 보였다. 이런 이벤트가 자주 있다면 산책을 자주 나올 텐데. 긴 다리로 어느새 가까이 온 채하현에게 커피를 건네주곤 눈을 맞추었다.

“가까이서 보니까 더 좋아요?”

“왜 당연한 걸 물어? 우리 자기 확신이 필요한 거구나.”

“아니, 계속 웃길래. 내가 그렇게 좋은가 싶어서.”

화환은 대꾸 없이 빨대만 입에 물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그늘 한 점 없이 웃는 얼굴을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조금 전 모르는 사람의 옆에 있는 걸 봤을 때는 짜증이 났는데 내 옆에서 이렇게 방긋거리며 있는 걸 보니 괜히 간지러워져 손끝만 문질러댔다.

계획을 변경할 필요가 있었다. 왜 잘해 주냐 묻기보단 그냥 내 옆에 끼고 살기로. 밥도 먹여 주고, 옷도 입혀 주며 내 손만 타게 해야 했다. 일단 먹을 걸로 꼬셔야 하니까, 집에 들어가면 바로 요리학원을 찾아서 등록하고….

“자기야,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 요리 학원을…”

“학원?”

“아니에요. 길마님은 왜 나오신 거예요?”

하마터면 다 얘기할 뻔했네.

“원두가 다 떨어져서.”

화환이 손에 들린 유명 프렌차이즈 로고가 박힌 원두 팩을 흔들거리며 보여주었다. 이런 사소한 행동마저 귀엽게만 보여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 같았다. 생긴 건 왕처럼 아무것도 안 하고 사람을 거느리게 생긴 주제에….

“게임 망하면 카페 차리면 되겠다.”

“벌써 내 미래까지 걱정하는 거야? 자기야, 걱정하지 마. 너 하난 먹여 살릴 수 있어요.”

“취업 실패하면 얹혀살러 갈게요.”

“오늘부터 물 떠놓고 빌어?”

“뭐, 취업 망하라고요?”

“네에, 동서남북 어느 쪽을 좋아해?”

굳이 좋아하는 쪽이라면 채하현 얼굴이 있는 쪽이 아닐까? 실없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 걷다 보니 어느새 아파트 입구 앞이었다. 혼자 걸을 땐 그렇게 멀던 길이 꼭 채하현과 걸을 땐 이렇게 짧게 느껴지는지.

“빨리 들어가요. 오늘 pvp 해야 하잖아요.”

“아쉬워. 내일도 산책해?”

“봐서…?”

“그냥 매일 하면서 나랑 걸으면 안 되나?”

채하현이 눈꼬리를 잔뜩 내리며 귀여운 얼굴로 보채기 시작했다. 왜 안 되겠어, 당연히 되지. 하지만 너무 쉽게 허락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기에 잠깐 고민하는 척을 하려는데….

“해요, 나오니까 좋네.”

눈이 마주친 순간 멋대로 대답이 튀어나왔다. 기다렸다는 듯 나온 대답에 채하현은 잠깐 눈을 크게 떴다 이내 눈동자가 안 보일 만큼 웃어댔고, 그 얼굴 하나에도 나는 열이 올라 귀가 화끈거렸다.

“자기야, 내일은 바쁠 것 같으니 모레부터 봐.”

좋아하는 걸 티 냈다는 부끄러움과 어차피 데리고 살 거 티 좀 내면 어떻냐는 생각이 부딪힌 머리가 복잡해질 즈음 1층 입구에 도착했다.

“네, 들어가세요.”

말 끝나기 무섭게 도망치듯 안으로 들어와 바로 핸드폰을 꺼내 작은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겸이가 웬일이야? 먼저 전화를 다 하고?]

“형,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어떻게 해야 해?”

[응?]

“그러니까, 그 사람이 어떻게 해야 나를 좋아할까?”

[그…건 큰형한테 물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래도 결혼까지 했잖아.]

“거기랑은 케이스가 좀… 달라서.”

[그럼 잘해줘야지. 자주 만나서 예쁜 짓도 하고.]

“매일 보긴 해….”

[같이 게임 하는 사람이야? 얼마나 예쁘길래 우리 겸이가 이래?]

“그냥 예뻐. 예쁘단 말밖에 안 나와.”

[형수님한테 물어봐, 여자 맘은 여자가 더 잘 알잖아.]

“응? 채하현 남잔데?”

백설이의 낑낑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 작은형의 목소리는 한동안 들리지 않았다. 통화 때문에 계단으로 3층이나 올라왔는데 끊고 엘리베이터를 타야 하나? 할 때쯤 헛기침하는 소리와 기다리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혹시, 커밍아웃?]

“뭐, 겸사겸사. 나 일요일부터 저녁에 매일 산책하기로 했어. 무슨 옷 입지?”

[산책이면 트레이닝복이지. 너무 신경 써도 꼴불견이야. 용돈은 안 모자라?]

너무 많이 준다며 휴학생이 무슨 돈이 필요하겠냐 타박하니 채하현에게 맛있는 거 많이 사 주라는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겼다. 일단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고 빨리 게임으로 접속해야지 싶어 샤워를 하고 바로 캡슐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pvp는 제가 이길 거라는 권경배의 예상과는 다르게 장꾸 형의 승리로 돌아갔다. 결승에서 권경배와 비등하게 싸우다 포션을 마시려 잠시 한눈파는 사이에 어이없이 당한 친구의 비명이 아직 귓가에 울리는 것 같았지만 뭐, 어쩔 수 있나….

상품을 전달하곤 기죽어 있는 권경배에게도 하나 남은 상자를 챙겨주었다. 금세 기운을 차리곤 손뼉을 쳐주는 그를 보다 배낭 안에 들어 있는 상자 두 개를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수인마을 수확제 최고의 연인 보상] 그리고 유일하게 은색의 보석함 모양을 한 상자는 [수인족의 기적 라디아탄에게 경배를]이었다. 묘하게 누구의 이름이 끼어 있어 읽기 싫어졌기 때문에 발로 툭 치다 모여 있는 사람들을 올려 보았다.

“이건 라디아탄이 제 꺼라고 했어요.”

“라디아탄이?”

“네, 지금 열어봐도 돼요?”

“응, 궁금하다.”

앞발로 보석함의 뚜껑을 조심스레 건드리자 저절로 열리더니 빛이 한 번 터져 나갔다. 놀라 주춤거리자 화환이 내 등을 토닥여 주었다. 밝은 빛 탓에 눈을 부비며 안을 보자 거기엔 낡은 실로 엮은 책 한 권만이 들어 있었다.

“겨미! 무슨 일인가!”

문이 부서져라 열고 들어온 나르가 바로 내 쪽을 향해 날아왔다.

“이거 열었더니 빛났어.”

“이건, 겨미 무기지 않은가!”

“…이게?”

“겨미! 자래따, 자래써!”

이 낡은 책이 진짜 내 무기라는 건가? 내 얼굴을 쥐고 쓰다듬는 나르를 밀어내곤 책을 열어보려 했지만 책은 열리지 않았고, 대신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알림만 뜰 뿐이었다.

“이거 던지는 용도야? 이게 어떻게 무기지?”

“나중에 알 수 이따!”

기분이 좋아진 나르가 온 사방으로 날아오르며 기쁨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이게 그렇게 좋은 건가?

“남은 건 하나야?”

권경배가 제 상자를 보던 건지 조용히 있다, 내 발아래 놓인 상자를 힐끔거렸다. 이것도 탐내는 건가?

/[수인마을 수확제 최고의 연인 보상]/#볼드

-연인소환 스킬이 개방됩니다. 수인의 축복 효과로 수인 왕국 왕성에서 결혼식 올리기가 가능해집니다.

별로 아닌가? 파티하면 그냥 소환할 수 있잖아….

“이 게임 결혼도 할 수 있어요?”

“아니. 몇 년째 말만 나오지, 업데이트는 안 하던데.”

화환이 제 무릎 위로 나를 올리며 중얼거렸다. 그럼 이걸 쓰면 어뉴어 최초로 결혼을 할 수 있는 건가? 조용히 상자를 배낭 안으로 넣자 사탕 누나의 표정이 이상했다.

“왜? 결혼할 수 있게 해준대?”

“네. 수인왕국 왕성에서 결혼식 올리게 해 준대요.”

“그런데 수상하게 왜 숨기는 거야?”

사탕 누나의 의심 가득한 눈을 피하며 조금 더 편한 자세를 찾아 버둥거리자 나르가 쪼르르 날아 내 배 위로 올라왔다.

“겨미 겨론하나?”

“뮤첼 죽이고 나면?”

“나르는 다 좋다! 장꾸만 아니면 댄다, 겨미. 그 변태는 안 대.”

바로 옆에 있는 장꾸 형을 노려본 나르가 이를 내며 그르릉거렸다. 둘이 사이좋은 거 아니었나? 앞에선 저래도 또 뒤돌면 달라지는 나르였다. 지금도, 발바닥을 쥐곤 조물거리는 화환의 손을 툭툭 치며 장난을 거는 중이었다.

“겸이 형, 하늘 사람들이 찾는데요? 길드 채팅에….”

[길드]구름이 : 겸이 어디?

[길드]별이 : 겸이 성수 구하러 ㄱ?

[길드]하늘이 : 겸이 세이렌 ㄱ?

[길드]유우 : 몇 번 돌 건데요..?

[길드]별이 : 열 번 정도.. 한 번 갈 때마다 성수 모아둬야 되거든.

[길드]민초맛사탕 : 겸이 멀미나겠는데ㅋㅋㅋㅋㅋㅋㅋ

[길드]구름이 : 아니지! 세이렌 풍경 개예쁘다고, 겸이도 좋아할걸?

“열 번 돌면 몇 시에 끝나요?”

화환의 손 위로 턱을 얹고 웅얼거리자 화환이 곰곰이 생각하는 척을 하며 손가락을 꼬물거렸다. 얌전히 대답이나 하라는 의미로 얼굴에 힘을 줘 손을 누르자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아마, 두 시 전에는 끝나지.”

[길드]유우 : 한 번만 가도 돼요?

[길드]구름이 : ㄴㄴ 최소 3번!

[길드]별이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구름이가 겸이 너무 좋아한다

[길드]구름이 : 님들 못 들음? 겸이 아이템 획득률 높혀주는 칭호 있잖음.

[길드]구름이 : 열 번이 세번으로 끝날지도 모른다고.

“…어떻게 알았지?”

“내가 예기했어, 레드 던전 돌 때 템이 너무 잘 뜬다고 이상하게 생각하길래.”

열두 명 모두 가진 칭호지만 얘기해 주면 귀찮을 것 같아 그나마 미안한 마음이 있는 나만 알려 주었다고 했다. 이 기특한 양아치새끼….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화를 내야 할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기뻐하기로 마음을 먹은 뒤 내 주변을 도는 나르를 올려 보았다.

“나르, 세이렌 던전 갈 건데 같이 갈래?”

“겨미 혼자 가나?”

“구름이 누나들이랑….”

“나나나나, 나 가 볼래.”

수박 누나가 손을 들고 이야기했다. 믿음직한 수박 누나라 마음은 든든했는데, 화환은 안 가는 건가?

“그럼 우린 길드전 팀 나눌게. 잘 놀다 와, 구름이 헛소리하면 혼내 주고.”

“나르도 가겠다, 겨미! 그곳은 예쁘기로 소문난 곳이 아닌가!”

나르가 낑낑거리며 내 등을 안아 올려 수박 누나 가까이 갔다. 왠지 묘하게 애착 인형 취급을 당하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빠질 것 같았다.

“와, 씨… 수박 님이랑 파티를 다 해 보네.”

“그러게요, 겸이 덕분에 별이 님이랑 파티도 해 보네요….”

낯설게 정상인 코스프레를 하는 수박 누나를 올려보자 눈을 찡긋대곤 나르에게서 나를 받아들었다.

“저 걸을 수 있는데.”

들은 척도 않고 주변을 둘러보는 걸 보면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인 건가?

던전은 바다와 이어진 절벽 아래 동굴로 들어가야 했다. 나르는 수박 누나의 어깨를 붙들고 구름이를 노려보는 중이었는데, 절벽 아래로 날아서 이동한다는 말에 바로 구름이 쪽으로 날아갔다.

“뭐야, 삐진 거 풀렸어?”

“와이번을 부를 게 아닌가! 구르미는 나르를 태워 줄 거시고.”

“나르 화 풀린 거면 태워 주고. 아, 겸이도 탈래?”

물음에 수박 누나의 손에 힘이 조금 더 들어갔다. 하는 수 없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수박 누나의 손등을 토닥여 주자 곧바로 귓속말이 도착했다.

[귓속말]수박맛사탕 : 너무 유명인이라 쑥스러운 거야. 오해 ㄴㄴ해

[귓속말]유우 : 누나 낯 많이 가린다는 말이죠?

[귓속말]수박맛사탕 : 겸이 똑똑해졌네ㅎㅎ

수박 누나가 배낭 안에서 빗자루를 꺼내 그 위에 앉았다. 진짜 마녀인 건가? 마녀고 나발이고 떨어질까 불안해 옷자락만 힘주어 쥐곤 최대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누나 진짜 저 여기서 떨어지면 죽어요. 알죠? 놓치면 안 돼요.”

“설마, 겸이 나 못 믿어?”

“믿죠, 믿어요. 믿는데… 너무 높아서….”

꼬리까지 엉덩이 사이로 말린 채 대답하자 어깨에 걸치듯 안아 들곤 등을 토닥였다. 우유 먹은 아기를 소화시켜 주는 모양새였지만 일단 안정감은 더 있었다.

동굴 안으로 들어서 한참을 더 날아 도착한 던전 입구는 투명한 막에 막힌 바닷속 같았다. 멀리 헤엄치는 물고기들과 물결 따라 흔들리는 반짝이는 해초들이 보였는데, 구름이의 말대로 그림같이 예뻤다.

구름이 던전 입장을 한 건지 우리는 순식간에 그 안쪽으로 이동되었다. 숨은 쉴 수 있는 덕에 무섭진 않았지만, 부력 때문에 육지에서 움직이는 것에 배는 힘들었다. 어기적거리며 걷자 와이번을 타 기분이 좋아진 나르가 나를 따라 걷는 척하며 웃는 게 보였다.

“미친, 여기 채집도 가능해요?”

“네, 조개 잘 캐다 보면 진주도 나오니까 잘 찾아보세요.”

“누나, 채집은 어떻게 해요?”

“겸이 한 번도 안 해 봤지? 그럼 캐는 건 안 될 거니까 보이는 조개만 잡아 봐.”

바닥에 내려 주곤 바로 옆에 보이는 조개를 가리켰다. 따로 배워야 하는 건 없나 보네. 한달음에 달려 조개를 모랫바닥에서 긁어내자 첫 채집을 했다는 알림과 함께 명성이 2 올랐다.

생각보다 재미있는데…. 조개는 잡히자마자 배낭으로 이동되었는데 껍질이 오묘한 색으로 예쁘게 빛나고 있었다.

“껍질 치장 아이템 만들 수 있으니까 많이 잡아서 송금이 오빠한테 맡기자.”

“네, 이거 재미있네요.”

나르도 들은 건지 귀를 쫑긋거리며 멀리 있는 조개를 양손으로 잡아서 내게 가져다주었다. 진짜 이럴 때마다 느끼는 건데, 내가 애 하나는 잘 키운 것 같다.

막 다섯 개째 조개를 잡는데 저 멀리서 징그럽게 생긴 큰 물고기 떼가 우리를 향해 헤엄쳐 오고 있었다.

“여기 더밀 피쉬가 나오네.”

수박 누나가 내게 실드를 쳐 주곤 앞으로 다가섰고, 남은 하늘 길드원들도 익숙하게 진형을 잡아 공격을 막기 시작했다. 몬스터는 크기만 크지, 그렇게 강한 적은 아닌 것 같은데… 아니, 지금 모인 사람들이 강해서 그렇게 보이는 거겠지?

앞에선 전투로 바쁜 사람들에게 한 번씩 힐을 넣어 주고 있고 나는 주위를 둘러보는데, 나르의 뒤쪽에 내 몸만 한 조개 하나가 보였다. 저것도 잡을 수 있는 건가?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보다 나르의 바지를 물곤 그쪽을 향해 턱짓했다.

“겨미, 저거 엄청나게 크다!”

“저거 잡으러 가도 될까?”

“나르랑 가자! 나르가 겨미를 지킨다.”

몬스터는 전부 앞에만 몰려 있고, 나는 실드도 두른 상태였기에 빠르게 커다란 조개가 있는 곳으로 달렸다. 나르도 뒤쪽을 경계하며 내 옆에 딱 붙어 날아왔고, 곧이어 손에 닿은 조개가 배낭 안으로 들어왔는데… 조개가 있던 곳 아래에 좁은 길이 보였다.

딱 나와 나르가 겨우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좁은 길이 말이다.

“겸아, 거기서 뭐 해.”

“누나, 여기 좀 봐요.”

수가 줄어든 몬스터를 등진 채 내 쪽으로 달려온 수박 누나에게 땅 아래로 이어진 길을 보여 주자 놀란 눈으로 나와 바닥을 번갈아 보기 시작했다.

“어, 겨미, 여기 보물 던전의 입구가 아닌가?”

“보물 던전?”

구름이 뒤로 달려오며 소리쳤다. 이런 건 잘 듣지….

“그러타. 여긴 바다 던전이니 진주나 산호들이 있게따 겨미!”

“와… 누나, 7:3 어때요? 어차피 저나 나르 아니면 못 들어갈 크긴데….”

“겸이 자기야…. 5:5는?”

“입구도 제가 찾았는데요? 6:4.”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 구름이를 보곤 얼른 들어가자며 노래를 부르는 나르와 함께 아래로 내려갔다.

“여기는 몬스터 없어?”

“응. 없다! 하지만 보물이 있을지 없을지도 모른다.”

“뭐야, 보물 던전인데?”

“맞다, 보물 던전인데 운이 좋아야 보물이 있다!”

“그럼 그냥 보물 있을 수도 있는 던전이잖아….”

고개를 갸웃거리는 나르를 보다 미로 같은 길을 내려갔다. 왠지 속은 기분에 풍경이고 뭐고 눈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눈앞으로 펼쳐진 장관에 잠시 할 말을 읽었다.

바다 한가운데 둥근 보호막을 두른 용궁이 있었다. 남색 기와의 단청엔 다섯 가지의 색이 여러 무늬로 알록달록하게 자리 잡고 있었으며, 기와 마루에 조그마한 잡상과 용두가 존재감은 내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바다라 용궁이 있는 거지? 상상도 못 한 풍경에 주변을 둘러보자 바닷속임에도 불구하고 붉은 아치형 다리 아래엔 연못과 연꽃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혼자 보기 아까워 스크린 샷을 잔뜩 찍어 단체 채팅창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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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0////^$)궁.*]

큰형수님이 형들 몰래 용돈 줄 때의 이모티콘까지 복사해 용돈을 용궁으로 바꿔 보내니 더욱 그럴듯해 보였다. 곧이어 수많은 물음표와 어디냐며 위치를 묻는 사람들이 나왔지만, 수박 누나의 ‘세이렌 던전 숨은 보물 던전’이라는 곧 말에 잠잠해졌다.

[길드]민초맛사탕 : 이모티콘 무슨 일ㅋㅋㅋㅋ 그런데 용궁 **네.. 개예뻐.

[길드]간계밥 : 거기 무슨 템 줘?

[길드]구름이 : 용궁??

[길드]수박맛사탕 : 나르가 진주랑 산호 준다는데?

[길드]구름이 : 용????궁????

[길드]별이 : 보물 창고가 용궁이에요?

[길드]화환 : 겸이가 사진 보내줬는데, 단체 메신저 안 들어왔지?

[길드]민초맛사탕 : 초대해 줘?

[길드]구름이 : ㅇㅇ! 사진도 보내주..!

문을 열고 들어가자 묵직한 우드 향과 화려한 천장이 먼저 보였다. 걸으면 삐걱이는 소리가 날 것만 같은 나무 바닥은 예상과 다르게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고, 대신 한 줄기 빛이 내려오더니 웬 상자를 비추기 시작했다.

“이것뿐이야?”

“겨미, 실망하지 마라! 그걸 열면 많이 있을 거시다!”

기특한 나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곤 배낭 안으로 상자를 넣어두었다. 마음 같아선 조금 더 둘러보고 싶지만, 수박 누나의 언제 오냐는 물음이 다섯 번이 넘어갔기에 얼른 파티원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겸이 자기야. 뭐 나왔어?”

“상자 하나 나왔는데 이따 던전 돌고 나서 열어 봐요, 누나.”

“빨리 가자, 궁금해.”

마찬가지였기에 달려가듯 앞으로 나가는 구름이의 뒤를 따라 달렸다. 모래 바닥을 지나 커다란 돌들이 있는 길을 따라가는데, 돌 틈 사이로 검은 그림자가 보였다. 뭐지, 분명히 풍경은 눈이 시리게 예쁜데 왜 이렇게 무서운 거지? 앞으로 달리던 것을 멈추곤 수박 누나의 다리를 붙잡은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상어 굴이야, 걱정하지 마.”

달이 형이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중얼거렸지만, 걱정 안 할 수가 없다! 걔들은 사람을 먹는다고….

나르와 같이 웃던 수박 누나도 내 머리를 쓰다듬곤 메이스를 들었다. 구름이는 전투 중인 건지 쿠궁 하며 돌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고, 남은 사람들도 그쪽으로 향했다.

멀리서 고래만큼 커다란 상어들이 빠르게 움직이며 구름이의 공격을 피하는 게 보였다. 얘들도 무리로 있는 건가? 프로텍트부터 걸곤 공격 자세로 주변의 움직임을 읽자 우리를 둘러싸고 헤엄치는 게 한둘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가장 많은 몬스터가 몰린 곳으로 안티하울링과 프레즐을 사용했다. 반 넘게 깎이는 체력을 확인함과 동시에 돌 위로 올라 ‘아우우’ 하고 크게 울었다. 커다란 늑대 그림자 다섯 개가 나타났다.

각각의 몬스터들에게 달려든 그림자 덕분에 생각보다 쉬운 전투가 되었다. 미처 닿지 못한 몬스터에겐 할퀴기를 연달아 사용하면서 내가 있는 곳은 정리가 끝났다.

오늘치 할 일은 다 한 기분이었다. 뿌듯함에 발이 가벼워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는데 수박 누나가 놀란 눈으로 나를 내려 보고 있었다.

“우리 겸이 사냥도 해?”

“수박이, 겨미는 아우밖에 못해도 쎄져따!”

“응, 아우밖에 못해도 엄청 강하다….”

그놈의 아우… 내가 겨우 여섯을 잡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전부를 해치운 건지 검게 물든 상어들의 사체가 주변에 가득했다. 이게 단순히 레벨의 차이만은 아닌 것 같은데.

“세이렌은 언제 나와요?”

“다음에 나오지. 겸이 세이렌에 홀려서 여기 산다고 하면 어쩌지?”

“토끼 같은 나르가 있어서 그건… 좀. 세이렌도 잡아야 하는 거예요?”

“네, 피 빼 줄 테니까 막타만 겸이가 쳐 줄래?”

“맞아, 성수가 랜덤으로 나와서. 똥손인 우리보다 겸이가 잡아야 잘 나올 것 같은데.”

“풍경이 아니라 이게 목적이었죠?”

“들켰네.”

“아니야, 풍경 보여 주고 겸사겸사… 그래도 보물 던전도 찾았고, 성수는 겸이네도 조금 나눠 줄게.”

구름이를 노려보자 수박 누나가 어색하게 웃으며 귓속말을 보내 왔다.

[귓속말]수박맛사탕 : 나도 드랍율 높은 칭호 있다고 얘기해 줄까?

[귓속말]유우 : 아뇨, 누나 엄청 귀찮게 할걸요.. 저는 레드 던전 때문에 미안해하면서도 이정도인데ㅎㅎㅎ

수박 누나가 고개를 끄덕였고 커다란 돌산 너머로 가는 구름이네를 따라 걸었다. 멀리 보이는 조개 성이 보이기 시작하자 자그마한 노랫소리가 들려 왔다. 아마 목적지는 저기겠지?

“노랫소리 들리는데, 이거 계속 들어도 돼요?”

“응. 상관없어. 가까이 오게 만드는 거니까.”

신뢰가 없는 구름이의 말이라 믿어도 되나 하는 의심이 먼저 들었다.

가까워 보였는데 생각보다 한참을 더 걸어도 성은 가까워지지 않았다. 이상한 건 수박 누나도 마찬가지인지 배낭 안의 빗자루를 다시 한번 꺼내 위로 날아오르더니 무언가 확인한 후 내려왔다.

“여기 미론데? 우리 빙빙 돌고 있는 거 아니야?”

“아, 말씀드리는 거 깜빡했네… 이렇게 돌다 보면 한군데 얇아지는 벽이 있어요. 그거 부숴서 들어가거든요.”

이것이 네임드의 던전 공략법인가? 생각보다 주먹구구식인 것 같은데…. 나르도 한숨을 폭 내쉬곤 맴을 탐색하듯 커다란 마법진을 바닥에 그렸다.

“구르미들은 바보군. 겨미 나르를 따라와라!”

그렇지. 나르만 믿어야지! 기특한 나르가 우리가 걷던 곳과 반대쪽으로 가더니 구석을 향해 손가락질 했다.

자세히 보니 거긴 해초들로 숨겨진 틈 하나가 있었다. 덩치가 가장 큰 달이 형까지 무리 없이 들어올 수 있을 정도로 컸기에 당연히 구름이들 먼저 들여보내곤 안으로 들어갔다.

순식간에 조개성 앞에 도착했는데 거기는 사람 둘, 셋은 그냥 삼킬 수 있을 만큼 큰 조개들이 바닥에 깔려 있었다.

“미친, 이런 길이 있었다고?”

“여태 우리가 돈 뺑뺑이는 다 뭐였지?”

고개를 팩 돌린 나르의 어깨가 으쓱해졌고 그런 나르가 마냥 귀여워 코로 나르의 배를 마구 부벼 주었다.

“여기 10분만 사냥할 수 있는 데야. 그러니까 최대한 빠르게, 많이 잡아야 하는데… 우리가 최대한 몰긴 할 건데 그래도 겸이가 많이 움직일 수밖에 없어.”

딸피 만들고 부르면 오라는 말인 것 같은데, 좋게 돌려 말하느라 장황해진 단어에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그걸 확인란 하늘이 형이 가장 먼저 세이브존의 밖으로 발을 옮겼다.

하늘엔 10:00이라는 시간이 떴고, 그와 동시에 거대한 조개들의 입이 열리며 인어들이 튀어나왔다. 인어는 신비로웠다. 분홍, 연두, 하늘색의 반투명 머리카락이 물결에 날려 더 그렇게 보이는 것 같았다.

꼬리의 색은 빨, 노, 초, 파 네 가지였는데 그 색에 따라 들고 있는 무기도 달랐다. 빨강은 구슬, 노랑은 삼지창, 초록은 검을 들었고 파랑은 몸이 강해 보였다.

어느새 2분이 지난 시간에 잡은 인어는 열 손가락이 넘어갔고, 내 배낭엔 성수 스물한 개가 들어와 있었다. 누가 더 많이 주는 것 같은데…. 겸아 하고 부르는 소리에 그쪽으로 달려가며 우우하고 울자 바로 성수가 하나 더 생겼다. 이렇게 확인하는 수밖에 없나?

“누나, 형! 빨간 꼬리가 더 많이 줘요!”

빨간 꼬리의 인어를 막 잡고 배낭을 확인하며 소리치자 다들 잡던 것도 내팽개친 뒤 빨간 인어만을 뒤쫓았다. 파랑과 노랑은 거의 안 주다시피 했으며, 초록은 꼭 하나씩, 빨강은 두세 개씩 들어왔다. 덕분에 10분이 끝날 무렵 배낭 안에는 99개로 두 묶음이 생겨 있었다.

내가 가진 성수와 수박 누나의 성수를 합하자 보통 다섯 번 돌았을 때의 양보다 많다며 다들 놀란 눈으로 우리를 돌아보았다.

“역시, 겸이는 하늘에 오는 게….”

“채하현이 우리 애 계속 꼬시면 앞으로 안 빌려줄 거라던데요?”

“아….”

“와… 개치사해.”

이런 말 하나에도 꼬리가 살랑거렸다. 맞지, 네 집 애지 내가. 열 번을 돈다는 말이 거짓이었다는 듯 상자나 까자며 성으로 가서 소환해 달라는 구름이의 말에 하우징으로 이동했다.

파티 소환을 하곤 이젠 아지트가 된 가든 하우스로 가자 아직 사람들은 거기 모여 있었다. 당연하게 화환의 무릎 위로 뛰어올라 앞발로 다리를 내리쳐 앉기 좋게 만든 후 주저앉았다.

“겸이 진짜, 우리가 데려가면….”

“자기야, 보물 던전 재미있었어?”

구름이의 말을 끊곤 내 발을 손으로 쥐는 화환의 손을 두어 번 토닥여 주었다. 그러곤 배낭 안에 있던 보물 상자와 성수를 모조리 꺼내 바닥에 늘어놓았다.

이렇게 보니 많긴 하네. 나르가 그 위를 빙글빙글 돌다 내 앞으로 조르르 날아와 나와 눈을 맞추며 눈을 반짝였다.

“겨미! 나르도 같이 열고 싶다.”

“나르가 열어 줘. 같이 가지고 온 거잖아.”

상자와 나를 번갈아 보던 나르가 또 볼에 쪽 소리 나게 뽀뽀한 후 상자 바로 앞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나르의 손이 자물쇠에 닿자 툭 하며 저절로 풀리더니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아, 그러고 보니 조개도 많이 주웠는데…. 배낭을 확인하는데 펑 하며 터지는 소리와 함께 연기가 피어올랐다.

“뭐, 뭐야? 무슨 일인데?”

“겨미… 꽝이다. 빈 상자를 가지고 와써….”

“보물 상자가 빈 상자일 수도 있어?”

텅 빈 상자를 보여주는 나르의 얼굴을 순식간에 울상으로 변했다. 그래도 풍경 사진은 얻었으니 괜찮긴 한데… 일단 나르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조개를 전부 꺼냈다.

손바닥만 한 조개 다섯 개와 큰 조개를 바닥에 내려 두었더니 나르가 가장 큰 조개를 손으로 슥슥 쓰다듬었다.

“이건 어떻게 해요?”

“색 예쁜 거로 잘 주웠네. 그 큰 건 뭐야?”

“이거 보물 던전 입구에 있던 거요. 까 볼 수 있어요?”

보미 누나가 조그마한 단검을 꺼내며 앞으로 다가왔다. 조개 까기 스킬이라도 있는 건가? 멋있다며 반짝이는 눈으로 보자 내 발을 쥔 화환이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배를 안아 올렸다.

[귓속말]유우 : 길마님, 안 보이잖아여

[귓속말]화환 : 자기야 나도 봐 줘야지. 서운해.

고개를 위로 올려 얼굴을 마주 보자 기다렸다는 듯 눈이 마주쳤다. 이 요망한 놈이…. 화환의 손이 내 턱을 조물거리다 닦아 주듯 아프게 문지르기 시작했다. 뭐, 왜, 뭐 미친놈아.

찌그덕하는 소리와 함께 다른 사람들의 감탄사가 들려왔다. 아직 내 얼굴을 쥐고 있던 화환도 힐끔거리더니 눈이 조금 커지는 것 같았다. 나도 궁금한데…. 손을 털어내곤 조개가 있는 아래를 바라보자 거긴 반투명의 구에 작은 인어 하나가 들어 있었다.

「인어의 알」

-세이렌 던전의 숨은 알. 인어가 태어납니다.

“이거 펫이에요?”

“그런 것 같은데?”

“나르 동생 생기겠다.”

“좋겠네.”

다들 나르를 보며 한마디씩 하는데 나르의 얼굴이 굳어졌다. 눈만 끔뻑이며 알과 나를 번갈아 보더니 이내 울상을 짓곤 화환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뭐야, 왜 그래… 나르?”

“나르는 동생 싫다! 외동이 좋은 거라고 했단 말이다!”

권경배의 어깨가 움칠 떨렸다. 저 입이 방정인 새끼…. 화환의 다리 위에 앉아 있던 탓에 등에 나르의 발이 부딪혔다. 싫고, 슬픈 건 알겠는데 나는 무슨 죄야.

“아파, 내려와서 나 좀 봐. 너 왜 거기 붙어서 그래?”

“길마가 가장 세지 않은가! 그럼 나르 편을 들어 주어야지.”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으로 내려가려는데 화환이 막으며 나르와 마주 보게 안아 주었다. 이건 또 무슨 해괴한 짓이지? 앞발을 들어 일부러 나르의 어깨와 화환의 가슴을 퍽퍽 쳐대자 나르가 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저 펫이 생겼다고 이제 겨미가 나르를 때리는 거신가? 너므하다.”

화환의 어깨에 매달려 잉잉하고 우는 시늉을 해댔다. 앞으로 둘이 못 놀게 해야 하는 건가? 여우짓까지 배운 나르의 행동에 몸에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와, 이거 뭐지? 젊은 아빠와 아들 둘 같지 않아요?”

푸름이 중얼거리자 수박 누나와 사탕 누나가 손뼉까지 치며 깔깔거리기 시작했다. 왜 항상 부끄러움은 내 몫이지?

“그래서, 어떻게? 저 알 다시 바다에 넣어?”

“그래라! 그래야 한다!”

“네가 싫으니까?”

“너 아니고! 나르다!!”

밥 먹은 힘이 다 목소리로 가는 건가? 커다란 목소리와 속상한 듯 얼굴을 찌푸린 나르의 얼굴엔 이젠 제법 눈물까지 고여 있어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굴 닮아서 이렇게 고집이 센 거야.

“그럼, 제가 사도 돼요?”

“푸름이가?”

“네, 저도 나르 보고 펫 기르고 싶었거든요….”

“너 개강하면 바쁠 거 아니야? 잘 오지도 못할 거면서.”

사탕 누나의 말에 푸름이 기죽은 얼굴을 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아쉬움 가득한 눈으로 알을 내려다보는데 사탕 누나가 한숨을 푹 쉬곤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가 살게, 겸아. 그래도 돼?”

나르가 행패만 부리지 않으면 되는데 싶어 나르만 바라보자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이며 화환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아, 그런데 거기 구름이 누나 던전이라. 제가 막 팔아도 돼요?”

“응, 겸이가 채집한 거잖아.”

이렇게 호락호락한 구름이가 아닐 텐데…. 미심쩍은 얼굴로 그쪽을 바라보자 구름이 장난스럽게 웃기 시작했다.

“겸이 자기야, 대신 나도 안아 줘.”

“던전 열어 주시면 다시 넣고 올게요.”

“철벽 봐, 그런데 달이 오빠는 이제 포기한 거야? 왜 거기 붙어 있어?”

이를 한 번 내보이곤 바닥으로 내려왔다. 그나저나 이 알은 얼마에 팔아야 하는 거지? 사탕 누나에겐 그냥 줘도 될 텐데. 바닥에 놓인 조개껍데기를 이로 물어 질질 끌며 사탕 누나 앞으로 다가갔다.

“누나, 여기요.”

“내가 주인이지만 푸름이가 잘 키워 주겠지. 얼마 줄까?”

“저도 뭘 파는 건 처음이라….”

“구름아, 이거 시세 얼마야?”

“글쎄, 그거 알 구하기 어렵긴 한데, 부화하고 등급이 랜덤이라 잘 안 팔린다고 알고 있어.”

“그럼 나중에 나르 옷 한 벌 사 주세요. 쟤 삐져서 언제 풀릴지 모르지만….”

“엄청 높은 등급 나와서 나중에 후회해도 몰라.”

“네….”

권경배 다리를 걷어찬 뒤 레드 던전 딱 세 번만 돌자는 달이 형에 거의 끌려가듯 던전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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