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1. 길드마스터에게 스며드는 방법 (5/11)

@브로콜리

1. 길드마스터에게 스며드는 방법

은은한 머스크향이 풍기는 미친놈은 가까이서 보는 얼굴이 더 예뻤다. 자그마한 얼굴은 여백 없이 주차한 이목구비가 친절하게도 어우러져 있었는데, 저런 얼굴에 몸까지 좋으면… 반칙 아닌가?

미친놈은 이제 아예 내 쪽으로 몸을 틀어 앉으며 신기한 걸 보듯 훑어봤다.

“뭘 봐요.”

“너무 열심히 훑어보기에, 네 마음에 든 건가 싶어서.”

“지금 길마님이 저를 샅샅이 훑어보시는 중인데…?”

“아직 내 몸이 목적이 아닌가….”

권경배가 물을 마시다 반쯤 뱉어내며 콜록거렸다. 뿐만 아니라 가까이 있는 사람들까지 반은 놀란 얼굴, 반은 웃음이 터졌다. 이 미친놈은 왜 여기서까지 한결같지?

“아쉽게도 저보다 큰 사람은… 좀 부담스러워서.”

“채하현 까였네.”

“얼굴로 열 번만 보여주면 넘어올 것 같아서 괜찮아.”

먹고 닥치라는 뜻으로 미친놈의 앞에 고기를 밀어주었더니 혼자 픽픽 웃어대던 채하현이 다시 내 앞쪽으로 접시를 밀어주었다.

“우리 겸이가 많이 먹고 얼른 커야지.”

맞는 말이었다. 화환은 이미 너무 커 있었고, 나는 아직 성장기인 23살이니까. 근데, 지금 누구 때문에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는데.

걱정과 달리 고기가 너무 맛있어 든든하게 식사도 마쳤고, 간단히 반주만 하자며 테이블 위에 올라온 술을 홀짝이고 있으니 사탕 누나가 화환을 보며 입을 열었다.

“다음 주에 길드전도 할 거지?”

“응, 토요일 저녁 7시?”

“맞아, 우리 사람 너무 적은데 더 안 구해도 되나?”

왜 하필 여기 앉아서 양옆에서 이야기하는 걸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네. 자리를 바꿔줘야 하나?

“봄, 겨울이 형도 이제 시간 난대. 두 사람 오면 얼추 되지 않나?”

“저기, 굳이 저를 사이에 두고 말씀하셔야 하세요?”

“응, 겸이는 술도 잘 먹네.”

“겸아, 이쪽으로 당겨 앉아. 미친놈한테 정신 나간 거 옮을라.”

얼른 엉덩이를 꼬물거려 사탕 누나 옆으로 가까이 가 앉았다.

깔깔거리며 놀리는 사탕 누나와 그런 누나를 노려보는 화환을 보니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아마 오랜 친구인 것 같은데… 사탕 누나는 어쩌다 저 또라이랑 친해져서.

“겸이는 데려가?”

“겸이 가면 녹을 건데, 쪼렙이라.”

“저 곧 170 찍을 건데요?”

“봐, 아직 천지 분간도 못 하잖아.”

정말 싫은 새끼. 말을 해도… 깔깔거리던 권경배가 안 그런 척 입을 가리곤 허공을 쳐다봤다. 겜창들 사이에서 일반인으로 섞여 있으려니 억울해서 안 되겠네.

“아, 나르. 나르는 엄청 도움 될 것 같은데. 그럼 나르도 안 데려가?”

“어, 맞다. 겸이 형 데리고 가면 나르가 겸이 형 지키느라 다 쓸어줄 것 같은데.”

여기저기서 우리 나르의 칭찬이 들려왔지만 당연하게 나보다 도움이 될 거라는 말이 나왔다.

방금, 어디 뼈가 부러진 것 같은데…. 119에 신고하면 마음의 뼈도 붙여주는 건가. 유난히 나르가 보고 싶은 밤이다.

“확실히 나르가 겸이보다….”

“…아니까 그만 해요.”

“어, 겸이 형 곧 4차 하지 않아요? 그럼 좀 안심하고 같이 갈 수 있을 건데?”

“아마 시간 좀 더 걸릴 거야. 그 나태 같은 던전 도는 거 아니면 각성 전이라 그런지 경험치가 잘 안 오르더라.”

“맞아요, 이상하게 그러더라고요. 그나저나 다음 죄인은 음욕이라는데. 그거 가기 전엔 때도 밀고 깨끗하게 해서 접속해야겠다.”

푸름이 뭘 기대한 건지 헛소리를 해대는데, 수박 누나가 나도 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왜요?”

“마음이 불순해서 저러지, 겸이 고기 더 먹어.”

“배불러요, 누나. 그러고 보니 이제 무기 다 얻으신 거예요?”

칠죄종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도 있는 탓에 사탕 누나 가까이 가서 조용히 말하자 누나가 고개를 저었다.

“도시락이랑 나 남았어.”

사탕 누나도 따라 목소리를 낮춰 대답했다. 분명히 처음 구할 때는 빠르게 찾았던 것 같은데. 혹시 무슨 문제가 있는 건가….

갖은 의문이 들 때쯤 반대쪽에서 낯선 남자의 속삭임이 귀에 닿았다.

“자기야, 나한테도 속삭여 줘.”

“꺼져요.”

최선을 다해 상냥하게 대꾸한 건데 역시 미친놈이라 그런지 어깨까지 들썩이며 웃기 시작했다.

“길마님, 나르가 찾아준 무기는 어때요? 쓸 만해요?”

“아직 못 써. 착용하려고 하면 때를 기다리라는 알림만 떠서. 계란이도 그렇지?”

“네, 옵션도 안 보이던데요? 그래서 강화석만 캐놓는 중인데.”

“칠죄종 마지막 보스에서 쓸 수 있으려나.”

“다음 보스 때는 나르한테 캐물어서 준비 좀 잘해서 가야겠다.”

“맞아요, 한 번에 두 명의 왕이 나올 수도 있다고 했으니까.”

“그런데 겸이 그때 눈 안 보였을 때, 탐욕한테 무슨 말 들은 거야?”

안 그래도 조용히 이야기 중이던 테이블 위로 적막이 찾아 왔다.

얘기해도… 괜찮은 건가? 괜히 내가 한 말에 다들 나르를 못 믿게 되는 건 아닌지…. 지금 받는 예쁨이 사라져 슬퍼할 나르가 눈앞에 아른거려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할 말을 찾지 못해 그저 어색하게 웃자 눈치 빠른 겜창들이 저마다 다른 이야기로 분위기를 풀기 시작했다.

“아, 유우겸. 너 무기는 없어?”

“나는 레벨이나 올리라는데?”

배은망덕한 짐승의 말을 그대로 따라 해 주자 그건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권경배가 보였다. 인정 말고 화를 내 달라는 거였는데….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는 옛말을 되뇌다 보니 어느새 1차가 끝났다.

2차는 집이 멀다는 코코와 도시락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참석했다.

1차 장소인 고깃집 바로 옆 골목으로 들어간 사탕 누나가 허름한 외관의 술집으로 익숙하다는 듯 들어갔다. 여기는 또 어떻게 찾은 건지 하는 의문이 들 만큼 구석진 곳에 있었다.

“누나 여기 자주 와 본 거예요?”

“응, 학교 다닐 때 여기서 살았지. 사장님, 방으로 가면 되죠?”

사탕 누나의 물음에 주방에 있던 사장님이 나와 사강이 왔냐며 반가워하더니 마른안주를 잔뜩 챙겨 앞장서 걸었다.

사탕 누나의 뒤만 졸졸 따라다니자 화환이 내 어깨 위로 팔을 올리며 뒤로 당겼다.

“겨미, 그렇게 예쁜 언니만 따라가면 나 서운해.”

“왜 또 미친 소리지.”

예쁜 언니를 찾던 미친놈은 내 뒤에서 떨어질 생각이 없는 건지 연신 훌쩍거리며 슬픈 척을 하기 시작했고, 사탕 누나는 못 볼 걸 봤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다 서둘러 방으로 들어갔다.

“자기야, 천천히 좀 가. 혹시 넘어지는 척하면서 내 품으로 떨어질 계획이야? 그런 거면 미리 받을 준비하고.”

“궁금해서 그러는데, 제가 언제부터 선생님의 자기가 된 거예요, 도대체…?”

“처음 봤을 때부터? 선생님은 뭐야, 또. 우리 자기 공손한 것 좀 봐.”

“네. 제가 유교 사상에 많이 찌들어서…. 손빨래하러 9시까지 집에 가야 하는데 이만 가 봐도 될까요?”

“나도 그거 좋아하는데, 같이 가도 될까?”

“될 것 같으세요?”

한참을 왕왕대다 결국 얌전히 화환의 팔에 붙잡혀 안의 제일 구석진 자리에 앉게 됐다.

벽과 붙어 있는 오른쪽엔 미친놈이, 왼쪽엔 기회만 노리고 있던 장꾸 형이, 맞은편엔 장꾸 형을 수줍게 바라보는 지우와 햇살이 나란히 앉게 되었다.

왜 하필 셋이 친해진 거지? 지우는 동족 혐오 따윈 없는 건가?

“와, 여기 겸이 팬 미팅이네.”

“겸이 형 사인하게 종이 좀 얻어 올까요?”

“사인해 주면 집에 가도 되나요?”

“겨마, 형아 두고 어딜 가려고 그래.”

지우 뒤를 지나 들어가던 수박 누나와 푸름이 놀리듯 한소리를 하며 앞을 지나쳤다. 미친놈의 재롱과, 눈을 반짝이는 장꾸 형 때문에 오늘의 야외 활동을 슬슬 마무리하고 싶은데….

얼른 집에 가고 싶은 마음에 권경배를 쳐다보자 무슨 심각한 얘기를 하는지 송금이 형과 둘이 얼굴을 굳히며 속닥이고 있는 게 보였다.

……지금 자리 비우는 건 포기해야겠다.

어느새 테이블 위의 술병들이 거의 빈 병으로 바뀌었고, 만취된 지우를 햇살이 데리고 들어갔다. 자연스럽게 송금이 형과 옥장판 님이 우리 앞자리를 채워주었다.

“겸이 매운 거 못 먹어?”

“네. 매운맛은 통각이래요. 셀프 고문은 취향이 아니라.”

“아직 아기구나.”

송금 형에 물음에 답을 한 건데 대답은 왜 미친놈이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받아칠 말이 있었기에 입꼬리를 씩 올리곤 화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길마님은… 술도 못 먹잖아요. 어린이네, 어린이.”

“겨미, 징짜 술 잘 마신다아-.”

벌써 혀가 꼬인 장꾸 형이 흐느적거리며 얘기했다. 유전이지. 형들도 모두 술이 센 탓에 늘 마지막까지 남는다는 말을 얼핏 들은 기억이 났다.

장꾸 형을 옥장판 님이 재워주겠다며 데리고 스르륵 사라졌다. 화환은 혼자 뭘 그렇게 생각하는지 내내 쫑알거리던 입을 다물곤 멍하니 먼 산을 보고 있었다.

왠지 불안한데… 내가 입을 다문 건 헛소리하기 위한 추진력을 얻기 위해서다, 라며 또 미친 소리를 줄곧 내뱉을 것 같아 긴장하고 있는데, 갑자기 자기 앞의 잔에 술을 잔뜩 따르기 시작했다.

“뭐야, 너 자살해? 알쓰 새끼가 무슨 술을 그렇게 따라?”

사탕 누나의 말에도 잔을 들어 한 모금 홀짝이더니 얼굴을 찌푸렸다. 어우, 뭘 먹으면 이렇게 예쁘게 자라는 거지?

“겸이가 나 어린애래. 그래서 먹어 보려고, 놀렸으니 책임도 지겠지.”

말을 끝으로 겨우 한 모금 마셨던 술을 들곤 고개까지 뒤로 젖히며 마시는 게 보였다. 책임이라면… 결혼까지 해야 하는 건가? 얼굴만 보면 누가 봐도 새색시긴 한데.

화환은 술잔을 내려놓기 무섭게 내 어깨 위로 스르륵 무너져 내렸다. 당황해서 털어낼까 싶었는데 불그스름하게 열 오른 얼굴이 눈에 들어와 차마 모질게 털어낼 수가 없었다.

“누나, 길마님 취한 거예요, 저 추행하는 거예요?”

“취한 거야. 진짜 술 못 먹어.”

“뭔 자신감으로 이렇게 훅 마신대요?”

“겸이 믿고 저러지, 뭐.”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왔다. 일단 목에 담이라고 걸릴까 장꾸 형의 자리로 옮겨 옆으로 뉘어주자 미친놈이 당연하다는 듯 내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뭐 이런 뻔뻔스러운 게 다 있지? 깨우려다 그냥 두곤 대충 들고 다니던 가디건이나 덮어주자 사탕 누나가 이상한 얼굴로 화환을 힐끔 보곤 눈을 돌렸다.

“겨미, 200 찍고 바로 음욕 갈 거야?”

“시간 되면요? 왜, 누나 바쁜 일 있어요?”

“아니, 마음의 준비가 필요해서. 나태나, 탐욕도 시간만 보냈지 내가 뭐 한 거 없이 다른 사람들이 고생했잖아.”

“고생은 누나도 했죠…. 내가 놀았지.”

씩 웃던 사탕 누나가 고개를 저으며 술잔을 들었다. 짠하고 잔을 부딪치고 입가에 가져다 대는데 꽉 차 있던 잔 탓에 화환 얼굴로 몇 방울 떨어져 내렸다.

서둘러 잔을 비우고 급한 대로 가디건으로 얼굴을 닦아주는데…. 다행히 깨지는 않은 것 같았다.

“겸이 아니었음 발도 못 붙였을 던전인데 뭐. 탱자탱자 놀아도 아무도 욕 안 해 걱정하지 마.”

“그래도… 저 진짜 열심히 한 건 경험치 던전밖에 없는 거 알아요? 그래서 베르 님이 민폐라고 할 때 아무 말도 못 했는데…….”

“아, 걔 길드 나간다던데.”

“저 때문에요?”

사탕 누나가 또 가득 술잔을 가득 채워주었다. 사랑하는 만큼 준다는 건지 아니면 먹고 죽으라는 건지 모르겠지만 다시 홀짝이다 당연하게 아래로 몇 방울 흘렸다.

술이 예쁘장한 얼굴 위로 뚝뚝 떨어져 내린 탓에 대충 옷을 들어 닦아주곤 사탕 누나를 보자 후련하게 웃는 얼굴이 보였다.

권경배가 오늘 신났던 이유도 이것 때문이었나?

“아니, 전부터 다른 길드랑 콘택 있었대. 그거 이번에 간대서 내일 또 면담해야지. 겸이 얘기 밖에서 흘리지 말라고.”

“얘기해도, 뭐. 수인으로 다니면 되죠.”

“늑대 수인이 너밖에 없는데 당연히 티 나잖아.”

“그럼… 뭐 경험치 던전만 돌겠죠.”

“머리 아프다 진짜. 그래도 던전 내용은 몰라서 다행이지, 뭐.”

고개를 끄덕이자 사탕 누나도 이제 가보겠다, 막잔이라며 가득 술을 부어주었다. 이러면 흘릴 텐데…. 하는 수 없이 테이블 위에 있던 티슈 한 장을 빼 화환의 얼굴 위로 살짝 덮어주었다.

단번에 잔을 비우자 사탕 누나가 자리에서 일어났고, 인사를 하며 나가는 것과 동시에 화환의 얼굴 위에 있던 휴지가 팔랑였다.

“안 잤어요?”

“깬 건데…. 자기야, 혹시 나 죽이고 싶은 거야?”

“그건 또 뭔 소리야. 언제 깬 건데요?”

얼굴 위를 가린 티슈를 슬쩍 들어 옆으로 치우며 묻자 화환이 눈도 뜨지 않은 채 입만 오물거렸다. 눈을 뜨고 입을 다문다면 더 봐줄 만할 텐데.

“겸이가 얼굴에 술 뿌릴 때부터.”

“누가 뿌렸다고… 흘린 거지.”

“그거나, 그거나.”

이 미친놈은 피부로도 흡수되는 건지 얼굴을 두어 번 비비적거리며 말꼬리를 잔뜩 늘여 중얼거리다 다시 스르륵 잠이 들었다.

“유우겸, 우리도 가자. 다들 일어난대.”

귀신처럼 다가온 권경배의 말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송금이 형과 수박 누나 뽀또 님까지 자리를 털며 일어나는 게 보였다.

…이 짐 덩어리는 어떻게 하지? 권경배를 한 번 올려 보다 화환의 어깨를 흔들었다.

“저기요, 선생님. 일어나세요.”

“웬일로 환이 형이 술을 먹었대?”

“원래 안 먹어?”

“응, 유명한 알쓰라던데?”

“내가 놀렸더니 마셨는데… 설마 한 잔 먹고 죽은 거 아니야?”

“… 재수없는 말 그만해. 일단 택시 부른다. 네가 좀 재워줘.”

괜히 내 탓 같아 고개를 끄덕이곤 화환을 일으켜 권경배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데리고 택시를 기다렸다.

조심히 들어가라는 길드원들에게 인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택시가 빵- 하며 다가왔고, 겨우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형 여기서 자면 넌 어디서 자려고?”

“소파. 그래도 손님이잖아.”

“내가 손님방 만들어 두랬지?”

“잔소리할 거면 올라가라.”

“야, 저번에 우혁이 형 올 때 사온 양주 있냐? 그거 오늘 까자.”

이미 얼큰하게 마신 권경배의 붉은 목덜미를 힐끔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때 같았으면 그냥 보냈겠지만, 아까 송금이 형과 심각한 얘기를 한 게 떠올라서 오늘은 예외로 두기로 했다.

냉장고 안에 있던 과일을 감자 칼로 대충 깎아 테이블 위에 올려둔 뒤 얼음과 잔을 식탁 위로 올렸다.

권경배는 자기 집인 것처럼 자연스레 팬트리를 뒤적여 과자를 찾아 들고 어울리지 않게 심각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분위기 잡지 말고 말해. 무슨 일이야?”

“사탕 누나가 찾던 사람이 있거든 몇 년 전에 자기 도와준 사람.”

“응, 알아.”

“그 사람을 베르가 알고 있대. 그래서 싫어도 달고 다닌 거였는데, 새벽에 길탈 할 거라고 누군지 알려주더라.”

절그럭 소리가 나게 잔을 휘휘 돌리다 권경배와 눈을 맞췄다.

“새 인생 산다고 말해도 아는 척 할지 안 할지 모른다더니 그게 진짜였어.”

“새 인생이라니?”

“그 사람이 예전 캐릭터가 컨 좋은 검사였거든, 그런데 아예 다른 직업으로 갈아탔어.”

“음, 그게 송금이 형이라고?”

“어. 게다가 송금이 형은 누나가 예전에 자기랑 알고 지낸 사람이란 거 알고 있고.”

“싫은 기억일 테니까 송금이 형도 모르는 척해주는 거 아니야? 엄청 욕먹었다며, 누나.”

“너 근데 그건 어떻게 아냐?”

“누나가 알려줬어. 탐욕 다음 던전 돌 때.”

“아, 업혀서?”

이 새끼가…. 내 얼굴을 본 권경배가 놀리듯 기분 나쁜 웃음을 지었다. 여기서 한 대 치면 음주 상태로 심신 미약이 적용되는 걸까? 뭐로 때려야 잘 때렸다고 소문이 나지?

“아무튼, 형은 추억은 추억이라고 지금처럼 이렇게 지내는 게 좋다고 하는데 누나 아직도 틈만 나면 공카 순회에 그때 송금이 형 아이디로 귓속말까지 하는데…. 알려줘야 하나?”

“두 사람 일인데 우리가 끼여서 말 얹는 건 아닌 것 같아.”

권경배는 덩치와 다르게 마음이 여렸다. 송금이 형보단 사탕 누나를 더 가까이서 지켜본 탓에 누나 입장에서 더 생각하게 되는 듯했다.

혹시나 실수하지 않도록 두어 번 말조심해야 하는 걸 강조한 뒤, 술병이 바닥을 보일 때까지 어울리다 겨우 올려 보냈다.

시간은 어느새 새벽 세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자리를 대충 정리한 나는 가볍게 씻고 나와 얇은 차렵이불과 베개를 꺼내 거실로 나왔다. 화환이… 입을 만한 옷이 있으려나?

드레스 룸을 활짝 열곤 옷을 뒤적이는데 다행히 포장도 뜯지 않는 속옷과 새 여름용 트레이닝복 바지와 헐렁한 티셔츠가 있었다.

내일 눈 뜨면 입든지 말든지……. 곱게 개어 거실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서랍을 뒤져 새 칫솔을 얹어둔 뒤 마음 편히 소파 위로 기어가 눈을 감았다.

“…기야, 자기야. 일어나봐.”

볼을 꾹꾹 눌러대는 손길에 부스스 눈이 떠졌다. 아직 잠이 다 깨지 않아 멍하게 눈만 굴려보니, 바로 앞에 말끔한 얼굴을 들이대고 있는 화환이 보였다.

아, 어제 데려왔지.

소파에서 잔 탓에 온몸이 뻑적지근했다.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꺾자 목에서 뚜둑 하고 소리가 들렸다. 으, 시원해.

“지금 몇 시예요?”

“열한 시 반.”

바스락거리는 이불의 감촉이 좋아 발을 꼬물거리다 화환을 내려 보자 똑똑하게 테이블 위에 놓아뒀던 옷을 입고 있었다. 씻고 나온 건지 머리카락이 젖어 있었는데, 이 새끼 패스트 샴푸 쓴 건가? 익숙한 향에 웃음이 터졌다.

“언제 일어났어요?”

“나 아홉 시쯤? 점검 3시에 끝난다니까 그전에 속 좀 풀자.”

“세수만 하고. 길마님, 혹시 해장을 느끼한 걸로 해요?”

“아니. 국물. 시원한 거.”

겨우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가며 묻자 채하현이 소파 위 널브러진 이불 위에 고개를 박곤 웅얼거렸다. 겨우 한 잔 먹었으니 숙취는 아니겠고, 피곤한 건가?

얼른 밥을 먹여 집으로 보내야겠다 싶어 빠르게 씻은 뒤 밖으로 나왔다. 채하현은 여전히 이불에 엎드려 핸드폰으로 배달 어플을 훑어보고 있었다.

그저께 집안일을 봐주시는 이모님께 다음날 술자리에 가는 걸 알려 드렸으니까….

주방으로 가 냉장고를 열자 바로 앞에 보이는 큰 통에 가득 든 국이 보였다. 콩나물을 잔뜩 넣은 오징어 뭇국인데, 술 먹은 다음 날은 꼭 이 국을 찾는 나를 알고 준비해 주신 것이다.

다행히 권경배와 먹으라고 준비해 주신 건지 양도 많았다.

“길마님 해산물 먹어요?”

채하현이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켜 등 뒤로 다가왔다. 한 번 보여준 뒤 냉장고 안에서 국을 꺼내 냄비로 옮겨 담는 걸 보곤 대뜸 헛소리를 했다.

“자기야, 요리도 할 줄 알아?”

“아니요, 제가 한 거겠어요?”

“겸이한테 장가갈 뻔했네. 나 이 국 좋아해.”

“저도요. 길마님, 냉동실에 얼린 밥 좀 꺼내 주세요.”

화환이 냉동고 문을 열더니 이상한 얼굴로 웃기 시작했다. 이젠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저렇게 웃는 건 곳 할 미친 소리의 빌드 업이란걸.

“자기야, 이렇게 있으니까 우리 신혼부부 같다.”

“술이 덜 깼나?”

“그런데 아직 길마님이야? 우리 밤도 같이 보낸 사인데.”

“혹시 쫓겨나고 싶다는 걸 돌려 말하는 중이세요?”

“아니, 설렌단 말이었지.”

“밥 먹고 싶으면 얌전히 앉아나 있어요. 헛소리 말고.”

“너무해, 진심인데….”

눈꼬리를 잔뜩 내려 억울한 듯 말하더니 바로 자리에 앉았다. 밥은 먹고 싶었구나…. 원래 스물다섯이 넘으면 저렇게 뻔뻔해지는 걸까?

밥을 데우곤 수저와 함께 자리에 놔 주니 입을 삐죽이던 화환이 싱긋 웃으며 얌전히 수저를 들었다.

“자기야, 이렇게 그냥 가도 돼? 너무 빌붙기만 한 것 같은데.”

“뇌물이에요. 다음 던전도 잘 부탁한다는.”

“뇌물도 귀엽게 주네. 옷은 나중에 돌려주러 올게.”

“네, 업뎃 끝나면 바로 접속할 거죠?”

고개를 끄덕이곤 화환이 밖으로 나갔다. 들어보니 집이 근처라고 걸어갈 거라던데 후끈한 날씨에 가다가 열사병 걸려서 던전 같이 못 돌아주는 건 아니겠지?

잠시 눈을 붙였다 뜨니 시간이 벌써 네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업뎃 끝난 지가 언제인데 왜 안 오냐는 권경배의 연락을 받고 부랴부랴 접속하니 사람들이 전부 접속해 있었다.

인사를 하기 위해 채팅창을 열었을 때, 제일 먼저 반긴 말은 베르의 길드 탈퇴 알림이었다.

[길드원 베르 님이 길드를 탈퇴하셨습니다.]

[길드]민초맛사탕 : *댔네.. 나가기 전에 얘기 좀 하자니까 다 차단하고 나감

[길드]유우 : 안녕하세요.

[길드]간계밥 : 벌써 다 퍼졌대요. 겸이 늑대로 다니는 거. 나가기 전부터 떠벌리고 다녔다는데?

[길드]민초맛사탕 : 겸이 왔네.

[길드]장꾸 : 겨마! 잘 들어간 거지? 형아 안 보고 싶었어?

[길드]민초맛사탕 : 어디로 갔대?

[길드]화환 : 악동

[길드]민초맛사탕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악동 빈털 아니여? 그때 털고 왔다며.

[길드]화환 : 그래서 머릿수로 메우려는지 사람 모으더라.

길드 채팅을 올려 보다 나르를 깨웠다. 뿅 하는 귀여운 소리와 동시에 나타난 나르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목을 안아왔다.

“겨미! 잘 잤나?”

“응, 나르도 잘 잤어?”

“그러타! 오늘은 누구와 다니면 되는가?”

“오늘은 나랑. 업뎃 끝났으니까 다른 사람들은 바쁠 거야.”

“겨미랑 있는 게 제일 조타! 얼른 레벨을 올리러 가자, 겨미.”

퀘스트는 마족의 평원에서 시작되었다. 길을 잃은 휴델을 호위하며 민가로 데려가기. 이런 호위 퀘스트는 처음이라 긴장했지만, 몬스터가 한 마리씩 나와 난이도는 그렇게 높지 않았다.

그것도 잠시, 마을 어귀에 도착하자 갑자기 수많은 악마형 몬스터들이 줄지어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르, 실드. 내가 나갈게.”

휴델을 나르 옆에 두고 그대로 달려 나가며 프로텍트를 걸자 나르도 믿음직한 얼굴로 실드를 쳐주었다.

-아우우!

이제 좀 컸다고 하울링 하는 소리도 제법 짐승 같아 웃음이 삐죽 났다. 하울링 스킬을 사용하자 다섯 마리의 늑대들이 컹컹 짖으며 빠른 속도로 달려와 그들의 살점을 잡아 뜯었다.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받은 몬스터들은 단 한 대만으로 몸을 검게 물들였다. 이번에야말로 강해진 게 맞겠지?

내적 기쁨이 사라진 건 바로 그때였다. 가장 뒤에 있던 거대한 괴물이 앞으로 달려왔기 때문이다. 얘가 보슨가? 자기 부하들이 죽어서 화난 듯 황금색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마주한 몬스터는 이상하게 무섭지 않았다. 키와 함께 간도 커진 듯했다.

얼마간의 대치 상황에서 먼저 몸을 움직인 건 저쪽이었다. 몬스터가 양팔을 넓게 벌리자 그의 손짓에 따라 세상이 일렁거렸고, 거기에 홀린 듯 멍하니 서 있으니 이상하게 싸울 의지가 사라졌다.

“겨미, 환각이다! 리무브!!”

나르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정신이 들었다. 하지만 몸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고, 내가 있는 곳으로 다가오는 금색 눈동자에 시선조차 뗄 수 없었다.

“깽!”

어떻게 된 일이지? 분명히 몬스터가 가까워진 것도 아니었는데, 내 몸은 어느샌가 초원 위를 뒹굴고 있었다.

바로 일어나 뒤로 빠지려는데 나르가 놀란 얼굴로 내게 날아올 것처럼 날개를 파닥거렸다.

“나 괜찮아! 나르, 그 사람 호위하고 있어야지.”

분명히 어느 정도 정리를 한 것 같은데 주변이 또다시 적들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아까 환각이라고 했으니… 저것들도 전부 환각인가?

그 대장 몬스터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며 리무브를 사용하자 분명히 거대했던 몬스터가 작아졌고, 아직 많이 남았던 부하들도 절반가량 사라져 갔다.

“얘 사기꾼이네.”

“겨미! 사기꾼은 먼가?”

물음에 대답해 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몬스터 무리를 처치하는 게 먼저였다.

쿨이 거의 없는 할퀴기와 간간히 긴 울음소리가 평지에 몇 번 울려 퍼지고 나자 이제 주변에 더는 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169Lv. 달성!

배낭 안으로 들어온 아이템을 확인하는데 붉은색의 이름으로 뭔가가 반짝였다.

「데빌의 뿔」

-마족의 평원에 자리한 악마의 보스. 사탄의 충실한 부하로, 뿔을 사용하면 사탄의 던전을 1회 소환 가능합니다.

…사탄이라니? 이름도 찝찝해 바로 송금 형에게 우편으로 날려버렸다. 알아서 잘 써주겠지.

휴델을 무사히 마을로 돌려보내고 나니 이번엔 마족의 평원에서만 난다는 가젤의 비료에서 자란 넬니반의 열매를 찾아다니는 중이었다.

[길드]빛과송금 : 겸이 형님. 어디심니까? 절하러 찾아뵈려는데.

[길드]수박맛사탕 : 왜 또 주접이지..

[길드]푸름 : 겸이 형 도망가게써여 송금이 형

[길드]빛과송금 : 제[데빌의 뿔]좀 보세요!

[길드]유우 : 그거 좋은 거예요?

[길드]민초맛사탕 : 갑니다. [2/6]

[길드]간계밥 : 아이템 획득률 높아져서 그런가? 이틀은 평원에서 굴러야 하나 볼까 말까 한 거잖아. [3/6]

[길드]민초맛사탕 : 겸이 데리고 가면 다른 던전으로 업하지 않을까? [4/6]

[길드]유우 : 맞아..

[길드]수박맛사탕 : 앗...

[길드]민초맛사탕 : 앗... [3/6]

[길드]푸름 : 다들 너무하다.. [4/6]

[길드]수박맛사탕 : 때를 아직 안 밀어서 그건 좀..

[길드]화환 : 송금이 형 언제 가려고?

[길드]지우 : 저랑 햇살이 형 지금 던전인데! 기다려주실 거죠,,,?

[길드]도시락 : 송금 님 지우랑 햇살이 버리고 바로 가죠!

[길드]소리 : 와, 나 던전이랑 안 친한데 거긴 간다. 저도 껴주세여!!1

어, 내 발톱을 달라고 했던 사람이다.

“겨미 채팅 그만하고 나를 보라.”

“아, 미안. 사탄 던전? 간대서 그거 구경하느라.”

“겨미 던저니 아니니 경험치를 못 받는다! 어서 열매를 찾아라!”

저 렙업 무새 같으니…. 빨리 업해서 저 잔소리에서 벗어난다, 내가.

“그래. 가자, 가.”

[귓속말]화환 : 자기는 안 와?

[귓속말]유우 : 나르가 저 경험치 안 준다고 가지 말래요.

[귓속말]화환 : 우리 자기, 나르한테 꽉 잡혀 사는구나..

[귓속말]유우 : ㅎ 조용히 말해 주실래여? 또 소문나면 안 되거든여.

[귓속말]유우 : 맞다, 저 화요일부턴 접속 잘 못 할 것 같아요

[귓속말]화환 : 아직 만렙도 아닌데 자기야, 벌써 내가 질린 거야?

[귓속말]유우 : 어떻게 알았지?

“겨미! 저기 있다. 저거시다!”

나르가 가리킨 곳은 나무 몇 그루가 주변과 어울리지 않게 삐죽 솟아 있었다. 저긴 아무리 뛰어도 안 닿을 것 같은데….

“나르 따줘. 나 안 닿아.”

“휴….”

[귓속말]유우 : 작은형이 강아지를 좀 맡아 달래서요. 목요일 저녁부턴 원래대로 접속해여

[귓속말]화환 : 강아지 보러 가도 돼?

[귓속말]유우 : 되겠어요?

[귓속말]화환 : 겸이 옷이 인질로 있는데 안 돼?

픽- 웃음이 샜다. 양손 가득 열매를 따 나르는 나르의 눈이 뾰족해졌지만, 배낭 안에 저 아기가 좋아하는 쿠키가 있어 별로 걱정은 되지 않았다.

[귓속말]유우 : 어쩔 수 없네.. 옷 때문에 봐줬다.

[길드]보미 : 와 ** 얼마만에 맡아보는 디지털 향이냐..

[길드]겨울 : ㅎㅇㅎㅇ 공카 보니까 우리 유명해졌던데 유우님 어디 계시냐?

[길드]보미 : 우리 집에서 키우고 싶은데, 분양 가능?

[길드]민초맛사탕 : ㅋㅋㅋㅋㅋㅋㅋㄴㄴ 불가능^^!

[길드]간계밥 : 겸이 데려가려면 나르를 이겨야 되는데.. ㅋㅋㅋㅋ 불가능^^!

[길드]수박맛사탕 : ㅂㄱㄴ^ㅁ^!

[길드]보미 : 아, 보던 얼굴 지겹다. 유우님? 안 계세여?

[길드]빛과송금 : 잘됐다, 봄 겨울님 사탄 가실래요? 사람이.. 안 모이네 ㅎ

[길드]겨울 : 접 하자마자 사탄? 설렌다.. 난 갈래.

막 인사를 하려던 참이었다. 갑자기 발치로 굴러온 물건에 나르를 보자 잔뜩 울상을 지은 자그마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너무하다. 나는 이러케 일하고 있는데. 혼자 노는 것인가, 겨미? 이젠 모른다! 안 따줄 거시다!”

씩씩거리던 나르가 이내 가장 높은 가지 위로 올라가 등을 돌리곤 앉았다. 그러니까 이럴 때는….

“우리 나르가 혼자 일해서 서운했구나….”

공감해 주기! 다음은 자버렸기 때문에 강의 내용이 기억나지 않지만…. 대충 좋은 말을 해 주면 되지 않을까, 하는 안일한 생각으로 하염없이 나르의 등만 올려 보았다.

“나르야?”

불안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아니… 대답은 해줘야 나도 다시 사과할 수 있을 건데.

결국 히든 스킬을 해제한 뒤 나르의 얼굴이 있는 나무 뒤쪽으로 들어가 두 팔을 벌렸다. 이 자세는 실패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르, 이리와. 이젠 내가 알아서 할게, 응?”

내 쪽을 내려 보던 나르가 날아오려 날개를 두어 번 퍼덕이다 그 자리 그대로 멈췄다.

“겨미 얼굴 보여주면 화, 화가 풀릴 것 같다.”

자기가 말하고도 민망한 건지 죄 없는 나뭇잎만 퍽퍽 치는 게 아닌가. 그게 너무 우습고 하찮았는데 화환 새끼가 날 볼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싶었다. 수치심에 귓가로 열이 오르는 듯 화끈거렸다.

“풀릴 것 같은 게 아니라 풀리는 게 맞아야 보여줄 거야.”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르가 쪼르르 날아오더니 성의 없이 한 번 안아 준 뒤 내 눈앞으로 날아올랐다.

“풀린다! 진심이다, 겨미!”

“그럼 열매도 다 따주는 거야?”

“당여나다! 다음 나쁜 것도 내가 다 잡아주게따!”

도대체 얼굴이 왜 그렇게 중요한 건진 모르겠지만 일단 풀린다고 하니 손을 올려 마스크를 벗었다.

“겨미, 나도 크면 겨미처럼 멋이써지나?”

“너 다 큰 거 아니야?”

“뭔 소리인가! 내가 이렇게 쪼그마할 리 없지 않은가!”

요리조리 날아 내 얼굴을 구경하던 나르가 손에 들려 있던 마스크를 잡아끌어 서둘러 내 얼굴을 가리기 시작했다.

“얼른 숨겨라. 나만 볼 것이야! 겨미는 다른 이들보다 나랑 더 친한 거지? 그러니 나한테만 몰래 보여준 거시 아닌가!”

미안, 착각이야…. 오늘 낮까지 화환에게 보여줬다고 얘기하면 이번에야말로 삐질 것 같아 어색하게 입꼬리만 올렸다. 채팅으로 얘기하는 것 때문에 소외감이 든 건가?

그 뒤로는 나르와 군것질도 하며 차근차근 퀘스트를 진행했다. 던전 전 마지막 선행 퀘스트인 호지슨 씨의 과수원 지키기를 완료하자 그렇게나 바라던 170이 되었다.

[길드]유우 : 다들 사탄 가셨어요?

[길드]간계밥 : ㅇㅇ 보미 누나 빼고. 던전?

[길드]유우 : 응 그럼 공팟으로 한 번만 가 봐도 돼?

[길드]화환 : ㄴㄴ 되겠어요?

[길드]유우 : 양아치**

[길드]유우 : 아... 속으로 말한다는 게... ㅈㅅ

[길드]화환 : ㅋㅋㅋㅋ ㄱㅊ 하찮아서 봐줬다.

[길드]민초맛사탕 : ㅋㅋㅋㅋㅋ

[길드]장꾸 : 나르가 어려운 던전이래?

[길드]유우 : 그건 던전 앞에 가야 알 수 있는데 아직 도착 전이라 모르겠대요.

[길드]보미 : 오셨다! 유우님 계란이랑 친구라면서요? 그럼 동생이네.

[길드]보미 : 어디세요? 저 혼자서도 클 가능! 믿고 맡긴다는 보미버스임.

[길드]유우 : 150 던전인데 혼자서 가능한 거예여?

[길드]보미 : 유우님 지금 170이네 둘이서 하면 쌉가능 ㅇㅇ

[길드]화환 : 기다려봐, 우리 집 던전 판독기 있어서 확인부터.

[길드]빛과송금 : 나르 울겠네...

“나르, 이번 던전 나 혼자서도 깰 수 있어?”

“아니. 겨미는 아가지 않은가!”

“나르가 세잖아.”

“하지만 겨미 레벨이…….”

“170 인데?”

“겨미는 아우우 하는 것밖에 모태서 오래 걸릴 것이다. 그럼 레벨 업이 늦어져 안 대.”

마음이 아팠다. 나는 언제 강해지는 건지….

막 던전 앞에 도착할 때였다. 나르의 눈이 갑자기 붉어지더니 더는 다가가지 말라며 내 옷자락을 잡았고, 그와 동시에 던전 입구에선 모르는 유저 네 명과 베르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아, 안 걸렸네. 혹시 거기 함정 숨겨둔 거 아셨어요?”

“유우 님 늑대 외형으로 다닌다고 안 했나?”

“베르 님, 진짜 유우 맞아요?”

베르가 잔뜩 위축된 모습으로 나를 힐끔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상황인지 이해도 하기 전, 갑자기 다가온 사람의 모습에 나르는 날개를 잔뜩 부풀리며 내 목덜미를 뒤로 잡아끌었다.

“그대들은 누구지, 겨미에게 무슨 볼일인가!”

“그쪽 길드원 전부 각자 바쁜 일 있을 것 같아서요. 도와주러 왔지.”

“약한 자의 도우믄 필요치 않아.”

“쥐방울만 한 게, 왜 이렇게 땍땍거리지?”

“유우 님, 분위기가 이래서 좀 그렇긴 한데 저희 길드로 안 오실래요? 부길마 자리까지 드릴 수 있습니다!”

덩치가 크고 번쩍이는 은색 갑옷을 입은 사람이 사람 좋게 웃으며 밝게 얘기했다. 이렇게 친근한 척하는 사람의 속이 보통 새카만 법이지 않나?

뒤로 물러나며 그 머리 위를 올려보자 ‘악동’이라는 절대 어울리지 않는 길드 명이 자리 잡고 있었다.

“싫은데요.”

싸한 정적 속에서 하얗게 질린 베르가 불안한 듯 입술만 뗐다 붙였다 했다.

뭐야, 협박이라도 당하고 있는 건가? 잘 봐줘도 형들 삥 뜯는 데 잡혀 온 후배로밖에 보이지 않는 모습이 솔직히 조금… 우스웠다. 당당하게 나가더니, 결국 받는 취급이 이런 거라니.

[길드]유우 : 여기 던전 앞 PK도 되나여?

[길드]보미 : 아녀, 던전 안에선 몰라도 밖은 평화지역인데여?

[길드]보미 : 누가 괴롭혀요?

[길드]유우 : 던전 앞인데 베르님이랑 악동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서요. 별일은 없어요.

[길드]민초맛사탕 : 우리 아직.. 반도 못 왔는데. 겸이 길드 성으로 가 이따 우리도 우르르 몰려가서 혼내주자.

“생각하는 시늉이라도 좀 해주시지. 이렇게 단칼이면 상처받는데.”

“네. 여기 이렇게 널려 계신 거 보니까 할 일도 없어 보이는데, 저는 바빠서 이만. 베르 님 좋아 보이시네요.”

서둘러 길드성으로 이동하기를 눌렀다. 갖은 욕설이 다 들려왔지만, 하루 더 오래 살 수 있겠구나 하는 기쁜 마음만 들 뿐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다만, 나르가 저 나쁜 말을 배우면 안 될 텐데 하는 염려는 지울 수가 없었다.

다들 사탄인지 하는 던전에 가 있기 때문인지 길드성은 조용했다. 채팅으로 처음 이야기했던 보미 님도 없었고, 어느새 저녁 시간이 되었기에 나르에게 사람들이 오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해 달라는 말을 끝으로 경험치 던전에 들어가 접속을 종료했다.

밥을 마시듯 먹곤 누워 빈둥거리다 나르를 위해 책을 펴들었다.

분명히 예전엔 책 한 권을 들면 그걸 다 읽을 때까지 집중할 수 있었는데, 한 살 한 살 먹을수록 집중력이 떨어지더니 이젠 두 페이지를 넘길 수도 없이 눈이 감겼다.

잠이 막 들기 일보 직전 연달아 울린 메시지에 눈이 번쩍 뜨였다. 아, 지금 자면 꿀잠 잘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손을 뻗어 메신저를 확인하자, 알림이 울린 곳은 피안 길드 단체 채팅방이었다.

계란 [겸아 너 좆댔어.]

계란 [나르 엄청 화났는데]

푸름 [겨미형, 나르 최애 과자도 집어 던졌어요]

푸름 [언제 와요?]

유우 [..?]

유우 [나르 좀 전까지 기분 좋았는데?]

수박 [나르가 겸이 얼굴 봤다고 자기랑 제일 친하다고 자랑했는데...]

계란 [내가 우리 다 봤다고, 난 매일 본다고 자랑했거든 ㅎ..]

아… 접을까? 아니면 잠시 쉬었다가 나르 화 풀렸을 때쯤 접속할까….

생각과 다르게 몸은 어느새 캡슐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건만 오토를 풀고 경험치 던전에서 바쁘게 사냥을 이어 나갔다.

레벨이라도 많이 올려서 화를 누그러트려야 한다는 걸 본능으로 알아차린 건가?

[귓속말]유우 : 너, 하나 있는 친구가 펫이랑 더 친한 것 같으니 질투해서 일부러 그런 거지? ***야

[귓속말]간계밥 : ㄴㄴ 인터넷 친구가 45명 정도 있어서 그럴 리 없지.

[귓속말]간계밥 : 나르 얼굴 봤으면 너도 놀렸다. 장담함.

시간이 끝나가는 던전을 확인하곤 서둘러 히든 스킬을 썼다. 최대한 불쌍해 보일 수 있게 외형까지 아기로 바꿨더니 처음 나르와 전투했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는 지저분한 몰골이었는데…….

길드성 홀로 막 들어서는데 누구 하나 말없이 다소곳하게 앉아 각종 간식을 나르의 발치로 내려놓고 있는 게 보였다. 내가 저녁 먹는 사이 길마가 바뀐 건가?

“겸이 왔다.”

“뭐야, 유우 님이야? 웨어 울프라며. 왜 아기 코코가 있는 거지?”

“코코?”

“진짜 닮았다. 보미 본가에 코코라고 강아지 한 마리 키우거든, 유우 님 5배는 큰.”

“야, 아기 늑대는 반칙 아니냐…?”

권경배를 노려보곤 나르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울기라도 한 건지 나르의 눈꼬리가 물기로 젖어 있었다.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어 짧은 나르의 다리 위로 턱을 올리곤 나르를 올려 보았다.

뒤에선 아기와 동물은 늘 옳다며 멀쩡한 사람을 동물로 만드는 말을 스스럼없이 했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저 사람들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나르, 화났어?”

“겨미. 왜 거짓말을 한 건가?”

“나르가 너무 좋아하니까…. 그리고 거짓말 아니었는데? 여기 안에선 나르만 보여 준 거 맞아.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못 봤어.”

“그래도, 계라니는 매일 겸이를 본다고 했다. 겨미는… 나랑 제일 친한 게 아니었나?”

“쟤가 우리 집 윗집에 살아서 그래. 잠깐 보는 건데 나르는 나랑 매일 같이 있잖아.”

나르가 가만히 눈을 굴리다 맞는 말인 것 같은지 입꼬리를 슬슬 올렸다. 아닌 척 입술을 앙 말아 물더니 눈을 이리저리 굴렸고, 곧이어 손을 뻗어 내 귀 아래를 쓰다듬었다.

“그럼 나르와 가장 친한 거시 맞는 건가?”

“응, 권경배 100명이 있어도 너랑 안 바꿔. 나 벌써 172인데 많이 올렸지? 이따 던전도 돌고 또 경험치 던전 가면 곧 180이야.”

나르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쪼그만 게 저렇게 한숨을 쉴 때면 꼭 내 레벨을 걸고넘어지던데. 아니 그런데 많이 올린 거 아닌가? 나도 할 말이 있다.

마음의 전투력을 올리곤 나르를 올려 보는데 주위에 널려 있던 간식 중 제 손바닥만 한 간식을 뜯더니 그걸 또 사 등분해 내 입 앞으로 가져왔다.

“그거 먹고 얼른 레벨 업 하러 가자, 겨미. 아직 한참 머러딴다….”

라며 불쌍하게 내 머리를 토닥였다. 잠깐 욱했지만 아기한테 화내면 무조건 내가 지는 것이기에 아무 말 없이 과자를 받아 꿀꺽 삼켰다.

그걸 확인한 나르가 등 뒤에서 내 앞발을 안고 날아 화환의 다리 위에 내려주었다.

아직 여기서 제일 강한 사람은 화환이라는 건가?

오랜만에 올라온 건데 다리를 꼬고 앉은 탓에 안정적으로 앉을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앞발로 삐죽 올라온 무릎을 콩 치자 화환이 내 몸을 안아 얌전히 자세를 바꿨다. 꼭 이렇게 주먹으로 말을 해야 알아듣지.

“나르 화 풀렸어?”

“그러타. 계라니가 100명이 와도 겨미는 내가 좋다고 했다.”

“그럼 아까 했던 얘기 마저 해 줘야지. 겸이랑 던전 앞에 갔는데 함정을 나르가 눈치채고 겸이를 지켜줬다며.”

뭔 소리지. 그때 내 옷만 잡아끌었는데?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르를 올려 보자 보이라는 나르는 안 보이고 화환의 손이 눈과 입을 뭉개며 얼굴을 주물럭거렸다. 이, 이 미친놈이!

“마자, 겸이가 그냥 걸어가는 걸 말렸다. 내가! 그때 검은 인간과 모르는 사람 넷이 같이 던전 앞에서 나왔다.”

“무서웠겠다.”

보미라고 한 사람이 화환의 가까이 와 앞에 쪼그려 앉았다.

“내가 안아 주면 안 돼? 나 강아지 많이 키웠었는데.”

왜 나를 안아 주고 싶다는 걸 나르한테 묻는 건지. 나르가 눈을 좁히곤 보미를 빤히 바라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댄다. 그대도 강하긴 하지만, 우리와 같이 가지 않으니.”

“어딜 가는데? 나도 끼워주면 안 돼?”

“안 댄다 열두 명은 이미 다 모여쓰니!”

“아, 저… 그럼 저 대신 가실래요?”

있는 듯 없는 듯 있던 도시락이 고개를 빼꼼히 내밀며 물었다. 지우와 햇살도 몰랐던 사실인지 놀란 듯 그쪽을 바라보았고, 어색하게 웃던 도시락이 곧 입을 열었다.

“여자친구가 길드에서 부길마 자리를 받았다고 도와 달라는 말이 나와서요.”

“그래서 그 던전을 포기한다고? 형, 미쳤어요?”

“아, 그… 난 별로 도움도 안 되는 거 같고….”

내년에 몇 달 떨어져 있어야 해서 남은 시간 동안 최대한 같이 있고 싶다며, 마지막으로 결혼할 사이라고 얘기를 하더니 수줍게 웃어 보였다.

그 후 결혼의 여파가 다 가시기 전에 나에게 거래를 걸곤 ‘탐욕’, ‘나태’ 칭호들을 거래 창에 올리기 시작했다.

“어? 이거 사용 안 하셨어요?”

“네, 전부터 같이 하자는 말이 나와서 혹시 몰라서 안 썼어요. 사용 안 하면 거래 가능이잖아요.”

“도시락 님, 혹시 도움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저 혼자라도 도와드리러 갈게요.”

칭호는 일곱 개가 모여야 수치가 올라가는 칭호였기에 중간부터 참여하는 사람은 당연히 다 모을 수 없었다.

어느 정도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부분이었는데 도시락 님 덕분에 아쉬운 소리 할 필요 없이 사람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아 저절로 꼬리가 흔들렸다.

[귓속말]유우 : 길마님 나태, 탐욕 칭호 전부 받았어요!

[귓속말]유우 : 다음에 오시는 분도 칭호 다 모을 수 있겠다.

화환은 버릇처럼 내 머리만 쓰다듬었고 신혼여행 다녀온 겨울과 보미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설명했다.

중간중간 나르가 추임새를 넣으며 말을 보태자 놀란 듯 눈이 커진 보미 님은 진심으로 재미있다는 듯 크게 웃기 시작했다.

“미친, 뭐야 진짜? 나 신혼여행 갔다 온 사이에 그렇게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고?”

“응, 누나 시간은 있을 것 같아? 도시락 님이 딱 무기도 뜨기 전이고 칭호도 반납했으니 시간 맞으면 같이 가자.”

“시간 없어도 만들어서 온다. 그래서 다음 던전은 언제 가는데?”

“겸이 200 찍으면. 그리고 누나, 당분간 나르랑 다녀, 누나 무기 던전도 뜰 거니까.”

“야, 나는…?”

주변을 어색하게 보던 겨울 님이 억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불현듯 사탕 누나가 고개를 번쩍 들어올렸다.

“맞다, 무기! 무기 던전은 어떻게 돼?”

“겨미, 음욕을 쓰러트리러 가자! 그래야 한다. 저번 순서대로 파티를 짜고 바뀐 사라미 마지막으로 가라.”

“그거 겸이 200 만들면 간다며.”

“그 전에 내가 도시락의 던저늘 찾으면 저 쌍검사는 마지막 던전에 갈 수 없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눈만 굴리고 있자 보미 님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던전을 찾아야 가는 거 아니야?”

“겨미가 찾은 던전부터 갔다 퀘스트를 따가라면 나올 거시야. 근데 겨미, 나는 잠들어 있어도 되나?”

“도시락 님 던전 찾을까 봐?”

“그러타, 던전이 열렸을 때와 클리어한 후 그 앞에서만 나를 깨워라. 아까 열린 던전은 일반 던전이다.”

고개를 끄덕이곤 나르를 보며 팔을 벌리자 나르가 익숙하게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펫 비활성화를 마친 것까지 확인한 화환이 파티를 신청했다. 파티에는 사탕 누나와 보미 님, 푸름과 간계밥이 있었다.

“저기요, 다들 저를… 잊으신 것 같은데….”

“겨울아, 누나 다녀올게. 성 잘 지키고.”

“왜… 난 안 끼워줘?”

“힐러가 이미 둘이라.”

“도시락 님 나가셔서 한 명 아닌가?”

“여기, 한 명 더 있어요.”

권경배가 나를 가리키자 겨울 님의 눈이 커졌고, 그게 귀여웠는지 보미 님이 겨울 님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빠르게 파티 채팅을 했다.

[파티]보미 : ㅃㄹㅃㄹ 따라온다고 패악 부리기 전에 ㄱㄱㄱㄱㄱ

세상 사랑꾼인줄 알았더니…. 바로 길드성을 나와 던전 앞에서 파티를 소환했다. 곧 반짝이는 빛과 함께 사람들이 눈앞으로 나타났다.

“맞다, 아까 악동 만났댔잖아. 무슨 얘기 했어요?”

보미 님이 던전 앞으로 오자마자 내게 물었다.

“악동으로 오면 부길마 준다던데요?”

“아, 안 그래도 베르 데려간 이유가 우리 길드원이기도 하고, 겸이랑 친한 줄 알고 불렀다더라.”

“도대체 형은 그런 걸 어디서 듣고 오는 거예요?”

“비밀이야.”

화환의 대답에 권경배의 입이 삐죽 나왔다. 대답 듣기를 포기하고 던전에 입장해서도 권경배의 호기심은 끊이질 않았다.

“넌 그래서 뭐라고 했는데?”

“당연히 싫다고 했지. 바쁘다고 하고 왔어.”

그게 다가 아니었지만 어쨌든 중요한 건 싫다고 또박또박 말했다는 거다. 듣던 권경배가 잘했다는 듯 내 뒤통수를 힘껏 쓰다듬었다. 너는 제발 이 안 좋은 손버릇 좀 어떻게 해봐라.

던전 안은 온통 시커먼 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마 마족들이 사는 마을과 가까워 영향을 받은 것 같은데 벽면은 어두운 반면, 주변 풍경이나 사람들은 모두 밝게 잘 보이는 덕분에 답답함은 없었다.

“어, 박쥐굴이네.”

보미 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천장 위에서 붉은빛이 일제히 반짝였다. 뭔가 싶어 그걸 빤히 보자 전부 거꾸로 매달린 박쥐들과 눈이 마주쳤다.

와, 저렇게 많을 줄 알았으면 수박 누나나 햇살 같은 캐스터를 데려올걸…. 망했다 싶어 침울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는데, 보미 님이 허리춤에 달고 있던 조그만 단도 두 개를 하늘로 던지더니 증폭이라 속삭였다.

분명 두 개를 던진 것 같았는데 보미 님의 말에 대답하듯 단도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늘어났다. 앞으로 뻗는 손짓 한 번에 전부 박쥐 떼를 향해 날아갔다.

쌍검사라며, 나르야… 내가 알고 있는 검사는 틀린 것이었나?

“와, 보미 님 진짜 대단하시다….”

“보미 님이 뭐예요, 계란이랑 동갑이랬죠? 그냥 누나라고 해요 나 32살.”

“그럼 누나도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경험치가 쏠쏠하게 들어와 꼬리까지 흔들며 말하자 누나가 씩 웃으며 해야겠다며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지금도 잘하는데 얼마나 더 힘을 내시려고.

이번 던전도 손가락 하나 까딱함 없이 끝이 났다. 던전의 왕인 흡혈박쥐는 크기만 컸지 만렙의 보미 누나 앞에선 공격 한 번 못 해보고 괴상한 비명과 함께 사라졌다.

평소처럼 길드원 사람들과 수다 떨며 막 던전을 나올 때였다. 앞으로 나오니 들어올 때는 없었던 악동 길드 사람들이 거의 열 명 가까이 진을 치고 있었다.

마침 정면으로 위치한 포탈을 이용한 터라 서로를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형국이었다.

“와, 150 던전에 피안 주력이 다 모였네?”

“히든 던전이 아니라 아쉬워서 어떡해.”

“와, 유저 한 명 괴롭히려고 서버 비매너 사람들이 다 모였네.”

“저렇게 모이기도 어렵겠는데, 신기하네.”

악동 길드의 말을 받아친 건 베르를 보고 기분 나쁜 표정을 짓던 사탕 누나와 보미 누나였다.

화환은 재미있다는 듯 옆에서 구경만 했고 푸름은 내 몸을 들어 안더니 권경배의 뒤로 한발 물러났다. 이 사람들은… 나를 얌전히 당하기만 하는 사람으로 보는 건가?

“유우 님, 그 모습은 처음 보네. 다시 봐서 반갑죠?”

아까 부길마 자리를 준다던 덩치 큰 사람이 웃으며 내 쪽을 빤히 보았다.

반갑긴, 이제 그만 나르를 불러야 하는데 왜 저 새끼들이 앞에 있는 건지 모르겠네. 못 들은 척 귀만 벅벅 긁으며 푸름의 품으로 고개를 묻으려는데 다시 몸이 덜렁 들렸다.

“우리 애한테 너무 관심이 많네. 하나 데려갔으면 된 거 아닌가?”

화환이었다. 익숙한 손길로 엉덩이를 감싸 앞이 보이도록 안더니 또 눈에 흰자가 보이게 강하게 쓰다듬었다. 악! 위엄 있는 모습을 보여도 모자랄 판에!

“안 되니까 이렇게 귀찮게 하지. 왜, 막상 보내니 아쉬워? 바꿔 줄 수도 있는데.”

“아니, 우리 애 던전 돌아주는 데도 허리가 휘어서 다른 데 신경 쓰기가 좀?”

“그러니까 허리 그만 휘게 해 준다는데 합병은 왜 거부한 거부하셨어.”

“배고프다고 쓰레기를 먹으면 안 되잖아.”

보미 누나가 들으란 듯이 픽 웃었다. 쓰레기, 아니 악동 길드원의 눈초리가 순식간에 사나워졌다. 싸움이라도 일어나는 건 아닌지 걱정될 때, 사탕 누나가 방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 애 계속 귀찮게 굴 거면 쟁 걸고요, 악동님들아. 님들 꼴에 세계전 준비하느라 창고 채우기 바쁘다며, 한 번 더 털릴래요?”

“그렇게 귀한 애를 왜 혼자 둬서 이 사달을 냈대. 혼자 다니는 거 보니까 욕심나잖아.”

“우리 애가 똑똑해서 집을 참 잘 찾거든, 그쪽같이 가둬둘 필요 없이.”

아니 그런데 왜 계속 애라는 거야?

[파티]유우 : 저 어른인데요.

[파티]간계밥 : ㅉㅉ 환이 형 말이 맞네.. 천지분간 못하고 이런 말이나 하는 거 보면

[파티]민초맛사탕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파티]보미 : 너 왜 우리 애 꼽주냐. 뒈질래?

유일하게 내 편을 들어주는 보미 누나에게 팔을 뻗자 누나가 나를 얼른 안아 들었다. 둥가둥가를 하더니 곧 표정을 굳히곤 악동 쪽을 노려보았다.

“좀 알아들었으면 이제 꺼지던가, 쟁을 걸던가. 병신들이 궁둥이만 무거워서…. 한 번만 더 우리 애 귀찮게 했다는 얘기 들리면 그땐 나 혼자서라도 털러 갈 거니까 알아서 몸 사려라.”

누나의 말에 잠시 이쪽을 노려보던 사람들이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보미 누나도 사탕 누나처럼 무서운 사람인 건가? 지금껏 내가 본 모습은 안아 주겠다며 호들갑 떤 것과 내 꼬리로 검을 날리며 웃던 모습뿐인데.

마지막으로 사라진 건 머리 위 악동이라는 길드명을 단 베르였는데, 아쉬움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연신 이쪽을 쳐다보다 등을 돌렸다.

악동 사람들이 완전히 모습이 없어진 걸 확인한 후 나르를 깨우자 눈을 비비며 일어난 나르가 바로 앞으로 날아왔다.

“겨미! 레벨 업은 많이 했나?”

“아니, 나르가 없어서 빨리 안 올라…. 이번 던전은 어때?”

“나도 얼른 겨미랑 다니고 싶다….”

그러면서 던전을 힐끔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이번 던전도 아닌 건가…. 아쉬운 얼굴이 티가 난 건지 양 볼에 쪽쪽 거리며 입을 맞춰주던 나르가 당당한 얼굴로 내 앞에 섰다.

“이제 나도 안다! 친밀함의 표시는 입이 아니라는 거!”

“와아…. 똑똑해 졌네, 나르?”

사탕 누나의 어깨가 묘하게 올라간 것 같은데… 착각이길 바라며 나르와 인사를 끝으로 비활성화했다.

“저 퀘스트 할 거니까 다들 일 보세요. 보미 누나, 겨울 님이 계속 찾아요.”

아까부터 길드 채팅을 메모장처럼 쓰던 겨울 님이 기다림에 지쳐 거의 울고 있었기에 더는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보미 누나가 작게 한숨을 쉬곤 내 몸을 내려주었다.

권경배는 43번째 친구가 부른다며 어디론가 갔고, 푸름도 사탕 누나의 손에 붙들려 끌려 나간 탓에 파티에는 이제 화환만이 남았다.

이 사람은 나 따라다니는 것 외에 할 게 없나?

“길마님, 한가해요?”

“엄청 바쁜데, 안 보이나?”

“세상 한가해 보이는데, 그래서 저 따라오는 거 아녜요?”

“겸이 따라다니는 게 제일 바쁘지.”

“오늘 꼭 음욕 던전을 깨고 싶어서 빨리 퀘스트 밀라는 걸로 밖에 안 보이는데.”

“설마, 자기야. 이제 겨우 우리 둘만 남았는데 내가 그러겠어?”

그러고도 남지. 아직도 자기 전에 꼬박꼬박 경험치 던전의 티켓을 주는 걸 보면 말이다. 혹시나 옆에 없을 때면 우편으로라도 꼭 주고 가는 사람이었다.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화환을 보자 머쓱하게 웃어 보이더니 서둘러 마을 쪽으로 발을 놀리기 시작했다. 꼭 양심에 찔리는 일이 있으면 입을 다물더라, 저 새끼는….

“모레 온다던 강아지 이름이 뭐야?”

“백설이요, 저 2차 각성 때 크기랑 비슷한 애예요.”

“귀엽겠다. 하얀색?”

“네. 작은형 친구네 강아지가 낳은 아기인데 어릴 때 유난히 작게 태어나서 오래 못 살 거라고 했었거든요.”

“작은형이 좋은 사람이네. 그런 아기를 데려온 거야?”

“그렇죠, 애가 계속 젖을 뺏기는 탓에 비쩍 말라 있었는데 그게 너무 속상해서 데려와서 분유도 먹이고 밤새 아기만 봤대요. 그렇게 잘 먹고 쑥쑥 커서 지금은 병원 가면 살부터 빼라고 한다는데….”

퀘스트가 끝나도 이야기는 끊어질 줄 몰랐다. 맞은편 아파트에 산다는 것도, 자기도 혼자 사는데 식사는 꼭 만들어서 먹는다며 놀러 오라는 말을 한 세 번은 한 것 같다.

자기가 너 있는 곳으로 이사 가면 안 되냐는 망언을 하다 결국 뒷발로 차이기도 했다.

이상하게 눈앞의 미친놈이 오늘따라 평범하고, 또 조금 외로운 사람처럼 보였다.

두 번째 던전은 외진 수풀 사이에 숨어 있었다. 던전 앞에서 나르를 활성화하자 진짜 한숨 자기라도 한 건지 눈을 부비며 내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코를 바짝 맞대고 인사해 주던 차에 나르의 눈이 순식간에 날카롭게 변했다.

“겨미, 여긴 뭔가 이상하다. 길드성에 있는 포션을 더 꺼내 와야겠어.”

응? 하며 나르를 올려 보는데 곧이어 나르의 눈이 더욱 검붉어졌다. 빨리 사람들을 불러오라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던전 입구에선 몬스터들이 쏟아져 나왔다.

화환이 바로 나를 끌어안고서 위로 번쩍 뛰어올라 몬스터 무리와 부딪치는 불상사는 막았지만 배가 너무 아팠다.

“윽, 일부러 그랬죠? 나 싫어서!”

눈물까지 찔끔 나 코를 혀로 연신 핥아대자 화환이 미안하다며 머리를 찬찬히 쓰다듬었다. 그런 후 기계와 다를 바 없는 손놀림으로 서둘러 사람들에게 파티를 걸었는데 희한하게 순서가 딱딱 맞았다. 이럴 때 보면 또 멀쩡해 보이는데….

“파티 소환 바로 하자, 겸아.”

화환의 말대로 바로 파티원 소환을 하자, 연달아 소환된 파티원들이 전부 놀란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더니 무기를 꺼냈다.

“야, 이거 던전 몬스턴데 왜 다 나와 있어?”

“겨미가, 겨미가 앞에 서서 그런 거다! 겨미, 여긴 두 명의 왕이 생겼다. 그래서 원래의 주인들이 있을 공간을 빼앗겨써!”

주위는 이미 몬스터를 사냥하는 소리로 가득했다. 그 사이에서 갑자기 수박 누나가 바닥에 주저앉더니 세상이 무너진 얼굴을 하곤 바닥을 내리쳤다.

“나 때 안 밀었다고…!”

정말 독특한 캐릭터였다…. 다들 익숙한 듯 모르는 척을 하는 것이 신기해 그쪽만 보고 있자 화환이 가볍게 내 몸을 추어올렸다.

얘는 불편하지도 않나? 한 손으론 나를, 남은 한 손으론 리볼버를 들곤 정확히 급소만 노려 공격하는 모습이 이상하게 조금, 아주 조금 멋있었다.

“왜 그렇게 반한 것 같은 눈으로 봐? 자기야, 설레?”

취소다, 미친놈은 그저 미친놈일 뿐이다…!

사방에 깔려 있던 몬스터들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됐다. 어서 입장하라며 턱짓으로 던전을 가리키는 화환의 얼굴을 보니 반대로 행동하고 싶었지만, 겨우 참고 던전을 열었다.

[일곱 개의 죄악 제5의 죄 ‘음욕’의 던전에 입장하셨습니다! 무사히 클리어하시고 명성을 널리 퍼트리세요.]

- 던전 페널티 발생. 마법 공격 방어력이 소폭 감소합니다.

- 던전 페널티 발생. 공격력이 소폭 감소합니다.

- 던전 페널티 발생. 체력 회복 스킬의 쿨타임이 소폭 증가합나다.

- 던전 페널티 발생. 공격 스킬의 쿨타임이 시간이 소폭 증가합니다.

- 던전 페널티 발생. 포션 사용 쿨타임이 소폭 상승합니다.

[칠죄종 던전 발견! 최초 발견자에게 칭호가 지급됩니다.]

‘음욕’

-칭호 효과로 공격력+2750 방어력+3210 증가합니다. 칠죄종 칭호를 모두 획득 시 칭호 효과가 대폭 상승합니다.

“와, 이게 말로만 듣던 그 칭호야?”

보미 누나의 말에 깜빡하고 있던 게 떠올라 얼른 거래를 걸었다. 탐욕과 나태의 칭호를 올려준 다음 확인 버튼을 누르자 내 지갑 안에 생전 처음 보는 금액의 돈이 들어와 있었다.

“누, 누나 이거 잘못 주신 것 같은데….”

“아니야, 고마워서 주는 용돈이야. 까까 사 먹어, 겸이.”

자그마치 10억이었다, 이거면 1년도 넘게 까까만 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안 되겠다 싶어 화환의 품에서 내려와 서둘러 보미 누나에게 달려갔다. 거래를 걸었지만, 거래가 거부되었다는 알림만 뜰 뿐이었다.

“겨미, 까까는 나도 조아한다!”

“너 꼭 아쉬운 거 있을 때마다 혀 짧은 척하는 것 같은데… 내 오해야?”

“그, 그러타! 겨미, 나는 아까 태어나찌 아는가!”

영악한 새끼… 귀여워서 봐준다.

“아, 이번 던전은 왕이 두 명이라고 했어요.”

“그러타, 이번 던전의 왕은 음욕과 분노이다.”

말을 마친 나르가 세이브 존 바닥을 다 덮을 만큼 큰 마법진을 그리더니 무언가 확인하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두 명의 왕이 같이 나오진 않는다. 분노가 훨씬 깊은 곳에 이써. 일단 저리로 들어가야 한다. 저곳에 음욕의 왕이 있어!”

나르의 말에 사람들이 목소리를 죽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보미 누나만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우리를 이상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파티]민초맛사탕 : 언니, 이 던전에선 목소리를 내면 안 된다고 했어요.

[파티]보미 : 와, 그런데 왜 유우를 겸이라고 부르는 거야? 다들 그렇게 부르길래 나도 따라하긴 했는데.

[파티]간계밥 : 쟤 이름이 유우겸이라 겸이라고 불러요.

[파티]민초맛사탕 : 그러고 보니까 우리 겸이는 이름도 자기 이름 쓰고 얼굴도 자기얼굴 달고 다니는 거야? 자기애 쩌는 아이구나.

‘ㅋ’으로 도배되는 채팅 창을 보다 한숨을 내쉬곤 원래의 크기로 돌아갔다. 내 발로 걸어가도 될 만한 길이었기 때문에 굳이 작은 모습으로 있을 필요가 없었다.

“나르, 음욕의 왕이 어떤 공격을 해? 말하는 것 말고 또 주의해야 하는 건 있어?”

“전에 말했던 대로다. 음욕의 왕은 꼭두각시를 부리지. 꼭두각시는 한 사람의 목소리와 생김새를 모두 빼앗는다! 그런 후 빼앗은 목소리의 주인에게 관심이 있거나, 좋아하고 있는 사람을 꾀어 괴로피지. 보이는 것에만 현혹되면 안 대.”

“목소리도 낼 수 없다며, 만약에 나르 모습으로 나타나면 어떻게?”

눈을 끔뻑이던 나르가 겨미는 나를 좋아하는 건가! 하며 기뻐하기 시작했다. 귀까지 연신 쫑긋거리며 웃는 얼굴에 차마 만약이라는 말을 한 번 더 할 수 없어 그저 따라 웃었다.

“세이브 존을 나가면 바디 스캔이 바로 시작댄다! 그게 끝남과 동시에 모습을 바꾸면 대!”

“치장을 바꾸면 되겠네.”

화환이 중얼거리자 기다렸다는 듯 보미 누나가 배낭에서 꽃 모양 핀을 꺼내 내 머리에 꽂았다.

“겸이는 이거 끼면 되겠다. 늑대 모습이라 바꿔도 티가 안 나잖아.”

잠시 잊고 있었다. 이 길드는 길드원의 절반이 또라이라는걸.

“…작아지면 돼요.”

히든 스킬을 해제하는 한이 있더라도 저 핀을 절대로 꼽고 싶지 않았다.

다들 바로 바꿀 수 있는 치장을 준비해 두곤 음욕의 왕이 있다는 곳으로 걸어갔다.

세이브 존을 벗어나기 무섭게 붉은 레이저 한 줄이 발끝에서부터 훑으며 올라왔다. 가장 작은 내 머리 위까지 훑었을 때 얼른 작은 외형으로 바꾸곤 몸을 부르르 떨었다.

꼭 외형을 바꿀 때면 온몸이 한 번씩 간지럽단 말이야….

[파티]민초맛사탕 : 저기 사람 한 명 서 있다.

사탕 누나의 말에 앞을 바라보자 사람이 순식간에 우리 쪽으로 달려옴과 동시에 눈을 뜰 수도 없을 만큼 강한 바람이 불었다.

바람이 멎자 주위가 온통 화려한 파티 홀 같은 모습으로 변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주위를 둘러보는데 화려한 내부와 달리 민망한 차림새를 한 목각 인형들이 성행위를 연상시키는 불건전한 자세로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그리고 그 뒤쪽, 왕이나 앉을 법한 단상 위엔 자그마한 백색의 소년이 눈앞의 인형들을 가리키며 깔깔거렸다.

의자의 반도 차지 않는 자그마한 몸엔 보송보송한 백색 망토를 두르고 있었는데, 이마 위에는 익숙한 보석이 박혀 있었다. 저 하얀 아이가 음욕의 왕이구나.

주시하고 있으니 자연스레 눈이 마주쳤다. 묘하게 비웃는 눈길에 질 수 없어 이를 드러내던 그 순간 ‘삐-’ 하는 이명이 들리며 머리가 아파왔다.

-그대는 다른 이의 도움이 없이는 이곳을 벗어나지 못하지. 그러니, 우리 내기할래?

어린아이 특유의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금방 내 몸이 떠올랐고, 정신을 차리니 음욕의 왕의 다리 위였다.

-저들이 네가 바뀐 걸 알아차린다, 못 알아차린다. 어때?

무슨 헛소리야? 아래를 내려 보자 내가 있던 자리에 나와 똑같이 생긴 늑대가 서 있는 게 보였다. 그보다 이상한 건… 왜 다들 움직이지 않는 거지?

서둘러 달려가려는데 다리가 굳어서 움직여지지 않았다. 유일하게 움직이는 건 눈뿐인가?

음욕이 다리를 잡아 제 코앞까지 나를 거꾸로 들어 올렸다. 아마도 놀잇감으로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길잡이의 말을 들은 건가? 아무 말 하지 않은 건 기특한데, 나 슬슬 지루해지려고 해.

연회색 도는 눈동자가 징그럽게 느껴질 만큼 가까이 다가왔다. 눈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노려보자 마주친 왕의 눈이 뱀의 그것과 같이 뾰족해졌다. 돌연 손바닥을 위로 향한 채 파티원들이 서 있는 곳을 보며 백색의 원을 만들기 시작했다.

저건 위험하다. 이 정도 거리가 있는데도 빨려들 것 같다니….

“말할 테니까 그만해.”

-똑똑한 아이는 미워하지 않아. 나 그동안 심심했어, 우리는 죽음의 안식도 허락되지 않은 채 갇혀 있었거든! 이제 죽을 수 있다는데 그냥 죽긴 심심하잖아, 그치?

“아니, 그냥 죽어주면 안 돼?”

-너무하다. 쟤들 다 죽여 버리면 난 안 죽어도 되는데… 그럼 재미없잖아.

뭐지 외형뿐만 아니라 뇌까지 어린아이인가?

“아까 내기하자고 했지? 그래, 해. 대신 내가 이기면 얌전히 보석을 내주는 거야.”

-그럼 내가 이기면 나랑 여기서 살아. 대신 먼저 고르게 해줄게.

“평생? 그건 좀….”

-선택지를 줄까? 쟤들 다 죽이고 갇혀 산다, 내기한다. 어때?

“너 진짜 음욕의 왕 맞아? 꼭두각시가 아니라?”

-내 꼭두각시도 알아? 지금 저기 늑대로 있잖아. 아, 내가 어린아이의 몸을 하고 있어서 그런가? 글쎄, 빛의 왕이 어른의 모습으로 풀어놓으면 또 아무나 데려와서 붙어먹는다고 이렇게 어리게 만들었지 뭐야…. 세상 그 자체와도 같은 사람이라 우리가 왕이라도 그의 법칙을 어길 수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 너무하지?

“헛소리 말고. 나는 알아본다에 걸게, 너는 못 알아본다. 말 바꾸지 마.”

숨이 넘어가게 웃던 왕이 손바닥을 한 번 치자, 멈춰 있던 사람들이 주춤 움직이면서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것도 잠깐, 곧 탕! 하는 총성이 들리더니 바로 앞에 보이지 않는 벽이 얕게 진동하며 총알이 떨어졌다.

놀라서 몸을 확 움츠리는데, 음욕의 왕은 아무렇지 않게 의자 위로 드러눕고는 나를 가까이 당겨 안았다.

-그냥 기다리긴 심심하니까 조금 놀아줄까? 걱정하지마 이 안은 공격이 통하지 않으니까.

화환이 의아한 얼굴로 다시 한번 총구를 왕에게 가져다 댈 때였다. 목각 인형들이 스르륵 일어나더니 점점 파티원들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푸름이 빠르게 늑대의 몸을 들어 올려 안전한 곳으로 몸을 피하자 나르가 푸름의 뒤로 숨어들었다.

길드원들이 몬스터와 맞서며 전투할 때, 나는 저런 모습이었겠구나…. 어쩐지 조금 부끄러워졌다.

“야, 진짜 부탁인데. 그냥 죽어주면 안 돼? 내가 뮤첼인지 뭔지 얼른 죽여야 한다며.”

-음… 수인 세상이 어떻게 되는 나는 관심 없는데.

“너, 우리가 안 죽이면 못 죽는다며.”

어린애다. 귀도 얇고, 삶에 미련도 없는 것 같아 이대로 조금만 더 빌면 죽어줄 것도 같은데….

-근데, 너희들이 찾아와 줘서 이렇게 움직일 수 있게 됐잖아? 마침 심심했는데, 잘됐어.

이러는 와중에도 파티원들의 전투는 계속되었다. 나무로 된 인형이라 그런지 팔, 다리가 떨어져 나가도 일어났고 수도 많아 해치우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때, 화환의 뒤로 커다란 몽둥이를 든 인형이 가까이 가는 게 보였다 위험해…! 입을 벙긋하며 그쪽만 내려 보는데, 갑자기 큰 손이 등을 간지럽게 쓰다듬었다.

어쩐지 낯설지 않은 추행에 고개를 뒤로 돌아보자, 음욕이 익숙한 얼굴로 가까이 다가왔다.

-아하, 그대는 이 사내에게 관심이 있는 건가? 눈을 떼지 못하는군.

“이, 이 미친놈아!!”

-반응이 제대론데. 하지만 이 얼굴은 환술일 뿐 그대가 바라는 쾌락은 줄 수 없는데….

“야,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이거 안 놔? 좀 꺼지라고!”

화환의 얼굴을 한 음욕의 왕의 얼굴이 조금씩 가까워질 때였다. 다시 벽이 울렸고 놀라 아래를 내려 보자 거긴 고개를 갸웃거리는 화환이 서 있었다.

화환은 한 번 더 총구를 겨누려다 뭔가 이상한 걸 깨달은 듯 푸름의 손에 안겨 있던 늑대의 목덜미를 잡아 그대로 바닥으로 내리꽂았다.

어, 어떻게 나를 저렇게 내동댕이칠 수가 있어!? 내가 아닌데도 나의 모습을 하고 있어 그런지 온몸이 아픈 기분이었고, 화환은 그것도 모자랐는지 내 얼굴을 한 꼭두각시한테 총구까지 들이밀었다.

화환이 돌발 행동의 나르의 눈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다른 사람들마저 말리는 와중에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거, 바뀐 거잖아. 나르는 그것도 못 알아봐?”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내 모습을 하고 있던 늑대가 이마의 보석만 뺀 음욕의 왕과 똑같은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와 동시에 앞을 막고 있던 투명한 벽이 깨지며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모두의 시선이 ‘진짜’가 있는 곳으로 닿았다. 시선이 부담스러워 고개를 돌리자 생각한 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얼른 전투 태세를 갖춰 놀란 음욕의 얼굴을 팡, 하고 내려찍었다. 채하현이면 몰라도 화환은 어디든 때릴 수 있지.

내기에서 이긴 덕분인지 음욕의 몸에서 빛이 나며 원래의 모습으로 커지기 시작했다.

어서 놈의 품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던 나는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그 길로 화환에게 돌진해 정강이를 마구 걷어찼다.

빨리, 알아차렸, 으면, 더, 좋았, 잖아! 화환을 흠씬 두들겨 패는 내게 나르가 희게 질린 얼굴로 빠르게 날아왔다.

“겨미, 왜… 왜 거기서 나오냐! 여우가 있었지 않나!”

놀란 건 나르뿐만이 아니었다. 푸름도 손을 떨어대며 제 양손을 내려보더니 더러운 것을 만진 듯한 눈으로 한참을 중얼거렸다.

푸름아… 그건 꼭두각시래. 얘기해 주고 싶었지만, 속 안에 가득 찬 울분을 화환에게 푸는 일이 더 급했다.

바짓단까지 물며 짜증을 냈지만, 화환은 우리가 있는 곳으로 다가오는 음욕을 주시할 뿐이었다.

-대단한데, 생각보다 너무 빨리 알아차렸어. 조금 더 데리고 놀고 싶었는데….

“야, 내가 이겼어. 너 이제 죽어주는 거야.”

당당하게 음욕 앞으로 걸어가 앞발을 턱 하고 내딛자 음욕이 서운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반대로 나는 가슴 털이 빵빵하게 부풀 만큼 자랑스럽게 섰다. 나도 이제 업혀 가지만은 않는다.

“무슨 말이야? 바뀐 건 언제였고, 넌 또 그걸 어떻게 알았어?”

수박 누나의 말에 덩달아 나도 궁금해졌다. 대체 어떻게 알아차린 거지?

-안에 발을 들인 순간 바뀌었는데 여태 몰랐던 것인가? 이래서야 분노를 이길 수 있을지 걱정이네. 별의 아이야, 역시 나와 여기 있는 게 좋지 않을까?

“약속이나 지켜.”

고개를 팩 돌리며 답하자 나르가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내가, 겨미를 못 아라봐따…. 그래서는 안 되는 거신데… 겨미를, 흑….”

손으로는 나르의 등을 토닥여 주고 나와 음욕을 번갈아 보는 화환을 올려 보았다. 뭐 해, 어렵게 단두대에 올려놨는데 빨리 처리하지 않고.

그러나 화환은 내 의도를 모르겠다는 듯 고개만 갸웃거렸다.

“길마님, 그냥 죽이면 돼요. 저랑 내기했는데 이겨서 그냥 죽어줄 거예요.”

뿌듯함에 가슴을 펴며 얘기하자, 화환이 처음 보는 이상한 총을 꺼내 음욕의 보석에 겨냥했다.

-매정해, 도와주려고 했는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 천천히 눈을 감았다. 올라간 입꼬리는 늦은 안식을 찾은 사람처럼 평안해 보였다.

음욕의 왕이 심호흡하듯 숨을 들이키는 동시에 탕! 하는 총성이 울렸다.

[음욕의 왕 생명의 근원이 파괴되었습니다! 일곱 개의 죄악 제5의 죄 ‘음욕’의 던전이 클리어 되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숨겨진 던전이 클리어 되었습니다! 유우님의 파티 화환, 푸름, 수박맛사탕, 간계밥, 지우, 장꾸, 빛과송금, 뽀또, 햇살, 민초맛사탕, 보미 님의 명성이 온 세상에 울려 퍼집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187Lv 달성!

[일곱 개의 죄악 제5의 죄 ‘음욕’의 던전이 클리어 되었습니다! 파티원의 명성이 세상에 울려 퍼집니다.]

-최초 보상 아스모데우스의 백색 보석이 유우 님께 귀속되었습니다!

-최초 보상 음욕의 귀걸이:비밀이 모든 파티원에게 지급되었습니다!

-최초 보상 음욕의 생명의 근원이 화환 님께 귀속되었습니다!

-최초 보상 음욕의 안식 버프로 파티원 모두의 디버프를 해지합니다!

다음 왕에게 가기 전, 아직 울고 있는 나르를 달래는 중이었다. 내 주위를 빙 둘러앉은 사람들이 각각 배낭 안에서 군것질거리를 꺼내 나르에게 건넸지만, 나르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진짜 들어가자마자 바뀐 거야?”

“아뇨, 들어가서 둘러보다 음욕의 왕이랑 눈이 마주치자마자요. 근데 길마님은 진짜 어떻게 아셨어요?”

모두의 시선이 화환에게 닿자 씨익 웃어 보이던 화환이 내 턱을 쥐곤 살짝 위로 올렸다.

“표정이 달라서. 우리 애는 이렇게 멍한 얼굴인데 걔는 눈에 힘주고 안겨 있었거든. 게다가 인형들이 다 푸름이 쪽으로는 안 가길래 이상하다 싶었지.”

“그래서 다짜고짜 애를 패대기쳤다고? 얼마나 놀랐는데.”

“맞아, 저 싫어하세요?”

“아니, 꼭두각시가 얼굴을 바꾸고 나온다고 했잖아, 똑똑한 나르가.”

“길마, 끄윽, 나, 나는 똑또카지 아나… 흐윽!”

화환의 웃음이 짙어짐과 동시에 주위에서도 웃음소리가 터졌다. 우는 게 안쓰럽긴 했지만, 솔직히 너무 귀여운 거 아닌가?

“겸이 욕 소리가 들렸어. 미친놈아 하고. 둘러보니 내 얼굴을 한 놈이 하얀 애를 희롱하길래 일단 저지르고 본 거지, 뭐.”

화환이 배낭 안에서 음료수를 꺼내 나르의 앞으로 내밀었다. 이만큼이나 눈물을 쏟았으니 목이 마르긴 하겠지….

코를 훌쩍이며 음료를 마시던 나르가 겨우 진정한 듯 색색 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들었다.

“겨미, 미아나다. 내가 똑똑하지 아나서 몰라봤다.”

“알아본 사람이 이상한 거지. 말도 못 했는데. 괜찮아.”

나르가 연신 코를 훌쩍이며 작은 제 손바닥에 음료를 쏟아 내 입 아래로 갖다 대었다. 고여 있는 것 보다 흐르는 게 더 많았는데…. 진짜 강아지처럼 핥아먹으라는 건가?

이를 내어 보이려다가 아직도 발갛게 물든 콧방울이 보여 조용히 혀를 내어 먹는 시늉을 했다. 다행스럽게도 나르의 얼굴이 점점 밝아졌다.

“나르, 이제 분노의 왕에 대해 알려 줘야지.”

“그대들, 흑… 부활을 할, 수 있는가?”

“부활 스킬은 겸이랑 사탕 누나밖에 없지 않나?”

“스크롤이 있긴 한데, 던전 돌 때마다 힐러는 필수라 많이는 없어.”

권경배와 송금이 형의 대답에 나르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부활이라니 여기선 필수적으로 죽는다는 건가?

“분노는 공격이 강하다. 그가 쓰는 스킬은 한 명이라도 죽지 않으면 사라지지 않아. 게다가… 겨미는 절대 죽어서는 안 댄다. 그럼 던전 밖으로 쫓겨나 버리고 다신 들어올 수 없어.”

“어떤 스킬을 쓰는 건데?”

“왼발을 굴리면 땅이 갈라지고, 오른발을 굴리면 그 안에서 불길이 솟아, 한 명이 죽기 전까지는 꺼지지 않는다.”

“피하면 되지 않나?”

“장꾸는 멍청이인가? 그렇게 쉽지 아나. 발길이 닿는 순간 순식가네 불기둥이 솟아난다. 겨미는 한 방이면 주거.”

“발만 구르는 거면 쿨 타임은 없어?”

“이찌. 3분, 하지만 왕과 눈을 3초 이상 마주치면 안 대. 기억의 편린을 읽어 가장 화난 순간의 감정을 흡수하기 때문에 공격이 더욱 거세진다.”

“일단, 송금이 형 부활 스크롤 제작할 수 있어요?”

“만들 수야 있는데, 일단 지금 가진 재료로는 열 개도 못 만들어.”

“사탕이가 겸이 안고 날아다니면서 겸이 체력만 신경 써 줘. 보미 누나나 원거리 딜러들은 계속 딜 넣어주고, 희생은 근딜 먼저 하자.”

“아, 아까 음욕의 왕이 얘기해 준 게 있는데… 왕이 그 단상 아래로 내려오지 않으면 공격이 통하지 않는다고 했어요.”

“그건 걱정하지 마라, 겨미. 우리가 도착했을 때 이미 바닥에 내려와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있을 거시야. 그리고 그의 체력이 일정치 이하로 떨어지면 분노의 왕이 자신을 인도할 사람 하나를 지목한다.”

나르가 화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여태 칠죄종의 막타는 항상 화환이 쳤는데…. 그게 무슨 연관이 있는 건가?

“길마, 이제 더는 말 하지 아늘 수 없어.”

말하지 않는다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둘을 보자 제작 중인 송금이 형 빼고 모두의 시선이 따라 모였다.

그러자 화환이 난처하게 웃더니 갑자기 옷을 훌렁 까 배를 보여주는데, 거기엔 1차 전직 전에 보았던, 수인족 마을 사람들과 같은 검은 얼룩이 곳곳에 퍼져 있었다.

화들짝 놀라며 내 눈을 피하는 사탕 누나와 어쩔 줄 몰라 하는 푸름이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나태 던전이 끝나자마자 가슴부터 이렇게 멍이 생겼어. 나르한테 물어보니까 칠죄종 막타를 내가 쳐서 ‘죄를 함께 짊어지는 자’라는 저주를 받은 거였고.”

“겨미, 저주를 풀기 위해선 모든 칠죄종의 생명의 근원이 필요하다.”

“누나도 알고 있었어요?”

“다 알고 있었어, 생명의 근원은 귀속 아이템이라…. 아무것도 모르고 막타라도 치면 안 되니까 먼저 우리한테 얘기한 거고. 송금이 형은 힐 포션 때문에, 사탕 누나는 힐 할 때마다 환이 형 체력이 이상할 만큼 너무 떨어지니까….”

권경배의 대답에 눈만 끔뻑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전부 알고 있는 이 중요한 사실을 나만 몰랐다는 거네. 그것도 내 던전에서, 나를 도와주다 받은 저주를?

허탈함과 함께 짙은 무력감이 온몸을 감쌌다. 그냥 나가버릴까 하다가 화환의 저주를 풀려면 던전을 클리어 해야 한다는 사실에 그럴 수도 없어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그러니까 내 던전에 나 도와주다 얻은 역병인지, 저준지를 나만 모르고 있었다는 거네. 사람 놀려요? 나르, 너는 비밀 없다며. 아까 잠깐 날 못 알아본 걸로 울고불고하더니… 이렇게 속이는 건 아무렇지도 않아?”

모든 게 삐딱해 보이기 시작했다. 자러 가기 전 주던 티켓도 빨리 저주를 풀려는 발악이었으며, 나르의 레벨 타령도 그것 때문이었나?

선의라고 받았던 것들이 모두 이기적인 산물이었음을 알아차린 기분이었다.

“걱정할까 봐, 네 탓이라고 속상해할까 봐 말을 못 한 거지.”

“그렇게 똑똑하시니까, 다 밝혀졌을 때 내 기분이 얼마나 좆같을지도 다 아셨겠네.”

놀란 사람들의 얼굴도, 다시 울먹이는 나르의 얼굴도 보고싶지 않아 사람들을 등진 채 포탈 안으로 사라졌다. 제일 한심한 건 나 자신이었다.

어떻게 몰랐지? 작정하고 숨겼다고 해도 그렇지. 왜 나는 이렇게 약해서 도움받고 있는 주제에 애먼 사람한테 피해까지 입히는 건지.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자고 싶어졌다. 숨길 거면, 영영 숨기지.

[귓속말]간계밥 : 너 혼자 생각할 시간 필요한 건 아는데 일단 던전부터 클리어하자, 겸아.

[귓속말]유우 : 너도 진짜 개**야.

[귓속말]간계밥 : 멍멍

친구 채팅과 귓속말 우편이며, 거래 등 모든 걸 다 막아둔 채 던전 입장하기를 눌렀다. 암만 머릿속이 복잡해도 저주는 풀어야지….

[일곱 개의 죄악 제4의 죄 ‘분노’의 던전에 입장하셨습니다! 무사히 클리어하시고 명성을 널리 퍼트리세요.]

- 던전 페널티 발생. 아이템 획득 확률이 소폭 감소합니다.

- 던전 페널티 발생. 공격력이 소폭 감소합니다.

- 던전 페널티 발생. 방어력이 소폭 감소합니다.

- 던전 페널티 발생. 회피율이 소폭 감소합니다.

- 던전 페널티 발생. 포션 사용 쿨타임이 소폭 상승합니다.

[칠죄종 던전 발견! 최초 발견자에게 칭호가 지급됩니다.]

‘분노’

-칭호 효과로 방어구 관통 효과가 7% 증가합니다. 칠죄종 칭호를 모두 획득 시 칭호 효과가 대폭 상승합니다.

텔레포트를 이용해 잠시 나갔다 왔음에도, 사람들은 굳이 어디 갔다 왔냐며 캐묻지 않았다. 나르도 화환의 곁에 붙어 나를 힐끔거릴 뿐이었다.

처음 보이는 건 중앙에 홀로 서 있는 분노의 왕의 모습이었다. 권경배와 비슷하게 새카만 머리칼에 검은 피부가 시선을 끌었다. 눈동자만은 붉게 빛났으며, 우리가 들어서자 고개를 들어 다 찢겨 밑단이 너덜너덜한 망토를 펄럭이며 다가왔다.

사탄과 똑같다는 웅성거림이 잠깐 들렸지만 쳐다보지도 않았다.

먼저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사탕 누나가 나를 다시 고쳐 안고서 하늘 위로 떠올랐다. 등을 잔잔히 토닥이는 손길에 어깨가 움찔 떨렸지만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 어깨에 얼굴을 묻을 뿐이었다.

보미 누나의 선제공격으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한 대 제대로 맞은 분노의 왕이 나르의 말대로 발을 굴렀고, 쿠구궁 하는 커다란 소리와 함께 땅이 갈라졌다. 반대편 발을 구르면 곧바로 긴 불기둥이 치솟았다.

하늘에 있는 우리도 안전하진 않았다. 우왕좌왕 피하는 파티원들이 우리가 서 있는 곳 아래까지 다 닿았고 나르의 고함에 뿔뿔이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사탕 누나, 구석으로 피해 계세요! 있는 자리까지 바로 확인 못 해요!”

지우의 소리에 사탕 누나가 얼른 구석진 곳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아직 한 명도 죽지 않은 탓에 분노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몇 번의 불길이 더 솟았을까, 드디어 죽은 사람이 나와 불길이 사그라들었는데, 처음 희생한 사람은 장꾸 형이었다.

일부러 불길을 맞은 건지 홀로 회색으로 변해 그 자리 그대로 누워 있었다.

[파티]장꾸 : 다들... 왜 피해 맞고 죽어야지...

[파티]수박맛사탕 : 나는 원딜인걸?

[파티]푸름 : 나는 피통이 큰걸?

[파티]장꾸 : 겨마, 형아야.. 형아가 1등으로 희생해따!

장꾸 형의 죽은 위치가 아슬하게 스킬 사정거리가 닿았다. 덕분에 처음으로 리저렉션(부활)을 써 볼 수 있었다. 도움이 안 되니 이런 거라도 해야지.

장꾸 형의 말에 대답이 없자 사람들이 내 쪽을 계속해서 흘깃거렸다. 마음을 다르게 먹어 보려 해도 서운함과 미안함이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몇 명이나 더 죽었을까, 분노의 왕의 패턴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발 구르기의 쿨에 맞춰 공격을 마구 퍼붓기 시작했다.

세 번쯤 턴을 지났을까, 분노의 왕이 하늘을 올려 보며 무언갈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거리도 꽤 멀었고, 워낙 작게 웅얼거린 탓에 들리진 않았는데 갑자기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하더니 마찬가지로 붉은 핏빛 비가 한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맞아도 아무런 효과가 없는 줄 알았던 그 비는 분노의 왕이 다시 한번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자 바늘처럼 날카로워졌다.

그게 몸에 닿는 순간 눈앞이 번쩍일 정도로 아프더니 체력이 급하게 떨어졌다. 얼른 자힐과 포션을 마셨지만 떨어지는 붉은 비는 쉼 없이 몸을 때렸다.

사탕 누나까지 얼른 상체를 웅크려 최대한 가려주면서 힐을 내게 퍼부어 댔다.

“수박아!!”

실드가 나타난 건 그때였다. 사탕 누나의 고함과 함께 생겨난 실드는 겨우 나만 들어올 정도로 작았다.

쿨이 돌아오는 족족 힐을 사용한 덕분에 내 체력은 안정권이었지만, 아래 파티원들의 상황은 그 반대였다. 대체… 이런 스킬까지 구사할 줄이야.

수박 누나의 실드가 깨지기 무섭게 이번에는 푸름의 실드가 머리 위로 쳐졌다. 다들 포션만 들이부으며 겨우겨우 부활을 이어 갔다.

쉴 틈 없이 쏟아지는 비에 공격마저 잘 되지 않자 나르가 날아올라 실드로 머리 위만 겨우 가렸다.

“겨, 겨미. 마력을 써도 되나?”

조심스런 물음에 고개만 끄덕이곤 배낭 안에 있던 마력 포션을 꺼내 물자 이내 마력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래도 저번 나태의 던전보다 힘들지 않았는데도 중간중간 사탕 누나의 활력이 한 번씩 들어와 이 던전 안에 있는 사람들 중 가장 멀쩡한 사람은 나 혼자가 되었다.

-아름다운 이 핏빛의 비를 보아라. 내가 죽기에 더없이 어울리는 곳이군. 그래, 그대. 나와 같은 향이 나는 그대가 내 마지막 상대가 되어주어야겠어.

분노의 왕이 붉은 뿔을 하나 부러트리자 바닥에 알 수 없는 문자들이 새겨지더니 붉은 빛을 내며 위로 떠올랐다. 이어 분노의 왕과 화환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벽으로 밀쳐졌다.

간당간당하게 피가 남은 지우와 권경배, 수박 누나마저 쟂빛으로 변하며 죽어버렸다. 그걸 확인한 송금이 형이 달려가 앞에서 부활 스크롤을 찢자, 원래대로 돌아오며 포션을 꺼내 마시기 시작했다.

화환과 분노의 왕, 둘의 싸움은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화환은 분노의 발 구름을 요리조리 피하며 날개를 펼쳐 가볍게 떠올랐는데, 저주 때문인지 곳곳에 털이 빠져 날개가 꽤 불쌍한 모양새였다.

분노가 등 뒤에서 긴 검을 뽑을 때였다. 원딜과 근딜 싸움인가 싶어 고개를 쭉 뻗어 그쪽을 보는데 나르의 목소리가 가까이서 들려왔다.

“겨미, 이제 나르랑 얘기하지 않을 거신가?”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얼굴을 돌리자 나르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천천히 다가왔다.

“비밀로 한 게 아니었다! 조, 조금 있다 얘기해 주려고 했는데… 겨미가 슬퍼할 거래서….”

나랑 제일 친하다고 했으면서, 다른 사람들과 작당이나 한 괘씸한 어린이 주제에……. 미워할 수도 없게 이렇게 쪼르르 달려와 귀여운 말을 하니 저절로 한숨이 났다.

나르만 봐줄까 하다, 간장 종지만 한 내 마음이 안 된다고 소리쳤다. 하지만 뮤첼은 없애야 하니 아예 모른 척하기도 뭐했다.

“당분간 사탕 누나랑 보미 누나랑 다녀, 너.”

무기 파밍은 해야 하니까. 나르는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알겠다고 할 생각이었는지 굳이 내 앞으로 와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 앞발 위로 제 손을 살며시 올렸다.

잔뜩 내려간 눈꼬리와 귀가 먼저 눈에 들어왔는데, 측은한 얼굴과 잔망 짓으로 해결하려고 이러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전투는 이제 막바지를 향하고 있었다. 체력이 거의 없어진 왕의 이마로 총을 겨누는 화환을 그냥 볼 리 없는 분노가 순식간에 화환의 눈앞으로 이동해 배에 검을 박아 넣었고, 그 순간 화환도 총알을 분노의 이마 중앙에 있는 보석에 명중시켰다.

이마의 보석이 깨진 분노의 왕이 무릎을 꿇자 온몸이 잿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화환이 서둘러 포션을 마셨고, 바닥으로 나를 내려준 사탕 누나가 그쪽으로 달려가 힐을 넣었다. 모든 것이 물 흐르듯 진행되었다.

[분노의 왕 생명의 근원이 파괴되었습니다! 일곱 개의 죄악 제4의 죄 ‘분노’의 던전이 클리어되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숨겨진 던전이 클리어되었습니다! 유우님의 파티 화환, 푸름, 수박맛사탕, 간계밥, 지우, 장꾸, 빛과송금, 뽀또, 햇살, 민초맛사탕, 보미 님의 명성이 온 세상에 울려 퍼집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198Lv 달성!

[일곱 개의 죄악 제4의 죄 ‘분노’의 던전이 클리어되었습니다! 파티원의 명성이 세상에 울려 퍼집니다.]

-최초 보상 사탄의 흑색 보석이 유우 님께 귀속되었습니다!

-최초 보상 분노의 반지:악 이 모든 파티원에게 지급되었습니다!

-최초 보상 분노의 생명의 근원이 화환 님께 귀속되었습니다!

-최초 보상 분노의 안식 버프로 파티원 모두의 디버프를 해지합니다!

던전 클리어 알림이 뜨자 긴장이 풀렸는지 모두 자리에 주저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힘들만도 하지. 하루에 두 명의 칠죄종을 없애느라 새벽 두 시가 넘어가는 시간까지 전투를 치러야 했으니.

지쳐 늘어진 사람들 사이를 지나 포탈로 걸어가려는데 갑자기 몸이 번쩍 들렸다.

“겸이는 나랑 얘기 좀 하고, 다들 고생하셨어요.”

싫다고 졸린다는 말을 하려고 고개를 들자 어느새 나태의 저주가 목까지 타고 올라 턱 바로 아래까지 얼룩진 게 보였다.

마음이 절로 불편해져 얌전히 있으니 사탕 누나가 다른 사람들을 모아 얼른 던전을 벗어났다.

나르마저 말을 잘 듣는다는 걸 보여주려는 듯, 사탕 누나의 등에 딱 달라붙어 나를 빤히 보며 밖으로 향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자리를 비우자 던전 안은 화환의 숨소리까지 다 들릴 만큼 고요해졌다.

“자기야.”

적막함에 익숙해질 때쯤 들리는 목소리에 등이 움찔거렸다. 거기서 끝난 게 아니라 나를 양손으로 안더니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제 얼굴을 비비적거리기 시작했다.

불현듯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숨결에 얼른 손을 들어 올려 왼쪽 뺨 위로 발바닥 자국이 깊게 나도록 때렸다. 픽하는 웃음소리에 다시 열이 올라 손발을 마구 버둥거렸다.

“아직 기분이 좆같아?”

“그럼 너 같으면 좋겠냐?”

“이제 반말하는 거야? 안 되겠다. 반말하는 것도 섹시해서….”

“이 또라이 새끼가!!”

“뽀뽀해 주면 풀릴까? 아까 음욕이 겸이한테 뽀뽀하려는 것 같던데. 그것도 내 얼굴로.”

어,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본 거지? 아무 대답 없이 가만히 있는 걸 긍정으로 받아들인 건지 미친놈의 얼굴이 조금씩 가까워졌다.

지금 몸으로 들려 있을 때는 어떻게 피할 방법이 없는데…!

화환의 얼굴이 더 가까워지기 전, 히든 스킬을 해제한 후 손을 뻗어 그 입 앞을 턱 소리가 나도록 막았다.

그러나 미친놈은 언제나 나보다 한 수 위였다. 입술이 닿는 모든 곳에 쪽쪽 거리며 입을 맞추기에 화들짝 놀라 서둘러 손을 떼었다.

또 무슨 엄한 짓을 당할라. 저만큼 떨어져 옷에 벅벅 문지르고 있는데 화환의 입꼬리가 요상하게 올라갔다.

“그 모습으로 해줬으면 해서 변한 거야?”

“혹시 저 지금 벽 보고 얘기하나요?”

“자기야, 나 반말해 주는 게 더 좋대도.”

화환이 희한하게 말꼬리를 늘리며 내 어깨에 얼굴을 비볐다. 미인계다, 미인계가 분명하다.

나르가 얼굴로 밀어붙이는 걸 누구한테 배웠나 했더니 바로 앞에 온갖 요망을 다 떨고 있는 이놈에게 배운 거였다.

“얘기 좀 하자며, 할 말이 내 기분 물어보는 거였어요?”

“아니, 화 안 풀 거냐고. 예쁜 척도 하고, 그래도 안 되면 몸으로….”

“어이가 없어서 화도 안 나네.”

“내가 숨기자고 했어. 몇 날 며칠을 기죽어 있는 거 안 보고 싶어서. 차라리 화내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서, 그래서 숨겼어.”

“…….”

“화내는 건 이렇게 풀어주면 되는데 기죽은 건 내가 풀어줄 수가 없잖아.”

“핑계가 너무 거창해서 홀릴 뻔했네. 지금 길마님이 저 바보로 만든 건 모르죠? 그렇게 생각해 주는 게 더 비참하다고요.”

“이제 알았으니까 다시는 안 그럴게, 화 그만 내면 안 돼?”

삐죽 올라가는 입꼬리를 가리려 떼어내지 않고 있었더니 제가 좋아서 그러는 줄 알곤 더 얼굴을 비비기 시작했다.

“좀 떨어져요, 풀렸으니까.”

“우리 자기가… 이런 걸 좋아하는구나.”

“아니요, 싫어하는데요?”

“자기라고 그래도 다 알아듣네.”

화환이 팔을 크게 벌리곤 내 얼굴을 내려 봤다. 뭐 하는 짓인가 싶어 가만히 보고만 있자 이젠 대놓고 예쁜 척인지 입술을 삐죽이다 입을 열었다.

“화해했으니까 안아 줘야지.”

“이건 또 무슨 지랄이에요? 레퍼토리가 너무 다양해서 따라갈 수가 없네.”

“원래 엄마 아빠가 화해할 땐 안아주는 건데.”

“참… 화목한 가정이네.”

그런 건 몰랐다. 철도 들기 전, 빗길 교통사고로 곁을 떠난 부모님 대신 친할머니의 손에 컸으니 말이다.

입꼬리만 올린 화환을 향해 주춤주춤 팔을 벌리곤 가볍게 한 번 안아 준 뒤 떨어지는데 뭔가 이상했다. 엄마, 아빠? 그건 부부가 아닌가?

“길마님, 근데 엄마 아빠면 부부잖아요.”

“으응. 이제 나랑 결혼해야겠다, 겨미는.”

눈까지 접으며 예쁘게 웃어대는 미친놈의 어깨를 밀어내곤 서둘러 포탈로 향했다.

또 속았다. 저 얼굴에 홀리면 안 됐는데…. 계속 현실의 얼굴이 아른거려 뒤에서 부르는 소리를 무시한 채 밖으로 나왔다.

던전 내부가 어두워 그런지 스치듯 지나간 화환의 귀가 조금 붉은 것 같았는데… 착각이겠지 싶어 경험치 던전 안으로 들어간 뒤 로그아웃을 했다.

초인종 소리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뜨니 아직 9시도 채 되지 않은 새벽이었다. 이 시간에 어떤 정신 나간 새끼가 찾아온 건지.

겨우 눈을 떠 현관문을 열자 거긴 권경배와 사탕 누나, 푸름이 서 있었다.

“봐, 너무 이르다고 했잖아 내가.”

“그래도 경배 형이 겸이 형 새벽마다 운동 간다고 했단 말이야.”

“그건, 제가 일찍 잤을 때의 얘기가 아닐까요…?”

떠지지 않는 눈을 부비며 문을 활짝 열어주자 세 사람이 눈치를 살피다 안으로 들어왔다.

“아니, 너 채팅, 우편 전부 거부해 두고 아무 말 없길래, 걱정돼서….”

“아, 어제 그대로 경험치 던전 돌리고 나가서 그런가? 아무튼, 뭐 마실래요?”

푸름이 들고 있던 음료 박스를 내밀며 물이면 된다 얘기했다. 어제 일이 마음에 걸려서 이렇게 새벽부터 찾아온 거겠지 싶어 거실 소파에 앉힌 후 냉장고를 열어 봤지만 마실 만한 게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원두를 갈아 커피 머신으로 내린 후 컵에 얼음을 잔뜩 타 거실로 들고 나왔다. 작은형이 커피 냄새가 좋다며 내려 먹어 보라고 사준 건데 써 보니 향이 좋긴 좋았다.

“저 세수만 금방 하고 나올게요. 마시고 계세요.”

양손으로 공손하게 받아드는 모습이 조금 웃겼다. 얼른 가글과 세수를 하고 문을 열자 사탕 누나의 목소리가 작게 들렸다.

“어떻게, 얼굴 보니까 더 미안해서 사과도 못 하겠잖아.”

“내 말이, 저 밤새는 바람에 피곤해 죽을 것 같았는데 겸이 형 얼굴 보니까 긴장돼서 잠이 다 깼어요.”

“어제 환이 형이 잘 풀었다잖아. 안 그랬으면 문도 안 열어 줬을 거야. 긴장하지 마.”

셋이서 머리를 맞댄 채 속삭이는 모습이 꼭 적의 잔당들 같았다. 일부러 문을 소리 나게 닫으니 후다닥 떨어져 제자리로 돌아가는 세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주방에서 물 한 병을 가지곤 비어 있는 자리에 앉았다. 세 사람은 3인용 자리에 옹기종기 모여 주변만 둘러보고 있었다.

“겸이 형, 집 좋다. 혼자 사는 거예요?”

“그러게, 저쪽에 채하현 사는데 되게 가깝네. 이따 불러서 밥이나 같이 먹을까…?”

푸름이 어색하게 웃으며 삐걱거리는 목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얘기하자 사탕 누나도 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 그 미친놈이 또라이이기까지 해요…. 이 말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그냥 손에 들린 물병을 열어 막 두 모금 마셨을 때 권경배가 입을 열었다.

“야, 솔직히 내가 숨기자고 했어. 너 보기보다 소심하다고. 속인 건 미안한데 다 너 생각해서 그런 거야.”

“누가 뭐래?”

“너 화난 거 아니야?”

“응, 어제 얘기 길마님이랑 얘기하고 잘 풀었어.”

“설마, 진짜 화환 형이 무릎 꿇고 빌었어?”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싶어 권경배를 빤히 보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화환에게 속기라도 한 듯한 얼굴이었고, 사탕 누나와 푸름은 웃음을 참는 얼굴로 권경배만 힐끔거렸다.

“뭔, 개소리야.”

“그치, 아니지?”

무릎은 무슨, 실컷 희롱당한 건 난데…. 대답할 필요도 없는 얘기에 고개만 끄덕이곤 소파 뒤로 기대어 앉았다.

그나저나 이렇게 이른 시간부터 쳐들어온 셋을 어떻게 하지? 밥은 아직 이른 시간이라 안 넘어가지 않을까?

혼자 고민에 휩싸여 세 사람을 멀뚱멀뚱 보고만 있자 권경배가 괜히 쫄았다는 듯 소파에 등을 기대앉았다.

“뭐, 이왕 만난 김에 저 아래 사거리 새로 생긴 캡슐 방이나 갈래요?”

“나 아직 덜 잤는데?”

“형, 저도 한숨도 못 자고 끌려나왔는데….”

“원래 그 나이 땐 이틀은 안 자도 버틸 수 있잖아.”

“경배 형… 저희 한 살 차이 나는데, 형도 꼰대예요?”

“야, 나도 맘 놓이니까 게임 하고 싶다. 가자, 이수림.”

권경배에겐 소심한 반항을 하던 푸름이 사탕 누나의 말엔 아무런 대꾸도 못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누나 말을 잘 들어야지.

가기 싫다는 나를 경치 두 배 이벤트가 있다는 말로 데려온 곳은 새로 생긴 캡슐 방답게 깨끗하고 넓었다.

잠깐 걸어오는 것도 땀이 날 만큼 더운 날씨에 짜증 내던 것도 잊고, 캡슐 안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늘 쓰던 기계가 아니라 조금 불편했지만 익숙한 BGM에 바로 로그인 후 게임에 접속했다.

[길드]민초맛사탕 : 겸이 어디야?

[길드]유우 : 저 어제 던전 앞이요.

[길드]수박맛사탕 : 뭐야 왜 넷이 같이 들어와?

[길드]푸름 : 저랑 누나랑 형이랑 아침에 겸이 형 집 쳐들어갔어요.

[길드]수박맛사탕 : 겸아, 따라 해봐.

[길드]유우 : 겸아, 따라 해봐.

[길드]수박맛사탕 : 싫어요.

[길드]유우 : 싫어요.

[길드]수박맛사탕 : 안 돼요.

[길드]유우 : 안 돼요.

[길드]수박맛사탕 : 도와주세요.

[길드]유우 : 도와주.. 아 누나ㅋㅋㅋ 뭐예요

[길드]수박맛사탕 : 저 진상들이 괴롭히면 외치는 거야.

“겨미, 왔나.”

사탕 누나와 함께 나타난 나르가 쪼르르 날아와 내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어제 수인으로 변하고 접속 종료를 한 탓에 아직 그 모습이었는데 지은 죄가 있는 나르가 마침 잘 됐다 싶었는지 내 얼굴에 마구 얼굴을 비비며 애교를 부려댔다.

“응, 누나 나르랑 있었어요?”

“접종하기 전까지? 다시 들어오니까 길드 홀에 혼자 있어서 데려다줬지. 나르, 무기 던전 다음이 나야?”

“그러타. 보미가 마지막이지.”

“나르가 길드성 지키미네.”

“겨미, 나 말 잘 들어따. 보미랑 사탕 잘 따라 다녔는데 아직 화났나?”

“아니, 이제 괜찮은데 또 거짓말하면 날 것 같아.”

“응, 응. 다시는 안 하게따.”

“그럼 됐어. 나 레벨 200 됐는데 누나 바빠요?”

“각성 던전? 잠시만, 겸이 던전 노예 불러줄게.”

내가 노예가 있었나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잠시 뒤 푸름과 간계밥이 소환되어 나타났다. 그뿐만 아니라 길드 마스터 접속 알림이 울리더니 화환마저 눈앞에 나타났다.

“넷이 같이 있다며, 나 빼놓고. 겸아, 나 서운해.”

“어이없네. 자느라 전화도 안 받은 주제에.”

“뭐야, 여기 네 명이 제 던전 노예예요?”

“한 명 더 있지. 보미 언니. 아직 접속을 안 해서….”

“근데 각성 퀘 던전인지 아닌지도 모르는데.”

“던전 맞을걸요. 수인 1차가 수인 마을, 2차가 늪 수색, 3차가 헤미르였고, 4차는 정령의 숲이에요.”

“나 2차는 나태 보상으로 그냥 완료됐는데 헤미르는 돌았으니까 정령의 숲이 맞으려나?”

푸름이 고개를 끄덕이며 늪 수색은 지옥이라고 얘기했다. 독 두꺼비를 잡아야 하는데 그 두꺼비가 늪 중앙의 연꽃 위에 앉아있었다며 늪이라 발이 빠져 걷기도 힘들었다며 울 듯 말하는 푸름에 괜히 내가 미안해졌다. 근 이틀을 도전했다며, 거긴 온종일 비가 내리는 지역이라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어깨를 들썩였다.

“그, 전에 파란 구슬 그것도 저 2차 때문에 만든 거예요. 깨고 나니까 완성됐지만.”

“다행이다. 거긴 그냥 넘어가서.”

“자기야, 내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길마님이 있어서 더 걱정이죠.”

하늘을 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편하긴 하겠지만 언제까지고 도움만 받을 순 없지 않은가. 화환을 등진 채 푸름을 바라보자 어색하게 웃던 푸름이 눈을 피했다.

“그, 그래도 3차는 쉬워요! 큰 메뚜기만 잡으면 되니까.”

“곤충… 말하는 거지?”

“네. 엄청 크긴 해도 곤충이에요. 걔가 대지의 정령이 아끼는 씨앗을 훔친 것 때문에 시작되거든요.”

그 씨앗은 심기만 해도 주변의 땅이 축복을 받는 씨앗이라 훔쳤다는 푸름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곤충이라니…. 아니 벌레잖아. 외관상 해충인 메뚜기의 얼굴이 떠올라 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어렸을 때 귀농을 하시는 할머니를 따라 시골로 가서 몇 년을 살았었는데, 그때 논길을 따라 걷던 중, 메뚜기 한 마리가 얼굴로 튀어 기절한 적이 있었다. 그 뒤로는 벌레의 그림자만 봐도 기겁을 하는데…….

권경배는 불쌍하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사탕 누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시절, 메두기를 먹어 본 적이 있다며 웃었다.

“우리 겨미, 또 안겨 가겠네.”

“겸이 형 벌레 무서워해?”

“어렸을 때 시골에 살았었는데, 그때 메뚜기가 얼굴로 날아온 적이 있거든.”

“와… 기절했겠는데?”

“네, 눈 뜨니까 할머니가 부채질해 주고 계셨어요.”

그땐 참 어렸지… 하지만 지금은 컸으니까 괜찮을 거다. 히든 스킬을 쓰자, 나르가 자기가 안아 주겠다며 내 등 위에 앉았다.

“겨미, 작아져라!”

작아진 몸을 확인한 후 퀘스트 창에 뜬 4차 각성을 눌렀다. 정령의 마을로 이동하자마자 파티원 소환으로 모두를 불러모은 뒤 던전으로 입장했다.

던전 안은 또 다른 세상이었다. 높게 떠 쨍쨍하게 빛나는 해와 푸른 하늘, 그리고 잘 익어 고개를 숙인 벼 사이로 난 흙길에 또 좋지 않은 추억들이 떠올랐다.

“와, 진짜 논이잖아….”

“형, 이 던전 한 번도 안 와 보셨어요?”

“응, 수인족이 별로 없으니까. 수인 각성 퀘는 5차 한 번 가본 게 다야.”

푸름과 권경배의 목소리에 양손을 얼른 눈을 가렸다. 세이브 존 밖으로 이동하는지 몸이 두둥실 날아올랐다.

웽- 하는 날갯짓 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사탕 누나의 욕하는 소리가 가까워지는 걸 보니 몬스터가 엄청 징그러운 건가 하는 의문에 그래선 안 됐지만, 눈을 가린 손을 내려 실눈을 뜨는데 미쳤다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일반 매미의 백 배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매미 몬스터 여러 마리가 이쪽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던전이고 뭐고 살기 위해서는 세이브 존으로 가야 했다. 꿈에서도 나올 징그러운 모습이라 다리를 버둥거리니 나를 붙잡은 나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겨미, 움직이지 마라. 나르 앞이 잘 안 보이지 않나.”

몸이 다른 곳으로 옮겨진 건 그때였다. 그사이 코스튬을 바꿔 입은 건지, 화환이 왼팔을 가리는 망토를 두른 채 나를 안아 들어 그 안으로 숨겨주었다.

조금만 덜 미친놈이었으면 꼬리라도 흔들며 고맙단 말을 했을 텐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그대로 품 안에 얼굴을 박았다. 곧 화환의 신들린 듯한 사격이 시작됐다.

“미쳤네. 곤충 변태가 만든 건가? 개리얼해.”

“푸름아, 저 새끼 안 죽었잖아! 다리 움직이는 것 봐.”

사탕 누나의 비명과 어우러진 매미의 날갯짓 소리는 갈수록 커져만 갔고, 수가 더 늘어난 것 같았다. 설마 보스라는 메뚜기도 저렇게 크진 않겠지…?

다행히 수만 많을 뿐 화환의 망토가 간간이 펄럭이기만 하는 걸 보면 놈들의 위력은 그저 그런 것 같았다.

물론 나 혼자만 얼굴을 다 가리고 안겨 있었기에 자세히 확인할 길이 없었지만…….

얼마나 지났을까. 화환이 망토 자락을 살짝 열어주었다. 얼굴을 밖으로 내밀자 눈앞에 잿빛으로 변한 곤충의 사체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발버둥을 쳐서 바닥으로 내려온 나는 가장 가까이 있는 매미를 발로 차다 흙을 뿌렸다.

갑자기 날아들지만 않으면 무섭지 않지. 발을 털곤 화환의 발치로 다가가자 미친놈은 웃으며 나를 안아 올렸다.

“쟤는 갈수록 뻔뻔해지네.”

“왜, 귀여운데. 죽은 건 안 무서운가 봐.”

무서운 게 아니라 싫은 거다. 예상치 못하게 날아와 예상치 못한 곳으로 붙어대는 것이.

두 번째 페이즈는 애벌레였다. 왜 진화가 아닌 퇴화를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다시 화환의 팔에 얼굴을 묻자 사탕 누나가 저 꼬물거리는 것 좀 보라며 소리를 쳤다.

“사탕이! 나, 나는 싸워야 한다! 이거 놓아라!!”

사탕 누나가 나르를 붙잡고 놔주지 않는 소리였다.

화환은 이 각양각색의 벌레들이 아무렇지도 않은지 조용히 사냥만 하다 한 번씩 흘러내리는 내 몸만 추어올릴 뿐이었다.

마지막 페이즈는 푸름이 얘기한 대로 메뚜기였다. 그 몬스터 다섯 마리가 꽃이 심겨 있는 자그마한 땅을 감싸고 지키고 있다며, 밖이 보이지 않는 내게 화환이 이야기해 주었다.

곤충들이 집채만 하다는 둥, 이빨이 날카로워 저 정도면 겸이는 한 번 씹히면 없겠다 놀려대다 결국 몇 대를 얻어맞고 나서야 얌전히 무기를 쥐었다.

던전의 보스는 보스였다. 껍질이 단단해 검이 박히지 않는다며 광폭화 쓸 테니 다들 물러서라는 권경배의 말을 끝으로 건물이 무너지는 듯한 큰 소리가 났다.

저게… 곤충 잡는 소리가 맞는 건가? 혹시 화환이 거짓말을 하는 건가 싶어 망토 사이로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었다.

먼저 반토막이 난 메뚜기의 머리가 보였고, 조금 더 시선을 틀자 하얗고 몽글거리는 것이 흘러나오는 중인 하체가 보여 서둘러 다시 고개를 처박았다.

하아…. 오늘 밥은 다 먹었네.

던전을 클리어 하고, 무사히 각성도 마쳤지만 아까 본 하얀 무언가가 계속 떠올랐다.

던전을 갈 기분도 그렇다고 퀘스트를 할 기분도 아닌지라 정령의 숲을 구경하고 오겠다는 푸름과 사탕 누나에게 나르를 맡겨둔 뒤, 화환과 권경배를 끼곤 길드 홀로 돌아왔다.

화환의 무릎 위에 당연하게 누운 나는 팔을 대 자로 뻗고는 잠시간의 휴식을 가졌다.

“야, 수인을 왜 안 하는 줄 알겠다….”

“나도. 와 씨… 나 아까 그거 베면서 토할 뻔한 거 아냐?”

“그러게 좀 얌전히 죽이지.”

한참 의자에 앉아 빈둥대던 권경배가 별안간 벌떡 일어나더니 회개하겠다며 천족 마을 성당으로 간다는 말과 함께 사라졌다.

한 놈 사라졌다고 이렇게까지 조용할 일인가. 주위가 고요해지자 너무나 당연하게도 졸음이 찾아왔다.

아까 본 매미의 확대 버전 곤충이 내 눈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어 화들짝 놀라며 눈을 떴다. 두어 번 눈을 깜빡이는데 화환이 희한한 걸 보는 듯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행히 길드 홀이었다. 화환은 테이블 위에 작은 병들을 늘려두곤 무언가 하는 것 같았는데, 맞은편엔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은 보미 누나까지 보였다.

“겸이 꿈꿨어? 우리 코코도 한 번씩 발작하듯 짖으면서 깨던데.”

“매미가… 아까 발로 차서 그런가?”

다시 생각해도 등골이 서늘했다. 역시 아까 권경배를 따라 성당으로 갔어야 했나?

소름이 끼친 탓에 기대고 있던 화환의 다리에 등을 비비자 갑자기 몸이 붕 들렸다. 뭐 하나 지켜봤더니, 내 등을 더듬더듬 쓰다듬으면서 제 욕심을 채우고 있었다.

“보미 누나, 길마님이 저 추행해요!”

보미 누나는 그냥 깔깔거리며 웃기만 했다. 그 옆에서 미친 길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겸이 히든 스킬 안 바꿔?”

“길마님이 내내 끼고 계시는데 어떻게 바꿔요.”

“왜, 그냥 바꾸면 되지.”

“이런 자세로… 히든 스킬 해지하면 우리 사이의 벽이 더 단단해지지 않을까요?”

앞발을 들어 어깨를 팡팡 내려치자 겸이가 부끄럼이 많네, 하며 옆자리로 내려줬다. 그에 그치지 않고 반짝이는 눈으로 내 쪽을 내려 보기에 하는 수 없이 히든 스킬을 해제했다.

때마침 길드성의 문이 열리며 나르와 푸름, 사탕 누나가 막 들어오는 게 보였다.

“겨미! 사탕이의 던전은 아직 못 찾았지만 선물이 이따.”

한달음에 날아와 양손을 뒤로 숨긴 나르가 장난스러운 얼굴로 웃었다. 선물? 우리 애가 이제 남들 삥도 뜯는 건가?

“뭔데? 재미있는 거 찾았어?”

짠하며 손을 내민 나르의 손 위에는 제 손만 한 커다랗고 붉은 열매가 두 개 올려져 있었다.

약간 투명하고 포동포동한 외형을 보니… 젤리인가? 나르와 열매를 번갈아 보는데 푸름이 다가왔다.

“어, 형. 귀가 더 커진 것 같은데요?”

“아, 막 각성 던전 깨서 그런 게 아닐까.”

“뭐야, 얘가 진짜 겸이라고?”

보미 누나의 목소리에 그쪽으로 몸을 반쯤 돌리자 나르가 자기를 보라는 듯 앞에서 열매를 흔들어댔다. 나르는 삐지면 오래가기 때문에 서둘러 나르부터 들어 올렸다.

“그건 뭐야?”

“맛있는 거다! 이건 푸름이 것이지만 내가 빼앗았으니 겨미를 주게따.”

말이 끝나기 무섭게 조그마한 손을 꼼지락거리며 알알이 꽉 차 있는 열매를 한 알 쏙 빼선 앞으로 내밀었다.

여태 받아먹는 것에 익숙해진 탓에 자연스레 앞을 가린 마스크를 벗으며 입을 열었다. 그 안으로 쏙 들어온 열매는 달고 시원했는데 보던 것처럼 젤리 식감이라 재미있는 맛이었다.

“이거 뭐야, 되게 신기하다.”

“그러치? 맛있지? 다 겨미 주게따!”

뭐가 그렇게 급한 건지 쏙쏙 뽑히는 열매의 알은 전부 내 입으로 들어왔다. 마지막 알은 나르의 입에 넣어주자 얼굴이 한층 더 밝아졌다.

“우리 겸이… 커스텀 되게 잘했다.”

어색하게 웃으며 나르의 손에 들린 하나 남은 열매를 받아 아까 나르가 했던 것처럼 한 알씩 뽑아 나눠 주었다. 마지막으로 나르의 입에 하나 더 넣어 주자 나르의 뺨이 볼록하게 부풀었다.

“겸이 커스텀 안 했어요, 언니. 근데 여기서 얼굴 보니까 또 다르다, 그치?”

“그러게 눈이랑 머리 때문에 다가가기 어려워 보여.”

푸름과 사탕 누나가 이야기하자 화환도 손에 들린 걸 입에 털어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연예인이야? 아이돌 상은 아닌데, 배우?”

“아니요, 그냥 휴학생인데….”

“혹시 누나는 안 필요해? 내가 외동이라 잘생긴 남동생 하나 있었으면 했는데.”

보미 누나가 눈을 반짝이며 묻는 모습에 시선을 피하자 아쉽다며 중얼거렸다. 그걸 쭉 보던 나르가 다른 사람 주지 말고 겸이 혼자 먹으라며 남은 열매를 손으로 숨기는 게 보였다. 자기도 두 개나 먹었으면서.

“근데 이거 뭐예요?”

“그거 정령의 숲 구경 다니는데 숨은 퀘 떴거든. 다리 밑에 할아버지 도와주기. 보상으로 세 알 받았는데 하나 나눠 먹었더니 맛있다고 나르가 겸이 줘야 한다면서 챙겼어.”

역시 애 하난 참 잘 키웠지, 내가. 머리를 쓰다듬고 야금야금 주워 먹자 나르는 제가 배부른 얼굴로 흐뭇하게 웃으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야, 우리 지금 너희 동넨데 잠깐 나와. 밥이나 먹자. 언니도 오실래요?”

“아니, 오늘 겨울이 일찍 퇴근하는 날이라 같이 밥 먹기로 했어. 아쉽다.”

“어쩔 수 없죠… 겸아, 계란이는?”

“회개한다고 성당 간대요.”

“우리 30분 정도 남았으니까 얼른 정리하고 점심 먹으러 가자. 우리 겸이 배고플라.”

“식당 도착하면 어딘지만 알려 줘.”

화환의 말에 사탕 누나가 알겠다 대답했고, 나르는 잠시 보미 누나에게 맡겨두었다. 그런 후 언제나처럼 경험치 던전 티켓을 찢어 오토 사냥을 돌린 다음 캡슐을 빠져나왔다.

막 캡슐에서 나와 밖으로 나가자 누나와 푸름이 서 있었다.

“겸아, 뭐 먹고 싶어?”

“다들 첫 끼면 밥 먹으러 가요.”

“여기 위에 김치찌개 전문점 있던데 그리로 가자. 괜히 나갔다 유우겸 또 녹아내릴라.”

강경 한식파 권경배가 내 핑계를 대며 사람들을 끌었다.

“그럴까? 아니면 길 건너서 조금만 내려가다 보면 백반집 하나 있는데 거기 괜찮아.”

“어, 저기 아래 부부가 하시는 데요?”

“응, 불고기 시키면 된장찌개 주는 데.”

권경배를 슥 올려 보니 아침도 걸렀다며 얼른 가자 보채는 얼굴이었다. 그래 그 덩치에 많이 먹어야지….

더위를 뚫고 도착한 곳은 다행히 점심시간에도 자리가 있었다. 금방 온다는 화환과 잘 먹는 권경배를 위해 불고기 백반 6인분을 주문하자 바로 상이 차려졌다.

몇 년 전 왔을 때와는 다르게 조그마한 좌식 테이블이었다. 그새 확장한 건가. 사탕 누나도 몰랐던 건지 우리가 자리 잡은 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누나 한대 나왔어요?”

“응, 의예과 다니다 적성에 안 맞아서 그만뒀어.”

“와, 의예과… 힐러라 그런가, 엄청 잘 어울려요.”

푸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 먹고 있던 떡볶이를 삼키곤 입을 열었다.

“그만두고 집이 뒤집어졌져…. 삼수하고 겨우 합격했는데 그만두고 게임으로 먹고 산다니까.”

“아빠가 의사시거든.”

“주위에서 엄청 뭐라 그랬겠다.”

권경배의 말에 처음 1년은 밥도 같이 안 먹었다며, 올해 푸름이가 의대로 입학하기 전까진 집안 분위기가 너무 안 좋아서 독립할 생각까지 했다고 말했다.

3인분씩 나뉜 불고기가 상 위로 자리 잡고 보글거리는 된장찌개까지 올라올 무렵 화환이 기다렸다는 듯 방으로 들어왔다.

“딱 맞춰서 왔네.”

“응, 겸이가 가까이 사니까 좋네. 너희가 정모 때 말고도 여기까지 오고.”

“찾아오면 뭐 해? 나와 보지도 않았으면서 입만 살았지.”

사탕 누나가 옆에 앉는 화환을 타박하곤 권경배의 앞으로 밥을 두 공기 밀어주었다.

“겸이 자주 보네.”

“매일 보잖아요, 게임에서.”

“그때랑은 다르지.”

예쁘장한 얼굴을 슬쩍 노려보곤 밥공기 뚜껑을 열자 뽀얀 연기와 함께 고슬고슬하게 잘 익은 밥이 보였다.

가격도 저렴한데 밥이며 반찬도 다 정갈하게 맛있어 학교와 조금 거리가 있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무조건 온 기억이 났다. 군대가 뭔지 잊고 있던 맛집을 다시 찾아낸 기분이었지.

갑작스러운 번개는 해어짐도 갑작스러웠다. 피곤에 쩔은 푸름을 데리고 사라지는 수박 누나와 커피를 쥐여주며 캡슐 방으로 돌아가는 권경배. 북적이던 사람들이 흩어지고 남은 곳엔 미친놈과 나 둘뿐이었다.

그런데 채하현의 상태가 조금 이상했다. 늘 하던 헛소리도, 추행도 없이 앞만 보고 걷다니.

이렇게 조용할 놈이 아닌데… 괜히 눈치만 살피다 화환을 빤히 쳐다봤다.

“길마님 무슨 일 있어요?”

“겸이, 형아가 안 놀아줘서 슬펐구나.”

채하현이 눈을 접어 웃더니 헛소리를 해댔다. 그래, 사람이 갑자기 변할 리가. 한 번 노려보곤 빨대를 입에 물자 화환이 손을 뻗어 어깨동무하며 제 쪽으로 가까이 당겼다.

“아까 송금 형이 새로 만든 포션을 줬는데 거기 좀 신기한 게 섞어서 그거 생각 중이었어.”

겜창 새끼….

“어떻게 그렇게 주야장천 게임 생각만 해요? 그래서 랭커가 될 수 있었던 건가?”

“왜 그렇게 오해해? 종일 겸이 생각만 하는데… 나 서운해.”

“겸이가 던전을 언제 갈까, 하는 생각?”

“자기야, 왜 귀엽게 삼인칭이야? 이제 막 애교로 꼬시는 거야?”

“아, 좀 미친놈아.”

웃든가 말든가. 화환의 손을 내치곤 조금 더 빠른 걸음으로 걷자 바로 따라오더니 다시 한번 어깨 위로 팔이 올라왔다.

“내일 강아지 오는 거지?”

“그러고 보니 왜 내 옷 안 가져 왔어요? 오늘 받았어도 되는데.”

“인질인데 이렇게 쉽게 줄 순 없지.”

머리 위로 내리쬐는 햇볕이 어쩐지 뜨겁지 않은 기분이었다.

화환의 헛소리에 의미 없는 대꾸를 하다 보니 어느새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에 들어섰다. 근데 얘는 길 건너 사는 주제에 왜 여기까지 들어오는 거지?

“저기요, 길마님 저기 건너편에 살지 않아요?”

“네. 그런데요?”

“왜 따라오지?”

“데려다주는 거지. 누가 우리 애 납치라도 하면 어떡해.”

“어이없네. 저 군필 건장한 남잔데요?”

“아담한 거지, 아담.”

“더워서 눈이 나빠질 수도 있나? 180 넘어요, 저.”

“와, 어쩐지 작더라.”

어쩐지 전에 180도 안 되는 아기가 어쩌고 하더라니…. 그럼 170대 사람은 먼지인가? 그사이 우리 집 바로 아래에 도착했고, 화환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그렇게 밀어낼 땐 죽어도 안 떨어지더니 집 앞이라고 미련 없이 떨어지는 팔이 아주 조금, 아쉽게 느껴졌다. 가만히 손만 내려 보자 미친놈의 입이 달싹였다.

“왜? 형이 떨어지니까 막 아쉽고 서운해?”

“아뇨, 시원하고 좋아서요.”

“내가?”

“빨리 집에나 가세요.”

“자기야, 그렇게 서운한 얼굴을 하면 내 발이 안 떨어지잖아….”

어이가 없어 힘이 빠지는 기분에 손만 내젓자 내 손을 한 번 꼭 잡은 채하현이 미련 없이 돌아갔다.

저 인간은 짜증 나게 뒷모습도 예쁘네.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쪽을 보다 집으로 올라왔다. 이상하게 손끝이 조금 간지러웠다.

200이 넘어가고 부턴 레벨 업이 더뎠다. 조금만 한눈을 팔아도 몰려드는 사람들 탓에 원거리 딜러와 동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매번 같이 가자는 말을 하기도 미안해 경험치 던전에 열을 올려 겨우 202까지 올려둔 뒤 캡슐을 빠져나왔다. 백설이가 내일 오기로 했으니 오늘은 일찍 마무리 해야지.

화환[자기야 렙 몇?]

유우[길마님 요즘 스토킹 너무 소홀한 거 아녜여? 좀 서운하네]

화환[아... 이래서 밀당이 중요한 건가?]

유우[ㅗ^^ㅗ]

화환[ㅋㅋ 그래서 렙 몇 인데 벌써 로그아웃 한 건데요?]

화환[자기 내일부터 접속하기 힘들다며 얼굴도 안 보여주고 가는 거야?]

화환[나 서운해]

화환[서운해...]

화환[자기야?]

화환[서운하다니까 자기야??]

화환[자니...?]

집착광공에서 뇌를 빼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연이어 울리는 핸드폰을 엎어두고 침대 위에 엎어졌다.

도어락 소리에 눈을 뜨니 열한 시. 요즘 점점 폐인 생활에 절여지는 걸 보니 권경배를 욕할 게 아니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거실로 나가자 작은 형이 이미 백설이를 내려놓고 있었다.

“이제 일어났어?”

“응…. 백설이 안녕.”

“휴학생이 아니라 반 백수 같네.”

장난스레 웃던 형이 메모해 온 종이를 냉장고에 붙여놓았다. ‘영양제 먹이는 법’. 성격만큼 반듯한 글씨를 눈으로 읽어 내렸다.

“오메가 3?”

“응, 그건 저녁에 줘야 해. 간식 많이 주지 말고.”

뇌물이라며 케이크 상자를 테이블 위에 올려둔 형이 백설이와 인사를 끝으로 현관으로 갔다.

“산책은 새벽이랑 밤에 가면 될 거야. 선물 사 올게.”

“네, 네. 걱정하지 마. 잘 보고 있을게.”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간 형을 백설이가 쫓았다. 간발의 차로 닫힌 문에 ‘끼잉’하고 울더니 그대로 엎드려 꼼짝하지 않았다.

“형 모레 온대. 들어가자, 백설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안으로 데려가는 걸 포기하고 배변 패드와 쿠션을 깔아주는데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여보세요”

[네, 자기야. 오늘 안 와?]

이 새낀 전화 목소리도 듣기 좋네.

“…이따 저녁에 들어갈 것 같은데요?”

[백설이는 온 거야?]

“네, 지금 현관 앞에 누워 있어요.”

[설마, 겸이도 현관 앞에 있어? 혹시 나 기다리나?]

“낮술을 했나, 해도 안 졌는데 왜 헛소리지?”

[언제 내가 때를 가렸다고.]

“그런 자기 객관화는 잘되네. 백설이 보러 언제 올 거예요?”

[겸이가 나 보고 싶어 할 때.]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히는 것 같았다. 미지근하게 닿아오던 팔의 체온이, 간지럽게 웃어대는 목소리가 불현듯 떠올랐기 때문이다.

[겸아, 나 보고 싶어?]

“길마님이 제가 보고 싶은 거겠죠.”

[나는 늘 보고 싶지.]

“사람이 진짜… 옷이나 잘 챙겨와요.”

이상하게, 간지러웠다. 팔만 슥슥 문지른 뒤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이야기하자 웃음소리를 감추듯 헛기침을 하더니 지금 오겠다는 말과 함께 전화가 끊겼다.

괜히 마음이 급해졌다. 백설이의 짐들은 한쪽에 몰아두며 부산하게 움직이자 백설이도 내 뒤를 졸졸 따라왔다.

뭔가 잘못된 게 분명하다. 미친놈 하나 오는 걸로 왜 이렇게 긴장되는 건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백설이에게 북어 트릿을 꺼내 준 뒤 현관을 힐끔거렸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벨이 울리자 백설이가 용맹하게 짖어댔다. 안아주었지만 발버둥까지 치는 탓에 결국 내려주고 1층 출입문을 열어주자 먼저 현관으로 달려갔다.

혹시나 뛰쳐나가진 않겠지? 싶어 온 힘을 다해 앞을 막으며 현관문을 열자 양손 가득 종이가방을 든 화환이 환하게 웃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겸이, 안녕.”

채하현의 얼굴에 홀릴 때가 아니었다. 발까지 구르며 짖는 백설이를 나가지 못하게 붙잡은 채 올려 보았다.

“길마님 일단 들어오세요. 좀 더 있으면 시끄럽다고 경비실에서 연락 올 것 같으니까.”

안으로 들어와 자연스럽게 앉는 채하현이 종이가방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백설이 목소리 되게 크다. 자기야, 간식 사 왔어.”

“제 간식이 아니라 백설이 간식 같은데… 잘못 본 거 아니죠?”

내 간식은 사과 주스뿐이고 전부 백설이 간식이었다. 양아치 새끼…. 백설이도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화환의 발치로 걸어갔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작네. 몇 살이야?”

“네 살이요. 그런데 백설이 예쁜 짓 해도 간식 주면 안 된대요.”

“잔뜩 사 왔는데 그럼 이건 다 어쩌지?”

“경배 나눠 줘야죠. 거기 애들은 전부 날씬해서….”

간식을 위한 애교인지 어느덧 경계가 사라진 백설이가 꼬리를 살랑거리며 안아 달라 다리를 긁었다.

“백설이가 나 좋아하나 봐.”

“그러게요…. 원래 저렇게 사교성이 좋은가?”

“안아줘도 돼?”

고개를 끄덕이자 백설이를 안아 올린 채하현이 심각한 얼굴로 보송한 털을 쓰다듬었다.

“백설이가 겸이보다 더 부드럽다. 강아지라 그런가?”

“그렇게 심각하게 할 얘기예요?”

자기 칭찬하는 걸 안 백설이가 번쩍 고개를 들곤 화환의 얼굴을 핥기 시작했다. 언제 봤다고 저렇게 좋아하는 건지…. 유백설은 나한테도 해 준 적 없던 뽀뽀를 입이 닳도록 하고 있었다. 하긴 강아지도 눈이 있는데 예쁜 걸 더 좋아하겠지.

“야, 유백설. 너 계속 그렇게 굴 거면 저 형이랑 살아. 내가 우진이 형이랑 살 테니까.”

채하현의 품에서 떼어내며 얘기했다. 이 강아지는 내 말을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번쩍 들어 내 얼굴을 핥기 시작했다.

야, 너 방금까지 미친놈이랑 뽀뽀했잖아! 얼른 바닥에 내려두곤 손으로 얼굴을 닦아내자 화환의 입꼬리가 또 요사스럽게 올라갔다.

“자기야, 우리 간접키스 한 거야?”

“전 백설이랑 했는데요?”

“부끄러워서 그러지?”

“…아닌데요?”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요.”

“또 혼자 이상한 상상하고 헛소리하려고 그러죠?”

“반응 보니까 혼자 상상한 게 다 틀린 것 같진 않네.”

대답할 말이 없었다. 내가 아무리 부정해도 또 자기 알아서 해석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얌전히 있으라는 의미로 형이 사 온 케이크를 한 조각 꺼내주었다.

“뭐야, 먹을 거로 조용히 시키는 거야?”

“어떻게 알았지? 똑똑하네.”

“본의 아니게 매력어필을 해버렸네.”

“아, 그러고 보니까 레드 던전 돌아야 한다고 했지 않아요? 그냥 열어둘까요?”

“아니, 우린 햇살이 가지고 있는 던전 돌면 돼. 겸이 던전은 저녁에 한 번씩만 돌자.”

“아쉽다. 돈 많이 벌어서 게임 접으려고 했는데. 그런데 햇살 님 던전 있어요?”

“응, 겸이보다 좋은 거 하나 있지.”

그래서 처음 길드로 데리고 온 날 유명인이라고 한 건가?

“레드 던전이 제일 좋은 거 아니었어요?”

“응, 귀하긴 한데 제일은 아닐걸.”

“좋다 말았네. 그, 길드전은 어떻게 하는 거예요?”

“깃발 쟁탈전이야. 길드전 전용 맵에서 하는 건데, 적 성문 앞에 깃발 먼저 쓰러트리는 길드가 이기는 거.”

“말은 되게 쉬워 보이는데 엄청 어려운 거죠?”

“그렇지, 깃발까지 가는데 성문도 부숴야 하고, 옆에서 방해하는 적 길드 NPC도 있으니까… 게다가 두 팀으로 나눠야 하는데 우린 수도 적어서 처음엔 정신도 없을걸.”

“우리 파티 말고, 장판 님, 코코, 소리 님 겨울 님뿐이지 않아요?”

“미리내에서 온 사람 더 있잖아. 게다가 아직 용병으로 부른 길드도 있어서. 우리 겸이 첫 PK 경험이겠네.”

“…긴장된다.”

“자기는 나르 옆에 딱 붙어 있어.”

조금 더 렙업을 열심히 할 걸 그랬나? 잠깐이라도 접속해 경험치 던전에 넣어두고…. 오늘 저녁에 백설이 잠들면 나르와 던전이라도 찾으러 다녀야 할 것 같았다. 그래도 어려운 던전이 레벨 업도 빠르니까.

“칠죄종은요? 찾아보니까 다음이 질투던데.”

“찾는 대로 가는 게 좋긴 해. 악세 받은 거 전부 좋거든. 나태에서 받은 야장은 마력 뻥튀기 엄청나던데. 겸이 아직 착용 안 되지?”

“렙제가 250이라…. 그럼 이따 저녁에 접속해서 나르랑 던전이나 찾으러 다닐까 봐요, 렙업도 하고.”

채하현이 기특하다는 듯 머리를 흩트려 놓았다. 가만히 두자 더 신나게 쓰다듬는 것 같았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내 것도 같이 울리는 걸 보니 피안 단체 채팅 같아 얼른 소파 구석에 박힌 핸드폰을 집어왔다.

사탕[뭐야, 겜창 어디갔냐?]

수박[겜창이 한둘이어야지...]

사탕[채길마, 손님오신다는데? 우리 겸이는 또 어디 갔지. 둘이 수상해.]

계란[겸이는 오늘 백설이 와서 저녁때는 돼야 온다는데?]

사탕[...우리 겸이 여자친구 있구나. 백설이라니 공주 같고 예쁘네.]

계란[백설이가 예쁘긴 하죠. 중성화 했으니까 여자친구가 맞나?]

조용히 카메라를 켜 백설이 엉덩이를 찍은 후 채팅창에 올렸다.

유우[인사하세여, 다들. 제 남자친구 백설이에요.]

수박 누나가 겸이도 꼴에 늑대라고 동족을 만난다며 웃어댔고, 사탕 누나와 푸름까지 나와 얼굴을 보여 달라 떼쓰기 시작했다.

화환[손님?]

사탕[하늘이 별이 달이 구름이까지 온다는데?]

채하현이 짚이는 게 있는지 아, 하고 작게 중얼거리다 내 얼굴을 내려 보았다.

“이만 가봐야겠다.”

겜창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 백설이가 눈으로 욕을 하며 뒤를 졸졸 따라다녔는데 현관으로 가는 걸 확인하자 꼬리가 내려갔다.

“조심히 가세요.”

“네, 이따 접속하면 봐요. 백설이도 안녕.”

문 닫히는 소리가 나자 백설이는 또 현관 앞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자기를 두고 나가는 게 싫은 것 같았다.

저녁 시간이 되자 권경배도 양손 가득 백설이의 장난감과 어머니께서 만드셨다는 다이어트 간식을 들곤 우리 집으로 내려왔다.

“하늘이 별이가 누구야?”

“아, 하늘 길드 형, 누나들이지. 실제로 본 건 처음인데 다들 장난 아니더라.”

“아, 뒷조사하는?”

“응. 너 보고 싶다고 올 때까지 기다린다더라. 아마 길드전 때문에 용병으로 부른 건가 봐.”

“되게 고급인력 아니야? 길마님 세계전 꼭 가고 싶나 보다.”

“뭐, 그것도 있고. 부탁할 게 있다고 먼저 도와준다고 나섰다는데?”

“아….”

그러고 보니 예전에 같은 길드에 있었다고 했지? 권경배는 백설이의 간식을 챙겨준 뒤 집으로 올라갔다. 배부르게 먹은 백설이도 졸린 건지 쿠션 위로 올라가 빙글빙글 돌며 자리를 잡았고, 눈이 감기는 걸 확인한 후 캡슐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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