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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어제의 적이 내일의 적 (4/11)

4. 어제의 적이 내일의 적

그 뒤론 화환이 미리내의 길드원 목록을 확인하곤 3명 정도 걸러낸 후 합병이 무사히 완료되었다.

부길마의 자리가 한 자리 남으니 거기 햇살 님이 들어오면 된다, 라며 24시간 뒤에 보자는 인사를 끝으로 일은 대충 일단락되었다.

화환이 등을 툭툭 두드린 탓에 놀란 나는 바로 본론부터 내뱉었다.

“있잖아, 나르가 길잡이야?”

“그 말을 겨미가… 어떠케 아라찌?”

“아까 왕한테 들었는데, 왜 비밀로 한 거야?”

한동안 눈을 깜빡이던 나르가 손까지 떨어가며 내 손 위로 제 손을 올리더니 곧이어 눈물을 뚝뚝 흘렸다.

“겨미, 나 미워하지 마라라. 나도, 흡, 이렇게 겨미를 힘들게 하기 위해 태어날 줄 몰라따.”

가만히 내 손 위로 얹힌 나르의 손을 내려 보다 고개를 숙여 나르의 동그란 정수리 위로 코를 쿡 찍었다.

“안 미워해. 이러는 거 보니까 더 수상한데. 진짜 뭐가 있는 거야?”

나르가 결국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곤 엉엉 울어댔다. 놀란 길드원들에겐 화환이 대신 파티 채팅으로 얘기를 전달해 주었고, 어느 정도 울음을 그친 나르는 겨우 숨을 고르더니 두서없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뮤첼이, 라디아탄에게 모든 죄를 디지버 씌우고 끄윽, 도, 도망쳐따. 어둠과 손을… 흑. 내가 쓰는 마법이 전부라, 라디아탄이 빌려준 히, 히미다…. 겨미가, 라디아탄의 흡, 마지막 아이니까 처, 첫 번째 아이를 쓰러트릴, 길을 열어줄 거라고….”

“뮤첼이면, 겸이 1차 전직 퀘 보스 아니었나?”

“맞아, 누나. 라디아탄이 그 거북이였지? 연금술사랑 자폭하던.”

이해할 수 없었다. 라디아탄이 죄를 나눠 받는다고 하지 않았나? 분명 자신의 아이를 위해 같이 벌을 받으려 희생하는 것 같았는데? 고개를 갸웃거리자 나르의 눈물이 더욱더 굵어졌다.

“하지만, 겸이는 아기, 아기자나!! 흐윽, 무섭다고 도망치면 어떠카나…. 500년을 사라온 나조차도 무서운 ㅇ, 이야기인데! 아직 이러케 야칸 아기인데….”

“아니, 나 이해가 안 돼서. 거북이, 라디아탄이 뮤첼의 죄를 전부 안은 거야? 왜? 분명히, 분명히 그땐 나눠 받을 테니 같이 가자고 했잖아.”

“뮤첼은 가낙칸 수이니다! 너구리라고!”

우리 나르는 너구리 뮤첼에게 사기라도 당한 아이처럼 소리 질렀다.

“하, 하지만 빛의 왕이 뮤첼을 주시하고 이써따. 우리의 신과는 반대의 세력이… 뮤첼에게 소늘 뻗어쓰니까. 그래서, 끄윽, 칠죄종을 세계에, 내려서 흑, 겨미를 시험하라고… 그래따. 뮤첼은 겨미가 쓰러트려야 할 존재니까, 시험하, 한다고…. 라디아탄은 빛의 왕 곁에서 겨미를 보고 이쓸 거야.”

그러니까, 뮤첼이 라디아탄에게 제 죄를 뒤집어씌우곤 어둠과 손을 잡으러? 갔고, 그걸 보고 있던 빛의 왕인지 뭔지가 라디아탄을 도와 나르를 길잡이로 태어나게 했다는 거잖아.

이 모든 걸 알고 있던 나르는 내가 무서워하며 도망칠까 봐, 강해지게 만든 뒤 사실을 털어놓으려 했는데 뜻밖에도 던전이 먼저 뜬 것이었다.

여기서 한 가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게 있었다.

“근데 나 아직 약하다며, 너 나태 던전은 왜 빨리 들어가라고 고집부린 거야?”

“당여나지 아는가!! 겨미가 강해지려면 던전을 도라야 한다! 강한 던전은 레벨이 더 빨리 오르니 거기를 돌아야 해따!!! 나태의 던전인 줄은 몰라찌만…. 그래도 겨미는 지금 76지 아는가! 아까 반짝여따!”

망할 키메라… 눈만 밝아서.

“어? 그럼 나르는 그 던전을 알아볼 수 있는 거야?”

사탕 누나의 질문에 나르가 고개를 팩 돌리며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겨미만 알려줄 거시다.”

“이거 누가 봐도 연계 퀜데…. 당분간 비밀로 하고 사탕, 계란, 수박, 푸름 누구든 접속 중에 겸이 접속하면 무조건 파티로 이동해. 나르는 혹시 그 던전이 열리면 겸이한테 바로 알려주고. 이건 당분간 우리만 알고 있는 걸로 하자.”

“나르는 더 할 말 없어?”

“겨미, 이번 나태는 겨미에게 호의적이라 쉽게 끝난 거시다. 다음 탐욕부터는 이러케 쉽지 아늘지도 몰라…. 얼른 레벨을 업 하라. 그래야 내가 도와줄 수 이따.”

“겸, 지금 렙 76라고 했나? 송금 형 길드 마스터 창고 열어줄 테니까 일단 겸이 템 좀 만들어 주고, 사탕인 나랑 제그로의 화원 돌면서 80 장신구 띄우고…. 장꾸 형은 던전 돌면서 승급석 좀 모아줘.”

“와… 현실에서도 안 하는 업어 키우기를 여기서 하는 거야? 겸이가 우리 아들이고?”

수박 누나의 장난스러운 말에 분위기가 유해졌지만 굳은 나르의 얼굴은 풀릴 줄 몰랐다.

“응. 받은 만큼 돌려줘야지. 지금 여섯 시니까…. 우리 아기는 경험치 던전 티켓 줄 테니까 여덟 시 반까지 다시 여기서 모이기로.”

“어, 저는 그럼 겸이랑 저녁이나 먹으면서 얘기 좀 할게요.”

화환이 경험치 던전 티켓을 10장이나 준 뒤 저녁 맛있게 먹으라며 몸을 일으켰다.

내가 빤히 바라보자 그가 반쯤 일어난 자세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작게 한숨을 내쉬다 나르의 옷자락을 물어 화환의 눈앞으로 끌어당겼다.

“나르 좀 맡아 주세요.”

고개를 끄덕이던 화환이 나르에게 뭐라 말을 한 뒤 같이 사라졌다. 권경배가 내 어깨를 두드려 고개를 돌렸다.

“바로 내려갈 거니까 던전 넣어두고 나와.”

그렇게 말한 권경배는 먼저 사라졌다. 나도 얼른 경험치 던전 티켓을 찢은 뒤 오토 모드로 돌렸다.

밖으로 나오자 기분이 이상했다. 되게 많은 일이 있었는데…. 현실에 나오니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딩동, 들려온 초인종 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실을 가로질러 현관문을 열어주자 권경배가 양손 가득 먹을 걸 들고 선 모습이 보였다.

“뭐야, 왜 정신이 이렇게 빠졌지?”

“야, 나 솔직히 정신이 하나도 없어.”

가만히 자리에 선 나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오던 권경배가 때아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원래 이렇게 퀘가 몰아치면 정신이 없긴 하지. 밥이나 먹자.”

들고 온 음식을 자연스레 상 위로 펼치더니 먼저 수저를 들곤 내 쪽을 힐끔거렸다.

“깊게 생각하지 마. 환이 형이 시키는 대로 하면 돼.”

“그게 맞긴 해? 왜 뮤첼 새끼는 혼자 안 뒈졌지? 나르는 왜 끝까지 혼자 고생이야?”

“내가 말했지? 다른 콘텐츠랑 이어지는 것 같다고. 지금 그냥 세계관을 넓히는 거고 운 좋게 네가 게임사의 선택을 받았을 뿐이야.”

“겜창의 세상에도 고난이 있구나.”

삐죽이려는 입을 겨우 말아 물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지금은 나르와 라디아탄이 평화를 찾았으면 하는 생각뿐이라 권경배가 쥐여주는 수저로 억지로 밥을 떠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밥을 다 먹은 뒤 서둘러 양치를 하고 캡슐 안으로 들어가 접속했다. 경험치 던전 시간이 딱 1분만을 남긴 상태였고, 레벨은 벌써 81이 되어 있었다.

경험치 던전을 무사히 끝내고 연회실로 가자 미리내 길드원들이 피안 길드의 이름을 달고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아니, 11명? 삼촌이 빠졌으면 10명이어야 하는데…. 실내를 훑어보자 삼촌의 자리엔 처음 보는 사람이 있었다. 뽀또?

당연하게 상석에 앉은 화환의 다리 위로 뛰어올라 앉았다. 한두 번도 아닌데 불편한 듯 몸을 비트는 화환의 다리가 불편했다. 얌전히 있으라 주먹으로 얘기한 뒤 처음 보는 사람을 쳐다보자 뽀또가 놀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길드]화환 : 우리 자기는 내 무릎이 좋은가 봐. 부끄럽다.

[길드]민초맛사탕 : 화환이 무릎은 앞으로 겸이 자리다.

“겨미, 거기가 조은 자리인가?”

“응. 왕 자리잖아.”

“겨미는 말로는 아기가 아니라며 왜 아기처럼 안겨 앉는 거신가?”

“오늘부터 아기 하지 뭐, 나 저거 먹고 싶어.”

이것 봐, 손짓 한 번에 입 앞까지 날라 오는 주전부리. 발라당 뒤로 누우며 편한 자세를 찾자 권경배의 얼굴에 부러움이 일었다.

[길드]유우 : 최신 ai 의자, 개이득.

시끌벅적했던 연회장이 화환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정적을 되찾았다.

칠죄종에 대해 간략히 설명한 후, 앞으로 히든 던전이 뜨면 이 멤버로 갈 거라며 뽀또를 소개했는데, 배도 부르고 등도 따뜻한 탓에 절로 눈이 감겨 뭐라고 말하는 건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겨미 입 벌리고 잔다, 길마.”

“밥을 괜히 먹였나….”

갑자기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커져 눈을 뜨려는데 나르가 내 배 위로 얼굴을 파묻으며 고개를 마구 부볐다.

내가 눈을 뜬 걸 확인한 송금이 형이 각종 장비를 우편으로 보내줬다. 그걸 하나하나 입어보며 속으로 감탄사를 내뱉는 중에 나르가 내 배를 꾹꾹 눌렀다.

“겨미, 각성해라. 그럼 나도 강해진다!”

두 시간 반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르의 얼굴이 제법 엄해졌다. 입맛만 쩝쩝 다신 뒤 화환의 소맷자락에 눈을 비벼 눈곱을 떼 내고 테이블 위로 올라가 기지개를 폈다.

“자기야, 내 옷에 이렇게 침을 흘리면 어떻게 해.”

늘 그래왔듯이 귀를 뒷발로 벅벅 긁는 것으로 대꾸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새롭게 알림이 뜬 퀘스트를 얼른 확인해야 한다고!

이번엔 또 어떤 내용으로 퀘스트를 주려나 싶어 누르자 바로 각성이 되었다는 알림이 떴다. 뭐야, 드디어 내 고생을 알아준 게임사에서 주는 선물인가?

[나태의 보상으로 2차 각성 완료되었습니다. 각종 능력치가 올랐습니다! 스킬 레벨 업! 널리 이름을 알리는 헌터가 되어보세요.]

“나, 2차 각성 바로 됐는데? 나태의 보상이래.”

“그럼 겨미, 이제 아기가 아니게 되는 거신가!”

“그건… 스킬 갱신해야 되는데.”

“어차피 치장에 마스크 끼고 있어서 괜찮지 않나. 그냥 갱신하고 퀘나 깨러 가자.”

“맞아, 어차피 2주 뒤엔 얼굴 볼 건데.”

화환이 권경배의 말에 맞장구치며 얘기했다. ‘그때는 꼬리와 귀를 안 달았겠죠.’라고 대꾸하고 싶었지만, 송금 형이 준 장비 외형도 확인하고 싶었기에 얼른 구석진 자리로 가 각성 스킬을 해제했다.

순식간에 높아진 시야에 눈앞이 어지러워 눈을 잠깐 감았다뜨니 나르의 얼굴이 코앞에서 보였다. 동그랗게 뜨인 눈을 보니 반인반수로 제대로 돌아갔구나 싶어 손을 올려 나르의 귀 아래를 쓰다듬어 줬다. 나르는 눈을 반짝이며 웃고 있었다.

“나르, 안녕? 이렇게 작았네.”

“겨미! 그 모습도 나와 눈 색이 똑같구나.”

분명히 커스텀에서 하늘색인가 초록색으로 바꿨는데 이게 무슨 소리지?

“나르랑 눈 색이 같아?”

나르가 크게 고개를 끄덕여 권경배를 바라보자 그 역시 놀란 얼굴이었다.

“그러게, 처음엔 하늘색 아니었나?”

조용해진 실내가 이상해 어색하게 주변을 둘러보자 모두 신기한 걸 본 것처럼 눈이 동그래져 있었다.

사람들의 반응에 얼른 장비 외형을 살피는데 누가 봐도 80대의 쪼렙 장비가 아닌 것 같이 번쩍이는 옷을 입고 있는 게 아닌가. 서둘러 송금이 형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형, 장비 엄청 강해 보여요. 이거 진짜 그냥 받아도 돼요? 저 던전 입장료도 받아서 이제 부잔데.”

송금이 형이 어색하게 눈을 피하더니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겸이 진짜 맞구나…. 너무… 커져서 낯설다. 그거 네가 준 아이템이랑 환이 창고 털어서 만든 거니까 그냥 받아 줘.”

“아긴 줄 알았는데…. 겸이 진짜 어른이구나. 송금 오빠도 어색해서 그래.”

사탕 누나의 말에 수박 누나마저 고개를 끄덕이자 마주 앉은 지우가 눈을 반짝였다.

“유우님 저도 겸이라 불러도 될까요? 아, 전 20살이요. 겸이 형이라고 불러도 돼요? 귀도 한번 만져보고 싶은데 아직 안 친해서 그건 어렵겠죠…?”

지우의 반짝이는 눈이 부담스러워 슬쩍 눈을 돌려 나르의 얼굴만 살폈다.

“나 많이 이상해? 쿨이 24시간이라 아직 스킬 못 쓰는데.”

“다들 겨미가 너무 머쪄서 그런다. 겨미, 나르만 봐라. 나르는 겨미 이상한 눈으로 보지 아늘 거시다.”

작게 속삭이는 말에 비해 크게 돌아오는 대답에 웃음이 터졌다. 나르보다 몇 배는 커진 몸으로 나르를 봐서 그런지 귀엽기만 했기에 한 번 더 나르의 귀 아랫부분을 쓰다듬어 준 뒤 무릎 위로 앉혔다.

“우리 집 아기 그만 힐끔거리고, 겸이는 메인 퀘 밀고, 나머지는 각자 할 일 하지. 푸름이나 계란이 둘 중에 시간 있는 사람은 겸이랑 파티 유지하고. 아직 귀걸이가 안 떠서 우린 던전 더 돌아야 돼.”

제일 빤히 보던 화환이 아닌 척 말을 한 뒤 사탕 누나와 함께 사라졌고, 권경배는 하던 길퀘를 마저 할 거라며 자리로 돌아갔다.

내 근처에 있던 푸름이가 파티를 걸어왔다.

“전 아침에 형 기다리면서 길퀘 끝냈어요. 잭한테 가야 하죠?”

푸름과 함께 메인 퀘를 깼지만, 레벨이 잘 오르지 않았다. 던전 탐색기인 나르를 앞세워 두 번의 던전을 돌자 85까지 올릴 수 있었다. 강림 스킬을 다시 켜자 강림2 스킬의 부속으로 작은 외형으로 돌아갈 수 있는 스킬이 새로 생겨났다.

능력치는 지금 적용된 능력치에서 외형만 작게 변하는 건데, 뜨거운 던전이나 악취가 나는 던전에서 요긴하게 쓰일 것 같다.

시간은 어느새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화환이 준 경험치 던전 티켓을 찢으며 나르를 비활성화 했다.

안 그래도 외로움이 많은 아인데. 내가 없는 동안 혼자 내내 나를 기다릴 것 같아 걱정하자 푸름이 알려준 방법이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7시쯤 일어난 나는 서둘러 트레이닝복을 입곤 헬스장으로 향했다.

권경배와 약속한 일주일이 훌쩍 넘은 날이었고, 90이 넘어가면서부터 잘 안 오르던 내 레벨은 이제 겨우 118이 되었다. 그리고 오늘 2 업을 해 나르와 3차 각성을 하기로 한 날이었다.

어제 새벽, 경험치 던전에 넣어두고 나왔으니 접속하면 120이 넘어 있을 테고….

요즘 화환이나 사탕 누나는 내가 히든 던전을 열고 다닌다는 헛소문 때문에 별별 길드에서 합병 문의가 들어온다며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Hunter : A New Adventure 22번 채널로 입장합니다.]

[환영합니다, 헌터님!]

익숙한 인사말에 앞발을 뻗어 기지개를 쭉 켜며 레벨을 확인하자 예상대로 120이었다. 나르를 활성화하자 뿅! 하는 귀여운 효과음과 함께 나르가 눈앞에 나타났다.

“겨미, 오늘 3차 각성 퀘를 하는 건가?”

“응. 어떤 건지 알아?”

“아마, 탐욕일 것이다.”

“칠죄종…?”

“맞아. 얼른 길마에게 연락하거라. 나는 길드 창고에서 쓸 만한 걸 가져올 테니.”

요즘 들어 나르가 말을 너무 잘하게 되어 아쉬웠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과 어울린 탓인지 한 번씩 이상한 말을 하는 게 걱정이지….

[귓속말]유우 : 길마님. 이번 각성퀘가 탐욕이라는데 언제 갈 수 있을까요?

[귓속말]화환 : 자기 업이 너무 빠른데. 어뉴어는 90부터 150까지 지옥 구간인데 벌써 3차야?

[귓속말]유우 : 길마님이 빨리 업 하라고 저녁마다 경치던전 티켓을 뿌려준 덕분이죠.

[귓속말]화환 : 티가 났구나. 20분만 기다려. 지우 지금 신발 때문에 길란 도는 중.

[귓속말]유우 : 나오면 파티 주세요.

길드 성으로 들어가 홀 중앙에 있는 소파에 앉아 나르를 기다릴 때였다. 갑자기 접속 알림과 함께 눈앞에 베르가 들어왔다.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꾸벅 숙이는 나를 본 척도 않곤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지원을 많이 받아서 그런가 레벨 업이 빠르네.”

“네, 도와주신 덕분이죠.”

이 사람은 너무 불편했다. 둘이서만 마주친 적이 없기 때문인지 어색함에 손바닥에 땀이 다 나는 기분이었다. 힐끔거리며 창고 쪽을 확인하며 나르를 기다렸다.

“네가 히든 던전을 열고 다닌다는 게… 진짜야?”

눈을 좁힌 채 물어오는 베르의 얼굴이 꼭 네 입으로 대답하라며 협박하는 것 같았다.

“설마요, 운이 좋은 것뿐인데.”

원하던 대답이 아니었는지 잔뜩 얼굴을 찌푸린 베르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 민폐야. 한참 랭킹 올려야 되는 사람들 잡고 메인 퀘 밀어 달라는 거. 다들 불만일걸.”

“…….”

“말을 안 해서 그렇지. 푸름이 이번 결투장 랭킹 바닥이어서 물어보니 너랑 같이 퀘스트 밀고 다니느라 바쁘다더라.”

명백한 적의였다. 사탕 누나가 데려왔고 뭐고 가 아니라 그냥 내가 눈에 거슬린다는 거겠지.

말을 아끼며 눈만 굴리자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쉰 베르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저 사람은 도대체 뭐가 문제지?

“겨미, 저 사람이 괴롭히는가?”

“아, 나르. 언제 왔어?”

“다 들었다. 민폐라니. 겨미가 얼마나 힘든 길을 가는지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내가 혼내주게따.”

베르가 나가길 기다렸다는 듯 소파 구석에서 나타난 나르는 어깨까지 들썩이며 씩씩거렸다. 나르가 제 분을 못 이겨 발까지 굴렀다. 나 참, 숨어 있을 땐 언제고….

퀘스트 창에 활성화된 3차 각성 퀘스트를 누르자 순식간에 장소가 이동되었는데, 도착한 곳은 생각지도 못한 물속이었다.

사방이 일렁이는 푸른색이었고, 사방에서 물고기들이 헤엄치는데도 신기하게 숨은 막히지 않았다.

“여기 뭐야, 물속인데 말도 할 수 있네.”

“겨미, 왜 그러케 멍하게 섰나! 어서 나르를 따라와라.”

“탐욕 던전이 여기 있어?”

나르가 먼저 날아가 던전 입구를 구석구석 살피다 고개를 끄덕였다.

“겨미 이번 던전 부터는 보스가 바로 나올 거시다. 아니, 어쩌면 한 번에 두 명의 왕이 나올 수도 이써.”

“왜?”

“겸이의 레벨을 올리는 것 때문에 시간이 너무 지체대써.”

그러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나태의 던전을 갔던 게 일주일 전이니…….

이해는 하겠는데 조금 속상했다. 던전을 클리어 하기 위해선 레벨을 올려야 하는데, 레벨 업 하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왕이 바로 찾아 왔다는 게. 뭐, 이런 배려 없는 게임이 다 있지.

내 얼굴이 굳어지자 나르의 날갯짓이 바빠졌다.

“그, 그래도 괜찮다. 우리에겐 다른 사람들이 이찌 아는가!”

나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파티 신청이 왔고, 수락하기 무섭게 바로 파티장이 넘어왔다. 아까 베르의 말과 나르의 말에 모두 나 때문에 고생하는 게 아닌지 걱정이 되어 선뜻 파티 소환으로 손이 가지 않았다.

다들 바쁜데 억지로 시간 내어 오는 건가? 귀찮은데 도와주는 거겠지….

[파티]푸름 : 겸이 형, 우리 다 준비됐는데, 솬 해주세여

푸름의 말에 서둘러 파티 소환을 하자 빠르게 11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생각해 보니 나는 던전마다 그냥 안겨 가거나 날로 먹기만 했네…. 절로 내려가는 꼬리에 나르는 내 눈치를 살폈고 우리 둘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보였는지 파티원조차 아무런 말이 없었다.

“야, 너 또 왜 혼자 땅 파냐.”

권경배가 무릎으로 앉아 내 얼굴을 홱 들어 올리며 눈을 맞췄다. 고개를 젓곤 권경배의 손을 털어내며 던전 입구로 향하자 나르가 소리 지르듯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검은 인간이 겨미에게 민폐라고 해따! 푸름이 경정? 절정이 늦다고! 겨미에게 그래따!!”

“검은 인간이 누구야?”

“베르 형.”

“푸름이 절정이 늦다니 둘이 그런 얘기도 해? 지…루?”

“뭔 개소리야, 누나! 결장!! 결장 랭킹 물어보더니 같이 하자잖아. 그거 싫어서 바쁘댔더니, 겸이 형한테 화풀이했나 보네.”

“그런데 겸이가 그런 거로 왜 기가 죽어?”

송금이 형이 중얼거리자 괜히 손가락만 꼬무적 거리다 얌전히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곤 작게 중얼거렸다.

“그렇잖아요. 매일 나랑 붙어 다니느라 다른 할 일도 못 한다고, 다들 불만이라고 하니까…. 그리고 이제 칠죄종 던전은 왕부터 나온대요. 두 마리가 나올 수도 있고. 레벨 업 하느라 시간이 너무 지체돼서…….”

“불만 없는데? 솔직히 겸이 형 던전 따라갈 때마다 보상이 너무 좋잖아. 칭호만 해도 형 업고 다녀도 될 등급이고. 송금이 형이 큰절하려는 거 말리느라 고생이었는데.”

“맞아. 나태 야장도 웬만한 옷보다 좋던데.”

“얘가 안 그런 것 같은데 좀, 소심해요.”

“그리고 수박이나 송금이 오빠는 불만이었으면 다 얘기했을 거야. 그 새끼는 왜 잘하는 애를 건드려서 지랄이야 진짜.”

“우리 겸이 마음이 너무 여리구나. 형아가 안아 줄까?”

장꾸 형의 말에 나르가 이를 보이며 으르렁거리자 벌리고 있던 팔을 살며시 접는 게 보였다.

“들었지, 민폐도 아니고, 불만도 없어. 괜히 자기만 안 끼워주니 화풀이하는 거야. 앞으로 또 뭐라 그러면 사탕 누나한테 말해. 확실하게 털어줄걸.”

화환이 내 머리를 흰자가 보이도록 장난스럽게 쓸어 넘겼다. 괜히 간지러운 기분에 올라가는 입꼬리를 겨우 갈무리한 후 나르를 바라보았다.

“탐욕 던전엔 어떤 몬스터가 나와?”

“탐욕은 환술사가 나온다.”

“그게 다야?”

“아니다! 탐욕의 왕은 자신도 죄인인 주제에 다른 사람들을 시험하지. 심판이라 해써.”

“그럼 들어가자마자 상태 이상 해지부터 써?”

“처음 환술은 해지가 되지 아나. 죄가 없음을 인정받은 후에 나올 수 있다.”

“인정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

장꾸 형이 갑자기 나르의 뒤로 다가와 물었다. 화들짝 놀란 나르가 발로 장꾸 형을 퍽퍽 차더니 내 등으로 내려와 앉았다.

예전의 내 모습 같아 아기 하난 잘 키웠다, 하는 뿌듯함이 들었다.

“우겨야 대! 억지라도 죄가 없다고! 그러고 환각에서 벗어나 탐욕을 쓰러트려야지.”

탐욕도 나태와 마찬가지로 이마의 보석이 약점이라는 말을 끝으로 던전 입장이 시작됐다.

[일곱 개의 죄악 제6의 죄 ‘탐욕’의 던전에 입장하셨습니다! 무사히 클리어 하시고 명성을 널리 퍼트리세요.]

- 던전 페널티 발생. 아이템 획득 확률이 소폭 감소합니다.

- 던전 페널티 발생. 이속이 소폭 감소합니다.

- 던전 페널티 발생. 상태이상 해제 스킬의 쿨타임이 소폭 증가합나다.

- 던전 페널티 발생. 상태이상 시간이 소폭 증가합니다.

- 던전 페널티 발생. 포션 사용 쿨타임이 소폭 상승합니다.

[칠죄종 던전 발견! 최초 발견자에게 칭호가 지급됩니다.]

‘탐욕’

-칭호 효과로 아이템 획득 확률이 5% 증가합니다. 칠죄종 칭호를 모두 획득 시 칭호 효과가 대폭 상승합니다.

“보니까 곧 무기나, 장비 도안 뜰 것 같은데?”

“응, 전엔 제작 확률, 이번에는 아이템 획득인 거 보니까 그러네.”

바로 그때, 송금이 형과 장꾸 형이 중얼거리는 게 점점 작아지더니 캄캄한 어둠 속에 혼자 남게 되었다.

무슨 던전이 세이브 존도 없는 거지…? 이게 나르가 말하는 심판인가?

-그대의 죄는 무엇이지.

남자와 여자의 목소리가 한 번에 울리는, 생경한 음성이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왜 이곳으로 들어온 것인가, 남의 것을 탐한 적이 있나?

윙윙 울리는 목소리에 머리가 아파 눈을 꼭 감곤 앞발로 눈을 가렸다.

“내 것도 다 못 쓰는데 남 걸 왜 탐내.”

사실이긴 했다. 남들 것을 탐낼 만큼 부족했던 적이 없었으니까. 이게 다 형들의 지극한 동생 사랑 덕분이지. 하필 던전에서 가족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접속 종료하고 나가면 전화라도 해 줘야지….

-그대는 왜 우리를 해방해 주려는 것인가, 명성이 탐이 난 것인가?

“해방?”

-세 번의 물음에도 답하지 못하는 순간 그대의 죄는 유죄가 된다. 다시 한번 묻지. 명성이 탐난 건가?

“뭐라는 거야, 명성은 무슨… 지금도 힘들어 죽겠는데. 시키니까 하는 거잖아.”

솔직히 시켜서 하는 건 아니지…. 어쩌다 보니 큰 퀘스트에 휘말렸고, 그 퀘스트들을 깨는 것이 재미있어 여기까지 온 거니 말이다.

거기다 함께하는 사람들도 다 좋았으며, 같이 게임을 한다는 자체가 즐거웠다. 권경배가 겜창이 된 이유도 이것 때문이 아닐까?

-그대는 어째서, 라디아탄이 원하는 길로 가고 있지? 끝이 희망이라는 확신도 없는 주제에, 왜 다른 이들까지 꾀어 그가 원하는 길로 들어가는 거지? 수인족의 왕국이 탐이 나는 것인가?

-다른 이들의 희생시키며 제 배만 채우려는 것인가?

“희생이라니…. 다들, 괜찮다고 했어. 도와주겠다고 먼저 다가왔다고.”

-허울 좋은 핑계일 뿐이군.

몸이 떨렸다. 던전 앞에서 다른 사람의 말을 듣기 전까진 나 때문에 시간만 낭비하는 건 아닌가 하는 고민으로 내내 끙끙 앓았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묻지. 그대의 탐욕이 다른 이들을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가? 내가 욕심부려 다른 사람들의 시간을 빼앗으며, 여기에 서 있는 건가?

-마지막으로 묻지. 그대의 탐욕으로 다른 사람들이 힘들어하지는 않는가?

“…그런 게 아니야. 다른 사람들도… 원하는 보상을 받으며 다들 도와주러 온 거라고. 그냥 나한테 주어진 길을 갈 뿐인데, 그냥 시키는 걸 했을 뿐인데 왜 다들 이렇게 괴롭히는 거야?”

-그대는 거북의 마지막 아이이지. 그의 말대로 마음이 너무 여려. 이래서 뮤첼을 없앨 수 있는 건가?

“…….”

-언젠간 선택을 하게 될 거야. 한 명이 피를 보게 될지, 여럿의 피를 보게 될지. 모두 그대의 결정에 달렸겠지. 그때가 온다면… 그대가 옳은 선택을 할 수 있길…….

“겨미, 겨미! 눈 떠라. 겨미!”

목소리가 사라짐과 동시에 나르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된 일인지 권경배의 품 안에 쓰러져 있었고 남은 사람들은 모두 탐욕의 왕을 막고 있었다.

“뭐야, 내가 제일 늦게 일어난 거야?”

“아니다. 탐욕이 겨미 혼자만 심판을 받게 했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나, 얼마나 걱정을 했는데!”

“오래 걸려?”

“반나절이 넘게 잠만 잤다! 겨미가 이러나지 않으면 탐욕을 공격할 수 없어서 다들 겨미만 지키고 이써따!”

“분명히 몇 분 지나지 않았는데, 반나절?”

나르의 말에 서둘러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제야 나타난 탐욕의 체력 바를 보곤 화환이 고개를 돌려 내 쪽을 힐끔거렸고, 화환의 어깨 위로 나르가 날아가서 자리를 잡았다.

멍한 정신에 얼른 고개를 털어냈다. 몸을 일으켜 사람들 사이로 가자 불상같이 생긴 탐욕이 기다렸다는 듯 주변에 어지러운 분홍빛 물방울을 만들어냈다.

두둥실 떠오른 물방울은 사람에게 닿으며 터졌고, 환각과 무기력 같은 상태 이상을 걸고 있었다. 일단 곧바로 리무브를 사용하자 장꾸 형이 하늘을 향해 커다란 화살촉을 던졌다. 눈이 마주치자 찡긋 거리며 웃곤 그 화살촉을 겨냥해 활시위를 당겼다.

바람 가르는 소리와 함께 활에 닿은 화살 촉은 조각조각이 나 물방울을 전부 터트렸다.

하지만 아무리 공격을 해도 탐욕의 체력이 반 이하로 떨어지지 않았다. 권경배가 벌써 두 번이나 광폭화를 썼는데도 말이다.

나르도 이상하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주위를 둘러보더니 갑자기 하늘 높이 날아올라 천장에 그려진 탱화 하나를 가리켰다.

“이 그리미 조금씩 탐욕의 왕에게 힘을 주고 이따! 더 지체대면 위험해!”

기다렸다는 듯 검은 날개를 꺼내 날아오른 권경배가 그 탱화로 검을 날리는데, 탱화 주변으로 반투명한 막이 생기더니 권경배의 검을 튕겨냈다.

“계란아 10초만 버프 둘러줄게.”

“개양아치 새끼! 몹 주제에 힐 셔틀도 달고 와?”

수박 누나가 짜증스러운 얼굴로 탐욕의 왕 주변에 활활 타오르는 장벽을 쳤다. 이번엔 푸름이가 기다렸다는 듯 그 위로 실드를 쳤다.

푸른색의 반투명한 벽이 탐욕을 완전히 감싸는 걸 확인한 수박 누나가 손가락을 한 번 튕겼다.

푸름의 실드 안에서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터지는 소리가 연달아 나기 시작했다. 때마침 탱화 그림을 공격해 천장에 금이 가게 한 권경배 덕분에 탐욕의 체력이 3분의 1로 확 줄어들었다.

그걸 확인한 나르가 바닥으로 급하게 마법진을 그렸다. 막 완성된 마법진에서 세 개의 번개가 뻗어져 나왔고, 각각 위로 솟구치며 탐욕의 움직임을 막았다.

나르가 화환을 내려 보았고, 화환은 기다렸다는 듯 커다란 총을 꺼내 탐욕에게 겨누었다. 화환의 주변으로 순식간에 거대한 빛이 일었다.

탕!

총성이 울리자마자 탐욕의 이마에 박혀 있던 노란 보석이 깨져 사방으로 흩어졌다.

-길잡이를 너무 의지하지 마라.

쨍하게 울리는 비명과 같은 말이 머리에 박혔고 순식간에 눈앞이 어두워졌다. 정신을 잃은 게 아니라… 정말 말 그대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앞만 보이지 않을 뿐 다른 창은 전부 볼 수 있었다. 맵이나 스킬 창, 배낭까지. 그런데 그게 무슨 말이지, 나르를 의지하지 말라니? 믿지 말라는 건가…….

“겨미!”

나르가 비명과 함께 날아온 건지 자그마한 손이 얼굴에 닿아왔다. 몇 번을 고개를 돌려도 돌아오지 않는 시력에 눈만 깜빡이는데, 무언가 낯선 게 내 등에 닿았다. 놀라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아, 저, 그… 눈이 안 보여서. 다른 건 다 보이는데 풍경이나 사람들이 안 보여요.”

“겸이 작게 변할 수 있다고 했지? 일단 나가자. 여기 좀 어지러우니까.”

그럴 것 같았다. 사방이 원색으로 빛나며 반짝였으니 말이다. 스킬 창을 열어 몸 크기를 줄이자, 발이 땅에서 떨어졌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손으로 눈만 꾹꾹 누르고 있으니 걸음 소리가 울렸고, 곧이어 화환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왕이 두 명이 있다는 말이 이거였나?”

“저기 앞에 던전 맞지? 밖이 아니라.”

“나르, 겸이 눈은 왜 안 보이는 거야?”

“탐욕이 말해선 안 되는 말을 했다. 그걸 들은 페널티가 생긴 거시다. 던전을 나가면 되는데…. 다른 던전까지 여기 있으니……. 어떻게 하나 길마.”

“일단 좀 쉬어야 할 것 같은데. 왕 한 명에 거의 열 시간을 넘게 버텼잖아.”

“송금 오빠, 겸이 넣고 들고 다닐 만한 가방 없어? 아니면 아기 띠라던가.”

사탕 누나의 말에 몸이 떨렸다. 23살 건장한 군필 남자에게 아기 띠라니……. 발버둥을 치자 화환이 등을 가만히 쓰다듬어 주곤 나르에게 다음 왕을 물었다.

“음욕의 왕은 변태 같은 자다, 그의 앞에선 절대 목소리를 내면 안대.”

“이마의 보석이 약점이고?”

“그러타. 목소리를 빼앗는 것도 모자라 그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 괴로핀다. 그런데 여긴 무언가 이상하다. 칠죄종이 아닌 것 가타!”

나르와 한참을 얘기하던 화환이 대꾸 없이 이곳저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눈이 보이지 않는 나를 이리저리 옮기는 배려 없는 짓이라니… 역시 정상이 아니네.

그나저나 칠죄종이 아닌 일반 던전의 입구가 뜬 건가? 나르도 아직 화환을 따라 날아오는 것 같았고, 내 머릿속은 여전히 이러저러한 생각들로 복잡했다.

“나르, 너 나한테 숨기는 거 하나도 없어?”

결국 입 밖으로 나온 질문에 순식간에 나르가 조용해졌다.

“겨미, 탐욕의 왕이 무슨 말을 한 거지…. 나는 겨미에게 숨기는 거시 아무것도 없다.”

오늘 처음 본 적보다 그래도 오래 알고 지낸 나르를 믿는 게 맞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마음 한구석이 찝찝해졌다.

왜 그런 말을 해서 이렇게 나르를 의심하게 하는 건지. 한 번 더 만나게 된다면 그때는 그 머리를 깨는 게 화환이 아니라 내가 될 거다.

으드득 이를 갈다 따뜻한 품속으로 얼굴을 밀어 넣곤 눈을 감았다.

나르가 안절부절못하며 내 주위만 빙빙 도는 게 느껴졌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귓속말]화환 : 나르가 뭘 잘못 한 거야?

[귓속말]유우 : 길마님 시력 절대 지켜.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어깨를 들썩이며 웃는 것이 게 느껴졌다. 보상이 뭐가 들어왔는지 확인하려 시스템 창을 위로 쭉 올려 보자,

[탐욕의 왕 생명의 근원이 파괴되었습니다! 일곱 개의 죄악 제6의 죄 ‘탐욕’의 던전이 클리어 되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숨겨진 던전이 클리어 되었습니다! 유우님의 파티 화환, 푸름, 수박맛사탕, 간계밥, 지우, 장꾸, 빛과송금, 뽀또, 햇살, 도시락, 민초맛사탕 님의 명성이 온 세상에 울려 퍼집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138Lv 달성!

[일곱 개의 죄악 제6의 죄 ‘탐욕’의 던전이 클리어 되었습니다! 파티원의 명성이 세상에 울려 퍼집니다.]

-최초 보상 탐욕의 왕 바알세불의 노란 보석이 유우 님께 귀속되었습니다!

-최초 보상 탐욕의 왕의 팔찌:세상 모든 파티원에게 지급되었습니다!

-최초 보상 탐욕의 왕 생명의 근원이 화환 님께 귀속되었습니다!

-최초 보상 탐욕의 왕의 안식 버프로 파티원 모두의 디버프를 해지합니다!

- 던전 페널티 발생. ‘유우’ 님께서 세상의 이면에 한발 다가섰습니다. 시력이 일시적으로 차단됩니다.

알림이 보였고 배낭을 확인하자 붉은색, 노란색 보석이 나란히 있었다. 조금만 쉬었다 간다는 말에 반짝이며 새롭게 뜬 아이템을 전부 송금이 형에게 우편으로 보내버렸다. 탐욕의 ‘ㅌ’도 보기 싫었다.

[귓속말]화환 : 나르 지금 구석에서 혼자 우는데, 불러줘?

[귓속말]유우 : 길마님이 보기엔 나르가 우리 편 같아요?

[귓속말]유우 : 너무 초등학생 같나?

[귓속말]화환 : 무슨 말을 들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보이는 것만 보면 나르는 겸이 편인 것만 같은데.

역시… 내가 과하게 반응한 건가 싶어 고개를 끄덕이자 나르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걸 듣고 파드닥 날아오는 나르의 날갯짓 소리가 귀여워 입꼬리가 절로 씰룩였다. 그냥 팔을 벌리자 내 몸만 한 나르가 폭 안겨 왔다.

“겨미, 이제 내가 싫은가? 나는… 겨미에게 속이는 게 아무것도 없다! 진짜다.”

“응, 알아. 그냥 아무것도 안 보여서, 무서워서 그랬어. 미안.”

한참을 울던 나르가 송금이 형의 다 됐다는 말에 슬쩍 품에서 떨어져 나갔다. 뭐가 됐기에 저러는 거지? 버둥거리며 뒤로 눕는데 갑자기 옷이 입혀지듯 다리에 무언가 끼워졌다.

“와, 이런 것도 만들 수 있어요?”

드물게 밝은 햇살의 목소리가 들렸고, 어딘가에 몸이 닿음과 동시에 내가 지금 무슨 행색으로 어떤 자세를 하고 있는지까지 알 수 있었다

…제대 후 처음 만난 작은 형의 강아지 백설이처럼 강아지 포대기를 한 게 분명했다.

“제가 두르면 안 돼요? 앞으로 딱 안전하게 멜 수 있는데… 사탕 누나 무겁잖아여.”

“지우, 헛소리 마라. 겨미는 사탕이 든다. 그리고 이번 던전은 칠죄종이 아니라 진짜 겨미의 3차 각성 던저니다. 다들 마구마구 때려 얼른 우리 겨미 눈을 뜨게 해줘라.”

지우의 말에 내가 사탕 누나의 등에 덜렁 들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빡종을 할까, 고민 중에 나르의 목소리에 음욕인지 뭔지 하는 왕이 나올까 긴장하던 사람들의 분위기가 조금 느슨해지는 것 같았다.

이제 들어가자는 화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를 둘러맨 사탕 누나가 입구 앞으로 간 건지 입장하겠냐는 알림이 떴다.

입장을 누른 순간 뜨끈한 바람이 불어왔고 겸이 괜찮냐는 물음에 안심하라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여기서 나보다 괜찮은 사람은 더 없지 않을까.

[‘수인족 저주’의 던전에 입장하셨습니다! 무사히 클리어하시고 명성을 널리 퍼트리세요.]

“진짜네, 수인족의 저주래요.”

“겨미, 이번 던전은 3페이즈 까지 이따. 졸리면 자도 조타.”

유난히 내 걱정 중인 나르가 내 콧잔등을 쿡 치며 중얼거렸다. 저번에 나태를 잡은 날, 내가 졸았던 게 떠올랐는지 잠까지 자도 좋다는 나르 덕분에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그래, 나르는 나르일 뿐이지.

“나르가 다 때려 줄 거야?”

“당연하다! 나는 강하니 겨미기 원하면 다 들어줄 거시다.”

“그럼 나랑 같이 있자. 무서워, 나.”

사탕 누나의 등이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여전히 파티원 체력은 오르락, 내리락 이었고, 얼굴조차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그저 나르가 목덜미를 안아 주는 것만 느껴져 울고 싶었다.

바로 앞 던전에서 탐욕의 왕의 물음에 알맞은 답을 찾지 못한 것과 또 내 개인 던전에 11명의 사람만이 고생을 하고 있다는 것이 계속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그저 작은 나르만 붙잡은 채 어서 빨리 던전이 끝나길 기다리는 것뿐이라는 현실이 너무 싫었다.

[귓속말]민초맛사탕 : 나도 예전에 딱 그랬는데. 게임 초반 랭커는 다 남자라 여캐한테 엄청 껄떡댔거든. 나도 여캐고 게다가 힐러니까 이상한 사람이 엄청 붙었었어.

[귓속말]민초맛사탕 : 계속 만나자, 밥 먹자, 술은 먹냐고 어디 사냐고 물어봐서 초반엔 잘 모르고 다 얘기했지. 그러다 이건 아닌 것 같아서 싹 끊어냈는데 내가 템 먹튀했다, 사람 가지고 논 거다 이런 소문이 공카에 올라와서 아이디도 바꾸면서 잠깐 접었거든

[귓속말]민초맛사탕 : 그렇게 근 1년을 안 들어가다 쟤가 같이 게임 하쟤서 다시 해볼까 싶은 마음이 든 거지. 어느 날 공카에 내 아이디 검색해 보니까 별로 안 친했던 사람이 거기서 내 편을 들어주고 있는 거야, 혼자. 그게 고마워서 돌아왔는데.. 시간이 너무 지나버려서 그런가, 그 사람은 벌써 접었는지 찾을 수도 없더라.

[귓속말]민초맛사탕 : 한참 욕먹을 때, 화도 났지만 엄청 무서웠거든. 겸이도 그때의 나만큼 불안한 거지?

[귓속말]유우 : 그냥, 내가 지금 이렇게 업혀가는 게 맞는 건지 모르겠어요..

[귓속말]민초맛사탕 : 하필 오늘 베르 ***가 우리 겨미한테 **을 해서 그런가? 겸이 기가 너무 죽었네.

[귓속말]유우 : 누나 나 지금 잘하고 있는 거 맞죠?

[귓속말]민초맛사탕 : 겸이가 잘하고 있는 게 아니면 사람들이 돌던 던전도 던지고 여기 올 리가 없잖아.

[귓속말]민초맛사탕 : 나처럼 놓치고 후회 말고 겸이 하고 싶은 대로 해.

눈물이 삐죽 나 괜히 나르의 어깨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수인족의 저주’의 던전이 클리어되었습니다! ]

-레벨이 올랐습니다. 140Lv 달성!

[‘수인족의 저주’의 던전이 클리어되었습니다! 파티원의 명성이 세상에 울려 퍼집니다.]

-최초 보상 헤미르 해변의 하프가 유우 님께 귀속되었습니다!

-최초 보상 ‘수인족의 구원 조각’(칭호) 파티원에게 지급되었습니다!

조각 4개를 더 모아 칭호를 완성하세요.

-최초 보상으로 유우 님의 디버프를 해제합니다!

[3차 각성 퀘스트가 완료되었습니다!]

[길드]빛과송금 : 던전 아이템 비싸게 삽니다@@

[길드]수박맛사탕 : @팝니다@

[길드]지우 : 형 뭐 만드시는 거예여?

[길드]빛과송금 : 일단 쟁여두게. 곧 업뎃이잖아.

[길드]민초맛사탕 : 아, 우리 이번 주 토요일에 모이는 거죠?

[길드]화환 : 겸이도 온대.

[길드]장꾸 : 겨마, 형아 꽃다발 사가면 받아주니...?

“나르야, 장꾸 형이 또 채팅으로 겸이 형한테 변태 같은 말 해.”

지우가 달려와 나르에게 이르자 씩씩거리며 장꾸 형에게 달려드는 소리가 들리고, 디버프가 해제되어 시야 앞의 모든 사물이 천천히 보이기 시작했는데….

이런 미친, 분홍색의 귀여운 하트가 콕콕 박힌 천에 둘러싸인 채 아직 사탕 누나의 등에 들려 있는 내 몸이 보였다.

발을 마구 버둥거리자 그제야 사탕 누나가 진정하라며 나를 내려줬다. 장꾸 형을 흠씬 발로 차던 나르가 곧장 내 앞으로 달려와 섰다.

“겨미, 각성 완료해라. 그럼 나도 더 강해질 거시다.”

나르의 말에 서둘러 각성을 완료하곤 히든 스킬을 해제했다. 이제는 높아진 시야가 더 낯설게 느껴지는 게 어이가 없었다. 나는 나르를 안아 들어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갔다.

“겸이 이제 140 됐지? 5만 더 업 하면 새 장비 맞춰줄게.”

“네, 이번 던전 다들 악세 받으셨죠?”

“네, 근데 겸이 형도 렙제 때문에 못 끼지 않아요? 그거 수치 좋던데.”

지우가 속상해하며 말하자 나르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던전에서 받은 악세사리도 250 아이템이라 그런 것 같은데….

열흘 만에 140을 찍는 것도 힘든 일인데. 우리 나르는 욕심이 참 많았다.

“겸이 5업 더 하면 경험치 던전도 새로운 몹 나오니까 메인 퀘 밀고… 칠죄종은 200 찍고 갈 거지?”

“네, 그때가 4차 각성이죠?”

“응.”

칠죄종 덕분인지 메인 퀘 진도보다 레벨이 더 높아진 탓에 요즘엔 메인 퀘를 깨도 업이 쉽지 않았다. 이번엔 또 얼마나 걸리려나.

메인 퀘 진도를 확인하니 권장 레벨이 100 언저리였다. 이 게임은 쓸데없이 만렙만 높아서.

결국 나르의 레벨 업 타령에 못 이겨 결국 메인 퀘를 밀기로 했다.

소도시 헬라에서 자도르네로 넘어가며 퀘스트 때문에 꽃바구니를 들고 초원을 지나던 중이었다. 나르가 내 옷깃을 잡아끌어 어딘가로 손짓을 했다.

나르가 가리킨 곳에는 풀숲에 가려져 있어 잘 보이지 않는 작은 동굴이 있었다.

“겨미, 저기.”

“뭔데? 히든?”

“아니, 길마를 불러라. 그 혼자 들어가야 하는 곳이다.”

“너 요즘 나보다 길마님이랑 더 친한 것 같다. 나 서운해.”

“아, 아니다! 저긴 길마의 아이템이 잠들어 있는 고시라 그런 거시다.”

[귓속말]유우 : 길마님.

[귓속말]화환 : 네, 유우 님.

[귓속말]유우 : 안 바쁘시면 여기 좀 와주실 수 있으세요?

[귓속말]화환 : 몇 명 모아가?

[귓속말]유우 : 이 사람이 진짜 던전에 환장했나.. 나르가 길마님 혼자 오면 된대요.

[귓속말]화환 : 드디어 둘만 있게 된 거야? 아, 나 갑자기 설레는데.

[귓속말]유우 : 헛소리할 거면 깜빡이 좀 키고 들어오라고요. 길마님 아이템 잠들어 있는 곳이라는데, 생각 없음 말구요~

[귓속말]화환 : 아, 바로 소환해 줘.

화환을 소환하자 기다렸다는 듯 바로 나타나더니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저 미친놈은 캐릭터 키를 얼마나 크게 한 거야. 강림 쿨을 기다리느라 반인반수의 모습인데도 턱을 들어 바라볼 만큼 화환은 컸다.

“뭐야, 나 옷 좀 챙겨 입고 다시 올까?”

“뭔 개소리야, 또.”

“꽃다발 들고 나 혼자 부르면 그렇고 그런 거 아닌가…?”

“이거 배달 퀘고 길마님은 저기, 동굴로 들어가시죠.”

“아… 괜히 기대했네.”

“길마! 저기 새로운 무기가 이따. 혼자 시련을 극복해야 대!”

“두 번째 던전부터 나온다는 그거야? 무기?”

“그러타. 그 무기이다.”

두 번째 던전부터 뭐라는 거야? 생전 처음 듣는 말에 나르를 노려보았다.

역시 둘이 친해진 게 맞나 보다 벌써 비밀 얘기를 저렇게 하는 걸 보니 말이다. 나르 이 새낀… 비밀 없다고 해놓고.

“왜 나한텐 안 알려줘?”

누가 들어도 억울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나르와 화환이 이상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은 내 억울함이 더 중요했으니 말이다.

“무슨 소린가, 겨미. 첫 던전을 깨고 다 얘기한 거시 아닌가.”

“난 처음 듣는데?”

“아, 겸이 그때 잤지. 입 벌리고.”

내가 잤던 날은 나태 던전이 끝나고 경험치 던전 돈 날뿐인데? 아, 그날이… 첫 던전을 깬 날이구나. 사람이 살다 보면 좀 졸 수도 있지…….

“그래서 앞으론 파티원 무기가 나온다는 거야?”

“겨미, 그대. 얼굴이 두껍군.”

“응, 라디아탄도 그러더라. 그런데 나는 왜 안 줘?”

“겨미는 레벨 업이 먼저다. 나는 길마와 같이 가도 되나?”

“알겠어. 나르, 다치지 말고 끝나면 길드성 가 있어.”

나르를 길마님에게 맡기곤 퀘스트를 마저 하러 다시 움직였다. 늘 둘, 셋씩 다니다 하려니 약간 어색한 기분이 들긴 했다.

꽃 다음 배달할 건 편지였다. 겸사겸사 던전 클리어까지 해달라는 의뢰에 길드 채팅을 둘러보았다.

권경배는 강화석 파밍을 갔고, 화환은 무기를 구하러 간 상태였고 원래의 파티원들은 각자 제 할 일 하느라 시간이 없어 보였다.

[길드]유우 : 유우 님의 파티에서 파티원을 모집합니다. [자도르네의 평원]

[길드]장꾸 : 겸이 던전 떴어? 지금 지우, 햇살인 나랑 던전 돌고 있고 도시락은 자리에 없는데.

[길드]베르 : 내가 갈게.

[길드]빛과송금 : 겸아 5분만. 사탕이랑 갈게.

[길드]유우 : 형 누나랑 던전인가 보네여ㅠㅜ 천천히 오세요.

[길드]민초맛사탕 : 꼭 기다려.

사탕 누나의 말에 웃는 이모티콘을 보내자 곧 베르가 파티에 들어왔다. 이번엔 무슨 말로 사람 속을 뒤집을지 궁금해 던전 앞에 가만있었다. 용케 찾아온 베르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 형 바로 오셨네요.”

베르가 한발 물러나며 나를 빤히 봤다. 그러고 보니 반인반수 모습은 처음 보는 건가? 괜히 머쓱해져 마스크에 감싸인 볼만 긁적이는데 채팅이 반짝였다.

[귓속말]민초맛사탕 : 우리 갈 동안 베르가 무슨 말 하는 거 있으면 바로 얘기해 줘, 또 혼자 맘 상하지 말고.

[귓속말]유우 : 지금 던전 앞에 같이 있는데 너무 어색해요, 누나.

“너 수인화도 할 수 있었나?”

“네, 늑대 모습은 히든 스킬이에요.”

[귓속말]민초맛사탕 : 이럴 때만 빠르지.

[귓속말]민초맛사탕 : 금방 갈게 거의 끝나가.

“야, 마스크 벗어봐.”

“네?”

“어차피 주말에 볼 거잖아. 얼굴이나 익히게.”

굳이 그럴 이유가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베르에게? 게다가 말하는 것조차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언제부터 친했다고 다짜고짜 명령질이야.

주춤거리자 베르가 눈을 좁히곤 점수라도 매기듯 아래위로 훑어보는 게 보였다. 그래, 나이가 벼슬이지.

“주말에 보시면 되죠. 형도 오시는 것 같은데.”

“얼굴이나 익히게, 라고 하지 않았나? 뭐 숨기는 거라도 있나 보네.”

“숨기는 건 없고 그냥 싫은 거죠.”

“미리 얼굴 트면 좋잖아. 연예인이라도 되나 왜 이렇게 비싸게 굴어.”

어이가 없네. 기가 차 웃음만 났다. 남이야 연예인이든 마기꾼이든 자기가 무슨 상관이지?

헛웃음 소리를 들은 베르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그건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었기에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할 말을 골랐다.

여기서 나오는 대로 뱉으면 주말에 보기 불편해지겠지. 최대한 기분 나쁜 티가 나지 않게 감정을 누르며 입을 열었다.

“남이 하는 말을 안 들으시는 것 같은데… 저 싫다고 하는 중이에요, 형. 비싸게 구는 것도 숨기는 것도 아니에요. 그냥 싫어요.”

“아, 맞다. 너 사람 가리면서 살랑거리지. 도움 될 만한 사람만 찾아가면서 약한 척, 착한 척.”

말문이 턱 막혔다. 지금… 싸우자는 건가? 아무 말 없이 베르의 얼굴만 내려 보고 있자 눈초리가 점점 사나워졌다.

사실 한 번 보여주고 그냥 보내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었지만, 저런 말까지 들어가며 얼굴을 보일 이유가 없었다.

대꾸를 하지 않자 자길 무시한다고 생각한 건지 베르의 얼굴이 점점 빨개졌다.

“이래선 던전도 못 돌 것 같은데. 형 하시던 거 하러 가세요.”

“너 그동안 이렇게 말대답하고 싶어서 어떻게 참았냐? 아까 길드성에서도 일부러 입 닫고 있었던 거네.”

“네. 별로 말 섞고 싶지 않아서요.”

“내가 너한테 과한 거 부탁한 것도 아니고. 수인 모습이라 얼굴 좀 보자고 한 게 그렇게 잘못이야?”

“제가 무슨 동물원 원숭이도 아니고 보여 달라면 여기요, 하고 보여줘야 하는 거예요? 그리고 형 말투가 꼭 아랫사람 혼내고 싶어 어쩔 줄 모르는 윗사람 같은데. 살면서 이룬 가장 큰 업적이 나이 먹은 게 아니라면 적당히 하셔야 할 것 같아요.”

……헉, 조때따.

짜증이 가득했던 얼굴이 와락 구겨지더니 뒤늦게 실소를 터뜨렸다.

“아, 이게 원래 성격인가? 예쁜 척 귀여운 척은 혼자 다 하고 길마, 부길마 앞에서 꼬리 흔드느라 고생이 많았겠네. 뒤에서 떨어지는 콩고물 주워 먹으려고 몸이라도 대준 건 아닌가 몰라. 이룬 업적이 나이 먹은 것밖에 없는 나는 상상도 못 하겠지만.”

“어떻게… 생각하는 게 꼭 어린애 같지. 형 머릿속에 뭐가 들었는지 잘 알겠어요.”

“그러니까 적당히 나대야지.”

“계속 이렇게 시간만 허비하실 거예요? 가달라고 한 번 더 말씀드려야 되나?”

“도움도 사람 가려가며 받아? 어쩐지 다른 애들이 오냐오냐 키운다 했다, 내가.”

“남이 오냐오냐 키우든 둥가둥가 키우든. 베르 님이 신경 쓸 일이 아니지.”

사탕 누나의 목소리에 뒤를 돌자 어느새 송금이 형과 무기를 들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귓속말]유우 : 언제 오셨어요?

[귓속말]민초맛사탕 : 겨미가 저놈한테 가라고 할 때부터. 대체 무슨 일이야?

별일 아니라며 누나를 향해 웃어 보인 뒤 작게 고개를 저었다. 사탕 누나는 이미 화가 난 것 같았고 송금이 형은 긴장한 표정으로 사탕 누나의 눈치를 살폈다.

“얼굴에 금칠했나. 그거 하나 못 보여줘서 그새 쪼르르 일렀어? 진짜 대단하다.”

“겸이 얼굴 보여 달라고 했어요? 같이 다니는 우리도 안 하는 말을 그쪽 분이 뭔데 그렇게 당당하게 해, 어이없게.”

“늘 뭐만 한 동물로 살다 갑자기 사람처럼 구는데. 궁금할 수 있는 거 아닌가?”

“뭐만 해? 또 나오는 대로 지껄이네. 아, 그래 놓고 길드 채팅에 미안 네가 비싸게 굴어서 화가 나서 그랬어, 라고 사과하게?”

“사과는 쟤가 해야지. 약하고 귀여운 척은 혼자 다 하더니 뒤에선 뭐? 업적이 나이 먹은 거야? 애 잘 키워서 좋겠다, 참.”

점점 격해지는 분위기에 서둘러 파티를 탈퇴하곤 둘에게 파티를 걸었다. 그리고 이제 가자는 모션으로 사탕 누나의 옷깃을 잡아 뒤로 당겼다. 나 때문에 싸우는 것 같아 난처했기 때문이다.

“누나, 저 던전 가야 되는데….”

“아, 잠깐만. 우리 겸이가 옳은 말 한번 잘했네. 저기요, 없는 듯 삽시다. 앞으로 겸이한테 신경 끄고, 민폐니 얼굴이 비싸니 이딴 소리 들리면 진짜… 가만히 안 있어.”

[파티]빛과송금 : 겸아, 바로 입장해.

송금이 형의 채팅을 확인하고 던전 입장을 누르자 이번엔 웬 낯선 숲 한가운데였다.

여전히 씩씩거리는 사탕 누나를 힐끔거리다 막 돌아온 쿨에 히든 스킬부터 썼다. 작아진 몸으로 발치를 어슬렁거리자 누나가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하곤 내 쪽을 내려 보았다.

“내가 헛소리하면 바로 이르랬잖아.”

“처음엔 그냥, 수인화 한 걸 처음 봐서 놀라서 그러는 건 줄 알았어요.”

“겸이 ai 창 스크린 샷 찍어서 계란이한테 보내봐. 열받아서 안 되겠네. 계란이한텐 내가 얘기할 테니까 얼른.”

ai 창은 대화한 내용이 글로 표시되는 창이었다. 처음 알았을 땐 멋있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내 발목을 잡을 줄이야…. 송금이 형 쪽을 보며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혀엉….”

“사탕이 화나면 환이도 못 말려. 해달라는 대로 해줘, 겸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우리 도착한 순간까지야. 바로.”

작게 한숨을 내쉬곤 스크린 샷을 찍었다. 4장 가까이를 찍은 후 그 사진을 메신저로 보내자 바로 읽었다는 표시가 떴다. 아마 사탕 누나 얘기를 듣고 기다리고 있었던 거겠지.

몇 분이나 흘렀을까 여전히 아무런 미동 없이 선 사람들의 눈치만 살피는 중이었다. 따지고 보면 나도 똑같이 군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발끝으로 땅만 긁으며 한숨을 쉬는데, 갑자기 누나가 각종 새끼를 다 찾아가며 살벌한 욕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누나의 흥분이 조금 가라앉을 때쯤 이번엔 송금이 형이 웃음을 터뜨렸다.

“풉, 이룬 업적이 나이 먹은 거라니.”

“아니, 계속 사람을 아래위로 훑어보면서 억지 부리니까 욱해서 그런 건데…. 형도 보셨어요?”

“응, 나도 보여 달라니까 계란이가 단체 채팅 열어서 보여줬어. 우리 셋밖에 몰라 걱정하지 마.”

“이 새끼는 몸에 무슨 문제 있나. 왜 뭐만 하면 몸 굴리는 사람으로 몰아가지?”

“전부터 그러긴 했지.”

“지금 화환한테 베르가 귓속말로 이르고 있다는데? 대단하다….”

[귓속말]간계밥 : 어디야?

[귓속말]유우 : 던전

[귓속말]간계밥 : 겸아 이렇게 된 이상 진짜 약하고, 예쁘게, 귀여운 척하는 거 어때?

[귓속말]유우 : 그러기엔... 너무 멀리 왔지 않나? ^^

[귓속말]간계밥 : 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ㅇㅇ 그렇긴 함

던전을 클리어하려고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한 건 30분이 훌쩍 지나서였다. 힐러 두 명에 제작자 한 명이라 걱정은 입장과 동시에 사라졌다. 지뢰 설치와 매타작이라니 누가 저 둘을 힐러와 제작자로 보겠냐고.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겸이 고생했어.”

“형, 누나도요….”

“겸아, 이제 퀘 보고하러 갈 거지?”

“네.”

“하고 연회실로 모이래.”

“저 쫓겨나는 거예요?”

“아니, 콩고물이 너무 커서… 그건 아닐걸. 그냥 무기 때문에 칠죄종 파티 모이라고 연락 온 거야.”

“네….”

보고를 마친 후 발을 돌려 최대한 천천히 길드 성안으로 들어가자 나르가 날아와 반갑다는 듯 온몸을 쓰다듬었다.

“나르, 잘 다녀왔어?”

“그러타! 겨미는 잘 다녀온 건가? 왜 얼굴이 비마즌 똥강아지 얼굴인가!”

“너 그런 말은 어디서 배운 거야.”

“길마다! 길마가 겨미 비마즌 똥강아지처럼 올 거라고 가보라고 해서 와따.”

이 미친놈이…. 시도 때도 없이 멍멍개 취급이야!

뱉은 말이 있어서인지 막상 회장 안으로 들어가려니 괜히 긴장됐다. 혼내려고 부른 게 맞겠지? 그래도 예쁜 척, 약한 척은 한 적이 없는데….

머뭇거리는 나를 대신해 나르가 문을 열었다. 크게 심호흡을 한 후 아무렇지 않은 듯 들어가자 화환이 내 의자를 빼주는 게 보였다. 그러나 오늘은 그냥 지나쳐 새로 의자가 생긴 곳으로 뛰어올랐다.

“겨미, 저기에 맛있는 게 더 많아.”

그렇지. 저기는 배낭 안에서 신기한 음식까지 주니까…. 유혹에 잠깐 넘어갈 뻔했던 나는 이내 정신을 차리곤 대답했다.

“나 이제 많이 커서 저기 못 앉아.”

그때, 화환이 자리에서 일어나 어수선한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다 모였네. 오늘 모이라고 한 건 전에 나르가 알려준 대로 무기 파밍 던전이 떠서. 그게 고마워서 겸이한테 예쁘고 귀여운 척 좀 하려고.”

뭔 개소리야, 저건? 고개를 들어 화환 쪽을 쳐다보자 눈을 접어 요사스럽게 웃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오해하는 사람이 있어서. 콩고물은 우리가 받아먹는 중이잖아.”

“겸아, 안 약해도 괜찮지…?”

“어휴, 저러니까 미친놈이라는 소리를 듣지.”

다른 사람들의 욕에도 꿋꿋이 웃는 얼굴을 한 채 나를 보는 화환이 오늘따라 유달리 더 미친놈 같았다.

그러다 조금씩 웃음이 짙어지는 게 불안하던 찰나, 미친놈이 옷깃을 내리더니 어깨를 살짝 내보였다.

“안 먹히네…. 역시 몸인가?”

“미친놈아!”

순식간에 연회장이 떠들썩해졌다. 지우도 벗을 수 있다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눈 버린다며 다짜고짜 지우의 멱살을 틀어쥔 수박 누나 때문에 대연회장은 한순간 시장통이 되어버렸다.

모든 광경을 영혼 없이 바라보던 사탕 누나가 테이블을 콩콩 치더니 입을 열었다.

“그 무기는 순서 없이 뜨는 거야?”

“탐욕의 파티에 있던 순으로 뜬다. 기억하는 사람이 있는가?”

“환이 형 다음이 푸름, 수박 누나, 나… 다음이 장꾸 형인가?”

“아니, 지우 다음이 나, 송금이, 뽀또 님, 햇살이지?”

“네, 그다음 저기 민초 님이요.”

도시락이 손을 들고 조심스레 말했다.

“그럼 순서 맞춰서 나르랑 붙어 다녀야겠네. 나르 말 잘 듣고, 던전 찾으면 다음 사람이랑 교대하는 걸로. 아, 던전은 어땠어?”

“너무 길어, 보통 던전 클리어 시간이 한 시간이라고 치면 여긴 두 배 정도 드는 것 같더라. 솔플이 힘들지는 않은데 나르도 데려가야 해. 쟤가 축복 걸어줘야 무기 만질 수 있으니까.”

“얼마나 어마어마한 업뎃을 하길래 그러지, 불안하게.”

“그래서 겸이가 접속 중이 아닐 때도 당분간 나르는 활성화 해 뒀으면 좋겠는데. 겸이 생각은?”

“나르만 괜찮다고 하면… 괜찮아요, 저도.”

습관처럼 간식거리를 배낭 안으로 밀어 넣다 불린 이름에 어색하게 대답했다.

나르는 다른 사람들과 다닐 수 있다는 말에 신난 건지 작은 귀를 연신 쫑긋거리더니 내 볼이며 입이며 온 얼굴에 입을 맞췄다.

“뭐, 뭐야. 왜 이래?”

“왜 그러는가. 친밀감의 표시인데. 겨미, 나르가 싫나?”

“아니, 애를 잠깐 맡긴 사이에 뭘 가르친 거야 저 변태가?”

화환은 모르는 일이라며 어깨를 으쓱했다. 나르가 고개를 돌려 지우를 빤히 보자 그쪽에서 당연하게 대답이 들렸다.

“야, 비밀이라고 했잖아!”

“조용히 해라, 지우. 내가 지우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지 않나! 그리고 난 겨미에게 비밀이 없다!”

“이게,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게 지우, 지우…. 너 진짜 혼날래?”

“지우, 그러케 행동하는 걸 요즘 사람들은 꼰대라고 한다. 꼰대 지우.”

나르가 아기답게 뭐든 금방 배우는 탓에 이렇게 된 것 같았다. 저 변태가 꼭 우리 나르 앞에서….

“햇살님, 애도 있는데… 숨어서 하시지 그러셨어요…….”

도시락이 제가 더 부끄러운 듯 고개를 테이블 위로 숙이며 중얼거리자 햇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아, 저 둘이구나…. 열린 대한민국에 깨어 있는 20대 청년답게 이 정도도 못 받아드리진 않지만, 나르가 중간에 껴 있다면 얘기가 달랐다.

두 사람에게 한마디 하려 고개를 돌리는데, 햇살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숨기는 게 먼저 보였다. 자세히 보니 귀까지 빨개진 모습이었다. 나는 하려던 말을 차마 할 수가 없어 어색하게 눈을 돌려 나르를 바라봤다.

“야….”

“겨미, 내 잘모시 아니다. 저 꼰, 아니 지우가 문 앞에서!”

“저런 건 비밀로 해도 돼. 봐, 햇살 님 부끄러워서 울잖아.”

“그럼 더 부끄러운 건 이야기하지 않게따….”

뭐? 미친 변태들이 애 앞에서 도대체 뭘 했길래…. 둘을 번갈아 보자 지우와 눈이 마주쳤다. 지우는 나르를 노려보다 나한테 들킨 게 놀란 눈치였는데 그런 건 상관없었다. 나르에게 한 번만 더 그런 걸 보여주면 혼내주겠다는 의미로 이를 한 번 내보일 뿐이었다.

정신없던 회의를 끝으로 나르를 푸름이에게 맡겼다. 작은형이 저녁을 먹자 불러 잠깐 자리를 비워야 했기 때문이다.

푸름이라면… 건전하게 잘 데리고 놀아줄 것 같기에 걱정도 없었고, 혹시 먼저 던전을 찾더라도 그다음이 수박 누나니 믿을 수 있었다.

이따 잠깐 들어와서 경험치 던전 사냥을 오토로 돌려놓고 접종하면 되겠지.

작은형과 저녁을 먹던 중 권경배에게 연락이 왔다. 나르가 제 몸만 한 크기의 홀 케이크를 들고 혼자 먹는 사진이었다.

그러면서 이번 기회에 길드원들이 있는 채팅방으로 넘어오라고 권했다. 얼른 프로필사진을 바꾸고 권경배에게 받은 채팅 창 링크로 접속하자 거긴 이미 열 명이 넘는 사람들이 있었다.

왠지 모르겠지만 절반 가까이가 나르의 사진을 달고 있어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 앞에서 작은형도 따라 씩 웃는 게 보였다.

“들어 보니 경배랑 게임 한다고?”

“응, 요즘 거기서 살아. 나름 재미있더라.”

“다행이다, 혁이 형이랑 형수도 얼마나 걱정했는데, 너 요즘 다 재미없어 하는 것 같아서.”

“걱정은, 나도 어른이야.”

“우리 눈에 너는 참외 먹으면서 쫓아오던 그때 그 아기야.”

“아, 그게 언젠데, 난 기억도 안 난다고.”

“그만큼 어리다는 거지. 겸이는 형아들이 먹여 살릴 수 있으니까 미래 걱정은 말고. 하고 싶은 만큼 놀면서 지내.”

“와, 형 진짜 설렜다, 방금.”

“먹기나 해, 다음 주에 사흘 백설이 봐주는 거 잊지 말고.”

잘 익은 고기를 내 앞접시로 덜어주는 형에게 걱정 말라고 웃으며 잠시 멈췄던 젓가락질을 열심히 놀렸다.

아침밥을 급하게 빵으로 때우곤 기대하는 마음으로 게임에 접속했다. 그러나 길드 성엔 아무도 없었다. 어렵게 145까지 찍은 레벨을 자랑할 곳이 없다니.

다들 아침부터 뭐가 그렇게 바쁜 건지. 조용한 실내를 주욱 둘러보다 퀘스트 길잡이를 눌러 따라가는데 낯선 이에게 채팅이 왔다.

[귓속말]지우 : 겸이 형, 나르가 형한테 데려다 달라고 고집부리는데 어디 계세여?

[귓속말]유우 : 길드 성으로 갈게. 벌써 네 차례야?

[귓속말]지우 : 벌써 얻었죠. 형, 제가 혹시 사랑한다고 말씀드렸나요?

[귓속말]유우 : 햇살 님이랑 등지는 건 좀..

다시 돌아간 길드 성 입구엔 아직 아무도 없었다. 무기 던전은 길다고 들었는데, 나르 덕분에 찾기가 쉬워서 그런가? 되게 빨리들 얻었네.

할 일 없이 성문 주위만 돌아보는데 빛과 함께 투닥거리며 지우와 나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우! 사과해라, 어서!”

“뭘 사과해. 네가 먼저 때렸잖아!”

“지우가 겨미 욕 하지 않았나!!”

“누가 들으면 진짜인 줄 알겠네…. 야! 내, 내가 언제 그랬어!”

둘은 나를 보지 못한 건지 그 자리 그대로 멈춰서 티격태격 말다툼을 했다.

“나르, 이제 송금이 형한테 가야 하는데 나는 안 봐줘? 너무한다.”

“겨미! 기다려라, 지금 꼰대에게 새로 배운 욕만 하고 가겠다!”

나르가 당당하게 허리에 손을 얹곤 ‘이 병신아!’라고 크게 외친 후 나에게 날아왔다.

……푸름이를 믿고 맡긴 내 선택이 틀렸던 건가 하는 후회가 물밀 듯 밀려왔다.

“너 그런 나쁜 말은 어디서 배웠어?”

“햇살이 지우에게 해따. 병신 멍청이… 또라이 새끼? 또… 폐기 뭐였는데 기억이 안 난다…. 겨미, 미안하다. 알려 주고 시펐는데…….”

아마 저 변태 양아치 새끼들이 우리 나르를 데리고 다니면서 사랑싸움이라도 한 것 같았다. 조용히 지우를 노려보자 어색하게 손을 흔들며 어디론가 가버렸다.

“나르는 앞으로 그 둘이랑 놀면 병신 멍청이 또라이에다가 재활용도 안 되는 쓰레기야 알겠지?”

“어? 어떠케 알았나! 재활용도 안 되는 폐기물이었다!”

[길드]유우 : 지우님, 햇살님 앞으로 저희 나르랑 같이 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길드]햇살 : 겨미님... 저 아직... 던전이...

[길드]유우 : 햇살님 대리 구합니다.

[길드]햇살 :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너므ㅠㅠㅠ해ㅠㅠㅠㅠㅠㅠㅠㅠ

[길드]간계밥 : ㅋㅋㅋㅋㅋㅋ왜? 우리 나르가 또 이상한 거 배웠어?

[길드]지우 : 겸이 형, 나르가 형한테 알려줄 게 많을 건데... 우리만의 이야기가 아닐 건데..

“나르, 너 푸름이랑 수박 누나, 간계밥한테도 뭐 배운 거 있어?”

“그러타. 수박이 나는 이제 하산해도 좋다는 말을 해따, 겨미.”

나르의 올바른 정신 건강을 위해 내가 늘 끼고 다녀야 하는 건가?

“겨미 장꾸는 언제 오나! 장꾸에게 새로 배운 말을 하고 싶다! 저질! 해, 핵폐기물!”

“그건 나쁜 말이잖아….”

“장꾸는 늘 듣는 말이라 좋아할 거라고 해따!”

그 뒤,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로 장꾸 형에게 나르를 보내곤 아무 말 없이 퀘스트만 했다. 길드 창 쪽으로는 쳐다도 보지 않았다.

점심을 먹고도 시간이 남아 바른말 교습 책을 잔뜩 샀다. 바른 육아 길잡이나 우리 아이를 착하게 키우는 방법 같은 육아 책도 한가득 집어 담았다.

그걸 몽땅 들고 권경배의 집까지 올라가 나르에게 좋은 말만 알려주라는 당부까지 잊지 않았다.

이틀 뒤, 점검으로 게임이 닫히기 직전 무사히 168을 만든 후 접속을 종료했다. 어느새 시간은 토요일 새벽 6시 반이 넘어가고 있었다.

이제 좀 자고 3시쯤 일어나 운동 다녀온 뒤에 느긋하게 준비해서 정모 나가면 되겠지.

시간은 정말이지 빠르게 흘렀다. 예정보다 빠른 일찍 일어나 운동하고 돌아오니 3시가 채 되지 않았고, 늦은 점심으로 빵 쪼가리를 뜯고 나니 더 할 일이 없었다.

기억하는 마지막은 소파 위에 누워 오랜만에 책을 읽었다, 라는 것이다.

번개처럼 들이닥친 초인종 소리에 부스스 눈을 떴다. 무슨 일이냐며 문을 여는데 잘 차려입은 권경배가 화들짝 놀라 핸드폰을 두어 번 두드리곤 옷 방으로 달려갔다.

“뭐야, 뭔데. 왜 그래?”

“미친 새끼야 지금 다섯 시 오십분이야!”

눈을 깜빡이다 믿을 수 없어 거실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권경배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왜, 꼭 중요한 날에 항상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생기는 거지.

“이렇게 된 거… 그냥 너 혼자 갈래?”

“야, 세수나 해. 옷 찾아놓을 테니까.”

욕실로 떠밀리듯 들어와 세수를 하곤 머리를 한쪽만 뒤로 넘겼다. 권경배의 선물 덕분인지 어색하지 않게 이마를 가리는 머리가 마음에 들어 가만히 보고 있자 문이 벌컥 열리더니 권경배가 얼굴을 찌푸리곤 입을 열었다.

“옷 빨리 갈아입어, 택시 부를 거니까.”

“어디서 모이는데?”

“가까워, 걸어서 20분? 옷이나 입어. 갈아입혀 주기 전에.”

“헛소리 말고, 지갑만 좀 챙겨줘. 옷 입고 바로 나가자. 침실 테이블 위에 있어.”

권경배가 안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하곤 옷을 벗었다. 침대 위에는 흰 티셔츠에 청바지, 얇은 가디건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더워 죽겠는데 가디건은 무슨……. 시간이 없어 그냥 골라준 대로 갈아입었다. 어플로 택시를 부른 경배가 늦었다며 얼른 내려가라 잔소리했다.

“야, 이 날씨에 웬 가디건이야.”

“내내 에어컨 밑에 있다 감기 걸리지 말고 챙겨가.”

밖으로 나오자 숨이 턱턱 막히며,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여름에 정모에 간다고 했을까. 화환에게 사과받아야 한다는 사실도 이미 잊은 지 오래였다.

다행히 택시는 미리 도착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둘러 몸을 싣고 10분쯤 달렸을까, 대학로 근처의 유명한 고깃집 앞에 금방 다다랐다. 택시에서 내려 시간을 확인하자 벌써 6시 반이 넘어 있었다.

“야, 베르… 온대?”

“아니, 안 온대.”

뭐가 그렇게 신나는지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은 권경배가 앞장서 안으로 들어갔다. 가만히 있는 사람 얼굴 못 봐서 안달이더니 왜 안 온다는 거지? 그래도 껄끄러운 사람의 불참 소식에 마음은 조금 편안해졌다.

“채하현 이름으로 예약했는데요.”

“네, 3층 룸으로 가시면 되세요.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서버의 안내에 따라 계단을 올라 제일 안쪽의 룸의 문을 두드렸다. 이게 뭐라고 긴장되는 건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복작복작 모인 사람들의 눈이 전부 우리에게 쏠렸다.

뭐지. 잘못 온 건가? 민망함이 고개를 들 무렵, 조용하던 실내가 떠들썩해지더니 저마다 한마디씩 말을 걸었는데, 여러 말소리가 한꺼번에 부딪쳐 일일이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나는 대답 대신 어색하게 대외용 웃음을 만들어 냈다.

“계란이랑 같이 왔으니까 겸이 맞지?”

“네, 늦어서 죄송해요.”

“아직 안 온 사람도 있는데, 뭐. 겸아 이쪽으로 와.”

얼굴은 처음 보지만 목소리만은 똑같았다. 가장 먼저 물어본 사람이 수박 누나고 권경배의 사과에 대답한 사람은 사탕 누나겠지?

“겸아! 형아 여기 있다!”

누가 들어도 장꾸 형의 목소리였다. 저 사람은 게임 속이나 밖이나 어쩜 저렇게 똑같은지….

사탕 누나가 부른 자리는 누나의 테이블 바로 옆자리였다. 권경배와 내가 자리를 잡자 바로 불판이 올려졌고, 전부터 신나 있던 권경배가 흥얼거리며 고기를 올리는 동안 궁금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탕 누나 옆에 앉아 있던 남자가 내 쪽을 힐끔 보며 입을 열었다.

“형, 저는 푸름이요. 여기는 사탕 누나, 수박 누나, 송금이 형.”

푸름과 사탕 누나는 남매인 건지 서로 안 닮은 듯 닮아 있었다.

시원시원한 이목구비에 웃는 눈이 똑같았는데 둘 다 시선을 끄는 얼굴이었고, 수박 누나는 말 붙이기 어려울 만큼 날카롭게 생긴 미인이었다. 저 사람이 던전에서 모자 하나 잃었다고 엉엉 울던 그 누나와 동일 인물이 맞는 건지 의문이 들 만큼.

송금이 형은 웃을 때 ‘허허’ 하고 웃을 것만 같은 인상이었다. 기억하는 바로 아마 게임 제작자라고 했던 것 같다.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인사하자 푸름이 다른 사람들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저기 앞엔 장꾸 형, 지우, 햇살 님 옆이 코코 누나, 도시락 님, 뽀또 님, 장판이 형.”

“아, 네….”

“얘가 낯을 좀 가려서, 천천히 친해지기로 하고…. 환이 형은?”

“아직. 집도 가까우면서 매번 늦어 그 새끼는. 우리 겨미 고기 먹어, 여기 맛있더라.”

옆에 있던 사탕 누나가 내 앞접시 위로 잘 구워진 고기를 얹어주며 얘기했다.

“잘 먹겠습니다, 누나도 많이 드세요.”

“근데 마스크 하나 벗은 건데 이렇게 다를 수 있나?”

“눈 색도 다르잖아, 머리 색이랑. 그럼 겸이 형 초반에 아예 본 모습으로 시작한 거예요?”

“아니, 눈이랑 머리색은 그때도 달랐어. 히든 직업 얻고 나니까 또 바뀐 게 지금 색이고.”

“전에도 느꼈는데, 겸이는 굳이 커스텀을 안 해도… 모르는 사람이 봤을 때 안 한 걸 모를 것 같은데…. 저 얼굴이면.”

내 얼굴로 모인 네 명의 눈이 부담스러워 어색하게 웃자 송금이 형이 헛소리했고, 반대쪽 테이블이 소란스러워졌다.

뭐지 싶어 고개를 돌리자 역시 장꾸 형이 겸이 옆으로 갈 거라며 짐을 싸 드는 걸 지우가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말리고 있었다.

한 번 더 문이 열린 건 바로 그때였다. 베이지색 슬랙스에 흰 무지 티를 입은, 전체적으로 색이 옅은 남자가 졸린 얼굴로 안으로 들어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쁘다고밖에 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밝은 머리카락은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었고, 반쯤 감긴 눈꺼풀 아래론 그보다 더 연한 색의 눈동자가 자리했다.

남자는 주위를 둘러보던 중 나와 눈이 마주치자 세상 기쁘다는 듯 웃어 보이더니 내 옆으로 걸어와 자리에 앉았다.

“채하현, 인사도 안 해?”

“화환입니다. 못 보던 얼굴이 좀 늘었네?”

“응, 저쪽이 지우 그 앞이 햇살이 도시락, 뽀또….”

“겸이.”

남자가 내 쪽으로 턱을 괴고 다시 한번 환하게 웃어보였다.

…미친놈이었다.

계속 (co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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